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황궁 밖에서의 하루.(1)
2018.04.21.
나는 카일에게 말을 배우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승마 능력자인 척했다. 다들 감탄해 마지않는 표정이었다. 심지어 클리페울룸경 마저 칭찬을 해줬다.
"오드리. 아이 예뻐."
"푸르릉."
카일이 아르세이아에게 선물했다는 순한 갈색 말이 내게 머리를 비벼왔다. 안 그래도 인간과 교감을 잘하는 동물이 말인데, 그 교감할 상대가 나니까, 얼마나 말을 잘 들을까?
늑대 대장을 타고 다닐 때의 내 순발력에, 내 뜻을 알아차리는 말의 조합은 환상적이었다.
"카일, 이제 당신에게 승마 안 배워도 되는 실력이죠?"
떨떠름한 표정의 카일은 못내 아쉬운지 입맛을 다시면서 답을 해왔다.
"그, 러, 네. 말이 참, 그대의 뜻을 잘 알아듣는 것 같아. 마음이 통하기라도 하나 봐?"
흐익, 가끔 저럴 때 무서웠다. 안 그래도 이번에 아르세이아의 모습과 다른 행동해서 찔리는데...
아르세이아가 돌아오기 전에 승마, 확실히 배워두라고 해야지. 아니다. 오드리, 혹시 먼 미래에 나랑 닮은 아이가 널 타려고 하면 절대 떨어뜨리면 안 돼. 약속해!
"히이잉~!"
흠. 약간 못 미더운데? 그냥 떠나기 전에 한 번 즈음 일부러 말에서 떨어져야겠다. 그 이후 더 이상 무서워서 말 못 타겠다고 해야지.
"이 정도면 카일이랑 경주해도 지지 않을 것 같죠?"
"흠, 경주할까?"
"기왕이면 내기해요. 서로 원하는 것 들어주기."
후훗, 지난 숨바꼭질에서는 식물의 배신으로 내가 졌지만 이번에는 안 진다고. 황태자 카일룸씨! 당신 말은 꼼짝도 안 할 것이야. 오호호호!
"또 지려고?"
"승부는 해봐야 아는 거죠! 이번에는 안질 거라고!!"
"그래 좋아. 여기서 저기 연무장 입구의 나무까지. 장애물도 있고 괜찮은 코스지?"
"좋아요!"
너무 티 나면 안 되니까 저기 장애물 쯤에서 황태자의 말을 망설이게 만들면 되겠지?
잘 부탁한다. 오드리, 그리고 블랙버드.
"꺄하하하. 이번에는 내가 이겼어요. 그쵸?"
"블랙버드, 네가 미인에게 약한 줄 몰랐어."
그런데 표정을 보니까 내가 꼼수를 안 썼어도 져 줬을 것 같은데? 흐음. 내가 진짜 또 나쁜 사람 된 것 같잖아. 왜 져놓고 즐거워하는 거야. 봐줬다 그런 표정이냐고.
"그래서 원하는 게 뭐야? 다 들어 줄게."
"진짜죠? 무르기 없기에요."
"... 각방 쓰자거나 이혼하자는 것만 아니면 돼."
그의 눈빛이 파르르 흔들렸다. 에이, 선수칠걸. 아쉽네.
"나, 황궁 밖에 나가고 싶어요. 갑갑해요. 말 타고 시원하게 강가도 달려보고 싶고, 시장도 가보고 싶고."
가출 전적이 있었던 나, 아니 아르세이아때문인지 카일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나도 나름 이유가 있었다.
솔직히 공부하고 호의호식하면서 지내고 있지만 갑갑했던 것이다. 자유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충분히 매일 미니 목장에서 동물들과 놀고, 산책도 하면서 자연을 즐겼다.
하지만 이 드넓은 황궁에서 정체를 숨기고 있는 것은 숨 막히는 일이었다. 하루 즈음은 숨통을 트이게 해주시면 안 되려나?
"아니, 밖에 나간다고 또 도망가거나 하겠다는 게 아니잖아요. 불안하면 카일이랑 같이 나가면 되잖아요! 그니까 밖에 나가서 데이트처럼 하자고요!!"
외출을 위해 자존심을 버렸다. 윽. 그런데 카일은 마지막 말에 꽂혔는지 아까의 심각했던 표정이 어느새 풀려있었다.
"어. 그래 데이트하자, 데이트. 좋네. 너랑 첫 데이트네. 하하. 데이트라니, 나 꿈꾸는 거 아니지? 구체적으로 뭐 하고 싶어?"
