九章. 금안의 요괴
어린 소녀의 눈에 세상은 마치 지옥도와 같다.
눈에 비치는 이들마다 어찌 그리도 혼잡하고 어지러운 형상을 하고 있는지. 그 눈에는 사람의 생과 사, 과거와 미래, 욕망과 갈등, 그 모든 것이 혼잡하게 뒤섞여 어지럽게 보였다.
어둠 속에 숨어 있는 것들은 또 어떤가. 빛이 닿지 않는 저 깊은 계곡의 시커먼 진흙 속에서 태어난 그것들은 심해의 물고기처럼 빛을 몰라 검고 불그죽죽하고 하나같이 괴이하게 뒤틀린 형상을 하고 있다. 그처럼 흉한 것들이 밤낮없이 숨어 저를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너를 먹고 싶다. 너를 먹고 싶다.
그 말만을 머리가 이상해질 정도로 반복하며….
소녀가 매달릴 곳이라고는 말더듬이 여종의 품속뿐이다. 그녀의 젖가슴에 얼굴을 파묻고서 그 모든 것으로부터 필사적으로 눈을 돌렸다. 울며불며 오들오들 떠는 저를 여자가 필사적으로 마주 안아준다. 그 순박한 눈망울만이 저를 이 세상에 붙들어 매주었다.
‘우, 우지 마… 우지 마….’
귓불 위로 쏟아지는 어물어물한 음성에 끅끅거리며, 저 귀신들이 나를 해치지 못하게 해달라, 나를 지켜달라, 어린 짐승처럼 보채면 그녀가 아플 정도로 꽉 끌어안으며 응, 응, 내가 지켜주께, 지켜주께, 하고 어눌한 말투로 거듭 말한다. 제가 파고들 수 있는 유일한 품. 갓 태어난 짐승처럼 머리를 들이밀며 애정을 요구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
제발, 나를 떠나지 마.
하지만 스멀스멀 검은 연기처럼 피어오른 죽음이 기어코 그녀의 모가지를 옭아매 왔다. 가지 말라고 붙드는 제 손을 꼭 한 번 마주 잡아준 그녀가 금방 올게 하고는 뒤돌아섰다. 그녀의 등이 새까만 그림자에 뒤덮여 보이지 않는다. 소녀는 자지러지며 엉엉 울었다.
다음 날 아침, 여자는 갈기갈기 찢겨져 돌아왔다. 눈도 감지 못하고 죽은 그녀를 보며, 소녀는 이제 세상에 저를 사랑하는 것은 무엇 하나 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참혹한 세상에, 나 혼자인 것이다.
***
덜커덩, 하는 소리에 소루는 잠에서 깨어났다. 잠시 동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등 뒤로 주룩 식은땀이 흐르고 팔뚝에는 오소소 소름이 돋아나 있었다.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팔을 쓸어 올리는데 지척에서 염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죄, 죄송해요. 저 때문에 놀라셨죠. 손에 약을 발라드리러 왔는데 대답이 없으셔서….”
“염아….”
그녀의 다감한 음성에 어깨에서 긴장이 풀린다. 어째서인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소루는 그것을 애써 삼키며 태연하게 말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구나.”
“많이 피곤하신가 봐요. 침상에 누워서 주무시지….”
“아니다. 날이 좋아 깜빡 잠들었을 뿐이야.”
해가 들어오는 창가에 하릴없이 앉아 사락사락 불어오는 바람을 맞던 참이었다. 깜빡 졸은 새에 해가 저문 것인가. 공기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염이가 호들갑스럽게 창문을 닫았다.
“그래도 아직 바람이 차요. 고뿔이라도 걸리면 어쩌시려고 그래요.”
“이 정도는 괜찮아.”
“괜찮긴요. 안색이 좋지 않으세요. 따뜻한 차라도 내올까요?”
소루는 고개를 내저었다.
“별생각 없다.”
“그럼… 약을 발라드릴게요. 이리로 오셔요.”
그녀가 조심스레 제 옷자락을 잡아 탁상 앞으로 이끌었다. 소루는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빼 앉았다. 염이가 가지고 온 고약을 꺼내어 뚜껑을 열었다. 확 올라오는 약 냄새에 코끝이 싸해진다.
“상처가 많이 희미해졌네요.”
소매를 걷어 올리자 옆자리에 앉은 염이가 고약을 잔뜩 찍어 발라주었다.
“딱지도 깨끗하게 떨어졌고, 흰 자국도 많이 옅어졌어요. 의원 나리께서 특별히 만들어 주신 거라더니… 연고가 아주 효능이 좋아요. 꾸준히 계속 바르면 아주 멀끔해지실 거예요.”
그녀의 말대로 상처로 거칠거칠하고 울퉁불퉁하던 팔뚝이 요 며칠 사이에 보들보들해졌다. 상처에 배겨있던 두꺼운 굳은살도 녹아서 사라졌고, 거미줄 같이 팬 흔적들도 점차 옅어지고 있었다. 소루는 얌전히 팔을 내맡긴 채 조금 수줍게 중얼거렸다.
“그럼… 조금은 흉한 꼴을 벗을 수 있겠구나.”
“흉하다니요! 무슨 말씀이세요! 마님께서는 지금도 꽃처럼 어여쁘세요.”
손가락에도 꼼꼼히 약을 발라주던 염이가 정색을 한다.
소루는 민망함에 얼굴을 붉혔다.
“그리 말해 주지 않아도 된다.”
“입에 발린 말이 아닙니다! 마님께서는 정말로 고우셔요. 희고 조막만 한 얼굴은 사랑스럽고, 윤기 흐르는 까만 머리채도 아름답고, 특히나 눈은 꼭 보석 같아서… 보고 있으면 넋을 잃을 정도인 걸요.”
난생처음 들어보는 칭송에 소루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저에 관해서 사람들이 하는 말이라곤 늘 꺼림칙하다, 불길하다 하는 것들뿐. 때문에 그녀는 막연하게 자신이 흉측한 생김새를 하고 있다고 생각해 왔다.
특히나 두 눈은 잿빛으로 흐릿한 것이 실로 괴이쩍고 섬뜩하여 마주하는 것만으로 간이 다 떨려온다, 귀가 따갑도록 들어온 것이다. 그런 것을 아름답다고 하니 얼떨떨하고 민망한 기분만 든다. 소루는 그저 제 기분을 신경 써 해주는 말인 줄로만 알고 고개를 푹 숙였다.
“…용모가 어떠하든 난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주변에 불행을 몰고 오는 귀신 공주 주제에, 여느 평범한 계집처럼 외모에 신경 쓰는 게 가당키나 한가. 제 모습이 추하다는 생각조차 그저 희미한 인식이었을 뿐 크게 마음 쓰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그런 말 하지 않아도 된다.”
“아이참! 참말이라니까요! 몸이 작고 앳되어 그렇지, 요기조기 뜯어보면 안 이쁘신 데가 없는 걸요! 계곡서 들려오는 노랫말 때문에 괜히 사람들이 선입견을 가지고 보아 그렇지, 분명 몇 년만 지나면 가란 공주님보다도 빼어난 미인이 되실 거예요! 그리 되면 주인 나리께서도…!”
열띤 어조로 다다닥 쏟아내던 염이가 급히 말을 멈춘다. 경솔하게 입을 놀려 제 기분을 상하게 한 것은 아닌지 살피는 기색이었다. 소루는 신경 쓸 것 없다는 뜻에서 미소 지어 보였다.
“마음 써주어 고맙다.”
“마음을 써 하는 말이 아닌데….”
그녀가 낙담한 것처럼 휴, 하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마님께서는 스스로에게 너무 박하세요.”
