十二章. 함정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잠시 후미진 골목에 자리한 잡화점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던 사내는 고개를 들어 빗물을 쏟아내는 검은 하늘을 고요히 올려다보았다.
먹구름 낀 하늘은 꼭 까만 연기가 뒤덮인 것처럼 보인다. 그는 기둥에 뒤통수를 기대며 습기 찬 한숨을 토해 냈다. 그 얼룩짐에 안심이 된다. 싸늘한 공기도, 발가락을 적시는 축축한 물기도, 그 어둑함도.
“아, 그림같이 아름다운 분께서 처량맞게도 흠뻑 젖으셨네요. 가엾어라.”
그가 서 있는 골목 바로 맞은편, 이층 난간에 등을 기대고서 떠들썩하게 술을 마시던 기녀 하나가 그를 발견하고는 희롱하듯 말했다. 사내는 시선을 들었다. 여인이 깜짝 놀란 듯 하얗게 드러낸 어깨를 움찔거린다.
“어머, 아름다운 눈동자….”
“어디, 어디.”
화려한 옷차림의 남자들 틈에 앉아 깔깔거리며 웃던 또 다른 여자가 난간 너머로 고개를 내민다. 사내는 그저 말없이 올려다보기만 하였다. 여인이 황홀한 탄성을 내지르자 그 반응에 호기심을 느낀 듯, 술판을 벌이던 다른 기녀들과 그 손님들까지 고개를 난간 밖으로 내밀었다.
“세상에나… 천상에서 내려오셨는지요.”
“공자님, 우리 가게로 와서 비를 피하지 않으시겠어요? 옷자락이 다 젖습니다.”
“…나는 비가 내리는 것을 가까이서 보고 싶다.”
무심하게 내뱉는 말에 여인들이 한숨을 내쉬었다.
“멋있으셔라. 시인이셨군요.”
“시라면 나도 좀 알지!”
여인네들의 관심을 빼앗긴 것에 골난 얼굴을 하던 남자가 돌연 술잔을 들며 큰 소리를 쳤다.
“내가 그대들을 위해 한 수 읊어 주겠네.”
그러고는 엣헴, 하고 헛기침을 하더니 분위기를 착 잡고 운을 뗀다.
「구름 온통 해와 달과 별을 가리우니
볼 것이라고는 여인의 고운 얼굴뿐이구나
애타는 이 내 마음 몰라주는 무정한 이여
어찌 나를 보아 주지 않는 것인지!」
마지막 수를 읊은 남자가 난간에 매달려있던 여인의 허리를 한 팔로 와락 끌어안았다. 여자가 까르르 웃으며 그의 목에 팔을 휘감았다. 입술과 얼굴을 서로 문대며 웃는 그들을 가만 올려다보던 사내가 물었다.
“…시가 무엇이냐.”
“어이, 미남 군(君). 무슨 그런 엉뚱한 질문을 하나.”
술 취해 얼굴이 벌겋게 된 다른 사내가 난간 너머로 팔을 내밀어 흔들며 말하였다.
“시가 시지 무어겠나! 말로는 설명 못 할 이 뜨거운 마음을, 여인을 향한 애타는 그리움을, 노래한 것이지.”
“어머, 나으리. 그건 연가(戀歌)이지요.”
“그게 그거지! 이보게. 우리의 즐거운 술자리를 방해한 대가로 자네도 어디 한 수 읊어 보게나.”
“…난 시를 모른다.”
“모르는 게 어딨나. 느끼는 바를 운율에 맞추어 그저 읊조리면 되는 것을.”
“이놈 말하는 거 보게나. 순 빈 수레였구만.”
남자들끼리 서로 발길질을 하며 낄낄거린다. 그것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사내는 다시금 흐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비가 점점 잦아들고 있었다. 희미해진 구름 새로 금색 빛줄기가 내려온다. 그 날카로운 햇살을 향해 손을 뻗던 사내가 조용히 입술을 떼었다.
「어찌하여 나는… 닿을 수도 없는 것에 번번이 손을 뻗는가.」
“어허! 운율이 하나도 안 맞잖는가.”
사내가 야유했다.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찬연한 빛을 하염없이 올려다보며 되뇐다.
「스스로를 끝없이 비참하게 만드는 것으로부터, 어째서 나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인가.」
빛을 바라보는 그의 두 눈이 고요히 일렁거렸다.
「…이 목마름
이 갈망은
대체 어디서 오는 것인가.」
그 목소리에 감도는 음산한 기색을 느끼었는지 낄낄거리는 소리가 희미해지었다. 그는 천천히 처마 밑에서 걸어 나와 잦아드는 빗줄기를 온 얼굴로 맞았다. 몸을 돌리는 그의 모습을 여인들이 애타는 눈으로 바라본다. 가지 말라 붙잡는 소리에도 무정하게 발걸음을 옮기며 그는 느릿느릿 내뱉었다.
「일생 답이 없는 물음 속을 헤매며
나는 괴로워하겠지….」
멀어지는 사내의 그림자는 기이할 정도로 거대하고 짙게, 빗물 얼룩진 땅을 뒤덮었다.
***
새벽부터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한 비는 아침까지 계속되었다. 이른 아침 조용히 궁궐을 빠져나와 집으로 돌아온 자현은 대문 앞에서 잠시 젖은 옷자락을 털어냈다. 곤죽이 되어 지쳐 잠든 여인을 두고 돌아오는 귀갓길, 기분은 말도 못할 정도로 씁쓸했다.
“제 부탁을… 들어주실 거죠?”
계집의 치마폭에 휘둘리는 줏대 없는 놈이 되게 생겼군 하며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묘한 무력감 같은 것이 어깨를 짓누른다. 노곤하고 피로하였다.
제가 그토록 기운차고 패기 넘쳐 눈에 뵈는 것이 없었다는 게 믿기지가 않을 정도였다. 불씨가 꺼지고 남은 잿무더기가 된 것처럼 만사 될 대로 되어라 싶은 그런 자포자기하는 마음이 가슴 한편에 들어찼다.
‘가란이 가륜 왕을 설득할 수만 있다면… 굳이 위험을 무릅쓸 것까지도 없다.’
그래. 조금만 기다려 보는 거다. 그녀에게도 못 박아 두었다. 왕이 제게 남긴 시일은 보름. 그 안에 가륜 왕의 마음을 돌리지 못하면 나로서도 어쩔 수 없다.
그리 말하자 여인은 가슴팍에 매달리며 절대 그 먼 곳으로 쫓겨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하였다.
정사 후의 나른함에 젖어 발갛게 달아오른 그 육체를 끌어안으며 자현은 이것으로 됐다, 아무래도 좋아 하고 읊조렸다.
애초에 제가 바라였던 것은 권력도 왕좌도 아니었다. 그저 그 아름다운 여인을 손에 넣고자 하였을 뿐. 저를 그리 대우한 왕에 대한 분노가 사그라든 것은 아니었으나 가란을 안은 순간 어쩐지 그에게 충분한 모욕을 준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이리도 단순한 사내였나.’
새삼스러운 깨달음에 맥이 탁 풀린 얼굴로 흐린 하늘을 올려다보던 자현은 이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썰렁해진 정원을 지나 본채로 들어가는데, 문득 정원 한편에 자리한 조그만 정자 위에 소루가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 있는 게 눈에 들어온다. 그 가녀린 모습에 일순 가슴이 묵직해졌다.
왜 그러고 나와 있는 건가.
얼어붙은 것처럼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 염이라는 계집종이 우산을 들고 그 앞으로 달려가는 것이 보인다.
