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희란국연가-16화 (외전) (16/16)


 

환기를 위해 잠시 열어 둔 창문 안으로 습한 바람이 흘러들었다. 화톳불 앞에 앉아 질그릇 안을 뒤적이던 야토는 머리를 들어 올렸다. 컴컴한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붉은 눈을 번뜩이며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 곤히 잠든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이마 위에 송골송골 맺혀 있던 땀방울이 주륵 흘러내려 그녀의 속눈썹에 맺혔다. 그것을 수건으로 조심스럽게 닦아 낸 뒤, 소리가 나지 않도록 주의하며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나무 사이에서 시커먼 그림자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야토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방문자의 정체를 똑똑히 알아볼 수 있었다. 엄숙해 보이는 각진 얼굴과 부리부리한 눈매, 늙은이답지 않은 우람한 어깨와 크고 다부진 몸집…. 한때 자신의 것이었던 얼굴을 노려보며 그는 짜증스럽게 내뱉었다.

“검은 여우, 네가 여기엔 어쩐 일이지?”

“공주가 열병을 앓고 있다고 하여 약을 준비해 왔다.”

승려의 인겁을 뒤집어쓴 여우가 치렁치렁한 옷자락을 질질 끌며 느릿느릿 다가왔다. 야토는 요괴의 손에 들린 작은 약병을 의심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네놈이 대가도 없이 약을 만들어 왔다고?”

“물론 값을 치를 마음이 있다면 굳이 사양하진 않겠다. 예를 들어, 공주의 피를 몇 방울 나눠 준다거나…”

여우가 채 말을 끝맺기도 전에 그의 몸이 맥없이 뒤로 날아갔다. 요괴를 굵은 나무줄기로 밀어붙인 야토가 어둠 속에서 황금빛 눈동자를 흉흉하게 빛냈다.

“내가 네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걸 잊었나. 나는 지금 당장이라도 네 존재를 이 세상에서 없던 것으로 할 수 있다.”

여우가 다리를 버둥거리며 캑캑거렸다. 그 모습을 무자비한 눈길로 올려다보던 야토가 손아귀에 더욱 힘을 주었다. 인간의 형태를 취하고 있던 손이 서서히 요괴의 것으로 변이해 갔다. 위기감을 느낀 여우가 숨 가쁘게 외쳤다.

“노, 농이었다! 네 말대로 나는 네게 거역할 수 없는 입장이다! 진심으로 네 것을 탐낼 리가 없지 않나!”

다급한 변명에도 야토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쇠처럼 단단해진 손가락이 살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어 오자 여우가 절박하게 덧붙였다.

“나는 네게 경고해 주기 위해 찾아온 거란 말이다!”

“…경고?”

“그래! 네가 반드시 알아야 할 일이 있다!”

진위를 읽어 내려는 듯 여우를 뚫어져라 응시하던 야토가 천천히 손아귀에 힘을 풀었다. 요괴가 재빨리 그의 손에서 빠져나오며 씩씩거렸다.

“빌어먹을 자식, 인계의 물이 들더니 터무니없이 난폭해져서는….”

“경고할 일이라는 게 뭐지?”

매섭게 노려보는 눈길에 반항적으로 씨근덕거리던 여우가 냉큼 꼬리를 내렸다. 그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기(羅忌)가 눈을 떴다.”

야토는 눈을 치떴다. 나기는 한때 음곡의 모든 요마들을 벌벌 떨게 했던 대요괴의 이름이었다. 여우가 바닥에 떨어뜨린 약병을 주워 들며 푸념하듯 내뱉었다.

“온 계곡에 공주의 단내가 진동을 한다. 어느 요괴가 팔자 좋게 잠이나 퍼자고 있을 수 있겠나. 나기가 깨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놈이 공주를 노리고 있다는 뜻인가?”

“당연한 거 아닌가. 우리 요괴들에게 그녀는 극상의 만찬이나 다름없다. 저걸 가만히 끼고 앉아 있는 네놈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야.”

여우의 탐욕 어린 눈길이 힐끗 오두막을 향해 날아들었다. 대번에 야토의 기색이 험악해졌다. 그가 요괴의 시야를 막아서며 다시금 팔을 뻗었다. 여우가 기겁하며 외쳤다.

“나는 그저 사실을 말했을 뿐이다! 네가 허락하지 않으면 우리들은 공주에게 손 하나 까딱할 수 없다는 거 잘 알지 않나!”

“그녀가 있는 방향으로는 눈길도 주지 마라, 요괴.”

야토가 그의 멱살을 움켜쥐고서 험악하게 으르렁거렸다. 목을 졸라 오는 힘에 헐떡거리던 여우가 맹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싸늘하게 노려보던 야토가 내던지듯 손을 놓아주었다.

“그래서, 나기는 지금 어쩌고 있지?”

“…홀연히 나타나 계곡 동쪽의 요괴들을 실컷 잡아먹은 뒤 자취를 감추었다.”

요괴가 잔기침을 토해 내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당장 네 녀석을 공격해 올 것 같진 않아. 제아무리 대요괴라 할지라도 ‘이름’을 빼앗기는 것은 두렵겠지. 나기는 이미 네가 골짜기에 거하는 거의 모든 요괴들에게서 이름을 갈취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섣불리 덤벼들진 않을 거야.”

“…어딘가에 숨어서 내 빈틈을 노리겠군.”

“신안을 사용하면 나기가 숨은 곳쯤 금방 찾아낼 수 있을 텐데, 뭐가 걱정이냐. 놈이 습격해 오기 전에 네가 선공을 하면 되지 않나.”

예리한 눈빛으로 동쪽을 주시하던 야토가 멈칫거리며 그를 쏘아보았다. 시원하게 쭉 뻗은 유려한 눈매가 위험스레 가늘어졌다.

“내가 그놈을 처치해 주길 바라서 찾아온 거로군.”

“그래 주면 나야 고맙지.”

여우가 순순히 인정했다.

“나기는 네 녀석에게 대항하기 위해 요력을 모으고 있다. 강한 힘을 지닌 마물들이 이미 놈의 먹이가 됐어. 재빨리 이곳으로 도망쳐 오지 않았다면 나 역시 잡아먹혔을 테지.”

야토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의 무감한 태도에 조바심이 난 요괴가 보란 듯이 약병을 흔들어 보였다.

“네놈도 수족이 줄어드는 것은 달갑지 않을 게 아니냐. 나만큼 인간의 몸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요괴는 흔치 않다. 잔병치레가 잦은 공주와 이 골짜기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내 능력이 필요할 테지.”

“그러니, 네놈을 보호해 달라는 건가.”

“상부상조하자는 거다.”

위험스레 눈을 번뜩이던 야토가 검게 변한 손을 뻗어 약병을 거칠게 낚아채 갔다. 여우는 당황한 기색 없이 느물거리며 웃기만 했다. 그 낯짝을 당장이라도 뭉개 놓고 싶었지만, 확실히 놈의 재주는 쓸모가 있었다. 초조한 눈길로 힐끔, 공주가 잠들어 있는 오두막을 바라보던 야토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당분간 내 영역에 머무는 것을 허락하지. 다만, 그녀에겐 다가가지 마라. 공주의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건드렸다간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잘게 찢어 놓을 줄 알아라.”

“명심하지.”

여우가 냉소적으로 답했다. 서늘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던 야토는 곧 오두막을 향해 몸을 돌렸다. 여우가 조급하게 그를 불러 세웠다.

“나기는 어쩔 거냐. 이대로 내버려 둘 생각이냐?”

“놈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면, 그때 처리하겠다.”

“나기에게는 마흔다섯 개의 눈이 있다. 그 녀석이 요력을 모으면 네가 가진 신안에 대항할 수 있을지도 몰라. 그렇게 되기 전에 처리하는 게 낫다.”

