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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비의 대역으로 살아남기-10화 (10/126)

11화. 황궁 생활에 익숙해지기. (2)

2018.04.10.

에이린과 대화를 나눈 뒤 바로 알비케라가 있는 방으로 갔다.

"알비! 너 진짜 호강하는구나!!"

황태자비의 방보다는 작지만 침실도 따로 있고, 황금 방석에, 보석이 장식된 각종 장난감과 방울이 달린 공들이 가득했다. 알비케라는 고개를 살짝 들고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도도하게 사뿐사뿐 걸어서 내 앞으로 왔다. 고양이냐?

"야, 너 누가 보면 날 때부터 황궁에서 산줄 알겠어."

나의 타박에 급 꼬리를 발랄하게 흔들었다.

"알비케라경께서 얼마나 의젓하신지 정말 얌전히 잘 노셔요."

"전하를 닮아 영민하셔요. 주인과 헤어지면 찾기 마련인데 밤새 짖거나 보채지 않고 얌전히 기다리셨어요."

오호라. 네가 그랬단 말이지? 내가 황태자한테 큰 일을 당할뻔했는데 너는 폭신한 네 침대에서 평화로운 밤을 보냈구나.

"뀨우."

어디서 눈치 보고 어리광 부리냐! 나 지켜준다더니, 세상에 믿을 짐승 하나 없어.

나의 차가운 눈빛에 알비케라가 배를 뒤집으며 복종의 의미를 내비쳤다. 몸을 배배 꼬며 간절한 눈빛을 보내기까지 했다. 동그랗고 까만 눈동자에서 눈물이라도 흐를 듯 촉촉해지는구나.

"휴우, 알비케라. 그만해. 나 괜찮으니까."

내 말에 꼬리를 말고 내 다리 앞으로 슬금슬금 기어 왔다.

"꺄아. 귀여워."

여기저기서 내 애완견을 향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전하, 황태자 전하께서도 들리셔서 알비케라경께 좋은 것만 주라 당부하셨답니다."

"그래, 그랬구나. 갑작스럽게 동물을 모셔야 해서 너희들의 수고가 많구나. 앞으로도 알비를 잘 부탁하마."

"예. 전하!"

알비케라가 밖에 나가고 싶은 기색을 보여 나는 데리고 나가기로 했다.

"알비가 산책할만한 곳이 있을까?"

"황태자 전하께서 만들어 주신 미니 목장은 어떠세요?"

"응?"

아르세이아는 동물 크게 안 좋아하는데... 카나리아나 앵무새는 키워도... 목장이라는 것이 새들 키우는 곳인가?

"그래, 거기로 가보자."

"황태자궁의 동쪽 후원에 있습니다."

알비케라가 먼저 내 앞에 섰다. 짜식, 너도 길 모르면서 왜 니가 앞이냐? 아. 동물들이 있다면 냄새를 맡아서 알려나?

하아, 황태자궁 주제에 왜 이리 큰 거야? 황제 폐하가 있는 태양궁은 본궁 뒤에 별궁이 5개 있었다. 황태자궁이 있는 만월궁은 본궁과 별궁 하나로 이루어져 있다.

제국은 부부가 같은 궁에서 기거하기에 별궁은 후궁들과 그 자녀들을 위한 것이다. 태양궁과 만월궁은 각각 후원과 정원을 가지고 있고 각양각색의 식물들이 아름답게 가꾸어져있다. 또 황제의 집무실이 있고 귀족 회의가 열리는 창공의 관과, 관료들이 일하는 행정관과 기사단 건물 등이 있고 각각 작은 정원이 있다고 한다. 어제 예법서에서 읽고 외운 지식이었다.

활자로 외운 것과 눈으로 보는 것은 달랐다. 황제 폐하를 보러 태양궁에 갈 때는 마차를 타고 가서 황궁이 이렇게 넓은 줄 미처 몰랐다.

우와! 차마 처음 본 티를 내지 않으려고 혼자서 감탄사를 삼켰다. 예쁘다. 싱그러운 꽃향기와 나무 향이 시원한 바람에 이끌려 나를 감싸 안았다. 불안한 나의 상황과는 달리 평화로웠다.

"왈! 왈!"