창백한 얼굴을 힘없이 무릎에 파묻고 있던 소루가 그리로 고개를 들더니 희미한 미소를 머금어 보였다.
“염이야.”
“이제 그만 들어가셔요. 고뿔이라도 걸리면 어쩌시려고….”
“응. 이제… 들어가마.”
여자가 우산을 씌워주는 여종을 순순히 따라 일어선다. 그녀의 옷자락이 빗물에 얼룩덜룩했다. 축축한지 치맛자락을 한데 모아들고서 여자가 희고 가느다란 종아리를 손바닥으로 쓱 문질렀다.
염이라는 몸종이, 가지고 나온 웃옷을 소루의 어깨에 걸쳐주고는 조심스레 안채로 인도한다.
그제야 자현은 소루가 제 귀가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항상… 정원에 나와 앉아있었던 것도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가.’
그는 이마를 감싸 쥐었다. 어째서인지 온몸이 빗물을 머금기라도 한 것처럼 무겁게 느껴지었다.
혹시 밤새 오지 않는 저를 기다렸을까. 제가 가란과 침상에서 뒹구는 동안 컴컴한 방에 홀로 웅크리고 누워 나를 기다렸던 걸까.
뱃속이 저릿해진다. 그는 곧장 고개를 흔들어 그 감정을 떨쳐버렸다.
아니. 상관없어. 기다리든 말든 무슨 상관이냔 말이다. 제멋대로 하는 일에 왜 내가 책임감을 느껴야 하나.
‘…젠장.’
그는 몸을 돌려세웠다. 방으로 들어갔다가 여자가 밤새 어딜 다녀왔냐고 묻기라도 한다면 저는 또다시 잔인한 말을 퍼부어 대겠지. 더 심한 말을 할지도 모른다. 그 상처받은 듯한 얼굴을 보는 게 두려워 그는 도망치듯 서재로 향했다.
거기서 대충 젖은 장포를 벗어 아무렇게나 던져 놓고는 하인에게 새 의복을 가져오라 일렀다.
시비가 재빨리 수건을 가져다준다. 그것으로 대충 머리의 물기를 털어내는데 지끈, 하고 관자놀이가 쑤셔왔다. 그는 시큰거리는 머리를 한 손으로 꾹 눌렀다. 두통이 점점 극심하여진다. 탕약이라도 먹어야 하는 건가 고심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벌컥 문이 열렸다.
“대체 밤새 어디 있었던 겐가!”
비령이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들어와 바가지 긁는 계집처럼 앙칼지게 소리친다.
“내가 얼마나 애를 태우며 자네를 기다렸는지 아나!”
그동안 코빼기도 비치지 않더니 이런 날에는 또 귀신같이 알고 달려와 닦달을 하는 건가.
그는 기가 막혀 고개를 내저었다.
“자네가 내 마누라라도 되나. 제발 징그러운 소리 집어치워라.”
“허! 내가 누굴 위해 이 고생을 하는데! 자네를 위해서 밤낮없이 뛰어다니는 사람을 이렇게 괄대해도 되는가!”
누가 그러라 하였나 하는 매몰찬 대꾸가 목까지 차올랐지만 인간적으로 참았다. 이놈이 항상 제 일에 열성인 것을 모르지 않았다. 자현은 조금 수그러든 어조로 물었다.
“그새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었던 거냐.”
“그리 살벌한 얼굴을 하고서 궁궐로 불려간 인간이 밤새 보이질 않으니, 내가 걱정을 안 하고 배기겠나? 무슨 사달이라도 났나 싶어 간이 다 철렁 내려앉았단 말일세! 한비도 자네를 찾은 모양이던데… 대체 어디에 있다가 온 건가?”
가란 공주의 처소에 있다가 왔다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어 자현은 그의 눈길을 피했다.
“내가 세 살배기도 아니고, 수선 부리지 마라. 심란하여 술 한잔하고 온 것뿐이다.”
“기껏 걱정한 사람에게….”
도끼눈을 뜨던 비령이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궁궐에서 있었던 일은 한비에게 들었네. 한비는 곧장 제게로 올 줄로 생각한 모양이야. 아직 결심이 서지 않은 것이냐고 묻더군.”
“…….”
“아직 결심이 서지 않은 겐가.”
자현은 입매를 일그러트렸다. 가란이 왕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지만 이미 기다리기로 약조하였다. 그런 사정을 시시콜콜 이야기할 수는 없어 그는 애매한 어투로 내뱉어다.
“…조금 더 생각해 보고 싶다.”
“자현에게 소심한 구석이 있었을 줄은 몰랐군.”
비령이 빈정거리듯 말했다.
“이미 결론이 나와 있는 상황에서 질질 끌다니… 자네답지 않아.”
“이게 그리 쉽사리 결정 내릴 수 있는 일인가!”
“…정말로 그뿐인가?”
미심쩍게 바라보는 눈초리에 자현은 인상만 써보였다. 뱀 같은 시선으로 살피던 비령이 이내 어깨를 으쓱이는 것으로 추궁을 관두고는 탁상 앞에 의자를 빼 앉았다.
“그럼 내가 자네의 결심을 도와주지.”
자현은 의아한 눈길로 그를 보았다.
“내가 그 요괴에 관해 조사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
“…무언가 알아낸 사실이라도 있나?”
“근래 자네의 집 앞에서 농성이 벌어졌을 때 발견된 시체 말일세. 미심쩍은 부분이 있어 내 은밀히 조사하라 시켰네.”
“미심쩍은 부분?”
“벌어진 상처가 지나치게 말끔하더군. 직접 살펴보기까지 하였네만 칼로 낸 것이 분명하였네. 그 후에 발견된 시체도… 칼로 낸 상흔으로 보이는 게 다수 있었네.”
자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어쨌다는 건가.”
“그 요괴 놈의 행적을 철저히 조사하였지만 놈이 사람의 심장을 훔칠 때 칼을 쓴 일은 일절 없었네. 마치 손으로 우악스레 잡아 뜯은 듯 상처 부위는 늘 거의 너덜너덜하였지. 그래서 처음 가슴이 뚫린 시체가 발견되었을 때 짐승의 짓이다 하는 말까지 오간 게 아닌가.”
“그날 보지 못했나. 놈은 검을 소지하고 있었다. 어느 날 마음이 바뀌어 그것을 사용하기로 했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지.”
“그 칼은 부상을 입은 자호가 무인이 떨어뜨린 것일세. 그 자리에서 주워 사용하고는 멀지 않은 곳에 버리고 갔어. 그 일대를 수색하던 무인이 발견했네.”
그렇다고 해도 칼쯤은 어디서든 구할 수 있었다. 그게 대체 어쨌다는 건가 하고 말하려던 자현은 다음 순간 비령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차리고는 느슨하던 자세를 바꾸어 앉았다.
“누군가 사람을 죽이고는 귀신의 짓으로 위장하고 있다는 뜻인가.”
비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온 도성이 뒤숭숭하니 제 죄를 요괴의 탓으로 돌리고자 하는 이들이 나와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 그래도… 그날 자호가의 앞에서 벌어진 농성도 그렇고 여러모로 석연치가 않아 죽은 이에 관해 조사를 하게 시켰네. 시신의 연고를 찾을 수가 없어 꽤 애를 먹었지.”
설마 하며 눈을 가늘게 뜨는 자현에게 비령이 굳은 어조로 내뱉었다.
“결론만 말해 그날 발견된 시체는 궐에서 일하던 노비의 것이었네.”
