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희란국연가-11화 (11/16)

十一章. 사모함

요괴 퇴치가 아무 소득 없이 끝이 나고 장안에는 더욱 흉흉한 소문이 퍼졌다.

“귀신 공주에게 홀린 요괴가 사람을 잡아먹고 다닌다.”

하늘을 뒤덮은 요괴 떼거지를 보고서 겁에 질린 자호가의 무인 하나가 도망하여 그리 떠들어 댄 것이다. 그의 증언은 안 그래도 흉포하여진 민심을 부채질했다.

자호가의 대문 앞에는 사람들의 욕설이 끊이질 않았고 몇몇은 인분을 가져와 뿌리기까지 했다. 자현의 영웅으로서의 명성은 오물로 범벅이 되었다.

일각에서는 왕에게 속아 어쩔 수 없이 귀신 공주와 결혼한 영웅이지 않느냐, 그에게 무슨 죄가 있나 하고 동정하는 목소리도 있었으나 형제자매, 부모나 자식 혹은 이웃을 참혹하게 잃은 이들은 분노를 멈추지 않았다.

영웅이 무고하다면 도대체 왜 귀신 공주를 도성 밖으로 쫓아버리지 않느냐. 그자도 다 한통속이다. 저 집안이 도성을 떠나야 더는 사람이 안 죽는다. 그 격한 분노는 들불처럼 번져 영웅을 지지하는 목소리를 압도해 버렸다.

상황이 이리 되니 이제나저제나 눈에 불을 켜고서 자현을 내쫓을 궁리만 하던 가륜 왕은 신이 났다. 옳다구나 하고 곧장 자현을 관료들이 모인 자리에 불러내 놓고는 그가 웃는 낯을 감출 생각도 않고 대뜸 말한다.

“민심이 어지럽다. 백성들의 진노가 이리 격하니, 어쩌겠나. 자네가 도성을 떠나 주어야겠네.”

이리 나올 줄 알고 있었음에도 자현은 기가 찼다. 마지막까지 저를 이렇게 대접하는가. 백성들의 진노가 저를 향한 것이, 제가 억지로 붙여준 왕실의 애물단지 때문임을 모르느냔 말이다.

“제가 무엇을 그리 잘못하였기에 쫓겨나야 하는 겁니까.”

“쫓겨나다니…. 무슨 말이 그런가. 이민족이 판을 치는 북방지를 나라 제일의 장수인 자네가 방비해 준다면 국가의 안위에도 크게 도움이 될 터. 나라 안의 혼란은 잠재우고, 바깥의 방비를 굳건하게 만들기 위해 내린 특단의 결정일세.”

“기나긴 전쟁을 치르고 귀성한 지, 아직 한 해도 지나지 않았습니다.”

자현은 거의 으르렁거리듯 말하였다. 사지로 밀어 넣어진 지 삼 년. 전지에서 구르고 구르다 이제 막 귀국한 참이 아니냐 외치는 두 눈이 치열하다.

“선처해 주십시오.”

“민심이 저리 시끄러운데, 어거지를 부릴 셈인가!”

“백성들의 뜻에 따라 국정 일을 좌지우지하실 작정이라면, 자호가에 대한 적의는 그렇다 치더라도 조정에 대한 불신감은 어찌 처리하겠습니까. 민의에 따라 대왕께서도 저와 같이 나란히 변방에 가시겠습니까.”

이죽거리는 말에 왕의 낯이 대번 일그러진다.

“가라 하면 가고, 기라 하면 길 것이지, 이 시건방진…!”

쾅, 하고 단상을 두드리며 성마르게 토해 내는 말에도 자현은 눈 하나 깜짝 않았다.

“고위 무관의 발령은 전시가 아닌 이상 삼 년을 주기로 하는 것이 군법입니다.”

그것을 예외로 하고 저를 북방으로 차출시키려면 고관대작 삼분지 이 이상의 찬성이 있어야 할 터. 그것을 잘 아는 왕이 까득, 이를 갈며 자리한 신료들을 쏘아본다. 그에 자호가와 연이 닿아있는 관료들은 황급히 고개를 숙여 시선을 피하였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자현이 밀어붙였다.

“헛소문 따위야, 그 살인귀 놈이 잡히면 해결될 일입니다.”

“하! 누군 그놈을 잡고 싶지 않아 못 잡는다더냐! 그리고 내 듣자하니 자네는 그 살인귀를 코앞에서 놓쳤다지? 자네가 괴물에 속수무책으로 당하였다 하는 소문을 나도 들었네. 영웅이란 자도 어찌하질 못하는 것을 과연 어느 세월에 해결한단 말인가.”

악의에 찬 조롱에 자현의 낯도 일그러졌다. 왕에 대한 분노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괴물에게 제대로 대적도 못하고 허무하게 당할 뻔한 것이 저 스스로도 분하여 그런 것이었다. 자현은 주변에 모인 이들이 모두 주춤할 정도로 살벌한 얼굴을 하고서 싸늘하게 씹어뱉듯 말하였다.

“그렇기에 더더욱 떠날 수 없다 하는 것입니다. 터무니없는 괴물이 판을 치는 것을 뻔히 알면서 어찌 제가 도성을 떠날 수 있겠습니까.”

“폐하, 송구하오나 그의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누가 무어라 하더라도 그는 희란국 제일의 장수가 아닙니까. 자현조차 어찌하질 못하는 괴물을 무능한 군관들이 당해 낼 수 있을 리 없지요.”

두 눈을 매처럼 뜨고서 끼어들 기회를 살피던 한비가 이때다 하고 거들고 나섰다.

“살인귀는커녕 역적 떼도 여태껏 어찌하질 못한 군관이 아닙니까.”

그리 말하고는 왕당파에 속한 고위 무관들을 향해 힐끗 조롱하는 듯한 시선을 보낸다. 조정의 고위 군관들은 빠짐없이 왕의 사위 용후가 뽑은 인재들.

애먼 자현이 아니라 살인귀를 붙잡기는커녕 그 정체조차 밝혀내지 못하였던 무능한 자들을 좌천시켜야 하는 게 아니냐. 오히려 살인귀의 정체를 밝혀내고 목숨을 내걸고 다투기까지 한 자현에게는 상을 주어야 할 일이다. 그리 청산유수로 말하는데 기회만 엿보고 있던 다른 관료들도 옳소 하고 한마디씩 거든다. 분위기가 그리 돌아가자 으름장을 놓던 왕의 낯이 딱딱하게 굳어지었다.

“그대들의 뜻은 잘 알겠으나 성난 백성을 진정시킬 다른 방법이 없지 않는가.”

“그에 관해서는 제게 한 가지 생각이 있습니다만.”

한비의 말에 왕은 물론이고 자현마저 의아한 시선을 보내었다. 왕이 미심쩍은 얼굴로 말해보라 하자, 한비가 주름진 눈가를 초승달 모양으로 휘며 유들유들 말하였다.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 소루 공주를 왕실 사당에 머무르게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 말에 자현은 한비를 노려보았다. 다른 관료들도 술렁거리며 서로 시선을 교환한다. 그들의 반응을 살피듯 쭉 좌중을 둘러본 한비가 다시 왕을 올려다보며 말하였다.

“본디 소루 공주는 궁궐 사당에 머무르시던 분. 그분께서 사당에 계실 적에는 백성들이 이처럼 죽어 나가는 일이 없지 않았습니까. 도성 백성들이 그분께서 민가에 머물고 있기에 이런 흉사가 벌어지는 것이라 생각한다면 그분을 다시 궁궐로 불러들이면 될 게 아니겠습니까?”

