十四章. 고별
소루가 정신을 차렸을 때 맨 처음으로 들은 것은 염이의 울음소리였다. 그녀가 제 손을 조심스레 쥐고서는 울먹울먹 말하였다.
“왜 그리 무모한 짓을 하셨어요.”
마치 꿈을 꾸는 듯 몽롱하였던 머릿속이 그 한마디에 번쩍 개었다. 소루는 급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염이가 비명을 지르며 그 몸을 간신히 붙들었다.
“일어나시면 안 돼요. 오, 온몸이 멍투성이예요. 갈비뼈도 두 개나 부러졌대요. 특히나 머리에 충격을 받았으니 조심하라고 의원님이 신신당부하셨어요. 마님께서는 거의 하루 종일 정신을 못 차리시고….”
“자… 현은…?”
목소리가 꽉 잠겨 꼭 개구리울음같이 들렸다. 소루는 바짝 마른 입술을 축여 간신히 뒷말을 이었다.
“어찌… 되었느냐.”
“…….”
“호, 혹 자현에게 무슨 일이라도….”
“…바, 방에….”
염이가 뭔가를 참는 사람처럼 꽉 잠긴 음성으로 말하였다.
“방에 계십니다.”
그제야 소루는 마음을 놓고 몸에서 힘을 빼었다. 그것을 보고 염이가 느닷없이 울음을 터트린다. 소루는 깜짝 놀라 몸을 굳혔다. 소녀가 제 옆구리에 고개를 파묻고서 애처롭게 흐느낀다.
“마님은… 마님은, 바보세요! 천하에서 제일가는 바보, 멍청이세요.”
제 주인을 향해 그리 폭언을 퍼부어놓고는 소녀가 요란하게 코를 훌쩍였다.
“그렇게 잔인하신 분, 그렇게 야멸차고 모진 사내가… 뭐가 좋다고 뒤쫓아 가서는… 흐윽, 이 모양 이 꼴이 된 것도 모자라서 눈뜨자마자 어떻게 그분 안위부터… 물으세요.”
“염이야….”
“그, 그런 취급을 받아놓고, 끔찍한 일만 잔뜩 겪어놓고는 어떻게 남 걱정부터 하세요. 세상에 이런 미련퉁이가 또 어디 있어요.”
염이가 속상해 죽겠다는 듯 제 가슴을 팍팍 두드렸다. 소루는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염이의 손만 맞잡았다. 버릇처럼 나는 괜찮다 하고 중얼거리는 말에 소녀가 더 크게 운다.
“뭐가 괜찮아요. 뭐가!”
“염아… 울지 마.”
소녀가 와락 저를 끌어안으려다가 혹 상처라도 덧날까 두려운 듯 어깨만 살포시 만지며 고개를 푹 떨군다.
소루의 눈가에도 핑글 눈물이 고였다. 누군가가 저를 위해서 운다. 가슴이 뭉클해졌다.
염이의 말대로 저는 바보, 멍청이가 맞는 모양이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서툰 손길, 신을 신겨주는 무뚝뚝한 손, 제가 아픈 것이 속상하여 펑펑 쏟는 눈물, 다정하게 건네주던 한 아름의 꽃다발…. 그런 것이면 아픈 일도, 괴로운 일도 전부 괜찮아진다니 천하에서 제일가는 미련퉁이가 분명 맞을 것이다. 소루는 주룩 눈물을 흘리며 미소 지었다.
“울지 마. 울지 마.”
“흐으윽.”
울음으로 떨리는 등을 토닥이자 소녀가 더 자지러지게 운다. 소루는 더듬더듬 손을 뻗어 그녀의 뺨에서 물기를 훔쳐주었다. 한참을 그렇게 엉엉 울던 염이가 겨우 눈물을 추스르고는 코를 팽, 하고 요란하게 풀었다.
“이, 이럴 게 아니라 당장 의원 나리를 불러오겠습니다. 깨어나시면 바로 알려 달라 하였는데….”
소녀가 스스로를 책망하듯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나간다. 소루는 멍하니 누워 더듬더듬 제 몸을 만져보았다.
팔이며 다리에 붕대가 둘둘 감겨 있었고 머리에도 천이 휘감겨 있었다. 그제야 온몸이 욱신거리는 게 느껴진다. 그녀는 고통을 누르고 손발을 움직여 보았다. 아프기는 하였지만 별 무리 없이 몸을 가눌 수 있는 것으로 보아 팔다리는 부러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저벅저벅, 하고 일정하게 울리는 발소리와 함께 방문이 벌컥 열렸다.
의원인가 하며 그녀가 문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데 낯익은 음성이 들려온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늘 자현의 곁을 지키는 이의 목소리였다. 이름이….
“비령?”
“예, 맞습니다. 제가 집으로 모셔왔는데, 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십니까?”
그녀는 멍하니 입술만 달싹였다. 머릿속이 흐릿하였다. 자현의 위험을 느끼고 성 바깥으로 뛰쳐나가 물매를 맞았다. 그리고….
“공주께서는 폐궁 안에 계셨습니다. 그 요괴가 숨어 있던 곳에서 정신을 잃고 계셨지요. 하인들의 말에 의하면 자현을 쫓아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고 들었습니다만… 어찌 된 연유로 거기에 계셨던 겁니까?”
“나도 잘… 모르겠다.”
사내가 내뱉는 말을 반도 이해하지 못하고 그녀는 멍한 얼굴을 하였다. 비령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그 요괴 놈이 장안에서 참살극을 일으키다 공주를 발견하고 그리로 데려간 듯합니다.”
“차, 참살극?”
소루는 화들짝 놀라 벌떡 몸을 일으켰다. 등이 욱신거렸지만 그런 게 문제가 아니었다. 의식을 잃기 전에 들었던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떠오른다. 그 겁먹은 얼굴을 보고 비령이 다소 다감한 어투로 달래듯 말하였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요괴 놈은 산으로 도망갔다고 합니다. 지금 법령사들이 그 뒤를 쫓고 있지요. 그들의 말에 의하면 비록 퇴치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큰 타격을 입혔다고 하니 곧 잡힐 겁니다.”
그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저를 조심스레 안아 올리던 요괴 손길이 떠올랐다. 그에게 제가 자현을 구해달라 하였었다. 하지만 그 이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알 길이 없다. 혼란스러움에 머리를 짚는데 비령이 문득 심각하게 말하였다.
“요괴는 그렇다 치더라도… 지금은 자현의 일이 걱정입니다.”
“자, 자현이 왜? 혹 어딜 다치기라도….”
“왕의 함정에 빠져 크게 부상을 입었습니다. 상태가 위중하여 다급한 마음에 정신을 잃은 공주의 손가락에서 피를 내어 자현에게 먹였습니다만….”
거기까지 말하고는 말끝을 흐린다. 소루는 제 안색을 살피는 기색을 느끼고는 대번 괜찮다 하고 내뱉었다. 제가 깨어 있었어도 그렇게 했을 것이 분명하였다. 비령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공주의 피 덕에 다행히 위급한 상황은 넘겼습니다. 하지만 피를 하도 많이 흘려서 아직 정신을 차리지는 못한 상태입니다. 의원의 말에 의하면 기력이 다해 잠든 상태라고 하니, 하루 이틀이면 정신을 차리겠지요.”
