十三章. 왕실의 그림자
하인들이 드나드는 조그마한 쪽문을 통해 궐 안으로 들어서자 대기하고 있던 하인이 냉큼 튀어나온다. 자현은 그에게 말고삐를 건네고는 성큼 후원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하지만 채 서너 걸음을 못 걷고 수목이 무성한 정원 한가운데에서 우뚝 멈춰 서고 말았다.
“자현!”
등 뒤에서 아직도 소루가 그를 부르고 있는 것 같았다. 뒤돌아보지 않기 위해 그는 턱이 부서져라 이를 악물었다.
그런 바보, 머저리 같은 짓 하지 마. 뿌리치고 왔으면 언제나처럼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제 내키는 대로 하는 거다.
그는 굳어선 다리를 떼어내 앞으로 옮겼다. 하지만 가란의 침실 앞에 당도할 때까지도 소루의 우는 얼굴은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대체 왜 나를 이리 몰아붙여! 대체 왜!’
공연히 분노가 치밀었다. 가란과 있을 때는 이런 난폭한 기분을 느끼지 않아도 되었다. 소루에게 그러하듯 제 말과 행동을 통제할 수 없어진 적도 없었다. 그저 안락한 쾌락만을 생각 없이 탐하면 그만이다. 그는 그녀의 다리 사이에 열중하는 것으로 머리를 비우고 현실에서 눈을 돌렸다.
그래서 그게 뭐 어떻다고.
이를 악물며 그는 문고리를 움켜쥐었다. 애초에 저는 왕좌를 탐낸 적도 없고 귀신 공주를 원한 적도 없다. 저가 원했던 것은 오로지 입신하여 가문을 일으켜 세우고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맞는 것. 그에게 있어 야망이랄 것은 겨우 그 정도였다. 제멋대로 기대를 품고서 부채질을 해대는 비령이나 억지로 맞이하게 된 아내 따위 다 성가시고 귀찮을 뿐이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붉은 비단옷을 아름답게 차려입은 가란이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저를 맞이했다.
금빛 등불 아래 발갛게 빛나는 그 고운 얼굴을 바라보며 그는 성큼 그 앞으로 걸어갔다. 약간 차게 식은 몸을 와락 감싸 안자, 여자가 호응이라도 하듯 제 목에 팔을 휘감는다.
“자현….”
애원하는 듯한 음성에 따라 그는 고개를 수그렸다. 입술을 겹치고 끈적한 입 안으로 혀를 밀어 넣으며 가느다란 허리를 끌어당겼다. 그녀 특유의 강렬하고 화사한 향기가 콧속으로 스며들어 머릿속을 마비시킨다.
‘이거면 돼….’
그는 여자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눈을 감았다. 캄캄한 나락으로 굴러떨어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 진득한 감각에 잠겨 소루의 슬픔에 잠긴 얼굴을 떨쳐버린다.
더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아.
***
자현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도 가륜은 의자에 앉아 옴쭉도 하지 않았다. 사실은 문틈으로 놈이 무슨 수작을 하는지 톡톡히 두 눈에 새기고 싶었지만 참았다.
놈은 한계까지 오감을 단련한 무사였다. 타인의 시선쯤은 쉽사리 감지해낼 수 있을 것이다. 이미 몇 차례 암살자를 보내어 확인하지 않았던가. 일류 살수도 주검으로 돌려보낸 놈이다. 제 기척 따위야 어렵지 않게 눈치챌 것이다.
하여 가륜은 검을 단단히 틀어쥐며 끓는 속을 진정시키었다. 제아무리 가란이라고 해도 저 경계심 강한 놈이 인사불성이 되도록 술을 마시게 하는 것은 쉽지 않을 터. 적당히 취기가 돌았을 즈음 약을 먹여 아주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 후에 제 손으로 직접 목을 베어내는 거다.
‘어디 목뿐이냐. 온몸을 갈기갈기 찢어 주마.’
가륜은 한껏 음산한 미소를 머금었다. 자현이 놈이 제 앞에 무력한 처지에 놓여 빌빌댈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피가 뜨거워진다. 그리고 마음 한편에서는 도저히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짙은 안도감이 스며들었다.
이제야 괴로움에서 해방되는구나 하고 마음이 놓인다. 그 기분에 도취되어 가륜은 다소 여유롭게 제 안에 들어있는 수렁을 인정하였다. 가슴 안에 들어있는 시커먼 웅덩이 위에 비치는 한 사람의 얼굴을.
‘형님….’
누구나 매료되고 마는 고매한 인품과 하나를 알면 백을 깨우치는 지력, 그리고 단명의 숙명에도 불구하고 꺾이지 않는 강인한 의지력을 지니고 있던 사내.
그 비범함이 아쉬워 하나같이 탄식하였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어찌 그 같은 인물에게 저리 병약한 육체를 주었단 말인가. 차라리 가륜의 강건함이 세륜의 것이었다면 하고 선왕조차도 아쉬움의 한숨을 흘렸다.
‘그 말대로, 차라리 당신이 왕이 되었다면… 내가 이처럼 왜곡된 인간이 되는 일도 없었겠지.’
그는 시퍼런 눈으로 형의 잔상을 노려보았다. 당신과 비교되는 일이 없었더라면 저는 그저 훌륭한 형님을 존경하는 동생으로 남아있을 수 있었을 것이다. 저 사람이 병약하여 제 안에 이런 수렁이 생긴 것이다.
이제 와서는 닿을 길이 없는 원망의 말들이 그의 안에서 소용돌이쳤다.
무엇 하나 흠잡을 수 없는 완벽한 인간과 하나부터 열까지 비교당하는 고통과 굴욕을 그 누가 알까.
그는 언제까지고 모자란 왕이었다. 세륜이 왕이 되었다면 희란국에 유례없는 성군이 나셨을 것이다 하는 말을 평생 짊어지고 살아야만 한다. 자신의 모자람을 낱낱이 평가받아야 하는 수치심을 죽는 날까지 견뎌야 한다.
처음 태자 자리를 거부했던 것도 사실은 그를 배려하여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저 고고한 척 형님이 계신데 제가 감히 하고 지껄이는 것으로 제 자존심을 지켰을 뿐이었다. 세륜은 그저 동생의 우애에 탄복하였지만 제 안에서는 그런 음습한 열등감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는 불타는 것처럼 뜨끈한 눈두덩을 손바닥으로 감쌌다. 형의 얼굴은 곧 자현의 얼굴이 되었다. 그를 본 순간 하늘을 원망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이제야 벗어났는데 또다시.
자각할 새도 없이 그런 생각을 하였다.
차라리 알아볼 눈이 없었으면 좋았을 것을.
애꿎게도 그 누구보다 먼저 그 광채를 알아보고야 말았다. 모를 수가 없었다. 줄곧 갈망해 왔던 것이다. 보통의 인간과는 다른 비범한 인간만이 가지는 열기. 범인은 흉내 낼 수도 없는 위압적인 존재감.
아아, 나는 저렇게 되기를 원했다. 형님이 얼마나 잘났든지 간에, 제가 얼마나 못났든지 간에, 그 무엇에도 개의치 않고, 그 누구의 평가도 신경 쓰지 않고, 그저 스스로에게 긍지를 품고서 위풍당당하게 살기를 바라여왔다. 자기 자신에게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살아가길 원했다.
가륜은 평온함을 벗고 괴롭게 신음했다. 창자에서부터 증오심이 끓어오르고 마음은 요동을 쳤다.