“어디 말 같잖은 소리를! 출가외인이다! 시집간 지 얼마나 되었다고…!”

“출가하신 첫째 공주께서도 궁궐에 머무르는 일이 더 잦은데 무엇이 문제입니까. 이는 백성들의 안심을 위한 일입니다.”

핑계 댈 말이 궁색하여져 가륜 왕은 입을 꾹 다물었다.

소루는 본디 왕실의 사람. 그걸 자호가에 부당하게 떠넘긴 것이 가륜이니 도로 가져가라 하는 말을 거절할 명분이 없다. 그걸 잘 아는지라 더는 밀어붙이질 못한 왕이 한껏 초조한 낯을 한다.

안 될 말이다. 그 애물단지를 도로 끌어안았다가는 기껏 자현에게로 집중된 백성들의 적의가 왕실로 돌아올지 모를 일. 혹을 떼기는커녕 덧붙이게 생겼으니 물러나야 할 때인가.

그런 생각을 하며 가륜 왕은 마치 적선이라도 하는 듯한 태도로 말했다.

“일단은, 추이를 지켜보도록 하지.”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꾸어 하는 말에 자현은 헛웃음을 흘렸다. 제게는 백성들의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 불모지로 떠나라 하더니 저는 조금의 손해도 보고 싶지 않아 재빨리 말을 바꾼다.

자현은 목까지 차오르는 조롱의 말을 간신히 삼키고는 고개를 숙이며 재고해주어 감사하다 하였다. 왕이 태연히 물러가라 손짓한다. 그는 고개를 한 번 더 꾸벅하고는 뒤돌아서 성큼 대회의장을 나왔다.

복도를 뚜벅뚜벅 걷기를 잠깐, 치미는 울화를 참지 못해 그는 주먹으로 벽을 내려쳤다.

‘젠장….’

해결해보겠다고 나선 일마다 도리어 독이 되어 되돌아오고 있으니 미칠 노릇이다. 세를 키우기 위해 소루를 이용한 일이 이제 와 발목을 잡고 있고, 살인귀를 잡아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선 것이 도리어 해가 되어 돌아왔다. 그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이제는 대체 어찌해야 하나. 모르겠다. 더는 아무 생각도 안 난다.

그는 주먹을 움켜쥐며 화를 삭였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한 번 문지르고는 다시 가던 길을 가려 하는데 등 뒤에서 발소리가 들려온다. 자현은 휙 고개를 돌렸다.

“잠시 이야길 나누겠나.”

한비였다. 어느새 의장을 빠져나온 것인지 그가 복도 한편에 뒷짐을 쥐고 서 있었다.

“궁궐 안에서는 말을 주고받는 것을 조심하라 하지 않았던가?”

슬쩍 뒤를 살피며 묻자 한비가 쯧쯧, 하고 혀를 찬다.

“이미 자네와 내가 한 배를 탄 것은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이네. 이제 와 숨겨 뭣하나. 따라오게.”

그러고는 뒤돌아서 손짓한다. 눈을 가늘게 뜨던 자현은 곧 그 뒤를 따랐다.

한비는 대회의장과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한 방으로 그를 인도했다. 남구파 관료들이 회의를 마치고 저희들끼리 은밀히 의논을 하곤 한다는 비밀 회의실이었다. 그가 대여섯이 둘러앉기 적당한 크기의 탁상 앞으로 의자를 빼 앉더니 그에게도 자리를 권했다.

“예상보다도 왕의 움직임이 빨랐네. 어지간히도 자네를 치우고 싶은 모양이더군.”

자현은 의자를 빼 앉으며 삐딱하게 대꾸했다.

“그것을 이제 알았소? 이제 와 새삼스레….”

“물론, 진즉부터 알고 있었던 일이었네만 이처럼 집요하리라곤 예상 못했어.”

그가 생각에 잠긴 듯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자현은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집요하다니?”

가륜치고는 비교적 쉽게 물러나 주지 않았던가 하며 이마에 주름을 잡는데, 한비가 잔뜩 목소리를 깔고서 은밀히 말한다.

“소문이 퍼지는 속도가 지나치게 빠르다고 생각하진 않나? 분명 그 참상이 있기 전에는 자호가에 대한 원망보다는 조정에 대한 반감이 더 극심하였네. 한데 단 며칠 만에 여론이 자네에게 불리한 쪽으로 기울었어. 이는 정상적이지 않네.”

성질이 급하고 불같아 그렇지 제법 머리가 돌아가는 자현이다. 그의 말에 단박에 상황을 파악하고는 두 눈을 살벌하게 빛냈다.

“…여론을 조작했단 말이오?”

“그렇네. 왕당파 관료들의 손을 빌려 공작하였다면 진작 알아차릴 수 있었을 테지만… 환관들을 동원하여 은밀히 진행한 모양이야.”

자현은 쾅, 하고 거칠게 탁상을 내려쳤다.

“제아무리 내가 눈엣가시라도 그렇지…!”

“이렇게까지 하는 것은 이해가 안 되지.”

한비가 말을 받았다.

“자네가 급히 세력을 키우는 것이 위협적이긴 하였을 테지만, 이는 왕당파 귀족들로 하여금 견제하게 하면 될 일. 직접 손을 써야 할 만큼 자네의 행보가 불순한 것도 아닌데… 왜 이리 과민하게 구는 것인지.”

저를 두둔하는 말임에도 자현은 헛웃음을 흘렸다. 제가 불순하지 않았으면 누가 불순하였나. 스스로도 왕에게 도를 넘어서서 대들고 있다는 자각은 있는지라 그 말이 어처구니없게 들린다. 하지만 한비는 빈말이 아니라는 듯 냉정하게 말을 이었다.

“자네 같은 인간은 큰 위협이 안 되네. 자현은 도대체 뭘 숨길 줄 모르는 아니, 숨길 생각도 없는 인간이 아니던가. 세를 키우는 것조차 그리 대놓고 보란 듯이 할 정도이니 말 다했지.”

“…….”

“자네가 떵떵거리는 꼴이 거슬리고 언짢더라도 이는 천천히 견제하면 될 일. 직접 손을 쓸 정도로 큰 위협은 못 되네. 정치판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은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인간일세.”

“…당신처럼 말이지?”

“그렇네.”

비꼬는 말에 한비가 순순히 동의한다.

“자현의 성정이 불측하고 오만하긴 하네만 역심을 품을 만한 그릇은 못 되지.”

“한참 잘못 보았군. 나는 뒤집어엎을 마음 만만이오.”

“궁궐 한복판에서 겁도 없이 그런 말을 하는 인간이 말인가?”

한비가 헛웃음을 흘린다.

“어림없는 말 말게. 자네가 원하는 것은 기껏해야 대장군, 왕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을 위치 정도일세. 불같은 성정에 울컥하여 역심을 품어도 그때뿐이지, 진심으로 반역할 생각은 없지 않은가.”

“…….”

“한데, 왕이 자네에게 품은 적의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야. 도대체 왜 그렇게 못 잡아먹어 안달을 하는 것인지…. 귀신 공주를 붙여 그리 모욕을 주었으면 자네에 대한 적의도 누그러질 만도 한데, 도리어 한술 더 뜨고 있으니…. 심지어는 온 도성이 뒤집혀 그 난리인데도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이를 빌미로 자네를 좌천시키는 데에나 열을 올리고 있지를 않나.”

자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비령도 이 비슷한 말을 하지 않았던가. 한비의 눈에도 그리 비칠 정도이면 왕이 제게 품은 독기가 보통이 아니긴 아닌 모양이다.

