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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비의 대역으로 살아남기-18화 (18/126)

19화. 티타임과 비스 후작부인. (2)

2018.04.19.

티타임이 끝날 무렵 나는 오늘의 티타임에 참석 한 부인들을 위한 답례품을 나누어 주었다. 사실 이건 황태자가 도와준 것이었다. 예전에 눈이 부었을 때 운디네의 힘으로 금세 눈이 가라앉았던 것이 아이디어가 되었다.

금사와 작은 보석 가루들로 장식된 안대에 운디네의 가호를 새겨 넣었다. 한 10번쯤은 눈의 붓기를 가라앉혀 줄 것이다.

이것을 위해 나는 황태자에게 볼 뽀뽀를 해줘야 했다. 치사하게, 대가도 얼마 안 든다면서.

사실 첫 티타임이고, 아르세이아를 위해 잘 해내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다. 그래서 부탁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해준다 해서 추진했는데 어젯밤에 되어서야 뽀뽀를 해줘야 한다고 나에게 어거지를 부렸다.

다른 것을 준비할 시간이 없었기에 해줄 수밖에 없었다. 대신 입술에는 죽어도 못하겠다고 내가 우겨서 볼 뽀뽀로 합의했던 것이다. 무려 개당 한 번이었다. 그래서 총 스무 번이나 해줬다.

"어머, 귀한 것이네요."

"제가 눈이 부었을 때 카일룸께서 해주셨던 것이랍니다. 비록 횟수에 제한은 있겠지만 부인들께도 도움이 되길 바라요."

"정령의 가호가 아니더라도 너무 아름다운 안대네요. 잘 쓰겠습니다."

후아, 끝났다. 이 정도면 선방한 거지? 돌아가는 귀부인들을 배웅하는데 비스 후작부인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비 전하. 오랜만에 어미에게 시간을 내어주시겠습니까?"

"물론이에요. 어머니."

그녀의 목소리만으로 이미 내 몸이 굳어버렸다. 겨우 쥐어짜듯 말하며 말아 쥔 손이 금세 축축해졌다.

다정해야 할 모녀는 말없이 응접실로 자리를 옮겼다. 에이린을 제외한 시녀들을 물린 나는 에이린에게 응접실 문 앞을 지키도록 명했다. 혹시라도 귀가 밝은 황태자가 들으면 안 될 대화를 나누게 될 테니까.

"하실 말씀이 무엇입니까? ...마님."

"아르세이아의 자리에서 재미가 좋나 보구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만 숙였다. 그녀의 차갑다 못해 아프도록 시린 시선이 내게 꽂혔다.

"그래서, 황태자와 몸은 섞었느냐?"

"아, 아닙니다. 아르세이아의 남편과 어찌... 앞으로도 아르세이아가 돌아올 때까지 그럴 일은 없을 것입니다."

내 대답에 후작 부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쫙!

내 옆으로 스쳐 지나가는 공기를 가르는 파열음에 내 몸이 완전히 얼어붙었다.

본능적인 공포. 오랫동안 학습된 고통.

그녀의 손에 들린 채찍을 보며 내가 몸을 부르르 떨자 그녀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들고 들어 온 지도 모르는 그녀의 손에 들린 채찍은 나의 몸과 마음을 지배했다.

내 몸이 신비한 것인지 그녀의 때리는 기술이 좋아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내 몸에는 채찍으로 인한 상처가 없었다. 어떤 깊은 상처라도 길어도 한 달이면 흔적도 없이 나아버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몸에 상처가 없다고 마음의 상흔까지 지워진 것은 아니었다. 나는 채찍 소리에 몸을 움직이지 못할 뿐 아니라 순간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아르세이아가 돌아왔을 때 그의 마음이 떠나있도록 만들 셈이냐? 지금 잘해준다고, 몸을 내어주지 않는 여인을 향한 마음이 계속될 거라고 생각해?"

대답할 수 없었다. 알고는 있었다. 부부간에 있어야 할 일. 그것을 거부하는 여자를 좋아할 남자는 없다는 것을...