오두막 입구에 우뚝 멈춰 선 야토가 성가시다는 듯 그를 쏘아보았다. 매끈한 미간에 깊게 주름이 팼다.

“그녀를 혼자 둘 순 없다.”

“다른 요괴들에게 공주를 지키도록 명한다면….”

야토의 살벌한 눈빛을 본 여우는 곧장 입을 다물었다. 진명을 빼앗긴 요괴들은 야토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골짜기에는 그에게 이름을 빼앗기기 전에 자취를 감추어 버린 요괴들도 있었다. 지금은 야토의 눈을 피해 몸을 숨기고 있지만, 언제 어디서 틈을 노리고 올지 모르는 일. 그가 다른 요괴들의 손에 공주를 맡길 리 만무했다. 여우는 체념의 한숨을 내쉬었다.

“좋다. 네가 알아서 해라. 나야 둘 중 누가 이기든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될 일이지.”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다.”

야토가 싸늘하게 대꾸하고는 오두막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여우는 입맛을 다시며 몸을 돌렸다. 놈을 부채질하긴 그른 것 같으니 일단 몸을 숨길 장소나 찾아야겠다. 요괴는 그리 중얼거리며 어둠 속으로 미끄러지듯 사라졌다.

***

“어딜 다녀온 것이냐?”

공주가 부스스 상체를 일으켜 세우며 물었다.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으려 주의했건만, 결국 그녀의 잠을 방해한 모양이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달려 나가 여우를 두 쪽으로 찢어 놓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천천히 침상 앞으로 걸어갔다. 화로에서 흘러나온 옅은 불빛이 그녀의 파리한 얼굴을 힘없이 비추고 있었다.

그는 목판을 다듬어 만든 침상 앞에 한쪽 무릎을 대고 앉아 그녀의 얼굴에 들러붙은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넘겨 주었다.

“잠시 땔감을 가지러 다녀왔을 뿐이야. 일어나지 말고 더 누워 있어라.”

“하루 종일 누워 있었더니 등이 아프다.”

그녀가 고개를 내저으며 입가에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야토는 못 박힌 듯 그녀의 입술을 응시했다. 기묘하게도, 그녀가 그런 식으로 웃을 때면 숨 쉬기가 힘겨워진다. 어째서 그리되는지 알 수 없었다. 인간이 되다 만 불완전한 육체는 때때로 영문을 알 수 없는 기이한 반응을 보였다.

“…더 잘 생각이 없다면 죽을 좀 들어라. 약을 구해 왔다.”

“약?”

갑자기 어디서 약을 구해 왔는지 궁금하다는 듯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그것을 모른 척하며 손에 쥐고 있던 약병을 침상 옆 선반에 내려놓고 화로 앞으로 걸어갔다.

“약을 먹으려면 속에 무어라도 채워 넣어야 한다. 나물죽을 끓였으니 몇 술이라도 떠 봐.”

그러고는 나무 주걱으로 질그릇을 뒤적이는데 희미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멈칫거리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공주는 무릎 위에 얼굴을 반쯤 파묻고서 짐짓 시침을 떼고 있었다. 하지만 눈매에는 채 숨기지 못한 웃음기가 남아 있었다. 그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웃지?”

“이상해서 그런다. 요괴가 이렇게 사람 보살피는 법을 잘 알 줄 몰랐다.”

“…오래전에 인간 아이를 돌본 적이 있다. 이런 일엔 익숙해.”

그는 무심하게 대꾸하고는 작은 사기그릇에 죽을 적당히 덜어 담았다. 그러고는 등받이가 없는 작은 의자를 침상 옆에 끌어다 앉는데,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아이는 어떻게 되었느냐?”

“그 아이?”

“네가 키웠다는 아이 말이다.”

그는 그녀의 낯빛을 살폈다. 조그맣고 부드러운 입술 위에 맴돌던 웃음기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갑자기 입이 말라 왔다. 그는 그녀의 손에 죽 그릇을 쥐여 주며 무미건조하게 내뱉었다.

“…먹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뻣뻣하게 굳어지는 게 느껴졌다. 야토는 그녀의 침묵을 견디지 못해 꽉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요괴다.”

왜 그런 말을 한 걸까. 그녀는 이미 그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도 그는 무언가를 설명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입술을 깨물며 초조하게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데, 덜그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어깨를 움찔거렸다. 그녀가 수저로 그릇을 뒤적이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알고 있다.”

그러고는 초연한 얼굴로 식사를 시작한다.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야토는 화로 앞으로 걸어가 숯을 더 집어넣고 불을 지폈다. 타닥타닥 불꽃이 튀는 소리와 숟가락이 그릇을 긁는 소리만이 오두막 안에 고요하게 울려 퍼졌다.

공주는 죽 그릇을 싹 비운 뒤, 약을 먹고 다시 침상 위에 누웠다. 얼마 안 가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창가에 앉아 한참 동안 어둠 속을 주시하던 야토는 슬그머니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창백한 뺨을 쓸어 보았다. 다행히 열기가 가셨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것도 잠시, 그녀의 수척한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다시금 가슴속에 둔중한 통증이 일었다. 그는 힘없이 벽에 머리를 기댔다. 이 골짜기에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한 지 이제 겨우 반년이 지났을 뿐이다. 그사이에 공주는 다섯 번을 앓았다. 늘 어둡고 축축한 곳에서 지내다 보니 기침을 입에 달고 살았고, 이런 식으로 한 번씩 열이 올라 그의 속을 뒤집어 놓기도 했다. 인간에겐 계곡의 환경이 맞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가라앉은 눈빛으로 그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애초에 요괴와 인간이 함께 산다는 게 말도 안 되는 짓이었던 건 아닐까. 그녀도 속으로는 후회하고 있을 것이다. 그는 공주가 아직까지도 슬픔을 떨치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을 감추기 위해 부러 밝은 체를 한다는 것도….

그는 차마 그녀에게 돌아가고 싶은 거냐고 물을 수 없었다. 그녀가 그렇다고 대답할까 두려웠다.

“…야토.”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던 야토는 어깨를 굳혔다. 그녀가 그의 손바닥에 얼굴을 기울여 왔다. 그는 어둠 속에서도 그녀의 얼굴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그녀가 눈꺼풀을 파르르 떨더니, 졸음이 덜 가신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자꾸만 수고를 끼쳐 미안하다.”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왜 그런 말을 하지?”

“며칠 동안 내 간병을 한다고 잠시도 쉬질 못했잖느냐. 한두 번도 아니고… 매번 너를 번거롭게 하는 거 같아서….”

“쓸데없는 소리.”

그는 다소 냉랭하게 말을 잘랐다.

“나는 인간처럼 쉽게 피로를 느끼지 않는다. 불필요한 걱정은 하지 마라.”

“그래도, 내 마음이 편치 않다. 그러지 말고 너도 여기 누워 조금이라도 휴식을 취해라.”

“…뭐?”

그녀가 벽 쪽으로 이동해 그에게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얼치기처럼 눈을 끔뻑거리던 야토는 팔을 잡아끄는 손길에 이끌려 엉거주춤 침상 위에 무릎을 대고 앉았다. 그녀가 그에게 베개를 내어 주며 이불을 걷었다.

“자, 어서.”

그녀가 그를 부드럽게 잡아당겼다. 잠시 주저하던 야토는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옆에 몸을 뉘었다. 그러자 그녀가 그의 어깨 위로 이불을 끌어 올리며 마치 온기를 나누려는 작은 동물처럼 몸을 바짝 붙여 왔다.