“생각해 보면… 가륜 왕은 자네에 관해서 처음부터 과민하게 굴었네. 자네의 태도에도 분명 문제가 있었지만… 자신만만한 신출내기 무관이 어디 자현 하나뿐이던가. 왜 그리 눈엣가시로 여겨 번번이 걸고넘어지는지 나도 이해가 안 되네.”

“…그런 것치고는 짝짜꿍이 잘도 맞아 툭하면 날 물 먹이지 않았소?”

해묵은 옛일을 떠올리며 살벌하게 말하자 곰곰이 생각에 잠겨있던 한비가 하하 웃으며 대번 화제를 바꾼다.

“아무튼 지금이야 가륜 왕이 한 발 물러섰다지만 일이 해결되지 않으면 분명 또다시 자네를 걸고넘어지겠지. 어찌 대처할 텐가.”

“소루를 보낼 수는 없소.”

그는 미리 선수를 쳐 말했다. 대회의장에서 그가 소루를 궁궐로 돌려보내라 하는 얘기를 했을 때부터 반발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했던 것이다.

“그녀를 노리는 자가 한둘이 아니오. 소루를 무방비한 상태로 둘 수는 없소.”

이는 비단 사람의 이야기만은 아니었다. 제 눈으로 흉악한 요물 떼거지를 보지 않았던가. 자현은 그날 보았던 요괴를 떠올리며 턱을 꽉 조였다.

분노와 비슷한, 분노보다 좀 더 불쾌한 감정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 무지막지한 괴물 놈이 언제 또 소루를 노릴지 모르는 일. 제집 밖에 잠시도 내놓을 수 없다.

“나도 찬성일세. 왕이 물러서게 하기 위해 그리 제안했지만, 정말로 왕실로 보내라 할 생각은 애초에 하지 않았네. 가륜 왕의 손에 공주를 넘길 수는 없는 일이지.”

의외의 대답에 자현은 의심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뱃속이 시커먼 인간이 웬일이냐 하는 눈길에 한비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는다.

“내가 비령처럼 그녀를 도성 밖으로 내보내라 할 줄 알았나? 나는 애초에 그 의견에 반대였네. 다소의 불이익을 무릅쓰고라도 소루 공주는 자네가 직접 보호하고 있는 편이 나아.”

“…소루의 안전을 걱정하는 것은 아닐 테고… 대체 뭐가 낫다는 거지?”

“자네의 세를 유지하는 일 말일세.”

한비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난 소루 공주의 영험함을 직접 체험한 사람이야. 그녀의 쓸모는 자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일세. 그 힘이 다른 이의 손에 들어가는 것만큼은 경계해야 하네.”

“나는… 소루에게 더는 사람을 치료하게 할 생각이 없어.”

“그렇다고 하더라도 분명 유사시에는 큰 도움이 될 테지. 예를 들어… 자네가 죽을 위기에 처하였을 때나 당장 자네 주변의 누군가가 숨이 넘어가기 직전에 놓였을 때….”

뱀 같은 미소를 지으며 한비가 요사스럽게 웃었다.

“그 손에 자그만 생채기 하나를 허락 못하겠는가.”

그는 바로 얼마 전에 있었던 전투를 떠올렸다. 요괴들에게 당해 피 흘리며 신음하는 집안 무인들을 소루의 피로 치료해 줬던 일을. 아무 말 못 하고 있는 그에게 한비가 묵직하게 가라앉은 어조로 말한다.

“내가 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생각하는 방안은 소루 공주를 떨쳐내라 하는 가벼운 것이 아닐세.”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리 사설이 긴가.”

“정말로 역모를 저지를 생각은 없나.”

대범하기 그지없는 자현도 그 발언에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깡마른 노인의 얼굴을 보며 눈을 깜빡이길 몇 차례 그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런 농담을 다 할 줄 아셨나.”

“농이 아닐세. 이미 상당수 관료들이 왕에게 뒤돌아섰어. 원래가 독선적이고 감정 기복이 심한 자라 알게 모르게 불만을 품은 이들이 많았는데… 거기에 이번 대로에서 있었던 참사까지 더해졌지. 왕의 폭언에 시달릴 대로 시달린 여러 관료들이 아주 마음에 독을 품었어. 무엇보다… 군관들의 불만이 실로 대단하지. 전지에서 공을 세워 왔음에도 제대로 된 포상은커녕 그 공마저 무능하기 짝이 없는 왕의 인척들에게 빼앗긴 장수가 태산이 아니던가. 거기에 고위 무관 자리는 첫째 공주의 남편 용훈이 꽉 틀어쥐고서 용호가의 사람으로만 채워 넣고 있으니, 제아무리 출중하여도 출세할 길이 없지. 자네조차도 그 대접을 받는 판이 아닌가.”

“…….”

“거기에 역적 떼들도 못 잡는다, 흉악한 놈도 못 잡아들인다, 욕에 욕을 먹고 있는 상황. 젊은 무관들의 불만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일세. 아마 현 조정에 대한 반감은 자네 못지않을 게야.”

굳은 얼굴로 조용히 듣고 있던 자현이 입을 뗐다.

“군을 선동하여 모반이라도 벌이란 말이오?”

“무능하고 존재감 없는 왕자들, 영문을 알 수 없는 증오에 사로잡혀 도의를 저버리고 있는 왕, 사치스러운 공주들,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 부마(駙馬)…. 명분은 충분하네만.”

“…당신 속이 시커먼 것은 진즉에 알고 있었지만.”

자현은 기가 찬 얼굴로 중얼거렸다.

“설마 왕좌도 탐을 내고 있는 줄은 몰랐군.”

“왕이 되는 것은 자네일세.”

자현은 코웃음을 쳤다.

저를 꼭두각시 세워놓으려는 줄 내가 모를 줄 아나.

그는 두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고는 이죽거렸다.

“우리가 한 배를 타게 되었다고 해서, 내가 당신을 믿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날 이용하려는 생각이거들랑 집어치우시오.”

“자네가 어디 남의 뜻대로 되는 사람이던가. 다루기에는 가륜 왕이 자네보다는 낫지. 가륜은 단소리라도 먹히는 사람이잖나.”

겁도 없이 그런 불경한 소리를 내뱉은 한비가 이내 한숨을 푹 내쉰다.

“나에게 있어서도 이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야. 이미 나는 왕의 눈 밖에 단단히 난 처지일세. 이런 상황에서 자네가 변방으로 좌천되어 버리면 나나 자네를 편들었던 다른 관료들은… 끈 떨어진 뒤웅박 신세가 되지.”

“…….”

“다들 그런 위기의식을 느끼고 이미 여러 차례 의견을 주고받았네. 가륜 왕은 실로 의심이 많고, 거만하며, 용서를 모르는 인물일세. 한 번 돌아선 이를 다시 포용해 줄 그릇이 절대 아니지. 자네가 실각하면 우리도 줄줄이 축출될 테지. 그리 허무하게 몰락하느니….”

모시는 군주를 치겠다, 이 말인가.

자현은 심각하게 미간을 모았다. 비령과 있을 적에 뒤집어엎는다느니 일을 칠 거라느니 별별 소리를 다 하였으나 한비의 말대로 저 스스로 왕이 되겠다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다. 갑작스러운 그 제의가 피부에 확 와 닿지 않는다. 그런 당혹감을 느끼었는지 한비가 한숨을 푹 내쉰다.

“왕과 대적하는 처지에 온갖 귀족들을 끌어들였을 때는 그만한 각오는 했어야지.”

“…….”

“아무튼 생각해 보게. 일단 시간은 벌어 놓았으니….”

자현은 냉큼 그러마 하지도 못하고, 헛소리 말라 일갈하지도 못하고 촛불에 붉게 물든 그 마른 얼굴을 가만 노려보기만 했다. 두 눈이 신중하기 그지없다. 어디까지가 진심인지는 알 수 없으나….