“…다행이구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소루는 무사하다면 대체 무엇이 문제라는 건가 하며 고개를 들었다. 의아해하는 기색을 느꼈는지 비령이 한층 가라앉은 어조로 말한다.
“자현이 무사한 것은 다행스러운 일입니다만… 자현을 함정에 빠트린 가륜 왕이 죽었으니, 앞으로 큰일이 벌어지겠지요.”
“왕이… 죽다니?”
덤덤하게 흘러나온 말에 소루는 흠칫 몸을 굳혔다. 비령은 마치 길거리에 똥개 한 마리가 죽었다 하는 사실을 전하는 것처럼 무미건조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하인들을 취조한 바에 의하면 가륜 왕이 자현을 죽이려는 순간에 요괴가 홀연히 나타나 가륜 왕을 해하고는 사라졌다고 하더군요.”
소루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떨구었다. 비령이 쓴웃음 섞인 어조로 말하였다.
“한마디로 자현은 그 요괴에게 목숨을 빚진 셈이지요.”
자현을 살려 달라 하는 제 말을 듣고 그리한 것이었다. 그녀는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비령의 말은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우리는 이제부터 군란을 일으킬 생각입니다.”
“…군란?”
소루는 느닷없는 말에 멍하니 반문하였다. 하지만 비령은 담담했다.
“예, 무사 계급을 결집시켜 무능한 왕족들을 몰아내고 자현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할 생각입니다.”
“왕….”
어마어마한 이야기에 멍한 얼굴을 하던 것도 잠시 소루는 납득을 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 사람은 다른 이의 밑에 있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본인도 견딜 수 없을 뿐더러 자현의 위에 있는 사람도 그것을 견딜 수 없다. 그녀는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깨닫고는 쓰게 웃었다.
“그리 되면, 내가 방해가 되겠구나.”
뒷말을 더 듣지 않아도 그가 제게 왜 구구절절 이러한 사실을 말하는지 알 수 있었다. 비령은 부정하지 않고 묵묵히 말을 이었다.
“새로운 왕조를 만들려면 백성들의 지지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공주께서 계시면 그것이 매우 힘이 들지요.”
저를 향한 백성들의 맹목적인 적의를 떠올리며 소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 때문에 사람이 죽었다 하는 그들의 비통한 외침이 아직도 귓가에 저렁저렁하였다. 집 앞에 몰려와 귀신 공주를 내놓으라던 외침도 떠오른다.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다. 그의 곁에 언제까지고 머무를 수 없다는 사실을 진작부터 깨닫고 있었다.
“…하지만, 자현은 소루 공주에게 책임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제 의견에 반대할 수도 있습니다. 하여 그가 깨어나기 전에 도성을 떠나 주셨으면 합니다.”
“…….”
“지낼 곳은 제가 마련해 드리지요.”
그녀는 입술만 달싹였다. 이미 마음 한구석에서는 각오하고 있던 일. 그런데도 알겠다 하는 대답이 입천장에 달라붙은 듯 떨어지지 않는다. 파르르 입술을 떨던 소루는 간신히 목소리를 내었다.
“그 전에… 부탁이 있다.”
“무엇입니까?”
“요괴가 도망쳤다는 산으로 나를 데려가 다오.”
“…어째서 그런 것을 요구하십니까.”
그녀는 잠시 침묵하였다. 어떤 식으로 말해야 좋을지 알 수 없어 헤매기를 잠시 곧 한 자 한 자 신중하게 내뱉었다.
“그의 눈은 본래 나의 눈이었다. 한 번도 해본 적은 없지만… 집중하면 그가 있는 곳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
“나를 산으로 데려가 주면 내가 그를 찾아보겠다.”
그는 어째서 진작 그것을 말하지 않았느냐 따져 묻지 않았다. 대신 그러마 하고 답하고는 당장 채비를 하라 이르겠다며 방을 나섰다. 그 서두르는 기색에 소루는 맥없이 웃었다.
***
염이가 몸도 성치 않은 소루를 어딜 데려가느냐고 겁 없이 따져 물었지만, 비령은 듣는 척도 안 했다. 소루는 곧 다녀오마 하고는 말 위에 올라앉았다. 그 뒤에 따라 올라탄 비령이 말고삐를 쥐고는 박차를 가했다. 말이 요란하게 울며 달려나간다. 그녀는 말안장을 꽉 움켜쥐고서 덜렁덜렁 흔들리는 말 위에서 고통을 참았다. 온몸이 욱신거렸지만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일각 정도 말을 타고 달리자 습기를 머금은 싸한 공기가 얼굴에 와 닿았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깊이 숨을 들이켰다. 안개를 머금은 바람 속에 짙은 흙냄새와 나무 냄새가 물씬 배어있다. 어디선가 벌레 우는 소리와 새 우는 소리도 들려왔다.
‘숲인가….’
사방에 나무가 많아서인 듯 말이 속도를 늦추었다. 사박사박, 마른 낙엽을 밟으며 한참을 더 나아가던 말이 어느 순간 멈춰 선다.
비령이 먼저 말에서 뛰어 내리더니 저를 번쩍 안아 들어 땅에다 내려놓는다. 그녀는 욱신욱신거리는 전신의 통증을 꾹 참고서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여기가 어디냐?”
“태화와 이어져 있는 숲입니다. 이 근방에서 수색을 한다고 하였으니… 금방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발밑이 울퉁불퉁하니 조심해서 따라오십시오.”
사내가 제 팔을 잡아 조심스레 이끌었다. 그녀는 고르지 못한 지면을 조심스레 밟아 나가며 그를 따라갔다.
지형이 가파르고 불규칙해 잠시 걸었을 뿐인데도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비틀거리며 필사적으로 그를 쫓아 얼마 정도 걸었을까, 근처에서 다른 이들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저기 있군.”
아무래도 법령사 일행을 찾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얼굴에서 땀을 닦아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이 저희들의 모습을 발견했는지 한달음에 달려온다.
“여긴 왜 오신 겁니까?”
달려온 사내 중의 하나가 물었다. 유독 맑고 깊은 기운으로 보아 일전에 만났던 그 아시타라는 이름의 법령사인 듯싶었다.
“이 산에는 귀물들이 많아 공주께 위험합니다. 어서 데리고 돌아가십시오.”
“공주가 요괴가 있는 곳을 알고 있다고 해서 일부러 데려온 거다.”
“그게 정말입니까?”
사내의 물음에 소루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밤새 수색을 한다고 고생을 했던 듯 그가 반색을 하며 말했다.
“그렇다면 부디 도움을 주십시오. 놈이 있는 곳을 알려주시면 저희가….”
“아니. 나 혼자서 그를 찾고 싶다.”
그녀는 그의 말을 뚝 끊고 말했다.
“나 혼자 가서, 그를 설득해 보겠다. 그러니… 수색은 이만 중지해다오.”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굳은 눈으로 바라보던 아시타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내뱉었다.
“지금… 설득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래. 내가 직접 가서 이야기를 해보마. 더는 사람을 해치지 못하게 할 테니… 더는 쫓지 말아다오.”
“지금 그 요물을 감싸시는 겁니까?”
그녀는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대번 아시타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제정신이 아니군요! 그 괴물이 얼마나 많은 이들을 죽였는지 아십니까? 무슨 짓을 했는지 아냔 말입니다! 설득이라니! 어림도 없습니다. 죽여 없애지 않고서는 절대, 놈은 살육을 멈추지 않을 겁니다!”