“나는 그저….”
“잠시 들어가도 되겠나.”
염이의 풀죽은 음성에 당황하며 더듬거리던 소루는 소스라치며 고개를 벌떡 들었다. 어째서 문 앞에 올 때까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던 건가. 지척에서 희미한 빛과 열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여의치 않은 상황인가.”
자현이 성질 급한 사람답게 잠시의 침묵을 기다리지 않고 재차 물었다. 소루는 급하게 내뱉었다.
“아, 아니다. 들어오거라.”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드르륵, 소리를 내며 그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것만으로 사위가 환하게 밝아지는 듯하여 소루는 잠시 말을 잃었다. 이제 슬슬 익숙해질 만도 한데 그를 마주 대할 때마다 늘 그 강렬한 기에 압도 되는 듯했다.
“잠시, 앉아도 되겠나.”
아무 말 없이 손가락만 꼼지락거리고 있자 그가 무뚝뚝한 음성으로 물어온다. 소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허락을 구할 것 없다. 여긴 네 집이 아니냐.”
“…실례하지.”
드르륵, 거칠게 의자 끌리는 소리가 나더니 그가 맞은편 자리에 털썩 앉는다. 원래 무뚝뚝한 사람이기는 했지만 오늘은 유독 기분이 나쁜 듯했다. 그에게서 묘한 긴장감이 느껴진다. 소루의 낯도 근심으로 어두워졌다. 혹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마, 마실 것을 내올까요?”
“되었다.”
“그, 그럼… 저는 잠시 물러가 있겠습니다.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불러주십시오.”
불편한 침묵이 흐르는 사이 어색하게 곁에 서서 꼼지락대던 염이가 약을 챙겨 들고는 조심스럽게 방을 나갔다. 그러고도 자현은 한참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머뭇머뭇, 그의 기색을 살피던 소루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입술을 떼었다.
“오늘은 늦게까지 일이 많았던 모양이구나.”
“…그래.”
“혹,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느냐?”
“…그래. 안 좋은 일이 있었다.”
그가 무뚝뚝하게 내뱉었다. 그가 자기 얘기를 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인지라, 소루는 깜짝 놀라 걱정스레 물었다.
“혹시 나 때문에….”
“너 때문이 아니다.”
그가 곧장 부인해온다. 그녀는 그가 뒷말을 잇기를 기다렸다. 그런 이야기를 꺼낸 이유가 있을 터. 한참 동안 침묵하던 그가 곧 굳은 어조로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최근 도성 안에는 흉흉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어느 놈이 사람들을 마구 잡아 죽이고 있는데 조정에서는 손도 못 쓰고 있는 상황이지. 그 때문에 희란국 전체가 발칵 뒤집어졌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처음으로 듣는 이야기에 소루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라고는 자현과 염이뿐이라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깜깜 무소식이었던 것이다.
예전에는 귀신들이 천지 사방에서 벌어지는 오만 사건들을 시끄럽게 떠들어대어 사당 안에 가만 앉아서도 세상 돌아가는 일을 모두 알 수 있었는데, 이제는 누군가가 전해주지 않으면 이런 큰일이 벌어져도 알 수가 없는 건가.
그녀는 굳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런 일이 있었는지 몰랐다.”
“흉한 일, 귀를 더럽혀 좋을 게 뭐가 있나.”
그렇게 생각한다면 지금 이렇게 제게 전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번뜩 머리를 스치는 한 가지 생각에 소루는 어깨를 굳혔다. 아닌 게 아니라 자현이 심각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네가 알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한데… 오늘 법령사라는 이들이 내 집을 찾아와 이는 요괴의 소행이라고 하더군.”
그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에 온몸의 피가 싹 식는 듯했다.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인가.
제일 먼저 그 생각부터 들었다. 조금 전 꿈에서 보았던 여인의 참혹한 얼굴이 떠올라 손발이 다 오들오들 떨린다. 이 집에서 지내는 동안 제가 얼마나 주변을 불행하게 만드는 존재인지 잠시 망각하고 있었던 것인지, 새삼스레 두렵고 참담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내게….”
누를 끼치지 말고 이 집에서 나가라, 그리 말하려는 거냐. 차마 그 뒷말을 잇지 못하고 마른침을 삼키는데, 자현이 먼저 무뚝뚝하게 내뱉었다.
“그들이… 요괴를 퇴치하기 위해 너를 미끼로 쓰고 싶다고 부탁해 왔다.”
“미… 끼?”
“그래. 네가 미끼가 되어 놈을 유인해 주면 법령사들이 요괴를 퇴치하겠다고 하더군. 물론, 네가 위험에 처하지 않도록 보호해 주겠다는 약조도 하였다.”
속사포처럼 내뱉은 자현이 덧붙였다.
“싫으면, 거절해도 좋다.”
“하마. 내가 미끼가 되겠다.”
그나마 제가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단 게 다행스러워 소루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흔쾌히 답했다. 그러자 싸늘한 침묵이 흐른다. 제가 무얼 잘못 말한 건가 하며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는데 자현이 조금 거칠어진 어조로 말한다.
“…혹시라도 위험한 일을 당할 수 있다. 상대는 수백 명을 잔인하게 죽인 요물이야. 그자들이 보호해 준다고 했지만 만에 하나라도….”
“걱정하지 마라. 나는 괜찮아.”
안심시켜주기 위해 애써 미소를 지어 보이자 지척에서 쾅,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루는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그가 거칠게 외쳤다.
“어째서 너는…!”
쾅, 하고 다시 한 번 탁상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대체 뭐가 괜찮다는 거야! 이용만 당하는 주제에… 나쁜 일만 잔뜩 겪어 놓고는…! 대체 왜 웃는 거냐!”
“나, 나는… 그저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게 기뻐서….”
그가 왜 화를 내는 것인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혹 제 웃는 얼굴이 그의 심기를 건드린 건가 하며 소루는 손바닥으로 입가를 가렸다. 그러고는 야단을 맞은 강아지처럼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나는… 늘 주변에 안 좋은 일만 일으켰다. 다른 이들이 괴로워할 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무력하게 있어야만 했어. 뭔가 할 수 있는 게 있다는 건… 내게 기쁜 일이다.”
“…….”
“그러니, 거리끼지 마라. 나를 이용해도 좋아. 나는 네게 도움이 되고 싶다.”
“…그런 일을 당해 놓고도.”
그가 뭔가를 참는 사람처럼 억눌린 음성으로 말했다.
“너는 아직도 다른 이들을… 나를 돕고 싶은 건가.”
“…그래.”
“밉지도… 않나.”
밉다니. 어불성설이다. 이 세상에 잘못된 것은 오로지 자신뿐이었다. 제 존재만이 잘못되어 있었다.
“무서울 때는 있지만… 미울 때는 없다.”
“바보 같은 여자.”
자현이 한숨 쉬 듯, 혹은 신음하듯 낮게 토해 냈다.
소루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가 보기에는 바보 같은 건가. 확실히 생물로서 자신은 무언가 결여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본심으로는 저도 그처럼 아프고 무서운 일은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염이가 그리고 네가, 나를 구해 주었으니까, 모른 척하지 않았으니까, 괜찮아.
“…좋아. 내일, 그들에게 그렇게 전하겠다.”
“그래.”
“그럼 쉬어라.”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녀는 가만히 앉아 그의 발소리를 들었다. 드르륵, 하고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 옷을 벗어 아무렇게나 던져 놓는 소리. 털썩 침상에 걸터앉는 소리. 그저 그뿐인데도 마음이 놓인다.
