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가 사라진 이후 더는 심장을 잃은 채 죽은 시체가 나오지 않게 되었다. 그럼에도 마음을 놓지 못하고 아시타는 약 한 달 정도 더 도성에 머무르며 요괴가 다시 사달을 일으키진 않나 감시했다.
하지만 장안 어디에서도 귀물의 자취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인겁을 뒤집어쓰고서 돌아다니던 요물들의 모습도 더는 보이지 않았고, 여기저기 숨어 장난을 치던 잡귀들조차 어디로 갔는지 싹 사라졌다. 도성 전체에 감돌던 음산한 기운마저 가셔 사나운 낯을 하고서 숙덕거리던 백성들의 얼굴도 밝다. 되레 심상치 않은 기색을 보이는 것은 왕성이었다.
“희란국에 드리워져 있던 흑운이 걷혔으니 이만 돌아오라 하는 연락이 왔다.”
폐궁 내부에 부적을 붙이던 아시타는 휙 고개를 돌렸다. 여란이 가슴께에 팔짱을 낀 채 못마땅한 듯 사문의 문양이 찍힌 종잇장을 흔들고 있었다.
“믿어지나? 그 요괴 놈을 내버려 두고 어떻게 이 나라를 뜨라고 할 수 있는 것인지…!”
“이제는… 놈이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겠지.”
“그걸로 납득하겠다고?”
“점괘가 그리 나왔다면 따라야지. 우리로서는… 별수 없는 일 아니냐.”
한숨 쉬듯 답한 아시타는 고개를 돌려 황량한 폐궁의 내부를 쭉 훑어보았다.
당분간 궁궐 출입이 제한될 것이다, 그 성에서 무언가 조사할 것이 있다면 서둘러라 하는 비령의 말에 사념 정화를 위해 다시 찾은 거였다.
진작에 성안에서 나온 시신과 신율의 유골을 정리해 장례를 치르고 위령제를 드렸지만 성 곳곳에는 아직도 강한 원념이 남아 있었다. 그것을 정화하기 위해 짤막한 법령을 외운 뒤 그는 무뚝뚝하게 내뱉었다.
“내가 쫓고 싶다고 해도, 놈이 계곡으로 떠나가 버린 이상에는 방법이 없다. 여기서 평생 죽치고 앉아 지킬 수도 없는 일이지 않나.”
“그렇기는 하지만….”
그래도 역시나 납득할 수 없다는 듯 여란이 불만스레 구시렁거렸다. 그것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자현은 사념을 계속해서 기둥에 부적을 붙였다. 폐궁 곳곳에는 채 씻겨내지 못한 핏자국이 검게 얼룩져 음습한 공기를 내뿜고 있었다. 완전히 정화하려면 시간이 꽤나 걸릴 듯하다.
‘차라리, 성을 불태워 버리는 게 편할 텐데….’
당분간 궁궐은 폐궁의 처지 따위에는 신경 쓸 여력이 없을 것이다. 사실 사문에서 귀환을 서둘러라 하는 데는 희란국 왕성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혼란 때문이기도 했다.
야토에 의해 희란국의 왕이 죽고, 현재 자현을 중심으로 한 무인세력과 일왕자를 중심으로 한 왕실 세력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상황. 조만간 난국이 벌어질지 모르는 일이다. 타국의 정치 분쟁에 휘말리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서둘러 떠나야 한다.
‘결국, 내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군.’
“그러고 보니… 궁금한 것이 하나 있다.”
쓴웃음을 짓는데 구석에서 새장을 툭툭 차며 그 안에 든 요괴를 괴롭히던 여란이 불쑥 내뱉었다.
“뭐가 말이냐?”
“야토 말이다. 왜 신율 왕제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한 거지? 보통, 요괴들은 인간을 잡아먹고 금방 새 인겁을 뒤집어쓰지 않나.”
“…그 모습이 이 성에 숨어 있기 편해서였겠지.”
“어차피 왕제가 성 밖에 모습을 드러낼 일도 없는데 무슨 상관이라고…. 숨어 있고자 한다면 모습 따위는 아무래도 좋지 않나. 그리 눈에 띄는 모습으로 돌아다녀 도리어 정체를 들킬지 모를 일. 실제로 그리 되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올려 야토가 머물던 방을 바라보았다. 눈 위로 신율을 잡아먹던 요괴의 모습이 스쳐 지나간다. 그는 중얼거렸다.
“소루 공주와 가까운 모습이었기에… 집착했던 게 아닐까.”
“…참으로 이상한 요괴다.”
여란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납득할 수 없다는 듯 싸늘하게 내뱉는다.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동감이다. 저 역시 놈이 한 짓을 용납할 수 없었다. 죽어 마땅한 놈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이라도 눈에 띄면 없애버릴 것이다.
‘그러니….’
어둠 속에서 조용히 살고 있을 요괴를 향해 그는 중얼거렸다.
‘그러니 평생 내 눈에 띄지 마라.’
그는 마지막 부적을 붙이고는 몸을 돌렸다. 방을 나서기 직전 창문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빛에 뭔가가 길게 그림자가 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아시타는 그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창가에 낡아빠진 공이 댕그라니 놓여 있었다. 그는 그것을 손에 쥐어 들었다.
척 보기에도 오래된 것이었다. 바람이 반쯤 빠져 있었고 군데군데 너덜너덜하다. 그래도 제법 귀중하게 보관해 온 듯하다.
‘신율 왕제의 것일 리는 없고….’