“그때는 내가 그의 먹이가 되마.”
덤덤히 흘러나온 말에 펄펄 뛰던 아시타도, 다른 법령사들도, 비령까지도 아연한 얼굴을 하였다.
제 목숨에 미련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은 진즉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 기이할 정도의 초연함은 대체 무언가.
아시타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하시겠다는 겁니까?”
그 목소리에는 깊은 혼란이 어려 있었다.
“대체 왜 그런 요괴를 위해….”
그녀는 설명을 하기 위해 입을 벌렸다. 하지만 마땅한 말을 찾지 못하고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무슨 말로 너와 나를 설명할 수 있을까. 내가 느끼는 이 감정에는 어떤 이름을 붙여야 하나.
연민, 죄책감, 동질감, 안타까움…. 그 모든 게 혼재되어 있는 듯도 하고 그 어느 것도 아닌 듯도 하다.
그녀는 질끈 눈을 감았다. 입술 새로 흐느끼는 듯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만이… 알고 있기 때문이야.”
무엇을 알고 있다는 것인지 스스로도 명확히 알지 못하는 채로 내뱉었다.
“도, 도무지 외면할 수가 없다. 모른 척 할 수가 없어. 이 세상에서…. 야토만이 내 존재를 요구해 주었다.”
그녀의 눈가에는 어느새 물기가 어려 있었다. 그것이 금세 넘쳐 주룩 흘러내린다. 뱃속에 응어리진 뜨거운 것이 목구멍을 꽉 틀어막고 있는 듯했다. 그것을 어떻게든 삼켜 보려고 했지만 목에 걸린 것은 기어코 좁은 목구멍 위로 역류해 올라왔다. 그녀는 가슴에 맺혀있던 말들을 힘겹게, 숨 가쁘게 토해 냈다.
“나는 줄곧, 그런 이를 기다려 왔다. 누구라도 좋으니, 단 한 사람이라도… 나를 필요로 해주고 원해 주기를…. 소망하고 또 소망했다. 있을 곳을 가지고 싶었다. 함께 있어줄 누군가를… 가지고 싶었어.”
차마 입 밖에도 내어본 적도 없는 바람이 마구 터져 나온다. 사는 것조차 무언가를 잘못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제겐 너무나 과분하게 느껴지던 소원.
“나는 알고 있다. 그런 부질없는 바람에 애태운다는 게 어떤 것인지. 닿을 수 없는 것을 향해 손을 내뻗는 일이 얼마나 괴롭고 아픈 것인지. 그런 내가, 어떻게 모른 척 할 수 있겠느냐. 그렇게나….”
뒷말을 채 잇지 못하고 그녀는 흑, 하고 숨을 들이켰다. 내뱉고서야 제 마음의 형태를 깨달았다. 제 안에 고여 소용돌이 치고 있던 것들이 보였다. 그녀는 힘겹게 말을 이었다.
“그가 설령 잘못된 존재라고 해도, 이 세상에 해를 끼치는 존재라고 해도, 그를 구하고 싶다. 어떻게든 해주고 싶어. 나 역시도 그만큼이나 잘못된 존재인 걸….”
“당치 않은 말은 그만하십시오. 당신은 아무런 잘못도 없습니다. 나쁜 것은 전부…!”
어떻게든 설득해 보려 달래는 듯한 말을 토해 내려던 아시타는 문득 뒷말을 삼켰다. 제 입으로도 떠들어대었던 것이다. 그 태생부터가 잘못된 공주. 하늘의 실수로 이 땅에 태어난 천인. 그리하여 이 세상에 혼란만 가져다주는 존재.
그녀라고 몰랐을까. 소루 스스로도 이 세상에 제 자리가 없다는 것을 뼛속까지 느끼고 있었다. 작은 평화, 오로지 그것만을 바라였건만 결국은 가질 수 없었다. 자현의 집에서 조용히 숨죽이고 사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소루는 울음으로 기어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있는지도 몰랐던 감정들이 계속해서 북받치듯 치밀고 올라왔다. 슬픔, 울분, 괴로움…. 가슴이 쥐어짜듯 저려온다.
부풀어 터질 듯해 꾹 내리누르고 있는 손바닥 밑에서 쿵쿵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이렇게나 빠르게, 격하게 뛸 수도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아프게, 원통하게 뛰고 있다.
“다시는,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마. 다시는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겠다. 더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으마. 이 세상에서 더는 무엇도 바라지 않아! 그저 어둠 속에 묻혀 조용히 살 테니 그것만 허락해 다오.”
“그럴 수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정녕… 잘못된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해서도 안 되는 것인가.”
계속되는 거절에 그녀가 목청을 높인다. 마치 궁지에 몰린 짐승의 울음소리와도 같은 음성에 아시타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그저 세상의 모퉁이에서 숨죽이고 사는 것, 그것조차 용서되지 않는 건가.”
“…소루 공주.”
“그렇다면 나도 죽여 다오. 야토에게 그만한 힘을 준 것은 나다. 그가 사람을 먹는 요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랬다. 그저 내 눈에 불쌍하고 안타깝게 비친다고 그리하였다. 내 죄가 얼마나 깊은지 나로서는 도저히 가늠할 수가 없다. 그러니 네가 나도 징벌해라.”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씀은 그만 하십시오!”
“그럴 수 없다면…!”
그녀가 질끈 눈을 감았다. 주룩주룩 흘러내린 눈물이 소녀의 얼굴을 온통 뒤덮었다.
“제발 한 번만 모른 척해달라. 평생을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 테니… 제발 자비를 베풀어 다오.”
“그럴 수는….”
아시타는 괴롭게 숨을 들이켰다. 소녀의 눈물 젖은 눈이 어둡게 일렁거린다. 입 안에 고인 모든 말들이 바람처럼 흩어졌다.
그는, 아이처럼 울며 흐느끼는 소녀의 모습을 참혹하게 내려다보았다. 앙상한 팔다리에 퀭한 두 눈, 어디 한군데 성한 데가 없다.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사람들에게 잔뜩 상처만 받고 이용만 당해온 소녀의 애원을 차마 뿌리치지 못하고, 그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공주께서 그를 찾겠다면 말리지 않겠습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답은… 그뿐입니다.”
이제 와 수색을 접을 수는 없다. 그녀가 먼저 그를 찾아내어 계곡으로 돌아가게 한다면 어차피 더는 뒤쫓을 수 없을 터. 그 의중을 읽고 소루가 희미한 미소를 머금는다.
“고맙다.”
그러고는 우거진 나무 사이로 몸을 돌렸다. 미처 붙잡을 새도 없었다. 숲이 출렁이더니 어디선가 바람이 몰아쳐 왔다. 새들이 요란하게 울며 하늘 빼곡히 날아올랐다.
날아드는 나뭇잎과 흙먼지를 피해 아시타는 급히 얼굴을 가렸다. 그녀가 몰아치는 바람 속으로 걸어가며 입을 열었다.
“길을 열어라.”
그 목소리는 마치 천공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울려 퍼졌다. 그녀의 명령에 따르듯 나뭇가지가 일제히 갈라져 길을 터준다.
아시타는 숨을 들이켰다. 잠시 뒤를 돌아본 소루의 창백한 잿빛 눈동자에 희미하게 금빛이 감돌았다. 그녀가 다시 앞을 보며 열린 길로 걸어 들어간다.
