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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비의 대역으로 살아남기-28화 (28/126)

29화. 여름비가 스며들 때. (4)

2018.04.28.

"세이, 너를 데려오지 말 것을."

"아니에요. 황태자비가 된 이상, 친정과 외가와는 어느 정도 선을 그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중립을 지켜야죠. 외숙은 원래 이기적인 분이시니까. 오늘은 받은 것 없이 돌아갔지만 다음에도 죄 없는 이들을 희생 시키면 벌을 받고 가셔야죠."

그가 나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내 가족을 홀대 한 것이 미안한 건지, 내 외숙의 추악함을 눈앞에서 확인시킨 것이 걱정인 건지 모르겠다.

날 바라보는 그런 그의 따스한 눈에는 온전히 나만 가득 담겨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담긴 걱정과 염려가 내 눈에도 그만이 가득 차도록 만들었다. 언제나 나를 걱정하는 그의 눈빛은 그를 향한 내 마음의 단단한 벽을 조금씩 부숴버렸다.

"걱정 마요. 아까 같은 모습 봤다고 떨 만큼 마음 약하지 않으니까, 그리고 당신이 곁에 있는걸요."

나의 말에 그의 기분이 좀 풀렸는지 살짝 입꼬리가 올라갔다. 두근, 역시 당신도 웃는 게 더 멋져.

"아니, 내가 한 걱정은 내 무시무시한 표정을 그대가 본 거야."

"네?"

"그게... 그대도 내가 웃는 게 좋다 했었잖아. 세이 앞에서는 언제나 예쁘게 웃어만 주고 싶었는데."

"아..."

나는 나도 모르게 그의 입술에 쪽 소리를 내며 키스를 했다. 그러자 놀란 그의 눈동자와는 달리 입술은 커다랗게 호선을 그렸다.

"얼마든지 예쁜 웃음 감상할 비책이 내겐 있으니까 괜찮아요. 그리고 무시무시한 표정도 카리스마 있어서 멋졌어요."

"세이, 저기, 한 번 더."

크큭, 저럴 때가 제일 귀엽다. 밥 달라고 조르며 입을 벌리는 새끼 참새도 저것보단 안 귀여울 거야.

쪽.

"한 번 더."

쪽.

"한 번만 더."

쪽, 이번엔 그가 입을 벌려 내 아랫입술을 살짝 빨아 당겼다. 내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그리고 내 입술에 닿는 그의 애절하고도 뜨거운 노란 눈빛. 약간은 억눌린 그의 욕망. 늘 간절히 나를 원하지만 참고 나에 대한 배려가 우선이었던 남자.

그래서 갑작스러운 욕망의 표시에 당황한 나를 보고 금세 미안해 어쩔 줄 모르는 사람.

내게만 웃어주는 카일룸.

남들은 차갑다고 하지만 누구보다 뜨겁고 따뜻한 사람.

내가 다시 돌아갔을 때, 힘없는 나약한 자들의 틈으로 내 자리를 찾아갔을 때, 그런 나라도, 지켜줄 힘이 있고 행동도 할 사람.

나는, 나는, 이 사람이 좋다. 동생의 남편인데, 내 동생이 잠깐 부탁한 아내의 역할인데...

도대체 언제부터 이 사람은 내게 스며든 걸까?

아르세이아가 돌아올 때까지만, 그때까지만 마음껏 사랑하고, 사랑받으면 안 될까? 그때까지만 내가 이 남자의 진짜 황태자비가 되면 안 될까?

나는 처음으로 내게 허락되지 않는 것을 가지고 싶었다.

"좋아해요. 카일."

동그래진 눈동자에 차오르는 기쁨은 나까지 절로 행복해지도록 만들었다. 나는 그의 눈이 더 동그래지기 전에 그의 뺨에 손을 대고 그의 입술에 내 입술을 겹쳤다.

그의 입술은 말캉하고 부드러웠다. 조심스럽게 내가 그가 한 것처럼 아랫입술을 빨아들이자 그의 숨소리가 거칠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다른 무엇을 해보기도 전에 그가 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리고 나에게 그의 참아왔던 욕망을 침투시켰다.

달콤해서 아득해지려 하면 그가 거칠어졌다. 거친 욕망에 숨이 가빠 오면 다시 나를 살살 달래며 숨을 불어 주었다. 우리는 그렇게 오래도록 서로의 입술을 탐했다. 시간이 멈추길 바라는 듯이.

키스하는 순간조차도 조심스럽고 소중하게 나를 배려해주는 나의 카일. 사랑하면 안 되는데, 그런데 그의 품에서 빠져나가고 싶지 않았다.

"사랑해. 세이."

평소보다 낮고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 나를 향해 고백해오는 그의 말에 내 머릿속이 빠르게 이성을 되찾아 갔다.