지금이야 그가 나를 유혹하려는 목표로 내게 잘해주지만 언제 나에 대한 흥미가 끊길지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나는 동생의 남편과 그럴 생각이 없었다.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언제 아르세이아가 돌아올지도 모르는데.

그리고 혹시라도 들키면, 그가 아내의 이복 언니와도 관계했다는 스캔들에 휘말리게 되는걸. 정치적인 목적으로 황후와 황비가 자매인 경우가 없지 않았지만, 나는 황비가 될 수 없는 하찮은 신분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그에게, 이유 없이 친절한 그에게, 내 하나뿐인 여동생의 남편에게 오명을 남겨주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지켜본 그라면, 나를 아껴주면서도 내가 원하지 않는다면 내 몸을 요구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나는 이미 그를 믿고 있었던 것 같다.

"세이렌, 그를 몸이든 뭐든,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아르세이아가 돌아올 때까지 잡아둬. 그 아이가 돌아 왔을 땐 완벽한 황태자비의 자리를 돌려줘야 하니까. 네 이름에 걸맞게 남자를 유혹해야하지 않겠니?"

세이렌. 바다에서 뱃사람들을 홀리는 마녀의 이름을 내게 내린 것이 후작부인이었다. 내가 비스 후작의 사생아임을 안 후작부인이, 내 어머니를 천하고 더러운 존재로 모욕하기 위해 붙인 이름. 고귀한 진짜 이름을 빼앗긴 나는 세이렌이 되었다.

"예전의 일을 잊진 않았겠지? 네가 아르세이아를 죽일뻔한 것을. 그런 널 내가 용서하고 이렇게 은혜를 갚을 기회를 줬으면 잘 해내야지."

후작부인은 그녀에게 있어 벌레만도 못한 내게 작은 꾸러미를 내어 놓았다. 투명한 병 속에는 잘 말려진 홍차 잎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찻잎에 섞인 저것은?!

"하지만, 네 더럽고 하찮은 몸에 귀한 황족의 씨앗이 잉태 되어서는 안되니까. 피임은 확실히 해야지."

저 찻잎에 섞인 잎. 얼핏 보면 찻잎과 달라 보이지 않지만 아주 미세하게 다른 향을 가진 프레젤리의 잎. 이것은 여인들의 자궁을 냉하게 만들어 피임을 일으켰다. 그리고... 종국에는 자궁을 완전히 망가뜨린다.

더 이상 아이를 낳아 양육할 능력이 안되는 평민들이 먹는 피임약. 식물들이 가진 특성을 모두 본능적으로 아는 나는 저 잎의 부작용을 알고 있었다.

후작부인도 이를 알고 내어준 걸까? 귀족들이 쓰는 다른 피임약도 있는데, 굳이 저것을 가져온 것은, 차로 위장하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나를 망가뜨리고 싶은 것일까?

어차피, 사실 후작부인의 감시 하에 사는 한 결혼 같은 것 꿈꾸지 않았다. 언제나 결혼은 내 미래 계획에 들어 있지 않았다. 그러니까 먹는다고 내 인생에 미치는 영향은 없을 것이다.

아니 나는... 케이가 날 찾으러 온다면, 그와 도망쳐서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잠깐 기대도 했었다. 저것을 먹고, 황태자와 몸을 섞게 되면, 나는... 다른 남자의 여자가 되어버린 나는 케이에게도 가지 못하게 되겠지?

내가 대답을 하지 않자 후작부인이 다시 채찍을 들어 올렸다. 황태자가 내 몸을 볼지도 모르니 나를 때리진 못할 것이었다.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내 몸이 긴장으로 빳빳하게 굳었다.

채찍은 역시나 내 옆의 바닥을 내려쳤다.

흠칫. 점차 떨림이 커지는 내 몸이 원망스러웠다. 후작부인은 내게 늘 태어난 것 자체가 죄라며 때렸었다.

내 어머니가 그녀보다 먼저 후작님을 만나 서로 사랑했고 내가 잉태된 것은 나의 죄가 아닌데. 아르세이아가 죽을 뻔한 일도 내가 한 게 아닌데... 그건 그저 사고였을 뿐인데... 왜. 내게.

"알겠...습니다."