그 뒤를 쫓으려 무의식중에 발을 떼었지만 나뭇가지가 의지를 가진 것처럼 앞길을 막아섰다. 그는 멀어지는 그녀의 등을 못 박힌 듯 서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소녀의 모습이 이내 숲의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
아주 어릴 적에 소루는 제가 남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몰랐다. 저를 키운 여인은 짐승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어리석어서 제 기괴함을 눈치채지 못하고 그저 예뻐했다.
그러다 그녀가 죽고 사당 신녀들의 손에 맡겨져 새로 말을 배우면서 제가 남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누구도 귀신을 보지 못했다. 동물더러 오고 가라 할 수 없었고 사람의 마음이나 미래, 과거를 들여다보는 일도 할 수 없었다.
제 불길함을 알아차린 사람들은 바로 저를 꺼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늘 혼자였다. 사당 밖으로 나가는 일도 할 수 없었고 다른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일도 할 수 없었다. 하는 것이라고는 그저 먹는 것 그리고 자는 것뿐.
어느 날 그런 저를 불쌍하게 여긴 무녀가 공을 하나 사서 사당 안으로 밀어 넣어주었다. 그녀는 하루 종일 그것을 가지고 놀았다. 벽에도 던지고, 바닥에 통통 튕기기도 하고, 발로 차서 쫓기도 하고. 그러면 어느새 하루가 지나가 있고 또 새로운 하루가 온다. 텅 빈 사당 안에서 그것을 정말로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가지고 놀았다.
그러다가 공이, 음식이 들어오고 나가는 구멍 밖으로 굴러나가고 말았다. 소루는 어떻게든 그것을 주워 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짤막한 손을 구멍 바깥으로 내밀고 낑낑거리기도 하고 지나는 이에게 그걸 주워 달라 요청해 보기도 했다. 모두가 모른 척한다. 구멍을 통해 하염없이 공을 바라보던 소루는 결국 훌쩍이며 울음을 터트렸다.
그때였다. 불쑥, 앙상하고 시커먼 손이 구멍 안으로 들어온 것은.
소루는 울음을 멈추고 그 커다란 손을 가만 바라보았다. 제 몸통만 한 거대한 손 위에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조그만 공이 놓여 있었다.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자 요괴가 공을 바닥에 놓아두고는 스르륵 손을 거두었다. 구멍 밖을 내다보았지만 이미 요괴는 몸을 숨긴 뒤였다. 항상 어둠 속에 숨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요괴들 중 하나라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그 후 소루는 이따금 실수인 척 구멍 밖으로 공을 굴려 보냈다. 그러고 나서 우는 시늉을 하면 잠시 뒤에 공이 돌아온다. 그것을 반복하는 사이 소루는 그 검은 손의 요괴를 다른 요괴들과 분류하여 부르기 시작하였다.
야토(夜土).
요괴의 손에서는 풀냄새와 흙냄새 그리고 밤의 냄새가 났다. 깊은 밤, 차게 식은 바람에 배어든 희미한 냄새.
그녀는 야토만은 무섭지 않다고 느꼈다. 아니, 가끔은 그 눈에 어리는 열기가 두렵게 느껴지기도 하였지만 제게 공을 건네던 그 손만큼은 무섭지 않았다.
나는 네가 밉다.
때때로 요괴는 그렇게 말했다. 제게 직접 말한 것은 아니었으나 소루는 요괴의 안에서 요동치는 그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내가 미운데 왜 나를 그리 슬픈 눈으로 보느냐.
소루는 소리 내어 묻는 대신에 공을 바깥으로 굴려 보냈다. 요괴는 어김없이 그것을 되돌려준다.
‘이상한 요괴.’
어쩌면 외롭고 외로워서, 아주 작은 호의의 흔적만 발견해도 거기에 매달리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저 누구라도 좋으니 곁에 있어 주었으면 하였다. 그게 설령 요괴라 할지라도 상관없다. 제 곁에 있어주고 저를 지켜봐 주기만 한다면.
그녀는 계속해서 공을 굴려 보냈다. 때로는 주먹밥을 남겨서 밖으로 밀어 놓기도 했다. 그러면 다음 날에는 꼭 접시 위에 주먹밥 대신에 나무 열매가 몇 개 놓여 있었다.
굉장히 시큼한 그것을 입에 넣고 오물오물거리며 맛나게 먹으면 다음 날 몇 개 더 사당 안에 들어와 있다.
야토는 실로 괴상한 요괴인지라 저를 미워하며, 저를 먹고 싶은 생각뿐이라고 하면서 그 같은 행동을 하였다. 상대에게 뭔가를 준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조차 모르는 듯하였다. 그녀는 중얼거렸다.
바보 같은 야토. 제 안에 바닥없는 슬픔이 있는 줄도 모르는 야토.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어 하는 가엾은 요괴.
‘나 잡아먹힌다면… 네가 좋아.’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새콤달콤한 나무 열매를 먹으며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 사당 안에서 언젠가 무의미하게 죽을 운명이라면 누군가의 피와 살이 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도 요구받지 못하고, 그 누구의 기억에도 머물지 못한 채 그저 이 작은 세계 안에서 하루하루를 흘려보내다 시체가 될 운명이라면, 차라리 누군가의 먹이가 되는 편이 더 낫다.
그렇다면 나는 네 생명이 되고 싶어. 네 몸의 일부가 되어 이 세상을 살고 싶다. 너와 함께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어.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였다.
***
소루는 비척비척 걸음을 옮겼다. 아지랑이처럼 세상이 흔들거리며 어두워졌다 밝아지기를 반복했다. 갑자기 열린 시야에 눈앞이 어지러웠다. 마치 휘몰아치는 불 속을 걷고 있는 듯하다.
‘야토.’
나무 기둥을 손으로 짚으며 울퉁불퉁한 땅을 끊임없이 밟아 나갔다. 어두운 그늘 속에서 붉은 눈자위가 번쩍거린다. 그 눈동자의 수는 갈수록 점점 많아졌다. 그들이 키덕키덕거리며 요란하게 떠들어 대었다.
공주가 골짜기 가까이에 왔다.
공주가 야토를 찾고 있다.
눈을 잃은 공주가 어둠 속을 헤맨다.
낙상하여 죽으면 우리가 그 시체를 먹자.
“물러나라.”
그녀는 입술을 옴쭉거렸다. 그 신언을 거역하지 못하고 귀물들이 길을 터준다. 몸에서 진땀이 흘렀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어 간신히 아득해지는 정신을 붙들어 매고는 다시 걸음을 이어 나갔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눈을 깜빡였다. 야토와 자신의 사이에 연결이 점차 선명해진다.
그의 숨소리가 마치 곁에 있는 양 생생하게 들려오고, 그의 고동이 제 것인 양 선명하게 느껴졌다. 깊은 어둠 중에 웅크리고 앉은 모습도 보였다.
너는 줄곧 거기에서 내가 발견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구나. 거듭되어온 그 꿈은, 네가 나를 향해 부르짖는 비명이었어.
그녀는 가슴을 감싸 안았다. 슬픔이 북받쳐 오른다. 화도 났다.
그래도 그런 짓은 말았어야지. 그런 식으로는 절대로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왜 몰라.
원망하는 마음이 밀려들었다. 하지만 그래도 역시 그가 가여웠다. 안타까웠다.
‘야토….’
제 안에 헤아릴 수 없는 깊은 슬픔이 있다는 것도 모르는 요괴.