줄줄 설명하지 않아도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자현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감쌌다.
“…단순한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다.”
비령이 고개를 내저었다.
“물론,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고 자네에게 앙심을 품은 다른 관리가 꾸민 짓일 수도 있지. 하지만 가장 가능성이 높은 배후는 가륜 왕일세. 한비가 왕이 직접 나서서 여론을 조장한다고 한 것을 듣고, 나도 궁궐에 심어둔 이들을 통해서 그의 움직임을 면밀히 살펴 왔어. 밤중에 본궁의 환관들이 수상한 움직임을 하였다는 증언이 꽤 되는 데다가…. 조사에 의하면 그날 농성을 선동한 자들도 가륜 왕의 사주를 받은 이들이었다고 하네.”
“…백성들의 원성은 내 집안으로만 향해 있는 것이 아니다. 조정에 대한 불신감도 깊은 터. 도성 안에 불안감이 극심하여지면 제게도 득 될 것이 없는데… 그런 일을 꾸몄다는 건가.”
“자네가 그만큼 위협적이라는 뜻이겠지.”
“…모반을 꾸미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건가?”
“그런 것 같진 않아…. 하지만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는 거 같네.”
비령이 의미심장하게 목소리를 내리깐다. 자현은 의아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무엇을 느꼈다는 말이냐.”
“자네의 숙명.”
툭 튀어나온 거창한 단어에 자현은 눈을 깜빡였다. 비령이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전부터 그가 자네에게 품은 과한 적대감이 의문스러웠네. 근래에 들어서야 알았어. 왕은 본능적으로 자네에게 위협을 느낀 거야.”
자현은 헛웃음을 흘렸다.
위협?
지방귀족 출신의 신출내기 무관이라 별 볼 일이 없는 처지에 콧대만 높구나 하고 비웃던 왕의 얼굴이 떠오른다.
자존심이 상하고 이가 갈렸지만 그 말대로 제 처지가 별 볼 일이 없음을 자현 자신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실력을 갈고닦아 공을 세우는 데 목을 맸던 게 아니던가.
“겨우 장수 하나가 왕에게 무슨 위협이 된단 말이냐.”
“그 법령사가 일전에 말하지 않았나. 자현 자네는 하늘이 내린 사람이라고. 나는 그 말이 바로 납득이 갔네. 자네에겐 확실히 남들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어. 이를테면… 운명. 그래, 그런 인간의 이치를 벗어난 강력한 힘이 자네를 따르고 있는 것 같아. 이는 비단 뛰어난 무예 실력이나 그 화마와 같은 기질만을 말하는 것은 아닐세. 거듭되는 불운조차… 꼭 자네를 어느 한 자리로 밀어내기 위한 것으로 보이네.”
친우의 어조는 그 열띤 내용과는 달리 담담하였다. 자현은 냉소적으로 대꾸했다.
“그 어느 한 자리가 왕좌인가?”
“그래.”
“거창하군.”
냉소적인 성격의 소유자답게도 건조한 한마디만 툭 내뱉는다.
비령은 예상이라도 한 듯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나라 제일의 모략가인 한비와 희란국 제일의 상인인 주호의 후원, 왕실에 반감을 품은 젊은 장수들의 열렬한 지지 그리고 그 어느 장군들도 압도하고 남을 만한 공까지…. 차곡차곡 필요한 것들이 쌓여가질 않는가. 이제 계기만 있으면 되지.”
“…….”
“단순히 잘나고 출중하다고 해서 왕좌를 거머쥘 수 있는 것이 아닐세. 주변을 움직이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지. 그것이 의도한 것이든 의도하지 않은 것이든 여러 사람들의 의지와 이해관계가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면서 어떤 강한 흐름이 형성되었을 때 새 왕조가 만들어 지는 것일세. 륜(倫) 왕조 또한 그리 탄생한 것이 아닌가.”
“…현(眩) 왕조라도 만들라는 말인가.”
교묘하게 꼬드기는 말에 빈정거리듯 말하자, 비령이 쌕, 교활한 미소를 머금어 보인다.
“자네는 좀 더 자각해야 해. 자네가 지금 어떤 움직임 속에 있는 것인지. 설령 자네에게 그럴 생각이 없더라도 주변인들이, 가륜 왕이, 가만 놔두지 않을 걸세.”
제 품에 매달려 부친과 대적하지 말아달라 하던 가란의 얼굴이 언뜻 머릿속에 스치었다. 제게 그만큼의 적의를 품고 있는 왕의 마음을 그녀가 과연 돌릴 수 있을까.
“보름.”
자현은 단호하게 내뱉었다.
“그게 왕이 내게 준 시일이다. 그동안 생각해 보겠다.”
“그 안에 뭔가가 바뀌리라 생각하나? 설령 그 귀물이 잡혀 상황이 일단락된다고 해도… 왕은 자네를 잘라 내는 것을 멈추지 않을 걸세. 노비들을 죽여 위장을 할 정도가 아닌가. 여차하면 자네의 신상을 위협해 올 수도 있어.”
“내가 암살 따위에 당할 것 같나.”
“…지나치게 자신하는군.”
“네 말대로 내게 숙명 같은 것이 있다면 안달하지 않아도 언젠가는 그리될 터.”
자현은 고집스레 말하였다.
“그것을 시험해 보는 것도 좋지 않나.”
더는 설득할 수 없다 판단했는지 비령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 그러하다면 어쩔 수 없지. 뜻대로 해 보게.”
***
어둠 속에서 검은 손이 기어 나온다. 소루는 바닥에 앉은 채 그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를 바라보는 끓는 두 눈. 비통한 듯도 하고 슬픈 듯도 하다.
그녀는 요괴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채 닿지 못하고 허공에 멈춰 세운다. 검고 앙상한 그 손이 점점 피로 흥건히 젖어갔다. 손바닥에 고인 검붉은 피가 뚝뚝 떨어져 바닥을 적신다.
사람이 되고 싶다.
요괴의 손에서 무수히 많은 이들의 피가 한데 뒤섞여 흘러내린다. 바닥에 강을 이룬다. 붉은 융단처럼 새빨간 선혈이 점점 퍼져나가 제 발치까지 적신다. 그녀는 그 손을 뿌리치지도 붙잡지도 못하고 바라보기만 하였다.
사람이 되고 싶다.
그렇다면 어째서 나를 먹지 않은 거냐. 어째서 나를 가져가지 않은 거야.
그 손이 제게서 멀어진다. 이해할 수 없는 충동에 이끌려 그 손을 붙잡았다. 하지만 마치 환상처럼 흩어져 버린다.
소루는 입을 벌렸다. 울음이 터져 나온다. 무엇이 그리도 슬픈지도 모르는 채로 그녀는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너를 어째야 좋을지 모르겠다.’
그녀는 또다시 꿈에서 깨어나 몸을 떨었다. 몸을 웅크린 채로 흐느낌을 삼키고 있기를 잠시 격정을 견디지 못하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역시, 이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다. 내가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그녀는 방을 나와 자현의 방문을 두드렸다. 굳이 그리하지 않아도 그가 거기에 없다는 것은 자명했다.
그녀는 빛 한 점 없는 깜깜한 세계를 유령처럼 배회하며 자현을 찾았다. 그에게 다시 한 번 말해 보는 거다.
법령사들을 만나면 야토를 만날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야.
그녀는 대책 없이 휘청휘청 걸어 정원 밖으로 나왔다. 두리번거리며 집 안에 남아 있을 그의 기척을 찾는데 어디선가 이야기 소리가 들려온다. 아마도 여종들이 모여앉아 수다를 떠는 모양이었다. 그리로 가서 그의 행방을 물으려던 소루는 우뚝 굳어졌다.