‘왕… 이라.’

그 말이 묘한 여운을 주며 뇌리를 울렸다.

***

자현과 한비가 만나 은밀히 이야기를 주고받더라 하는 말을 전해 들은 가란은 심각하게 얼굴을 굳혔다.

그녀는 최근 관료들의 동향이 심상치가 않다는 사실을 진작부터 알아차리고 있었다. 듣기로는 북구파 관료들과 한비를 주축으로 한 남구파 관료들이 자주 은밀한 회담을 가지고 있었고, 심지어는 젊은 무관들마저도 이들과 접촉하기 시작했다.

대체 모여앉아 뒤로 무슨 말을 주고받는 것인가.

성 안팎으로 왕실에 대한 불만이 알게 모르게 쌓여가는 이 상황에 신료들이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니 마음이 몹시도 불안하였다.

‘그 약삭빠른 노인네가 자현을 무슨 말로 부채질을 했을지….’

그녀는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가륜은 아직 깨닫지 못한 모양이었지만 그는 지금 상당히 정치적으로 고립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민심이 왕실을 떠난 지 오래였고 왕당파 귀족들마저도 상당수 등을 돌렸다.

그들을 살살 달래고 구슬려도 모자랄 판에 매일 역정을 내시어 그나마 곁에 남은 이들도 언제 뒤돌아설지 모르는 판이다. 이 와중에 적대적인 세력들에게 구심점이 되어줄 인물이 생긴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상상만으로도 눈앞이 캄캄하였다.

‘일단, 아바마마를 설득해야….’

상황이 이러하니 부디 마음을 누그러뜨리시고 신하들을 포용하십시오, 자현과도 그만 화해를 하십시오, 하고 간언을 드려 보는 거다.

완고한 부친의 얼굴이 떠올라 망설여졌지만 무엇이든 하지 않고서는 불안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가란은 한참의 고심 끝에 마음을 다잡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바마마께 가보려고 한다. 채비를 해다오.”

“…알겠습니다, 마마.”

시녀들이 재빠르게 옷차림과 머리를 손질해 준다. 붉은 비단 장의를 어깨 위에 걸친 뒤 방을 나왔다.

반주라도 챙겨 들고 가 애교라도 부려 볼까. 그리하면 설득하기가 조금 쉽지 않겠는가 하며 그녀는 시비에게 좋은 술을 챙기게 하였다. 그런 뒤에는 미모가 빼어난 시녀들 다섯 명을 골라내어 뒤를 따르라 명했다.

“나라 안에 끔찍한 일이 연이어 터졌는데… 괜히 트집 잡힐 수 있다. 조용히 따라오거라.”

“네, 마마.”

제가 머무는 별궁은 본궁과 조금 거리를 두고 있는 터라 다른 이들의 눈에 띌 리는 없을 테지만 혹 모른다. 백성들은 비탄에 빠져 있는데 왕께서는 궁녀들을 데리고 술을 즐기고 계시더라 하는 말들이 오갈 수 있는 일.

그녀는 혹시라도 신료들과 마주칠까 하여 호롱불도 들지 않은 채 본궁으로 조용히 들어섰다. 그녀를 본 호위병들이 화들짝 놀라 급히 허리를 굽힌다. 가란은 그들에게 고개를 한 번 까딱하고는 곧장 부왕의 사실로 향했다. 그녀를 본 환관이 반색을 표했다.

“공주마마, 오랜만에 발걸음을 하셨습니다.”

“최근 아바마마께서 안 좋은 일이 많아 골머리를 앓고 계신다고 들었다. 위로를 드리고 싶어서 찾아왔다.”

시녀들이 들고 있는 술과 악기를 가리키며 말하자 그가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마침 잘 되었습니다. 지금 폐하께서 기분이 많이 좋지 않으십니다. 공주마마께서 얼굴을 내비치시면 기분이 풀어지시겠지요. 제가 가서 오셨다 고하고 오겠습니다.”

“아니다.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다. 오랜만에 아바마마를 놀래켜 기쁘게 해드리고 싶구나.”

화사한 미소를 머금고서 그리 말하니 환관이 반쯤 녹아내리며 예에, 그러십시오 한다.

그녀는 성큼 문 안으로 들어갔다. 기나긴 복도와 그 안측에 자리한 커다란 문이 눈에 들어온다. 그녀는 그리로 자박자박 걸어가 문고리를 잡았다. 막 목을 가다듬고 제가 왔습니다 하고 이르려는 순간 안에서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럼 이대로 놈을 놔두어야 한다는 거냐!”

그녀는 불에 댄 듯 화들짝 문고리를 놓았다. 안에서 탕탕, 하고 주먹으로 무언가를 내려치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자현 놈을 좌천시키기는커녕 되레 귀신 공주를 돌려받을 판이지 않느냐!”

공교롭게도 자현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어째야하나 잠시 망설였다. 제게만은 누구보다 다정한 아비이니 얼굴을 내비치면 분명 금세 기분이 풀어지실 것이다. 하지만 저리 펄펄 뛰는데 거기다 대고 자현의 이야기를 꺼낼 수 있겠나. 그녀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안에서는 대화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폐하, 도성에서 시체가 한 번 더 나오면 그때에는 자현도 버틸 수 없을 것입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언제 다시 사고가 터질 줄 알고! 놈이 비록 살인귀를 놓쳤다고는 하나 거의 다 잡을 뻔하다지 않느냐! 다음에는 정말로 붙잡아 올지도 모른다. 그리 되면 천하 만민이 그놈을 떠받들 터인데…!”

“제, 제아무리 자현이라고 해도 설마 요물을 어쩌겠습니까.”

“네놈은 모른다! 자현이 어떤 놈인지! 수십 배의 병력 차를 꺾고 승리하여 적장의 목까지 베어온 놈이다. 귀신 공주를 붙여 놓아도 죽기는커녕 되레 가문의 세를 키운 놈이야! 이번에도 분명…!”

“폐, 폐하, 고정하십시오. 다음번에는 놈도 버티지 못하고….”

“그다음이 대체 언제냔 말이다! 그 귀신 놈이 영영 나타나지 않으면 영영 다음은 없는 것이다! 그리 되면 자현을 욕하던 소리도 잠잠해지고 말 터! 어리석은 것들이 또다시 영웅 자현이라 떠들어대겠지! 그 전에, 그 전에 어떻게든… 어떻게든 해야 한다.”

왕의 초조한 목소리에 간이 서늘해져 가란은 문에서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늘 위풍당당하던 부왕의 음성이 마치 궁지에 몰린 사람의 것처럼 들려왔다.

“그래… 손을 써야 해. 내가 직접… 그러지 않으면 놈이….”

그 음산한 중얼거림을 마지막으로 가란은 황급히 뒤돌아섰다. 사색이 되어 머리를 푹 숙이고 있는 시녀들에게 상황이 좋지 않으니 돌아가자 하고 눈짓하고는 황급히 그 자리를 떠났다.

문을 지키는 환관이 왜 그냥 가시냐며 붙잡는다. 가란은 바쁘신 듯하여 떠난다, 제가 왔다 간 사실은 알리지 마라 신신당부한 뒤 후다닥 본궁을 나왔다.

“마, 마마 괜찮으십니까….”

“안색이….”

뒤를 쫓으며 시녀들이 걱정스러운 듯 묻는다. 그녀는 대꾸도 않고 별궁을 향해 도망치듯 걸음을 옮겼다. 심장이 불안으로 쿵쿵거렸다.