자신의 안에 마음이 없다고 믿고 있는 너는 끝까지 깨닫지 못하였다.
네가 나의 친구였다는 것을.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보잘것없는 내게, 너는 손을 뻗어 주었다. 나를 그저 먹이로만 보는 요괴들 틈에서 너만은 나를… 소루를 보아주었어. 그래서 나는….
그녀는 거대한 바위 앞에 섰다. 그 틈에서 그으으, 하는 낮은 신음소리가 들려온다. 그녀는 그 어둠 속을 향해 손을 뻗었다. 언젠가 그가 저를 향해 손을 내밀었던 것처럼.
“거기에 있느냐… 야토.”
느린 숨소리가 들려온다. 어둠 중에 금색 눈이 빛난다. 요괴들의 붉은 눈과는 다른 황금빛 눈동자. 일찍이 제가 짊어지고 있던 것이다.
그 눈에 비친 세상이 얼마나 어지러울지, 나는 안다.
그녀는 그리로 살그머니 다가섰다. 그러자 어둠 중에 숨어 있던 요괴가 두려운 듯 몸을 웅크렸다.
“만지지 마라.”
소루는 허공에서 손을 멈춰 세웠다.
“공주는 달과 같다.”
정말로 달을 올려다보는 짐승처럼 하염없는 눈으로 저를 바라보며 요괴가 말하였다.
“달처럼 아름답다.”
“…….”
“그대는 이처럼 추한 것에 손을 대서는 안 된다.”
소루는 손을 내려 그의 어깨 위에 살그머니 손을 올렸다. 그가 괴로운 듯 몸을 떤다. 그 엉망이 된 몸뚱이를 이내 양팔로 꽉 끌어안았다. 엉망진창이 된 제 몸뚱이도 부서질 듯 아파왔다.
그도 그럴 테지. 하지만 요괴는 뿌리치지도 마주 안지도 않고, 그저 떨리는 숨을 몰아쉰다.
너는 항상 그랬다. 나를 먹겠다고 하면서 내가 다가가면 몸을 숨겼지. 끝끝내 너는 나를 해치지 않았다. 기껏 가져간 것은 그 눈뿐…. 어리석은 나는 이제야 그 의미를 깨달았어. 너는 내 짐을 가져간 것이었다. 괴로워하는 나를 위해… 내가 더는 이 참혹하고 어지러운 세상을 보고 싶지 않다고 해서 내게서 덜어내 준 거였어.
소루는 그의 눈가를 어루만졌다.
“…울고 있었느냐.”
“요괴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이게 눈물이 아니면 무어냐.”
“…모른다. 나는 망가져 버렸다.”
그녀는 손을 올려 위로하듯 그의 얼굴을 감쌌다. 야토는 끓어오르는 격정에 괴롭게 신음했다.
어찌하여 이 괴물을, 너는 그리도 두려움 없이 안아주는 것인가. 나는 알지 못한다. 인간이 아니기에. 나는 제아무리 가슴을 쥐어뜯어도 알 수가 없다. 이 거대한 몸뚱이의 안은 텅 비어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어떻게든 채우려 몸부림치고 또 몸부림쳐왔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안달을 할수록 답에서 멀어져 간다. 이제는 무얼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 격렬한 마음을 달래주듯 소루가 잠잠한 음성으로 말하였다.
“이제 그만 해도 된다.”
“…….”
“이제 그만 해도 돼. 사람이 되지 않아도 된다. 답을 모르는 채로도 괜찮다. 불완전한 모습 그대로… 괜찮아. 요괴인 네 곁을 내가 지켜주겠다. 같이 떠나자. 야토.”
요괴는 망연히 중얼거렸다.
“나는… 괴물이다.”
“나도 괴물이다.”
“그대는 괴물이 아니야.”
소루는 씁쓸하게 웃으며 그의 이마에 제 이마를 눌렀다. 고독한 짐승이 몸을 맞대어 온기를 나누듯 그렇게 어둠 속에 몸을 붙이고서 서로의 상처를 감싸 안는다.
“정말로… 내 곁에 있어주는 것인가.”
“그래.”
공주가 어둠 속에서 미소 짓는다. 요괴는 그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가슴이 술렁거렸다. 몸이 찢기는 듯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사랑이 아니다.
나는 너를 사랑하고 싶었다. 그저 사랑하고 싶었을 뿐이다. 평생 닿지 못해도 좋았다. 곁에 머물지 못해도 좋았다. 먼발치에서 애태우는 것, 오로지 그것만을 소망하였지만, 여전히 나는 요괴일 뿐이다.
그것이 괴롭고 또 괴로워 요괴는 흐느꼈다.
“나는 그대에게 줄 것이 없다. 내 마음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
“나도… 그렇다.”
“…….”
“내 마음은 이미 다른 이에게 주어 남은 것이 얼마 없다. 그래도 남은 것은 모두 네게 주겠다. 너를 채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내가 가진 전부를 네게 주겠다.”
소루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조용히 눈물을 떨구며 그녀는 요괴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야토는 그 눈물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너는 어찌하여 그리도 아름다운가.
그 우는 얼굴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인간 사내가 그리하듯이. 그 머리카락에 쉴 새 없이 입술을 거듭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 마음조차 진짜가 아니다. 진짜가 아니다.
“이 몸도 주마. 허기를 견딜 수 없을 것 같을 때는 나를 먹어도 좋아. 그러니… 이제 다른 사람은 해치지 마라. 그것만 약조해다오.”
“그대가….”
요괴의 눈에서도 눈물이 흐른다. 야토는 그저 그것이 어리둥절하기만 하였다. 진짜 눈물일 리는 없었다. 마음이 없는 짐승이 울 리가 없지 않은가. 나는 정말로 단단히 망가져 버렸구나 하며 그는 답했다.
“그대가 원하는 것이라면 그 무엇이든….”
그녀가 희미하게 웃는다. 그 모습이 날카롭게 요괴의 눈을 베었다. 야토는 그 작은 몸에 조심스레 머리를 기대었다. 어둠 속에서 상처 입은 짐승처럼 붙어 웅크린 채로 쉼 없이 눈물을 흘린다.
소루는 그의 어깨에 대고 세상 어디에도 있을 곳이 없는, 죄 깊은 우리 둘이서 조용히, 소리 없이 살자 하고 속삭였다.
야토는 눈을 감았다. 아득한 숲 속에서 귀신들의 웃음소리조차 멀어진다. 어둠이 모든 것을 감싸 안는다.
더는 괴로워하지 않아도 돼. 찾을 수 없는 것을 찾아 헤매며 방황하지 않아도 된다.
이 고요한 어둠 속에 앞으로는 계속 단둘뿐이다.
***
소루는 거의 자정이 되어 자호가의 저택 앞에 홀연히 나타났다. 그 이야기를 듣고 비령이 급히 대문 앞으로 뛰어나왔다. 그녀는 마치 산책이라도 다녀온 사람처럼 덤덤한 얼굴로 물었다.
“그는… 깨어났느냐?”
“아직입니다.”
그 말에 소녀의 낯빛이 흐려진다.
마지막으로 제대로 인사를 나누고 싶었는데….
‘차라리 잘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 사람은, 내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을 테니….’
쓰게 웃으며 그녀는 그에게 조심스럽게 부탁했다.
“마지막으로 그를 한 번 보고 싶다.”
