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황궁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2)
2018.04.07.
어느새 게이트 앞에 도착했다. 마력석을 충전하고 게이트가 가동되길 기다리는 동안 황태자는 창문을 열고 뭔가 이것저것 지시를 내렸다.
일하는 모습은 아까 내게 보여줬던 능글맞은 모습과 달리 진지하고 단호했다.
조금은 달라 보이네.
그가 창문을 통해서 서류를 받아드는데 그의 검은 예복 자락에 이질적인 것이 내 눈에 띄었다.
"아, 저기..."
"왜 그러지?"
"소매에 개털이 묻어서..."
이리저리 팔을 돌려보던 황태자는 귀찮은 듯 살짝 털어내었다. 그런데도 개털이 떨어지지 않았다.
"휴우, 이리 줘봐요."
큰 마차라 내가 그의 앞으로 한걸음 다가갈 수밖에 없었다. 그의 앞에서 옷자락을 잡고 손톱으로 살살 긁어 개털을 하나씩 모으기 시작했다.
마차 옆에서 말을 타고 가던 기사들이 흐뭇한 눈길을 보냈다.
왜? 뭐? 이 정도 가지고 그런 눈길인데? 하필 마차의 커튼이 걷어진 바람에 다 보이고 그러냐.
반대편 소맷자락도 잡아들며 황태자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이마가 왠지 붉어보이네. 감기라도 들었나?
"전하?"
"크, 크흠. 왜?"
"얼굴이 왜 그리 빨개요?"
"그, 그야. 그대의 몸이 내 눈앞에 붙어 있으니까."
아, 뭐래? 어제는 입을 맞췄니, 체온을 나눴니 마구 능글맞게 굴어놓고 내가 눈앞에 있다고 저런, 다... 고...?
"꺅! 어딜 봐요!"
난 순식간에 뒤로 후다닥 물러났다. 앉아있던 그의 시선이 닿는 곳엔 기울인 몸의 윗부분, 그, 그러니까 내, 내, 가슴골이!!
이 변태 황태자! 어딜 들여다본 거야? 그리고 에이린은 왜 이런 옷을 입힌 거야?
우리 사이엔 어색한 침묵만이 흘렀다.
나는 팔을 교차하고 가슴을 가린 상태였다. 마차는 다시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이제 서류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내가 미처 떼어내지 못한 개털은 그가 정령을 이용했는지 바람이 일어 날아가 버렸다. 신기하네. 도대체 정령은 어디 있지? 정령이 소환되야 힘을 쓰는 거 아닌가?
아니지, 진작에 지가 정령으로 개털 털면 됐잖아! 웃기네 진짜.
내가 그의 옷자락을 뚫어져라 쳐다보자 그가 서류에서 눈을 뗐다.
"기왕이면 내 손 말고 얼굴을 들여다 봐주면 안 되나? 손도 예쁘지만 얼굴은 더 잘생겼는데."
"예뻐서 본거 아니거든요?"
피식, 웃었다. 잘생겼긴 한데, 내 취향 아냐. 난 흑발이 더 좋거든. 눈동자는 진짜 이쁘긴 했다. 금색인가? 반짝이는 황금빛이 참 신기하네. 윽, 나도 모르게 얼굴을 봤다.
고개 돌려야지.
게이트는 일렁이는 무지개? 환영?처럼 생겼다. 나는 게이트를 처음으로 이용해 보는 것이었다. 멀미가 있으려나? 얼굴만 이동되고 몸은 다른 곳으로 가고 이런 건 아니겠지? 무섭네.
"왜 그래? 게이트 이용이 처음인가...?"
이런. 긴장한 것 티 많이 난 건가? 진짜 아르세이아라면 이용해 봤겠네. 나는 처음이지만.
"그, 그저 혹시나 마법이 잘못 인도되어 신체 부위가 각각 다른 게이트로 보내질까 하는 상상이 매번 들어 그럽니다."
"겁이 나면 내 손을 꽉 잡든가. 내가 그대를 안전하게 지켜줄 테니."