“주인님께 따로 정인이 생기신 게 틀림이 없어.”
빨래를 하는 듯 치덕치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자가 방망이질을 하며 제 딴에는 소곤소곤 떠들었다.
“거의 이틀에 한 번 꼴로 외박을 하시잖아. 그것도 비령 님과 동행하지도 않으시고 혼자 나가서는 날을 꼬박 새우고 돌아오시지. 필시 여인네를 만나고 오시는 거야.”
“설마, 때가 때이니만큼 일이 많으신 거겠지….”
“일은 무슨 일! 옷에 귀부인이 쓰는 향유 냄새가 아주 진득하게 배어 있던걸. 내가 듣기로 주인님께 이삼일에 한 번 꼴로 느지막한 저녁이면 들어오는 전보가 하나 있는데 그걸 받으시면 잠시 뒤 꼭 외출을 하신다는 거야. 그렇게 나가시면 다음 날 아침에 옷은 엉망으로 구겨져서는 여자가 쓰는 향냄새가 진득하게 배어 돌아오신대. 이쯤이면 말 다 한 거지, 뭐.”
“웬일이시래. 본래 기루 같은 데는 잘 발걸음 하지 않는 분이시잖아.”
“귀한 향을 쓰시는 것으로 보아 기녀가 아니라 어느 집 귀부인인 것 같아. 내 생각에… 혹, 가란 공주 아닐까 싶어. 최근 궐에 드나드는 일이 잦으시잖아.”
즐거운 듯 숙덕숙덕거리는 말들에 손끝이 싸하게 식었다. 소루는 오도카니 서서 멍하니 가슴께를 움켜쥐었다.
어째서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건가. 아내로 여기지 않아도 좋다. 곁에만 있게 해달라고 한 것은 자신이었다. 그가 누구와 함께 있든….
“주인님께는 잘된 일이지. 근래 얼마나 안 좋은 일만 거듭되었어? 주인님께서도 위안을 얻을 곳이 한군데쯤은 있어야 하잖아. 귀신 공주를 안을 것도 아닌데….”
“쉿, 누가 들으면 어쩌려구….”
“내가 뭐 틀린 말 했나. 누구 때문에 집안이 이 꼴이 되었는데! 어디 오싹해서 부인이라고 맘 편히….”
종알거리던 소녀가 갑자기 말을 멈춘다. 소루는 여자들이 제 모습을 발견해 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이 겁에 질려 하던 일도 놓아두고 후다닥 도망가 버린다.
뜰 한 귀퉁이에 덩그러니 남은 소루는 멀어지는 그 발소리를 가만히 들었다. 스산한 바람이 젖은 얼굴을 싸하게 훑고 지나간다.
“그렇군. 그에게는 잘된 일이다….”
중얼, 흘러나오는 말이 제 귀에도 덧없게 들린다. 마음 한구석이 시리고 아파와 소루는 얼굴을 감싸 쥐었다.
평온한 일상, 오로지 그것만을 바랐던 제가 지금 다른 이의 마음까지 탐내고 있는 건가.
웃음이 나왔다.
욕심이라는 것은 충족되기는커녕 점점 커지기만 하는 거구나.
‘야토, 너도 이런 아픔 속에 있는 거냐.’
채울 수 없는 갈망에 애를 끓는다는 것은 이리도 괴로운 일이었다. 그녀는 두 손으로 뜨끈한 눈두덩을 덮었다.
사르륵사르륵,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가 저를 비웃는 귀신들의 웃음소리처럼 들린다. 언제까지고 이런 곳에 움츠리고 앉아 헛된 꿈만 꾸고 있을 것이냐 그리 말하는 듯하다.
소루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아슬아슬하게 내디디는 발걸음이 마치 검은 늪 속으로 잠겨 가는 것처럼 무겁다.
땅속으로 가라앉아 가는 것 같았다.
***
가륜은 자현이 떠날 채비를 하기는커녕 태평스레 잦은 밤놀이나 나가더라 하는 보고를 듣고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궁지에 몰려 자포자기한 것인가.
아니 그럴 리가 없다 하며 바로 고개를 휘저어 그 생각을 부정했다.
그놈이 보통 질긴 놈이던가.
‘밟고 또 밟아도 다락같이 기어오르는 놈이다. 체념했을 리 없다.’
거의 강박에 가까운 확신에 차서 가륜은 종잇장을 파헤칠 듯 바라보았다. 놈이 어딜 그렇게 쏘다니는지는 나와 있지 않았다. 그저 허구한 날 밖에 나가 밤을 꼴딱 새우고 들어온다 하는 게 보고의 전부다.
‘무능한 놈들….’
그는 우득 이를 갈며 종이를 내던졌다. 귀신같은 놈이니 미행하기가 쉽지 않으리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명색이 왕실 그림자 무사라는 것들이 번번이 이러니 속이 뒤집어진다.
‘하긴, 이제 와서는 제 놈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아무 말도 못 하고 주먹만 틀어쥐던 자현의 모습을 떠올리며 가륜은 히죽 웃었다. 손끝에 박힌 가시 같은 놈을 드디어 빼어내 저 멀리 던져버릴 수 있는 것이다.
이제야 해방이다.
히히덕거리던 가륜은 문득 미간을 모았다.
해방이라니? 자신이 대체 무엇으로부터 해방된다는 말인가. 그가 제 신경을 거스르는 것은 분명하나 해방이라니. 이상하지 않은가.
‘그저… 후환이 될 싹을 제거하는 것뿐이다.’
왕은 마음속의 묘한 위화감을 지워 버렸다. 그래. 그는 처음부터 자현이 골칫거리가 될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본 것이다.
그 불온한 눈빛, 오만방자한 태도,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자만심…. 어떻게든 저걸 꺾어 누르지 않으면 큰 화가 미치리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놈은 호랑이 새끼였다.
결국 제 예상대로 되지 않았나. 한낱 하찮은 지방 귀족 출신의 무관에서 특출난 장수 그리고 나라의 영웅이 되더니 이제는 권세가들을 줄줄이 꿰어다가 저를 위압해 오고 있다. 이다음에는 무엇이 될지 알 수가 없다.
‘내 눈앞에서 어서 치워 버리지 않으면….’
왕의 머리에는 오로지 그 생각만이 가득하여서 정작 사람을 죽이는 그 살인귀를 어찌하느냐 하는 문제는 뒷전이었다.
백성들의 원성은 불쾌하고 성가셨으나 제 안에 더 큰 불안이 있는데 하찮은 것들의 우는소리가 무에 대수란 말인가!
쾅, 하고 솥뚜껑 같은 손으로 탁상을 내려친 왕은 또다시 얼굴을 굳혔다.
불안이라니, 제 안에 왜 그런 것이 있단 말인가. 자현 같은 놈 때문에 왕인 저가 불안해 할 리가 없다. 저는 그저 불충한 놈들을 쫓아내고 싶을 뿐이다.
“그래. 그런 거다.”
듣는 이도 없는데 설득하듯 중얼거리고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초조한 걸음으로 방 안을 서성거렸다. 이럴 게 아니라 놈을 성으로 다시 불러들이자. 놈을 불러내 떠날 준비는 잘 되어 가느냐 하고 속을 떠보는 거다. 놈이 반발하면 한 번 더 노비의 시체 몇 구를 길바닥에 늘어놓고 양민들을 부채질하자. 민중들은 겁에 질려 자호가로 득달같이 달려가겠지.