그는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눈 위로 언뜻 창가에 앉아 자그만 공을 손에 쥐고 만지작거렸을 요괴의 모습이 스쳐 지나간다.
지금 공주와 함께 있을까.
그것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다시 창문 위에 올려놓고 방을 나왔다.
여란이 기둥에 기대선 채 왜 이리 미적거리냐 투덜거린다. 그는 바닥에 놓아 둔 새장을 집어 들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제발 잔소리 좀 그만해라.”
“네놈이 좀 빠릿하게 굴어봐라. 내가 왜 잔소리를 하느냐.”
이제는 네놈이라는 호칭이 너무나 당연해졌다. 그는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새장 안에서 꾸벅꾸벅 졸던 까마귀가 창살에 머리를 박고는 살살 좀 걸으라며 날개를 파드득거린다. 그걸 보며 여란이 눈살을 팍 찌푸렸다.
“저건 도대체 언제 없앨 거냐.”
“히익, 없애다니요. 아이고, 여란 님. 왜 자꾸 그런 흉한 말씀을 하십니까.”
“끽소리만 내도 불태워 버린다고 하지 않았던가?”
여란의 위협적인 말에 요괴가 부리를 합 다문다. 아시타는 그 우스운 꼴을 보며 킬킬거렸다.
“이왕 잡아 길들인 거, 식신으로 삼아볼까 한다.”
“요괴를 식신으로? 네가 드디어 미쳤구나. 정줄을 놓았어.”
아시타는 여란의 폭언을 설렁설렁 흘려들으며 폐궁을 빠져나왔다. 그러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 새장을 번쩍 들어 올렸다. 심상치 않은 눈길에 요괴가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그리로 고개를 바짝 가져다 대며 아시타는 요괴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말하였다.
“남방으로 떠나기 전에.”
히죽 웃는 아시타의 얼굴은 요괴의 눈에도 음흉스럽기 그지없어 보였다.
“조용히 네놈의 둥지에 들리자. 일전에 말했던 금은보화를 챙겨가야 할 게 아니냐.”
“…귀신보다 지독한 인간.”
“응? 지금 뭐라 했느냐?”
“아, 아닙니다요.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요.”
“좋아, 좋아. 어서 가자고. 남방까지 갈 길이 멀다.”
* * *
희란국에 새로운 왕조가 탄생했다.
무인 세력이 자현을 중심으로 결집해 왕권을 두고 왕족들과 길게 대립하기를 반년. 기나긴 다툼은 자현이 가란 공주와 혼인하여 현(眩) 왕조를 세우는 것으로 종결되었다.
다수의 관료 대신들이 열렬히 자현을 지지했고 무엇보다 무관들의 지지가 막강했다. 한동안 자현을 비난하였던 백성들은 장안에 은근히 도는 소문, 자호가에서 살인 요괴를 퇴치하였다 하는 말을 듣고 다시 자현을 추앙하기 시작했다.
그럴 줄 알았다, 자현이 어디 보통 인물인가, 자현이 또다시 백성들을 구하였구나, 그런 칭찬의 말들이 장안에 요란했다.
결국 여론에 밀려 륜(倫) 왕자들은 왕좌를 포기했다. 궁궐에는 대대적으로 물갈이가 일어났고 몰락하여 도성을 떠나는 귀족들의 행렬이 한동안 쭉 이어졌다. 이러한 격변이 몰아치는 사이 희란국은 어느덧 장안에서 벌어진 끔찍한 참상이나 귀신 공주에 관한 것은 까맣게 잊었다.
새로운 왕조가 세워지고, 새로운 질서가 세워졌다.
자현이 왕위에 오른 지 삼 년.
희란국에는 유례없는 태평성대가 시작되고 있었다.
* * *
“또다시 토벌에 나가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갑주를 벗어 던지던 자현은 힐끔 고개를 돌렸다. 문가에, 황금색 잉어가 수놓아진 푸른 금의를 우아하게 차려입은 가란이 조심스러운 눈길로 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칼자루를 벗어 걸며 무심하게 대꾸했다.
“그렇소.”
“폐하… 돌아오신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이리 궐을 자주 비우시는 것은 좋지가 않습니다. 굳이 폐하께서 가실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그는 힐끔 시선을 한 번 주고는 대답도 없이 그 옆을 스쳐 지나가 버렸다. 옷자락을 움켜쥐며 입술을 깨물던 가란이 그 팔을 황급히 붙잡았다.
“후, 후계자도 없는 상황에서, 혹 폐하께서 다치시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
“지금, 내가 죽기라도 할까 봐 걱정해 주는 건가?”
나른하게 웃으며 하는 말에 여자의 어깨가 눈에 띄게 경직된다. 그는 손끝으로 그 아름다운 얼굴을 들어 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여자의 입술이 파르르 떨린다. 바로 코앞에서 그것을 조롱 어린 눈길로 내려다보며 차갑게 내뱉었다.
“과부로 만들어, 입장을 난처하게 하는 일은 없게 할 테니 걱정하지 마오.”
“…단지, 폐하의 몸이 걱정이라고 해봐야 진심으로 들리지 않겠지요.”
여자가 처연하게 내뱉는다. 새하얀 얼굴이 슬픔으로 흐려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제 마음은 잠잠하기만 하다. 자현은 손을 놓았다. 조금은 딱한 마음이 든다. 씁쓸하였지만 여자를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로서는 가륜을 거역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목숨을 아비에게 가져다 바친 것에 대해 배신감에 치를 떠는 것도, 원망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이 여자를 보면 한 가지 생각을 뿌리칠 수 없는 탓이다.