제가 바라여왔던, 제가 죽어도 될 수 없는 인간 군상이 눈앞에 나타난 심정을 그 누가 헤아릴 수 있을까. 구멍 나고 뒤틀린 제 인격을 정면에서 마주 보아야 하는 고통을 누가 감히 이해할 수 있나.
그릇에 맞지 않는 비대한 자의식이 비명을 질러댔다. 누군가가 혹 알아보고 조롱하는 게 아닐까. 자현을 봐라. 기백이 다르지 않나. 역시 가륜은 범인의 그릇에 지나지 않는다. 뒤에서 숙덕숙덕 저를 비웃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들이 밤낮없이 그를 괴롭혀 왔다. 떨칠 수가 없었다. 그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하나뿐이다.
‘그러게 떠나라 할 때 떠났어야 했다, 자현.’
잠시 뒤 슬그머니 문이 열리며 굳은 얼굴의 하인이 준비가 끝났다 일러왔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란의 방으로 향했다.
이미 다른 종들은 모두 자리를 비켜선 상태. 으스스하게 느껴질 정도로 조용한 복도를 지나 가란의 침실 문을 열었다.
침상 한구석에 웅크리고 앉은 제 딸과 그 옆에 누워 곤히 잠들어 있는 자현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 장면을 싸늘한 눈길로 바라보던 가륜은 검을 빼 들었다.
스르릉, 하는 소리에 놈이 번쩍 눈을 뜬다.
그래. 자는 새에 쥐도 새도 모르게 죽는 것은 자현답지가 않지.
그는 씩 웃으며 바로 그 앞에 가서 섰다. 놈이 곧장 상황을 파악하고는 더듬더듬 제 검을 찾지만, 무기는 이미 저편에 치워둔 뒤였다. 가륜은 약 기운에 몽롱하게 흐려진 눈동자를 내려다보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래… 즐거운 시간 보내셨는가.”
“…독을 쓴 건가.”
“아니. 독 따위에 죽게 할 수는 없지. 다만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약을 썼을 뿐이다.”
자현이 몸을 일으켜 세우며 눈에 힘을 준다.
“송구스럽군. 친히 손을 더럽혀 주시다니.”
여유롭게 지껄이는 말에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살려 달라 비는 꼴을 보고자 하였지, 그리 태연한 얼굴을 보려고 한 게 아니었다. 가륜은 검을 치켜들어 가차 없이 휘둘렀다.
가란이 날카로운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정작 자현은 눈 하나 깜짝 않고 아슬아슬하게 칼을 피한다. 가륜은 침상에 박힌 검을 뽑아 들며 이를 드러냈다.
“과연 나라 제일의 장수답다! 약에 취하는 정도로는 쉽게 죽지 않는다 이건가!”
“과분한 칭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자현이 가물가물 흐려지려는 정신을 간신히 붙들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대꾸하였다. 이 와중에도 호기를 부리는 그 모습에 가륜의 인내심도 바닥을 드러냈다. 그는 눈에 불을 켜고서 칼을 휘둘렀다.
자현이 던진 비단 자락이 장검에 길게 찢어졌다. 자현은 바닥을 구르며 무기가 될 만한 것을 급히 찾았다. 하지만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젓가락 하나 들기도 힘이 들었다. 그는 떨리는 손을 움직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전부터 자네 키가 지나치게 크다는 생각을 하였지. 내, 다리를 좀 잘라 줌세.”
가륜이 비단 자락을 걷어내며 바닥을 기는 자현의 다리를 향해 칼을 들이댄다. 급히 다리를 끌어 올렸지만 종아리를 베이고 말았다. 자현은 이를 악물었다. 화끈거리는 통증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의자 다리를 움켜쥐고 혼신의 힘을 다해 휘둘렀다. 가륜 왕이 그것을 얻어맞고 휘청거리며 균형을 잃는다. 자현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왕의 몸을 밀치며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등 뒤로 가륜이 고함처럼 내질렀다.
“그래 봤자 독 안에 든 쥐다!”
***
자현은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어 필사적으로 걸음을 이어 나갔다.
‘…방심했다.’
복잡한 머릿속을 비우려 권하는 술을 넙죽넙죽 마신 것부터가 실수였다. 눈앞이 흐릿하고 온몸이 돌덩이라도 된 듯 무거운 상태에서도 그는 스스로를 비웃었다.
‘한 번 마음을 놓으면 그것으로 끝이라는 걸 질릴 정도로 잘 알고 있으면서….’
궁궐이 전쟁터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못 하지 않다는 사실을 지겹게 체험해 놓고도 여태 정신을 못 차렸나.
‘꽤나 시시한 최후로군.’
적들이 우글우글한 전장을 거치고 그 무시무시한 적장과 대결하고서도 살아남은 저가 겨우 미색에 홀려 이런 위기에 처하다니. 희극도 이런 희극이 없다.
이휼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노릇이군.
필사적으로 출구를 찾아 헤매면서도 그는 오래전에 해치운 적의 얼굴을 떠올리며 웃음을 흘렸다.
“…놀랍군. 이 와중에도 웃을 여유가 있다니.”
기둥에 기대어 서서 무기가 될 만한 것을 찾아 헤매던 자현은 거의 본능적으로 몸을 숙여 날아든 검을 피했다. 죽도록 갈고 닦은 육감이 아니었다면 단박에 목이 베였을 것이다.
가륜이 나무로 된 기둥에 박힌 검을 뽑아 드는 사이에 그는 몸을 굴려 반대편으로 도망쳤다. 팔자 좋게 자학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자현은 부들부들 떨리는 팔에 힘을 주어 필사적으로 문을 밀었다. 전부 자물쇠로 걸어 잠근 터라 옴쭉도 하지 않는다.
“하하하! 자현이 문 하나를 못 열어 낑낑거리다니 볼만하구나!”
뒤쫓아 온 가륜이 그것을 보고 광소를 터트린다. 말대꾸를 할 여유는 없었다. 그는 온몸으로 문을 쿵, 하고 밀었다.
가륜이 또다시 칼을 휘둘렀다. 급히 몸을 숙였지만 움직임이 굼떠 어깨를 깊숙이 찔리고 말았다. 자현은 바닥으로 무너져 내리며 신음을 토해 냈다. 왕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기색이 어린다.
“어디 살려달라고 애걸해 보아라.”
“…애걸하면 살려줄 텐가.”
심드렁한 대꾸에 남자의 얼굴이 극적으로 일그러진다.
“네놈은 이런 순간조차 굴복하지 않는 건가.”
그가 어깨에 박힌 칼을 비틀었다. 자현은 이가 다 나가도록 턱을 다물어 비명을 삼켰다. 가륜이 가차 없이 칼을 뽑아들며 미친 듯이 외친다.
“나 따위에게는 굴복할 수 없다 이건가! 이 와중에도 나를 업신여기는 것인가!”
자현은 피가 흐르는 어깨를 필사적으로 움켜쥐며 옆으로 몸을 숙여 날아드는 칼을 피했다. 우직근, 소리를 내며 나무로 된 문이 날아든 칼에 부서진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다리를 들어 그의 복부를 가격한 뒤 밖으로 뛰어나갔다. 다리에서도 지독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이를 악물며 버텼다.
‘숨어 있을 곳을….’
그는 점점 흐려지는 시야에 애써 힘을 주었다. 가란의 별궁은 내궁에서도 가장 외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다른 누군가와 마주칠 확률은 극히 희박하다. 성문을 통해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정원 어딘가에 숨어 상처를 추스르는 수밖에는 없다.
‘적어도 약효가 떨어질 때까지는 시간을 끌어야 한다.’