왕께서 자현을 눈엣가시처럼 여긴다는 사실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으나 저리 맹목적인 적의를 품고 계셨나.

‘마치… 지난번과 같은 참상이 또다시 일어나길 바라고 계신 것 같지 않나.’

심지어는 혹시라도 자현이 그 살인귀를 처단할까 두려워하는 듯하였다. 가란은 떨리는 손으로 입가를 감쌌다.

자현만 내쫓을 수 있다면 백성들은 죽든 말든 상관없다는 뜻인가. 비록 자애로운 군주는 아니시지만 그래도 백성과 나라를 사랑하는 분이셨다. 어쩌다 저리 강퍅해지셨나.

‘초, 초조하셔서 그러신 거다…. 마음에 여유가 없어 그러시는 거야….’

그녀는 필사적으로 아비를 위한 변명거리를 찾았다. 민심이 떠나가고 역모까지 벌어지는 등 올해 흉한 일이 얼마나 많았나. 그 와중에 자현이 세를 키워 위협해 오니 심정적으로 궁지에 몰리셔서 눈이 잠시 어두워진 것뿐이야.

‘여유를 찾으시면… 다시 돌아오실 거다.’

필사적으로 마음을 추스른 가란은 거처로 돌아와 시비들에게 오늘 들은 이야기를 발설했다간 목숨이 성치 못할 줄 알라 으름장을 놓았다.

시비들이 사색이 되어 납작 엎드린다. 그 모습을 무서운 눈길로 내려다보다 곧 몸을 돌려 침실로 뛰어 들어갔다. 머릿속이 온통 복잡하였다.

이제는 대체 뭘 어찌해야 하나.

‘…자현과 먼저 이야기를 해볼까.’

일전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 저를 보던 자현의 차가운 눈빛을 떠올리며 가란은 낯빛을 흐렸다.

마음이 단단히 식은 듯한데 과연 제가 말한다고 듣겠는가.

‘잘 설득하면….’

그래,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리 쉽게 돌아서던가. 비록 아비 때문에 화가 나 있지만 나에 대한 마음은 아직 남아 있을 것이다. 비록 이리 엇갈려 버렸지만 본래라면 진짜 아내가 되어야 할 사람은 자신이 아니던가. 자현도 그리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걸 아쉽게 느끼고 있을 게 분명해.

‘그래… 일단은 그 사람의 마음부터 돌려보자. 내가 말하면 들을 거야.’

그 사람의 태도가 누그러지면 왕께서도 마음을 푸실 것이다.

부친의 격노에 찬 음성이 귓가에 아른거렸지만 가란은 필사적으로 스스로를 설득했다.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해봐야 한다.

그녀는 굳은 결심으로 눈을 빛냈다.

***

한비가 제안한 일에 관해 상의하려고 비령을 찾았지만 놈은 하루 종일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았다. 약에 쓸래도 쓸 수 없는 놈이다 하고 구시렁거리며 자현은 서재를 나왔다.

‘어차피 또 그 빌어먹을 법령사 놈들과 붙어 있겠지.’

무슨 꿍꿍이인지 비령은 법령사들과 함께 요괴의 행방을 뒤쫓고 있었다. 당연히 정의감에 불타 그리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 상황을 타개하려면 역시 그 요괴 놈을 없애야 한다. 그래야 자호가의 명성이 다시 살아날 게 아니냐 하는 다분히 계산적인 속셈 때문이었다.

‘…과연 뜻처럼 될까.’

그날 보았던 요괴의 모습을 떠올리며 자현은 냉소했다.

대체 무슨 방법으로 놈을 죽이겠다는 건가. 저조차도 그 손에 거의 죽을 뻔하지 않았나. 그리 자신만만하게 굴던 법령사들도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퇴마는 고사하고 놈을 찾아낼 방법조차 없을 것이다.

‘설마… 또 소루를 이용해 그 괴물을 불러낼 셈은 아니겠지?’

자현은 살벌하게 얼굴을 굳혔다.

어림도 없는 일이다. 그날 겁 없이 요괴의 앞으로 걸어가던 소루의 모습만 떠올리면 자다가도 경기가 났다. 요괴가 물러났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정말로 죽었을 것이다.

손가락 하나 안 다치게 하겠다, 지켜주겠다, 큰소리를 쳐놓고는 그런 위험에 노출시켰다. 두 번 다시 소루에게 상관하도록 두지 않을 것이다.

그는 턱을 단단히 조였다.

‘요괴고 뭐고… 아무래도 좋아. 더는 엮이지 않겠다.’

뇌리를 맴도는 요괴의 얼굴을 떨쳐버린 자현은 제 방으로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다.

이미 자정을 훌쩍 넘어 사위는 어둠에 잠겨 있었다. 힐끔, 소루가 있는 옆방을 한 번 살핀 뒤 제 방 문고리를 잡았다. 혹시라도 깨울까 싶어 조용히 안으로 들어가려 인기척을 죽이는데 드르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소루가 반쯤 열린 문 사이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자현.”

“…아직까지 안 자고 뭐 하는 거냐.”

“할 말이 있어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막 침상에서 일어난 것인지 여자는 얇은 속치마에 덧옷 한 장을 어깨 위에 덜렁 걸치고 있었다. 사내 앞에 그리 무방비하게 나온 꼴이 못마땅하다.

부주의한 계집 같으니라고.

그는 속으로 중얼거리고는 무뚝뚝하게 내뱉었다.

“시간이 늦었다. 내일 이야기하지.”

그러고는 휙 몸을 돌리자 여자가 화들짝 제 옷자락을 움켜쥔다.

“매일 그럴 새도 없이 나가질 않느냐.”

“…….”

“잠시면 된다.”

그냥 뿌리치고 들어가 버리면 될 일인데 어찌 된 영문인지 다리가 얼어붙어 옴쭉도 하지 않았다. 자현은 인상을 쓰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소루는 그 언젠가 제 곁에 머물게 해달라며 매달렸을 때처럼 간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결국 뿌리치지 못하고 몸을 바로 세웠다.

“…말해봐라.”

“그 이후로… 야토가… 또다시 나쁜 일을 벌이진 않았느냐.”

어물거리면서 묻는 말에 자현은 인상을 굳혔다. 짜증이 울컥 치밀고 올라왔다. 그 일 이후 여자가 안절부절못하면서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진 않았는지 수시로 묻고 다니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바보 같은 계집이 터무니없는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도. 그 꼴을 보면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라 요 며칠간 계속해서 그녀를 피해온 게 아닌가. 그는 휙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는 사납게 쏘아붙였다.

“기껏 그런 걸 물으려고 이 야밤까지 기다린 건가? 쓸데없는 일에 신경 소모하지 말고 잠이나 자라!”

“어, 어찌 쓸데없는 일이라 하느냐!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이대로 내버려두면 야토가 또다시….”

“내버려두지 않으면 어쩌겠다는 거냐.”

싸늘하게 내뱉는 말에 여자가 마른침을 삼킨다.

“내가… 뭔가 할 수 있는 게 있을 거다. 나를 법령사에게 데려가 다오. 야토를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그는 쾅, 소리가 나게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고는 여자의 팔을 거칠게 잡아당겨 그의 방 안으로 끌어당겼다.

창문에서 쏟아지는 달빛에 여자의 놀란 얼굴이 파리하게 보인다. 그는 휘청거리는 소루를 벽으로 밀어붙이며 사나운 눈길을 던졌다.

“가서… 또 미끼 노릇이라도 하겠다는 거냐?”

“나, 나는….”

부서질 듯 야윈 어깨를 움켜쥔 손에 꽉 힘을 주며 씹어뱉듯 말하자 여자가 겁먹은 것처럼 목을 움츠린다. 그는 주먹으로 쾅, 벽을 내려쳤다.