‘그때, 당신의 부름에 답하지 않았더라면.’
그런 덧없는 후회를 거듭하고 있는 자신이 진절머리가 나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매몰차게 여자에게서 돌아섰다. 뒤에서 여자가 애달픈 시선을 보내오는 게 느껴진다. 자현은 돌아보지 않고 성큼 복도를 걸어 나왔다.
그 앞에서 대기하고 서 있던 비령이 작게 한숨을 내쉰다.
“폐하, 왕비마마의 말씀도 일리가 있습니다. 최근 너무 자주 성을 비우시지 않습니까. 영토 분쟁을 해결하는 것도 중한 일입니다만, 굳이 폐하께서 나서지 않으셔도….”
“어차피 너와 한비만 있으면, 궁궐은 아무 문제 없이 돌아가지 않느냐.”
빈정거리는 말에 비령이 넉살 좋게 웃는다.
“유능한 측근들이 있다고 해서 국정을 아주 나 몰라라 하시면 곤란하지요. 어디서 역심을 품을지 모를 일입니다.”
겁 없이 내뱉는 말에 자현은 코웃음을 쳤다.
“제가 왕으로 만들고, 제가 끌어내리고, 아주 재밌는 취미군. 네 하고 싶은 대로 해라.”
“무슨 그런 흉흉한 말씀을 하십니까. 제가 만들다니, 다 폐하의 타고난… 제발, 얘기를 하면 좀 끝까지 들어주십시오!”
휙 몸을 돌려 걸음을 옮기자 놈이 바로 뒤따라 붙는다. 자현은 본 척도 않고 척척 연무장으로 향했다.
특별히 만든 정예 군관들이 군열을 맞추어 훈련을 진행 중이다. 털썩, 상석에 마련된 자리에 앉아 그 모습을 살피는데 쫄랑쫄랑 쫓아온 비령이 곁에 딱 붙어 말한다.
“차라리 제가 출병하겠습니다. 당분간은 좀 성에 붙어서….”
“네놈, 문관이 아니던가?”
“무관입니다! 폐하와 함께 무관시험을 보고, 같은 부대에 배치되어, 같은 전장에서 싸운, 장수입니다!”
스스로도 제 정체성에 자신이 없었던 모양인 듯 꽤나 격렬히 외친다. 자현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사람은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 나보다는 네가 국정에 능하고, 네놈보다는 내가 살육에 능하다. 고로, 내가 나가 싸우는 게 낫지.”
“살육이라니… 선두에 서서 난동을 부린다는 게 사실이셨습니까.”
뒤에 서서 얌전히 지휘만 하리라 생각한 것은 아니었으나 이제는 나라의 머리가 된 인간이 그리 위태로운 짓을 한다 하니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러고 다니실 거라면 후계 문제를 서둘러 해결해 주십시오!”
“…….”
“왕이라면 당연히 짊어져야 할 의무입니다. 특히나 구 왕조의 피가 섞인 왕태자는 정당성을 위해서라도…!”
“시끄럽게 할 거면 썩 물러가라!”
날카롭게 쏘아붙이자 비령이 입을 다문다. 자현은 의자의 손잡이를 탁탁 손끝으로 두드렸다. 잠시간의 침묵 끝에 비령이 한숨 쉬듯 내뱉었다.
“아직도 잊지 못하신 겁니까.”
자현은 쾅, 하고 손잡이가 부서지도록 내리쳤다. 비령이 무거운 시선을 보낸다. 그런 눈길이 더욱 신경을 긁었다.
그를 사나운 눈으로 노려보던 자현은 곧 벌떡 일어나 몸을 돌렸다. 성큼 가버리는 그의 등 뒤로 비령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폐하, 오랜만에 잠행을 나가지 않겠습니까?”
다음 날 이른 아침, 대련장에 나와 땀범벅이 되도록 검을 휘둘러대던 자현을, 비령이 찾아왔다. 자현은 그의 수수한 옷차림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네가 웬일이냐.”
“폐하께서 고집을 꺾으실 리도 없고, 토벌에 나가시면 또 한동안 도성을 떠나계실 텐데, 단둘이서 오붓한 시간이라도 가져 볼까 하여… 으악!”
자현이 휘두르는 목검을 피해 비령이 후다닥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자현은 그리로 살기등등한 시선을 던졌다.
“내, 한 번은 그 머리통을 갈라 보고 싶다고 생각했지.”
“하하, 고정하십시오. 농입니다. 농.”
자현은 코웃음을 한 번 치고는 바닥에 검을 내던졌다. 그 뒤로 비령이 살살거리며 들러붙었다.
“장안에서 홍등 축제가 벌어진다고 합니다. 오랜만에 저잣거리를 헤집고 다니며 기분 전환이라도 하시지요.”
자현은 물병을 집어 들며 그 웃는 얼굴을 미심쩍은 눈으로 살폈다. 아무런 의중 없이 이런 제안을 할 놈이 아니라 수상쩍은 생각이 먼저 들었던 것이다. 그것을 눈치챈 듯 비령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말로, 별다른 뜻은 없습니다. 그동안 몰아치듯 여기까지… 폐하께서도 많이 쌓이셨을 테지요. 그러니 그리 전쟁으로 풀지 못해 안달이 아니십니까.”
“하! 혈기왕성한 개를 한 번씩 풀어 놓지 않으면 물어뜯는다지.”