그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저 얄미운 미소. 다른 건 모르겠지만 아르세이아가 왜 짜증 내며 도망친 건지는 알겠다. 걔는 절대 저런 성격 못 받아준다. 황족이라 뭐라 하지도 못했겠지.
마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황태자는 내민 손을 거두지 않고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 치우라고 살짝 쳐내야지. 그 정도면 황족 모독죄는 아니겠지.
내가 팔을 들어 손을 내미는 척 찰싹 쳐내려는데 그가 갑자기 내 손을 꽉 잡았다. 그리고 내 손을 살짝 끌어당기더니...
으악! 촉촉하고 말캉한 게 내 손등에 닿았다. 따뜻하고 간지러워.
게이트를 통과했는지 갑자기 시야가 까맣게 변했다. 그리고 곧 어둠사이로 조금씩 빛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도 고개를 들지 않던 남자의 청남색 머리카락이 살짝 흔들렸다.
그가 고개를 들자 거짓말처럼 그의 몸 뒤로 후광이 비치는 듯 환해졌다. 그리고 그 빛 사이로 그가 햇살보다 환하게 미소 지었다.
"아르세이아, 내 곁으로 와줘서 고마워. 잘지내 보자구, 나의 비, 세이."
두근두근.
정신 차려. 네 눈앞의 남자는 네 이복동생의 남편이야. 둘은 아직 육체적인 관계는 없었지만 법적인 부부야!! 그니까 네 제부란 말이야!
소개받진 못했지만, 나설 순 없지만 나는 그의 처형이야. 홀리면 안 돼!
나는 그가 나를 향해 지어주는 미소를 외면하고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따뜻한 시선이 따라붙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침묵하는 사이 마차는 제도로 들어가는 성문 앞에 도착해 있었다. 황태자의 행렬임을 알리자 거대한 성문이 삐그덕 거리며 열리기 시작했다.
나는 결국 도망치지 못했다. 이제 이 문을 지나 황도로 들어가게 되면 어쩔 수 없이 황태자비인 척 지내야 할 것이다.
바짝 긴장이 되어서인지, 너무 오랫동안 마차를 타서인지 허리가 뻐근해져왔다.
잘 해내야 한다. 아니 무조건 모두를 속여야 한다. 진짜 황태자비가 돌아올 때까지, 꼭. 살아남아야 해.
넓게 잘 닦인 황도의 대로로 들어서자 잘 닦인 도로를 따라 수많은 건물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 길을 따라 모여있는 수많은 사람...들?
뭐지? 왜 저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웃어, 손도 흔들어주고. 황태자 부부가 다정하게 외유를 갔다 오는 걸 환영하려고 나왔잖아."
"이,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요? 왜요?"
"생각보다 내가 제국민들에게 인기가 많거든."
찡긋, 나에게 윙크한 황태자는 사람들을 향해 여유롭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수많은 군중들이 환호했다.
"황태자 전하다."
"행복해 보이십니다."
"잘 사세요."
"와와!!"
그때였다. 점점 커지는 함성소리 사이로 듣고 싶지 않은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괴물. 우리 마을에서 쫓아내라."
"내 아들을 살려내!"
"마녀! 악마의 새끼!"
"끼잉, 멍멍!"
흩어지려는 정신을 뚫고 내 소중한 강아지의 소리가 들렸다.
나는 알비케라의 목소리에 겨우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너무 오래된 기억. 묻고 싶었던, 지워버리고 싶었던 과거가 되살아났다. 지워졌다고 생각했는데,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난 한 뼘도 그 기억들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나 보았다. 입술을 꽉 깨무는 순간 뺨으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 땀을 거두어 주려는 크고 단단한 손이 보였다.
"전하. 더러워지십니다."
내가 반사적으로 그의 손길을 피해 얼굴을 뒤로 물리자 그는 순간 망설였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손을 뻗어 내 뺨을 어루만졌다.
그 순간 나는 시원한 바람이 내 얼굴을 스치는 것을 느꼈다. 땀이 다 거두어 진 뒤에는 따스한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와 긴장을 풀어줬다.