“아니면 놈의 손에 죽기라도 하려고? 정말로 그 괴물에게… 잡아먹히고 싶어서 그러는 거냐?”

“하지만… 뭐, 뭐라도 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목숨을 잃게 될 거다. 또 나 때문에… 나는 더 이상 누구에게도 해가 되고 싶지 않다. 더는… 견딜 수 없어. 차라리 내가….”

그녀의 얼굴이 울음으로 일그러졌다. 무겁게 아래로 떨구어지는 자그만 머리통을 그는 무자비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치밀고 올라온다. 무언가 심한 말을 해대고 싶어서 목울대가 부풀어 올랐다.

왜 너는 조금도 스스로를 보호하려고 하지 않는 거냐. 그 누구도 너를 지켜주지 않는데. 온 천지에 너를 이용하려는 이, 해하려는 것들뿐인데. 저 스스로라도 자신을 지키려 안간힘을 써야 하는 게 아니냔 말이다.

“잡아먹히기를 원하였다.”

소루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그는 이를 악물었다. 많은 것을 체념하고 살아온 이 여자가 가여우면서도 밉다. 안쓰러운 마음이 들면서 동시에 화가 치민다. 도무지 스스로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는 그녀에게서 한 발짝 떨어지며 잔뜩 꽉 잠긴 음성으로 말하였다.

“잘 들어라.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너 때문이 아니야.”

“…….”

“그 요괴 놈이 무슨 짓을 저지르고 다니든, 네 탓이 아니다. 너는 할 만큼 했다. 더는 그 일에 신경 쓰지 마.”

“하지만…!”

“이건 명령이다. 놈들 때문에 충분히 더러운 꼴을 보았어. 더는 엮일 생각 없다. 더는… 그런 헛소리로 귀찮게 하지 마라.”

그러고는 무언가 말하려는 그녀를 잡아당겨 가차 없이 제 방 밖으로 내보낸 뒤 문을 닫아걸었다.

여자가 그 앞에 덩그러니 서서 한참 동안 미동도 하지 않는다. 그런 행동 하나하나가 다 짜증스러웠다.

미련스러운 여자. 바보 같은 여자. 차라리 제 거친 행동에 화라도 내면… 이런 기분이 들지는 않을 텐데.

그는 문에 머리를 기대며 욕설을 삼켰다. 그 얼굴만 보면 가시 돋친 말들만 쏟아져 나온다. 때때로 잔인하게 상처 주고 싶은 충동마저 느꼈다. 스스로도 이해할 수가 없다.

이렇게나 몸서리치게 싫은 여자를 보호하려고 하는 이유는 무언가. 그녀를 이용할 수도 없고, 이용당하게 둘 수도 없다. 누군가가 다치게 만드는 꼴도 볼 수 없다.

‘난 대체 저 여자를 어쩌고 싶은 거지?’

무력한 눈으로 문 앞에 선 희미한 그림자를 노려보던 자현은 손을 들어 올렸다. 무의식중에 그림자의 선을 매만지는데, 불현듯 그녀를 향해 손을 뻗던 요괴의 모습이 떠오른다.

“네 얼굴을… 만져 보고 싶다.”

저를 향해 손을 뻗어오던 소루의 얼굴도 떠올랐다. 불가사의한 감정이 밀려든다. 가슴이 답답해져왔다.

아니, 더 이상 생각하지 말자. 더는 상관하지 않기로 하지 않았나. 저 여자도 관련시킬 생각이 없다. 만약 그 괴물이 또 다가오면 그때는 정말로 이 손으로 죽이면 그만이다. 오지 않는다면 내버려 두면 된다.

그 괴물 놈이 저 밖에서 무슨 짓을 하고 다니든 상관없어. 그 밖에 심사숙고해야 할 일이 태산이었다.

그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한 손으로 감싸며 침상에 몸을 뉘었다. 하지만 어수선한 마음이 좀처럼 가라앉지를 않아 그는 늦게까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

며칠 뒤 또다시 대로변에서 가슴이 갈라진 시체가 발견되었다. 허름한 옷을 걸쳐 입은 젊은 여인이 칼로 도려낸 듯 활짝 벌려진 흉부를 고스란히 드러낸 채 길바닥 한가운데에 널브러져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심장은 보이질 않았다.

그 참혹한 모습을 본 사람들은 광분했다. 꾹꾹 눌러두었던 공포심에 불똥이 튄 격이다. 팽배했던 불안이 기어코 폭발하여 대로변에 몰려온 인간들은 대번 자호가의 대문으로 우르르 몰려가 농성을 시작했다.

“도성 백성 다 죽어야 성이 차느냐! 어서 귀신 공주를 쫓아내라!”

그리 외치는 소리가 어찌나 우렁차고 사납던지 집 안에 얌전히 앉아 있던 소루의 귀에까지 쩌렁쩌렁 들려왔다. 창가에 앉아 볕을 쬐던 소루는 놀라 고개를 쳐들었다.

“…이게 무슨 소란이냐.”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마님.”

염이가 급히 일어나 창문을 닫는다. 그 손을 소루가 붙잡았다.

“밖에 무슨 일이 있는 것이지?”

“아, 아닙니다! 수, 술에 취한 이들이 소란을 피우나 봅니다.”

염이가 어설픈 거짓말로 둘러대었다.

소루는 입술을 깨물었다. 얼핏 들려오는 소리만으로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또다시 흉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래서 노한 이들이 제게 원망을 퍼부으러 온 거야.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기를 잠시 그녀는 만류하는 염이도 뿌리치고는 방에서 나왔다. 곧장 정원으로 나가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걸음을 옮기니 그들의 말이 좀 더 분명하게 들려온다.

“그년 때문에 다 죽게 생겼단 말이다! 이대로 둘 것이냐! 이 집 주인을 불러오라!”

“귀신 공주가 애먼 사람 다 잡아먹어야 직성이 풀리는가! 그년이 사라져야 나라가 조용해진다.”

악에 받친 외침에 소루는 몸을 떨었다.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다 바닥에 있는 조약돌을 밟고 휘청하였다. 기우뚱하며 엉덩방아를 찧기 직전 등 뒤에서 커다란 손이 어깨를 꽉 붙들어 온다.

“왜 나와 있는 거냐.”

머리맡에서 들려오는 싸늘한 음성에 소루는 어깨를 움츠렸다. 무뚝뚝한 손길로 제 몸을 돌려 세운 자현이 매몰차게 말했다.

“당장 방으로 돌아가!”

“하, 하지만… 자현, 밖에….”

“어서 안으로 데려가지 않고 뭣 하나!”

“예, 예에….”

그가 소리치자 뒤따라 나온 염이가 급히 팔을 붙든다.

소루는 와락 그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나, 나 때문이잖느냐. 내가… 내가 나가겠다.”

“나가서 뭘 어쩌겠다는 거지?”

채찍처럼 울리는 말에 소루는 목을 움츠렸다. 그가 바로 코앞에서 싸한 숨을 내뱉으며 으르렁거리듯 말하였다.

“네가 대체 뭘 할 수 있다는 거냐.”

소루는 아무런 대답도 못 하고 입술만 달싹였다. 서릿발 같은 말에 손발이 달달 떨린다. 그것을 감추려고 양손을 꾹 맞잡았지만 떨림은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그것을 보았는지 자현이 머리맡에서 짧은 욕설을 내뱉는다.

“당장 집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라.”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를 싹 무시하고는 그가 염이에게 명령했다.

“예, 예에… 마님, 이리로 오셔요….”

“자, 잠시만…!”

