소설리스트

희란국연가-8화 (8/16)

八章. 참상의 여파

총 백하고도 열아홉 구의 시체가 차곡차곡 짐수레에 실렸다. 골목골목마다 고개를 삐죽 내민 이들이 제 친지가 혹여나 거기 실려 있는 것은 아닌가 하며 두 눈을 부릅뜨고 살폈다. 개중에는 바닥에 엎어져 목 놓아 우는 이들도 있었다. 허옇게 질린 자식의 얼굴을 보고서 꺼이꺼이 울어 대는 노파, 아내의 주검을 발견하고는 넋을 잃은 사내, 가까이 지내던 이웃의 시체를 보고는 충격에 빠진 여인들….

군졸들이 그들을 제치고 나아가 정리된 시신 위에 거적을 덮자 여덟 구의 주검을 실은 수레가 달그락 소리를 내며 굴러가기 시작했다. 병사들은 바로 다음 수레에 시신을 날랐다.

피가 시커멓게 굳은 도로 위에 그들의 발자국이 얼룩덜룩 찍혔다. 그 분주한 등 뒤로 거리에 모인 이들이 하나같이 사나운 시선을 던졌다.

‘백 명은 죽어야 나라님은 관심이 가시는 모양이다.’

그동안 시체가 줄줄이 나왔음에도 제대로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던 조정이다. 이 사달이 나고서야 부랴부랴 병사들을 파견하는 꼴이 고깝기 그지없다. 진작 치안에 더 신경을 썼어야 하는 게 아니냐, 백 명이 넘는 인간이 저 꼴이 되도록 대체 뭘 했느냔 말이다, 괜히 애먼 사람 역적으로 의심해 잡아갈 줄만 알지 군병들은 무능하기 짝이 없다, 그리 숙덕숙덕거리는 소리가 골목골목에서 끊이질 않았다.

‘생각보다도 흉흉하군.’

대로가 한눈에 들어오는 길목 끝에 서서 잠자코 그 상황을 지켜보던 비령은 한껏 심각한 얼굴을 하였다. 피비린내 가득한 거리의 참상도 참상이었지만 살벌하여진 백성들의 낯이 그로서는 더 큰 근심이었다.

‘이들의 적의가 왕실로만 향한다면 문제없지만….’

“…이는 분명 귀신들의 소행일 거야.”

그 생각에 응하기라도 하듯 살벌한 음성이 고막을 자극해 온다. 그는 소리 난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상인으로 보이는 이들 서넛이 서로 얼굴을 가까이에 붙이고서 수군거리고 있었다.

“귀신이 하지 않고서야 하룻밤 새 이런 끔찍한 참상을 만들어 낼 수가 있었겠어? 필시 사람 가슴을 파먹는 그 흉악한 귀신 놈이 한 짓이여. 그놈이 한밤중에 소리도 없이 사람 백을 잡아먹은 게 분명해.”

“대체 어떤 끔찍한 귀물이기에 이처럼 미쳐 날뛰어대는 겐지….”

“염병. 이게 다 귀신 공주가 궁궐을 나온 탓이 아니냐.”

비령은 한숨을 삼켰다. 우려했던 대로였다. 전대미문의 참상에 온 도성이 술렁거린단 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그는 이것을 걱정하였다.

‘괜한 불똥이 튀게 생겼군.’

안 그래도 자호가에 영약이 있단 소문이 퍼져 장안에는 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던 참이다. 이번 일까지 더해져 방패막이 되어주던 민심이 완전히 떠나가 버리면 어쩌나. 근심으로 비령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왕이 이 일을 빌미 삼아 귀신 공주를 데리고 도성을 나가라 할지도 모를 일. 그 전에 어떻게든 손을 써야 한다.

“그년이 뒈져야 더는 애먼 사람이 안 죽는다.”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는데 모여 앉은 이들의 음성이 점차 격해졌다. 참다못한 비령은 그들의 대화에 불쑥 끼어들었다.

“귀신 공주 탓이라는 근거가 어디 있소. 정작 자호가 사람이 흉한 일 당했단 소리는 내 듣지 못했소만.”

“젊은이는 그 집안에서 일하다 나온 이들이 하나 빠짐없이 다 죽었다는 말 못 들었나?”

그런 말까지 나돌고 있는 것인가.

제 예상보다 심각한 상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절로 얼굴이 굳어졌다. 비령은 애써 초조한 기색을 감추며 천연덕스레 대꾸했다.

“정작 그 집안에는 좋은 일만 있지 않소. 오히려 그 집안에만 다녀가면 만병을 고칠 수 있다던데… 귀신 공주 때문에 사람이 저리 죽어 나가는 거라면 그 집안을 드나들던 이들은, 병 고침 받기는커녕 다 귀신 붙어 죽었어야지.”

그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듣고 보니 일리가 있군 한다. 귀신 공주는 대체 언제 뒈지는가 하며 마구 욕설을 토해 내던 사내만 오만상을 찌푸렸다.

“나도 그 집안에 영험한 약이 있다는 소문은 들었네만 그럼 뭐 하나. 재물 있고 권세 있는 이들만 그 집안 문지방을 넘을 수 있는데.”

침을 튀기며 말하는 품새가 필요 이상으로 격한 것을 보아 혹 자호가에 도움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한 사내인가.

비령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이자는 그 악감정으로 나쁜 소문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역시 병자들을 치료해 민심을 되돌려야 한다.’

그런 제 생각에 반발이라도 하듯 곧장 완고한 친우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역시 자현의 걱정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었다.

같은 귀족 관료들의 입을 간수하기에도 벅찬데 천것들을 어찌 감당할까. 이놈들이 장안에서 떠들어대기 시작하면 금세 소루의 비밀은 도성 전체에 퍼질 테고 자현의 집 앞에는 오늘내일하는 병자들이 떼로 몰려들 테지.

하지만 그리 되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은 민심을 붙들어 둬야 한다. 몰려드는 이들은 잘 통제하면 될 일. 오히려 사람을 구제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선다면 자호가의 세는 걷잡을 수 없이 뻗어 나갈 것이다.

허나 자현이 이를 받아들일 리 없다. 그를 대체 어찌 설득해야 하나 속으로는 고심하면서도 비령은 가벼운 태도를 잃지 않고 유들유들 말을 이었다.

“그거 너무한 일이오만, 이 흉악한 일이 귀신 공주 탓이라는 근거는 아니지 않소.”

“흥, 뻔한 것을. 그년이 시집가던 날부터 귀신들이 미쳐 날뛰기 시작했는데 무얼. 고년 못 잡아먹어 안달인 귀신 놈들이 사람을 해치고 있는 것이 틀림없어.”

계속되는 사내의 사나운 말에, 비령은 반박하길 포기했다. 여기서 입씨름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돌아가 대처할 방도를 찾는 것이 일선무가 아닌가.

그는 시큰둥한 얼굴로 어깨를 한 번 으쓱이는 것으로 논쟁을 종결시키고는 그들에게서 돌아섰다. 사내가 등 뒤에서 무어라 구시렁거린다. 그걸 한 귀로 흘려들으며 골목을 나서는데 때마침 시체가 가득 실린 짐수레가 굴러가기 시작했다. 그는 엉성하게 짠 거적때기 아래로 백지장처럼 새하얀 얼굴과 딱 마주치고는 인상을 썼다.

‘…보통 일이 아니긴 아니군.’

고통에 일그러진 잿빛 얼굴에, 채 다 감겨지지 않은 퀭한 눈, 피가 시커멓게 굳어 있는 입가…. 전쟁터에서 지겹게 봐온 모습임에도 일순 뒤숭숭한 기분이 들었다.