"피임을 위해서 매일 아침저녁으로 진하게 우려먹어야 한다. 네 시녀에게 이 차를 우리는 방법을 일러주고 가마."

"저는 피임 같은 것을 할 생각이 없습니다만, 장모님?"

갑자기 나타난 황태자에 후작부인의 얼굴에 당혹감이 흘렀다. 서늘하게 내려앉은 금안. 내가 본 것 중에서 가장 차가운 눈빛.

어, 어디서부터 들은 거지? 그의 청력은 예민한데, 설마, 다 들었으면 어쩌지?

소드마스터의 능력에 대해 모르는 후작부인은 당황한 기색을 순식간에 숨기고 능청스럽게 연기했다. 손에 들려있던 채찍은 어느새 곱게 접어져서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었다.

"신혼이신데 벌써부터 회임을 하면 아쉽다고 비 전하께서 말씀하시어 챙겨왔습니다."

"아하, 나의 비, 그런 뜻이었나?"

초야를 거부하고 있는 내가 그런 말을 했을 리가 없잖아. 그의 냉랭한 말은 내게 답을 요구하지 않았다. 대신.

"허나 장모님. 폐하께서 얼른 손주를 보고 싶어 하십니다. 아쉽지만 피임 문제는 저희끼리 다시 상의한 뒤 결정하도록 하지요. 황실의 문제이니까요. 게다가. 만약 피임을 한다면 황궁의가 지어다 준 몸을 보호하는 좋은 약을 쓸 것이니 사가에선 신경 쓰지 마십시오."

혹시 그는 이 프레젤리의 정체를 아는 걸까? 내가 여러 의문을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으나 그는 내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대신 후작부인을 내려다보는 눈빛에는 차가움이 가득했다.

"그런데, 이 채찍은?"

"아, 비전하께서 황궁에서는 언제 어떤 암투가 벌어질지 모르니 호신용으로 필요하다 하셔서요. 그래서 가져왔습니다."

"흐음. 황태자비의 가녀린 손이 들기에 적절한 물건은 아닌 듯하군. 대신 내가 곧 든든한 호위를 붙일 예정이니 이 위험한 물건은 내가 직접 처리하도록 하지요. 그리고, 오늘 부인이 바빠 함께 시간을 보내지 못해 이제부터라도 나의 비와 오붓한 시간을 보낼까 하는데...?"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황태자가 열어 준 문으로 후작부인이 나가는데 밖에 서 있던 에이린의 하얗게 질린 얼굴이 보였다. 황태자가 계속 문을 잡고 있자 후작부인은 공손히 인사를 하고 황태자의 시종의 안내를 받고 사라졌다.

"아르세이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디서부터 듣고 있었는지, 알지 못하니까.

후작부인이 만든 공포에, 정체를 들켰을 수도 있다는 공포가 더해져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고, 반응할 수 없었다. 내 눈은 차마 그를 쳐다보지 못하고 점점 초점을 잃어갔다.

"아르세이아."

다시 나를 부르는 소리. 그리고 다정한 그의 금빛 눈동자. 평소와 다름없는 그.

그의 눈빛을 마주하자 눈물이 차올랐다. 내 눈에서 눈물이 흘러넘치자 안타까움으로 가득 찬 그가 나를 다정하게 끌어안았다.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아무런 대답도 요구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그의 따스한 품에 안긴 것만으로도 비스 후작부인이 가져다준 공포가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의지해서는 안되는 사람에게 의지하고 마는 나 자신이 한심했다. 내 정체를 들켰을 때, 나를 내치고 황족 모독죄로 날 죽이라는 명령을 내릴 사람에게 기대는 내가 바보 같았다. 이 사람은 내 남편이 아닌데. 나는 아르세이아의 대역일 뿐인데.

왜 아무것도 묻지 않는지, 분명 들었을 텐데 왜 추궁하지 않고 여전히 다정한 것인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단지 어머니에게 냉정하게 군 남편의 모습에 속상해한다고 여기고 위로하는 것일까? 정말 아무것도 못 들은 것일까?

나를 감싸 안은 온기에 짓누르던 공포가 점차 사라지자 내 눈앞에는 어둠이 찾아왔다. 나는 그의 품에서 울다 지쳐 기절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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