간질하면서도 마음이 한결 가라앉는 기분. 낯선 기분에 순간 얼굴이 붉어졌다.
그와 나의 다정해 보이는 스킨십 때문인지 군중들의 함성소리는 더 커졌다.
"봤어?"
"황태자 전하께서 하신 일을 봤냐고?"
"우와!!! 역시 대단하셔!!!"
"멋지다. 경이로워!!"
저기요? 스킨십이 대단하단 소리와 경이롭단 소리를 들어야 하는 일인가요? 왜 다들 경외심 가득한 눈빛을 보내는지 이해 못한 내가 말없이 눈만 깜박였다.
그러자 그가 천천히 조용히 말을 걸어왔다.
"괜찮아? 식은땀을 흘리는데, 혹시 어젯밤에 있었던 일 때문에 회복이 덜 된 건가?"
우이씨, 왜 내 흑역사를 들추는데?
"아, 아니에요. 여행이 길어져서 피곤해서 그래요."
걱정스레 바라보던 그가 마부 쪽을 향해 몇 번 벽을 두드리자 마차의 속도가 조금 빨라졌다. 차라리 마차가 좀 흔들리더라도 빨리 도착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나는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때 작은 꼬마 아이와 시선이 마주쳐 어색하게 살짝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러자 꼬마아이가 환하게 웃으며 소리쳤다.
"꺄아, 황태자비 마마가 날 보고 웃어주셨어. 예쁘다."
아, 좀 쑥스럽네. 그런데 아이가 너무 좋아해 줘서 나도 모르게 나도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 상태로 내 정면을 쳐다보다가 황태자와 눈이 마주쳤다.
"웃으니까 더 예쁘네."
"당연히 인상 쓴 것보단 웃는 게 예쁘죠. 아...!"
그러고 보니 이 남자를 만난 뒤로 알비케라와 놀아 줄 때 말고는 웃은 적이 없는 것 같았다. 특히나 그를 보고 웃은 적은 없구나.
쬐끔 미안하네. 잔뜩 긴장하거나 날 선 표정으로만 그를 봤구나.
"미안해요."
"뭐가?"
"그, 그게. 그냥. 매번 전하를 향해 인상만 쓰고 있었던 것 같아서요."
"이제라도 자주 웃어주면 되지."
그가 날 향해 또 환하게 웃는다. 피식. 웃음 정도야 얼마든지 주지 뭐. 그래도... 도움만 받았는데 매번 짜증 내고 있을 순 없지.
"그러지요. 전하."
응? 왜? 웃어준다는데 못마땅한 표정인데?
"카일룸. 아니 카일."
"네?"
"내 이름 알긴 아는 거지? 부부지간에 애칭으로 부르는 게 서로 웃을 일이 많지 않을까? 세이?"
세이. 아르세이아의 애칭. 그런데 왜 계속 세이렌, 나를 부르는 것만 같지? 조금은 떨렸다. 다정한 그의 부름이 날 간지럽혔다.
"조금 더, 친해지면 불러드릴게요."
"흐음."
다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그를 외면하고 나는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열심히 웃었다. 이것은 황태자비가 할 일이니까.
알비케라도 제가 황실견이라도 된 듯 열심히 창밖을 향해 고개를 들어 올리고 꼬리를 흔들었다.
열심히 인사하다 보니 어느새 황궁 앞이었다. 황제가 사는 태양궁이 가장 높은 곳에서 찬란하게 빛이 나고 있었다. 우리의 마차가 도착하자 해자 건너편의 다리가 내려왔다. 이제 이 다리를 건너면 나는 황태자비의 완벽한 대역이 되어야만 한다.
작년 가을 데뷔탕트가 끝나고 올해 봄이 시작되던 달, 성대한 국혼이 시작되며 내게 찾아왔던, 아르세이아가 황궁으로 들어가며 잠시 내게 주어졌던 자유, 그리고 평온 한 삶은 봄 향기와 함께 떠나갔다.
마차가 높고 높은 담으로 둘러싸인 황궁 안으로 온전히 들어왔다. 여름이 시작되는 달, 내게는 겨울이 다시 시작되는 달로 기억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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