알비도 즐거운지 꼬리를 마구 흔들며 뛰었다. 여름이 시작되며 살짝 뜨거워진 햇살이 여유롭게 느껴졌다. 숨통이 조금 트이는 것 같았다. 창밖으로 내다보는 것보다 훨씬 만족스러웠다.

황궁에 감금되어 자연의 숨결을 느끼지 못 할 줄 알았는데, 비록 인위적으로 가꾼 식물들이지만 즐거움에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우와!"

미니 목장에 도착한 나는 설렘을 숨기지 못했다. 새하얀 양, 귀여운 토끼와 앙증맞은 조랑말, 초롱초롱한 눈망울의 꽃사슴.

귀엽다아!! 안녕 친구들. 난 세이렌이라고 해. 처음 만나지? 예쁜 울타리 안에서 놀던 아이들이 나랑 눈을 마주치자 내 앞으로 몰려들었다.

"안녕!"

아르세이아가 동물을 좋아하지 않아서 좋아하는 티를 마구 낼 수 없었지만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도저히!!

"비 전하!"

"에이린, 이걸 왜 황태자께서 만들어 주셨지?"

"잘 모릅니다. 바쁘신 황태자께서 궁을 비워 혹시나 전하가 적적해 하실까 봐 선물 하신 것 아닐까요?"

나는 에이린에게만 들리도록 살짝 말했다.

"그 분은 세이가 동물이라면 질색하는 거 모르셔? 여기 온 것도 처음 아냐?"

"일단, 그건 모르겠고, 처음 오시진 않았습니다. 보고만 가셨긴 하지만."

몇 번 왔으면 싫어한다고 여기진 않겠지? 으앙. 저 친구들 표정 봐봐. 날 쓰담아 주세요 이러고 있잖아. 만지고 싶다. 다들 사람 손에 키워져 야생의 느낌은 전혀 없는 아이들이었다.

아주 순한 아이들!! 너무 꼭 껴안고 싶어!!! 뭐 야생의 동물들도 다 내 앞에선 순하지만.

"전하, 동물들이 이제 전하가 주인인 걸 알아보나 봅니다. 지난번에는 근처에도 안 오더니."

유리아라는 시녀가 신기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 그런가? 그럼 내가 직접 먹이를... 줘봐도 될까? 얘들이 날 좋아하는 거면 보답을 해줘야지."

"네, 먹이통 가져오라 할게요."

나는 강아지 외의 동물이 처음인 사람처럼 행동했다. 먹이를 주는척하고는 겁먹어서 슬쩍 뒤로 빼고, 그랬다가 다시 용기를 내서 손을 내밀고.

내가 꺄르륵 웃으며 토끼를 품에 안아들자 다른 아이들도 쓰다듬어 달라고 머릴 내밀었다. 미안해 아가들아, 언니가 며칠 뒤엔 마음껏 귀여워 해 줄게.

내 연기가 썩 괜찮았는지 시녀들도 해보고 싶어 해서 그녀들에게도 만져보게 토끼를 내밀었다. 보드라운 털에 시녀들도 좋아하는 느낌이었다.

황태자궁에 여인들의 꺄르륵 거리는 웃음소리가 퍼졌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동물과 교감을 나누는 기분이 좋았다. 동물과 친한 내 모습을 부러워하다니. 낯설었다. 야생동물과 친한 나를 다들... 괴물이라 했었는데...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었다. 황태자의 침실 아래에 그의 집무실이 있다 했던가? 하늘보다 짙푸른 그림자가 창가를 스쳐 지나갔다.

아, 조심해야 해. 그가 정말로 아르세이아를 좋아한다면 그녀가 동물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지도 몰라. 갑자기 변한 모습을 보면 의심할지도 모르니 조심, 또 조심해야지.

"그만 가자. 털이 옷에 묻어 찝찝하구나. 후원을 잠깐만 걷고 바로 옷을 갈아입을 수 있게 준비해줘."

미안. 이쁜이들, 내일 또 올게. 매일 알비 산책을 핑계로 이리로 와야겠다. 너희가 싫어서 가는 거 아냐. 언니 맘 알지? 다들 고개를 슬쩍 끄덕여준다. 고마워.

잠시 비스가의 목장에 있는 친구들이 떠올랐다. 잘 지내고 있을지, 나만 이렇게 호사를 누리고 있네. 내가 없어서 누군가 잡아먹진 않았을지... 미리 자연으로 도망치게 할걸. 조금 쓸쓸해졌다. 걱정도 다시 늘었다. 그런 마음은 최대한 숨기고 후원을 향해 걸었다.