“허허… 꼭 그렇게 곡해해서 받아들이셔야 직성이 풀리십니까? 싫으면 마십시오.”
자현은 휙 돌아서는 놈을 붙잡았다.
“내 옷을 챙겨오라고 일러라.”
비령이 씩 웃으며 진작 챙겨 왔지요 하며 의복을 내민다. 자현은 피식 웃으며 그 옷을 받아 재빨리 갈아입었다. 그러고는 환관들을 물린 뒤 조용히 후문으로 향했다.
당연히 단둘이서 나가는 것은 아니었다. 호위무사 넷이 조용히 그 뒤를 따라왔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따돌릴 수 있었지만 나중에 시끄러워지는 게 귀찮아 그냥 내버려 두었다.
‘그래도 역시 거슬리는군.’
왕이라는 신분은 실로 재미가 없고 거추장스러운 것이었다. 그는 궐을 나오며 새삼 생각했다. 궁궐 밖에서 한 발짝만 내디디려고 해도 주렁주렁 달고 다녀야 하는 것이 많고, 거쳐야 하는 것도 많다.
검 한 자루만 덜렁 들고 다녀도 아무 문제가 없었던 자현이건만 왕이라는 명패가 붙었다는 이유로 최소 둘에서 열 이상의 호위를 데리고 다녀야 하고 그마저도 잘 허가가 나지 않는다.
십년지기에게는 낯간지럽게 존칭을 들어야 하고, 어디를 가나 몸종을 데리고 다녀야 하며, 억지로 여자를 안아야 한다.
‘차라리 가륜이 변방으로 가랄 때 재깍 갈 것을 그랬다.’
스스로의 생각에 자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제가 배가 불렀구나. 언제는 어느 누구도 저를 감히 무시할 수 없는 위치에 오르겠다더니.
“본격적인 축제는 해가 넘어간 뒤에나 시작된다고 합니다. 일단… 무얼 하시겠습니까?”
“그새 또 시장이 커졌군.”
“구경을 하시겠습니까?”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로를 조금 지났을 뿐인데도 사방이 휘황찬란했다. 건물들은 층수가 올라가 있었고, 길에는 온갖 진귀한 것들을 파는 행상인이 우글우글하다. 어디선가 이국적인 음악 소리와 노랫소리도 들려온다.
“폐하께서 전쟁에 열을 올려 주신 덕이지요. 영토분쟁의 종결, 평야의 약탈족 토벌, 산적들과 해적들 토벌, 토벌, 토벌, 아주 깡그리 쓸어 주신 덕에 나라의 치안은 실로 공고해져서 온 나라에서 상인들이 물밀듯 들어오고 있는 판입니다. 요 몇 년 사이, 더 거두는 것도 아닌데 세수가 거의 네 배로 늘었다는 거 아닙니까.”
자현은 심드렁하게 그러냐 하며 천장 곳곳에 대롱대롱 매달린 붉은 등을 바라보았다. 아직 해가 저물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거리에는 등을 올리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그들을 무심히 훑어 내리던 자현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길 한구석에 자리한 좌판 위에 꿀을 굳혀 만든 듯한 노란 엿가락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엿 안에 붉은색 꽃잎이 들어 있다. 그것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자 비령이 설마 하며 물었다.
“드시고 싶으십니까?”
“…그래. 하나 사라.”
“정말로요?”
자현은 두 번 말하게 하지 말라는 듯 매서운 시선을 던졌다. 비령이 떨떠름한 얼굴로 그것을 두어 개 사 들고 왔다. 달짝한 것을 입에 물며 자현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비령이 그 뒤를 쫓으며 별일이라는 듯 말한다.
“단것이라면 질색을 하시는 분이 웬일이십니까. 혹, 축제라고 들뜨신 겁니까?”
그는 대답하지 않고 이에 끈적끈적하게 들러붙는 것을 우물우물 녹여 먹었다. 혀가 아릿할 정도로 달다.
꽃잎은 대체 왜 들어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별맛도 없는데.
그는 끈적끈적해진 손을 혀로 핥으며 중얼거렸다.
“…맛없어.”
“다 드셔 놓고는….”
비령이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흔든다. 자현은 비령이 투덜거리든 말든 하릴없이 거리를 구경했다.
번화가까지 나가자 거리에 사람들이 우글우글하다. 시장이 성황이라더니 실로 어마어마한 인파였다. 길에는 좌판이 쫙 깔려 있었고 가게란 가게는 모두 만석.
일하는 이들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입이 귀에 걸렸다. 건물마다 층수를 높인다고 난리라더니 목수들마저 분주하였다.
‘무료한 것은, 저뿐인 모양이군.’
자현은 문득 쓴웃음을 흘렸다. 물론 자신이라고 한가할 리는 없었다. 왕이라는 자리가 어떤 자리던가. 제아무리 주변이 유능하다고 해도 직접 해야 할 일이 태산이다.
어떤 날에는 하루 종일 인장만 찍다가 끝나기도 한다. 하지만 제아무리 바쁘고 정신없는 날들을 보내도, 전쟁터 한복판에서 미친 듯이 검을 휘둘러도, 무료하고 지루하기만 하다. 마음 어딘가가 버서석, 메말라 죽어버린 것 같았다.
‘무엇을 하든, 어디에 있든, 누구와 있든, 무엇을 보든….’
마음이 미동도 안 해.