그는 비틀거리며 수풀이 무성한 곳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하지만 엉망진창이 된 몸으로 그리 빨리 숨을 수 있을 리가 없다. 금세 가륜이 뒤따라왔다.
재빨리 몸을 숙여 검은 피할 수 있었지만, 균형을 잡지 못하고 바닥으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곧장 반대편 다리에 가차 없이 검이 틀어박힌다. 자현은 끅, 하는 소리를 내며 흙바닥을 긁었다.
“이제는 더는 미꾸라지처럼 도망치지 못하겠지.”
그는 이를 악물며 왕의 희번덕이는 눈을 노려보았다. 더는 도망칠 기운도 없었다. 왕이 다리에서 검을 뽑아 보란 듯 들어 올린다. 피가 줄줄 흐르는 검이 희미한 등불 아래 요요하게 빛났다.
“네놈의 가슴을 열어 길바닥에 버려두면 다들 그 살인귀의 소행인 줄로 알겠지. 하하. 영웅에게 어울리지 않는 비참한 최후가 아닌가. 더 이상 누구도 너를 추앙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고는 발을 들어 가슴팍을 짓눌렀다. 더는 발버둥 칠 기운도 남아 있지 않다. 그는 출혈로 인해 흐려진 눈을 가늘게 떴다.
결국 이리 한심하게 끝나는군.
가지 말라 붙들던 소루의 얼굴이 떠오른다.
네 말을 무시하여 이 꼴이야. 꼴좋다 마음껏 비웃어라.
하지만 눈앞에 아른아른 떠오른 그녀는 웃기는커녕 슬픈 듯 고개를 떨군다.
그런 얼굴 하지 마. 절대 슬퍼하면 안 돼.
‘…지독한 말만 퍼부어댄 나 같은 인간 때문에 울지 마.’
그녀의 모습이 점점 흐려진다. 더는 표정을 알아볼 수도 없었다. 그 순간, 믿을 수 없게도 가슴이 미어져 왔다. 내 멋대로 살아왔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생. 이 꼴사나운 최후가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지만 스스로도 제 명이 길지 않으리라 하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결국 이렇게 되는군, 하는 스스로에 대한 조소만이 있을 뿐 억울하고 분한 마음이 드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너는… 내가 사라지면 어떻게 되는 건가.’
저를 이용하려 드는 이, 저를 원망하고 증오하는 사람들만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 너는 대체 어떻게 살아갈 건가.
오로지 그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 차올랐다. 자신을 따르던 이들, 충성하는 친우, 저를 사랑한다 지껄이고는 배신한 여자, 그 모든 게 희미하다.
선명한 것은 줄곧 하찮게 취급해 온 그 조그만 여자뿐이다. 오로지 그녀만이 생에 대한 미련이 되어 그를 움켜쥐어 온다.
네게 퍼부어댄 말만이 후회가 되어 목을 졸라와. 이 세상에, 너를 홀로 두고 싶지 않다.
“이것으로 나는 해방된다.”
왕이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칼을 높이 치켜들었다.
자현은 질끈 눈을 감았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몸을 찢는 통증은 느껴지지 않는다. 대신에 왕의 비명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누, 누구냐…!”
가륜의 날카로운 음성에 자현은 간신히 눈을 떴다.
가륜이 피 흐르는 팔뚝을 움켜쥐고서 어둠 속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잠깐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가륜의 오른쪽 팔이 기묘한 각도로 꺾여 있다. 왕이 악에 받친 고함을 내질렀다.
“누구냐고 묻지 않느냐!”
어둠 속에서 키가 큰 사내가 말없이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그 얼굴을 본 가륜은 눈을 부릅떴다.
“너, 너는…!”
금색 눈동자가 무심하게 왕의 얼굴과 자현의 얼굴을 훑어 내린다. 그 미려한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며 가륜은 휘청,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사내의 모습에, 혼란한 머릿속에 겹겹이 처져 있던 장막이 걷히고 제 수렁의 밑바닥에 자리하고 있던 이가 고개를 쳐들었다.
“기쁘시겠어, 형님.”
세륜이 숨지던 날, 제 귓가에 은밀히 닿았던 속삭임. 존경한다 지껄이던 이의 시체를 눈앞에 두고 희열에 떨었던, 안도감에 눈물을 흘렸던 저를 꿰뚫어 보고서 조롱해온 그 아름다운 동생이 쌕 웃는다.
“그 같은 인간과 항시 비교당해야 하다니, 가엾은 둘째 형님. 차라리 나처럼 서자로 나는 편이 나았을 텐데…. 륜이라는 이름에 옭아매일 일이 없었다면 당신도 좀 더 자유롭게 살 수 있었을 테지.”
가륜은 세륜의 발끝에도 못 미친다 하던 아비의 탄식을 엿듣고 수치심에 떨던 제게 희롱하듯 지껄여 오던 그 나른한 음성이 귓가에 선연하다. 제 고뇌를 알아채고서 귀신과 같은 말들로 제 안에 도랑을 깊이 판 동생.
“하지만 당신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이상에, 평생을 애태워야 하는 운명인 거군. 비참하게도….”
“신… 율….”
십수 년 만에 불러보는 그 이름은 가늘게 허덕이는 소리가 되어 허공에 흩어졌다.
그는 제 가슴에 박힌 손을 내려다보며 입을 벌렸다. 울컥 피가 토해져 나왔다. 그것을 온몸에 뒤집어쓰고서도 사내는 눈 하나 까딱 않는다.
가륜은 필사적으로 그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도 모르는 채로 입술을 달싹였다.
채 쏟아내지 못했던 원망의 말을 퍼부으려 했던 것인가.
피가 줄줄 흘러내리는 입을 뻐끔뻐끔거리던 가륜은 이윽고 허망하게 무너져 내렸다.
그 모습을 무심하게 내려다보던 사내는 곧 자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자현은 의식을 간신히 붙들고서 그를 노려보았다.
고요하며 비통한 눈. 눈물이 일렁이는 것처럼 사내의 금빛 눈이 출렁인다. 왜 그런 얼굴을 하는지 의문을 느낄 새도 없이 그가 몸을 돌렸다.
기다려.
입술을 달싹였다.
왜 나를 죽이지 않는 건가.
‘어째서 나를….’
뒤따라가 따져 묻고 싶었지만 점점 시야가 어두워진다.
자현은 멀어지는 사내의 뒷모습을 마지막으로 눈을 감았다.
***
희미한 달빛 아래 폐궁은 더욱 을씨년스럽게 보였다. 아시타는 잡초가 무성한 정원을 지나 그 흉물스러운 건물 앞에 우뚝 섰다.
줄곧 이 부근을 살펴왔지만 사람의 출입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던 터라 이리 가까이에서 본 건 처음이었다.
‘야토는 줄곧 이곳에서….’
그는 고개를 길게 빼고서 짐승의 아가리 같은 시커먼 입구 안을 들여다보았다. 요력이 느껴지진 않았다.
이 부근을 감시하던 법령사가 놈이 성을 나오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하였으니 안에 숨어 있지는 않겠지.
“결계를 설치해 둘까?”
옆에 조용히 서 있던 여란이 물었다. 아시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둘러라. 놈이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
그의 허락이 떨어지자 뒤에 대기하고 서 있던 이십여 명의 법령사들이 일제히 성을 둘러쌌다.
그들이 바닥에 진을 깔고 주변에 겹겹이 결계를 치는 동안 아시타는 성 내부를 살피기 위해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뒤따라 들어온 여란이 부적 하나를 꺼내어 불을 붙였다.
