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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비의 대역으로 살아남기-29화 (29/126)

30화. 간택연의 기억.

2018.04.28.

그 이후 며칠은 서로 바쁜 일정이 이어져 카일을 만나기 힘들었다. 탄생연 준비로 바쁜 나와, 전염병 확산 방지 문제로 바쁜 그는 요즘 같이 식사를 할 여유도 없었다.

게다가 종종 가까운 황실 직할령에 괴수가 나타난다고 했다. 위험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그의 성정상 황태자가 직접 나서야 했다.

결국 내가 알비 케라와 잠들고 나서야 방으로 들어와서 내가 일어나기 전에 방을 나가는 카일. 일부로 날 피하나 싶을 만큼이었다. 집무실에서 루카스는 만나도 그는 보이질 않았다.

다행이었다. 차라리. 보지 않으면, 가까이 있지 않으면 마음을 정리하는 게 쉬우니까.

"비 전하. 요즘 식사는 제대로 하시는 겁니까?"

"네?"

"안 그래도 마르셨는데 더 야위셨습니다. 전하께서도 겨우 살을 찌워놨더니 다시 마르고 있다고 걱정이 많으십니다."

"... 늦더위 때문에 입맛이 떨어졌나 봐요."

요즘은 얼굴 보기도 힘든 사이인데 내 상태를 알고 있는 카일이 신기했다. 새벽에 잠깐 들리는 게 고작인데.

"카일룸 전하도 요즘 꼴이 말이 아닙니다."

"... 왜요?"

"당연히 바빠서 비 전하를 뵙지 못해서지요. 저희랑 밥 먹으면 밥맛 떨어진다고 성질내고, 향만 좋은데도 일하다 마시는 차가 떫다고 투덜거리고, 웃지도 않고, 냉기만 풀풀 날려요. 대련 중독자 테일러가 오죽하면 요즘 전하를 피해 다니겠습니까?"

내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눈만 깜박이자 루카스가 웃으며 답했다.

"대련했다가 흠씬 두들겨 맞을 것이 뻔하거든요. 이런 상태에서 대련해 달라 조르면요. 얼마나 잔인한지 으. 피하는 게 상책이에요. 냉기가 아주 그냥."

내가 아는 카일의 모르는 모습. 나한테 속았다는 것을 알면 내게도 그렇게 차갑고 잔인해질까?

싫을 것 같았다. 그가 몬테 공작을 보던 시선으로 날 바라본다면, 날 바라보던 가장 따스한 눈길을 잃는다면 세상이 무너지겠지?

그가 날 차가운 눈으로 보지 못하게 철저하게 내 정체를 숨기다가 사라져야 해.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루카스는 계속 카일의 까칠한 모습들에 대해 설명했다. 나는 옅은 미소를 지은 채 그의 말을 경청했다.

"그러니까 저희 살리는 셈 치고 카일룸 전하를 만나주십시오!"

"예? 하지만..."

내가 피하는 게 아닌데...

"카일룸께서 비 전하를 피하시는 것 압니다."

아, 역시 그가 날 피했구나. 불편하겠지. 오락가락하는 내가.

"전하는 이거 제가 말했다고 하면 죽여버리실지도 모르지만 그때 그 간택연 전부터 비 전하를 아셨습니다."

그런 것 같았다. 후작가 안에서 살던 아르세이아의 외로움도 아는 것 같았고.

"간택연 전부터 전하께 여인은 비 전하 한 분밖에 없으십니다. 황태자비 전하라서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아르세이아님이라서 사랑하시는 겁니다."

마지막 말이 찌르르 아팠다. 나는 그저 아픈 걸 숨기려고 웃었다.

나는 간절한 루카스 때문에 카일룸이 있다는 곳으로 향했다. 어쨌든 나 때문에 보좌관들이 고생하고 있다니 도와줘야 할 것 같았다. 조금 불편한 것을 참으면 되니까.

걷는 동안 간택연의 일이 떠올랐다.

당시 황제는 20살이 훨씬 넘어가도록 정략혼도 거부하고, 연애조차 하지 않는 황태자 때문에 고민이었다.

결국 3년 안에 아내를 맞이하라는 황제의 명령에 황태자는 자신의 반려를 고르기 위해 간택연을 열게 되었다.

이틀간 열리는 데뷔탕트에서 마음에 드는 여인을 찾아보겠다고 선언했다. 원래 남녀 구분 없이 이틀간 열리던 데뷔탕트는 첫날은 영식들을 위한 성인식이, 둘째 날은 영애들의 성인식이자 간택연으로 바뀌어 버렸다..

영애들의 데뷔탕트는 소녀들 사이에 좀 더 로맨틱한 환상을 불러왔다. 원래 파트너나 가족이 주는 붉은 꽃을 머리에 꽂고 입장했었다.

그런데 이것이 모든 여인들의 선망의 대상인 황태자가 입구에서 손등키스와 함께 꽃을 직접 머리에 꽂아 주는 것으로 바뀌었다.

황태자를 직접 만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영광인데 손등키스라니!! 제국의 소녀들은 데뷔탕트만 기다리게 되었다.

당연히 데뷔탕트는 둘째 날 연회가 화제의 중심이 되었다.

황제는 그해 데뷔하는 귀족의 자녀라면, 누구든 일 년에 두 번 열리는 이 데뷔탕트에 참여해야 한다고 칙서를 내렸다.

간접적으로 신분이 낮더라도 황태자의 눈에만 들면 황태자비가 될 수 있단 가능성을 내비친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 세 번의 연회에서 꽃을 나눠준 황태자는 단 한 번도 여인에게 춤을 청하지 않고 홀을 떠났다고 했다.