오늘의 교훈. 단어 선택을 잘하자.
"강가에서 말 달리다가 시원한 나무 그늘 있는 곳에서 도시락 먹어요. 또 시장 구경도 하고, 같이 쇼핑이라도 할까요? 길거리 음식도 사 먹고, 길거리 공연도 있음 보고. 시장은 야시장이 재밌다던데, 나는 야시장은 무서워서 못 가니까 음."
야시장에는 가난한 상인들이 많아서 마법등 대신 횃불을 많이 켜두는 편이었다. 그래서 나는 야시장은 한 번도 못 가봤다. 늘 어떤 곳인지 궁금해서 미련은 남지만 포기한 곳이었다.
"카일과 가면 불이 무섭지 않으려나? 아니, 근데 이거 다 하려면 하루 다 비워야 되니까 무리겠죠?"
내가 혼자서 먼 산 보며 이야기하다가 그를 쳐다보았다. 엄마얏!! 뭐야, 왜 그렇게 눈에 하트를 켜놓고 쳐다보는데? 뭐예요?
"왜, 그렇게, 봐요? 무섭게?"
"그냥, 나랑 가면 불이 무섭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게 좋아서."
괜히 민망해졌다. 이게 뭐라고 좋아하는 거지? 그를 믿거나 의지하는 것처럼 느껴져서인가? 어느 정도는 그를 믿고 있긴 하지만...
"그래서 언제 데리고 나가 줄 거예요?"
"내일 가자."
"내일 당장요?"
"어. 최대한 빨리."
나야 좋지. 아, 설렌다. 황도 구경이라니. 기대되잖아.
"네. 좋아요."
* * *
아니, 옛날에 내 옷들은 다 낡아빠진 헌 옷이었는데 황태자비의 옷은 죄다 화려해서 밖에 나가서 입을 수가 없잖아!!
놀러 가는 건데 주목 받게 생겼어. 나 고귀한 사람이에요라는 티 내고 다니기 싫은데.
"이런, 이래서야 밖에 못나가겠어. 모처럼의 기회인데."
내가 우울해하며 일단 몸을 씻고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 한숨을 쉬며 최대한 장식 없고 단순한 옷이 없나 다시 고민하며 드레스룸을 둘러봤다.
"세이, 이 옷 입고 나가...헉!"
"꺅! 나가요!!"
아무리 부부지간이라도 속옷 차림인데, 마구 남의 드레스룸에 드나들다니, 시녀들은 뭐한 거야?
아차, 시녀들은 남편이니까 그냥 들여보내 준 거구나. 그렇구나, 꿈도 안 꿨지만 점점 딴 남자에게 시집가기 글렀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황태자께서 이 옷을 입으시랍니다."
시녀장이 날 보고 잘게 웃으면서 수수한 평상복을 건네줬다. 편해 보이고, 치마도 적당한 길이라 말도 탈 수 있을 것 같았다.
"어. 내 옷들보다 훨씬 낫네."
센스가 없진 않구나. 구두도 편한 것으로 갈아 신고 문 밖을 나가자 여전히 얼굴이 붉게 물든 카일룸이 서있었다. 그러게 왜 아무 때나 들어오냐고요.
"뭘 입어도 귀태가 나서 큰일이네."
하, 하, 하. 그 와중에도 저런 소릴 하다니. 그는 내게 다가와 예쁘게 땋아놨던 머리를 풀고 평범한 연두색 끈으로 머리를 높게 묶어주었다.
"이 편이 훨씬 더 평범해 보일 거야."
에이린이 작은 도시락 주머니를 줬다. 오늘은 멀리서 근위대장만이 우리를 따라오며 수행하기로 했다.
"갈까?"
"네."
황궁 밖에 살 때도 목장에만 틀어박혀 살던 나였다. 처음으로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나간다는 설렘에 발걸음이 가벼워져갔다.
"헤헤헤, 에엑? 왜 말이 한 마리에요?"
내가 콧노래까지 부르며 즐거워했는데, 너무하잖아. 이 무슨!! 나 놀리는 거야?
"같이 타는 게 안전할 거라서. 워낙에 습격을 달고 사니까, 떨어져 있으면 보호하기 힘들어."
핑계도 좋아. 누가 봐도 이건 같이 말 타려는 수작이잖아.
"내가 직접 말 몰고 싶었는데!"
"그렇게 해. 나는 그냥 얹혀갈게."