가슴속에 삐뚤어진 유쾌함이 차오른다. 영웅이라 그리 떠받들던 이들이 등을 돌려 비난해대는 모습을 보는 기분은 어떨까. 불러 세워 놓고 묻고 싶을 정도였다.
‘못 할 것도 없지.’
그는 한껏 음산한 미소를 머금었다. 놈의 참혹한 얼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들뜬다. 비웃는 듯, 멸시하는 듯, 저를 바라보던 그 두 눈에 굴욕과 좌절을 깊이 새겨 넣는 거다.
억울해 하는 놈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제가 뭘 그렇게 잘못한 것이냐 묻는 듯하다. 그는 그 허상에 대고 대꾸했다.
그러게 왜 저보다도 높은 곳에 서 있는 듯한 눈을 하느냐. 제 위에 무엇도 없다는 듯 구냔 말이냐. 왕인 나를 어찌하여 업신여기느냔 말이다.
‘다 제가 자초한 것이다.’
맨 처음 그저 시건방진 놈이 눈에 거슬려 꺾어 누르려 면박을 주었을 때 놈이 굴복하였다면 이 지경까지 오진 않았을 것이다. 그처럼 제게 깔보는 듯한 시선을 보내지 않았더라면 이 지경까지는….
“폐하.”
턱이 다 아프도록 이를 악물고 주먹을 틀어쥐던 가륜은 문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환관장의 목소리였다.
“무슨 일인가.”
“그, 급히 아뢸 일이 있어 달려왔사옵니다.”
“아뢸 일?”
눈을 가늘게 뜨던 가륜은 곧 들어오라 내뱉었다. 장재가 총총거리는 걸음으로 조심스레 들어선다. 그 얼굴이 매우 창백하게 질려 있는 것을 보고 가륜은 인상을 찌푸렸다.
“대체 무슨 일이냐.”
“마, 말씀드리기 송구하오나….”
그가 말끝을 흐리며 한참 동안 뜸을 들였다. 그 모습에 묘한 불안감이 고개를 든다. 가륜은 초조함을 이기지 못해 도끼눈을 뜨고 다그쳤다.
“무슨 일이냐! 질질 끌지 말고 어서 말하지 못할까!
그에 장재가 허겁지겁 말을 이었다.
“가란 공주님에 관한 것입니다.”
“…가란이 왜?”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이의 이름에 대번 가륜 왕의 낯이 심각하여졌다. 가란이 어떤 딸인가. 일찍 죽은 제 어미를 쏙 빼닮아 곱디고운 자태에 온유하고 사려 깊어 늘 아비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그의 단 하나뿐인 위안이 아니던가. 혹 가란의 신상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인가 하며 가륜 왕은 환관장의 앞으로 한달음에 달려가 닦달을 했다.
“말을 해보아라. 무슨 일이기에 그리 뜸을 들이느냐!”
“가, 가란 공주님의 별궁에… 남몰래 사내가 드나들고 있는 듯하옵니다.”
순간 방 안에 깊은 침묵이 흘렀다.
가륜은 제가 들은 말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멍하니 되풀이하였다.
“지금… 무어라 했느냐? 가란의 궁에 사내가 드나들어?”
“예, 예에, 별궁을 드나드는 본궁의 시녀가 공주 전하의 여종이 몰래 사, 사내의 족의(足衣)를 빨고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해서 훔쳐보았는데 잠시 뒤 웨, 웬 사내가 이른 새벽에 공주 전하의 침실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까드득, 섬뜩한 이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장재는 어깨를 한껏 쪼그리고서 왕의 험악한 기색을 살폈다.
시집도 안 간 딸의 방에 밤손님이 드나든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느 아비가 격분하지 않겠는가. 더군다나 가륜 왕의 막내딸에 대한 유별난 사랑은 온 궁궐에 자자한 일. 제 딸에게 청혼을 넣었다는 이유만으로 모진 대우를 받은 이는 비단 자현만이 아닌 것이다. 그 귀애하는 딸이 부친의 눈을 피해 밀회를 즐기고 있다는 소리에 가륜은 눈이 뒤집혀 대뜸 칼부터 뽑아들었다.
“네 이놈…! 그 말이 사실이 아니라면 네 목이 달아날 것이다!”
“소, 송구스럽게도… 사실이옵니다. 이 사실을 전해 듣자마자 제가 직접 공주 전하의 시비 중 하나를 족쳐 확인하였습니다. 아흐렛날 전부터 사내가 가란 공주님의 별궁을 드나들며… 저, 정분을 나누었다는데….”
제 목에 겨누어진 칼자루가 바르르 떨리는 것을 보며 침을 꿀꺽 삼킨 장재가 힘겹게 토해 냈다.
“그자가… 자현이더랍니다.”
섬뜩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심히 두려워 장재는 감히 시선을 들지 못하였다. 부들부들 떨리던 칼끝이 천천히 바닥을 향해 내려갔다.
“네놈이 지금… 뭐라 한 것이냐.”
궁궐생활이 삼십 년 넘어 잔뼈가 굵은 장재이지만, 또다시 그 말을 입에 올릴 만한 담력은 없었다. 그저 바닥에 몸을 납작 엎드리며 송구하다, 송구하다 연발하였다. 그것을 시커먼 눈으로 내려다보던 가륜은 이내 방문을 박차고 나갔다.
궁녀들, 환관들이 그 손에 들린 시퍼런 칼을 보고 낯을 굳히며 고개를 조아리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가륜은 귀신같은 얼굴을 하고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호위와 하인들이 우르르 그를 보필하기 위해 꼬랑지처럼 따라붙었으나 가륜은 그마저도 인지하지 못했다. 그저 뭔가에 씐 사람처럼 성큼성큼 정원을 나가 제 딸의 거처를 향해 갔다.
열다섯이 넘어가서부터 빼어난 미태를 뽐낸 가란이다. 궁궐을 드나드는 놈들이 혹여라도 순진한 딸을 꾀어 허튼수작을 부릴까 부러 내궁에서도 가장 외진 곳에 덩그러니 지어 놓은 별궁, 제 아비가 저를 위해서 특별히 지어준 궁전에서 설마 가란이 그놈과 밀월을 즐겼을 리 없다.
가란이 그런 식으로 저를 배신했을 리 없어.
그렇게 되뇌면서도 왕의 시퍼런 낯빛은 돌아올 줄을 몰랐다.
그는 왕이 찾아왔다는 소리를 듣고 허겁지겁 뛰쳐나와 조아리는 시녀들을 제치고 성큼 가란의 방으로 향했다. 제아무리 왕이라 할지라도 기별도 없이 불쑥 공주의 방문을 열어젖힐 수는 없는 법. 하지만 가륜은 그리했다.
벌거벗은 채 침상에 누워 곤히 자고 있던 가란은 쾅, 하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문가에 선 왕의 얼굴을 발견하고 대경실색하여 황급히 비단자락으로 몸을 가렸다.
하지만 이미 가륜은 지난밤 날이 새도록 벌어진 정사로 울긋불긋해진 몸뚱이를 낱낱이 확인한 후였다. 그의 얼굴이 흡사 염라대왕의 것처럼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네가, 네가 감히…!”
“아, 아바마마….”
가란이 재빨리 침상에서 뛰어 내려 바닥에 엎드렸다. 그의 손에 쥐여진 시퍼런 칼이 서슬 퍼렇게 빛나며 파르르 떨렸다. 가란의 얼굴도 퍼렇게 질렸다.