후원은 장미가 화려함을 뽐내고 있었다. 크고 탐스러운 장미가 흐드러지게 핀 모습은 장관이었다. 장미꽃 터널을 지나가자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꽃비가 내렸다.

시녀들도 다들 감탄사를 내뱉었다. 향기롭다. 황궁에서 버티는 시간이 지금처럼 편안하기만 하면 얼마나 좋을까? 휴우. 얼마나 바빠질지 모르겠지만 최대한 몸은 사리고, 꼭 오늘 같은 시간은 갖자.

어디선가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날 위한 응원가. 고마워. 나 힘낼게.

꽃들이 떨어지는 것이 아쉽게 느껴졌다. 그래서 몰래 힘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지나가는 길마다 꽃들이 더 화려하고 싱그러운 향을 뿜기 시작했다. 아마 일주일은 더 피어있겠지? 헤헷.

"전하, 날도 좋고 꽃도 이쁜데 여기서 티타임이라도 가질까요?"

에이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햇살이 좋을 때 야외에서 책을 읽고 싶네. 제국사 책을 가져다 주렴. 생각보다 흥미롭더구나. 어제 읽던 것으로."

공부도 소홀히 하면 안 되니깐. 미리 공부하자. 제국사는 권수가 많지만 내겐 시간도 많으니 오랜만에 여유롭게 정독이나 해야지.

"으음~! 이 복숭아 타르트 정말 맛있어."

이 치즈케이크도 진짜 진해 보였다. 와, 세상엔 이런 맛도 있구나. 아르세이아를 대신해서 갔던 티파티에서 몇 번 봤지만, 긴장한 탓에 다양하게 먹어 보진 못했다.

이렇게나 아름다운 곳에서 이렇게나 여유롭게 차와 다과를 즐길 수 있다니!!

황궁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미칠 것 같았는데, 참 사람 마음이 간사하구나. 흠흠. 아르세이아. 1할만 용서해줄게.

막 퍼먹고 싶지만 난 제국의 하나뿐인 황태자비니깐 우아하게 책장 넘기면서 먹어야지. 아, 근데 시녀들은 다 서있나?

"에이린만 남고 부를 때까지 가서 쉬거나 자기 할 일들을 하렴. 아, 찻잔은 하나 더 준비해주고."

편애하는 것처럼 보여도 어쩔 수가 없었다. 이 깊은 황궁에서 내 비밀을 아는 유일한 편인걸.

다들 물러가자 에이린을 맞은편에 앉혔다. 그러자 내 긴장이 완전히 풀렸다.

"이거 왜 이리 맛있어?"

"입에 맞으십니까?"

"응응. 이렇게 맛난 거 처음이야. 어제저녁 스튜가 넘 맛있어서 요리사한테 모자를 내렸는데, 같은 사람인가?"

"디저트 담당은 따로 있는 것으로 알아요."

흐음. 요리사가 여럿인가 보네. 이번에도 모자 내릴까? 막 남발해도 되려나?

"좋아할 거에요. 칭찬받으면 더 맛있는 것을 만들어 내려고 요리사들끼리 경쟁도 할걸요?"

"막 상을 남발해도 돼? 사실 다 맛있어서 계속 상을 주고 싶어."

내가 미각에 이리 쉽게 유혹당하는 줄 예전엔 몰랐다. 먹는 것에 홀려서 황궁 온 거 잘했다고 여기는 이 나약한 인간 같으니라고.

내 발아래에서 알비케라도 육포를 열심히 뜯고 있었다. 너도 나랑 똑같구나. 지독한 동질감.

"에이린, 혹시 목장 친구들 잘 지내는지 알아봐 줄 수 있어?"

"네, 알아볼게요."

내가 그녀의 답에 작게 안도하자 에이린도 조금 걱정을 던 표정이었다.

"생각한 것보다 잘 지내실 것 같아 다행이에요."

"어쩔 수 없잖아. 내가 못하겠다고 또 사라져버림 안되잖아. 하아 솔직히 그러고 싶지만 참아야 하니깐."

그래야 내 혈육들이 안전하니까, 적응해야지. 별 수 있겠어?

"또 도망칠 생각은 없어 보여서 다행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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