깜깜한 밤중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앉아 불을 쬐는 기분이 이럴까. 다정하지 않고, 무뚝뚝하고, 늘 제게 화가 나 있는 사람이지만… 곁에 있으면 역시 마음이 놓인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방에서 당신이 오기를 기다리는 날들이 도리어 불안했다는 것을 알까. 제가 아무 쓸모가 없어져 버려서, 어디 멀리 보내버리는 건 아닐까 하고….’
그녀는 낯빛을 흐렸다. 제 마음 중에 희미하게 피어오르는 안도감을 자각하고는 그것에 죄악감을 느낀다.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하는 소리를 듣고도 나는 그가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만을 기뻐하고 있는 건가.
누가 보고 있는 것도 아닌데 스스로가 부끄럽게 느껴져 그녀는 얼굴을 가렸다. 틀림없이 지금 저는 흉한 얼굴을 하고 있겠지.
탐욕스러운, 귀신같은 얼굴을….
***
비령은 곧장 사람을 시켜 아시타와 여란의 신분을 확인해 오도록 했다. 둘 다 확실한 법령사였다. 그것도 남방에서 명성이 자자한 젊은 법사들로, 희란국에 온갖 요괴들이 판을 친다는 소문을 듣고 온 것이었다.
그는 곧장 자현에게 그 사실을 전했다. 듣는 듯 마는 듯 묵묵부답으로 장부만 뒤적이던 자현은, 정오가 되어 법령사들이 다시 찾아와서야 협조하마 하고 무뚝뚝하게 말하였다. 그 얘기를 들은 아시타는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렇다면 놈이 또다시 살상을 저지르기 전에, 바로 계획을 시행하겠습니다.”
그들이 세운 계획은 매우 단순했다. 사람들을 시켜 사흘 뒤에 소루 공주가 도성 밖으로 요양을 떠난다 하는 소문을 파다하게 퍼트린 뒤, 실제 떠나는 척을 하여 요괴를 끌어내겠다는 것이었다.
요괴는 본디 태어난 곳을 멀리 떠날 수가 없는 존재. 만약 그 요괴가 공주에게 미련을 두고 있다면 도성 밖으로 나가는 것을 그냥 두고 보지는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방해가 되는 자현도 없으니 이 적기를 놓치지 않으려 할 터. 아시타는 미리 준비해 온 지도를 펼쳐 구체적으로 마차가 지나갈 경로까지 일러 주었다.
“소루 공주가 탈 마차와 위장할 수 있는 의복을 서른 벌 준비해 주시면 저희 법령사들이 하인으로 위장하여 공주를 모시고 도성을 떠나는 시늉을 하겠습니다. 그리하면 요물들이 때를 보았다가 급습해 올 테지요. 저희는 놈들이 출현할 만한 곳곳에 미리 함정을 파 놓을 생각입니다.”
“나도 호위로 위장하고 동행하겠다.”
잠자코 그의 설명을 듣던 자현이 툭 내뱉었다. 아시타는 고개를 내저었다.
“영웅께서 가까이에 계시면 요괴들은 접근하지 않을 겁니다. 애초 위장을 해도 당신의 정체는 감추어지지도 않습니다.”
“그러고 보니 일전에 소루 공주도 그런 말을 했었지. 어떤 귀물도 자현에겐 해를 끼칠 수 없다고…. 이놈이 보통 기가 센 게 아니기는 하네만, 그 흉한 요물조차 피할 정도인가.”
비령이 너스레를 떨며 하는 말에, 아시타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맞습니다. 선천적으로 양기를 강하게 타고난 것도 있습니다만… 영웅께서는 천기를 타고나 하늘의 보호를 받는 분이십니다. 그런 이를 피안에 속한 불완전한 존재가 범접할 수 있을 리 만무하지요. 차안의 세계에서도 당신은 특히나 선명하고 강렬한 존재여서, 귀물들은 가까이 가는 것만으로 그 존재가 흐려지거나 붕괴돼 버리고 말 겁니다. 그러니 소루 공주를 그렇게나 탐내면서도 자호가에는 감히 침범해오지 못하는 게 아닙니까.”
그 거창하기 그지없는 말에 자현은 코웃음을 쳤다. 저를 꽤나 대단한 존재라는 듯 띄워주는 데 어깨가 으쓱해지기는커녕 수상쩍고 미심쩍은 마음만 든다.
애초에 제가 그리 좋은 기를 타고났다면 이만큼 궁지에 몰릴 일도 없어야 하는 게 아니냐.
그는 아시타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냉소적으로 쏘아붙였다.
“그러니까 난 빠져 있어라, 이 말인가.”
“저희만으로 미덥지 않으신다면 자호가의 무인들을 호위로 붙여 주셔도 됩니다. 하지만 영웅께서는….”
“자현이다! 그놈의 영웅 소리, 집어치워.”
“…자현 님께서는 그 요괴가 출현할 때까지 소루 공주와 멀리 떨어져 있으셔야 합니다.”
“아내를 미끼로 내어놓고 나보고 손가락이나 빨고 있으라고?”
“그리 걱정이라면 내가 대신 따라가겠네.”
자현은 미심쩍은 눈으로 비령을 돌아보았다. 네가 웬일이냐, 하는 시선에 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소루 공주에게 만에 하나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자네가 두고두고 나를 원망할 게 아니냐. 자현만큼은 아니어도 나 역시 희란국에서 손꼽히는 장수일세. 내가 호위로 따라간다면 자네 마음도 조금은 놓일 테지.”
그러니 고집부리지 말고 얌전히 있으란 뜻이다. 자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놈의 실력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상대는 인간이 아닌 존재. 그런 놈을 상대로 하는 것이니 보통의 전투와는 다를 것이다. 제아무리 비령이라고 해도 과연 제대로 대적할 수 있겠는가. 장안에서 보았던 참혹한 시체가 떠올라 마음이 몹시도 불안하다. 법령사란 놈은 꽤나 자신만만하게 굴지만 그다지 신뢰가 가진 않았다.
“…나중에라도 뒤따라가겠다.”
“사람 말 좀 듣게! 굳이 자네까지 나서지 않아도….”
“놈이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충분히 떨어져 있다가 후에 합류하면 될 게 아니냐! 만에 하나라도 네놈들이 그 요괴 놈을 처리하지 못했을 시에는 내가 상대하겠다.”
“…어지간히도 저희가 미덥지 못한 모양이군요.”
아시타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좋습니다. 대인께서 가까이에 있기만 해도 요괴는 타격을 입을 테니 후에라도 가담하여 주신다면 저희로서도 든든하지요. 다만….”
아시타가 손가락 하나를 척 들어 올리며 짐짓 엄한 얼굴을 하였다.
“충분한 간격을 두고 오셔야 합니다. 놈이 출현하기도 전에 대인께서 나타나시면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갑니다. 아니, 아예 신호를 정해 두지요. 제가 신호탄을 쏘아 올리면 그때 달려와 주십시오.”
더 이상 우겨 보았자 받아들여 줄 것 같지 않아 자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신호를 기다리고 있겠다.”
“이걸 쓸 새도 없이 끝날지도 모릅니다.”
“…입만 산 놈이 아니길 빌지.”
***
하수인들을 시켜 소루 공주가 도성 밖으로 나간다 하는 소문을 퍼트린 지 사흘째, 사람들은 이제나저제나 귀신 공주가 언제 떠나나 하며 자호가를 힐끔거렸다. 도성에서 벌어지고 있는 흉흉한 일이 소루 공주 탓이다 하고 모두가 원망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고년이 떠난다고 하니 이제 한시름 놓겠구나 하는 소리가 장안에 가득했다.
