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황태자와의 승마 수업
2018.04.21.
여름이 성큼 다가오자 부채질을 하는 횟수가 늘어났다.
"여름 싫다아아아."
"습한 거 싫으시죠?"
"응. 딱 질색이야. 꿉꿉한 것도 싫고, 나가 놀지도 못하고."
뭐, 어차피 황궁에서는 뛰어놀지 못하니까. 하아아아. 예전에는 목장에서 뛰어다니고, 늑대도 타고 그랬는데. 갑갑해.
날도 더운데 늑대 대장 등에 매달려서 언덕에서 바람맞고 싶다.
"뭐, 새로운 취미생활이라도 하실래요? 더 더워지기 전에."
"뭘 할까?"
"고상한 귀족 여인들은 사랑하는 남편이나 연인을 위해 손수건에 자수도 놓고, 요리도 하고, 편지도 쓰고, 많은 걸 하죠."
저기 에이린? 어째서 다 연인들과 쿵짝하고 노는 취미만 추천해? 게다가 내가 사는 이곳에 사랑하는 사람이 도대체 어디 있죠?
"정적인 취미는 싫어. 요즘은 공부하느라 앉아 있는 시간이 늘어서 동적인 거 하고 싶어."
"그럼, 승마는 어때요?"
"나, 승마복 있어? 내 말도 있고?"
"물론이죠."
내가 예전에 살던 목장에도 말은 있었다. 그리고 프리케에게 안장을 매는 방법을 배워서 종종 타고 다녔다. 정말 재밌었는데.
늑대 대장은 사람을 태우는 것은 서툴러서 내가 힘들게 매달려야 했지만, 말은 정말 높은 시야에서 날 얌전히 태우고 달렸기에 기분이 최고였다.
"저기, 나 타도될까?"
내 눈빛의 의미를 알아들은 에이린이 심각하게 고민하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서투시니까, 어, 배우셔야 하지 않을까요? 사가에선 몇 번 타보셨긴한데, 엉망이셨고, 황궁에선 처음이시잖아요."
흐앙. 그래, 역시나 아르세이아는 승마가 서툴렀구나. 황궁에서는 타지도 않았어. 하긴 걔는 동물과 함께하는 것은 뭐든 서툴렀으니까.
"그래, 그럼 누구에게 배울까?"
"클리페울룸 근위대장님은 어때요?"
"그 사람 나 싫어하지 않나?"
첫 만남 때 나 노려봤는걸. 쳇 내가 좀 늦었다고 완전. 그래, 그러고 보니 카일이랑 매일 대련한다던데, 근위대장이 맨날 진다지? 일부러라도 가서 지는 것 보고 놀려줄까 보다.
"저희 오라버니가 혹시 비 전하께 실례를 범했나요?"
"아니, 유리아, 아니야. 그저, 저번에 내가 조금 늦었더니 표정이 안 좋더라고? 내 잘못이긴 하지만, 날 안 좋아 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
"설마요? 저희 오라버니는 비 전하를 좋아하셔요. 그래도 불편하시면, 음, 역시 황태자 전하?"
너희 오라버니가 날 좋아할 리가, 하하하.
으... 그냥 외부에서 선생님 모셔오면 안 돼? 그러나 분명 이 일을 알면 카일룸은 지가 한다 그러겠지? 안 그래도 후작부인이 다녀간 이후 부쩍 날 과보호한다는 느낌이란 말이야.
솔직히 그때 진짜 못 들은 것 맞는지 찝찝해 죽겠는데, 당사자는 막 내게 들러붙고 칭얼대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조건 자기가 하려고 해서 민망할 지경이었다.
내게 올라오는 진상품도 본인이 다 정령 불러다 검수하고, 내가 누군가를 알현하면 꼭 만나러 와서 확인까지 했다.
"혹시 근위 기사들 중에 여기사는 없어?"
"황후 폐하를 호위하는 분 중에 계시긴 하던데요. 황후 쪽 사람들은 위험하잖아요."
"그건 그렇지?”
역시 황태자뿐인가? 어차피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도 그가 등장할 가능성이 높았다. 아니 그가 나타나지 않을 가능성은 그가 스스로 각방 쓰고 따로 자자고 말할 확률이랑 같을 것 같은데?
그래, 결국 나타날 거라면, 그냥 직접 가서 부탁하지 뭐. 싫다 그럼 아무 근위기사나 불러다 배울 거라고 해야지. 그게 더 고맙고.
"모일라, 황태자께선 어디 계신지 알 수 있을까?"
"근위 대장님과 연무장에 계시답니다."
그래. 차라리 잘 됐군. 근위 대장인지 뭔지 잔뜩 놀려도 주고, 카일한테 부탁도 하자.
챙! 파앗!!
"우와. 살벌하네."
쟤들 진검으로 싸우는 거야? 프리케가 대련용 검은 날이 안 섰다 했는데, 뭐야? 날이 잘 벼려져서 아주 번쩍번쩍하는데?
"세이!! 나 응원 온 거야?"
"꺄악!"