그가 부르는 세이는 나 세이렌일까, 아르세이아일까? 그가 사랑하는 세이는 지금의 나일까? 나보다 먼저 만난 아르세이아일까?

그게 어느 쪽이든 나는 이 남자의 깊은 마음을 기만하고 있는 거잖아. 이렇게나 아껴주는데... 사랑해주는데... 하지만 나는 그가 선택했던 비스가의 장녀 아르세이아가 아닌걸.

아르세이아의 모든 것을 그는 사랑해. 지금의 내가 오기도 전부터 그는 아르세이아를 사랑했는걸. 내가 오지 않았어도 그는 여전히 아르세이아를 사랑했을 거야.

질투가 났다. 그리고 질투와 함께 찾아오는 죄악. 나를 향한 자괴감.

어쩌면 늘 듣던 고백인데, 내 마음을 자각한 후 듣는 고백은 그를 향해 질주하던 내 마음이 차갑게 이성을 되찾도록 만들었다.

이 남자를 사랑한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그의 사랑을 받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여실히 깨달았다.

그래, 잊지 말자. 나는 아르세이아가 아니야.

"으음, 세이?"

열렬히 그의 뜨거운 입술에 반응하던 내 움직임이 둔해지자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숨, 숨을 못 쉬겠어요."

내가 그를 살짝 밀어냈다. 그러자 그가 아쉬워하면서도 밀려나주었다. 지금은 욕망에 가 득차 날 삼키고 싶은 눈을 하면서도 배려한다고 물러서는 남자의 모습마저 심장을 아려오게 했다.

"나, 쉬고 싶어요."

"왜 그래? 어디 아파?"

걱정스레 내 안색을 살피려 드는 그의 노란색 눈을 피했다.

"생각보다 외숙을 상대하는 것이 정신적으로 피곤했나 봐요. 가서 잠깐만 쉴게요. 당신도 바쁘잖아요. 몬테 공작을 잔뜩 자극했으니 전염병이 더 이상 퍼지지 않게 막아야죠."

그가 대답해오기 전에 내가 응접실을 나섰다. 2층의 귀족 접견용 응접실을 지나 3층으로 올라가는 동안 입술을 꽉 깨물었다. 눈물을 흘려서는 안되니까.

루카스와 테일러가 카일을 찾으러 왔다가 잔뜩 인상을 구긴 내 표정을 보고 놀랐다. 그들에게 인사할 여유 따윈 없었다. 나는 살짝 고개를 숙이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에이린."

"전하!"

마침 내 침실을 점검하고 있던 에이린이 내 표정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나는 그대로 내 친구의 품에 뛰어들었다. 에이린이 내 뒤를 따르던 시녀들을 다 내보내고 내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주었다. 그리고 작게 속삭여왔다.

"렌, 괜찮아."

에이린의 다정한 한마디에 참아왔던 울음이 터져버렸다.

"흐흑, 흑, 흑"

에이린은 그저 내 등을 쓰다듬어 줄 뿐이었다.

카일룸, 언제부터인가 그가 서서히 내게 스며들어왔다. 여름 내내 내리던 비처럼 나에게 애정을 주던 그는 내 마음과 영혼의 깊은 곳까지 스며 적셔버렸다.

그리고 내게 스며든 물은 날 얼렸다 녹였다 하며 제 영역을 점차 확대시켜왔다. 너무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와서 내게 엉겨 붙은 사랑은 이제 나의 일부가 되었다.

그러나 내 마음이 봄이 되어 이제 그를 사랑하는 마음을 자각하고 따뜻하게 녹아내리기 시작하자 나는 산산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이젠 주변에서 불어오는 바람에도 쉽게 부서졌다. 그게 너무 아파서 잃기 싫은데, 내 사랑이 뜨거워질수록 더 크게 벌어지고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진짜로 내게 봄은 오는 걸까? 따뜻한 봄이 오면 다들 행복하다는데, 나는 왜 내 마음에, 내 사랑에 봄이 올수록 무서워지는 걸까? 이 봄이 깊어지면 나는 산산조각 난 바위가 되어 그와 이별하겠지.

아르세이아, 제발 내 사랑이 더 뜨거워지기 전에, 내 마음의 겨울이 끝나기 전에 돌아와 줘. 더 이상 견디지 못할지도 몰라 나는.

나는 에이린의 품에 안겨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에이린은 그저 등을 토닥여 줄 뿐이었다. 내 울음이 잦아들자 에이린이 먼저 말을 꺼냈다.

"렌, 황태자 전하를 정말 사랑하게 되어버린 거지?"

"그는, 내 동생의 남편이야. 게다가 나 같은 사생아가. 사랑해선 안되는 사람인 거잖아. 내게 주는 관심이, 배려가, 사랑이 다 아르세이아껀데, 그가 날 아르세이아로 알기 때문인데. 그게 욕심나. 탐이 나."