“…최소 십 년은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거 같군.”
그녀가 팔을 높이 들어 내부를 훤히 밝히며 말했다. 확실히 성 안은 바깥보다 으스스하였다. 천장은 온통 거미줄로 뒤덮여 있었고 기둥이며 벽에는 먼지가 뽀얗다. 어디선가 쥐 울음소리도 들려왔다. 도저히 사람이 살고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모양새.
‘비령이라는 자의 말이 맞았군.’
그 뻔뻔스러운 남자의 얼굴을 떠올리며 아시타는 인상을 썼다.
야토와의 싸움이 있은 지 사흘 후, 홀연히 찾아온 그 남자는 야토가 숨을 곳을 알려줄 터이니 퇴치에 성공하면 그 공을 자호가에게 돌려달라는 요구를 해왔다. 내심으로는 기가 막혔지만 아시타는 순순히 응했다. 놈을 찾을 길이 막막하던 참에 사내의 말이 더없이 반가웠던 것이다.
‘그놈의 얼굴, 이전에 본 적이 있다. 눈동자 색과 분위기가 판이하게 달라 바로 알아보지 못하였지만… 일전의 대결로 생각났어. 그 비범한 용모, 틀림없이 신율 왕제의 것이야.’
신율 왕제라면 선왕의 여인을 농락한 대가로 폐궁에 유폐되었다는 왕자가 아니던가.
희란국에 들어오던 날 들었던 야담꾼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아시타는 얼굴을 심각하게 굳혔다.
야토가 왕제의 인겁을 뒤집어쓰고 왕궁에 숨어 있다면 타국민인 저희들로서는 섣불리 발을 들일 수가 없었다.
“폐궁을 조사하는 것을 도와줄 터이니 나와의 약속을 잊지 말게나.”
그리 다시 한 번 신신당부를 한 비령이 그를 포함한 몇몇 법령사들에게 위장신분을 만들어 주었다. 그걸 가지고 그들은 은밀히 폐궁을 조사했다. 외부인의 접근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던 터라 그 안을 살필 수는 없었지만, 확실히 그 주변에는 음산한 기운이 흐르고 있다. 그들은 반경 이 리(里) 밖에서는 항시 진을 치고서 놈의 움직임을 면밀히 주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한발 늦고 말았지만….’
해질녘, 장안에서 벌어진 두 번째 참상을 떠올리며 아시타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놈이 폐궁에서 나오는 걸 본 법령사들이 서둘러 뒤를 쫓았지만 이미 수십 명의 사람들이 죽은 뒤였다.
그 끔찍한 광경을 보고 아시타는 오늘에야말로 놈과 결판을 내자 결심하고서 수십 명의 법령사들을 데리고 예까지 숨어들었다.
후에 남방민인 저희들이 멋대로 궁궐에 침투한 것이 알려지면 크게 문제가 될지도 모를 일이지만 더 이상 놈이 설치게 둘 수는 없었다.
“아시타, 이리로….”
문득 앞서가던 여란이 심각한 음성으로 그를 부른다. 아시타는 그녀가 가리키는 방으로 고개를 디밀었다.
순간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열댓 명이 넘은 이들이 마치 푸줏간에 걸린 고기처럼 거꾸로 매달려 길게 혀를 쭉 빼고 죽어 있었다. 방 안에서는 썩은 피 냄새가 진동을 했고 바닥은 온통 검은 피로 눌어붙어 본래 색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모두 심장을 빼앗겼다.”
여란이 참담한 음성으로 말한다. 부적을 든 그녀의 손이 파르르 떨린다.
시체를 추슬러 위령제를 드려주고 싶었지만 그럴 만한 시간이 충분치 않다. 놈이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모른다.
“…일단, 함정을 파놓는 게 우선이다.”
“안다.”
그녀가 굳은 얼굴을 하고 돌아선다. 그 순간이었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온다. 아시타는 거의 본능적으로 부적을 붙였다.
“끼아아아아악!”
인겁을 뒤집어쓴 요괴였다. 두꺼비같이 생긴 흉한 얼굴이 찢어지고 거기에서부터 검은 진흙 같은 것이 부풀어 올랐다. 아시타는 곧장 법문을 외웠다. 놈이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었다.
“젠장!”
그 옆에 숨어있던 놈이 그 광경을 보고 재빨리 도망친다.
여란이 재빨리 염주를 펼쳐 들었다. 그것이 길게 늘어나며 요괴의 몸을 휘감았다.
“이거 놔!”
여란이 무서운 눈을 하고서 염주를 잡아당겼다. 그러자 요괴를 휘감은 구슬에서 뇌전이 번쩍번쩍 튀었다. 요괴가 고통스레 꺽꺽거리며 경련을 한다. 아시타는 급히 그녀를 만류했다.
“아직 죽이지는 마라. 물어볼 것이 있다.”
살의를 주체할 수 없는 듯 어깨를 파르르 떨던 여란이 작게 욕설을 토해 내며 주술을 푼다. 요괴가 바닥에 주저앉아 가느다란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아시타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 모습을 살폈다. 쫙 찢어진 눈에, 앙상한 얼굴, 시뻘건 두 눈….
“지네 요괴인가.”
“…뭘 원하는 거냐.”
“다른 요괴들은 어디에 있지?”
“나와 저놈뿐이다. 나머지는 야토가 부르지 않으면 오지 않아.”
폐궁 내에 요력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사실인 듯싶었다.
“야토 놈은, 어디로 갔나.”
“몰라, 공주를 두고는 말도 없이 나가버렸다.”
도망칠 길을 찾는 듯 눈을 이리저리 굴리던 요괴가 툭 내뱉는다.
아시타는 눈을 크게 떴다.
“공주…? 지금 소루 공주를 말하는 건가?”
“네놈들 공주를 어찌한 거냐!”
요괴가 답할 새도 없이 여란이 또다시 염주에 법력을 주입한다.
요괴가 몸부림치며 비명처럼 내질렀다.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야토가, 야토가 인간으로부터 구해서 방에 데려다 놓았을 뿐이다!”
여란이 법력을 풀었다. 요괴가 또다시 고통이 쏟아지는 것이 두려운 듯 오들오들 떨면서 복도 제일 끝에 자리한 방문을 가리킨다.
“저, 저기에 있다.”
여란이 염주를 놓고는 그리로 급히 달려간다. 아시타는 요괴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단단히 붙들고서 급히 그 뒤를 쫓았다. 요괴가 짐짝처럼 질질 끌려오며 앓는 소리를 해댄다. 그것을 싹 무시하고는 반쯤 열려있는 문 안으로 고개를 내미니 희미한 불빛이 보인다.
그는 성큼 그 안으로 들어섰다. 먼저 들어간 여란이 자그만 화롯불 앞에 켜켜이 쌓여있는 이불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소루 공주인가?”
“…그래.”
그녀가 침통한 음성으로 답한다. 그는 그 앞으로 가 몸을 숙였다.
겹겹이 쌓아올린 낡은 비단 이불 위에는 상처투성이의 공주가 죽은 듯 누워 있었다. 그 처참한 모습을 보고 아시타는 얼굴을 굳혔다.
이마는 찢어져 시뻘겋게 부어올라 있었고, 팔뚝과 종아리는 온통 멍투성이다. 그는 급히 손을 내려 그녀의 코 밑에 대어 보았다. 다행히도 숨은 쉬고 있다.
“네놈들의 소행인가?”
굳은 얼굴로 그 처참한 모습을 살피던 여란이 살기등등한 시선을 요괴에게 던진다. 요괴가 기겁을 하며 외쳤다.