저 인간이 미쳤나? 진검을 휘두르는데 어디 한눈을 팔아??
후읍후읍. 놀라서 진정이 안됐다. 카일룸이 내게 한눈을 파는 순간 클리페울룸경이 카일의 급소를 향해 검을 휘둘렀고, 카일은 그것을 작은 스텝과 상체의 움직임으로 피했다.
아, 내 심장이시여. 잘 뛰고 있는 거지요?
"테일러, 그만하자. 나의 비가 살벌한 광경에 많이 놀란 것 같아."
"예, 전하."
카일룸은 검을 거두자마자 내게 달려왔다. 땀에 흠씬 젖어서 젖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세이, 무슨 일이야? 내가 그렇게 보고 싶었어?"
"저, 저기 일단 땀 좀."
사랑에 콩깍지가 씌어도 땀냄새는 싫다고! 그러나 나는 콩깍지도 안 씌었고, 비록 우리가 약간 친해졌어도 땀 냄새는 싫어! 정령은 이럴 때 쓰세요!!!
"으앗! 미안. 실프, 운디네."
그가 멋쩍은 듯이 머리를 긁적이면서 정령들을 불렀다. 그런 카일과 나를 근위대장은 뒤에서 이상하다는 듯이 보고 있었다.
왜요? 뭐, 불만 있어요? 내가 당신 주군 너무 막 대하는 것 같아? 네 동생이 네가 나 좋아한댔는데 역시 아니군.
흠흠. 계속 쳐다보네. 이런 충성스러운 기사 같으니, 절대 저 사람한테는 내 정체 걸리지 말자.
"그런데 왜 왔어?"
"대련 중이라길래요. 대련하고 나면 기운 빠지잖아요. 간단한 간식이라도 드시라고 챙겨왔어요."
"진짜?? 우와. 우와. 세이가 날 이렇게 챙겨주다니!! 나 너무 행복해!!"
저기 이거 뇌물이에요. 그러니 그렇게까지 좋아할 필요는 없는데 말이죠. 게다가 내가 직접 만든 것도 아닌데 그렇게 행복해하면 없던 죄책감이 샘솟는다는 불편한 현실.
"시원한 나무그늘에 앉아서 먹어요. 저기 근위대장님도 가실래요?"
"저는 됐습니다. 대련하다 멈춰 몸이 찌뿌둥하니 기사단이랑 마저 몸을 풀겠습니다."
역시 날 싫어하는 것 같아. 조금 시무룩해졌다. 미움받는 게 좋은 일은 아니니까. 에이, 같이 먹으러 가면 방금 진 것 가지고 놀릴랬는데, 아쉽군.
"게다가 따라갔다가는 카일룸께서 다신 대련을 안해주실 것 같거든요."
"네?"
"역시 넌 내 오른팔이야. 내일 대련 두 배로 해줄게."
뭐라는 거야?
"음료가 많이 미지근해졌네. 운디네."
"흐음, 늘 느끼지만 정령은 만능인 것 같아요."
"그런가? 그런데 진짜 무슨 일이야? 나의 비께서 이유도 없이 날 먼저 찾아올 사람은 아닐 텐데."
잘 아네. 역시 똑똑한 황태자님이시군요.
"황궁에서 있는 게 갑갑하기도 하고, 그래서 말을 타고 싶은데, 아쉽게도 서툴러서요."
"그래서?"
"카일이, 가르쳐 줄래요?"
아, 뭐야. 왜 웃음 참는데? 설마 위험해서 안 시켜 준다 이런 거 아니지? 내가 그럴까 봐 이렇게 음식까지 싸 들고 온갖 아부하러 온 건데!!
"글쎄? 이래 봬도 바쁜 몸인지라."
허, 참! 이것 봐라?
"어머나 죄송해요. 나는 카일이 내가 다른 남자랑 손잡고 말에 오르거나 말 타고 같이 산책하는 거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상관없나 봐요."
메롱이다. 쳇, 좀 친해졌다 싶었는데 치사하게 나오면 나도 막 나갈 거라고.
"어디 한가한 근위 기사님들 중 한 분에게 부탁해아겠네요."
"미안해. 한 번 튕겨 본거야. 시간 많아."
저럴 거면서 왜 그런 거야?
"아 해요."
"어. 아!"
입에 커다란 복숭아를 밀어 넣으면서 맹세를 받았다.
"한 번만 더 그래봐요!"
"우웅, 앙그래."
생각보다 황태자는 다루기가 쉬웠다. 조금만 잘해줘도 결국 다 넘어 옴.
"자, 안장 채우는 법은 알겠지? 뭐, 대부분은 시종들이 해주니까 직접 할 일은 없겠지만, 혹시나 혼자 해야 하는 경우도 있으니까 기억해둬."
"네."
사실 다 할 줄 아는데 모르는 척 연기를 했다. 날 가르치면서 너무 초롱초롱 눈을 빛내는 황태자 때문이었다. 차마 저 눈을 배신할 수 없으니.
이제 말 위에 올라타 보기로 했다. 카일은 키도 크고 힘도 세서 한 번에 발을 걸고 올라갔다.