그는 목구멍을 뚫고 올라오는 신음을 삼켰다. 감미로운 향기가 콧속으로 스며들어 왔다. 머릿속이 어질어질하다. 황홀경과 고통 사이를 정처 없이 헤매는 기분이었다. 지독히도 허기가 졌고, 당장이라도 그녀를 집어삼키고 싶은 충동으로 내장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야토는 입 안의 살을 짓씹었다. 탐욕스러운 짐승이 곁에서 군침을 질질 흘리고 있는 줄도 모르고 공주는 평온한 얼굴로 잠을 청하고 있었다.

그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힘겹게 눈을 돌렸다. 그다지 도움은 되지 않았다. 민감해진 오감이 그녀의 체온과 향기, 색색거리는 부드러운 숨결을 더욱 선명하게 감지해 뇌수로 전달해 왔다. 전신에 불이 붙은 것 같았다. 그는 떨리는 한숨을 토해 냈다. 어째서 그녀를 향한 굶주림은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가는 것일까. 오히려 순전한 요괴일 때보다 더욱 심해진 것 같았다. 인간의 육체는 원래 이러한 것인가. 아니면 되다 만 몸뚱이라 이리 오락가락하는 건가.

그는 땀이 배어 나오는 자신의 매끈한 살결을 매만져 보았다. 법령사들의 공격에 의해 인겁이 갈기갈기 찢어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피부 표면이 멋대로 부글부글 끓어오르더니 다시 인간의 형태로 되돌아갔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재생된 육체는 이전과 비슷한 듯하면서도 어딘가 조금 달랐다. 학처럼 가늘고 호리호리했던 몸매는 더욱 크고 단단해졌고, 얼굴선도 이전보다 약간 굵어진 듯했다.

요력이 강해지는 날에는 요괴로 남아 있는 부분들이 부풀어 올라 가끔 형태가 일그러지기도 했지만, 힘이 안정되면 어김없이 이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아무래도 인간화가 이루어지면서 진흙이나 다름없었던 요괴의 육체 일부가 담고 있던 그릇의 형태 그대로 굳어져 버린 것 같았다.

그는 흠집 하나 없는 온전한 사내의 얼굴을 가만히 쓸어내리다가 다시 그녀를 돌아보았다.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뽀얀 얼굴을 가만 보고 있자니 가슴이 죄어들었다. 껍데기가 어찌 변하였든 다 무슨 소용인가. 그는 여전히 괴물이었고, 그녀의 눈에는 제 흉측한 본모습이 그대로 비칠 것이다. 때때로 그는 그녀에게서 눈을 빼앗은 이유가 그녀가 그것을 바랐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녀가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게 만들기 위해서였는지 혼란스러웠다.

‘…이제 와서 이런 의문이 다 무슨 소용인가.’

그는 곧 생각하기를 관두었다. 그녀는 그의 곁에 있어 주겠다고 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야토는 그녀가 깊이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조심스럽게 침상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검은 숲이 와스스 소란스럽게 울어 댔다. 요괴들이 또 어디선가 싸움을 벌이는 모양이다. 경계하듯 어둠 속을 빤히 주시하던 야토는 기묘한 피로감을 느끼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다음 날, 완전히 몸을 회복한 공주가 몸을 씻고 싶다며 개울가에 데려가 달라고 졸랐다. 여우의 충고가 마음에 걸렸지만, 그녀의 바람을 거절하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든 그에게 있어선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비단옷과 무명천을 챙겨 보자기에 곱게 싸 들고서 그녀를 등에 업고 간간이 달빛이 비쳐 들어오는 골짜기 외곽으로 향했다.

잠시 후, 수정처럼 맑은 물이 흐르는 작은 개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편편한 바위 위에 그녀를 조심스럽게 앉혀 주고는 손을 물속에 담가 너무 차갑지는 않은지, 혹시 뾰족한 돌이나 나뭇가지가 있지는 않은지 세심하게 바닥을 살폈다. 그러고는 그녀가 멱을 감은 뒤 곧바로 몸을 덥힐 수 있도록 근처에 작은 모닥불을 피우는데, 공주가 겉옷을 벗어 한쪽에 개어 두고는 얇은 속치마 차림으로 물속에 발을 집어넣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또다시 묘한 울렁거림을 느끼고 시선을 돌렸다.

“…너무 오래 있지 마라. 다시 열이 오를지 몰라.”

“걱정 마라. 네가 건네준 약이 아주 잘 들어서 이젠 아무렇지도 않아. 오히려 평소보다 건강해진 기분이다.”

그녀가 물을 첨벙거리며 해맑게 말했다. 그는 그녀를 보지 않으려 애쓰며 주위를 살폈다. 요괴들에게 주변을 면밀히 감시하도록 명령했지만, 상대는 한때 골짜기를 호령했던 대요괴다. 나기가 작정하고 달려들면 한 무리의 요괴가 덤벼도 막을 수 없었다.

‘차라리 정면에서 공격해 온다면 곧바로 이름을 빼앗아 버리면 그만이지만….’

교활하기 그지없는 놈이니, 그리 단순한 방법으로 공격해 오진 않겠지.

그는 그녀가 몸을 씻고 머리를 감는 동안에 신안을 부릅뜨고서 주위를 경계했다. 신력을 사용하는 것은 자신의 살을 태우는 일이나 다름없는 짓이었지만, 나기를 해치울 때까지는 잠시도 긴장을 풀 수 없었다. 그렇게 한창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데, 작게 재채기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대번 무명천을 집어 들고 그녀를 향해 달려갔다.

“이제 그만 나와라.”

“…그냥 코가 간지러웠을 뿐이다.”

“충분히 깨끗해졌어. 몸이 식기 전에 나와.”

그녀가 살짝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다가 순순히 물 밖으로 걸어 올라왔다. 그는 얇은 천이 피부 위에 찰싹 달라붙어 속이 훤히 다 비치는 것을 보고 재빨리 그녀의 몸에 무명천을 둘러 주었다. 공주가 편편한 바위 위에 걸터앉아 머리에서 물기를 꾹꾹 짜냈다. 물장난에 아직 미련이 남는지 발은 개울 속에 담근 채였다.

“너도 이리 와 앉아라. 물이 아주 시원해 기분 좋아.”

“…나는 됐다.”

“그러지 말고 어서.”

애원하는 듯한 어조에 야토는 결국 그녀의 곁에 신을 벗고 앉았다. 그녀의 조막만 한 발 옆에 제 큼지막한 발을 내려놓자 공주가 키득거리며 물을 튀겼다. 그녀는 간만에 즐거워 보였다. 하지만 그는 물속에 신체의 일부를 담그고 있는 것이 뭐가 재밌는지 도통 알 수 없었다.

“배고프다.”

공주가 슬슬 발이 시린지 다리를 물속에서 꺼내 천으로 감싸며 중얼거렸다. 그는 곧바로 한 곳에 치워 둔 보자기를 풀어 헤쳐 주먹밥 한 덩이와 천도복숭아 한 개, 군밤 한 꾸러미를 꺼냈다. 연잎에 싸 온 주먹밥을 까서 그녀의 손에 쥐여 주자, 어지간히도 배가 고팠는지 야금야금 잘도 베어 먹었다.

그녀가 먹는 걸 보고 있자니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제 허기 따윈 잊고 그녀에게 천도복숭아도 씻어 건네주고, 군밤도 까서 주었다. 공주가 주먹밥 하나, 복숭아 하나를 다 먹고, 군밤도 주는 대로 넙죽넙죽 입에 넣었다. 잘 먹는 걸 보고 있자니 어제저녁 검은 여우 때문에 뒤집혔던 속이 다 풀렸다.

“나만 챙기지 말고 너도 먹어라.”

한참을 정신없이 먹던 그녀가 문득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왜 요괴인 자신의 휴식이나 식사 따위를 신경 쓸까. 가끔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음식을 먹지 않아도 돼.”