“…떠나는 것입니까.”
“그래.”
“그렇군요.”
그게 다였다. 그는 산에 가서 어떻게 된 거냐, 어디로 떠날 거냐, 그런 구구절절한 질문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불필요한 물음이었다.
그는 소루의 팔을 붙잡아 자현의 방으로 인도했다. 이미 밤이 깊어 대부분의 하인들은 처소로 물러간 뒤였다. 곁을 지키고 서있던 하인 놈을 조용히 물리며 그가 소루를 문 앞에 세웠다.
“이 방입니다.”
“…단둘이만 있어도 되겠느냐.”
“…….”
“잠시면 된다.”
굳은 눈으로 소녀의 얼굴을 살피던 그는 곧 한숨을 내쉬며 문고리를 잡았다.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설마 그녀가 자현을 해하려 하지는 않겠지만 이미 한 번 여자에게 속아 죽을 뻔하지 않았나. 경계심이 쉬이 가시질 않는다.
그는 방을 나서기 직전 다시 한 번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문득 마음이 불편해진다. 성한 곳이 하나 없어 여기저기 붕대를 감은 꼴만 해도 안쓰러운데 옷자락은 온통 흙투성이고 머리는 풀어헤쳐져 엉망이다. 마음 둘 곳이라고는 하나 없는 이 집에서 온갖 험한 꼴 다 보고는 떠나는 저 여자가 조금은 가엾게 느껴졌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는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고는 문밖으로 나갔다.
등 뒤로 문이 닫히자 소루는 침상을 향해 걸어갔다. 색색 숨소리가 들려온다. 가슴속에 안도감이 스며들었다. 죽음의 그림자가 완전히 걷혀져 있었던 것이다.
밝게 빛나는 그의 빛을 바라보고 서 있기를 잠시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그의 가슴팍에 귀를 가져다 대었다. 쿵쿵, 일정하게 뛰는 심장 소리에 가슴이 저릿해진다.
“자현… 빨리 나아라.”
손을 내밀어 조심스레 그의 얼굴을 만져 보았다. 깊게 주름이 잡혀 있던 미간이 매끈하다. 잘 때는 인상을 쓰지 않는 모양이구나 하며 살짝 웃었다.
“네 곁에서 생전 처음으로 평온함을 느껴 보았다. 네 가까이에 있으면 세상이 밝고, 안온하게 느껴졌어….”
비록 그 세상에는 제 자리가 없었지만 그래도 너는 내 빛이었다. 거기 있다는 것만으로 이 캄캄한 어둠이 밝아지는 것 같아서 마음이 놓이고 안심이 되었다. 그래서 욕심을 부렸다. 그래서….
“폐를 잔뜩 끼쳤구나. 미안해.”
그녀는 입 안을 깨물어 상처를 내었다. 비릿한 피맛이 입 안에 퍼진다. 그리고 더듬더듬 어깨에 덮인 붕대를 풀어내고 거기에 입술을 대었다. 손끝에서 상처가 아물어 가는 게 느껴진다. 그녀는 손끝으로 계속 그의 피부를 더듬어 나갔다.
뺨에 난 작은 상처, 옆구리에 난 상처, 팔에, 가슴팍에, 다리에…. 작은 생채기 하나 놓치지 않고 입을 맞추었다. 마치 짐승이 제 새끼를 핥듯이 상처마다 혀를 대고는 끝내 그의 입술 위에까지 제 입술을 가만히 가져다 대었다.
혀를 내밀어 살짝 벌어진 입 안에 밀어 넣자 낮은 신음 소리가 들려온다. 재빨리 그 안에 피를 흘려 넣고 입을 떼려 했지만 어느새 그의 손이 제 팔을 움켜쥐고 있었다. 소루는 놀라 몸을 움찔거렸다.
“소루….”
맞닿은 입술에서 한숨처럼 제 이름이 나온다. 소루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남자의 혀가 입 안으로 버거울 정도로 깊이 들어왔다. 말캉말캉한 살덩어리가 입천장을 훑고는 볼 안쪽에 난 상처를 훑어 내린다.
쓰린 통증에 목을 움츠리자 크고 단단한 손이 제 목덜미를 움켜쥐고는 아플 정도로 강하게 잡아당겨 왔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녀는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다. 숨과 숨이 뜨겁게 섞이고 끈적한 타액이 목구멍을 채운다. 그녀는 괴롭게 허덕였다. 그 가쁜 숨소리에 입 안을 샅샅이 배회하던 혀가 겨우 입 밖으로 빠져나갔다.
“울지 마….”
그가 입술 위에 대고 중얼거렸다. 얼떨떨한 얼굴로 가쁜 호흡을 몰아쉬던 그녀는 놀라 눈을 깜빡였다. 그제야 제가 또 울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커다란 손이 쓱쓱, 제 젖은 뺨에서 눈물을 훑어 내린다.
“자현, 정신이….”
소루는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이내 그의 손이 아래로 축 늘어졌다. 잠결이었던 듯, 색색거리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붉어진 얼굴로 입술을 감싸고서 멍하니 서 있던 소루는 이내 웃음을 흘렸다.
“…나쁜 잠버릇이 있구나.”
너에 대해서 좀 더 알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평범한 여자로 태어나서 네게 시집왔으면 더 많이 알 수 있었겠지.
‘아니… 너는 나 같은 거 거들떠도 안 보았을까.’
하지만 아마 나는 너를 숨어 훔쳐보며 애를 태웠을 거야.
그냥 어느 평범한 여인들이 그러하듯이.
그녀는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주룩, 고여 있던 눈물이 흘러내린다.
“이런 나를 받아 주어서 고맙다. 잠시라도, 곁에 머물게 해 주어서 고마워.”
소루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몸을 돌려 나가는 발걸음이 무겁다. 그녀는 떨리는 입술을 깨물고는 애써 의연하게 걸어나갔다.
괜찮아.
앞으로 내가 네 빛에 닿는 일이 없다고 하더라도, 네가 이 캄캄한 세계의 어딘가를 밝히고 있다는 사실만은 내 안에서 계속된다.
그 사실이 꺼지지 않는 등불이 되어 내 안에서 계속해서 빛날 거야.
“부디 건강하기를.”
마지막 한마디를 남기고 그녀는 방을 나갔다.
***
그녀는 마지막으로 조용히 염이의 거처를 들여다보았다. 제가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는 듯 탁상에 엎어져 자는 모습에 가슴이 아파온다. 소루는 조용히 그녀의 머리맡에 한 아름의 꽃을 놓아두었다.
매일 매일, 나를 위해 꽃을 꺾어다 주어서 고맙다. 인사도 없이 가서 미안해.
입술만 달싹여 그리 중얼거리고는 정원으로 나와 야토를 불렀다.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요괴가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내었다.
“…정말로 나와 함께 갈 건가.”
“이미 약속하지 않았느냐.”
“혹, 마음이 바뀌었다면….”
“아니. 네 곁에 있으마. 이제는, 너를 혼자 두지 않을 거야.”
요괴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다가오지 않는 그를 대신해 걸음을 내디뎠다. 사분사분 걸어가 요괴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자 그가 낮은 신음을 토해 낸다.
“…가슴이 요동을 친다.”
“그래. 나한테도 들린다.”
“이건 기쁨인가, 슬픔인가. 요괴도, 인간도 되지 못한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그녀는 희미하게 웃었다.