‘어서 범인이 붙잡혀야 할 텐데….’

그는 새삼스레 걱정스러운 눈길로 시커먼 도로를 쭉 훑어보았다. 그러다 골목 귀퉁이에서 묘한 사내를 발견해 내고는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진즉 발견하지 못한 게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키가 큰 사내였다. 그는 막 잠자리에서 일어난 듯 흐트러진 옷차림에 어깨 위에는 검은 도포 한 장을 어설프게 걸쳐두고 있었고, 머리에는 챙이 넓은 삿갓을 하나 올려두고서 졸린 듯 벽에 기대서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산책이라도 나온 듯 태평스럽기 그지없었다. 비령은 눈가를 찡그렸다.

‘…어느 하릴없는 한량께서 구경이라도 나오셨나.’

그 유유자적한 모습을 빈정거림이 담긴 시선으로 노려보는데, 사내가 시선을 느낀 것처럼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비령은 무심코 숨을 들이켰다.

귀기가 느껴질 정도의 미모였다. 흰 피부에 계집의 것보다 곱고 섬세한 턱선, 높게 솟은 날렵한 콧대에 옆으로 길게 뻗어난 섬세한 눈매와 모양 좋은 붉은 입술….

대체 어느 집안 자제인가 하고 넋 놓고 바라보고 있는 사이 사내가 무심히 몸을 돌렸다. 비령은 저도 모르게 그 뒤를 따랐다.

막 출발하려는 수레를 다급히 지나쳐 사내가 사라진 골목으로 뛰어들자 빽빽이 들어찬 사람들이 무어라 불평을 한다. 그는 입으로만 건성으로 미안하다 중얼거리며 그들을 제치고 나아갔다. 작달막한 이들 위로 사내의 머리가 우뚝 솟아 있었다. 자현만큼이나 키가 크다.

혹, 무사인가.

그는 무슨 말을 하려는지도 모르고 불러 세우기 위해 그 넓은 등에 바짝 따라붙었다. 그러자 앞서 가던 이가 성가시다는 듯 뒤를 돌아본다.

‘금색… 눈동자?’

그 무표정한 눈과 마주한 순간, 이해할 수 없는 한기가 온몸을 휩쓸어 발걸음이 얼어붙었다.

사내는 마치 짐승의 것 같은 무미건조한 눈길로 얼마간 주시하다가, 흥미를 잃은 듯 다시 몸을 돌려 사람들 틈을 헤치고 나아갔다.

가만히 굳어 서 있기를 잠시 비령은 다시 허겁지겁 그 뒤를 쫓았다. 하지만 어디로 사라졌는지 이미 사내는 자취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대낮에, 귀신에게 홀리기라도 한 건가.’

길 한복판에 우뚝 서서 그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대체 왜 쫓아온 것인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어딘가 낯이 익기에….’

비령은 스스로의 생각에 깜짝 놀랐다.

낯이 익다니? 대체 어디에서 봤단 말인가. 잠깐 스치기만 하였어도 저런 자를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다.

‘하긴… 어디서 봤든 무슨 상관인가. 기억할 만하면 하였겠지.’

문득 허탈감이 밀려들어 비령은 헛웃음을 흘렸다. 아름다운 여인네도 아니고 산만 한 사내놈 뒤를 홀린 듯 쫓다니. 엉뚱한 짓으로 시간을 낭비하였구나 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데 좀처럼 찝찝한 마음이 가시질 않는다. 그는 다시 한 번 어둑한 골목을 돌아보았다.

키가 몹시도 큰, 황금색 눈의 사내.

‘대체 어디서 보았더라?’

좀처럼 눈 위에서 떨어지지 않는 그 형상을 곱씹어 보아도 역시나 떠오르지 않는다. 비령은 쯧, 하고 혀를 한 번 차고는 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

한비가 보내온 전보를 읽어 내려가는 자현의 얼굴은 점차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장황하기 그지없는 기나긴 문장의 내용을 한 줄로 요약하자면 이러했다.

「때가 좋지 않다. 기다리라.」

그는 종잇장을 가차 없이 구겨 바닥에 패대기쳤다. 그 사달이 났으니 당장 수월하게 대장군이 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대체 언제 일이 수습될 줄 알고 마냥 기다리라 하는 것인가.

‘하필이면 이런 때에….’

대로 한복판에서 전대미문의 참상이 벌어진 지 막 보름이 지났다. 민심은 온통 뒤숭숭하고 가륜 왕은 수사가 어찌 진척이 없느냐며 매일같이 불호령을 치시니, 이 와중에 자현을 대장군으로 임명하라 감히 말이나 꺼낼 수 있겠나. 한비의 곤혹스러운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었다.

설상가상 병을 고쳐 달라는 요구를 거절당한 이들마저도 제게 단단히 앙심을 품고 있는 상황이 아니던가. 거기에 이런 흉사까지 더해졌으니 제아무리 한비라고 해도 쉽사리 자신의 얘기를 꺼낼 수 없을 테지.

‘그렇다고 해도, 다소 무리를 해서라도 밀어붙여 주기를 바라였건만….’

자현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병자를 받으라는 주변의 압박은 점차 심해지고 있었다. 비령은 물론이고 제 세력으로 끌어들인 다른 관료들조차도 은근슬쩍 옆구리를 찔러대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양민 놈들도 툭하면 대문 앞에 몰려와 우는소리를 해댔다. 그런 것을 계속 무시했더니 자호가에 대한 평판마저 금이 가기 시작했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상황은 제게 불리한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는 것이다.

한시 빨리 대장군이 되어 이 상황을 타개해야 하는데, 별 흉측한 일이 다 터지어 입신(立身)마저 무기한으로 연장되어 버리다니…. 나처럼 재수 옴 붙은 놈이 또 있을까. 앞으로 비령이 얼마나 들볶아 댈까. 천지 사방에서 병자들이나 다친 이들이 몰려와 성가시게 굴 게 분명한데 그걸 또 어찌 감당하나.

생각하면 할수록 넌더리가 난다.

‘젠장, 내가 왜… 이런 성가신 일을 견뎌야 하는 건가.’

이렇게 궁지에 몰릴 때까지 주변의 압력을 물리치고 있는 이유를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자현은 이를 악물었다.

내가 왜. 내가 대체 왜, 버티고 있는 것인가.

‘그래… 비령의 말대로 이삼일에 한 명 정도는, 괜찮지 않나.’

이전과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감시를 철저히 하면 된다. 그 정도는 그녀에게도 큰 부담이 되지 않을 것이다.

사람 살고 죽는 일에 비하면 작은 생채기쯤은 사소한 것이 아닌가. 몸이 상하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을 써주면 될 거야. 지켜주면 될 게 아니냐. 분명 소루도 납득하고 받아들여 줄 거다.

거기까지 생각한 자현은 불현듯 몸을 굳혔다. 고맙다 하며 웃던 소루의 얼굴이 떠오르자 그런 스스로의 생각이 못 견디게 역겹게 느껴졌다.

제가 하는 말이라면 무엇이든 따르려 할 것이 분명한 여자다. 그런 그녀에게 또다시 다른 이들을 위해 아니, 나를 위해 몸에 상처를 내어라 할 수 있나. 정말 그런 말을 입에 담을 작정인가.

“주인 나리.”

문 너머에서 들려온 음성에 그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어찌나 깊게 생각에 잠겨있었는지 이리 가까이 올 동안 인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그는 굳은 음성으로 답했다.

“무슨 일이냐.”

“그것이… 낮부터 마님께서 보이질 않습니다.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

머뭇머뭇 이어지는 말에 일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벌컥 문을 열어젖혔다. 여종이 놀라 뒤로 나자빠진다. 그는 그리로는 눈길도 주지 않고 성큼 걸음을 옮겼다.