“부, 부디 제 이야기를….”
“네가 감히 나를 우롱해!”
번쩍 칼을 치켜드는 가륜의 모습에 가란은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악 소리를 내며 머리를 부여잡았다.
이성을 잃고서 씩씩거리던 가륜은 차마 칼부림은 못하고 어깨를 부르르 떨다가 이내 검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네가! 네가! 어떻게 네가 이런 식으로 내 뒤통수를 후려갈길 수가 있단 말이냐!”
고함을 내지르는 왕의 얼굴은 그야말로 아수라와 같았다. 그가 주먹으로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감히 그놈과… 하필이면 자현, 그 자식과!”
그놈이 제 딸과 놀아나며 저를 비웃었을 것을 생각하니 속에서 천불이 일었다. 가륜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당신이 다 이긴 줄 알았지?
머릿속에 놈의 음흉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가 조롱하듯 말한다.
어쩌면 그리 모자라고 어리석을 수가 있나. 당신 딸이 희롱당하는 동안 멍청이같이 희희낙락하였지? 왕이란 이름이 다 아깝소. 하기는, 그 허울 좋은 자리도 잘나신 형님이 죽어 손아귀에 떨어진 것. 그 손에 쥔 모든 것이 다 허상과도 같은 것이지.
그으으, 앓는 소리를 내며 가륜이 끊어질 듯 내뱉었다.
“네가 그놈과… 그놈과 붙어 나를 이리 조롱하다니…!”
“아, 아니에요! 아바마마! 절대 그리하지 않았습니다. 소녀는 오, 오로지 아바마마를 위해서…!”
정신줄을 놓은 듯한 왕의 모습에 가란이 흐느끼며 토해 냈다.
“단지, 단지 아바마마를 위해서 그, 그를….”
“나를… 위해?”
왕의 형형한 눈이 딸의 얼굴을 내려다본다. 광기가 일렁거리는 그 눈길에 가란은 어깨를 움츠렸다. 왕이 그 앞에 무릎을 꿇어앉으며 딸의 어깨를 억세게 부여잡았다.
“그래! 이 아비를 위해 그리한 것이지? 그렇지? 암, 란이 네가 이 아비를 배신했을 리가 없지. 너는 나를 위해 그를 속인 것이야. 속은 것은, 그놈! 그놈이야! 틀림이 없을 테지!”
가란은 제 아비가 정상이 아님을 알고 혹여라도 이를 부정했다가는 죽임을 당할까 부들부들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왕의 낯이 극적으로 밝아지었다.
“하하하! 그럴 줄 알았어! 어리석은 놈! 어리석은 자현!”
그리 껄껄 웃어 대는 얼굴을 보는 가란의 눈이 아득하다. 아비의 안에 저로서도 어찌할 수 없는 깊은 수렁이 있음을 그제야 깨닫고 암담하여졌다.
제 말이라면 무엇이든 다 들어주는 다정한 아비. 그 안에 광기와 같은 것을 엿보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제게만은 설탕같이 다디단 부친이라 노력하면 마음을 누그러트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이리 골이 깊었던 건가.’
가란의 눈에 핑글 눈물이 고였다. 아니, 사실은 은연중에 느끼고 있었다. 그 안에 자리한 정체 모를 앙금을. 그리해, 왕을 설득하고 있느냐는 자현의 질문에 조금만 더 기다리라 하며 감히 말도 못 꺼내고 있던 것이 아닌가. 부친의 안에 웅크리고 있는 분노가 혹여라도 터져 나오는 게 아닐까 두려워….
“나를 위해 그자를 불러 오너라, 딸아.”
입술을 깨물며 울고 있는 가란의 턱을 한 손으로 들어 올리며 가륜이 부드럽게 말하였다. 그 온화함이 도리어 두려워 가란은 등줄기를 떨었다.
“아, 아바마마….”
“당연히 그리할 테지? 란이 너만은 나를 거스르지 않을 게야.”
상냥하게 웃으며 그가 어린 딸을 어르듯 머리를 쓰다듬는다. 몸을 움츠리며 후두둑 눈물을 쏟아내던 가란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흐느낌을 삼키기 위해 깨문 입술에서 핏물이 튀었다. 제 딸의 공포에 질린 얼굴조차 보질 못하고 왕은 즐겁다는 듯 호방하게 웃었다.
***
식은땀에 젖어 깨어난 소루는 거친 숨을 토해 냈다. 컴컴한 어둠이 사방에 자욱하다. 자신이 아직도 악몽 속에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며 눈꺼풀을 어루만져 보았다.
축축한 물기가 만져졌다. 땀방울이 맺힌 것인 줄로 알고 손끝으로 몇 번인가 쓸어내리다가 주룩주룩 흐르는 것을 느끼고는 그게 눈물임을 알았다.
‘무슨 꿈이었지?’
매일 꾸는 그 꿈과는 달랐다. 잘 기억나지 않는데도 다르다는 것만큼은 분명하였다. 그녀는 오한이 돋아난 팔을 쓰다듬으며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어지럽고 몸은 으스스하다. 요즘 날이 춥다며 나와 있지 말라던 염이의 음성이 떠오른다.
설마 고뿔이라도 걸린 것인가.
의아한 얼굴을 하고서 침상에서 내려서던 소루는 문득 인상을 썼다. 심장이 불안하게 요동을 치고 있었다.
‘대체… 뭐지?’
조금 무섭게 느껴질 정도로 주변이 조용하다. 밤인지 낮인지조차도 불분명했다. 요 며칠 동안 계속해서 밤잠을 설친 탓인지 정오가 지나고부터 수마가 쏟아져 일찌감치 침상에 누운 것이 미시(未時)가 조금 지났을 즈음.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살금 문가로 걸어가 더듬더듬 문고리를 잡아 열었다. 서늘한 바람이 뺨을 스친다.
‘저녁인가….’
공기가 차분하게 식어 있었다. 좀처럼 떨림이 가시지 않는 어깨를 끌어안으며 고개를 두리번거리기를 잠시, 갑자기 그 고요함과 어둠이 참을 수 없을 만큼 두렵게 느껴지었다. 그녀는 인기척을 느끼려 신도 제대로 신지 않고 나무로 된 바닥 위를 저벅저벅 소리를 내며 걸었다.
‘왜 이렇게 불안하지?’
갑자기 자신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조차 불분명하게 느껴지었다. 묘한 두려움에 질려 양손을 휘저으며 방문 앞을 배회하길 잠시 염이의 놀란 듯한 음성이 들려온다.
“마님, 일어나셨어요? 왜 나와 계세요.”
그녀는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사람이 내뿜는 그 희미한 기류조차 흐릿하였다. 예민하던 감각이 뭉툭해져 천지가 그저 시커먼 연기에 휩싸인 것처럼 느껴진다.
소루는 어깨를 떨었다. 그에 놀란 듯 염이가 마님, 하며 손을 붙잡아왔다.
“어디 불편하신 데라도 있으세요? 얼굴이 창백하세요.”
“…자현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느냐.”
“낮에 돌아오셨어요. 곧장 서재로 가셔서 일을 보고 계십니다.”
소루는 고개를 들었다. 그가 집 안에 있을 때면 가까이에 있지 않더라도 희미한 빛이 느껴지었다. 한데 어째서인지 그의 기척을 조금도 느낄 수가 없다. 불길한 예감이 점점 커져 그녀는 염이의 손을 꽉 붙잡았다.
“지금 나를 그리로 인도해 줄 수 있느냐.”
“예?”
