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티타임과 비스 후작부인. (1)
2018.04.19.
내가 입궁한지 보름 정도 되던 날, 여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직전, 나는 귀부인들을 초대해 티타임을 가지기로 했다.
되도록이면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는 것이 나의 정체를 들키지 않는 방법일 테지만, 황태자비의 위치에 있는 이상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개인적인 알현 요청을 황태자비 수업과 업무로 바쁘다며 미뤄왔기에 나를 만나고 싶어 하는 귀부인들은 대부분 내 초대에 응했다.
3대 공작가 중에서 황제파로 알려진 콘스탄트 공작부인, 중립파인 볼라드 공작부인의 참여가 확정되었다. 귀족파의 수장이자 아르세이아의 외숙모인 몬테 공작부인의 참석은 건강상의 이유로 미루어졌다.
비스 후작부인이라면 몬테 공작부인에게 나에 대해 이미 고해바쳤을 것이라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후작부인 못지않게 나를 벌레 보 듯하던 이였기 때문이다.
어쩌면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도 있기에 말을 안 했을 수도 있겠지? 어쨌든 안 온다니 다행이었다.
몬테 공작부인이 오지 않았다고 마음이 편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제 딸을 황태자비로 밀던 콘스탄트 공작부인의 악의를 감당해야 할 것이며, 무엇보다 비스 후작부인이 오기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전하, 오랜만에 어머니를 뵐 수 있으시니 기쁘시겠어요."
"얼마 전에 봤었는 걸 뭐."
공식적으로 나는 친정에 외유를 이미 갔다 왔으니 덤덤한 척했다. 황태자비 교육기간 동안은 사사로이 친정 식구들과의 만남을 자제하는 것이 미덕인지라 지금껏 후작부인을 피할 수 있었는데, 오늘은 마주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나는 그녀 앞에서는 언제나 구렁이 앞의 토끼가 되어 꼼짝하지 못했다. 똬리를 트는 구렁이의 몸에 갇혀 숨도 쉴 수 없었던 나날들.
후우...
"괜찮으세요?"
내 상태를 유일하게 아는 에이린이 조용히 물어 왔다.
"응. 설마, 황태자비인 나에게 어찌하겠어?"
하도 황태자가 사람들 앞에서 티를 많이 내주어 황궁의 모든 사람들은 내가 총애 받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황궁의 성벽을 넘어 귀족들의 귀에까지 퍼져있다고 했다.
그러니, 보는 눈이 있으니 내게 함부로 대하지 못 할 것이다. 그런 믿음을 가지고 조용히 주먹을 꽉 쥐었다.
시녀들은 내가 첫 사교모임인데다가 거물급들이 모이는 티타임에 긴장했다고 생각하는지 응원들을 퍼부었다. 시녀들의 방향이 다른 응원들이지만 힘을 받고, 나는 용기를 내서 티타임이 열리는 정원으로 가기 위해 방문을 열었다.
"전하. 이 시간에 무슨 일로?"
내 문 밖에 마침 도착한 듯한 황태자가 서 있었다. 오늘도 변함없는 단단하고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그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의 비가 오늘 첫 사교모임을 갖는다 하여 혹시나 그대가 긴장할까 봐 응원해 주로 왔소."
시녀들 앞이라 평소와 다른 말투로 자신만 믿으라는 듯 에스코트를 청하는 그를 보자 조금 안심이 되었다. 내가 진짜 싫다는 것은 하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것, 필요한 것만 찾아서 해주는 남자.
아르세이아, 너는 이렇게 괜찮은 남자를 속인 거야. 그리고 나도... 이 남자를 속이고 있어.
그와 함께 집무실에서 일하면서 느낀 것은 그는 귀족파, 황제파의 구분 없이 공정하고 냉정하게 판단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오늘 티타임에서 일어날 일들도 내가 어떤 실수를 하든지 계파에 관계없이 공정한 시선으로 봐 줄 것이다.
그러니 겁먹지 말고 깽판만 놓지 말자. 최소한 이 남자의 명성에 먹칠만 하지 않으면 돼!
"고마워요. 카일룸."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자 그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리고 기분 좋게 휘어지는 노란 보석. 그는 내가 내민 손을 다정하게 잡아 나를 에스코트해주었다.
"황태자 전하와 황태자비 전하 드십니다."
우리의 등장에 귀부인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추었다.
"창공에서 두 번째로 높은 태양과, 밤하늘을 비추는 작은 별. 두 분 전하를 뵙습니다."
"일어들 나시오."