소루의 거처로 향해가는 발걸음이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다급하다. 심장이 아픔을 느낄 정도로 둔탁하게 뛰었다. 그런 제 반응을 깊이 생각해 볼 새도 없이 그는 여자가 머물고 있는 방문을 거칠게 열어젖혔다. 여종의 말대로 안은 텅 비어 있었다.

그는 바로 몸을 돌려 정원으로 달려 나갔다. 툭하면 거기 나앉아 있는 것을 몇 번이나 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하인들이 정성껏 가꾼 화원 역시 휑하니 비어 있었다.

그는 울퉁불퉁한 자갈길을 빠르게 가로지르며 이리저리 눈을 돌렸다. 건물을 돌아 공터까지 둘러보았지만 여자의 모습은 발견할 수가 없었다.

혹, 납치라도 당한 게 아니냐. 또다시 종놈들이 작당을 하고 흉한 짓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냐.

조그만 몸에 가득했던 시뻘건 상처들이 떠오르자 뱃속이 다 뒤틀렸다. 그는 목청을 높였다.

“소루!”

정원에 제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린다. 그는 성큼 걸음을 내디디며 조금 더 크게 외쳤다.

“소루!”

보초를 서는 무인들이 놀라 무슨 일인가 하고 멀리서 달려온다. 그가 막 그들에게 소루를 찾으라 명하려는 순간 정원 귀퉁이의 무성한 수풀 속에서 조그만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 자현….”

그는 재빨리 소리가 난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우거진 나뭇가지를 헤치니 덤불 뒤에 제 아내가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대체 거기서 뭐 하는 것이냐 호통을 치려던 자현은 여자의 모습을 보곤 입을 다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새까만 머리칼은 다 풀어 헤쳐져 있었고 옷가지는 군데군데 찢겨져 어깨며, 가슴골이며, 허벅지까지 훤히 다 드러나 있었던 것이다. 그걸 멍하니 내려다보던 자현은 곧 황급히 고개를 돌려 다가오는 무인들을 멈춰 세웠다.

“되었으니, 물러가라.”

“무슨 일인지….”

“물러가래도!”

버럭 언성을 높이자 서로 눈짓을 주고받던 이들이 몸을 돌린다. 그들이 멀어지기 무섭게 자현은 이를 갈며 소루의 몸 위에 겉옷을 벗어 던졌다.

“대체 여기서 뭣 하고 있는 거냐!”

“잠깐, 산책을 하려다가….”

“산책?”

그 태평스러운 단어에 자현은 하, 하고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다. 혹여 무슨 일이 생겼을까 봐 쏜살같이 달려온 제 꼴이 우습다. 그는 이마를 짚으며 짜증 어린 음성으로 말했다.

“산책을 어찌하면 이 꼴이 되나.”

“가, 갑자기 인기척이 느껴지기에 놀라 숨다가… 넘어졌다.”

“…넘어지면서 어디 다치기라도 한 건가?”

그래서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건가.

눈을 가늘게 뜨고서 여자의 다리를 살피는데 소루가 기어들어가는 음성으로 말했다.

“아니. 괜찮다. 단지… 신이 벗겨졌는데… 도무지 찾을 수가 없어서….”

그러면 시녀를 불러 도움을 요청하면 될 것을 멍청하게 이러고 있느냐 윽박지르려던 자현은 곧 입을 다물었다.

이 여자가 대체 누굴 믿고 도움을 청한단 말인가. 종들에게 그런 일을 당한 후인데.

대책 없이 여기 숨어 신발을 찾고 있었을 여자를 더는 책망 못 하고 그는 낮은 신음을 토해 냈다.

‘그나마 누군가에게 붙들리어 험한 꼴을 당한 것은 아니니 다행인가.’

“일어나라. 방까지 데려다주겠다.”

“하지만 신발이….”

그는 몸을 굽혀 수풀을 뒤적였다. 여자가 주저앉은 자리에서 불과 한 발짝 떨어진 자리에 신발이 나뒹굴고 있었다.

바로 코앞에 있는 것도 찾지를 못해 여태껏 헤매고 있었나.

그는 인상을 찡그렸다. 사람은 그리도 신통방통하게 잘 구분해 내면서 사물은 바로 눈앞의 것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는 허리를 굽혀 신을 주워 들고는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발을 이리 내밀어라.”

“괘, 괜찮다. 내가 신을 수 있어.”

“이리 내라 하였다.”

“하, 하지만….”

그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치맛자락 밑에 숨은 조그만 발을 집어 들었다. 소루가 힉, 하고 작게 숨을 들이켠다. 자현은 그것을 싹 무시하고 제 쪽으로 잡아당겨 신을 가져다 대었다.

손안에서 여자가 발가락을 움츠린다. 안 그래도 작은 발이 조막만 해졌다. 이런 것으로 용케도 걸어 다니는군 하고 다소 얼빠진 생각을 하며 그 발을 조심스레 비단신 안으로 밀어 넣는데, 여자의 발목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는 게 눈에 들어온다. 그는 혹 넘어지다가 어딜 다치기라도 한 건 아닌가 하며 고개를 들었다.

여자의 얼굴이 새빨개져 있었다. 자현은 그 모습에 놀라 붙잡고 있던 발목을 툭 내려놓았다. 소루는 정말이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보고 있는 쪽이 오히려 민망해질 정도였다. 그는 당황하여 얼뜬 질문을 던졌다.

“왜… 왜 얼굴을 붉히는 거냐.”

겨우 신을 신겨 주었을 뿐인데. 그 뒷말을 어물거리는데 소루가 어리둥절한 얼굴을 한다.

“…내가 붉어졌느냐?”

그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더듬더듬 분홍빛 손가락을 들어 제 얼굴을 어루만진 뒤에야 그 열기를 자각한 듯, 여자가 당황스레 고개를 숙인다. 제가 덮어 주었던 옷가지가 흘러내리며 흰 어깨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 자그만 어깨 위로 까만 머리칼이 사락거리며 쏟아져 내린다. 언뜻 드러난 그 살결마저도 붉게 물들어 있었다. 피부가 워낙 하얘서 홍조가 더 눈에 띄었다.

“보, 보지 마라. 보기 흉하다.”

그녀가 얼굴을 감싸 쥐고서 울먹거린다.

그는 당황스레 내뱉었다.

“흉… 하지 않다.”

“어, 얼굴이 붉어졌으니, 보기 흉할 게 아니냐.”

긴 속눈썹에 반쯤 가려진 커다란 눈동자가 그렁그렁 물기를 머금어간다. 정말로 붉어진 제 얼굴이 보기 흉하고 추하리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보기 흉하지 않다. 오히려….”

무슨 말을 하려는지도 모르고 입을 달싹거리던 자현은 흠칫 말을 멈추었다. 그녀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물기를 머금은 잿빛 눈동자로 조용히 저를 응시해 온 것이다. 아니. 응시했다는 말은 적합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제가 있는 쪽을 향해 고개를 들었을 뿐이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그 맑디맑은 눈동자는 어설픈 풋내기처럼 구는 제 모습을 속속들이 들여다보고 있는 듯했다. 평소였다면 불쾌감을 느꼈을 눈빛. 하지만 어째서인지 가슴이 사르르 떨려온다.

그는 숨조차 멈춘 채 여자의 얼굴을 가만히 마주하였다. 햇빛을 받아 눈동자가 투명하게 빛난다. 겨울날 꽁꽁 얼어붙은 은색 호수 같기도 하고, 어둠 속에서 은은히 빛을 받아 빛나는 금강석 같기도 한 눈동자….