“우리는 공주에게 상처 하나 내지 않았다. 인간들이 해코지 하는 것을 야토가 구해왔다고 하지 않았나!”
“확실히… 구타를 당한 것 같다.”
혹 심각한 상처는 없는지 살피며 아시타가 덤덤히 동의했다.
“장안에 소루 공주에 대한 원망이 자자하다더니 성난 군중들이 이리 만들어 놓은 모양이군.”
그렇다면 장안에 늘어진 시체는 공주를 구타하던 이들의 것인가. 그래서 그리 처참하게 갈기갈기 찢어 놓았나.
“전후 사정이 어찌 되었든 이대로 둘 수는 없다. 내가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켜 놓지.”
멍투성이 소녀를 복잡한 눈으로 내려다보는데, 여란이 어미 새처럼 소루를 품에 번쩍 안아 든다.
“너는 서둘러 준비한 함정을 설치해라.”
“그래. 법령사들에게도 서두르라고 전해 줘.”
야토가 이 소녀를 두고 오래 떠나 있을 리 없다. 머지않아 돌아올 것이다.
여란이 소녀를 안아 들고 나가자마자 아시타는 방 안을 살폈다. 이 방이 놈이 주로 머무는 공간인 듯 이전에 보았던 끔찍한 방과는 달리 깨끗하다.
천장에는 거미가 집을 지어 놓았고, 구석에는 먼지가 쌓여 있었지만 적어도 끔찍한 시체는 보이지 않는다.
그는 각 구석에 준비해 온 부적을 눈에 띄지 않게 조심스레 붙였다. 그러고는 공주가 누워있던 이불 안에도 주술을 걸어 놓기 위해 돌아서는데 탁, 하고 뭔가가 발에 차인다.
고개를 숙여 그것을 확인한 아시타는 인상을 찌푸렸다. 시커먼 먼지에 쌓인 해골이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빌어먹을 요괴 놈.”
대체 얼마나 죽여 놓은 건가 하고 욕설을 내뱉으며 그것을 주워들었다. 그 안에 숨어 있던 거미가 우르르 기어 나와 솜털이 부숭숭한 다리를 하느작거린다. 아시타는 눈살을 찌푸렸다.
순간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로 진득한 사념이 바짝 마른 두개골에서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혹시….’
그는 염주에 꽁꽁 묶인 채 구석에서 바동거리고 있는 요괴를 향해 물었다.
“이거, 혹 신율 왕제의 유골인가?”
“나는 신율 왕제가 누구인지 모른다.”
그리 내뱉고는 퉁명스레 덧붙인다.
“그게 이 성의 주인의 것이라는 사실만 안다.”
아시타는 굳은 얼굴로 빤히 그 해골을 내려다보았다.
왜 하필 야토는 신율 왕제의 모습을 하고 있는 건가.
쓸데없는 호기심이 물큰 치밀고 올라왔다.
‘시간이 얼마 없는데….’
굳은 듯이 서서 망설이던 아시타는 결국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부적을 꺼내 들었다. 법문을 외우고 부적에 불을 붙이자 주변의 공기가 일렁이며 과거의 그림자가 신기루처럼 펼쳐졌다. 그는 고개를 들어 펼쳐진 풍경을 둘러보았다.
마치 폭풍우가 지나간 듯 엉망이 된 방 한가운데 야토가 씩씩거리며 서 있었다. 아니, 야토가 아니었다. 무자비해 보이는 새까만 눈동자와 비웃는 듯 얄팍한 입매, 요염함이 흐르는 미려한 자태와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날카로운 표정….
‘이자가… 신율인가.’
“그 계집애를 죽이고 와.”
씩씩거리던 사내가 어느 한곳을 보며 말하였다.
“그년을 죽이고 오면, 얼마든지 안아주마.”
그 말에 구석에서 오돌오돌 떨고 있던 이가 번쩍 고개를 든다. 마흔은 되어 보이는 추한 외모의 노비였다. 사내가 비척비척 늘어진 옷자락을 질질 끌고 그 앞으로 다가서서 여자의 머리칼을 우악스레 움켜쥐었다.
“평생 사내에게 안겨 볼 일 없는 네년을, 왕의 아들이 안아 주겠다는 거다. 목숨을 내놓아도 아깝지 않겠지?”
노비가 흐느끼는 듯한 소리를 더듬더듬 토해 냈다. 그걸 내려다보는 사내의 아름다운 얼굴에는 혐오감이 뚜렷하였다. 감출 생각도 않고 경멸하듯 노려보며 사내가 노비의 머리채를 던지듯 놓았다.
“그년이 살아 있는 한 아비는 나를 용서해 주지 않을 거다. 그 계집애가 죽어야 내가 이 지옥 같은 곳을 나갈 수 있어!”
날카로운 목소리가 방 안에 예리하게 울려 퍼졌다. 씩씩거리며 흐트러진 숨을 토해 내던 사내가 돌연 한없이 애처로운 얼굴을 하였다. 마치 어미 잃은 어린 소년처럼 슬픈 얼굴을 하고는 그가, 흐느끼는 노비의 품으로 기어들어가 안겼다.
그러자 여인의 뚱뚱한 몸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가늘게 떨리기 시작한다. 그 창백하던 얼굴은 금세 발갛게 달아오르고 두 눈은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그 열에 들뜬 듯한 얼굴을 애절하게 바라보며 신율이 간절하게 말하였다.
“나를 구할 수 있는 것은 너뿐이다. 오로지 너뿐이야.”
“…….”
“여기에 계속 있다가는 미쳐버리고 말 거야. 광인이 되어 목을 매고 죽을지도 모른다.”
여자가 그러지 말라는 듯 미친 듯이 도리질한다. 신율은 여자의 뺨을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내 부탁을 들어줄 테지? 이렇게 가엾을 나를, 너만은 뿌리치지 않을 거야.”
여자가 고개를 끄덕인다. 신율은 고맙다 하며 여자의 몸을 와락 끌어안았다.
아시타는 그 광경을 바라보며 진절머리 쳤다. 그 품에 안긴 노비는 볼 수 없을 테지만 여자의 어깨에 놓인 신율의 얼굴은 실로 냉랭하였던 것이다.
그를 알 길이 없는 여자는 그저 행복한 얼굴을 하고서 방을 나선다. 신율은 곧장 더러운 것이라도 떨치듯 입고 있던 옷을 벗어 바닥에 내팽개쳤다. 그러고는 화풀이를 하듯 탁상을 걷어찼다.
“젠장, 여기서 나가기만 하면 저 끔찍한 계집은…!”
손도 대지 않았음에도 남자의 사념이 하도 지독하여 절절히 스며들었다.
사내의 안에는 타자를 사랑하는 마음 따윈 티눈만큼도 없었다. 태어나 한 번도 본 적 없는 딸 따위는 제 인생에서 급히 치워야 할 오물일 뿐이고, 주제도 모르고 저를 연모하는 노비 따위는 부리기 좋은 가축일 뿐이다. 저 들개와 같은 여자와 성교를 한다는 생각만으로 구역질이 치밀었지만 왕궁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는 못할 짓이 없었다.
그래, 개에게 먹이를 던져 준다고 생각하고 한 번 안아 주자. 여길 나가면 그 뒤에 저 구역질 나는 몸을 갈가리 찢어 개밥으로 던져 주면 된다.
그리 의기양양하게 생각하며 사내는 저 여자를 어찌 죽여야 속이 시원할까 하며 웃었다.
아시타는 급히 그에게서 멀리 떨어졌다.