이윽고 정오가 지나 자호가 대문이 열렸다. 커다란 마차와 하인들, 짐을 실은 망아지, 열댓 명쯤 되어 보이는 호위무사가 줄을 이어 대로로 쏟아져 나왔다. 사람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모두 자리를 비켜섰다. 어떤 이들은 냉큼 가게 안으로 들어가 버리기도 하였고, 어떤 이는 후다닥 골목으로 숨어 버리기도 한다. 길목에 버티고 선 이들도 만에 하나라도 귀신 붙을까 두렵다는 듯 시선을 돌려 버렸다.
그런 냉랭한 침묵 속에서 마차는 조용히 길 위를 지나갔다. 그 행렬 맨 앞자리에 선 아시타는 미리 정해두었던 대로, 큰길 한가운데로 나아갔다. 혹 도성 어딘가에 숨어 있을지 모를 야토란 놈을 도발하기 위해서였다. 도성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를 보란 듯이 지난 뒤에는 북문으로 갈 생각이었다. 그 주변이 가장 한적하다고 하니 혹시라도 피해를 입는 사람이 생길까 싶어 정한 경로였다.
‘미리 함정을 준비해 놓기에도 딱 좋은 지형이고….’
지난 사흘 동안 여란과 그는 요괴가 출몰할 만한 곳곳에 함정을 설치해 두었다. 자호가에서 그 부근에는 접근하는 사람이 없도록 통제해 주기로 했으니 방해 없이 요마와 싸울 수 있을 것이다.
‘호락호락 당하지는 않을 터.’
상대는 보통 비범한 요물이 아니다. 강력한 주술을 준비해 두지 않으면 제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밤새 준비한 부적 다발이 든 주머니를 툭툭 두드리며 어깨에 힘을 잔뜩 주었다. 내내 필사적으로 뒤쫓아 온 요물을 드디어 만나게 된다 생각하니 피가 절로 뜨거워진다.
‘내 법력을 모두 쏟아 붓는 한이 있더라도 없애주마.’
마음 단단히 결심하며 그는 광장 한복판에 마차를 멈춰 세웠다. 사람들이 골목 구석구석에 몸을 숨기고서 흉한 시선을 던져온다. 그걸 싹 무시하며 아시타는 말머리를 북쪽을 향해 돌렸다. 휑한 길을 따라 마차가 느릿느릿 이동했다. 큰길에 나와 있던 사람들이 역병이라도 피하듯 후다닥 몸을 피했다. 아시타의 어깨 위에 올라앉은 까마귀 요괴가 그것을 보고 낄낄거리며 웃었다.
“저 바보 같은 꼴을 보아라. 인간들 눈이 어두워 천계의 것이 지척에 있는데도 뭣 피하듯 하는구나. 하여간에 어리석기 그지없다.”
“다 네놈들이 공주 주변의 사람들을 못살게 굴어 그런 게 아니냐.”
귀신 공주라 부르며 벌벌 떨게 만든 것이 제 놈들인데 그리 비웃다니. 부아가 치밀어 아시타는 까마귀의 꽁지를 휙 잡아당겼다.
“다 너 같은 요괴가 꼬여 드는 것을 피하기 위해 저리 하는 거다!”
“악! 잡아당기지 마라! 내 우아한 꽁지가 망가지잖아!”
“우아한 꽁지 좋아하시네.”
아시타는 코웃음을 쳤다. 야토 이외의 다른 요괴가 출몰하여 습격할지도 모르는 일. 놈을 구별하기 위해 데리고 나온 까마귀 놈은 간만에 바깥 공기 마시는 게 그저 신이 나 겁도 없이 까불어댔다.
“흥, 너희 인간 놈들은 수틀리면 남 탓이지. 인간들이 과연 요괴들 때문에 공주를 저리 모질게 대접하는 것일까. 그럴 리가 없지. 그나마 우리가 있어 그동안 공주가 온전히 살아온 것이다.”
온전히 살아와?
아시타는 기가 막힌 눈으로 제 어깨에 올라앉은 것을 노려보았다. 요괴 놈들 때문에 사당에 갇혀 홀로 외롭게 살아온 소녀다. 온갖 이들에게 역병처럼 여겨지며 살아온 삶이 어디 온전한 삶이란 말이냐. 요괴 놈의 말이 하도 괘씸하여 아시타는 놈의 꽁지를 또다시 확 잡아당겼다.
“헛소리 집어치워라! 뻔뻔스러운 요물 같으니….”
“대체 뭐가 뻔뻔스럽다는 거냐! 우리 요괴들이 공주에게 떨어져 나가서, 어디 인간들이 공주를 다정히 대접하기라도 했단 말이냐!”
놈이 꽁치를 뒤로 빼며 빽 외쳤다. 주먹을 들어 그 머리통을 쥐어박으려던 아시타는 제 품에 든 공주의 살점이 떠올라 움찔 손을 멈추었다. 아무 말도 못 하고 입을 꾹 다물자 놈이 것 보라는 양 깃털이 수북한 가슴을 빵빵하게 내밀어 보인다.
“그나마 우리들이 공주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둘러싸고 경계하였기에 이제껏 온전하였지, 아니었으면 공주는 진작에 인간들에게 먹혔을 것이다. 내 보기에 너희 인간들이 하는 짓도 우리와 별반 다를 것이 없어. 아니, 때때로 너희들은 우리보다 잔혹하다. 요괴는 그 근원부터가 혼란이라 그리한다 치더라도 너희 인간들은 요괴와 달리 태어났으면서도 요괴와 같이 행동하지.”
“…뚫린 입이라고 아주 멋대로 지껄이는군.”
아시타는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분명 인간에게도 악한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어디 요괴에 비할까. 세상에 난 이래 하는 일이라고는 환란을 일으키는 것들뿐인 놈들이 인간이 잔학하다 하니 어처구니가 없고 기가 막혀온다. 그는 가차 없이 놈을 어깨 위에서 휙 쳐내버렸다. 까마귀가 굴러떨어지며 날개를 파드득 파드득거렸다.
“말로 하란 말이다!”
일정 거리 이상 떨어지면 몸에 불이 붙는 주술을 걸어놓은 터였다. 놈이 제 날개에 붙은 불꽃을 끄며 시끄럽게 꽥꽥거린다. 그 꼴을 피싯거리며 내려다보던 아시타는 불현듯 말을 멈춰 세웠다. 어디선가 희미하게 요기가 느껴진 것이다.
‘드디어 나타나셨나?’
그는 사위를 살폈다. 어느새 행렬은 도성 외각지에 다다라 있었다. 북문과 불과 삼 리 정도 떨어진 거리. 행상이 자주 드나드는 곳이 아닌지라 사방이 온통 휑하였다. 있는 것이라고는 무성한 수목과 덩그러니 솟은 성문, 정돈되지 않은 흙길과 흑산 태화로 이어진 가파른 언덕뿐….
그 우거진 수풀 속에 검은 옷을 입은 괴한 서른 명이 그림자처럼 서서 화살을 겨누고 있었다. 인겁을 뒤집어쓴 요괴들이었다.
아시타는 재빨리 품에서 부적을 꺼내어 법문을 외웠다. 그들이 쏜 화살이 주술로 일으킨 바람의 장벽에 부딪혀 날아가 버렸다. 그것을 본 요괴들의 기색이 돌변한다. 법령술사가 있으리라고는 예상치 못한 모양이었다.
그는 곧바로 미리 설치해 두었던 주술을 발동시켰다. 발밑에서부터 불꽃이 일어나 거대한 원을 그려냈다. 도망가려던 요괴들이 그 원 안에 갇혀 비명을 내질렀다. 그들이 뒤집어쓰고 있던 인겁이 일시에 찢어지고 그 안에 숨겨져 있던 요괴 본연의 모습이 드러났다.
