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황궁 생활에 익숙해지기 (1)
2018.04.10.
다음날 아침까지 나는 걱정과 달리 악몽도 꾸지 않았고, 월경통도 없이 꿀잠을 잤다. 이상하게 아랫배가 계속 따뜻해서 아픈 줄 모르고 편히 잤네.
잠결에 곤란하다는 둥, 힘들다는 둥, 환궁하기 전에 말하고 거사를 치렀어야 했다는 등등 툴툴대는 소리가 들린 것 같긴 하다만 뭐 나랑 상관 없다.
아침은 저 푸른 머리의 황태자와 함께 먹었다. 25살쯤 나이가 들면 저리도 뻔뻔해지는 건가?
나의 월경통을 이유로 1층으로 내려가지 않고 내 방에 있는 내실의 작고 네모난 테이블에 우린 마주 보고 앉았다.
"바쁘지 않으신가 봅니다."
"이제 좀 한가해졌어. 그리고 그대의 마음을 얻으려면 없는 시간도 만들어야지. 얼른 유혹해서 그대를 마음껏 품으려면."
빠직. 저 능글맞음. 도대체 누구에게 물려받은 능력이야?
"전하는 동물들보다 더 종족 번식 욕구가 강하 신가 봅니다?"
나의 노골적인 표현에 시중들던 시녀들이 움찔한다. 흠흠, 19살의 요조숙녀가 할 발언은 아닌가?
"세이, 그대를 닮은 아이들이 잔뜩 태어난다면야 난 동물들보다 더한 열정을 보여줄 수 있어."
"저는 전하를 닮은 능글맞은 아이는 사양입니다만."
내가 쏘아붙이고는 예쁘게 잘린 삶은 달걀을 한쪽 입에 넣고 오물오물 씹자 그가 그런 내 모습을 유심히 관찰했다.
뭐, 뭔데? 설마 먹는 모습도 이쁘다 그런 뻔한 느끼한 대사는 사양이라고!
"세이, 예전에는 달걀 안 먹지 않았어?"
뭐라고? 아르세이아가 달걀을 싫어했던가? 알레르기라도 있나? 아닌데, 아르세이아는 달걀요리를 즐겨먹었다. 아니 정말 좋아한다고!
"무슨 소리 입니까? 저 완전 좋아합니다."
그쪽보다는 내가 아르세이아에 대해선 더 잘 안다고. 나는 태어나지도 못한 어린 생명을 먹는 걸 꺼려 해 유정란을 피했지만 암컷만 키우는 축사에서 나오는 무정란은 잘 먹었다. 황실 것은 무정란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아르세이아가 좋아하는 식재료라 먹은 건데...
"그랬나? 내 기억이 잘못됐나보 군."
아 불편해. 계속 아르세이아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거 생각하면서 가려가며 밥먹다가 체할 것 같았다. 입맛이 뚝 떨어졌다.
내가 포크를 내려놓자 눈앞의 남자가 염려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더 먹어야 해, 세이. 그댄 너무 말랐어."
나, 제대로 못 먹고 자라서 키만 크지 아르세이아보다 전체적으로 살짝 마르긴 했다. 그치만 나올 곳은 걔보다 더 나왔는데? 일하면서 잡힌 근육도 탄탄히 잘 자리 잡았는데 말랐다니?
"충분합니다."
"어제 만져보니 어깨도 허리도 너무 가늘던데... 그대가 어떤 모습이라도 내 눈엔 예뻐 보이겠지만 체력을 위해서라도 잘 먹어둬."
뭔데? 꼭 사료를 열심히 먹고 있는 닭을 바라보는 맹수의 눈이잖아. 흐익! 이 인간아 가까이 오지 마!!!
"체력을 길러둬야 나중에 우리의 밤이 더 뜨거워 진다구."
나지막하고 소름 끼치는 말을 한 황태자는 이마에 쪽하고 제 영역 표시를 했다. 그리고는 샐러드를 찍은 포크를 내 앞에 내밀었다. 아, 싫어. 내가 지꺼도 아닌데 왜 저래?