자박자박, 멀어지는 그의 뒤의 옷자락을 한 번 더 움켜쥐었지만 그가 거칠게 그 손을 뿌리친다. 그러고는 곧장 소란이 벌어진 곳을 향해 성큼성큼 나아갔다.

소루는 더는 붙잡지 못하고 망연히 서서 그 발소리를 듣고만 있었다. 보다 못한 염이가 강하게 제 팔을 잡아당긴다.

“마, 마님, 그만 안으로 들어가세요. 이러고 계시면… 제가 나중에 주인 나리께 혼이 나요.”

울먹이며 하는 말에 결국 고개를 떨구며 염이의 뒤를 따랐다. 하지만 온 신경은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되어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덜컥 겁이 났다.

혹, 성난 누군가가 그를 해치기라도 하면 어쩌지. 나 때문에 다치기라도 하면….

언뜻 그를 향해 퍼부어지는 욕설이 들려온다. 치맛자락을 움켜쥐며 소루는 눈물을 삼켰다.

결국 나 때문에 그도 곤혹을 치르게 되는구나.

조르는 게 아니었다. 곁에 있게 해달라고 매달리는 게 아니었다.

‘재수 없는 계집을 떠맡아 험한 꼴을 겪는다 생각하겠지….’

집안에 화가 될 것이 뻔한 계집, 끼고 살고 싶지 않다 하였다. 그런 그에게 네게 아무런 해가 가지 않도록 하겠다며 매달렸다. 제가 그랬다.

소루는 질끈 눈을 감았다. 후두둑 눈물이 떨어진다.

대체 내가 뭘 할 수 있다고 그런 허언을 하였을까.

“마, 마님, 많이 놀라셨죠? 주인님께서 잘 타일러 돌려보내실 거예요. 걱정 마세요.”

우는 것을 보았는지 염이가 걸음을 멈추며 서툴게 달랜다. 소루는 암말도 못하고 고개를 흔들기만 하였다. 결국 그의 말대로 되었다. 저는 화밖에 되지 않는다. 요괴에게 죽임을 당할 뻔한 것도 모자라 이런 일까지 겪게 되었으니 얼마나 억울하고 분할까.

‘나를 어디 멀리 보내도 된다고….’

그리 말해야 옳다. 더는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 어디로든 보내다오, 낯이 있다면 그리 말해야 한다.

제 존재는 분명 계속해서 그를 곤경에 빠뜨릴 것이다. 아무리 손가락을 찔러 피를 내어도 제가 우환거리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눈물이요 근심이라던 그 이름처럼 곁에 있는 이를 불행하게 만들고야 마는 숙명이 제 어깨에 지워져 있는 것이다.

그녀는 흐느낌을 삼켰다. 어둠 속에서 뻗어오던 검은 손이 떠오른다. 그 손을 제가 잡았다. 저 자신이 이미 귀에 속한 존재였다.

그저 그곳에 있다는 것만으로 불화를 낳는 나는 귀신 그 자체다.

‘그래도… 조금만 더….’

곁에 있고 싶다. 떠나라 할 때까지. 지긋지긋하다, 더는 못 견디겠다, 눈앞에서 사라져라 할 때까지. 하루라도 더, 한시라도 더, 그의 곁에 머물고 싶다.

소루는 어깨를 다독여주는 염이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눈물을 떨구었다.

***

자현은 손쉽게 성난 군중을 압도해 버렸다. 자현이 어디 보통 인물이던가. 희란국 왕조를 통틀어 가장 대가 세기로 유명한 가륜 왕 앞에서도 위세 등등하고, 적지 한복판에서도 겁 없이 날뛰는 인간이다.

저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이들 백이 몰려오든 천이 몰려오든 기가 죽을 리가 없다. 그는 바글바글 몰려온 인간들 앞에서도 조금의 움츠러듦 없이 남의 집에서 이게 웬 소란이냐 일갈하였다.

그 당당하다 못해 위압적인 태도에, 기세등등하던 인간들이 자라처럼 목을 움츠린다. 자현은 그 꼴을 살벌하게 노려보며 한 번 더 일갈했다.

“썩 물러가라!”

“그, 그년을 도성 밖으로 내보낸다 하기 전까지는 떠날 수 없습니다!”

맨 앞줄에 서 있던 곰처럼 험상궂은 얼굴의 사내가 용감하게 외쳤다.

“나으리께서는, 귀신 공주가 온 도성에 이 같은 화를 불러일으키고 있는데 모른 척하시려는 겝니까!”

“살인귀가 날뛰는 것이 왜 소루의 탓이지?”

“귀, 귀신 공주의 탓이 아니면 누구의 탓이오!”

“날뛰는 귀신의 탓이다.”

자현은 가슴께에 팔짱을 끼고서 당연하지 않냐는 듯 고개를 쳐들고 말했다.

“날뛰는 귀신을 막지 못하는 무능한 조정의 탓이다!”

그리 포효하며 손가락으로 궁성을 가리켜 보인다.

“그 외에 누구의 탓이냐! 내게 와 따질 배짱과 기력이 있으면 궁궐로 가라! 거기 가서 해결해달라 하란 말이다.”

“채, 책임을 전가하시는 겝니까!”

“책임?”

위험스레 높아진 언성에 사내가 커다란 몸을 웅크린다. 자현이 그리로 한 발짝을 내디디자 주위에 우글우글한 인간들이 본능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눈앞에 있는 것이 사람이냐 불야차냐. 크고 훤칠한 몸을 곧게 펴고서 시퍼렇게 타오르는 두 눈으로 이글이글 노려보는데 그 심상치 않은 기백에 질려 모인 이들이 일제히 숨을 죽인다.

“나와 내 집안에 대체 무슨 책임이 있다는 것이지? 내가 무고한 이들을 죽이기라도 했단 말이냐.”

“그, 그런 말이 아니오라….”

“소루가 도성을 떠난다고 그 살인귀가 얌전해지리라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놈은 제가 좋아서 사람을 죽이고 다닐 뿐이야! 엄한 데 와서 행패 부리지 말고 시간이 남아돌면 궁성에 가서 해결해 달라 외쳐라! 아니. 그리 피가 끓는다면 직접 그 요괴 놈을 잡아 해치우는 것은 어떤가!”

“저, 저희 같은 양민 놈들이 어찌….”

다들 슬금슬금 발을 빼며 서로 눈치만 본다. 인간 백을 한꺼번에 잡아먹을 정도로 무지막지한 요물을 제 놈들이 어쩐단 말인가. 그런 비굴한 얼굴들을 내려다보며 자현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래. 무지막지한 요괴와 싸우느니 힘없는 여인에게 와 행패를 부리는 것이 속 편하고 쉽겠지.”

“저… 저자도 귀신 공주에게 홀린 것이다!”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군중 속에서 누군가가 손가락을 들고 외치었다. 자현은 소리가 난 쪽을 향해 무섭게 눈을 부라렸다. 그러고는 으득 이를 갈며 그리로 저벅저벅 걸어나갔다. 사람들이 위축되어 절로 길을 터주었다.

“귀족의 집에 찾아와 이 같은 소동을 벌인 것만으로 경을 칠 일인데, 지금 내게 손가락질을 한 것이냐?”

사내가 그 무시무시한 기세에 도망칠 생각도 못 하고 주춤주춤 뒷걸음질만 친다. 그걸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던 자현은 뒤에서 떡 버티고 서 있던 수하들에게 손짓을 하였다.

그러자 무관들이 달려가 단박에 사내를 바닥에 내리누른다. 사람들은 느닷없이 벌어진 일에 우왕좌왕 흩어졌다. 개중에 몇몇은 혹시나 불똥이 튈까 허둥지둥 자리를 떠버리기까지 했다.