이무기의 몸에 인간의 머리를 지닌 요괴, 교였다. 놈들이 거대한 몸을 꿈틀거리며 시뻘겋고 긴 혀를 위협적으로 날름거렸다.
아시타는 재빠르게 그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특별히 강한 요력을 지닌 요괴는 없다. 어느새 다시 제 어깨 위에 올라앉은 이암을 돌아보니, 놈이 고개를 흔든다.
“이중에 야토는 없다.”
설마 다른 요괴들만 보내고 저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셈인가.
아시타는 잔뜩 굳은 얼굴을 했다. 기껏 놈을 잡기 위해 판 함정이 무용지물이 되게 생겼으니, 마음이 몹시도 초조해진다.
‘이놈들이 모두 전멸해도, 어디 모습을 드러내지 않나 보자!’
그가 호기롭게 법문을 외웠다. 그러자 솟아오른 불의 방벽이 점차 좁아지며 요괴들을 옥죄여 갔다. 뱀들이 서로 몸을 뒤얽은 채 괴성을 내질렀다. 그들 중 하나가 불벽을 빠져나오려 버둥버둥거리다 기어코 틈을 하나 내어 꼬리를 내어 휘두른다. 그것을 법령사 중 하나가 재빨리 바람의 술법으로 막아내었다. 댕강 잘린 기다란 뱀의 꼬리가 바닥에서 요동을 쳤다. 그것을 불꽃으로 태우며 아시타는 다른 법령사들에게 퇴마술을 시작하라고 외쳤다. 그러자 요괴들이 발악하며 마구잡이로 독을 내뿜기 시작한다.
“모두 결계를 쳐!”
놈들이 분사한 독이 소나기처럼 우스스 쏟아져 내렸다. 황급히 바람을 조종해 방벽을 치지 않았으면 모두 살이 녹아내렸을 것이다. 바닥에 고여 지글지글 끓어오르는 독물을 보며 아시타는 사방에 외쳤다.
“모두 연기를 마시지 않도록 주의해라!”
그러고는 침착하게 염주를 쥐고서 법문을 읊는다. 그러자 돌풍이 일어나 사방에 고인 독 기운을 일시에 날려버렸다. 그가 독을 정화하는 사이에 마차에 바짝 붙어 호위를 하던 여란이 앞으로 나와 부적을 꺼내들었다. 요괴들의 요력을 남김없이 빨아들인 뒤 그 빨아들인 요력을 이용해 요괴의 몸을 불태워 버리는 강력한 부적이었다. 그녀가 법문을 읊조리고 부적을 던지자 요괴 서넛이 순식간에 숯 더미가 되어 버렸다. 그녀를 따라서 다른 법령사들도 퇴마술을 펼치기 시작했다.
잠시 뒤 잔뜩 기합을 넣었던 게 무색하리만치 허무하게 요괴 서른 몇 마리가 모두 잿가루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그동안에도 야토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걸로 다 끝난 건가?”
소루 공주가 타고 있는 마차에 딱 붙어 호위를 하던 비령이 다가와 물었다.
고개를 돌리니 자호가의 무인들이 마차를 둘러싸고 있는 게 눈에 들어온다. 그는 요괴들이 마구 토해 낸 독 기운에 혹시나 다친 이가 없나 살핀 뒤 비령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애석하게도 저희가 찾던 요괴는 없었습니다.”
“그 말은… 계획이 실패했다는 소리인가?”
“글쎄요… 일단 요괴를 보낸 것으로 보아 공주에게 미련을 두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만….”
그는 말끝을 흐렸다. 보낸 요괴들이 모두 죽었는데도 놈이 직접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니, 혹 법령사들이 있다는 걸 알고 포기해 버린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일단 성 밖으로 나가는 시늉을 해보지요.”
가느다란 눈으로 말없이 저를 살피던 비령이 곧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차 쪽으로 향한다.
아시타는 다시 행렬을 추슬러 북문 쪽을 향해 말머리를 돌렸다. 하지만 성문에 다다를 때까지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그곳에서 머뭇거리기를 잠시 아시타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말머리를 되돌렸다.
어쩔 수 없다. 일단 다시 돌아가는 수밖에.
비령에게 그리 전달하려는 순간 사위가 어두워지며 공기가 사납게 진동을 한다. 어마어마한 요기를 느끼고 아시타는 고개를 쳐들었다. 맑디맑았던 새파란 하늘이 온통 시커멓게 물들어 있었다. 하늘을 가득 메운 것들이 모두 요괴라는 것을 깨달은 아시타는 경악하며 입을 딱 벌렸다.
“아시타 님!”
법령사들도 당황하여 그를 불렀다. 수십 년 동안 요괴 퇴마를 하였지만 이처럼 어마어마한 수의 요괴 떼는 처음으로 본 것이다.
아시타는 언성을 높였다.
“침착하게 방어진을 펼쳐라. 너희들은 공주를 모시고 뒤로 물러나 있어!”
그의 지시에 따라 법령사들이 사방에 황급히 결계를 둘러쳤다. 달려들던 요괴들이 장벽에 쾅, 하고 부딪힌다. 아시타는 품에서 재빨리 부적 다발을 꺼내 들었다. 휘리릭, 그의 손에서 휘몰아친 바람에 부적이 길게 나선을 그리며 공중을 가른다. 그것이 결계를 깨부술 듯 마구마구 달려들던 까마귀 요괴를 향해 채찍처럼 날아들었다. 요괴가 황급히 몸을 뒤로 빼어 그것을 피했다.
“젠장!”
“아시타! 법력을 낭비하지 마라!”
여란이 사납게 외친다. 그녀의 얼굴 역시 비장하게 굳어져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의 예상하였던 요괴의 거의 네다섯 배는 훌쩍 넘는 숫자가 나타난 것이다.
음곡이 요물들의 소굴인 것은 진작 알고 있었으나 이리 많은 요괴가 살고 있었단 말인가. 설마 그 야토란 놈은 이놈들을 전부 부리고 있는 것인가.
‘아니, 소문을 듣고 희란국 요괴들이 모두 기어 나온 것인지도….’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것이라면 제 놈들끼리도 다투어야 옳다. 저들끼리 전열을 맞추어 질서정연하게 공격해 들어오는 것으로 보아 분명 지휘하는 이가 있을 터. 놈을 찾아 없애야 한다.
“이암! 야토는, 놈은 어디에 있나!”
“보이지 않는다.”
그 말의 사실 여부를 확인할 여유도 없었다. 아시타는 법령사들을 지휘해 술법을 펼쳤다. 요괴들이 그들의 공격을 피해 우르르 물러났다가 밀려들기를 반복한다. 실로 어마어마했다. 무수히 많은 수의 교와, 독수리의 몸에 여자의 얼굴을 한 요괴 가암, 인간의 몸에 돼지의 머리를 한 고호, 사자의 몸에 도깨비의 머리를 지닌 파후, 대왕 지네와 고양이 요괴, 독두꺼비 떼에 한 무리의 외눈박이 요괴…. 그가 알고 있는 요괴란 요괴는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아시타! 술법을 펼치겠다!”
여란이 앞서 나오며 외쳤다. 그녀가 펼쳐 든 부적을 본 것만으로 무엇을 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그 어떤 귀물이든 단숨에 집어삼키는 불의 용, 염왕의 소환술을 펼치려는 것이다. 아시타는 바로 자신이 거느린 법령사들을 동원해 여란을 보좌했다. 그녀의 신호에 따라 동시에 법령사들이 일제히 법문을 외우자, 땅바닥에서 거대한 화룡이 솟아올라 요괴들을 향해 매섭게 날아간다.