먹어도 먹지 않아도, 어차피 그는 늘 기아 상태였다. 그렇게 말하려는 순간, 그녀가 손에 쥐고 있던 밤을 그를 향해 내밀었다.

“그러지 말고 이거 하나만 먹어 봐라. 밤이 아주 달아.”

“…….”

아무리 의미 없는 짓이라 할지라도, 그는 그녀가 원하는 것은 뭐든 해 주고 싶었다. 왜 그런지는 모른다. 그저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는 밤을 받아 들기 위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전에 그녀가 더욱 가까이 다가오더니 그의 얼굴 언저리에 밤을 들이밀었다. 입가를 더듬거리는 손길에 그는 무의식중에 입술을 벌렸다. 그러자 그녀의 손가락이 입 안으로 슬며시 기어들었다. 무엇이든 게걸스럽게 먹어 치워 온 탐욕스러운 아가리 안으로 말이다.

너무 놀라 숨을 멈추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단단한 이빨과 혀를 살짝 스쳤다. 밤의 맛 같은 건 전혀 느낄 수 없었다. 다시 입 밖으로 빠져나가는 그녀의 손가락을 끌어당겨 그대로 와그작 씹어 먹지 않은 것은 거의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그 강렬한 충동을 억누르느라 등 뒤로 식은땀이 다 맺혔다. 그는 혀끝에 맴도는 살갗의 감촉을 지우기 위해 턱이 부서져라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본인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맛이 어떠냐?”

웃고 있는 그녀에게 처음으로 화가 났다. 그는 입매를 단단히 굳혔다. 제 침묵에서 분노를 감지했는지, 그녀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아래로 내려갔다. 그는 그것을 모른 척하며 차갑게 내뱉었다.

“이만 옷을 갈아입어라. 돌아가자.”

그는 보자기에서 새 속치마와 비단옷을 꺼내 건네주고는 뒤돌아섰다. 그녀가 부스럭거리면서 옷을 갈아입고 그의 등을 살짝 건드렸다.

“다 입었다.”

그는 그녀의 몸에 장포를 둘러 주고는 훌러덩 등에 업었다. 오두막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내내 공주가 제 눈치를 살피는 게 느껴졌지만 기분이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그녀는 손가락이 없어질 뻔했다는 것을 알기나 할까. 배를 곯을 대로 곯은 짐승의 입에 손을 집어넣다니, 그녀는 제정신이 아니다. 두 번 다시 그런 짓을 하지 못하도록 단단히 주의를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차마 제 입으로 그 섬뜩한 충동을 고백하고 싶진 않았다. 그는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제가 얼마나 허기졌는지 알게 된다면, 그녀는 자신을 먹어도 좋다며 충동질해 올지도 모른다. 이미 몇 번이나 그러지 않았던가.

‘그러면… 그녀가 바라는 대로 먹어 치워 버리면 그만이 아닌가. 초조해할 이유가 어디에 있지?’

문득 떠오른 의문에 그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는 틀림없이 맛있을 것이다. 맛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분명 혀끝에서 녹아내릴 듯하겠지. 목구멍이 멋대로 꿀렁거렸다. 어째서, 이토록 먹고 싶은데 참아야 하나. 그녀는 분명 흔쾌히 자신을 제공하려 할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왜 참고 있나.

‘…내가 바란 것은 그런 게 아니다.’

그는 사랑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 알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 대상이 왜 그녀여야만 했던 걸까. 이전에는 특정한 대상에게 이토록 집착해 본 일이 없었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해 준다면, 그 대상이 누구든 상관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달라진 걸까.

‘그만 생각해.’

야토는 이를 악물었다. 답이 없는 질문들을 파헤치는 일은 이제 그만두기로 하지 않았나. 어차피 요괴인 그는 인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다. 스스로를 괴롭게 만들 뿐이라는 걸 질리도록 느끼지 않았나.

“…야토?”

귓가를 간지럽히는 목소리에 그는 번뜩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녀가 코를 킁킁거리며 고개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이 계곡에도 꽃이 있느냐?”

“꽃?”

“어디선가 꽃향기가 난다.”

주위를 살피던 야토는 커다란 바위틈 사이로 희미하게 빛을 뿌리고 있는 한 무더기의 초승달 이끼를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추었다. 가느다란 꽃잎 모양의 하얀 잎사귀가 바람결을 따라 살랑이며 달콤한 향기를 흩뿌리고 있었다.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꽃이 아니라 이끼다.”

“이끼?”

“이 계곡 안에 볕이 드는 것은 해 질 녘의 한순간뿐이다. 그 때문에 골짜기 안에는 정상적인 식물이 살 수 없지. 골짜기에 서식하는 식물의 대부분은 습하고 어두운 지역에서 사는 이끼다.”

그의 설명에 그녀가 호기심 어린 음성으로 물었다.

“한번 만져 봐도 될까?”

제아무리 기분이 상한 상태라고 해도 그가 그녀의 요구를 거절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야토는 순순히 바위틈 사이로 걸어 들어가 이끼를 한 줄기 꺾어 건넸다. 그녀가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받아 들어 줄기와 팔랑거리는 잎 부분을 만지작거리다가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았다.

“감촉도 냄새도 그냥 꽃 같다.”

“생김새는 거의 다를 게 없지.”

“그러면 그냥 꽃이라고 하자.”

그녀가 쾌활하게 말했다.

“앞으로 이 이끼는 골짜기에서 피는 꽃이다.”

밝은 목소리에 거짓말처럼 가슴속에 엉켜 있던 것이 스르륵 풀어졌다. 그는 발아래에 무더기로 핀 이끼를 둘러보며 말했다.

“마음에 들면 전부 다 꺾어 가지고 갈까?”

“그렇게 많이 피어 있느냐?”

“널려 있다.”

“그러면 꽃다발을 만들어 가자. 방에 장식해 두고 싶어.”

그는 곧바로 가장 잎사귀가 풍성한 것으로만 골라다가 한 움큼을 꺾어 내밀었다. 그녀가 그것을 두 손으로 받아 들어 코에 대고 연신 향기를 맡았다.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가슴 한편에서 찌르르한 통증이 일었다.

그녀가 그것을 꽃이라 부른다고 해도, 그건 이끼다.

축축하고 어두운 곳에서 자라는 초라한 이끼일 뿐이었다.

그는 빛을 받은 지 오래되어 창백하고 파리하게 변한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 어둠 속에서 그녀가 점점 시들어 가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니 모골이 송연해졌다. 그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돌렸다.

***

그토록 날을 세우며 경계한 것이 무색하도록 평화로운 날들이 이어졌다. 그녀는 대부분의 시간을 책상 앞에 앉아 종이나 손바닥에 글씨를 쓰는 연습을 하거나 하릴없이 창가에 앉아 악기를 연주하며 보냈다.

가끔은 골짜기 외곽으로 바람을 쐬러 나가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공주는 마치 볼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저물어 가는 태양을 향해 눈을 고정해 두다가, 때때로 무언가를 찾듯이 어깨 너머로 시선을 돌리곤 했다. 그렇게 투명한 눈동자가 허공을 정처 없이 헤매고 있을 때면, 그는 이유 없이 가슴 한구석이 선뜩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무엇을 찾고 있는 것일까.

“내일은 시냇가에 데려가 주겠느냐?”

돌아가는 길에, 그녀가 그의 등에 업힌 채로 물었다. 야토는 느릿느릿 걸음을 옮기며 고개를 내저었다.

“요즘은 날이 춥다.”

“발만 담그마. 아니면 물이 흘러가는 소리만 들어도 좋다. 또 개울가에 모닥불을 피워 두고 놀다가, 돌아오는 길에는 꽃밭에 들러서 꽃다발을 만들어 가지고 가자. 이번에는 전보다 더 크게 만들자.”