귀신에게 빼앗겼다고 하였지. 본래는 어땠을까. 세상을 담고서, 어떤 식으로 빛났을까. 지금도 이렇게나 아름다운데, 본래는 얼마나….

“오히려…?”

그녀가 기나긴 침묵을 기다리지 못하고 뒷말을 재촉해온다. 무의식중에 그녀의 눈언저리를 향해 손을 뻗던 자현은 그제야 정신을 번쩍 차리고는 벌떡 몸을 일으켜 세웠다. 어째서인지 귓불이 뜨거워졌다. 불붙은 듯 화끈거렸다.

혹 제 얼굴도 붉어진 것은 아니겠지?

여자가 보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리며 딱딱하게 내뱉었다.

“언제까지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을 건가. 어서 일어나라.”

갑자기 돌변한 태도에 놀란 듯 여자가 어리둥절한 얼굴을 한다. 자현은 성급한 음성으로 일어나지 않음 두고 가겠다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자 소루가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는 무뚝뚝한 손길로 그녀의 팔을 붙잡아 이끌었다.

문뜩 짜증이 난다. 이 여자는 손목마저도 왜 이리 가는 것인지. 살이 있기는 한지 의심스럽다. 조금만 힘주면 우득, 하고 부러질 것 같아 손대고 있기 겁이 날 정도였다.

“오히려… 그다음은 뭐냐?”

남의 조마조마한 속도 모르고 여자가 난감한 물음을 던져왔다. 자현은 대답 대신 똑바로 걸으라는 핀잔만 주었다. 그녀가 굴하지 않고 끈질기게 답을 재촉했다.

“좀 전에 무어라 말하려고 했잖느냐.”

“아무 말도 안 했다.”

“내가 똑똑히 들었는데….”

“쓸데없는 소리 말고 잠자코 걷기나 해.”

그러자 소루가 입술을 삐쭉거린다. 정작 화낼 일에는 조용하더니 왜 이런 시답잖은 것에 그리 뚱한 얼굴을 하는 건가. 계집 속은 도통 알 수가 없다.

괜한 초조함에 걸음을 빨리하자 옆에서 따라오던 여자가 살짝 휘청거린다. 그에 놀라 그녀의 발치에 시선을 두니 어딘가 어설프고 위태로운 걸음걸이가 보인다.

이 여자는 걷는 것마저도 시원치 않은 건가.

꼭 갓 태어난 망아지의 것처럼 휘청휘청한 발걸음을 보며 그는 그녀를 붙든 손목에 단단히 힘을 주었다.

혹시라도 이 팔을 놓아버리면 그대로 바닥을 굴러 와장창 깨져버리는 게 아닐까. 구석구석 가늘지 않은 데가 없고 자그맣지 않은 데가 없는 계집이니 그러고도 남을 것이다.

“왜… 그러느냐?”

붙잡힌 팔이 아픈지 여자가 살풋 미간을 모았다. 그러면서도 놓으라는 말이나 뿌리치려는 기색은 없다. 아무 의심 없이 무방비하게 제게 기댄 그 모습에 가슴이 지끈거려 왔다.

그녀가 얼마나 정에 굶주렸는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러니 나같이 무정한 사내도 남편이랍시고 의심 없이 따르는 게 아닌가. 지금까지 얼마나 가혹한 취급을 당해 왔을지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그런 끔찍한 일을 당해놓고도 원망 한마디, 불평 한마디 하지 않는 것만 보아도 그렇다.

‘…동정하지 않는 게 이상하다.’

무력하고, 아무 가진 것이 없고, 누구도 보호해 주거나 아껴 주지 않는 여자. 불쌍하다고 느끼는 게 당연하다.

그래서 너를 보면 가슴이 답답해져 오는 거겠지. 바라만 보고 있어도 팔다리가 돌덩어리라도 된 것처럼 무거워지고, 신경이 바짝 곤두서서 초조해지는 거야. 가엽고 애처로워서.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주변의 성화에도 불구하고 이리 감싸고도는 것도 분명 죄책감 때문이다. 이토록 무방비하게 내게 의지해 오는 사람, 차마 더는 상처 줄 수가 없어… 그런 거야.

그는 고개를 돌려 다시 앞을 보았다. 멈췄던 걸음을 말없이 다시 이어 나가자 여자가 자박자박 뒤를 따라온다. 그 발소리에 가슴 한구석이 애잔해진 것마저도, 그는 연민 탓으로 돌려 버렸다.

***

아무런 소득 없이 여관으로 돌아온 아시타는 침상에 털썩 주저앉으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지난 보름간 도성을 구석구석 조사해 보았지만 놈의 흔적도 찾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는 밤마다 이리저리 쏘다니며 사람들을 납치해 가던 요물들조차도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혹, 그 야토란 놈이 목적을 이루고 귀신 계곡으로 돌아가 버린 건가.

아시타는 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까마귀 요괴 이암의 말에 의하면 놈이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어림잡아도 삼백 이상의 심장이 더 필요했다. 아마도 사방이 떠들썩하니 몸을 사리고 있는 것일 테지.

아시타는 이를 갈았다. 그날의 참상이 떠오르자 절로 살기가 끓어오른 탓이다. 요괴들이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천성이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고 여겨온 아시타마저도 놈이 저지른 참상만 떠올리면 치가 떨리었다. 서둘러 제거하지 않으면 또 무슨 짓을 할지 알 수가 없다.

‘…놈이 움직이기 전에 먼저 찾아내야 한다.’

또다시 그 같은 참상이 벌어지게 놔둘 수는 없다.

‘하지만 도대체 무슨 수로…?’

아시타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 요괴 놈, 심상치 않은 힘을 지니고 있는 것이 분명한데도 요력은 감지되지 않는다. 심지어는 법령사 수십 명이 눈에 불을 켜고 서 있는 와중에 제 요력을 철저히 감춘 채 그 같은 살육을 저질렀다. 놈이 하고자 마음만 먹으면 지금으로서는 막을 방도가 없는 것이다.

‘대체… 어떤 방법으로 놈을 찾아내야 하나.’

“이봐, 인간.”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아시타는 소리가 난 쪽을 향해 힐끔 시선을 돌렸다. 부적을 덕지덕지 붙여 놓은 조그만 새장 안에 얼마 전에 포획한 요괴 이암이 다섯 쌍의 붉은 눈을 끔뻑거리고 있었다.

“나는 대체 언제 풀어 줄 거냐.”

한껏 불쌍한 척 몸을 웅크리고서 하는 말에 아시타는 헛웃음을 흘렸다.

“요괴도 농담을 다 하나. 풀어주다니, 모가지를 몸뚱이 위에 붙여두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줄 알아야지.”

그 살벌한 말에 요괴의 몸이 반절로 쪼그라든다. 그 꼴을 보고 아시타는 히죽 웃었다. 이암은 본디 사람의 공포심을 먹으면 곰만큼이나 커질 수 있는 요괴였다. 그처럼 위풍당당하던 요괴가 손바닥만 해져서는 오들오들 떨고 있는 게 참으로 우습지 않은가. 아시타는 새장이 매달려 있는 기둥을 툭툭 차며 짐짓 위험스럽게 말했다.

“뭣하면 지금이라도 불에 노릇노릇 구워주리?”

“휴, 흉한 소리 말아라! 날 풀어주면 다신 인간을 공격 않겠다니까.”

“이봐, 이봐. 이름을 빼앗긴 처지에 어떻게 야토의 명령을 거역하겠다는 거냐?”

“그, 그건… 그의 눈을 피해 잘 숨으면….”