어둑한 눈으로 활기찬 사람들의 얼굴을 훑어 내리던 그는 힐끔, 높게 솟은 태화를 돌아보았다. 어느 날부터인가 노랫소리가 그쳐 잠잠해진 그 검은 산봉우리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데 비령이 불현듯 말한다.
“자호가 근처까지 왔는데… 한번 들르시겠습니까?”
힐끔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보았다. 비령의 얼굴에도 어딘가 씁쓸해 하는 듯한 기색이 어려 있었다.
“왕위에 오르신 뒤로 한 번도 가보지 않으셨잖습니까.”
가만히 그 얼굴을 내려다보던 자현은 곧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말없이 걸음을 돌렸다. 빽빽한 인파를 헤치고 대로를 통과해 얼마간 가자, 제법 한적한 곳에 자리한 투박한 대문이 눈에 들어온다.
자현은 단단히 걸쇠가 잠겨 있는 문고리를 괜히 움켜쥐어 보았다. 그가 왕위에 오르고 가솔들은 모두 궁궐로 들어오거나 고향으로 떠나버린 터라 몇 년간 비워 둔 채 찾지 않은 집이다. 여태껏 관심도 두지 않았으면서 막상 싸늘하게 버려진 것을 보니 기분이 좋지 않다.
“열쇠도 없이… 괜한 발걸음을 하였군.”
“잠깐만 기다려 보십시오, 여기 옆에 샛문이….”
휙 돌아서려는 것을 비령이 붙들며 담벼락 옆에 자리한 좁은 길로 고개를 디민다. 그러고는 뭔가를 발견한 듯 어랏, 하는 소리는 내며 골목 안으로 성큼 들어갔다.
“문이 열려 있습니다.”
자현은 인상을 찡그리며 골목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나무로 된 문이 덜렁거리며 반쯤 열려 있었다.
그 안쪽으로 슬그머니 밀고 들어가니 잡초가 무성한 정원이 나온다. 제 가슴팍까지 올라오는 무성한 풀을 보며 자현은 미간을 접었다.
몇 년 비워둔 것만으로 이리 변하나.
고개를 두리번거리는데 어디선가 희미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흥얼흥얼, 앳된 콧노래에 자현은 돌처럼 굳어졌다. 비령이 고개를 돌린다.
“누가 멋대로 들어온 모양입니다.”
심장이 쿵쾅거려 그 말소리는 거의 들려오지 않았다. 저벅저벅 걸음을 옮기니 점점 노랫소리가 커진다. 저택 맨 구석진 곳, 뒤채에서 들려오는 게 분명했다.
자현은 거의 달려가다시피 해 거의 폐가나 다름없는 건물 뒤편으로 고개를 디밀었다. 그러자 붉은 꽃이 무성한 넓은 화단과 그 앞에 쪼그리고 앉은 자그만 체구의 여자가 눈에 들어온다.
자현은 잠시 숨을 멈추었다. 설마, 설마 하며 겨우 그리로 한 발짝을 떼자 여자가 인기척을 느낀 듯 뒤를 돌아본다.
“주, 주인 나리….”
황망히 두 눈을 크게 뜨던 여자가 곧 새파랗게 질려 바닥에 급히 엎드렸다.
“아, 아니, 폐, 폐하… 여, 여기는 어쩐 일로….”
자현은 허탈한 눈으로 그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일순 아무런 말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런 제 곁으로 비령이 다가서서 물었다.
“자호가에서 일하던 여종인가?”
“예, 예에… 이곳에서 일하던 여종, 염이라고 하옵니다.”
“모두 떠나라고 했을 터, 여기에서 대체 뭘 하고 있는 거냐?”
“그, 그것이….”
소녀가 꿀꺽 마른침을 삼키더니 기어들어 가는 음성으로 답했다.
“꼬, 꽃을 돌보려….”
“꽃?”
그 생뚱맞은 대답에 비령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힐끔, 무성한 꽃밭을 바라본다.
화려하게 만개한 아름다운 꽃이 바람에 살랑살랑 기분 좋게 흔들리고 있었다. 꽤나 아름다운 장면이기는 하다만 텅 빈 집에 숨어들어 수고스럽게 화단을 가꾸는 이유를 알 수 없다. 인상을 찌푸리는데 소녀가 더듬더듬 덧붙였다.
“소루 마님께서….”
불쑥 튀어나온 이름에 꽃밭을 바라보던 자현이 휙 고개를 돌렸다. 그 형형한 시선에 움찔 놀라며 소녀가 입을 다물었다. 자현이 다그치듯 물었다.
“소루가… 뭐지?”
“이 뒤채에 머무실 적에… 직접 가꾸신 밭입니다. 여기에 꽃씨를 심어놨었는데… 거, 걱정이 되어 제가 가끔씩 들러 돌보고 있습니다.”
“…….”
“몰래 숨어들어 온 게 불경한 일인 줄은 잘 압니다. 하지만… 옛날에 마님께서 제게 바람결에 꽃향기를 맡아보고 싶다고 하신 게 생각이 나서… 주, 죽게 내버려 둘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오들오들 떨고 있는 여자의 작은 어깨를 내려다보다가 멍하니 고개를 돌렸다.
바람에 붉은 꽃잎이 하늘하늘 흔들린다. 좀 전에 시장에서 먹었던 엿가락처럼 달큰한 향기가 물씬 풍겨온다. 그 여자와는 조금 어울리지 않는 진한 향기.
‘너는… 단것을 좋아하였구나.’
흐린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며 자현은 여종에게 툭 내뱉듯 말했다.