“자, 잠시 확인할 게 있어서 그런다. 지금 당장, 나를 그에게 데려가 다오.”
당황스러운 기색을 보이던 염이가 이내 이리 오셔요 하면서 손을 잡아끌었다. 소루는 어미의 뒤를 따르는 어린아이처럼 그 뒤를 졸졸 쫓았다.
기껏 나가봐야 본채와 이어져 있는 정원 정도. 제 방을 나서는 일이 없는 안주인이 홀연히 등장하자 일꾼들이 헉, 하고 급히 숨을 들이켠다.
본래라면 그들의 두려움을 예민하게 느끼고 몸을 사렸을 테지만 제 두려움이 너무 극심하여 신경 쓸 수 없었다. 소루는 염이의 손을 동아줄처럼 꽉 붙잡고서 열심히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염이가 목적지에 당도하였는지 걸음을 멈췄다. 그러곤 몸을 돌려세워 야무진 손으로 제 긴 치맛자락을 몇 번 쓸어준 뒤 흠흠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주인 나리…. 마님께서 오셨습니다. 잠시 안으로 들어도 될는지요?”
소루는 긴장하며 대답을 기다렸다. 두 눈은 불안하게 흔들리었다.
어째서 그의 기(氣)가 이렇게나 희미해진 걸까. 어디가 아픈 것일까. 안 좋은 일이 생긴 건 아닐까.
그런 두려움이 무색하리만치 담담한 음성이 들려왔다.
“들어와라.”
드르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염이의 인도를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해 이리 달려온 것이 바보같이 느껴질 정도로 그는 강건했다. 금색과 붉은색이 아른아른 휘몰아치는 듯한 빛의 아지랑이를 바라보며 그녀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무슨 일이지?”
염이가 말씀 나누세요 하고 문을 닫기 무섭게 그가 무뚝뚝한 음성으로 물었다. 소루는 네게 무슨 일이 생긴 줄로 알았다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느냐 물으면 무어라 답한단 말인가. 갑자기 안 좋은 예감이 들어서? 꿈자리가 사나워서?
굳이 입 밖에 내지 않아도 그의 비웃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아무 말 못 하고 입술을 깨물고만 있자 남자가 다그쳤다.
“뭣 때문에 왔느냐고 물었다. 혹 또다시 지난번 같은 소리를 하려거든….”
“네, 네가… 걱정이 되어서….”
난폭해지는 어조에 더듬거리며 내뱉자 굳은 침묵이 내려앉는다. 그녀는 허둥지둥 덧붙였다.
“요 며칠 동안… 계속 돌아오지 않길래 조금 걱정이 되었다. 그뿐이야. 방해해서 미안하다.”
“…잠시 쉬려는 중이었다.”
또다시 냉담한 대꾸가 돌아오는 것이 두려워 황급히 뒤돌아서려는데 등 뒤에서 조금 가라앉은 음성이 들려왔다. 그녀는 움직임을 멈추었다.
자현이 덜커덩 소리를 내며 의자에서 일어나더니 저를 잡아당겨 탁상 앞으로 이끈다.
“차나 한잔하고 가라.”
“아….”
그러고는 대답도 듣지 않고 하인을 불러 차를 내오라 이른다. 소루는 그가 빼주는 의자 위에 얼떨떨하게 앉아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예상치 못한 친절에 가슴이 달뜬다.
일전에 한 번씩 제 방에 들러줄 때에도 같이 차를 마신 적이 있지만 야토와의 싸움 이후로는 처음 있는 일이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다.
“편히 있어라.”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을 느꼈는지 자현이 무뚝뚝하게 내뱉는다. 소루는 볼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뒤 시비가 차와 다과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동안 그는 말없이 반대편에 앉아 종잇장을 부스럭거렸다. 제가 옆에 있든 없든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 무심함에 도리어 마음이 녹는다. 제가 옆에 있기만 해도 벌벌 떠는 이들 투성이이지 않은가.
“…식사를 못 한다고 들었다.”
묘한 감동 같은 것을 느끼며 따뜻한 찻잔을 쥐는데 불현듯 그가 말을 걸었다.
“음식이 입에 맞지 않나.”
“아, 아니다. 아주 맛있어.”
“뭐든 좋아하는 게 있으면 말해라. 준비하라 이르마.”
“난 뭐든 잘 먹는다.”
“그래서 뼈밖에 안 남았나.”
다소 날이 선 음성에 그녀는 어깨를 움츠렸다. 그렇게 제 모습이 볼품이 없나 싶어 귀가 뜨거워졌다.
“그저, 입맛이 없어서….”
“그러니까 먹고 싶은 것을 말하라 하는 것이다.”
그가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는 것처럼 딱딱 끊어 내뱉는다.
뭐라도 말하지 않으면 화를 낼 것 같아 아무 음식이나 떠올려 보았지만 생각나는 것이 없다. 우물쭈물하기를 잠시 옛날 저를 젖 먹여 키운 이가 몰래 궁궐을 나가 사다 주곤 하던 엿가락이 생각났다.
“…꽃잎이 들어있는 엿을 먹고 싶다.”
“꽃잎이 든 엿?”
“저잣거리에서 파는 것인데… 어릴 적에 아주 좋아했다.”
그것은 유일하게 제게 쏟아지었던 애정의 증거였다. 그것을 움켜쥐고서 양손이며 입 주변이며 끈적끈적해질 때까지 물고 빨고 하던 것을 떠올리며 소루는 살짝 웃었다.
한때는 떠올리는 것만으로 가슴이 쥐어뜯기는 듯하였건만 지금은 그저 그립기만 했다.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여자의 무릎 위에 앉아 말랑한 젖가슴에 뒤통수를 파묻고서 달짝한 것을 먹던 때가.
자현은 별 시답잖은 것을 다 먹고 싶어 한다며 면박을 주었다.
소루는 조금 무안했지만 그가 관심을 기울여주는 것 자체가 기쁘고 행복해, 그런가 하며 웃기만 했다.
그가 퉁명스레 오가다 눈에 띄면 사다 주마 하고 중얼거리고는 제 할 일을 다시 시작한다. 그 무심한 한마디가 가슴속에서 울렸다.
“…고맙다.”
그가 못 들은 척 대꾸도 않고 사박사박 종잇장만 펼쳤다 들었다 한다.
눈치껏 차를 비우고 자리를 비켜줘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소루는 많지도 않은 차를 홀짝이며 시간을 때웠다. 조금이라도 이 시간을 연장하고 싶어 그렇게 하릴없이 앉아 미적거리고 있는데 문득 문밖에서 하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인님, 전보가 도착했습니다.”
소루는 낯빛을 흐렸다. 이삼일에 한 번 꼴로 온다던 전보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아니, 오늘 낮에 들어왔으니까 아닐 것이다.
그녀는 모른 척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잠시 뒤 그가 입을 열었다.
“외출하겠다. 말을 준비해라.”
“예에….”
그러고는 저를 향해 무뚝뚝하게 내뱉었다.
“시녀에게 방으로 데려가 달라 일러라.”
“아….”
그러고는 대꾸를 기다리지 않고 문을 열고 나간다. 그녀는 번쩍 고개를 들어 그를 향해 돌렸다. 그 순간 주위가 캄캄해진다.
‘뭐지…?’
좀 전의 불안감이 되살아나며 심장이 쿵쿵거리고 등 뒤로 식은땀이 주룩 흘렀다. 좀 전까지만 해도 밝았던 세계가 아득하니 시커멓게 물들어 간다.