그녀가 다리를 까딱거리며 졸랐다. 기분이 좋아질 때면 그녀는 평소보다 말이 많아진다. 그 목소리가 듣기 좋아서 그는 부러 길을 빙 돌아갔다. 짙은 어둠이 곧 그들을 완벽하게 둘러쌌고, 공기에는 습한 흙 내음과 이끼에서 나는 축축한 냄새가 섞여 들었다. 그는 그녀가 춥지 않도록 장포를 더욱 단단히 여몄다.

집에 도착하자 지칠 대로 지쳤는지 공주는 조용해졌다. 화로 앞에 앉아 꾸벅꾸벅 조는 그녀를 채근해 겨우 밥 한 공기를 먹였다. 요괴들을 부려 구해 온 생선을 화톳불 위에 바삭하게 구워 살점을 발라 주자 그녀는 그것도 말끔히 먹었다. 공주가 먹는 것을 보는 게 왜 이렇게 좋을까. 제가 먹는 것도 아닌데 포만감이 느껴진다는 게 희한하다. 아니, 오히려 자신이 무언가를 먹었을 때보다 좋았다. 내장이 터지기 직전까지 먹고 또 먹었을 때도 이런 만족감은 느껴 본 적 없었다.

“더는 못 먹겠다.”

그가 껍질을 깨 건네주는 호두알을 오독오독 씹던 공주가 이내 손사래를 쳤다. 그는 물수건으로 그녀의 손과 얼굴을 닦아 주고 편안하게 쉴 수 있도록 침상 위에 앉혀 주었다. 공주는 침상 위에 앉아 그가 얼마 전에 구해 준 비파의 현을 튕겼다.

연주 따위는 배워 본 적이 없는 터라 그저 되는대로 줄을 당길 뿐이었지만, 그녀는 즐거운 듯 그 일에 몰두했다. 최근에는 요괴인 그의 귀에도 괴이하게 들리는 묘한 곡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공주는 그 이상한 노래를 만족할 만큼 연주하다가 벽에 기댄 채로 잠들어 버렸다.

그는 벽에 비스듬하게 기대 누운 그녀를 조심스럽게 침상 위에 눕혔다. 그러곤 머리채가 엉키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정리해 이불 위에 펼쳐 두는데, 또다시 알싸한 열기가 몸을 덮쳐 왔다. 그는 손가락 사이를 스르륵 빠져나가는 매끄러운 머리카락을 무심코 움켜쥐었다. 달콤한 향기가 끊임없이 그를 유혹해 왔다. 먹고 싶다. 이대로 한입에 삼켜 버리면 얼마나 황홀할까. 뱃속이 격렬하게 꿈틀거렸다. 하지만 허기와는 무언가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살갗에 입을 가져다 대고 싶은 이 충동은 정말로 식욕인가.

‘…아니면 무어겠나.’

그는 어두운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제자리걸음 하듯 반복되는 의문에 신물이 났다. 요괴인 자신이 품을 수 있는 욕망은 단 하나뿐이다. 이렇듯 그녀를 극진하게 보살핀다고 해도, 그것은 인간의 흉내를 내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자신이 하는 모든 게 다 가짜인 것이다.

야토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를 만지고 싶어지는 것 또한 배를 채우고자 하는 추잡한 욕망일 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는 그녀에게 닿고 싶은 욕구를 참을 수가 없었다. 야토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그녀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다 제 손끝이 검게 변한 것을 보고 번쩍 정신을 차렸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에게서 멀리 떨어졌다. 짙은 낭패감이 밀려들었다.

‘…그믐이었나.’

소매를 걷어 올리니 팔뚝까지 무쇠처럼 거무튀튀한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요력이 점점 부풀어 올라 인간화된 부분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그 때문에 육체의 일부가 멋대로 꿈틀거리며 뒤틀려 갔다. 그는 곧바로 침상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갔다.

그믐날 밤은 요괴들에게 있어서 가장 활력이 넘치는 날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 음기가 충만하기 때문에 요괴의 힘은 최대치까지 증폭한다. 하지만 신력과 요력이 항상 팽팽한 대치를 이루고 있는 불완전한 육체에는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오른쪽 팔부터 어깻죽지까지 비대하게 부풀어 오르는 걸 느끼며 입술을 짓씹었다. 신력이 짓눌리면서 시야가 조금 어두워졌다. 그는 방구석에 한껏 웅크리고 앉아 그녀가 깨지 않도록 숨을 죽였다. 몸이 점점 더 심하게 부풀어 오르며 척추가 뒤틀렸다.

그는 뼈가 으스러지는 통증에 까득 이를 갈았다. 차마 신음은 흘릴 수 없었다. 곤히 잠든 그녀를 가물거리는 눈빛으로 응시하던 야토는 벽에 뒤통수를 짓눌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밤이 끝나고 나면 거짓말처럼 원래 형태로 되돌아간다는 것이었다. 그때까지만 참으면 된다. 그는 날뛰는 요력을 최대한 가라앉히려 애쓰며 호흡을 골랐다.

그때, 어디선가 강대한 요력이 느껴졌다.

야토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 앞으로 걸어갔다. 음산한 기운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는 몸 안쪽에 짓눌려 있는 신력을 끌어 올려 칠흑 같은 어둠 속을 꿰뚫어 보았다. 전신이 붉은 눈으로 뒤덮인 거대한 짐승이 숲을 빠르게 가로질러 오고 있었다. 나기였다.

야토는 지체하지 않고 오두막 밖으로 뛰쳐나갔다. 하지만 그새 몸을 숨겼는지, 나기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야토는 초조하게 눈을 굴렸다. 증폭된 요력 때문에 신안이 흐려져 놈을 추적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는 지붕 위로 뛰어올라 사방을 빙 둘러보았다. 분명 나기는 공주를 노리고 있을 것이다. 당장이라도 이 근방을 샅샅이 뒤져 어딘가에 몸을 숨기고 있을 놈을 찾아내 갈기갈기 찢어 놓고 싶었지만, 오두막에서 멀어지는 순간 놈이 단숨에 그녀를 집어삼키려 들지 모를 일이다. 그 광경을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피가 식었다.

그는 성난 짐승처럼 그르릉거리며 붉은빛이 뒤섞인 금빛 눈동자를 형형하게 빛냈다. 검은 안개가 낀 것 같은 흐릿한 시야에 마침내 검은 짐승의 형상이 어렴풋이 잡혔다. 그는 지체하지 않고 몸을 날렸다. 쿵, 하는 둔중한 소음과 함께 황소만 한 들개의 몸뚱이가 바닥에 묵직하게 내리꽂혔다. 하지만 한때 골짜기를 호령했던 대요괴가 그리 쉽게 당할 리가 없었다.

놈이 곧바로 섬광처럼 뛰어올라 그의 어깨에 송곳 같은 이빨을 박아 넣었다. 야토는 개의 머리 아래쪽에 팔을 휘감았다. 힘겨루기를 하는 동안, 그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요력에 의해 사방에서 돌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야토는 그 와중에도 그녀가 깰 것을 걱정했다. 요력을 이용해 바람을 멈춰 세우자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나기가 근육질의 강인한 앞다리로 그의 가슴을 할퀴었다. 피부가 찢어지며 검은 피가 뿜어져 나왔다. 나기는 그대로 그를 거대한 아름드리나무 줄기에 밀어붙였다. 흉부가 으스러지는 듯한 충격에 야토는 거칠게 숨을 헐떡거렸다. 요괴의 목소리가 머릿속으로 불쾌하게 흘러들었다.