“바로 다음 주술을 준비해라!”
염왕을 땅 위에 붙들어 둘 수 있는 것은 불과 일각. 그 정도 가지고는 저 많은 놈들을 모두 없앨 수 없다. 그는 재빨리 허공 위에 좌르륵 부적을 펼쳤다. 그가 막 새로운 소환술을 펼치려는 순간, 황소 같은 몸집의 요괴가 방망이를 휘둘러 결계를 뚫고는 제게로 곧장 달려든다. 미처 방어 주술을 펼칠 여유도 없었다. 그 무지막지한 요괴가 저를 덮쳐왔다.
“뒤로 물러나!”
그 앞을 섬광처럼 누군가가 튀어나와 막아섰다. 비령이었다.
‘요괴의 완력을… 보통의 인간이 받아 내다니!’
경악한 것도 잠시 아시타는 그가 맞서는 사이 재빨리 바람의 술법을 펼쳐 단박에 요괴의 머리를 베어 버렸다. 비령이 칼을 바로 쥔 채 아시타를 향해 소리쳤다.
“저놈들을 다 없앨 수 있는 거냐?”
“버겁습니다.”
“그럼, 당장 자현을 불러라. 자현이 있으면 요괴는 약해진다 하지 않았나!”
그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곧장 품에서 신호탄을 꺼내 들었다. 그것에 불을 붙이자 하늘을 향해 불덩어리가 치솟더니 강한 빛을 뿌리며 사라진다. 자현이 저걸 보고 여기까지 당도하는 데 제아무리 서둘러도 일각은 걸릴 터.
‘그때까지 버틸 수 있겠지.’
그리도 자신만만하게 물리칠 수 있다 호헌하였는데, 이 무슨 꼴인가.
아시타는 얼굴을 굳히며 부적을 꺼내 들었다. 당장이라도 깨어지기 일보 직전인 결계 안측에 재빨리 새 결계를 치고는 곧장 새로운 소환술을 펼쳤다. 그가 불러낸 것은 거대한 바람의 새, 가루다였다.
땅에서 솟아낸 새는 곧장 염왕의 곁으로 날아가 요괴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독기를 분사하던 요마들의 몸뚱이가 가루다의 칼바람을 맞고 갈가리 찢겨져 나갔다. 염왕보다는 약하지만 거의 비견될 정도로 사납고 강한 소환수였다. 웬만한 요괴는 상대도 되지 않는다.
“가루다는 얼마나 유지할 수 있지?”
“일각도 어렵다.”
아시타는 줄줄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며 여란의 질문에 답했다. 사실 그 정도도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소환술은 보통 두세 사람 분의 법력을 소모해야 가능한 고위의 술법. 그런 것을 다른 법령사들의 도움 없이 혼자서 펼쳤으니 기진하여 뒤로 넘어가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
하지만 아시타는 떡 버티고 서서 결계를 깨고 들어오려는 요괴를 향해 새 술법을 펼치기까지 하였다.
‘젠장, 끝이 없군.’
하지만 아무리 공격을 퍼부어도 요괴들의 수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다. 혹시 야토란 놈, 이전에 법령사와 싸워본 경험이 있는 것인가. 교묘하게 공격해 들어왔다가 물러났다가 하는 꼴이, 꼭 저희들의 법력을 모두 소진시키려 하는 것 같았다.
‘처음에 보내었던 교들도 우리의 전력을 확인하기 위한 미끼였던 거로군….’
아시타는 이를 악물었다. 모습을 감춘 채 숨죽이고 있는 요괴 따위, 찾아내기만 하면 쉽사리 없앨 수 있다 자만하였건만 놈은 우리가 짜놓은 허술한 함정을 웃돌고 있었던 것이다.
“비겁하게 숨어 있지만 말고 모습을 드러내라, 야토!”
이러다가는 법력만 모두 소진한 채 전멸할지 모른다는 위기감에 그는 쩌렁쩌렁 목청을 높였다. 자현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끌 수도 있겠지만 그리 되면 놈을 찾아낼 길이 또다시 막히게 된다. 무리를 해서라도 이번 기회에 끝장을 봐야 한다.
그는 남은 법력을 총동원해 거대한 불 회오리를 불러일으켰다. 어떻게든 야토를 불러내어 처단하면 남은 요괴들은 서로 우왕좌왕 흩어질 터. 그는 불기둥을 요괴 떼거지를 향해 날렸다. 요괴들이 우왕좌왕 흩어지며 불꽃을 피해 달아났다. 아시타는 곧장 불의 경로를 틀었다. 요괴들이 우르르 한 방향으로 도망친다.
그곳에는 아가리를 크게 벌린 염왕이 기다리고 있었다. 요괴들 수십 마리가 순식간에 염왕이 토해 낸 불꽃에 잿더미가 되어 버린다.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는 계속해서 불꽃을 조종해 요괴들을 한곳으로 몰았다. 한 마리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불태워 버리마 하고 이를 악물며 법력을 쥐어짜 내는데 저 멀리서 시커먼 그림자가 날아들었다. 미처 피할 새도 없었다.
“크으윽!”
날카로운 칼날이 어깻죽지에 깊숙이 내려박혔다. 비령이 급히 사내를 공격하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팔이 떨어져 버렸을 것이다. 아시타는 피가 흐르는 어깨를 꽉 움켜쥐며 고개를 쳐들었다.
형형하게 빛나는 금빛 눈의 사내가 대검을 쥐고서 우뚝 서 있었다.
“…왜 그런 눈으로 보나. 나를 부른 게 아니었나. 좀 더… 반겨 달라.”
기묘하게 느껴질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 가득 오싹한 미소를 머금고서 사내가 나직하게 읊조린다. 굳이 이암에게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야토….”
사내가 피에 젖은 긴 장검을 바로 세우며 의아한 얼굴을 한다.
“그 이름을 어찌 아나. 아… 쓸데없는 걸 떠들었구나, 까마귀.”
“나, 나로서는 별수 없었다!”
주술 때문에 도망가지도 못하고 아시타의 곁에 앉은 이암이 바들바들 떨며 외쳤다. 야토는 별 관심 없다는 듯 요괴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뭐, 아무래도 좋다.”
그러고는 곧바로 저를 막아선 비령을 향해 칼을 휘둘러 온다. 비령은 그 공격을 간신히 막아냈다. 야토는 머뭇거리지 않고 곧장 다시 공격해 들어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검이 세 번이나 휘둘러졌다. 세 번 다 막아냈지만 인간을 초월한 어마어마한 완력에 손목이 다 끊어질 듯하였다. 비령은 이를 악물었다.
“당신이… 그 참상을 만들어 낸 요괴인가.”
칼을 맞댄 채 간신히 버티고 서서 묻자, 요괴가 희미하게 인상을 찡그린다. 사내는 다른 추하디추한 요괴들과 달리 보통의 인간과 같은 아니, 인간을 넘어서는 아름다운 용모를 하고 있었다.
“참상이라 하면, 나의 만찬을 말하는 건가.”
“…이 괴물 놈이… 무어라 지껄이는 게냐.”
“왜 화를 내지? 너희 인간들도 가축을 잡아 한 상 잘 차려 먹질 않던가.”
칼을 맞댄 채로 그가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속수무책으로 뒤로 밀리면서도 비령은 검을 놓지 않았다. 그런 비령을 내려다보며 요괴가 이해하기 힘들다는 듯 중얼거린다.
“너희도 짐승을 먹잖느냐. 왜 나쁘다고 하는지 알 수가 없어.”
“크윽…!”
“인간이 되면, 알 수 있으려나.”