“앞으로… 둘이서 천천히 알아보도록 하자.”
그리 말하며 두 팔을 뻗자 머뭇거리던 요괴가 제 몸을 안아 든다. 그 팔에 안겨 소루는 조그맣게 속삭였다.
“가자. 야토. 우리가 편히 쉴 수 있는 곳으로….”
“…그대가 원하는 그 어디든.”
공주를 안아 든 요괴의 그림자가 어둠 속으로 스멀스멀 사라져 갔다.
***
“폐를 잔뜩 끼쳤구나. 미안해.”
꿈인 듯 현실인 듯 몽롱하게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입술이 제 입술에 살그머니 와 닿았다. 입 안에 자그만 혀가 입 언저리로 들어온다. 그것이 못내 애가 탔다.
좀 더 깊이.
칭얼거리며 그것에 매달렸다, 숨조차 제대로 쉬어지질 않았다. 달콤한 향기가 입 안 가득 퍼진다. 맞닿은 입술이 저릿했다.
말랑말랑한 입술을 좀 더 맛보고 싶다.
무거운 팔을 들어 떨어지려는 그녀를 붙들고서 마음껏 탐했다. 혀끝이 마비될 듯 다디단 액체가 목 안으로 넘어간다.
“곁에 머물게 해 주어서 고마워.”
그는 가물가물 감기려는 눈에 애써 힘을 주었다. 흐릿한 시야에 눈물범벅인 얼굴이 들어온다.
또 우는구나. 눈이 다 녹아 없어지겠어.
그는 입술을 달싹였다. 손을 뻗어 그녀의 뺨에서 눈물을 훔쳐내고서야 그는 줄곧 제가 그렇게 하고 싶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네가 울 때마다 나는 사실은 달래주고 싶었던 거구나. 이렇게 만져 주고 싶었던 거였어. 대체 왜 그렇게까지 제 마음을 부정하고 부정했던 건가. 인정하면 저 자신이 무너져 내리기라도 할 줄 알았던 건가. 자존심이 상하는 게 그렇게 두려웠던가. 대체 뭘 지키려고 그렇게 널 밀어냈던 것인지, 이젠 나도 모르겠어, 소루.
‘뭣 때문에 그리 아등바등했던 건가. 처음부터 이랬으면 됐을 것을….’
이 팔에 안고, 달래 주고, 안심시켜주고, 지켜주었으면 되었다. 그러면 됐던 거였어.
깨어나면, 그래, 같이 변방으로 가자. 조용한 곳이니 너한테는 오히려 여기보다 살기 좋겠지. 너를 욕하는 사람이 없고, 너를 상처 입히는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같이 가자. 추운 날씨가 걱정이지만 겨울옷을 잔뜩 사줄게. 거기서 같이 눈이 오는 걸 보자. 둘이서 조용히 살자. 이제 나는, 다른 건 아무래도 좋아.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졸음이 쏟아져 한마디도 내뱉을 수가 없다.
지금은 조금만 자고, 일어나서 말하는 거다. 미안하다고.
심한 말 해서 미안해. 밀쳐서 미안해.
그녀가 입술을 달싹거리며 무어라 말한다.
“부디 건강하기를.”
그는 번쩍 눈을 떴다. 심장은 쿵쿵거리고 몸이 식은땀에 흠뻑 젖어있었다. 곧장 상황이 파악되지 않았다. 천장을 올려다보며 눈을 깜빡이기를 잠시 정신을 잃기 전의 일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가륜의 함정에 빠졌던 일. 홀연히 나타나 왕을 죽이고는 사라진 요괴. 그리고… 어떻게든 살아남았나.
‘일단, 내 집인 걸 보아 최악의 상황은 아닌 모양이군.’
그는 손으로 더듬더듬 몸 상태를 확인했다. 칼로 가차 없이 꿰뚫린 어깨는 흠 하나 없이 깨끗이 아물어 있고 마찬가지로 양다리도 멀쩡하였다. 눈을 가늘게 뜨던 자현은 곧 소루를 떠올리며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소루의 피로 치료한 게 분명하다. 어렴풋, 몸에 와 닿던 그녀의 자그만 입술이 떠오른다. 꿈이 아니었나 하며 그는 얼굴을 감싸 쥐었다. 화끈거리는 열기가 느껴진다. 겁 없이 사내 몸에 입술을 들이대었을 소루를 떠올리니 풋내기처럼 몸이 단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여자는 너무 무방비하다.
‘…설마 남녀 관계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건 아니겠지?’
그는 한껏 인상을 썼다. 정말 그렇다면 앞날이 보통 심란한 것이 아닐 터였다. 투덜거리며 침상에서 몸을 일으키던 자현은 불현듯 멀어지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는 미간을 모았다. 어디서부터가 꿈이고 어디서부터가 현실인지 애매하다.
“주, 주인 나리! 깨셨습니까!”
지끈거리는 머리를 문지르고 있는데 문을 열고 들어선 하인 놈이 놀라 꽥 소리를 지른다. 자현은 그 우렁찬 소리에 징하고 울리는 관자놀이를 꾹 문질렀다.
“내가 얼마나 누워 있었느냐.”
“꼬박 이틀 동안 정신을 잃으셨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바로 비령 나으리를 모셔오겠습니다.”
그놈이 제 마누라라도 된단 말인가. 왜 깨어나자마자 녀석을 불러오겠다는 건지, 그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흘렸다.
“소루는?”
“…마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소루가 또 있느냐?”
날 선 음성으로 쏘아붙이자 종놈이 어깨를 움츠리며 눈치를 본다. 자현은 못마땅한 얼굴로 왜 아무 말 않느냐 일갈했다. 우물우물거리던 종놈이 이윽고 고한다.
“지금 찾고 있습니다만….”
“찾다니?”
또 정원 어딘가에 숨어 있기라도 한 건가 하며 쯧, 하고 혀를 차는데 그의 다음 말이 거칠게 고막을 긁는다.
“아무래도 집을 나가신 거 같습니다. 방을 정리해 두고는 홀연히….”
무슨 헛소리인가 하며 그는 종놈의 둔해 뵈는 얼굴을 노려보았다.
소루가 집을 나가 어디로 간단 말인가. 세상천지에 그 여자가 기댈 곳이 어디 있다고.
헛소리 말고 당장 소루를 데려오라 하려던 그는 문득 희미한 의식 중에 보았던 얼굴이 떠오른다.
“부디 건강하기를.”
그 나직한 속삭임이 귓가를 맴돌아 온몸이 차게 식었다.
꿈이 아니었던 건가.
그는 벌떡 일어나 소루의 방문을 열었다. 텅 비어있다. 숨을 멈춘 채 그 휑한 방을 바라보고 있길 잠시 자현은 이내 방을 나와 정원으로 뛰쳐나갔다.
“소루!”
분명 또 정원 어디에 숨어 있는 거야. 멍청한 것들이 그걸 못 찾고서 실종되었다 헛소리를 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그는 쩌렁쩌렁 외쳤다.
“소루!!!”
그 소리를 듣고 하인들이 놀라 달려왔지만 그는 시선도 주지 않고 실성한 사람처럼 정원을 마구 뒤졌다. 늘 나와 앉아 있던 정자, 나무 뒤, 뒤뜰, 일전에 주저앉아있던 수풀까지 모두 헤집었다.
나뭇가지에 긁혀 손가락에서 피가 흘러나왔지만 그는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가지를 마구 꺾으며 외쳤다.