“잘 가꾸었군.”
“화, 황송하옵니다.”
“잠시 머물다 가도 되겠나.”
소녀는 왕이 제게 허락을 구하는 것에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동그란 눈을 휘둥그렇게 뜨더니,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양 물론이지요 하며 고개를 조아린다.
자현은 말없이 툇마루에 앉았다. 그 옆에 비령이 턱 앉는다. 자현은 붉은 꽃이 살랑거리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렇게 툇마루에 앉아 조용히 볕을 쬐었을 소루의 모습이 눈 위에 아른거린다.
“한 번은….”
자현이 불쑥 중얼거렸다.
“한 번은, 잘해줄 것을 그랬다.”
늘 퉁명스럽게 굴었지. 한 번도 다정한 말 한마디 해준 적 없다는 사실이, 이토록 나를 괴롭힌다.
그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녀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한없이 고독하고, 한없이 외로웠던 여자. 하염없이 사람을 그리워하였던 내 아내.
이제 와서는 후회라는 말조차 입 밖에 낼 수가 없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떨구었다. 이상한 피로감이 몰려든다. 축 처진 어깨가 물먹은 듯 무겁다.
이마를 짚는 손이 차다.
마음까지 시리다.
그는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
* * *
“오늘 하루는, 장안에서 머무르시지요.”
대로로 나온 비령이 권유해 왔다. 그가 재주 좋게 휙휙 사람들을 뚫고 지나가며 도성에서 제일가는 여관으로 척 그를 안내했다.
“하루 정도, 궁궐을 나와 자유를 만끽하시는 것도 좋은 기분 전환이 되시겠지요. 골치 아픈 일은 다 잊고 실컷 놀다 들어가는 겁니다. 궁궐에는 제가 연락을 취하겠습니다.”
“…대체 무슨 속셈인 건지, 이젠 무섭기까지 하군.”
“속셈이라니요! 소인의 충심을 꼭 그렇게 곡해하셔야 기분이 풀리십니까?”
비령이 툴툴거린다.
“가끔은 이렇게 풀어 주지 않으면 정말로 뭔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분이시니 예방 차원에서….”
자현은 네놈이 그러면 그렇지 하며 도끼눈을 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비령은 그 살기등등한 시선을 넉살 좋게 웃어넘기고는 성큼 여관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문가에 선 종업원에게 가서 가장 좋은 방으로 내어 놓아라 큰소리를 친다.
자현은 그 뒤에 서서 쭉 가게 내부를 훑어 내렸다. 깨끗하고 넓은 공간에 손님이 와글와글하다. 따로 분리되어 있는 방에도 어디 하나 빈 곳이 없다. 과연 자리가 있겠나 싶은데 아닌 게 아니라 점주가 고개를 흔든다.
“식사를 하실 곳은 딱 한 군데 남아있습니다만, 빈방은 없습니다. 특실까지 모두 가득 차 있어서….”
“허허, 거참. 다른 곳으로 가야 하나.”
비령이 난처하게 뒷머리를 긁적이자 점주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른 곳도 모두 마찬가지일 겁니다. 올해 손님이 유독 많아… 아, 그러고 보니 저녁에 방이 하나 새로 나는군요. 특실입니다만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다마다! 마침 딱 좋구만. 누가 이 저녁에 방을 다 내어놓는가?”
축제가 벌어지는 날 저녁, 없는 방도 잡아야 할 판에 방을 내놓다니 별나구나 하고 묻자 점주가 사람 좋아 뵈는 웃음을 흘리며 답했다.
“축제를 구경 온 이들이 아니라 그렇습니다. 사흘 전에 도성에 들어온 젊은 부부인데, 부인이 아파 의원을 찾아왔다고 합니다. 소란스러운 것이 싫어 오늘 저녁에 떠난다고 하더군요.”
“저런, 어디가 아파서?”
젊은 부부라는데 안 되었구나 하고, 비령이 딱하다는 듯 내뱉자 점주가 손을 내젓는다.
“심한 병은 아니고, 몸이 본래 약해 자주 앓는 모양입니다. 젊은 아씨께서 얼굴이 아주 해쓱한 것이 제가 다 안쓰럽더군요.”
“미인인가 보지?”
비령이 짓궂게 묻자 점주가 얼굴을 다 붉히며 고개를 끄덕인다.
“예에, 천하절색이 따로 없습니다. 부인뿐만이 아니라 남편 되는 분께서도 보기 드문 절세미남이시지요. 부부가 둘 다 그리 미색이 빼어나니 고새 소문이 퍼져 구경 오는 사람이 다 있지 않았겠습니까.”
“오호, 그 정도인가?”
점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참으로 오손도손 참 보기 좋은 한 쌍입니다. 특히나 사내가 아내에게 어찌나 극진하던지 잠시도 곁을 떠나질 않고 애지중지하는 게, 보는 이가 다 애절해질 정도가 아니겠습니까.”
비령이 오지랖 넓게 캐묻는 말에 점주가 구구절절 쓰잘머리 없는 수다를 늘어놓는다. 그 뒤에 서 있던 자현은 잔뜩 짜증 난 음성으로 재촉했다.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 건가.”
“아이고, 이거 참. 죄송합니다. 일단 식사자리를 내어 드리겠습니다. 방이 비워지는 대로 정리해서 알려드릴까요.”
“그렇게 해주게.”
비령의 대답에 점주가 냉큼 일꾼을 불러다가 가게 안측에 자리한 방으로 안내해 준다.