“애쓸 것 없다. 설령 이름을 빼앗기지 않았다고 해도 사람을 해하려 했던 요괴를 풀어줄 생각은 없어.”

그리 말하고는 곧 관심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려버리자 이암이 필사적으로 외치었다.

“나, 나를 풀어주면, 내가 모은 황금을 다 주겠다!”

아시타는 그야말로 번개 같은 속도로 벌떡 일어나 새장 앞에 달라붙었다. 그 전광석화와 같은 움직임에 요괴가 다 놀라 주저앉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시타는 양손으로 새장을 꽉 붙들고서 침을 튀기며 물었다.

“화, 황금이라 했느냐?”

그 격한 반응에 요괴가 옳다구나 하고 줄줄 내뱉는다.

“그래. 황금이라 하였다. 나는 빛나는 것을 아주 좋아하여 근 백 년간 인간들에게서 보석이며 금화를 야금야금 훔쳐다 계곡 안에 있는 내 둥지에 쌓아 두었다. 나를 풀어주면 그걸 네게 전부 주마!”

“그, 금이 얼마나 있느냐.”

“이 방을 가득 채울 만큼 있다!”

“이 방을 가득….”

상상만으로 황홀하여 아시타는 입을 헤 벌렸다. 그것을 보고 요괴가 한층 신이 나 떠들어대었다.

“금뿐이랴. 홍옥, 비취, 호두알만 한 진주가 한가득이오, 잘 세공된 금강석까지 수두룩하다! 내 둥지에는 온갖 금은보화가 차고 넘친다.”

“그, 금은보화….”

“날 풀어주면 당장이라도 눈앞에 대령하마. 풀어줄 테지?”

“풀어주면… 그대로 도망칠 셈이지?”

“설마! 난 네 도술을 피해 숨을 만한 요력도 가지고 있지 않다. 정 미심쩍다면 언령(言靈)으로 약속하마.”

아시타는 꿀꺽, 하고 요란하게 침을 삼켰다. 이놈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진짜로 풀어줘? 도망친다 해도 까마귀 요괴 따위야 추적술로 금세 다시 붙들 수 있을 터인데 그냥 확 저질러 버릴까.

머릴 팽팽 돌리며 고민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뒤통수에 어마어마한 충격이 가해졌다. 아시타는 머리를 감싸 쥐며 억, 하는 비명을 내질렀다. 핑글 눈물이 고인 눈으로 뒤를 볼아 보니, 여란이 주먹을 움켜쥔 채 경멸 어린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이런 썩어빠진 놈….”

“여, 여란… 아하하, 언제 왔느냐. 제아무리 사형의 방이라지만 인기척도 없이… 조금 무례하지 않느냐.”

“흥, 금은보화 소리에 눈이 뒤집혀 듣지 못한 거겠지.”

“누, 눈이 뒤집히다니! 지금 막 단호히 거절하려고 하던 참이었다. 네가 때리지만 않았어도 허튼수작 부리지 말라는 내 사자후를 들을 수 있었을 거야!”

“씨알도 안 먹힐 소리 하지 마라.”

여란은 코웃음을 치며 가차 없이 아시타의 발을 콱 밟았다.

그는 발을 붙들며 깡총깡총 뛰었다. 그의 눈에 핑글 눈물이 다 고였다.

이 계집애랑은 대체 전생에 무슨 악연으로 얽혔기에 이리 번번이 치이는 건가.

그리 눈물을 짜는 모습을 여란이 북해에서 부는 칼바람 같은 눈길로 쏘아보며 일갈했다.

“법령사란 놈이 세속에 찌들어서는… 이 사문의 수치.”

그러고는 새장을 향해 살벌한 시선을 보낸다.

“두 번 다시 수작 부리지 못하게 재로 만들어 주마.”

“재, 재로 만들다니! 아이고, 아름다운 법령사님, 무슨 그런 흉한 소리를 하십니까.”

여란은 코웃음을 쳤다.

“요괴 따위가 흉함을 논하나. 천지 만물 중에 가장 비천하고 흉한 것이 요괴거늘.”

“히익!”

진짜로 죽겠구나 싶었는지 요괴가 새장 안에서 날개를 퍼덕거리며 야단법석을 떨었다. 그걸 무미건조한 눈길로 내려다보며 여란이 품에서 부적을 꺼내 들었다. 퇴마 부적이었다. 그걸 들고 법문을 외우는 것을 아시타가 다급하게 멈춰 세웠다.

“그만둬라! 내가 포획한 요괴다! 이놈은 내가 알아서 하겠다.”

“지금 이 요괴를 감싸는 건가?”

설마 보물이 탐이 나 그러는 건 아니겠지 하며 여란이 눈꼬리를 치켜세웠다.

아시타는 기겁을 하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감싸다니! 내가 요괴를 왜 감싸겠느냐! 이놈을 죽이면 야토를 찾아낼 작은 실마리마저 잃는 것이 아닌가 하여….”

“이까짓 놈이 무슨 도움이 된다는 거냐.”

매몰찬 말에 아시타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눈을 가늘게 뜨고서 그 꼴을 내려다보던 여란이 더는 들볶기 싫다는 듯 부적을 도로 집어넣었다.

“좋아. 알아서 해라. 한가하게 입씨름이나 하려고 온 게 아니야.”

“그럼 왜 왔느냐.”

입술을 부루퉁하게 하고서 꿍얼거리자 여란이 품에서 조그만 주머니를 꺼내 들어 던진다. 아시타는 얼결에 그것을 받아들었다.

“이게 무엇이냐?”

“일전에 자호 가문에서 쫓겨난 종들에 대해서 조사하라고 시켰던 거 기억나나?”

“뭔가 알아낸 거라도…?

이 주머니가 무언가 중요한 단서라도 되는 건가 싶어 유심히 들여다보았지만, 양민들이 흔히 엽전을 넣고 다니는 낡은 주머니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끈을 풀어 안을 들여다보았다. 안에는 쪼글쪼글 말라비틀어진 고기조각이 들어있었다. 이게 대체 무엇이냐 꺼내 들고는 요리조리 살피는데 새장에서 웅크리고 떨던 요괴가 날개를 퍼덕거리며 외친다.

“뭐냐, 그거! 좋은 냄새가 난다.”

아시타는 코에다 가져다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아보았다. 아무 냄새도 안 나는데 무슨 냄새가 난다는 건가. 이상하다는 듯 요괴를 노려보는데 여란의 목소리가 벼락처럼 귓가에 꽂혔다.

“그거… 귀신 공주의 살점이다.”

손가락 사이에서 그것이 툭, 하고 굴러떨어졌다. 아시타는 다시 주울 생각도 못하고 화등잔만 해진 눈으로 여란을 돌아보았다. 그녀가 싸늘하게 식은 얼굴을 하고서 말을 이었다.

“자호가에 사람 병 고치는 영약이 있단 소문을 너도 들었겠지. 그게 바로… 소루 공주였다.”

“…설마, 여태껏 이런 방법으로 사람을 치료한 건가?”

“아니, 매번 살을 도려낸 건 아니다. 보통은 병자들이 찾아오면 생피를 먹게 해 병을 치료해 줬다더군. 그걸 보고 몇몇 종들이 몰래 숨어들어 가 이 작당을 한 모양이야. 그걸 주인에게 들켜 쫓겨나게 된 거지. 죽어도 입 밖에 낼 수 없다는 걸, 말하지 않으면 가슴 파먹는 귀신이 잡아먹으러 와도 지켜주지 않겠다고 협박하여 겨우 알아낸 것이다.”

종들이 주인의 살을 도려내다니… 세상에 그런 하극상이 어디 있단 말인가.

아시타는 기가 막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 용케도 조용히 지나갔군.”