세상천지에 이처럼 뒤틀린 심성을 가진 인간이 다 있는가.
아름다운 것은 외양뿐, 속은 구더기가 드글드글하다. 온갖 악인들을 보아 왔지만 이처럼 썩어빠진 내면을 가진 인간은 처음이었다.
자기 딸조차 아무렇지도 않게 죽이려고 하는 그 악랄한 심성에 치를 떨며 아시타는 주술을 중지시키기 위해 부적에 손을 뻗었다. 더는 이 끔찍한 인간을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술법을 파훼하기도 전에 잔상이 흩어지더니 곧이어 다른 풍경이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아시타는 음산한 기척을 느끼고 휙 고개를 돌렸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듯 사위가 깜깜하다.
벌컥 문이 열리더니 좀 전의 그 노비가 방으로 들어섰다. 사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에게 달려갔다. 그러고는 그 계집애를 죽였느냐 하고 물었다. 노비는 아무 말 없이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기만 하였다. 사내가 성마르게 다그쳤다.
“그년을 죽였느냐고 묻잖아! 성공했으면 고개를 끄덕여 보아라.”
“왜… 너는… 사랑….”
벙어리였던 계집이 느닷없이 말을 내뱉는 것에 놀라 신율은 눈을 크게 떴다. 여자가 혼란스러운 듯 고개를 갸웃하며 입술을 옴쭉거렸다.
“사…랑… 하지… 않나… 인간은….”
“헛소리 집어치우고, 그 계집애를 죽였는지 아닌지만 대답해!”
사내의 살벌한 으름장에 여자의 눈이 마치 타오르는 듯 일렁이더니 서서히 금빛으로 뒤바뀌었다. 아시타는 몸을 굳혔다.
야토다.
놈이 손을 신율의 배 속에 박아 넣었다. 신율이 황망하게 눈을 부릅떴다. 야토는 태연히 사내의 몸속에서 창자를 끄집어내었다. 그제야 신율이 고통을 느낀 듯 비명을 내지르며 도망쳤다. 야토는 손에 쥔 것을 잡아당겼다. 팽팽히 당겨진 창자가 끊어질 듯하여 신율이 양팔을 허우적거리며 외쳤다.
“그거 놔아아!”
요괴가 그것을 잡아당겨 기어코 끊어 놓는다. 사방에 피와 오물이 줄줄 흘렀다. 신율이 배를 끌어안고서 도망치려 몸을 돌렸다. 요괴가 그런 그를 움켜쥐어 끌어당기고서는 고개를 숙였다. 으적으적 사내의 살코기와 내장을 씹는 소리가 질척하게 들렸다. 신율이 비명을 내지르며 온몸을 뒤틀었다. 요괴는 배 속에 고개를 처박고 걸신들린 것처럼 먹고 또 먹었다.
아시타는 올라오는 구토를 간신히 삼켰다. 잠시 뒤 피 웅덩이 속에서 요괴가 고개를 쳐든다.
어느새 입고 있던 껍질을 벗고 새 껍질을 입은 요괴가 피에 젖은 입가를 훔쳐 내린다. 그만큼이나 먹어 치워 놓고도 그는 여전히 굶주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째서 인간은….”
휘청, 피 웅덩이에서 왕자의 모습을 한 요괴가 혼란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인간이면서… 왜…?”
피투성이 얼굴을 감싸며 그가 형형히 눈을 빛낸다.
“사랑은… 인간만의 것이 아니던가. 한데… 왜 그녀를… 어째서… 나는 이리도 바라건만….”
두서없이 쏟아지는 말을 들으며 아시타는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 누구보다 사랑을 갈망하는 요괴와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인간. 그 대비가 뼈아프게 가슴팍을 파고들었다.
이윽고 부적이 다 타버리고 방 안에는 요괴와 해골 그리고 요괴가 소녀를 위해 피운 화롯불만이 댕그라니 남았다.
타닥타닥, 불씨가 타는 소리를 들으며 아시타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곤충의 다리를 잡아 뜯는 순진무구한 어린아이처럼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잡아먹는 귀신이다. 동정의 여지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요괴의 괴로움이 그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젠장….”
작게 욕설을 내뱉는데 다음 순간 여란이 문 안으로 뛰어 들어오며 외친다.
“놈이 오고 있다!”
“결계는?”
“모두 설치했어.”
아시타는 굳은 얼굴로 주먹을 그러쥐었다. 어떠한 이유에서든 사람을 해치는 요괴를 살려둘 수 없다.
‘내가… 네놈을 번뇌에서 해방시켜주마.’
그는 함정을 놓아두고는 서둘러 방에서 나왔다.
***
야토는 잡초가 무성한 정원을 지나 폐궁 앞에 섰다. 하늘에 달이 훤하다. 안으로 들어가기 직전 그는 그 빛에 이끌린 듯 고개를 들었다.
그 어느 날 추한 제 모습을 여과 없이 비추던 그 달이 오늘은 피에 흥건히 젖은 제 모습을 비추고 있다.
그는 끈적끈적하게 젖은 시뻘건 손을 내려다보았다. 인가에 숨어들 때가 아니고서는 별로 신경 써 본 적 없는 일이다. 피를 뒤집어쓰든 오물을 뒤집어쓰든 그는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공주는 싫어할 테지.
그런 제 생각에 요괴는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인다.
공주가 싫어하든 말든 무슨 상관인가. 그는 아직 인간이 아닐 터였다. 그 누구의 미움도, 그 누구의 애정도 제 마음에는 닿는 일은 없다. 그렇다면 왜 상관하는가?
‘아직은 아니지만… 곧 인간이 될 터이니….’
납득이 가는 답변은 아니었다. 곧 인간이 될 터이지만 아직은 아닌 것이다. 귀신인 제가 타자의 마음을 신경 쓸 이유가 하등 없다. 거기까지 생각한 요괴는 곧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을 관두었다.
지겹도록 묻고 또 물었지만 답을 얻는 일은 없다. 그렇다면 떠오른 의문을 깊이 파고들지 않는 게 이롭다는 것을 수백 년이 지나서야 겨우 깨친 것이다.
요괴는 그저 제가 인간의 흉내를 내는 일에 익숙해져서 그런 것이다 하고 대충 결론을 내고는 비척비척 성 안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그녀가 잠들어 있는 방으로 향하는 동안 머릿속은 또다시 혼란에 휩싸인다.
그녀를 데리고 검은 여우를 찾아가 인간의 상처에 잘 듣는 약을 달라고 청해야 하는 게 아닐까. 아니면 그녀를 다시 인간의 집에 데려다줘야 하나.
어느 쪽도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생각이었다.
왜 요괴인 제가 인간의 상처를 신경 쓰는 거지? 그야 그녀가 죽으면 곤란하니까. 나는 인간이 되어 그녀를… 하고 싶은 게 아니던가. 그럼 왜 그녀를 인간의 집에 데려다줘야 하지? 그야 그녀가 그것을 원할 테니까. 어째서 그녀가 원하는 것을 들어줘야 하는 거지?
또다시 의문이 의문에 꼬리를 문다. 그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만둬. 더는 생각하지 마라. 아무리 생각해도 요괴는 결코 알 수 없다. 인간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래,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있으면….’
사실은 완전한 인간이 되기 전에는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을 생각이었다. 닿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왜 자꾸 공주는….
혼란스레 얼굴을 감싸던 요괴는 문득 초조함을 느끼고는 걸음을 서둘렀다. 그녀가 혹시라도 깨어났을지도 모른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녀가 방에서 나와 헤매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는 그녀를 뉘이고 나왔던 방으로 황급히 뛰어 들어갔다.