황태자의 방문에 귀부인들의 당황한 표정이 느껴졌다. 여자들만의 모임에 따라온 남자에 대한 놀람과 불편함이 뒤섞여 있었다.
응? 겁먹은 사람도 있네. 이 남자 도대체 평소에 어떻게 하고 다녔길래 이래?
"나의 비가 처음 갖는 모임이라 긴장한 듯하여 바래다 주러 온 것뿐이니 그리들 경계 마시오."
황태자의 말에 다들 수긍했는지 대체로 자애로운 얼굴로 다정한 신혼부부를 바라봐 줬다.
"다들 나의 비를 예쁘게 봐 줬으면 좋겠군. 즐거운 시간들 보내길. 세이, 저녁에 만나."
그가 다정하게 내 이마에 입을 맞추고 가자 부인들의 표정이 흐뭇해졌다. 콘스탄트 공작부인의 표정은 뭐. 그렇네. 더 열이 받으신 듯?
비스 후작부인은... 웃고 있는 게 더 무섭다. 대단한 연기력. 지금 이 순간 얼마나 내 머리채를 잡고 싶을지 그녀의 마음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황태자의 깜짝 출연으로 귀부인들의 관심이 내게 집중되었다. 내가 먼저 간단한 인사를 모두에게 건넨 뒤 여러 가지 이야기가 오갔다. 대부분이 중년의 부인들인 가운데, 비교적 젊은 30대의 볼라드 공작부인이 내게 호감을 먼저 표했다.
"냉정하다 소문난 황태자 전하가 저리도 다정하시다니, 비 전하께서 행복하시겠습니다."
"카일룸께서 저를 과분하게 아껴주시어 황궁에 잘 적응하고 있답니다."
"비스 후작부인께서 걱정을 덜었겠어요."
"간택연때부터 황태자 전하께서 제 딸, 아니 황태자비 전하께 한결같으셨지요. 그래서 황궁에 보낼 때도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아, 역시 철 가면. 몬테 공작가의 고명딸로 어릴 때부터 사교계에서 갈고닦은 후작부인이라 한치의 흔들림 없이 할 말 다하시네.
분명 저 표정은 후작님이 계실 때 나한테 대놓고 화 못 내고 참을 때 표정인데... 다들 후작부인이 저런 표정 지으면 자애롭다고들 말했지만 나는 알지. 저 표정을 짓고 나면 나 혼자 남았을 때, 얼마나 많은 화풀이를 당해야 하는지...
애써 과거의 아픈 기억을 감추고 귀부인들을 향해 나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우아하게 한 손을 들어 올려 신호를 보냈다.
나의 손짓에 오늘의 다과가 테이블마다 놓이기 시작했다. 내가 워낙에 요리사들을 아끼다 보니 그들에게 포상을 많이 내렸다. 황태자궁 소속임을 알리는 조리복들과 조리기구가 마구 남발했었지.
그랬더니 요리에 점점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 그 결과가 아름답게 수 놓아졌다.
"황태자 전하가 비 전하를 위해 정성껏 가꾼 수국 정원에서 딴 수국으로 만든 차입니다."
모일라가 차를 올리면서 설명했다. 달콤한 수국차에 어울리는 고소하고 단백한 호두 타르트가 올려졌다. 저 타르트, 덜 단데 정말 씹히는 질감과 고소함이 극상이었다.
그리고 부족한 디저트의 단 맛을 보충하는 케이크들. 이 케이크에 귀부인들의 탄성이 쏟아졌다. 싱싱한 꽃들이 과일 대신 장식되어 있었다.
내가 요리사들에게 보낸 꽃이었다. 나의 축복을 보태 꺾이기 전이나 다름없는 싱싱함이 돋보였다. 하나같이 새콤달콤한 맛으로 과일만큼이나 케이크들과 어울렸다. 그리고 요리사들의 솜씨로 어느 부케들보다 화려하게 피어나 있었다.
"후원에 꽃들이 상큼하여 케이크와 잘 어울린답니다. 부인들께 황태자궁의 아름다움을 선보이고 싶어 준비했으니 부디 즐겨주길 바라요."
대부분의 귀부인들은 꽃과 케이크를 함께 떠서 입에 집어 넣어보았다. 다들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휴우, 다행이었다. 물론 콘스탄트 공작부인과 후작부인은 맛도 보지 않고 심각하게 앉아만 있었다. 숨 막히게 하시네.
"비 전하, 국혼 후 아프셨다던데 건강은 괜찮으십니까?"
"건강하답니다. 제가 아플 때면 카일룸께서 정령의 가호를 내려주시어 심려치 않아도 된답니다."