주변 시녀들은 다 시선을 돌렸다. 애들도 민망해하잖아. 그만하자 우리.
"가장 고귀하신 분의 입에서 나오는 어휘가 참 고급지네요."
"어제 그대가 말한 짝짓... 읍!!"
그만!!!! 나도 모르게 황태자의 입을 막아버렸다. 그만하자, 황태자님아 제발이요.
"흐익!!!!!!!!"
나는 손을 급히 뗄 수 밖에 없었다. 아, 내 손바닥! 불결해졌어. 내가 노려보자 그는 태연한 척 어깨를 으쓱했다.
가벼운 아침식사였지만 입가심으로 향긋한 차가 나왔다. 뜨거운 차지만 빨리 마셔 없애자. 그래야 이 인간이 빨리 자리를 뜨지.
어? 그런데 차가?
"캐모마일이 진통과 진정에 좋다고 하니 끝까지 마시도록 해. 밤새 앓더라."
찻잔의 온기가 내 손으로 넘어왔다. 차를 한 모금 마시자 향긋한 꽃내음이 나를 채웠다. 동시에 밤새 내게 전해진 그의 따스한 배려가 내 가슴 한켠에 쌓였다.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
내가 작게 웅얼거리자 그가 나를 향해 빙긋 웃는다. 나도 어쩔 수 없이 그를 향해 살짝 미소 지었다. 나, 또 어젯밤부터 이 사람을 향해 날만 세우고 있었구나. 미안하게, 쓸데없이 세심하네.
시녀장이 오늘의 일과를 정리해 보고했다. 오늘은 자유란다. 아싸! 황태자가 나 아프다고 다 빼라고 했대!! 정식 일과는 사흘 후부터 시작하라고 스케줄 조정을 지시했단다.
카일룸 헬리오스 데피니토르 황태자 전하. 완전 감사드립니다!! 그는 생각보다 다정하고, 아르세이아에게 진심인 것 같았다.
단순한 월경통에도 내 몸이 상할까 염려해주는 사람인 걸. 어제 초야 문제에 당황하던 모습도 그렇고. 내 동생에게 꽤 애정이 많은 듯한데...
어째서 아르세이아는 도망을 간 걸까? 작년 가을 데뷔탕트 이후로 황태자는 6개월가량 아르세이아에게 구애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가 나를 대한 태도를 보면. 좀... 능글맞지만 분명 아르세이아에게 나쁘진 않은 반려인데 왜? 아르세이아가 늘 소망했던 뜨겁고 불타는,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었을 텐데... 뭐가 문제였니?
나는 내 침실의 한쪽 테이블에 앉아 캐모마일 차를 또 마시며 책을 펼쳐두고 생각에 잠겼다. 모르겠다. 아 답답해.
그 애는 어릴 때부터 예측 불가였다. 후작부인이 그리 싫어하는데도 날 찾아와서 놀다가곤 했으니까. 부족한 것 없는 아이가 왜 날 찾아온 건지는 아직 의문이었다.
아르세이아. 예쁜 내 동생. 널 참 좋아하지만. 이건 아니잖아. 빨리 쫌 돌아와!! 제발!!!
하아, 답답해서 발코니 쪽으로 옮겼다. 커다란 창가에 붙어서 밖을 내다보자 어제와는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정원들. 그 속의 다양한 식물들, 처음 보는 나무도 많았다.
우와. 제도는 대도시니까 자연을 느끼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커다란 정원을 보자 마음이 놓였다. 날 평온 속에 살게 해주는 녹음.
실컷 감상하다 몸을 돌리는데 창가 옆에 있던 장식장의 모서리에 팔을 박았다. 우씨, 어딘가에 집중하다 보면 자주 이랬다. 익숙하지 않은 방의 구조도 문제고, 나의 공간 감각에도 쬐끔 문제가...
멍들진 말아다오 제발.