“다시 한 번 말해 보라. 내가 뭣에 홀렸다고?”

그러거나 말거나 자현은 무릎을 꿇린 사내에게 잇새로 살벌하게 내뱉었다. 사내가 허옇게 질려 오돌오돌 떤다. 그 모습을 서슬 퍼런 눈으로 내려다보던 자현은 고개를 들어 좌중을 훑었다. 시선을 받은 이들이 허겁지겁 고개를 숙인다.

그새 이미 많은 이들이 도망하여 겨우 삼십여 명 남짓 남아 있었다. 그 무력한 얼굴들을 하나하나 주시하며 자현은 잇새로 살벌하게 내뱉었다.

“또다시 내 집 앞에 와 이런 행패를 부리면 깡그리 관군에 넘기겠다. 두 번은 봐주지 않아! 썩 물러가라!”

그가 손을 휘젓자 사람들이 마치 바퀴벌레처럼 허둥지둥 흩어진다. 저승사자처럼 우뚝 서서 그 꼴을 지켜보던 자현은 곧 몸을 돌려 집 안으로 들어갔다.

***

소동은 그렇게 일단락되는 듯하였으나 이 일로 자호가에 대한 평판은 땅에 떨어졌다.

장안에는 영웅도 귀신에게 홀려 제정신이 아니다 하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설상가상 문하생들마저 하나둘 짐을 싸들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이 집 안에 있으면 귀신에게 심장을 뺏긴단 소문이 파다하던 차에 자호가에 발을 담그고 있단 이유로 온갖 악담을 다 듣고 있으니 어디 사기(士氣)가 생기겠는가. 마음이 꺾인 이들이 하나둘 떠나 며칠 새 바글바글하던 문하생의 수는 절반가량으로 줄어들었다.

이렇듯 가세가 기울어져 가는 것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가륜 왕은 또다시 자현을 궁궐로 불러들였다.

“더는 도성을 어지럽게 하지 말고 떠나라.”

일방적인 통보에 자현은 꽉 주먹을 틀어쥐었다. 자현에게 악감정을 품고 있는 이들마저 가세해 언제까지 시끄럽게 해야 직성이 풀리겠느냐, 어명을 받들라 거들었다. 한비나 다른 관료들은 민심이 돌아선 것을 잘 아는지라 전처럼 편들지 못하고 눈만 데굴데굴 굴린다. 자현은 이를 악물고 말하였다.

“정녕 소인을 보내야 직성이 풀리시겠습니까.”

“이는 백성들의 뜻이다. 어차피 자네가 그 귀신을 물리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이런 혼란을 감수하면서까지 자네를 도성에 머무르게 둘 이유가 없다.”

그 뻔뻔스러운 말에 자현은 이를 악물었다. 입을 열었다가는 격한 말을 마구 쏟아낼 것 같아 필사적으로 턱을 조인다. 그것을 만족스러운 눈으로 내려다보며 왕이 제 딴에는 아량을 베풀 듯 덧붙였다.

“떠나기 전에 준비할 게 많을 터, 보름 정도 시간을 주겠네.”

이미 떠나는 것이 결정된 듯한 투였다. 그러고는 대답도 듣지 않고 불렀을 때처럼 심드렁하니 손을 한 번 흔들며 물러가라 명한다. 굳은 얼굴을 하고 서 있기를 잠시 자현은 고개를 한 번 꾸벅하고는 휙 몸을 돌려 방을 걸어 나왔다.

‘이미 대장군 자리는 멀어져 버린 거 같군.’

쫓겨나지 않으면 다행인 처지인가.

분노가 극에 달하면 도리어 무감각해지는 듯하다.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이제… 내게 남은 수단은 단 하나뿐인가.’

그는 일전에 한비와 밀담을 나누었던 곳으로 걸음을 돌렸다. 곧 의전이 끝날 터, 감이 좋은 인간이니 따로 부르지 않아도 그리로 오겠지.

“장군님….”

단단히 결심한 얼굴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데 누군가가 말을 건다. 그는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만치에 흰 비단 옷차림의 시비 하나가 오도카니 서 있었다. 옷에 새겨진 문양으로 보아 내궁 소속의 시녀. 관료들이나 드나드는 본관에는 무슨 일인가.

“뭐지?”

“저의 주인님께서 잠시 만남을 청하십니다. 잠시 시간을 내어 주시겠습니까.”

“…주인님?”

내궁에 속한 자라면 왕의 후궁들과 공주들, 친인척들…. 제게 개인적으로 만남을 청할 만한 이는 하나 없었다. 주인의 신분을 밝혀라 하려는 순간 시비가 뭔가를 내밀었다.

“이걸 보시면 아실 것이라 하셨습니다.”

진주와 금으로 만든 꽃 모양의 화려한 머리 장식이었다. 눈을 가늘게 뜨길 잠시 그것이 가란 공주의 것임을 떠올리고는 눈을 크게 떴다.

분명히 그가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 하고 있던 장식이었다. 후원을 홀로 거닐다 나뭇가지에 요란하기 그지없는 이 머리 장식이 걸려 애를 먹고 있던 것을 도와주었었지. 혼사도 엎어진 마당에 그녀가 저를 만나자 청할 일이 어디에 있나 하며 그는 의심스레 눈살을 찌푸렸다.

“무언가… 바쁜 용무라도 있으십니까?”

아무 대답 없는 것에 시녀가 불안한 눈을 하고 올려다본다. 잠시 망설이던 자현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안내해라.”

시비가 안심한 얼굴로 이리 오십시오 하며 뒤돌아선다. 자현은 그 뒤를 따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여자가 환관들만 다닌다는 좁은 문을 열어 어둑한 복도로 쓱 들어간 것이다.

이토록 은밀하게 저를 청하는 이유가 대체 무엇이지?

혹 함정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지만 저를 불러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가 하는 궁금증이 더 컸다. 그는 경계 어린 눈으로 주변을 살피며 조심스레 여자의 뒤를 따랐다.

“여기입니다.”

그녀가 저를 안내한 곳은 외진 곳에 자리한 조그만 방이었다. 본궁에 이런 곳이 다 있었나 하며 침침한 방을 살피는데 시녀가 그 안쪽에 위치한 문을 향해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마마, 모시고 왔습니다.”

“…안으로 모시거라.”

확실히 가란 공주의 목소리였다.

시비가 문을 열자 온통 비단과 황금으로 꾸며진 방과 그 방 한가운데 앉아 있는 가란 공주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우아한 미소를 머금어 보인다.

“갑작스러운 요청에 응해 주어 고맙습니다.”

그 모습이 희란국 제일의 미녀라는 명성에 걸맞게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그는 못 박힌 듯 서서 그 모습을 생경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옥같이 매끄럽게 빛나는 흰 얼굴, 흑수정 같은 커다란 눈동자에, 풍만한 육체를 한껏 돋보이게 차려입은 붉은 금의, 매끄럽게 빛나는 흑단 같은 머리채….

어째서인지 그 숨 막힐 듯 매혹적인 모습이 낯설게 느껴진다. 자현은 의아한 마음에 눈가를 찡그렸다.

제가 그토록 열을 올리던 이가 아닌가. 왜 이리도 마음이 심드렁하고 건조한 것인가.

“이리로 와 앉으십시오.”

“…무슨 용건으로 부르셨습니까.”

안으로 발걸음도 들이지 않고 그리 묻자 여인의 낯빛이 흐려진다.

“안으로 들어오시지요.”

“…….”

“장군, 서서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소 강하게 내뱉는 말에 굳은 얼굴을 하던 자현은 곧 저벅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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