볼라드 공작부인의 말에 내가 황태자의 배려를 설명하자 다들 부러워했다. 황태자에겐 가뿐한, 대가 없는 일이었지만,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기엔 엄청난 힘을 나의 건강을 위해 사용한 것이니까. 그럴 만도 했다.
"호오, 그런데 어찌하여 황궁으로 시집온 지 3개월 만에 요양차 본가로 가신 겁니까? 그것도 영지로 내려가셨다던데."
아프면 황태자가 치료해준다는데 왜 집 나갔냐는 질문 속에 가시가 박혀있었다. 비록 아팠다고는 하지만 3개월 만에 새 신부가 집을, 그것도 황태자비가 황궁을 두고 나간 것이 정당한 일인가에 대한 지적이었다.
"아 참, 그 시기엔 황태자께서는 외부 일로 황궁을 비운 적이 많다던데, 그래서인가요? 아니면 저희가 모르는 다른 사정이라도 있으셨는지?"
은근슬쩍, 알고보면 사이가 나쁜 것이 아니냐는 돌려까기에 내 얼굴이 굳었다. 비스 후작부인이 말을 꺼내려는 순간 내가 먼저 말을 내뱉었다.
"시집 오자마자 바쁜 일정으로 황궁을 비우시게 되어 저를 염려한 카일룸 전하의 배려로 본가로 내려갔던 것이랍니다. 급하게 궁으로 시집오느라 가족들과 헤어질 준비도 제대로 못했는데, 카일룸께서 저를 챙기지 못하시니 미안하다고요. 제가 집이 그리워 시름시름 앓기도 했답니다."
볼라드 공작부인이 옆에서 빙긋이 웃었다. 그녀가 콘스탄트 공작부인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은 에이린이 알려줬었다. 그래서 일부러 내 편이 되어 줄지도 모르는 예감이 드는 볼라드 공작부인을 향해 마주 웃으며 덧붙였다.
"처음에는 한 달 동안 쉬다 오라 해놓고는, 참지 못하시고 결국 절 데리러 영지까지 오셨지 뭡니까? 호호호"
콘스탄트 공작부인의 미간이 좁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르세이아와 나의 데뷔탕트 전, 그러니까 황태자비 간택연이 시작된 2년 전부터 콘스탄트 공녀는 간택연에 꼬박 참석했다.
이미 데뷔를 한 영애가 데뷔탕트에 꼬박 참여한 것은 노골적인 것이었다. 그녀가 황태자에게 푹 빠져 있었다는 것은 사교계 소문에 둔 한 나도 알고 있었다. 아니 알 수밖에 없었다.
그 어떤 여인에게도 춤을 신청한 적 없던 황태자가 아르세이아에게 춤을 신청했을 때,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나도 봤으니까.
간택연이라는 것이 시작되기 전 강력한 황태자비 후보였던 제 딸이, 황태자의 선택을 받지 못했음을 얼마나 분하게 여길지 알 것 같았다. 그러니 저렇게 날 싫어하는 내색을 하는 거겠지 뭐.
현 황후의 친정 가문이기도 한 콘스탄트 가문. 아 근데 웃기네. 너네 황후랑 손잡고 황태자랑 1황자 죽이려고 그렇게 애쓰지 않았던가? 결국 1황자를 죽여서 황태자랑 원수져놓고 왜 이제 와서 황태자비 자리가 니들 것인 양행동함? 너네 같으면 황태자가 너네 딸이랑 결혼하겠냐?
내가 더 화가 났다. 황태자한테 한 짓은 생각 안 하고 왜 나한테 화풀이하려고 함? 게다가 그쪽은 고작 공작부인이고, 나는 황태자비라고!
뭐... 비록 대역이지만. 안 걸리면 되는 거니까!
콘스탄트 공작부인의 무례에 조금 가라앉은 분위기는 다른 공작부인인 볼라드 공작부인의 주도로 화기애애하게 흘러갔다. 두 공작부인 중 하나가 나를 지지하는 모양새에 귀족파 부인들까지 합세해 즐거운 티타임이 되어버렸다.
신혼 시절이 한참이나 지나버린 귀부인들에게 새 신부인 나는 그녀들의 젊은 시절 설렘을 떠올리게 하는 존재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결국 민망하게도 대화 주제는 신혼생활이 되어버렸다.
진짜 신혼을 즐긴 적이 없는 나에게는 그저 막연한 진짜 미래에 있을지도 모르는 나의 신혼에 대한 기대만 부풀려 주는 대화였다. 조금 부끄러운 주제도... 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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