“소루! 당장 이리 나와!”
하지만 어디에서도 그녀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다. 그는 바짝 조여 오는 목을 감싸 쥐었다. 점점 눈앞이 캄캄해진다. 발밑이 흔들렸다.
천재지변이라도 일어난 건가. 소루가 다칠지도 모른다.
“빨리 찾아야….”
그는 멍하니 중얼거리며 비틀비틀, 그녀가 지내던 뒤채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 순간 어디선가 비령이 달려와 제 어깨를 움켜쥔다.
“자현, 깨어난 건가! 아직 몸도 회복되지 않았는데 왜 나와서…!”
“소루는?”
자현은 그의 말을 뚝 끊고 물었다. 비령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자현은 그의 어깨를 움켜쥐며 다그쳤다.
“소루는 어디 있나?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사흘 전에 사라졌다.”
“사흘 전에… 사라져?”
타국의 언어라도 듣는 양 멍한 얼굴을 하던 자현은 다음 순간 험악하게 외쳤다.
“대체 여태까지 안 찾고 뭐 한 건가!”
“찾았네. 찾고 있어.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대체 뭐가 중요하단 거야!”
자현이 악을 쓰며 소리쳤다.
“눈도 보이지 않는 여자가 혼자 집을 나갔는데…!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말인가! 그 여자가 세상천지 어디에 갈 곳이 있다고…!”
그 처절한 음성에 비령이 놀라 뒷걸음질을 하였다. 그의 얼굴을 충혈된 눈으로 노려보던 자현은 다음 순간 머리를 감싸 쥐었다.
“너 같은 거 처음부터 보내 버렸어야 했어!”
그녀를 뿌리치며 했던 말이 비수처럼 제 가슴에 꽂힌다.
진심이 아니었어. 진심이 아니었어.
“어서 찾아서….”
나는 아직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고집을 부리며 진심이 아닌 것만 잔뜩 말했어. 몰라서 그랬다. 나는 어리석어서, 죽는다고 생각한 순간까지 제 마음도 못 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돌아와.
떨리는 숨을 토해 냈다. 후드득 뭔가가 떨어진다. 비가 오는 건가 하며 멍하니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설마, 설마 하며 제 얼굴을 만져본다.
아. 젖어있다.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내가 지금 울고 있는 건가. 천하의 자현이, 울고 있는 것인가.
“하, 하하… 하하하하하!”
그는 미친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우스워 죽겠다는 듯 배를 부여잡고 웃다가 견디질 못하고 주저앉아 주먹으로 바닥을 쳤다. 눈물이 후두둑 떨어져 흙바닥 위에 검게 얼룩진다. 눈으로는 울고 입으로는 웃는다. 그렇게 괄대했던 아내가 사라졌다고, 그렇게 밀쳐낸 여자가 떠났다고, 눈물을 떨구고 있는 제가 우습고도 슬퍼서.
“하하….”
망연히 얼굴을 감싸 쥔다. 다신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선뜩한 예감이 가슴을 관통했다. 심장이 뭉개지는 듯하다.
그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주룩 고인 물줄기가 뺨을 타고 흐른다. 목 안쪽에서 끅, 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건강하기를.”
그녀가 남긴 인사말만이 바람 속에 섞여 귓가를 계속해서 맴돌았다.
終章. 붉은 골짜기
공주가 사라진 이후 더는 심장을 잃은 채 죽은 시체가 나오지 않게 되었다. 그럼에도 마음을 놓지 못하고 아시타는 약 한 달 정도 더 도성에 머무르며 요괴가 다시 사달을 일으키진 않나 감시했다.
하지만 장안 어디에서도 귀물의 자취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인겁을 뒤집어쓰고서 돌아다니던 요물들의 모습도 더는 보이지 않았고, 여기저기 숨어 장난을 치던 잡귀들조차 어디로 갔는지 싹 사라졌다. 도성 전체에 감돌던 음산한 기운마저 가셔 사나운 낯을 하고서 숙덕거리던 백성들의 얼굴도 밝다. 되레 심상치 않은 기색을 보이는 것은 왕성이었다.
“희란국에 드리워져 있던 흑운이 걷혔으니 이만 돌아오라 하는 연락이 왔다.”
폐궁 내부에 부적을 붙이던 아시타는 휙 고개를 돌렸다. 여란이 가슴께에 팔짱을 낀 채 못마땅한 듯 사문의 문양이 찍힌 종잇장을 흔들고 있었다.
“믿어지나? 그 요괴 놈을 내버려 두고 어떻게 이 나라를 뜨라고 할 수 있는 것인지…!”
“이제는… 놈이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겠지.”
“그걸로 납득하겠다고?”
“점괘가 그리 나왔다면 따라야지. 우리로서는… 별수 없는 일 아니냐.”
한숨 쉬듯 답한 아시타는 고개를 돌려 황량한 폐궁의 내부를 쭉 훑어보았다.
당분간 궁궐 출입이 제한될 것이다, 그 성에서 무언가 조사할 것이 있다면 서둘러라 하는 비령의 말에 사념 정화를 위해 다시 찾은 거였다.
진작에 성안에서 나온 시신과 신율의 유골을 정리해 장례를 치르고 위령제를 드렸지만 성 곳곳에는 아직도 강한 원념이 남아 있었다. 그것을 정화하기 위해 짤막한 법령을 외운 뒤 그는 무뚝뚝하게 내뱉었다.
“내가 쫓고 싶다고 해도, 놈이 계곡으로 떠나가 버린 이상에는 방법이 없다. 여기서 평생 죽치고 앉아 지킬 수도 없는 일이지 않나.”
“그렇기는 하지만….”
그래도 역시나 납득할 수 없다는 듯 여란이 불만스레 구시렁거렸다. 그것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자현은 사념을 계속해서 기둥에 부적을 붙였다. 폐궁 곳곳에는 채 씻겨내지 못한 핏자국이 검게 얼룩져 음습한 공기를 내뿜고 있었다. 완전히 정화하려면 시간이 꽤나 걸릴 듯하다.
‘차라리, 성을 불태워 버리는 게 편할 텐데….’
당분간 궁궐은 폐궁의 처지 따위에는 신경 쓸 여력이 없을 것이다. 사실 사문에서 귀환을 서둘러라 하는 데는 희란국 왕성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혼란 때문이기도 했다.
야토에 의해 희란국의 왕이 죽고, 현재 자현을 중심으로 한 무인세력과 일왕자를 중심으로 한 왕실 세력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상황. 조만간 난국이 벌어질지 모르는 일이다. 타국의 정치 분쟁에 휘말리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서둘러 떠나야 한다.
‘결국, 내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군.’
“그러고 보니… 궁금한 것이 하나 있다.”
쓴웃음을 짓는데 구석에서 새장을 툭툭 차며 그 안에 든 요괴를 괴롭히던 여란이 불쑥 내뱉었다.
“뭐가 말이냐?”
“야토 말이다. 왜 신율 왕제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한 거지? 보통, 요괴들은 인간을 잡아먹고 금방 새 인겁을 뒤집어쓰지 않나.”
“…그 모습이 이 성에 숨어 있기 편해서였겠지.”
“어차피 왕제가 성 밖에 모습을 드러낼 일도 없는데 무슨 상관이라고…. 숨어 있고자 한다면 모습 따위는 아무래도 좋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