“그 집안에서 철저하게 입단속을 한 모양이야.”

여란이 입꼬리를 비틀며 말했다.

“하긴, 사람의 피를 가지고 병 고친단 말을 어디 떳떳이 할 수 있을까. 더군다나 아내의 생피를 가지고. 영웅은 무슨 얼어 죽을 영웅!”

소루의 처지에 동정심을 느낀 모양인지 여란이 분한 얼굴을 하고서 성토했다.

아시타는 흐음, 하는 심드렁한 추임새를 내뱉어 건성건성 맞장구를 쳐 주었다. 그는 소루 공주가 당한 험한 일보다는 이 사실이 의미하는 바에 더 신경이 쏠려 있었다.

“이봐, 여기서 좋은 냄새가 난다고 했지?”

아시타는 바닥에 떨어진 소루 공주의 살점을 집어 들어 이암을 향해 내밀어 보였다. 까마귀가 대가리를 힘차게 끄덕였다.

“그래, 단내가 아주 풀풀 흐른다.”

“혹시, 야토는 이것을 노리고 자호가에서 쫓겨난 이들을 잡아먹은 건가.”

“…그건 대답할 수 없다.”

“충분한 대답이군.”

아시타는 입꼬리를 비틀며 그것을 다시 주머니 안으로 밀어 넣었다. 여란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이미 인간의 심장을 모으고 있지 않은가. 어째서 소루 공주까지 노리는 거지?”

“미련을 떨치지 못해 그런 거겠지.”

그 야토란 요괴 놈이 그 옛날 소루 공주의 눈을 빼앗은 요괴와 동일하다면 더더욱. 아시타는 그 요마가 공주의 신력을 이용해 다른 요괴들도 부리고, 제 요력도 감추고 하는 게 아닐까 하고 의심하고 있었다.

‘그만한 힘을 지니고 있으면서 왜 진즉에 공주 잡아먹기를 시도하지 않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직 포기하지 못한 게 분명하다.’

그러니 혼롓날에도 요괴들을 사주해 그 난리를 피웠던 게 아닌가. 천기를 타고난 이에게 시집을 가면 후일 공주를 잡아먹는 데 방해가 될 테니 미리 훼방을 놓은 것일 테지.

“그걸 가지고 야토란 놈을 유인해 낼 수 있을까?”

여란의 물음에 아시타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것만 가지고는 부족하다. 아주 영악한 놈이야. 그 난리를 일으킨 뒤에는 얌전하게 몸을 사리고 있지 않나. 뻔히 보이는 함정으로 기어들어 가진 않을 것이다.”

“하면 어찌하면 좋겠나?”

그는 주머니를 꽉 움켜쥐었다. 놈이 움직이기를 기다리면 늦는다. 바로 지척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눈치를 채지 못했다. 야토가 다음번엔 어디에서 어떤 짓을 저지를 줄 알고 잠자코 기다린단 말인가. 그 전에 찾아내야만 한다. 찾아낼 수 없다면 유인해 내기라도 해야 한다. 요만한 것으로는 턱도 없다. 더 탐스러운 미끼가 필요하다. 함정인 줄 뻔히 알면서도 기어 나오지 않을 수 없을 만큼 탐나는 것이.

“소루 공주다.”

“뭐?”

“소루 공주를 미끼로 쓰는 거야. 제아무리 조심성 많은 놈이라도 나오지 않고는 못 배기겠지.”

“너… 제정신인 거냐! 무고한 이를 미끼로 쓰자니! 감히 어찌 그런 소리를…!”

“인간 백이 죽었다.”

펄쩍 뛰는 여란에게 아시타가 날카로운 어조로 내뱉었다.

“그전에도 놈의 손에 무수히 많은 이들이 목숨을 빼앗겼을 테지. 내버려 둔다면 앞으로도 수백 명이 희생될 거다. 그것을 막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야 할 게 아니냐.”

“대를 위해서라면 무구한 소녀 한 명쯤 위험으로 몰아넣어도 된다 이거냐!”

여란이 분개한 어조로 외친다. 제게야 잔학무도하게 굴지만 본디 고지식하고 정의감이 강한 성품의 소유자다. 이 정도 반발은 예상하였다. 아시타는 살살 구슬리듯 말했다.

“우리가 지켜주면 될게 아니냐. 손가락 하나 다치지 않도록 보호해 주면 돼. 다소간의 위험은 있겠지만 수백 명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다.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다른 방도를 찾아! 난 힘없는 이를 미끼로 쓰는 일은…!”

“다른 방도를 찾는 사이에 또다시 누군가가 그 요괴 놈의 먹이가 되면 어쩔 거냐! 공주의 처지가 딱한 것은 사실이나, 다른 이들의 안전도 생각해야지!”

여란이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술을 깨문다. 아시타는 그 갈등의 기색을 놓치지 않고 강하게 밀어붙였다.

“동의하지 않겠다고 하면 나 혼자서라도 하겠다. 너는 빠져. 나는 더 이상 두 손 놓고 있을 수 없다.”

“젠장….”

그녀가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기며 욕설을 토해 냈다.

“좋아. 네 계획을 따르겠어. 단, 공주의 호위는 내가 맡을 거야.”

아시타는 좋을 대로 하라는 뜻에서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하지만 결정을 내리고도 여란은 영 내키지 않는 듯 구겨진 인상을 풀 줄 몰랐다. 그녀가 뚱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래서… 자호가에는 언제 갈 거냐?”

“놈이 언제 다시 행동을 개시할지 모를 일. 질질 끌 여유는 없지. 내일 당장 찾아가 보도록 하마.”

“다짜고짜 찾아간다고 해서 그 집주인이 만나 줄까.”

자현을 떠올리며 아시타는 애매한 웃음을 흘렸다.

그렇군. 이 계책을 실행하려면 그 무시무시한 사내를 만나 아내를 미끼로 쓰게 해 주십사 하고 설득해야만 한다. 그자가 아내를 아끼지는 않을지라도 쓸모 있다고는 여기고 있을 터. 과연 타국에서 온 법령사의 말을 듣고 흔쾌히 부인을 내어 줄까.

‘…제 백성들 수백이 죽어 나가는데 설마 모른 척하진 않겠지.’

그는 애써 밝은 쪽으로 생각했다.

“다소 강경한 방법을 써서라도 만나서 설득해야지 별수 있나.”

여란이 또 무슨 짓을 하려고 그러나 하는 의심이 서린 눈으로 노려본다. 아시타는 품 안에 든 주머니를 두어 번 툭툭 두드리며 씩 음흉한 미소를 머금었다.

***

“사태가 생각보다 심각해.”

한참 동안 수하들이 조사해 온 내용을 읽어 내려가던 비령이 두루마리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의 얼굴은 한껏 심각하게 굳어져 있었다.

“소문이 점차 나쁜 쪽으로 퍼지고 있어.”

“소문은 늘 나쁜 쪽으로 퍼지게 되어 있어.”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란 말일세!”

제가 여유로워 보였나 싶어 자현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에 비령이 울컥하여 손바닥으로 탁상을 내려쳤다. 전쟁터 한복판에서도 실없는 소리나 하는 녀석이 이리 여유를 잃을 정도면 상황이 좋지는 않은가 보군 하며 자현은 쓰게 웃었다.

“초조해 하면 어디 일이 해결된다더냐.”

“해결할 마음은 있는 겐가?”

비령이 보고서를 탁상 위에 던지듯 내려놓으며 빈정거렸다.

“정 병자들을 받지 않을 거라면 이 일이 해결될 때까지 소루 공주를 도성 밖으로 잠시 요양 보내라 하지 않았나! 한데 이것도 싫다 저것도 싫다. 아무 대책 없이 내놓는 방도마다 퇴짜를 놓으면 어디 일이 해결된단 말인가!”