그동안 요력을 꽤나 모은 것 같다만… 그렇다고 해도 네놈은 하찮은 식귀일 뿐이다. 신안이 없으면 네놈은 내 적수가 못 된다.

검은 짐승의 몸뚱이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수십 쌍의 붉은 눈동자가 비웃듯이 가늘어졌다. 요괴가 앞발로 그의 몸을 짓누르며 입을 크게 벌렸다. 야토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놈의 아가리 안에 팔을 밀어 넣었다. 나무뿌리 같은 길고 앙상한 팔뚝이 놈의 목구멍 안으로 틀어박혔다.

나기는 펄쩍 뛰어오르다가, 이내 그까짓 반항이 무슨 의미가 있냐는 듯 으르렁거리며 그의 팔을 으적, 씹었다. 야토는 뼈가 으스러지는 것에도 개의치 않고 놈의 축축하고 뜨거운 내장 속에 더욱 깊숙이 손을 집어넣어 신력을 불어넣었다. 몸 안에서 퍼지는 심상치 않은 열기에 나기가 눈을 부릅뜨더니 격렬하게 몸을 비틀기 시작했다. 야토는 다른 손으로 놈의 머리를 꽉 움켜쥐고서 팔을 더 깊숙이 밀어 넣었다. 놈의 비명 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그만! 그만!

놈의 몸속이 진흙처럼 질척하게 녹아내리는 게 느껴졌다. 요괴가 근육질의 육중한 몸뚱이를 마구 뒤흔들며 거세게 발버둥 쳤다. 하지만 야토는 모든 요력을 끌어모아 무지막지한 힘으로 나기를 꽉 붙들었다. 이놈이 본격적으로 날뛰기 시작하면 온 계곡이 뒤흔들린다. 야토는 그의 몸을 바닥 위에 짓누르며 계속해서 신력을 쏟아부었다.

나기의 입에서 울컥 피가 뿜어져 나왔다. 야토는 전신에 피를 뒤집어쓰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신력에 의해 나기의 몸이 빠르게 붕괴되어 갔다. 요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반발은 더 거세어지는 법. 선천적으로 강대한 요력을 가지고 태어나 골짜기의 왕으로 군림한 대요괴는, 난생처음 겪는 고통에 혼비백산하여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야토는 곤죽이 된 나기의 내장을 긁어내며 놈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마침내 놈이 혼 깊숙한 곳에 꽁꽁 숨겨 둔 것을 꿰뚫어 볼 수 있었다.

그는 나기의 진명을 소리 내어 읊조렸다. 수십 쌍의 눈동자 위에 선명한 공포가 떠올랐다. 요괴에게 있어서 가장 두려운 일이 벌어지려 한다는 것을 알아차린 듯하다.

야토는 명령을 내렸다.

“나는 네 존재를 이 세상에 허락할 수 없다. 사라져라.”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요괴의 몸이 재가 되어 바스러졌다. 비명을 내지를 틈도 없었다. 요괴의 거대한 몸뚱이가 순식간에 바람 속으로 흩어져 버렸다. 자신을 옭아매던 힘에서 벗어난 야토는 축축한 흙바닥 위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나기의 공격으로 만신창이가 된 몸이 멋대로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부풀었다가 줄어들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는 전신을 관통하는 끔찍한 통증에 이를 갈았다. 제 몸에서 나는 피 냄새가 생소했다. 요괴의 피와 인간의 피가 뒤섞여 무어라 형용하기 힘든 야릇한 냄새가 공기 중에 섞여 들었다. 그는 천천히 숨을 고르다가 비틀비틀 몸을 일으켜 세웠다.

상체는 거의 짓뭉개지다시피 해 엉망이었지만 다행히도 두 다리는 멀쩡했다. 그는 간신히 균형을 잡고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 어느 한 방향으로 바람처럼 달려가 나무 뒤에 숨어 있던 한 그림자를 낚아챘다. 몰래 염탐하고 있던 검은 여우가 꽥, 하는 기괴한 비명을 내질렀다. 그는 비교적 멀쩡한 다른 손으로 놈의 입을 틀어막으며 음산하게 으르렁거렸다.

“간자 노릇을 하기 위해 여기에 왔던 거였나?”

“나, 나는 그저 일이 어떻게 돌아가나 궁금하여….”

그는 여우의 턱을 부숴 버릴 작정으로 힘을 주었다. 노승의 얼굴이 기묘하게 어그러졌다. 야토는 그의 뺨에 무자비하게 손톱을 박아 넣었다.

“그믐이 되면 신력이 약해진다는 것은 어찌 알았지?”

변명이 통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여우의 얼굴이 파리하게 변했다. 빠져나갈 길을 찾듯 눈을 굴리던 요괴가 결국 실토했다.

“…그믐만 되면 요괴들에게 이 주변을 철통처럼 지키라 명령하는 걸 보고 무언가 있다고 생각했지.”

야토는 입매를 일그러트렸다. 영리한 놈이니, 요력이 강해지는 날에는 신안이 약해진다는 것쯤이야 어렵지 않게 추론해 낼 수 있었겠지. 그는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손으로 여우의 얼굴을 음산하게 쓸어내렸다.

“그걸 고스란히 나기에게 고해바쳤나 보군.”

“네, 네 명령을 거역한 건 아니지 않나! 너는 네 약점을 다른 이에게 알리지 말라 명한 적이 없다. 네가 내린 명령은 공주를 해치지도 탐내지도 말라는 것뿐이었어!”

“그러면, 다시 명령을 내리지.”

여우의 얼굴이 공포로 푸르스름해졌다. 놈이 그의 옷자락을 와락 움켜쥐었다.

“나를 나기와 같은 꼴로 만들려는 거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여우가 처절하게 울부짖기 시작했다.

“안 돼! 차라리 나를 먹어라! 먹이가 되는 편이 백배는 나아! 내 존재를 지우지 마라!”

“입 닥쳐.”

야토가 그의 입을 손바닥으로 틀어막으며 험악하게 으르렁거렸다. 여우의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덜덜 떨렸다. 존재가 말살되는 것은 요괴들에게 있어 죽음보다 두려운 일이었다. 제 말 한마디면 이 녀석은 세상에서 완벽하게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당장이라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 이놈은 너무나 교활하다. 자신에게서 해방되기 위해 또다시 어떤 술수를 부릴지 모를 일. 이 자리에서 없애 버리는 게 여러모로 속 편하다.

‘하지만, 공주에게는 이놈의 재주가 필요하다.’

몇 날 며칠을 앓았던 공주가 이 녀석이 만든 약을 먹고 하루 만에 깨끗이 나았던 것을 떠올리며 야토는 까득 이를 갈았다. 이놈의 능력을 잃을 수는 없었다. 결국 그는 손아귀의 힘을 풀었다. 그러고는 잇새로 살벌하게 여우의 진명을 읊조렸다. 요괴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야토는 그의 공포에 질린 얼굴을 차분히 내려다보며 느릿느릿 내뱉었다.

“나와 공주의 신상에 위해가 가해지는 날에는, 네놈의 존재도 함께 사라지게 될 것이다. 앞으로는 우리에게 어떤 위험도 닥치지 않도록 모든 주의를 기울여라.”

요괴가 다리에 힘이 풀린 듯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놈의 얼굴을 손톱으로 긁어내리며 씹어뱉듯 말했다.

“이제 내 눈앞에서 사라져.”

***

그녀는 기묘한 소음에 잠에서 깨어났다. 처음에는 폭풍우라도 몰아치는 줄 알았다. 세찬 바람 소리와 함께 오두막이 미세하게 뒤흔들리다가 벼락 치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고, 곧이어 사방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이불 속에 몸을 웅크리고서 부르르 떨던 소루는 부스스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문득, 무언가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장막에 둘러싸인 것처럼 깜깜해야 마땅한 시야에 무언가가 아른거리더니 곧 희미한 불빛이 스며들어 온 것이다.