자현은 자리에 앉자마자 술부터 주문했다. 점원들이 금세 음식과 술을 날라다가 넓은 상을 가득 채워주었다.
“자, 한잔 받으십시오.”
“…오늘따라 유별나군.”
“이럴 때도 있어야지요.”
비령이 따라준 술을 입에 털어 넣으며 자현은 피식 웃었다.
확실히 성에서 한비나 대신 관료들의 잔소리에 시달리는 것이나, 가란의 처연한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보다는 마음 편하지.
그는 안주에는 손도 가져다 대지 않고 연거푸 술을 들이켰다. 비령이 말리지 않고 비우는 족족 잔을 채워 준다.
“오늘 하루는 마음껏 드십시오.”
“…….”
“그리고 이걸로… 마음을 비우시는 겁니다.”
술잔을 입에 댄 채로 자현이 눈을 들었다. 비령이 잠잠한 눈으로 마주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 정리하셔야 합니다. 삼 년이 지났습니다.”
자현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래서 데리고 나왔나. 미련 떠는 제 모습, 더는 못 봐주겠어서 이제 그만 정리시키려고?
자현은 아무 대꾸도 않고 술을 들이켰다. 쓰디쓴 술이 화끈거리며 식도를 데운다. 비령이 다시 한 번 되풀이했다.
“그만 잊으십시오.”
자현은 뭔가가 울컥, 치밀고 올라와 탕, 하고 거칠게 술잔을 내려놓았다. 그만하라는 뜻에서 사납게 노려보자 비령이 씁쓸한 미소를 머금는다.
“저도 때때로 생각합니다. 그때… 말렸으면 어떻게 됐을까… 못 가게 했더라면….”
“…….”
“위한다고 그랬습니다. 앞길에 방해가 될 것 같아서, 그냥 가게 뒀습니다. 하지만 폐하를 생각한다고 그런 것이지… 불행하게 되길 바라고 그런 게 아닙니다.”
쏟아지는 말을 무표정한 얼굴로 듣던 자현은 내가 불행한 건가 하고 쓴웃음을 흘렸다.
천하를 손아귀에 쥐었는데도 내가 불행하단 말인가.
“애석하게도 그때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분을 찾아낼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제 와서는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
“그러니, 잊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그 말이 맞다. 제아무리 후회한다고 해도 돌이킬 수 없다. 한동안 희란국을 이 잡듯이 뒤졌지만 결국 어디서도 그녀의 자취를 찾을 수 없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불분명하다. 아니, 마음 한편에서는 죽었을 것이라는 생각마저 하고 있었다. 그래도 제 상실감을 마주 보고 싶지 않아서,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덮어두고 그저 외면했다. 생각하지 않는 것으로 여태껏 질질 끌어왔다. 그도 알고 있었다. 이리 미련을 떤다고 해서, 무엇 하나 바뀌는 것은 없다. 이미 늦었다.
멍하니 술잔을 내려다보던 자현은 체념하듯 내뱉었다.
“그렇군.”
술을 물처럼 입 안에 털어 넣고는 탁, 하고 내려놓았다. 입 안이 썼다.
“이제는 잊는 수밖에는, 없는 거군.”
* * *
둘은 한참 동안 말없이 앉아 서로 술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 한 시진을 그러고 있는 동안 빈 병이 점점 바닥에 쌓여간다.
원체 둘 다 술에 강해 심하게 취하지는 않았지만 점점 어깨가 무겁게 축 처졌다. 자현은 상 위에 팔을 올려놓고 푹 머리를 수그렸다. 머릿속이 점점 멍해진다.
창밖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거리에서는 이제 하나둘씩 홍등을 밝히고 있었다.
하릴없이 창밖으로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데 점주가 다가와 방이 비워졌다고 이른다. 비령이 그리로 고개를 돌리며 고부장한 어투로 말했다.
“어, 그럼 장안에 소문 자자하다는 미남미녀 부부는 벌써 떠난 겐가? 슬쩍 구경하려고 했더니만.”
“하! 봐서 뭐하려고?”
“궁금하잖습니까. 눈요기도 하고….”
“지금 막 나갔으니 창문으로 보일 겁니다. 아… 저기 마차 앞에 서 있네요. 저들입니다.”
비령이 점주가 가리킨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자현은 흥, 하고 콧방귀만 한 번 뀌고는 술을 들이켰다. 그런데 비령의 기색이 이상하다. 뭔가 떠들어도 떠들어 댈 놈이 입을 벌리고서 멍하니 창밖을 내다본다. 자현은 의아한 눈으로 그의 시선을 쫓았다.
창틀 사이로 대로에 선 큰 마차와 그 앞에 선 키 큰 남자와 가녀린 체구의 여자를 금방 찾을 수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그들의 모습을 살피는데 문득 등줄기가 굳었다.
기묘하게 느껴질 정도로 아름다운 용모의 사내와 오싹하리만치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미려함이 흐르는 고운 얼굴을 피곤한 듯 흐리며 힘겹게 서 있는 여자를, 사내가 품에 안아 들었다.
그녀의 가냘픈 팔이 남자의 목에 휘감겼다. 길고 새까만 머리칼이 사내의 어깨 위로 쏟아졌다. 사내는 토닥이듯 그녀의 등을 두어 번 두드리고는 몸을 돌려 여자를 마차 안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뒤이어 마차에 올라타 문을 닫았다.