요괴가 검을 쥐지 않은 손을 그의 가슴 쪽을 향해 뻗어온다. 비령은 급히 몸을 뒤로 뺐다. 하지만 요괴는 민첩하게 따라붙었다. 비령보다 두 배는 빠른 속도였다. 피할 수 없다. 이대로 심장을 내어 주나 보다 하는 순간 사내를 향해 불꽃이 날아들었다.
“물러나라!”
여란이 얼굴께에 부적을 들고 서 있었다. 비령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황급히 요괴에게서 떨어졌다. 사내의 발밑에서 화르륵 불의 장벽이 치솟아 올라 그를 둘러쌌다.
“걸렸구나.”
여란이 회심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야토의 발밑에는 미리 설치해 놓은 강력한 봉인 결계 식이 펼쳐져 있었다.
“각오해라. 어느 요괴도 그 안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여란은 곧바로 퇴마 부적을 꺼내 들어 요괴를 향해 던졌다. 천년 묵은 이무기도 순식간에 잿더미로 만들어 버리는 강력한 부적이었다. 하지만 그 회심의 일격은 어이없으리만치 허무하게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다. 요괴가 마치 평범한 종잇장을 움켜쥐듯 그것을 한 손에 붙잡더니 와그작 구겨 버린 것이다.
그녀는 황망한 눈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두 눈으로 보고도 믿어지지가 않았다. 요괴가 마치 쓰레기를 버리듯 종잇장을 휙 바닥에 던져 버리더니 저벅저벅 불 속에서 걸어 나왔다.
그것을 바라보며 아시타가 침통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이미 요괴를 벗어난 건가….”
보통의 요괴라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 놈의 몸은 이미 인간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반인 반요의 몸. 거기에 원래라면 지니고 있어 봤자 독밖에 되지 않는 신력이 인간화된 부분과 융화를 이루었다. 놈은 반은 요괴, 반은 천인이 된 것이다. 그러니 술법이 통하지 않는 게 아닌가.
‘그래서… 요력도 숨길 수가 있었던 거군.’
“덕망이 높은 승려 백을 먹으면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러니까….”
요괴가 칼을 들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너 하나가 열 명의 몫을 한다는 말이지?”
여란은 황급히 바람의 장벽을 일으켰다. 요괴가 그것을 손을 휘둘러 간단하게 깨어 버린다. 신력은 법력보다 우위에 있는 힘이다. 그 어느 술법도 놈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여란, 피해!”
아시타는 다급히 외치며 요괴에게 달려들었다. 아무런 타격도 입히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불꽃을 일으켜 놈에게 휘둘렀다. 야토가 손바닥을 펼쳐 너무나 간단하게 그것을 흩어버린다.
“혼자 여러 마리를 잡으려니… 성가시군.”
그러고는 귀찮다는 듯 아시타의 목을 한 손에 낚아채듯 움켜쥐었다. 아시타는 컥컥거리면서도 재빨리 야토의 팔에 염주를 휘감았다. 법력을 주입하자 염주가 시뻘겋게 달아오른다. 그 열기를 느낀 듯 놈이 화들짝 손을 놓았다. 피부가 검게 눌어붙어 있었다. 그것을 찡그린 눈으로 내려다보던 야토가 다음 순간 반대편을 향해 몸을 날렸다.
놈이 무엇을 하려는지 깨달았지만 막을 새가 없었다. 야토가 칼을 휘두르자 법령사들이 간신히 유지하고 있던 결계가 마치 종잇장처럼 간단하게 찢어졌다.
“젠장!”
아시타는 황급히 멀쩡한 한쪽 손으로 부적을 모두 꺼내 허공 위에 펼쳤다. 마치 무너진 댐으로 물이 쏟아져 내려오듯 부서진 결계를 뚫고 요괴들이 밀어닥치기 시작한 것이다. 염왕과 가루다가 서둘러 요괴를 집어삼켰지만 그 수가 너무 많았다.
“여란! 마차를…!”
그가 외치기도 전에 여란은 이미 마차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녀가 황급히 마차 주변에 결계를 쳤다. 하지만 그녀 역시 법력이 거의 바닥난 상황일 터. 오래 버틸 수 없다.
‘대체 어떻게 해야….’
“소루!”
이제 정말 끝장인가 한 순간 사방에 흐르는 기류가 요란하게 뒤흔들렸다. 아시타는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현이 당도한 것이다.
그가 무사들을 이끌고 달려와 마차를 에워싼 요괴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요마들이 기겁을 하며 우르르 흩어진다. 어디 그뿐인가. 저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던 요괴나 살기등등하게 여기저기에서 몽둥이를 휘두르던 요괴들까지 일시에 물러나니 마치 썰물이 빠지는 듯하다.
“그리 자신만만하더니… 이게 대체 무슨 꼴이냐?”
그 모습에 반쯤 질려 멍한 얼굴을 하는데, 자현이 성큼성큼 다가와 싸늘하게 으르렁거린다. 아시타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면목없습니다.”
“너는 나중에 보지.”
기절 직전인 그의 모습에도 일말의 자비 없이 중얼거린 자현이 곧 살기등등한 얼굴을 야토를 향해 돌렸다.
“네놈이… 도성에서 행패를 부리는 요괴냐.”
대답 대신에 야토가 칼을 들어 올린다. 법력이 통하지 않게 된 것처럼 자현이 지닌 천기도 버틸 수 있게 된 것인지, 그는 다른 요괴들처럼 도망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저 태연히 마주 선 채 형형히 눈을 빛낸다.
“왜지…?”
요괴가 문득 중얼거렸다. 자현은 눈을 가늘게 떴다.
“뭐가 말이냐.”
“왜… 너를 본 순간에, 나는 화가 치민 건가.”
그렇게 묻는 요괴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는 모습이 정말로 의아해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물끄러미 자현을 바라보고 서 있기를 잠시 곧 요괴가 몸을 날렸다. 거의 동시에 자현이 검을 휘둘렀다. 허공에서 그들의 검이 격돌하며 불꽃이 튀었다.
그 모습을 보고 저희들이 끼어들어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을 깨달은 법령사들은 급히 뒤로 물러났다. 법령술을 펼쳐 보좌하여도 방해만 될 게 뻔했다. 그들이 숨죽이고 지켜보는 사이 자현과 야토는 격렬하게 검을 주고받았다.
“너를… 갈기갈기, 찢어 버리면… 기분이 조금 나아지려나.”
“으득… 할 수 있으면 해보시지!”
칼을 맞댄 채 한 치의 물러남도 없이 힘을 겨루던 자현이 슬쩍 몸을 틀었다. 일순간 요괴의 옆구리에 허점이 드러난다. 그것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베어냈다. 하지만 놈은 통증을 느낄 줄 모르는 듯 민첩하게 몸을 돌려 곧장 칼을 휘둘러온다. 그 움직임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날쌔다. 힘과 속도만 보자면 자현보다 한 수 위였다.
‘하지만 칼을 다루는 솜씨만큼은 어느 무뢰배와 다름이 없다.’
자현은 요괴의 공격을 간신히 막아내면서도 그 움직임을 면밀히 분석했다. 그저 빠른 속도와 힘으로 밀어붙일 뿐 놈의 움직임에는 기교가 없었다. 자현은 마치 벼락처럼 떨어지는 공격을 아슬아슬 흘려버리며 자잘한 빈틈을 놓치지 않고 계속해서 검을 찔러 넣었다.
“칫….”
제 몸에만 상처가 늘어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요괴가 얼굴을 일그러트린다. 그 모습이 마치 날파리 한 마리를 잡지 못해 안달 난 아이처럼 보였다. 자현은 이를 악물었다.