무슨 꿍꿍이지? 더 수상한데?
역시, 그거였어. 내가 먼저 말에 올라타고 고삐를 잡자 그가 훌쩍 뛰어올라 내 뒤에 앉았다.
"흡!"
"나는 너한테 기대서 갈 거니깐 말 잘 몰아."
내 허리를 꼭 껴안은 남자의 숨소리가 목뒤를 스쳐 귓가에 닿았다. 이, 이런 자세로 편히 말을 몰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블래버드가 힘들어하지 않을까요?"
"푸르릉!"
야, 너 조용히 해. 힘들다고 해야지 이 상황에서는!
"좋아하는데? 게다가 우리 블랙버드는 군마라서 튼튼해."
이런. 망했다.
결국 모두가 보기에 우리는 아주 다정한 연인처럼 철썩 붙어서 말을 탈 수밖에 없었다. 내 팔자지 뭐.
"그런데 이러고 당당하게 정문으로 나가도 돼요? 이 차림에 이 모습이면 너무 눈에 띄는데."
"어, 그래서 근위대만 다니는 통로로 나갈 거야."
나는 순순히 그가 알려주는 방향대로 말을 몰기 시작했다. 군마라더니 생각보다 순해서 주인이 아닌 내 말도 잘 따라줬다.
성문은 금방 빠져나갈 수 있었다. 성문을 빠져나가자마자 펼쳐진 광경에 나는 작은 탄성을 질렀다.
"우와, 북적북적하다."
해자 너머로 좁은 길이 이어져 있었고 멀지 않은 곳에 광장이 있었다. 그 광장에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것이 보였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활기차게 움직이며 살아가는 곳.
이곳이 제국의 중심가구나.
"여기보다는 황궁 정문 쪽이 더 화려해. 거긴 귀족들의 거리거든. 여긴 평민들이 많이 다니는 곳이고, 밤에는 야시장도 열려서 재밌는 곳이야. 저기 오른쪽으로 가면 큰 강으로 가는 길이 있어. 우선 그리로 가자."
야시장, 가보고 싶다. 하지만 갈 수 없는 곳. 나는 미련을 떨치고 오른쪽으로 말머리를 향했다.
푸른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왼쪽으로는 반짝반짝 빛을 내며 잔잔히 흐르는 푸른 강이, 오른 편에는 한창 자라고 있는 농작물들의 초록 강이 펼쳐졌다.
그 사이를 유유히, 빠르지 않게 달리자 시원한 바람이 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가슴마저 뚫어 줄 것만 같은 한줄기 바람.
"시원해."
"좋아?"
"이렇게 높은 곳에서 멀리 바라보면서 달리니깐 답답했던 게 다 풀리는 것 같아요."
카일이 갑자기 말이 없어졌다. 계속해서 내게 저기는 무엇이고, 이쪽에는 뭐가 있다면서 여기저기 알려주던 사람이 갑자기 입을 다무니까 걱정이 되었다.
"카일?"
내가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자 그가 내 이마를 급습했다.
"뭐예요? 반칙!"
"내 욕심에 자유롭게 살던 너를 갑갑한 황궁에 가두어 버렸어. 미안해."
그건, 카일의 잘못이 아니었다. 내 동생의 잘못이고, 내 동생의 어머니와 내 아버지라는 사람의 잘못, 비스가의 잘못이었다.
그의 눈이 아주 슬퍼 보였다. 진한 외로움이 그 밑바닥에 깔려있는 것 같았다. 원래 황족이라는 자리가 알고 보면 가장 외로운 자리랬지?
"괜찮아요. 황궁에서 지내는 것도 할만해요."
맛있는 것도 매일 주고, 용돈도 많이 주고, 침대도 폭신하고, 예쁜 꽃도 많고, 내 친구인 에이린도 있으니까.
심지어 알비케라마저 호화롭게 살게 해주는 낙원이 아닌가? 내 정체만 아니면 살기 좋은 곳이지 아무렴.
"그리고, 매일 나 웃게 해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곁에 있잖아요."
그 사람은 후작부인으로부터 날 지켜주기도 한 걸요. 충분히 고맙고, 감사해요. 당신이 곁에 있다는 것이 이젠 조금은 편해졌어요. 당신 덕분에 즐겁게 살고 있어요.
내가 당신을 속이고 있는 게 문제일 뿐이죠. 언제 들킬지 모르니까.
"매일 웃게 해줄 게."
"그러시든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