"그럼 가지면 되잖아."

"어떻게 그래, 아르세이아가 언제든 돌아오면, 나는, 나는, 다시는 카일을 만날 수 없는 걸. 그런데 그 사람을 욕심내면 나중에 나는 견딜 수 없어서 부서져버릴 거야. 망가질지도 몰라."

에이린이 무슨 말을 하려다 말았다. 그래서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더 쏟아냈다.

"나, 이제 와서 다시 도망치면 안 되는 거지? 엄마도, 외삼촌들도 다 모른 척하고, 내 마음이 더 깊어지기 전에 도망가 버리면 안 되겠지? 솔직히 무서워. 내가 그를 더 사랑하게 되면. 아르세이아가 영원히 돌아오지 않길 바랄까 봐. 내 동생이 죽어버리길 바라게 될까 봐. 너도 알잖아. 내가 누군가를 미워하면, 죽길 바라면 생겼던 일들을. 게다가 나 때문에, 아르세이아는 이미 죽을 뻔했잖아.”

"렌..."

"실은 내가, 내가 진짜 비스가의 장녀 아르세이아이고 싶어. 아니 그건 원래 내 이름인데, 내 자리였을지도 모르는데... 나 같은 숨겨진 사생아는, 저주받은 아이는 그의 곁에 있음 안 되는 거 아는데, 그런데. 흐윽."

나는 결국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내 이름, 나의 진짜 이름. 아버지가, 비스 후작이, 첫 딸이 생기면 붙여주려고 했다던 이름. 아르세이아.

후작부인에게 우리의 존재가 발각되기 전까지 내 엄마가 당연하다는 듯이 불러줬던 내 이름. 아르세이아.

후작부인은 천한 사생아가 제 딸의 고귀한 이름을 같이 쓰는 게 싫다며 내 이름을 바꿔버렸다.

아르세이아. 카일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그 이름의 진짜 주인은 나였다. 하지만 그가 부르는 아르세이아는 내가 아닌걸.

"렌, 마음 가는 대로 해도 돼. 이미 네 마음이 황태자 전하에게 향했잖아. 그냥 마음 편하게 그분의 사랑을 받아. 그래도 돼."

"카일은, 그 사람은 고귀하고 위대한 황태자야. 혹시라도 나 같은 천박한, 저주받은 아이가 그의 곁에 머물러선 안돼. 잊고 있었어. 내가 왜 세이렌인지.

천박한 마녀. 저주받은 괴물.

내가 그를 사랑해버리면 분명 비스가의 안주인은 제 오라비와 함께 무슨 짓을 벌일지 몰랐다. 지금까지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뺏어간 것처럼 카일에게 위해를 가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카일에게 불행이 닥치길 원하지 않는걸. 그가 쉽게 다칠 만큼 약한 이는 아니지만, 이미 상처가 많은 그에게 더 이상의 고난을 주는 것은 싫었다.

"린, 울고 나니깐 괜찮아졌어. 내가 미쳤었어. 나는 내 동생의 대역일 뿐이야. 대역이 자신의 본분을 잊어버리는 순간 대역이 될 수 없는 걸. 아르세이아가 돌아올 때까지만 버티면 나는 내 어머니와 외가를 구할 수 있어. 참을 거야."

내 사랑도, 다른 이를 향한 질투도, 미움도 다 참아야지. 그런 나를 보는 에이린의 표정이 너무 슬펐다.

"렌, 아르세이아는."

"나 쉴래."

그 아이의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아. 내 반응에 에이린의 입이 꾹 다물어졌다. 그리고 조용히 내 옷을 갈아입히고 씻겨주었다.

그녀마저 떠나 버린 침실에 혼자 남았다. 그가 들어오기 전에 잠들어 버려야겠다. 보고 싶지 않아.

저녁도 굶어버리고 나는 잠을 청했다. 울다 지친 몸은 순식간에 잠에 빠져버렸다.

"아르세이아."

밤늦게 나를 찾는 그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눈을 뜨지 못했다. 그의 한숨소리와 함께 잘 들리지 않는 웅얼거림이 뒤섞여들렸다. 그리고 눈가에 청량감이 느껴졌다.

눈의 붓기가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청량감이 잦아들자 그의 커다란 손이 베개 위에서 엉켜버린 머리카락을 조금씩 조심해서 풀어주는 간질함이 느껴졌다. 이불도 다시 어깨까지 덮어주었다.

"네가 괴로워하는 것은 싫은데... 묻어 두는 것이 네게 더 나은 것이 맞는지 잘 모르겠어."

내 귓가를 울리는 목소리, 내 머리카락을 넘겨주는 따뜻한 손 그와 반대로 얼어가는 내 마음. 더 이상 그에게 흔들리지 않기 위해 억지로 고정시키려는 심장이 시큰하게 아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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