인간이 아닌 놈답게 이 정도 가지고는 눈 하나 까딱 않는 건가. 결정적인 공격을 날릴 틈을 노려야 한다.
그는 교묘하게 요괴의 공격을 흘려버리며 잔뜩 약을 올렸다. 마치 짐승처럼 마구잡이로 달려들던 요괴가 어느 순간 짜증을 참지 못한 것처럼 크게 칼을 내리그었다. 동작이 커지며 가슴팍에 허점이 드러난다. 그것을 놓치지 않고 자현이 단번에 파고들어 흉부에 검을 찔러 넣었다. 야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걸로 끝이다 하고 자현은 칼을 비틀어 쥐었다. 하지만 가슴을 꿰뚫린 놈이 가만 웃더니 그대로 팔을 들어 올리는 게 아닌가. 자현은 눈을 크게 떴다. 거의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빼지 않았다면 놈이 휘두른 칼에 목이 댕강 잘렸을 것이다. 연이어 쏟아지는 공격을 피해 그는 급히 서너 걸음 뒤로 물러났다. 제 가슴에 박힌 칼을 거침없이 빼어 든 야토가 그 모습을 보고 광소(狂笑)를 터트렸다.
“이건 들고 가야지!”
그러고는 검을 내던진다. 자현은 화살보다 빠르게 날아드는 칼을 간신히 피해 냈다. 그것을 낚아채어 다시 쥘 새도 없이 야토가 그 뒤를 이어 달려들어 왔다. 하지만 상처 때문인지 움직임이 매우 조잡했다.
자현은 재빨리 몸을 틀어 그 공격을 피하고는 요괴의 가슴팍을 걷어찼다. 하지만 야토는 상처를 걷어 채이고도 물러나기는커녕 도리어 그 다리를 꽉 붙잡고서는 잡아당겼다. 서둘러 뿌리쳤지만 자현은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고 말았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야토가 달려들어 그의 어깨를 가차 없이 물어뜯었다.
“젠… 장!”
자현은 신음을 삼키며 놈의 머리통을 후려갈겼다. 소도 때려잡은 주먹이다. 그 우악스러운 힘에 야토의 몸도 휘청하였다. 하지만 요괴는 머리를 두어 번 흔드는 것으로 충격을 털어버리더니 곧장 다시 자현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아슬아슬 빗겨 맞았는데도 일순 골이 띵하였다.
자현은 놈의 복부를 연이어 걷어찼다. 그들의 몸이 한데 엉켜 바닥을 굴렀다. 순식간에 전투가 육탄전으로 돌변한 것을 보고 물러서 있던 비령이 기함하며 칼을 들고 달려들었지만 야토가 단번에 날려 버린다.
그의 팔은 어느새 뒤틀리고 찢겨져 본래 요괴의 것으로 돌아와 있었다. 보통 인간의 팔보다 두 배는 길고, 열 배는 단단하며, 몹시도 괴이쩍은 형상의 시커먼 팔. 그것을 자현을 구하기 위해 접근해 오는 이들을 향해 휘두르며 야토가 짐승처럼 내질렀다.
“방해… 하지 마!”
그 음성은 인간의 성대에서 나올 만한 것이 아니었다. 피를 본 짐승처럼 동공을 세운 야토가 괴이쩍은 음성으로 으르렁거렸다.
“네놈, 모조리 먹어 주마…!”
“크윽…!”
“먹어주마, 먹어주마, 먹어주마, 먹어주마…! 너를…! 네 심장을…! 네 수육을! 뼈를! 남김없이 먹어치워 주마…!”
자현과 맞닿은 몸이 점점 기이한 형태로 어그러져 간다. 반은 인간이지만 아직 반은 요괴. 요괴로 남아있는 부분이 자현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견디지 못하고 꿈틀거리며 요동을 치기 시작한 것이다. 황금색 눈동자에는 희미하게 붉은빛이 감돌기 시작하고 등줄기는 점점 부풀어 올랐다. 요괴는 육체가 요동치는 고통에 얼굴을 일그러트리면서도 자현을 짓누르며 씹어뱉듯 외쳤다.
“네놈을 죽여서, 먹어 치워서 나는… 난 인간이….”
자현은 필사적으로 놈의 머리를 밀어냈다. 놈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팔이 부들부들 떨리며 점점 밀려났다. 얼굴이 터질 듯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걸 내려다보는 요괴의 두 눈이 사나운 열기를 담고서 타오른다. 희열, 굶주림, 갈망과 분노 그리고 증오…. 온갖 감정이 뒤범벅되어 금색 눈이 회오리쳤다.
어째서 제게 그런 눈을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단지 포식자의 앞에 엎드린 양이 된 기분으로 자현은 버둥거렸다. 요괴가 산 채로 뜯어먹어 버리겠다는 양 피에 젖은 입을 쩍 벌린다.
“그만…!”
막 그 입이 제 가슴팍을 향해 내려오려는 찰나 요괴가 우뚝 움직임을 멈추었다. 자현은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소루가 아수라장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그 모습에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냥 처박혀 있을 것이지 왜 기어 나온 거야!
그렇게 소리치고 싶었지만 너무 놀라 입도 뻥긋할 수 없었다. 그녀가 비틀비틀 그들을 향해 걸어오며 허공에 양팔을 허우적거렸다.
“제발… 그만해라.”
그 위태로운 발걸음을 바라보는 자현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창백하게 질렸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머리칼이 쭈뼛 선다. 그것이 공포심임을 자현은 미처 몰랐다. 괴이하기 짝이 없는 이 괴물을 눈앞에 두고도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 겁 없이 다가오는 여자의 모습에 치솟아 올랐다.
‘제발 오지 마.’
그는 소리 없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도망치란 말이야.
그 애원이 들리지 않는지 여자가 겁도 없이 내뱉는다.
“나를 원한다면… 주마.”
그 말에 요괴가 어깨를 움찔하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여자가 그리로 한 발짝을 더 뗀다. 한바탕 소란으로 흐트러진 옷자락 아래로 당장이라도 부서질 듯 가느다란 몸이 어렴풋 드러났다. 두 팔을 벌려 그것을 무방비하게 내민 여자가 담담히 말한다.
“자, 나를 먹어라.”
“…….”
“어째서 보고만 있는 것이냐. 사람이 되기를 원했던 게 아닌가. 나를 먹기를 원했던 게 아닌가. 얼마든지 가져가도 좋다. 그러니… 그는… 놓아 달라.”
“입 닥쳐!”
자현은 결국 더는 참지 못하고 고함을 내질렀다. 그러고는 요괴의 밑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몸을 비틀며 바닥을 더듬었다. 무엇이든 무기가 될 만한 것이 잡히기를 바라며 필사적으로 손을 뻗는데 요괴가 입술을 달싹였다.
“내가 원하는… 거….”
자현은 흠칫, 움직임을 멈추었다. 요괴의 음성은 어느새 사람의 것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가 자현의 몸 위에서 천천히 일어나며 중얼거렸다.
“내가 그대에게 원하는… 것은….”
저를 짓누르는 힘이 약해졌건만 어찌 된 노릇인지 자현은 옴짝달싹 못하고 요괴의 얼굴을 올려다보기만 하였다. 요괴의 눈에는 도무지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멍한 눈으로 소녀를 바라보던 요괴가 느릿느릿 내뱉는다.
“나는… 만져보고 싶다.”
대체 이 괴물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가 하며 자현은 입을 벌렸다. 놈의 말을 단 한 자도 이해할 수 없었다. 요괴가 그 스스로도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는 것처럼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인다.
“당신의 머리카락을….”
그가 하염없는 눈으로 공주를 바라보며 팔을 들어 올렸다. 나무토막처럼 앙상하고 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