소루는 혼란스레 눈을 깜빡거렸다. 시야가 점점 선명해지더니 오두막의 어두운 윤곽이 한눈에 들어왔다. 비단 금침이 깔린 커다란 침상과 방 안을 은은하게 비추고 있는 화로, 식량을 보관하는 데 쓰는 듯 보이는 크고 작은 항아리와 그릇이 켜켜이 쌓여 있는 선반, 큼지막한 함과 한쪽 벽면을 꽉 채우고 있는 장롱….

그녀는 반년 가까이 살아온 오두막을 낯설게 둘러보았다. 매끈한 마룻바닥에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호랑이 가죽이 펼쳐져 있었고, 창문 옆에 자리한 책상 위에는 글자를 배우는 데 썼던 붓과 종이가 쌓여 있었다. 인가의 어느 평범한 가옥이라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세간이 잘 갖추어져 있었다.

‘꿈이라도 꾸고 있는 걸까?’

어리둥절하며 눈을 비비기를 한참, 그녀는 문득 뒷덜미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 야토가 약해졌을 때, 신력이 얼마간 제게 되돌아와 일시적으로 눈이 밝아지지 않았던가. 소루는 비틀거리며 침상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야토를 찾기 위해 문 쪽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데, 무언가가 그녀의 옷자락을 덥석 움켜쥐었다.

“…밖은 위험하다. 혼자 나가선 안 돼.”

소루는 흠칫 고개를 돌렸다. 검은 손이 제 소맷자락을 붙들고 있었다. 그 손을 따라 시선을 올리니 방 한쪽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검붉은 몸뚱이가 눈에 들어왔다. 소루는 비명을 삼켰다. 그는 온통 피투성이였다. 한쪽 어깨와 흉부는 시커먼 두꺼비처럼 부풀어 올라 부글부글 끓고 있었고,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는 나머지 부분들은 갈기갈기 찢겨 끊임없이 피를 줄줄 흘리고 있었다. 소루는 허둥지둥 그의 앞으로 달려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어쩌다가 이런 꼴이….”

“만지지 마라.”

그가 그녀의 손을 피해 벽에 바짝 붙었다.

“요력이 안정화되면 금방 낫는다. 요괴는 재생력이 뛰어나. 시간이 지나면 원래대로 돌아오니, 나는 신경 쓰지 말고 다시 자라.”

그녀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 그게 무슨 말이냐! 네가 이 꼴이 되었는데 내가 어떻게….”

강렬한 통증이 엄습해 온 듯, 그가 입술을 깨물며 몸을 뒤틀자 소루는 급히 말을 멈추었다. 부풀어 오른 흉부가 격렬하게 꿈틀거리더니 살갗이 갈라지며 검붉은 피가 줄줄 쏟아져 내렸다. 그녀는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나 손에 잡히는 대로 이불이며 옷이며 끌어당겨 그의 상처에 대고 눌렀다. 야토는 거칠게 헐떡거리며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나는 괜찮다. 괜찮으니까…. 제발, 저리 가 있어.”

“이, 이리 피가 많이 나는데 뭐가 괜찮다는 거냐. 잠시만 기다려라, 내 당장….”

그녀는 옷 속을 더듬어 자현에게서 받은 단검을 꺼내 들었다. 가죽으로 된 칼집을 벗겨 내 칼날을 손가락 끝에 가져다 대려는데, 차가운 손이 거칠게 그녀의 팔뚝을 움켜쥐었다. 다소 사나운 손길에 소루는 흠칫 몸을 굳혔다. 요괴가 두 눈을 불길처럼 빛내며 그르렁거렸다.

“대체… 뭘 하려는 거냐?”

“내 피를 받아 마시면 금방 나을 거야. 그러니….”

그녀의 팔을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무언가를 억제하듯 몸을 부들부들 떨던 요괴가 그녀의 손에서 단검을 빼앗아 바닥 위에 내팽개쳤다. 쨍그랑, 하는 소리가 방 안에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소루는 눈을 크게 떴다. 그가 자신에게 이런 난폭한 행동을 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팽팽하게 긴장된 침묵이 흐르기를 잠시, 요괴가 씹어뱉듯 말했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마라. 시간이 지나면 나아.”

“나는 괜찮다. 가벼운 생채기 정도야 삼사일 정도면 흔적도 없이 낫는걸. 내 피 몇 방울이면 금방 낫는데 굳이….”

“하지 말라고 하잖아.”

공격적인 어조에 소루는 입을 다물었다. 그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격렬하게 그녀를 쏘아보던 붉은 눈동자에 문득 슬픈 기색이 어렸다.

“그대는 정녕 모르는 건가. 그대의 몸에서 피 한 방울을 내느니, 내 몸의 모든 피를 쏟아 내는 게 더 낫다는 것을….”

소루는 할 말을 잃고 멍하니 눈을 깜빡거렸다. 그녀의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요괴가 고통으로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말을 이었다.

“그대의 몸에 생채기를 낼 바에는, 내 몸을 갈기갈기 찢는 게 낫다. 그러니… 제발, 그러지 마라.”

기이한 전율이 등줄기를 훑어 내렸다. 그의 눈이 자기 자신조차도 이해하지 못하는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듯했다. 망연히 굳어 있던 소루는 그를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야토가 흠칫거리며 벽으로 바짝 붙어 앉았다. 덩달아 움찔거리던 소루는 꽉 잠긴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

“…….”

“그저 네 상처가 다 나을 때까지 곁에 있고 싶을 뿐이다. 그것만이라도 허락해 다오.”

그가 천천히 숨을 몰아쉬다가 뜻대로 하라는 듯 조용히 눈을 감았다. 소루는 살그머니 그의 옆에 앉아 나뭇가지 같은 길고 뻣뻣한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그의 몸이 희미하게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뿌리칠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가 고통에 경련할 때마다 그의 손을 더욱 꽉 맞잡았다.

야토의 몸은 수차례 부풀어 올랐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그 모습이 죽도록 고통스러워 보였음에도, 그는 비명 한 번 지르지 않았다. 이를 악물며 아픔을 삭이는 모습에 절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소루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 모습을 본 야토가 격통을 견디느라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어 왔다. 왜 자신이 울고 있는지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위로를 건네려 하는 것이다.

소루는 강렬한 충동에 휩싸여 그의 팔을 끌어당겨 딱딱하고 거칠거칠한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었다. 참고 있던 눈물이 주룩 흘러내렸다. 이 손은 언제나 그녀가 필요로 하는 것을 건네주었다. 오래전부터 그래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울지 마라.”

그가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말했다. 그녀는 흐느낌을 삼키며 그의 성한 부분을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그렇게 얼마나 부둥켜안고 있었을까. 기진맥진해 축 늘어져 있는데 길고 강인한 팔이 제 몸을 안아 드는 것이 느껴졌다. 소루는 시야가 다시 어두워진 것을 느끼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몸이 회복되고 있다는 증거였다.

“이제 괜찮은 거냐?”

“…그래. 괜찮아졌다.”

그가 그녀를 조심스럽게 침상 위에 내려놓고는 다시 몸을 일으켜 세웠다. 피를 닦아 내는지 물수건을 철벅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루는 가만히 그 소리를 듣다가 기절하듯 까무룩 잠들어 버렸다.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는 사방이 새까만 장막에 휩싸여 있었다. 버릇처럼 눈꺼풀을 매만지던 소루는 이내 벌떡 몸을 일으켜 세웠다. 더듬더듬 야토의 흔적을 찾는데, 매끄러운 손가락이 그녀의 손을 감싸 왔다.