오. 멋지네. 허당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내려오는 것도 한 번에 멋진 자세로 뛰어내렸다. 내가 작게 박수를 치자 그가 괜히 부끄러워했다.
"자, 이번에는 세이가 올라가 봐. 등자에 한 쪽 발을 끼우고 안장을 잡아."
"우와!! 높다. 재밌어요."
"올라탄 것만으로 좋아하긴 이르지."
갑자기 그가 내 뒤로 훌쩍 올라탔다.
"앗, 뭐예요? 가르쳐 주는 것 아녔어요?"
"일단 말위에 앉았을 때 자세도 중요하니까, 한 번 같이 타고 달려보자고. 고삐나 내 팔 꽉 잡아."
뒤에서 그가 날 감싸 안 듯 손을 뻗어 고삐를 잡았다. 그의 가슴이 내 등에 닿았다.
쿵쾅거리는 그의 심장박동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아니 카일의 심장이 뛰는데 왜 나까지 두근거려? 어쩌지? 내가 생각한 승마는 이게 아닌데, 어머, 꺄악!!
"이럇!!"
"재밌어!! 꺄악, 너무 좋아요. 카일 더 빨리!!"
역시 나란 아이! 부끄럽잖아. 그런데 너무 신나. 빨리 배우는 척 하는 거 끝내고 내가 직접 몰고 싶어. 어차피 말들이랑 친화력이 좋으니 애들이 날 떨어뜨릴 일은 없는 걸.
"크큭, 세이, 어쩜 넌 다른 여자들이랑 다른 거야?"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신나게 한 바퀴를 돈 뒤 카일이 내게 물었다.
"보통의 귀족 영애들은 다 무서워하는데 말이야."
흠흠, 그거야 내가 귀족 영애로 자라지 않았으니까, 뭐.
"그래서 이상해요? 싫어요?"
"아니, 더, 매력적이야. 푹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 할 만큼."
얼굴이 홍당무가 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아르세이아가 아닌 내 모습을 칭찬하는 말이니까, 당혹스럽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했다. 아니, 기분 좋았다.
"내, 내려줘요."
"잠시만, 내가 먼저 내릴 테니 위에 꽉 잡고 있어."
그가 먼저 말에서 내렸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내릴 생각에 그가 내린 뒤 손을 뻗으려 했다. 그런데 그는 양팔을 활짝 펼치고 내게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자, 스릴을 즐길 줄 아는 아름다운 나의 비. 내 품으로 뛰어 내려봐. 재밌을 거야."
뭐래? 하지만, 이 정도 높이에서 뛰어내리는 거, 재밌을 것 같긴한데. 갈등되네. 뛰어 말어?
뭐, 카일은 소드마스터니까 내 무거운 몸뚱이 하나 못 받아내진 않겠지. 해볼까? 혹시 못 받고 뒤로 넘어지면 마구 놀리지 뭐.
후작부인에게서 날 지켜줬던 남자이기에, 그가 이제 뭘 한다 해도 믿고 싶었다. 그 믿음이 뛰어내리고 싶은 욕구를 자극했다.
"잘 받아요. 떨어뜨림 안돼요."
자신만 믿으라는 듯 빙그레 웃는 남자를 보며 과감하게 내 몸을 날렸다. 그의 얼굴이 내 얼굴과 맞닿을 만큼 가까워져 갔다. 그리고 그가 뻗은 양팔이 내 허리를 단단히 안아들었다.
"어랏??"
왜 뒤로 넘어가? 소드마스터라더니 마나 코어만 있고 하체는 부실한 거야? 이런, 아르세이아 내동생, 어떻게 해? 부실한 남자라니!!!
"쪽!"
"이 인간이!!"
그의 등이 바닥에 닿고, 내 몸이 그의 몸을 위에서 덮는 순간 그가 내 입술에 버드키스를 날렸다.
"무슨 짓이에요?!"
"내 품으로 날아오는 세이의 등 뒤에 날개가 달렸는지 요정 같아 보이잖아."
내가 한때 이 남자를 신뢰했던가? 날 지켜줄 거라 믿었었나? 믿음 따위 개나 줘버려!!
"제발, 오글거리는 소리 하지 마요!!"
"진짠데, 넌 내게 요정이야. 날개만 없을 뿐이지."
도대체가 어떻게 하면 이렇게 진지한 표정으로 상대방을 부끄럽게 만드는 말들을 할까?
"꺄아, 두 분 봐."
"어머어머, 빨리 지나가자."
멀지 않은 곳에서 어린 하녀들이 우릴 부끄러워하며 도망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으아아악. 나 이제 고개 어찌 들고 다녀?
이제 좀 놔라. 무겁지도 않니?
"놔줘요."
"좀만 더 있음 안 돼?"
"우리, 이제 사이좋게, 각자의 방에게 주인을 돌려..."
"일어나시죠. 나의 비."
하아, 혼자 말 타는 순간, 승마 천재인 척해야겠다. 그리고 다신 카일에게 뭐든지 배우지 않을테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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