“하인들도 그 작당을 하는 마당이다. 밖으로 내돌렸다간 무슨 짓을 당하게 될 줄 알고 내보내란 거냐!”

“호위를 붙여주면 되지 않나!”

“그놈들을 대체 무슨 수로 믿느냔 말이다!”

계속되는 닦달에 언성을 높였다.

“영약의 정체가 소루라는 것을 아는 이들이 어디 한둘이던가! 그들 중 누군가가 소루를 탐내 손을 쓰고자 한다면 호위 몇을 붙여주든 무슨 소용이냐! 거기다….”

“자네, 소루 공주를 곁에 두는 이유가 무언가.”

자현은 속사포처럼 쏟아내던 말을 멈추었다. 비령이 예리한 눈길로 제 표정을 살핀다. 평소 같았으면 그 뱀 같은 시선에 음흉스러운 놈 하며 욕설을 토해 냈을 터인데 어째서인지 입이 얼어붙었다. 아무 말 못 하고 있는 그를 대신해, 비령이 한 자 한 자 힘주어 내뱉었다.

“쓸모가 있어서였잖은가.”

“…….”

“본래는 혼례가 끝나는 대로 도성 밖으로 내보낼 예정이었던 것을, 이용가치가 있겠다 싶어 집 안에 둔 거였네. 한데, 지금 자네가 하는 것을 보면 주객이 전도돼도 한참 전도되었어. 집안에 이런 누를 끼치면서까지 그 여자를 싸고도는 이유가 대체 무어냐?”

“나 때문에….”

자현은 마른침을 삼켰다.

“나 때문에, 그런 꼴이 되었다.”

“그게 왜 자네 때문인가!”

“집구석에 가둬두고는, 한 번 돌아보질 않았다. 무슨 꼴을 당하든 신경도 쓰지 않았어. 그리 하찮게 대했으니 종놈들이 그런 하극상을 벌인 게 아니냐!”

비령은 입을 다물었다. 집안사람들이 모두 귀신 공주 꺼리니 하는 수 없이 뒤채에 둔 것이 아니냐, 감시자는 소루 공주의 효용을 알게 된 누군가가 허튼짓이라도 할까 걱정되어 붙여 놓은 거고, 신경도 쓰지 않은 것은 네가 일이 많아 그런 것이다, 설마 종들이 그 작당을 할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느냔 말이다 하며 얼마든지 청산유수로 반박할 수 있었다. 하지만 비령은 굳은 자현의 얼굴을 본 순간 그 어떤 말도 통하지 않을 것임을 깨달았다.

“그 여자는 나를 돕겠다고 그토록 참혹한 꼴을 당했다. 한데… 나보고 나쁜 일이 터지어 욕을 좀 먹게 됐다고 해서 그 여자를 그냥 내버리라 하는 건가.”

자현이 주먹을 꾹 쥐고서 씹어뱉듯 내뱉는다.

비령은 이마를 감싸 쥐며 한숨 내쉬듯 말했다.

“그럼… 대체, 어쩌자는 건가. 이대로 두 손 놓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 아니냐.”

“그 짓거리를 한 놈이 잡히면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해질 거야.”

“조정 군사 수백이 나서서 조사하고 있는데도 아무 단서를 못 찾고 있네. 대체 언제 일이 해결될 줄 알고…!”

답답함에 가슴을 탕탕 두드리며 열을 내던 비령이 문득 말을 멈추었다. 문밖에서 호들갑스러운 발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저들이 의논을 할 때는 중한 일이 아니고서는 누구도 얼씬하지 말라 미리 일러두었던 터였다. 또 뭔 일이 터졌나 싶어 자현의 낯빛이 대번 어두워졌다.

“무슨 일이냐.”

“주, 주인 나리… 밖에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

“예에… 저잣거리에서 영험하기로 소문 자자한 법령사라는데….”

법령사가 저를 찾을 이유가 어디에 있나. 혹 자호가에 영약이 있단 소문을 듣고 웬 놈이 또 허튼수작을 부리는 게 아닌가 하며 그는 눈을 치떴다. 허구한 날 별별 인간이 다 몰려와 집 앞에서 행패를 부렸던지라 곧장 고런 의심부터 들었다.

“사전에 허가를 받지 않은 방문자는 내쫓아 버리라 내 미리 일러두지 않았느냐!”

“소, 소인도 쫓아내려 하였습니다만… 그 법령사란 인간이 심상치 않은 말을 하기에….”

“심상치 않은 말?”

한참 뜸을 들이던 하인이 기어들어가는 음성으로 답했다.

“그자가 마, 마님에 관한 비밀을 알고 있다면서… 주, 주인님께서 만나주시지 않으면 이를 포, 포, 폭로하겠답니다.”

대번 자현의 얼굴이 살벌하게 일그러졌다. 하인이 어물어물거리며 말을 이었다.

“주, 주변에 사람이 많아 일단 대문 안으로 들였습니다만… 어, 어찌할까요?”

비령은 머리를 짚었다. 종놈이 사색이 되어 그 법령사란 놈을 안으로 들였을 테니 뭔가 숨겨진 비밀이 있다 시인한 꼴이 아닌가.

‘무얼 알고 있다는 것인지 확실치도 않은 마당에….’

“일단 안으로 들여 이야기를 들어보게나.”

비령은 이를 빠득빠득 갈고 있는 자현에게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자현이 대번 도끼눈을 뜬다.

“그런 시답잖은 협박을 하는 놈을 내 집에 들이라고?”

“뭘 알고 있다는 건지 모르겠으나 일단 입막음부터 해야 할 게 아닌가. 여기서 더 나쁜 소문이 퍼지면… 나로서도 감당하기 힘들어.”

잔뜩 피로한 얼굴로 그리 말하니 더는 무어라 못하고 자현은 하인에게 놈들을 데려오라 일렀다.

잠시 뒤 종놈이 치렁치렁한 검은 옷차림의 남녀를 대동하고 나타났다. 비령은 눈을 가늘게 뜨고서 그들의 모습을 면밀히 살폈다. 가무잡잡한 피부의 남방 여자와 계집처럼 허여멀건 하여 곱상하게 생긴 사내놈이다. 둘 다 남방계 승려 특유의 치렁치렁한 옷차림에 손목과 목에는 염주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다. 확실히 법령사처럼 보이는 이들이었다.

‘위장일 수도 있지만….’

이 집안의 비밀을 캐내기 위해 누군가 보낸 이들일 수도 있다. 의심스러운 눈길로 그들을 신중히 살피는데, 사내놈이 앞으로 나와 정중하게 합장을 취한다.

“무례한 청을 들어주어 감사합니다.”

“무례한 청이라 함은, 비밀을 폭로하겠다 협박한 것을 말하나.”

“협박이라니… 무슨 그런 흉한 말씀을. 이리하지 않으면 만나 주시질 않을 것 같아, 좀 강경한 방법을 취했습니다만….”

살기등등한 자현을 눈앞에 두고 사내놈이 겁도 없이 화사하게 웃어 보였다.

“정말로 대인을 곤혹스럽게 만들 생각은 없습니다. 부디 노여움을 푸십시오.”

그 맹랑한 태도에 자현의 눈꼬리가 스르륵 치켜 올라간다. 허튼 놈은 아닌 것 같다. 자현이 휙 몸을 돌리며 거만하게 고갯짓을 했다.

“안으로 들어오라.”

남녀가 고개를 꾸벅이더니 성큼 방 안으로 들어선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안달복달하던 하인 놈이 그들의 등 뒤로 문을 닫고는 후다닥 멀어졌다. 자현은 앉으란 말도 없이 바로 본론을 꺼냈다.