소루는 멍하니 눈꺼풀을 매만져 보았다. 피안의 눈마저 점점 좁아졌다. 그것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검은 그림자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었다. 소루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허겁지겁 그를 쫓았다.
“자현!”
급한 손길에 바로 문고리를 잡지 못하고 쿵, 하고 문에 부딪혔다. 그녀는 통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기척을 쫓았다.
그가 놀란 듯 멈춰 선다. 소루는 숨을 삼켰다. 남자의 몸을 휘감고 있는 음습한 기운. 검은 얼룩 같은 것이 그를 흑운처럼 둘러싸고 있었다.
그녀는 그게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 옛날 금방 올게 하고 뒤돌아서던 이의 머리 위에, 장난감을 밀어 넣어주던 무녀의 가슴 위에, 제 곁을 지키던 어느 어린 여종의 배 위에 뭉글뭉글 피어오르던 것.
소루는 필사적으로 그의 옷자락을 거머쥐었다.
“가지 마라.”
놀란 듯이 남자의 몸이 희미하게 굳어진다. 그녀는 파들파들 손을 떨었다. 죽음의 기운이 아른아른 그의 몸을 짙게 뒤덮는다. 마치 검은 뱀 같은 사념(邪念)이 그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그것의 출처가 그가 손아귀에 움켜쥐고 있는 것이라는 걸 깨닫고 그녀는 낚아채듯 그의 손에서 그것을 빼앗아 들었다. 조그만 종잇장이 손아귀에서 와그작 구겨졌다. 그것을 작성한 이의 살의가 제게 들러붙는 듯하여 순간 속이 다 울렁거렸다.
“이게 무슨 짓이냐!”
“가면 안 돼.”
거칠게 뿌리치는 손길에도 물러나지 않고 그를 꽉 붙잡고서 외쳤다.
“나가면 나쁜 일이 생길 거다. 죽을 수도 있다.”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는 거냐.”
“정말이다! 여태껏 그래왔어. 내 곁에 있는 이들은 전부…!”
소루는 차분함을 잃고 소리쳤다. 조곤조곤 설명해 설득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마음이 불안하고 조급하여 혀끝이 자꾸 얼어붙는다. 과거 처참하게 죽어간 이들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어떻게든 못 가게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 그녀는 구겨 놓은 종잇장을 붙들고 속사포로 토해 냈다.
“이, 이걸 보낸 사람이 너를 해치려고 한다. 가면 큰일을 당할 거야.”
“하! 무슨 헛소리를…! 누가 보냈는지, 어떤 내용인지 네가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하는 거냐!”
“알아! 네 정인이잖아! 나도 다 안다. 네가 다른 이를 사모하고 있다는 것쯤은…! 네가 행복하다면 그래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하지만 지금 이 사람은 너를 해치려고…!”
“헛소리 집어치워!”
거칠게 내팽개치는 손길에 소루는 휘청거리며 나가떨어졌다. 소루는 낮게 신음했다. 남자에게서 짤막한 욕설이 터져 나왔다.
“그런 허황된 소리를… 지금 나보고 믿으라고 하는 거냐!”
“저, 정말이야. 너는 내가 가진 재주를 알잖느냐! 내 말을….”
“그만해!”
내뻗어 오는 그녀의 손을 그가 가차 없이 내치며 소리쳤다.
“있는 듯 없는 듯 있겠다, 아내로 여기지 않아도 된다, 그리 지껄여 놓고는…! 너는 늘 나를 헤집고 들어오려 하지! 대체 내게 뭘 바라는 거냐! 나는, 나는…!”
그가 격한 숨을 토해 냈다. 스스로를 주체할 수가 없다는 듯 그가 고함을 내질렀다.
“젠장! 처음부터 곁에 두는 게 아니었다. 매달리든 말든, 쓸모가 있든 없든, 너 같은 골칫거리 진작 멀리 보내 버렸으면, 내가 이런…!”
비수처럼 가슴을 찌르는 말에 소루는 눈물을 주룩 흘렸다. 그 모습에 그가 쿵, 하고 벽을 내려친다.
“젠장! 그러게 왜 나를 찾아와서…! 왜 나를 붙잡아서…! 왜 나한테 이런 말을 들어! 왜 내가 이런 말을 하게 해!”
“미, 미안… 하다. 미안해…. 두 번 다시 기대하지 않으마. 다가가지도 않으마. 멀리 보내도 돼. 그러니까….”
어깨를 떨며 울면서도 소루는 내뱉었다.
“…가지 마라.”
“젠장!”
다시 한 번 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두어 번 더 벽에 주먹질을 했다. 그녀는 발을 움츠렸다. 씩씩 울리던 거친 숨소리가 천천히 잠잠해지더니 잠시 뒤 그리 격렬한 행동을 한 사람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차분한 음성이 이어졌다
“그나마 네게 품은 동정심마저 식게 만들지 마라.”
“내 말을 믿어 줘. 정말로 이대로 나가면 네게 안 좋은 일이…!”
비웃는 소리가 선연하게 귓가에 울렸다.
“저도 계집이라고 사내를 붙들려 드는 게 그저 우습군.”
그러고는 돌아서서 가버린다. 소루는 망연히 주저앉아 그 멀어지는 빛을 멀거니 바라보기만 하였다. 차마 끼어들지 못하고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염이가 훌쩍거리며 다가와 몸을 일으켜 세워 준다.
“…마님, 이, 이만 방으로 돌아가요.”
잡아끄는 손길에도 옴쭉도 않고 그녀는 그저 오도카니 서서 그를 텅 빈 눈으로 좇았다. 마치 해가 먹구름에 집어삼켜지듯 켜켜이 어둠이 그를 집어삼킨다. 깜깜한 암흑이 스멀스멀 몰려들더니 이내 사방을 검게 물들였다. 제 세계가 죽어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발작적으로 염이의 손을 뿌리치고 달려 나갔다. 뒤에서 찢어질 듯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녀는 잠시도 멈추지 않고 잘 알지도 못하는 길을 내달렸다. 그러다 벽에 부딪히고 계단을 굴렀지만 멈추지 않았다. 어찌어찌 밖으로 나오자 멀리서 말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외쳤다.
“자현!”
이럇, 하는 외침과 함께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게 울린다. 그녀는 쫓아갔다. 미처 채 문을 닫지 못한 이들이 소스라치며 급히 물러나는 게 느껴졌다. 귀신 공주에게 닿으면 저주받는다는 말 때문인지 그들은 막아 세울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허겁지겁 멀어지기만 하였다. 그녀는 그들을 뒤로하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저 멀리서 염이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 소리가 들려온다.
“마님!”
그녀는 귀가 먹은 사람처럼 그저 앞을 향해 내달렸다. 늘 얌전히 방 안에 틀어박혀 있던 사람이 그런 행동을 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지 누구 하나 뒤쫓을 생각도 않는다. 소루는 맨발인 것도 잊고 도로를 마구 뛰어나갔다.
“자현!”
가지마.
숨이 턱까지 차서 제 귀에도 희미하게 들리는 소리를 힘겹게 토해 낸다. 그녀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모르고 계속해서 앞으로 달려 나갔다.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이내 희미해졌다.
소루는 오가는 사람들에 이리저리 부딪히면서도 계속해서 나아갔다. 컴컴한 어둠 속에 말소리, 수레바퀴가 돌아가는 소리, 물건을 파는 상인들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어지럽게 뒤섞인다. 낄낄낄, 귀신들의 웃는 소리도 들려왔다.
여기다. 여기야. 이쪽으로. 아니야, 이리로. 아니 이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