“야토, 상처는….”

“다 나았다.”

그가 확인이라도 시켜 주듯 그녀의 손을 자신의 얼굴 위에 올렸다. 소루는 그의 매끄러운 얼굴을 어루만지며 딱딱하게 힘이 들어가 있던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가 그녀의 손을 다시 제 얼굴에서 떼어 내며 말했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해 배가 고플 거다. 식사를 준비해 줄 테니 잠시만 기다려라.”

“나는 괜찮다. 몇 끼 거른다고 큰일 나는 것도 아닌걸. 그보다 이리 와 앉아라. 그렇게나 피를 많이 흘렸는데 조금이라도 더 휴식을 취해야….”

“내 몸은 인간과는 다르다. 불필요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그 단호한 목소리에 그녀는 더는 만류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불을 지피는 소리, 그릇을 덜거덕거리는 소리가 한참을 이어지더니 곧 그가 죽을 한 그릇 가지고 왔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녀의 식사를 거든다. 소루는 그의 종용에 못 이겨 억지로 죽을 떠 넘겼다. 겨우 한 그릇을 싹 비우자, 그가 그녀에게 겉옷을 입혀 주었다. 소루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옷은 왜…?”

“데려가고 싶은 곳이 있다.”

그러고는 제대로 된 설명도 없이 그녀를 훌쩍 안아 들었다. 소루는 그의 목에 팔을 감으면서도 혼란스레 눈살을 찌푸려 보였다. 도통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느닷없이 상처투성이가 되어 나타나질 않나, 몸이 낫자마자 다짜고짜 갈 곳이 있다 하질 않나.

“대체 어딜 가려고 그러냐.”

“가 보면 안다.”

그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며 건성으로 답했다. 소루는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해 주지 않을 작정이냐?”

“…다 끝난 일이다. 그대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일이야.”

저벅저벅, 그의 발소리만이 한참 동안 이어졌다. 소루는 그의 어깨에 몸을 기댄 채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드는 소리, 찌르르 울리는 벌레의 울음소리, 희미한 새소리를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울퉁불퉁한 산길을 지나는 동안에 그의 몸이 쉼 없이 오르락내리락했다.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소루가 불쑥 내뱉었다.

“나 때문이었느냐?”

“…….”

“나 때문에 싸우다가… 그리 다친 것이냐?”

야토는 말없이 걷기만 했다. 하지만 굳이 대답을 듣지 않아도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소루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동안 잊고 있었던 절망감이 고개를 쳐들었다. 이곳에 온 뒤로 줄곧 평온한 시간들이 이어진 탓에 잊고 있었던 것인가. 자신은 어디를 가나 화를 불러일으키는 존재였다. 요괴의 세계라고 해서 다를 리가 없었다. 제가 태평스럽게 지내는 동안에, 그는 뒤에서 남몰래 싸워 온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니 가슴이 죄어들었다.

“야토, 나는….”

느닷없이 몰아친 바람에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감미로운 향기가 폐부를 그득 채웠다. 따사로운 열기가 얼굴 위로 부드럽게 쏟아져 내리는 것을 느끼며 소루는 고개를 높이 들어 올렸다. 그가 그녀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다 왔다.”

소루는 싱그러운 풀 내음에 코를 찡긋거렸다. 부드러운 풀잎이 손과 다리를 간질이는 게 느껴졌다. 어리둥절하여 고개를 이리저리 휘돌리고 있는데, 그의 손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왔다.

“나를 봐라, 소루.”

소루는 그가 있는 방향을 향해 머리를 들어 올렸다. 그 순간, 그녀의 안으로 뜨거운 것이 흘러들었다. 소루는 눈을 크게 떴다. 섬광 같은 것이 번쩍이더니, 사방에서 밝은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녀는 자신이 꽃밭 위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끝도 없이 펼쳐진 넓은 들판 위에 하얀 꽃들이 파도처럼 출렁이고 있었다. 그녀는 얼이 나간 얼굴로 사방을 빙 둘러보았다.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많은 꽃들이 몰아치는 바람결을 따라 춤을 추었다. 그 광경을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는데, 차가운 손가락이 그녀의 얼굴 위에 와 닿았다. 소루는 그가 이끄는 대로 고개를 돌렸다. 위태로울 정도로 고독한 눈을 한 사내가 그곳에 있었다.

“나를 봐라.”

그가 그녀를 향해 고개를 기울여 붉게 물든 자신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게 했다. 그녀는 그의 내부 깊숙한 곳까지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곳에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의 정체를 알아차린 소루는 전신을 떨기 시작했다. 그가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말했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그녀는 무심결에라도 그것을 소리 내어 입 밖에 낼까 싶어 혀를 깨물었다. 그의 입가에 슬픈 듯한 미소가 어렸다.

“그대가 그랬지. 그대에게 남은 마음을 모두 내게 주겠다고. 남은 것은 얼마 없지만… 전부 내게 주겠다고….”

“…….”

“내게는, 그 약간의 마음조차도 없다. 그대에게 돌려줄 것이 없어.”

그의 눈매가 조금 일그러졌다. 하지만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단조롭고 차분하기만 했다.

“그러니, 내가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주겠다. 나는 그대의 것이다.”

소루의 입에서 신음 같기도 하고 탄성 같기도 한, 묘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격정에 뺨을 타고 주룩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자신의 안에 자리하고 있던 무언가가 희미해지고, 새로운 것이 힘차게 타오르는 걸 느꼈다. 상실감과 충족감이 동시에 엄습해 왔다. 소루는 질끈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다시 그의 눈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뒤틀리고 어그러진, 고독한 괴물의 안에 자신이 평생 찾아 헤매던 것이 있었다.

줄곧 바라 왔던 단 하나.

눈시울이 점점 더 뜨거워졌다. 그의 얼굴에 얼핏 낭패감이 서린다. 지난 새벽, 아이처럼 흐느끼던 제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 이리 데리고 나온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기뻐하기는커녕 돌연 눈물을 흘리니, 어리둥절하고 초조하여 그는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소루는 그런 그의 앞으로 다가가 발돋움을 했다. 서늘한 입술 위에 제 입술을 살그머니 가져다 대었다가 떼자, 요괴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의미를 알 수 없는 행동에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소매로 젖은 뺨을 닦아 내며 미소 지었다.

“…고맙다, 야토.”

때마침 몰아쳐 온 돌풍이 그들의 몸을 격렬하게 훑고 지나갔다. 소루는 흩날리는 꽃잎 속에서 그가 자신을 따라 미소 짓는 것을 보았다. 요괴는 본인이 행복에 겨운 듯 웃고 있다는 사실도 모를 것이다. 슬픈 눈빛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소루는 그를 향해 두 팔을 뻗었다.

“해가 지기 전에 이만 돌아가자. 우리들의 보금자리로….”

야토가 다시 그녀를 안아 들고 물결치는 꽃들을 헤치고 나아갔다. 왔던 길을 거슬러 가는 동안에 그는 꽃대를 툭툭 끊어 그녀에게 들꽃을 한 아름 안겨 주었다. 소루는 부드러운 꽃잎에 얼굴을 파묻고서 향기를 듬뿍 즐겼다. 풀숲에 숨어 있던 새들이 퍼드득, 하늘 위로 힘차게 날아올랐다. 그녀는 어두워졌다가 밝아지기를 반복하는 어지러운 시야 안에 그 모든 것들을 빠짐없이 담았다. 희미하게 붉은빛으로 물들어 가는 하늘, 황금 빛을 뿌리는 태양, 연둣빛 들판 위로 휘몰아치던 꽃의 폭풍우….

죽는 날까지 이 광경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녀는 안락한 품에 감싸여, 천천히 어둠 속으로 잠겨 들어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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