‘아직… 깨지 못한 것인가.’
발갛게 빛나는 화롯불 앞에 누운 조그만 등을 보고 마음이 놓인 것도 잠시 슬그머니 걱정스러운 마음이 든다. 아니, 요괴는 제가 걱정을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하고 그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서 살금 그 앞으로 다가섰다. 부러 인기척을 내었지만 겹겹이 쌓아올린 이불 위에 뉘인 그 자그만 몸뚱이는 미동도 않는다.
그는 공주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허리를 구부렸다. 그리고 그녀의 어깨 위에 올려놓았던 이불을 걷어냈다.
그 순간 이불이 부풀어 오르며 그 안에서 수천 장의 부적이 날아들었다. 요괴는 뒷걸음질 쳤다.
이불 속에는 소루 대신 나무로 만든 인형이 누워 있었다. 그 인형의 몸에 빼곡히 새겨진 문자들이 푸른빛이 되어 흘러나와 그의 몸을 사슬처럼 휘감았다.
야토는 급히 신력을 끌어 올렸다. 하지만 문자들은 흩어지기는커녕 그 숫자를 더욱 늘려가더니 이윽고 제 몸을 뒤덮었다.
‘신력이….’
야토는 불타는 듯한 열기를 느끼고 몸을 뒤틀었다. 내부에 억눌러 놓았던 힘이 부풀어 오르더니 꿈틀꿈틀 거칠게 약동한다.
그는 터질 듯이 팽창하는 몸을 필사적으로 끌어안았다. 요력을 끌어올려 어떻게든 술법에서 벗어나려 하였지만 이미 바닥이며 천장까지 법문이 깔려 있었다.
‘대체 어느새?’
황망히 시선을 옮기던 야토는 이윽고 방에서 뛰쳐나왔다. 하지만 복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파랗게 빛나는 문자들이 그를 뒤쫓아 온다.
야토는 신음했다. 요력과 신력이 통제를 잃고 육체 안에서 격렬하게 충돌한다. 몸이 폭발할 것 같았다.
끄어어억, 짐승 같은 소리를 내며 그는 성문 밖으로 뛰어나갔다. 하지만 밖에는 부적을 든 법령사들이 동그랗게 진을 치고 있었다.
“야토!”
그 맨 가운데에 선 아시타가 염주를 들고서 크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오늘에야말로, 끝을 보자!”
법령사들이 일제히 법문을 외웠다. 사방에서 새파란 불꽃이 피어올랐다.
야토는 온몸을 뒤틀었다. 그들의 목소리가 뇌를 둥둥 울린다. 신력이 부풀어 오르며 요괴인 부분을 공격한다.
몸 안에 간신히 이루어 놓았던 힘의 균형이 무너져 내리며 요괴인 부분, 인간인 부분, 천인인 부분들이 제각각 요동을 쳤다.
야토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몸이 산산조각 나 찢길 것 같다. 견갑골이 비대하게 우득우득 튀어나오고 오른쪽 손가락 뼈마디가 흉측하게 불거진다. 얼마 전 간신히 인간의 형태를 갖추어 놓았던 그 손이 본래 요괴의 것으로 돌아갔다.
그뿐이 아니다. 부풀어 오른 거대한 척추가 등 위로 우둘투둘 튀어나와 육체를 뒤틀었고, 어떤 부분은 그 격변을 견디지 못하고 찢어져 버렸다.
야토는 그 격통을 견디지 못하고 얼굴 가죽을 손톱으로 긁어내렸다. 두 눈이 불타는 것처럼 뜨겁다. 몸이 타 녹아내린다. 불타 버린다. 전부 새까맣게 타버린다.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요괴도 아니고, 인간도 아니고, 천인도 아닌 괴이하게 일그러진 모습이 달 아래 드러났다. 사방에 거센 회오리가 몰아친다. 시커먼 기류를 토해 내며 야토가 부풀어 오른 뻣뻣한 손가락 사이로 불같은 금안을 형형히 빛내었다.
“고, 공주는….”
법문을 외우던 아시타는 흠칫 어깨를 굳혔다. 그으으, 하고 낮게 울리는, 인간의 성대에서 난다고는 할 수 없는 기묘한 음성으로 요괴가 토해 내듯 말한다.
“공주는… 어디에….”
고통에 웅크리고 있던 몸을 펴고서 요괴가 마치 돌려달라는 듯 팔을 뻗어온다.
“그녀를… 어디로….”
아시타는 대답 대신에 법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야토는 짐승처럼 괴롭게 허덕이면서도 비명처럼 내질렀다.
“어디로 데려갔냐고 묻고 있잖아!”
마치 폭발과도 같은 파동이 요괴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요괴가 몸의 붕괴를 가속화 시키면서까지 힘을 끌어 올린다. 그를 휘감은 주술이 그 힘을 견디지 못하고 불꽃을 튀기며 깨어지기 시작했다. 요괴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몸을 던지며 괴성을 내질렀다.
“그녀를… 내놔!”
“대체 네놈은 요괴이면서…!”
아시타는 그 절규에 반발하듯 소리쳤다. 결계와 놈의 요력이 부딪치며 사방에 불꽃이 튀었다. 아시타는 이를 악물며 법력을 끌어 올렸다. 울분과도 같은 감정이 그의 안에서도 몰아쳤다.
이 와중에 왜 타자의 안위를 걱정하는 것인가! 요괴이면서! 어째서 그리도 허망한 바람에 몸을 태우고 있는 것인가.
채 끝마치지 못한 그 외침을 듣기라도 한 듯 요괴가 얼굴을 일그러트린다. 금색 눈이 우는 것처럼 출렁거렸다.
“요괴이기에… 요괴이기에… 요괴이기에, 요괴이기에, 요괴이기에! 이렇게 발버둥 치고 있는 게 아닌가!”
요괴가 몸을 크게 펼치며 결계를 내려쳤다. 신력과 요력이 상충되면서 일어나는 어마어마한 파동에, 일순 공간이 출렁거렸다.
“크윽…!”
법령사들이 그 힘을 버티지 못하고 우르르 뒤로 날아갔다.
요괴가 한 발짝을 더 내디디자 대지가 일순 뒤흔들리더니 땅이 쩍 갈라졌다. 그야말로 천지가 뒤흔들리는 듯하였다.
“나에게는 불가능하다. 나에게는 그녀를 생각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바라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요괴에게는! 이 귀신에게는! 마음을 품는 것조차 불가능한 것이다! 그렇기에… 이토록! 이토록! 이토록!”
야토가 비통하게 울부짖으며 제 가슴을 쥐어뜯었다.
“몸부림을 치고 있는 게 아니냐…! 그런데 어째서, 어째서! 그것을 방해하는 거냐!”
그가 내뿜는 요력에 결계가 당장이라도 부서질 듯 쩍쩍 갈라졌다. 아시타는 숨조차 멈추고서 모든 법력을 쏟아 부어 간신히 결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야토가 가진 요력은 예측했던 것 이상이었다. 그가 내뿜는 거대한 힘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방해하지 마라! 나는 알고 싶을 뿐이다! 느끼고 싶을 뿐이다! 나는…! 나는…!”