“무슨 용건으로 왔는지, 뭘 알고 있다는 것인지, 어디 한번 떠들어 봐라.”

그 고압적인 태도에도 사내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우선 저희들의 소개부터 드리지요. 소인의 이름은 아시타, 여기 이 여인의 이름은 여란. 저희들은 남방에서 온 법령사로 현재 장안에 숨어 사람을 해치고 있는 요괴를 찾고 있는 중입니다.”

“…요괴?”

“예, 희란국 어딘가에 숨어 사람의 심장을 꺼내 먹는 위험한 요괴입니다. 대로의 참상도 놈이 일으킨 일이지요. 저희는 그놈을 잡기 위해 대인의 도움을 구하고자 찾아왔습니다.”

자현은 황당한 얼굴을 했다. 곁에서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비령조차 멍하니 눈을 끔뻑였다. 장안에 귀신이 판을 친다, 요괴가 판을 친다 별별 소문이 다 돌고 있다는 것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으나 정말로 귀물의 소행일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자현은 이 무슨 허무맹랑한 소리인가 하며 헛웃음을 흘렸다.

“감히 어디서 그런 황당무계한 소릴….”

“그럼 영웅 나리께서는 하룻밤 새 백 명이 넘는 인간을 그 꼴로 만든 게 인간이라 생각하셨습니까?”

사내의 옆에서 팔짱을 끼고 서 있던 여자가 시건방진 태도로 말했다. 사분사분 구는 사내놈과는 달리 거만하기 그지없는 말투였다.

“귀물의 짓이니 인간들이 천지 사방 곳곳을 뒤지고 다녀도 흔적조차 찾아볼 수가 없는 게 아닙니까. 예부터 놈들은 사람으로 둔갑하여 이런 흉측한 짓을 저지르고 다녔습니다.”

“뭐, 이번처럼 어마어마한 살상을 저지른 요괴는 흔치 않습니다만….”

아시타는 끼어들지 말라는 듯 여자에게 슬쩍 눈총을 주고는 유들유들 말을 이었다.

“그 말대로 요괴는 사람들 틈에 숨어들어 소동을 일으키기를 좋아하는 족속입니다. 그리고 저희가 쫓는 이 요괴 놈은 그중에서도 특히나 지독하여 무려 사람 천 명을 잡아먹을 목적을 가지고 있는 놈이지요. 부디 더 이상의 희생자가 늘어나지 않도록 도움을 주십시오.”

“…느닷없이 찾아와 돼먹지도 않는 협박을 하는 놈을, 내가 왜 도와야 하지?”

“그야 많은 사람들의 안위가 걸린 일이니….”

“네 말이 사실이라는 보장이 없다.”

“…….”

“설령 사실이라 치더라도 네 말대로라면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요물. 내가 무얼 도울 수 있단 말이냐. 나는 귀물과는 다투어 본 적이 없다.”

“귀물과 다투어 달라는 게 아닙니다.”

계속되는 자현의 냉랭한 태도에 아시타의 얼굴도 조금 경직되었다.

“요괴 놈과 대적하는 것은 저희 법령사들이 할 일입니다. 저희가 구하고자 하는 것은… 정확히 말하자면, 소루 공주의 도움입니다.”

느닷없이 튀어나온 아내의 이름에 자현의 입매가 눈에 띄게 굳어졌다. 그 냉혹한 표정에 내심으로는 찔끔하면서도 아시타는 겉으로는 태연한 척 덤덤히 설명을 이어 나갔다.

“대로에서 참상이 벌어지기 이전부터 강도가 기승을 부렸다는 사실을 알고 계실 겁니다. 그 또한 요물의 소행입니다. 우리는 놈의 표적이 되었던 이들을 조사하던 중에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집안에서 일하다 쫓겨난 이들 대부분이 요괴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입니다.”

“…그거 참 재미난 우연이군.”

“우연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그 원인이지요.”

그가 품에서 작은 주머니 하나를 꺼내 들고는 탁상 위에 두고 탈탈 흔들었다. 그 안에서 말라비틀어진 육편 같은 게 툭, 하고 떨어져 내렸다. 아시타가 그것을 집어 들어 자현의 앞으로 내밀었다.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자현은 제가 알 턱이 있나 하고 코웃음을 쳤다.

“질질 끌지 말고 본론만 말하라.”

“이것은 바로… 소루 공주의 살점입니다. 이 집에서 쫓겨난 이들 중 하나가 가지고 있던 것이지요. 요괴는 바로 이것을 노리고 이 집안에서 일하던 일꾼들을 해친 것입니다.”

느릿느릿 진중하게 쏟아지는 말에 자현의 어깨가 뻣뻣하게 굳어졌다. 햇볕에 잘 그을린 얼굴은 핏기가 사라져 그야말로 백지장처럼 허옇게 질렸고, 말라비틀어진 고기조각을 내려다보는 눈길은 서슬이 퍼렇게 서다 못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 참혹한 표정에, 순간 아시타가 다 움찔했을 정도였다.

“대체 원하는 게 무언가.”

아무 말 못 하고 있는 자현을 대신해 비령이 날카로운 어투로 물었다. 법령사란 놈이 이런 소리를 지껄이고 다니면 이게 다 귀신 공주의 탓이다 하고 다니는 놈들이 얼씨구나 하고 달려들 게 아닌가. 비령은 살인멸구도 불사할 생각으로 싸늘하게 아시타를 노려보았다.

“소루 공주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였지? 혹 살점이라도 더 내어 달라는 뜻인가?”

“그런 천인공노할 짓은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저희가 원하는 것은….”

“소루를 미끼로 쓰고 싶다는 거군.”

자현이 꽉 잠긴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아시타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요괴 놈은 꼭꼭 숨어 있어, 우리들의 술법으로도 도무지 찾아낼 수가 없습니다. 소루 공주께서 놈을 유인해 주신다면 저희들이 제거하겠습니다. 부디 다른 희생자가 나오기 전에 도움을 주십시오.”

“싫다.”

자현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단박에 거절했다. 그 무성의한 대답에 아시타의 얼굴에서 여유로운 기색이 싹 가셨다.

“어째서입니까?”

“초면의 수상쩍기 그지없는 놈이 허무맹랑한 소리를 늘어놓으며 아내를 내어 달라 하는 것을, 그럼 순순히 들어주리라 생각했나. 이만 내 집에서 나가라.”

“원하신다면 저희들의 신분을 증명할 수도 있습니다!”

당장이라도 내쫓을 듯한 기세에 아시타는 다급하게 외쳤다.

“이 집안이 왕실과 대적하고 있다는 것은 풍문으로 들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타국에서 온 법령사일 뿐, 어떤 정치 세력도 배후에 지고 있지 않으며, 따로 품은 목적도 없습니다. 사문의 이름을 걸고 맹세할 수도 있습니다.”

“이는 귀문에 의뢰하여 신분을 조사하면 금세 증명할 수 있는 일이다. 금방 밝혀질 일을 꾸며낼 만큼 어리석어 보이진 않네만.”

비령까지 슬그머니 끼어들어 법령사에 동조했다.

“이들이 정말로 그 흉악한 요괴 놈을 퇴치할 목적이라면 마땅히 도와야 하는 게 아니냐. 안 그래도 그놈 때문에 곤혹을 치르고 있던 참이다.”

비령은 이미 머릿속에서 계산을 끝낸 상태였다. 조정에서도 어찌하질 못한 살인귀를 없애는 데 일조한다면 단순히 무너져 내리고 있는 위상을 회복하는 데서 그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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