에이린은 점심 전에 출근을 했다. 나는 다른 시녀들을 물리고 에이린과 독대했다.
"너! 알고 있었지?"
"뭐...뭘요?"
에이린은 황궁 안에서는 습관적으로 실수할 수도 있다며 존댓말만 쓰기로 했었다.
"한 달에 한 번 있다는 합방일!"
"아, 그거 말입니까?"
"말을 해주고 퇴궁했어야지!!!!!"
"그래서 황태자 전하랑 합방은 어찌 됐어요?"
"에이린! 너 진짜!!!!!!"
에이린은 어젯밤 있었던 일을 듣고 한참이나 멍하게 있다가 깔깔 넘어갔다. 뭐가 그리 좋은데? 응?
"이걸 다행이라 할지, 불행이라 할지, 하하하."
"보니까 황태자는 세이에게 충분히 진심인듯한데, 초야가 늦어지긴 했지만 이유는 명확했고. 도대체 세이는 왜 그런 거야?"
세이는 황태자가 자기에게 관심 없다 했지만 그건 아닌 듯 했다. 귀찮으리만큼 좋아하는 게 이리도 느껴지는데...
"글쎄요. 황태자 전하께서 세이님을 좋아하긴 했지만 좀 거리감이 있었는데, 가출 사건 이후로 전하께 유달리 잘해주시네요."
가출로 남자 마음 잡은 거면 너 성공한 거야. 그러니까 돌아와라 아르세이아. 제발!
"후우. 나 힘들어. 입성 하루 만에 내 멘탈이 모래성마냥 무너지고 있다고."
에이린은 이해한다는 듯이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사흘 후부터 나 공식 일정 있다던데 뭐야?"
"뭐, 예법 교육이랑 황후가 되기 위한 여러 가지 공부들, 그리고 귀부인과 영애들과의 티타임 이런 거겠죠."
공부란 소리에 내 귀가 번쩍 뜨였다. 배우는 것은 즐거운 일인데, 아르세이아가 황궁에서조차 땡땡이였다면 어쩌지? 내가 막 갑자기 공부 열심히 하면 이상해 보일 거잖아.
"저기 린. 혹시 세이가 황궁에서도 땡땡이쳤어?"
"정말 지겨워서 몸서리치셨지만, 황궁 안에는 황태자비를 대신해 수업을 들어줄 분이 안 계셔서 꼬박꼬박 들으셨지요."
이 알만한 느낌. 황태자가 문제가 아니라, 공부가 싫어 가출한 거야. 얘 진짜 못 견뎌서 내가 글 아는 거 알고 매번 날 지 수업에 대신 내보냈잖아!!
이해한다고 용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아니 용서하고 말고 할 게 없었다. 당사자가 아주 당당히 미안해하지도 않고 자신은 자유를 찾아 떠났다.
걔는 내게 사과도 안 할 것 같은데 무슨 용서. 매번 대역시킨 것도 당당했지. 내가 못 누린 것을 누리게 해주는 것이니 고맙지 않냐고. 못된 것.
대신 후작부인에게 걸릴 땐 아주 열정적으로 변명해 줬다. 그렇다고 내게 날아오는 채찍을 막아 낼 순 없었겠지만.
"그래, 그럼 자연스럽게 공부에 흥미 생긴척해도 되겠네."
티타임은 어쩌지? 사교계에서 아르세이아와 친했던 영애들이 누가 있더라. 연회에 대신 가서 몇 번 만나긴 했지만 부담스럽긴 했다.
"에이린, 미안한데 당분간 휴가를 못 줄 것 같은데, 괜찮아?"
"어쩔 수 없죠. 당분간은 그래야겠죠."
"세이 때문에 너도 고생이 많구나. 대신해서 사과할게."
"괜찮으니까 수당이나 많이 챙겨주세요. 전하가 이곳 주인이시니 마음껏 절 이뻐해 주시면 된답니다."
어, 그래. 이렇게 된 이상 내가 황태자비 명목으로 나온 돈. 마음껏 탕진해 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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