요괴가 뛰어 올라 결계를 내리쳤다. 아시타는 간신히 그 힘을 버텨냈다. 결계에서 요괴와 닿은 부분마다 뇌전이 일어나며 사방에 빛을 흩뿌린다. 그 점멸하는 빛에 요괴의 금색 눈이 불덩어리처럼 일렁였다. 그 눈을 둘러싼 피부가 타들어 가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요괴가 입을 벌려 짐승과도 같은 소리를 내었다. 어마어마한 열풍이 사방에서 몰아쳐 왔다. 법력을 끌어올려 놈의 힘에 대항하던 아시타는 뒷걸음질 쳤다. 다른 법령사들은 이미 나가떨어진 뒤였다.
“단지….”
요괴의 목소리는 마치 수백 명이 동시에 내뱉는 것처럼 웅장하고 괴이하게 울렸다.
“그녀를….”
끝내 결계가 와장창 소리를 내며 부서져 내렸다. 하지만 요괴의 몸도 거의 붕괴되었다.
“사… 하고… 싶….”
짐승처럼 그르렁거리던 요괴가 이내 깨어진 결계에서 비척비척 기어 나온다.
놈은 이미 한계다. 여기서 더 힘을 사용했다간 정말로 육체가 완전히 녹아내리고 말 테지.
아시타는 그가 제각각 날뛰는 힘을 가라앉히려 애쓰는 동안 재빨리 거리를 벌리며 제령술을 시작했다. 하지만 제 목소리도 갈라져 나온다.
요괴의 비통한 눈길이 우는 듯 저를 향해 왔다. 그처럼 궁지에 몰려서도 두 눈을 열망으로 불태우는 요괴의 모습에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부풀어 오른다.
제령술의 마지막 한 줄을 남기고 아시타는 큭, 하는 신음을 토해 냈다. 그의 안에서도 불길이 끓어오른다.
그 많은 이들을 그처럼 끔찍하게 죽여 놓고는 어찌 그 같은 소망을 품을 수 있단 말인가. 그처럼 집요하게 인간이 되고자 한 이유가 단 한 명의 소녀를 사랑하기 위해서라니, 그런 걸 인정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네놈은 악이다. 네놈은 해충이다. 네가 사라져야 평화가 온다.
‘인간인 척하지 마!’
아시타는 두 눈을 부릅떴다. 망설임을 떨치고서 법력을 끌어 올렸다. 하지만 요괴는 그가 주저한 틈을 놓치지 않았다. 마치 호랑이처럼 빠르게 뛰어올라 그를 향해 팔을 휘두른다. 급히 염주를 들어 방어술법을 펼쳤지만 요괴의 완력을 이기지 못하고 손목이 으스러졌다.
아시타는 신음하며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다른 법령사들이 급히 결계를 펼쳐주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서 목숨을 빼앗겼을 것이다. 요괴는 공격을 계속 이어가는 대신에 단박에 몸을 틀어 폐궁의 지붕 위로 뛰어 올라갔다. 그러고서 좌중을 빠르게 훑어 내린다.
아시타는 그가 소루의 행방을 찾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요괴는 저 멀리 떨어진 자리에 여란의 품에 안겨 있는 소루를 확인하고야 반대편으로 몸을 돌려 뛰어내렸다. 미처 손쓸 새도 없이 요괴의 잔상이 사라진다. 멍하니 그 모습을 올려다보던 아시타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법령사들에게 명령했다.
“어서 뒤쫓아!”
놈이 몸을 다시 회복하기 전에 없애야 한다. 법령사들이 무성한 수풀을 헤치며 요괴의 뒤를 쫓아간다. 아시타는 욱신거리는 손목을 꽉 움켜쥐며 이를 악물었다.
제가 망설이지만 않았다면 이번에야말로 없앨 수 있었을 터인데…. 분한 마음에 성한 손으로 바닥을 두드리던 아시타는 곧 몸을 일으켜 세웠다. 자책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번에도 놓칠 수는 없다.
***
“또 실패한 건가? 형편없군.”
야토가 흑산 태화로 도망쳐버렸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비령이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바닥에 주저앉아 손목에 붕대를 둘둘 감던 아시타는 발끈하여 그를 노려보았다. 아무것도 않고 지켜보기만 했던 주제에 마치 지휘관이라도 된 양 책망을 해오니 화가 나지 않을 수가 없다.
“놈이 얼마가 강한 요괴인지 알기나 하는 거요? 반은 천인이고 반은 요괴인 터무니없는 괴물이라고!”
“그렇다고 해도 그런 함정까지 준비해놓고 놓치다니. 무리하게 자네들을 폐궁으로 들인 내 입장도 생각해 줘야지. 왕실의 허가도 없이 이만한 인원이 숨어들 수 있도록 도와준 게 들통 난다면 경질당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을 거라고.”
“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달린 일에 자신의 안위만을 걱정하다니 대단하시구려.”
“내 안위만을 걱정하였으면 애초 이런 성가신 일에 뛰어들지도 않았네.”
비령이 눈 하나 까딱 않고 말한다. 아시타는 세상에 뭐 이런 뻔뻔스러운 인간이 다 있나 하며 헛웃음을 흘렸다. 이 남자가 제게 협조하는 것도 다분히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이지 않던가. 그는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자호가의 무인들로 하여금 도와주게 했어도 되었지 않소.”
“그때의 전투로 다섯이 죽는 바람에 쓸 만한 문하생들은 다 도망가 버렸고, 무인들의 사기도 떨어졌어. 또다시 그런 괴물을 상대한다고 귀한 목숨을 내버릴 수는 없지.”
“우리 목숨은 귀하지 않단 말이오!”
비령은 대답 대신에 씩 웃기만 하였다. 아시타는 부아가 치밀었지만 참았다. 적어도 제 음흉스러운 속내를 감추고 위선을 떨지는 않으니 솔직하다면 솔직한 그 태도가 차라리 마음 편하다. 그는 어깨에서 힘을 쭉 빼고 말했다.
“비록 놓쳤지만 놈은 심각한 내상을 입었소. 추적하고 있으니 금세 찾아낼 수 있을 거요.”
“그 말이 사실이길 바라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요괴를 없애지 못하면 내가 입을 타격은….”
거기까지 말한 비령이 문득 입을 다문다. 그의 수하로 보이는 무인 둘이 황급히 달려오고 있는 게 눈에 들어온 것이다. 비령이 잠시 실례하마 하고는 그리로 성큼 다가가 무슨 일이냐 하고 물었다. 그러자 헉헉 숨을 고르던 무인이 비령의 귀에다 대고 무어라 숙덕거린다.
아시타는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무슨 말을 들었는지 비령의 얼굴이 대번 백지장이 되더니 무어라 급히 무인들에게 지시를 내리고는 다시 저를 향해 성큼 다가섰다.
“소루 공주는 어디에 있지?”
그가 폐궁에서 정신을 잃은 채 발견된 공주를 그제야 찾는다. 아시타는 눈을 가늘게 뜨면서도 순순히 답했다.
“저쪽에서 여란이 상처를 치료해 주고 있습니다.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여….”
“내가 데려가지. 자네들은 그 요괴 놈을 쫓아주게.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해치워야 하네.”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내부 사정일세.”
상관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리 단호하게 말하고는 성큼 소루 공주가 있는 쪽으로 걸어간다. 그가 축 늘어져 있는 공주를 가볍게 안아 드는 모습을 보며 아시타는 미간을 모았다. 뱀 같은 사내의 품에 안겨 축 늘어져 소녀가 힘없이 팔을 늘어트린다. 어둠 속에서도 그 가녀린 팔뚝에 피멍이 가득한 게 똑똑히 보였다.
불현듯 야토의 비통한 울부짖음을 떠올리고 아시타는 얼굴을 굳혔다.
“나는 공주를….”
그는 서둘러 그 절규를 떨쳐버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