마차가 출발할 때까지 자현은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멍하니 창틀을 부여잡고 있기를 잠시 점점 멀어지는 마차를 보고서야 번쩍 정신을 차렸다.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가게를 달려 나갔다. 놀란 비령이 뒤에서 제 이름을 불렀지만 인식할 수도 없었다.
그는 바글바글한 사람들 속에서 고개를 이리저리 휘둘렀다. 이미 마차는 저만치 멀리 가 있다. 그것을 붙잡으려 숨이 다 넘어가도록 달려갔다. 말을 빌릴 여유도 없었다. 잠시만 눈을 돌리면 놓칠 듯해 무작정 뒤를 쫓기만 하였다.
“소루!”
축제를 알리는 폭죽이 여기저기서 터진다. 자현은 욕설을 내뱉었다.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마다 소음 속에 묻혀버린다. 그는 사람들을 마구 밀치며 나아갔다.
“소루!”
술기운 때문에 다리가 따라주질 않는다. 마차가 조금씩, 조금씩 멀어지더니 이윽고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자현은 망연히 서서 턱까지 찬 숨을 토해 냈다. 흐린 시선으로 멍하니 마차가 떠나간 도로를 바라보고 있기를 잠시, 떠날 거라고 하였으니 분명 성문을 향했을 거라는 데 생각이 미친다.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자현은 누군가가 가게 앞에 매어 놓은 말을 발견하고는 다짜고짜 올라탔다.
말 주인인 듯한 사내가 고함을 내질렀지만 듣는 척도 않고 말에 박차를 가했다. 요란하게 울음을 터트린 말이 마차가 간 방향을 향해 달려갔다.
일각 정도를 달리자 돌담을 쌓아 만든 높은 성문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는 말에서 뛰어내려 문지기를 붙들고 물었다.
“혹시 마차를 타고 온 남녀를 못 보았느냐?”
놀란 얼굴을 하던 병사가 자현의 다급한 얼굴을 보고는 순순히 답한다.
“마차에서 내려서 저쪽으로 갔습니다.”
그가 붉은빛에 감싸인 태화를 가리킨다. 자현은 그리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골짜기와 이어진 산기슭 끝에 남녀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그는 입을 벌렸다. 하지만 숨이 차, 부르는 소리는 희미하기만 하다. 그들은 점점 멀어져갔다.
“기다려….”
그는 손을 뻗었다. 그림자가 계곡 속으로 사라진다. 시뻘건 태양이 골짜기 사이로 점점 가라앉아 갔다.
자현은 붉은빛에 물든 계곡 안으로 거침없이 달려 들어갔다. 귀신들이 산다는 음곡은 실로 괴이했다. 썩은 낙엽과 벌레들이 우글거리는 바닥, 수천 마리 뱀이 한데 뒤엉켜 요동치는 듯한 형세의 구불구불한 나뭇가지, 날카롭게 솟은 높은 바위, 웅웅거리는 요란한 바람 소리…. 그 속에 그들이 있었다.
붉은빛에 휩싸여 있는 커다란 남자, 그 품에 안긴 여자. 그녀의 모습이 타오르는 듯한 노을빛에 어렴풋하게 비친다. 희미하게 웃는 그 얼굴이 망막에 아프게 스며들었다. 그는 입을 벌려 소리쳤다.
“소루!”
계곡에 잠시 머물던 빛이 완전히 사그라지고 계곡에는 이내 깊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얼굴을 긁는 나뭇가지를 밀어내며 그는 다시 한 번 소리를 내질렀다.
“소루!”
바람 소리에 묻혀 제 귀에도 그 음성은 덧없게 들려온다. 그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눈앞이 깜깜하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가 없었다. 요란한 바람 소리에 귀가 다 먹먹했다. 제 모습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어둠 속에 갇혀 그는 낮은 흐느낌을 토해 냈다.
“소루….”
대답 없는 공허한 부름. 질끈 눈을 감았다. 정말로 잊을 수 있겠느냐고, 누군가가 조롱하는 듯하였다.
잔인했던 만큼 잔인함이 되돌아온다.
무정했던 만큼 무정함이 되돌아온다.
잊을 수 없다.
잊을 수 없다.
붉은빛에 감싸여 있던 그 모습을. 그 미소를. 다른 누군가의 품에 안락하게 안겨 웃던 그녀를.
제가 놓친 것을… 죽는 날까지 잊을 수 없다.
나는 평생 너를 그리워하며 살게 되는 것일까. 해질녘마다 네 그림자를 찾게 되는 것일까.
진득한 절망이 밀어닥친다. 그것을 힘겹게 삼키며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손을 더듬으며 비틀비틀 계곡 밖을 향해 걸어 나가는데 문득 윙윙 바람 속에 웃음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그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새까만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노래한다.
「빛이 닿지 않는
깊고
깊은
계곡에
공주가 있다.
만물을 집어삼키던 요괴
야토가
항상 그 곁을 지키고 있으니
그 발은 땅에 닿을 일이 없고
그 피부는 상할 일이 없으며
그 몸은 식을 날이 없다.」
망연히 그 소리를 듣다가 다시 고개를 내려 어둠 속을 응시했다. 느린 발걸음이 힘없이 이어진다. 무겁게 처진 어깨 위로는 산울림이 너울너울 춤을 추고, 허공에는 삐뚤어지고 기묘한 요괴들의 연가가 울려 퍼진다.
「어둠 속에서 공주가 미소를 지으나
그 얼굴을 볼 수 있는 것은
해질녘의 찰나뿐.
심연 속에서
공주가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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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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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