이는 황태자에게 반한 것으로 알려진 콘스탄트 공녀가 자신은 더 이상 꽃을 받지도 못하면서도 매번 찾아오게 된 원인이 되었다.

감히 저보다 못한 가문의 여인들이 저를 제치고 황태자의 손을 맞잡을 수 있는지 확인하려고, 그리고 결국에는 제 손을 잡게 될 황태자에게 그의 무례를 경고하려고, 그러니 자신의 손을 잡을 기회를 주겠노라며 계속 나간 것이다.

네 번째로 열린 나와 아르세이아가 참석하기로 된 데뷔탕트.

사실 나는 아르세이아와 겹치지 않으려고 그해 초에 열린 신년 데뷔탕트에 에이린과 참여하려 했다. 그러나 후작부인의 매질로 생긴 염증 때문에 고열로 전날 쓰러지고 말아 참석하지 못했다.

결국 가을 연회에 참석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오늘의 주인공은 우리 아르세이아겠지만, 혹시라도 그 아이에게 누를 끼치지 않도록 튀지 말거라."

결국 나는 늘 쓰고 다니던 칙칙한 갈색 가발을 쓰고 참석해야 했다. 뻣뻣한 싸구려 머리털로 만든 가발이라 손질이 힘들었다.

그래서 그냥 반을 하얀 머리끈으로 질끈 묶은 채, 초라한 드레스를 입고 꽃만 받고 구석에 숨어 있을 생각이었다.

"어라? 이것은?"

"후작님이 보내신 것 아닐까?"

하얀 치마에 분홍 레이스로 포인트를 준 화려하고 예쁜 드레스. 곳곳에 분홍 레이스로 만든 장미꽃이 달려있고 그 꽃의 가운데에는 예쁜 색색의 보석이 달려있어서 데뷔를 앞둔 소녀들을 설레게 하는 그런 드레스. 거기에 어울리는 장신구 세트까지 커다란 상자에 들어있었다.

"렌. 예쁘다. 네가 저 낡은 드레스를 입고 한 번뿐인 데뷔탕트에 간다 해서 걱정했는데."

망설이는 나를 위해 에이린은 그 드레스를 억지로 입혔다.

"장신구는 하지 않을래, 조금이라도 튀면 분명 마님이 싫어할 테니까."

충분히 주목받을 만한 보석들이었다. 그것도 이름 없는 지방 자작가의 영애가 하기에는 부담스러운. 에이린이 아쉬워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화장도 일부러 칙칙하게 도드라지지 않게 했다. 그랬음에도 날 에스코트해주기로 한 프리케는 날 이쁘다고 칭찬했었다.

"세이렌. 너무 예쁘다. 오늘 황태자께서 네게 반하는 것 아냐?"

"말이 되니? 아르세이아는 나보다 훨씬 우아하고 아름답게 치장하고 올 텐데."

"그래, 황태자는 아르세이아에게 맡기고, 너는 내가 책임질게. 너의 안전도, 네 첫 춤도."

"됐거든. 그냥 벽의 꽃이 되고 말겠어."

나는 능청맞은 그의 옆구리를 살짝 찌른 뒤 함께 황궁의 프리미코 홀로 향했다. 연회장에는 이미 많은 여인들이 도착해 있었다.

나도 황태자의 꽃을 받기 위한 줄에 섰다. 줄은 금방금방 줄어들었다. 꽃을 받은 여인들은 저마다 볼에 홍조를 띠며 자리를 떠나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근처에 대기한 시종들에 의해 홀로 억지로 떠밀려 옮겨갔다.

쯧쯧, 어짜피 내가보기엔 다들 선택받긴 글렀다. 물론 나도 포함이고.

"세이렌 소노르 영애. 데뷔를 축하하오. 즐거운 밤 되길."

사무적으로 말하며 눈도 마주치지 않고 꽃을 머리에 꽂아주던 그는 내 손등에 짧게 키스했다. 눈을 마주치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상당히 무료해 보였다.

무릎을 살짝 꿇고 인사를 한 뒤 홀로 이동하자 오늘 내 파트너인 프리케가 바로 붙어왔다.

"황태자 전하는 봤어? 멋지지? 너 혹시 반했냐?"

"얼굴도 제대로 못 봤어. 피곤하신가 봐. 잘생기긴 하셨지만, 나는 검은 머리의 기사님이 더 좋아."

"나?"

"꿈 깨."

"쳇, 내가 네 기억 속 케이일 수도 있잖아."

"웃기시네. 절대 넌 아냐. 어딜 케이를 너한테 갖다 대냐? 케이가 훨씬 더 멋졌거든?"

"칫, 나도 검은 머리의 기사인데 이리 무시하냐. 그나저나 오늘도 전하는 춤도 안 추시고 그냥 가실 건가?"

아직도 오늘 참석을 알린 영애들이 다 도착 못했는지 입구의 줄이 줄어들지 않았다.

다 나눠주는 것도 일이겠다. 그러니 황태자가 지쳐서 춤도 추지 않고 돌아가지.

황제 폐하가 잘못했네. 저러다 황태자가 평생 결혼 못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르세이아는 언제오지? 그 아이가 오는 순간 나는 구석으로 숨어버릴 테다. 지금은 프리케때문에 참고 있는 중이었다.

프리케는 평민 출신 견습기사라 내 파트너가 아니었으면 이곳에 와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렌, 네 꽃 좀 시들하다."

"응? 그러네."

죄 없는 꽃을 이렇게 짧게 꺾어놓으니 금방 시들지.

"표 안 나게 살짝 살리면 안 돼?"

내 힘을 아는 유일한 두 친구, 프리케의 말에 내가 웃었다. 꽃마다 시든 정도는 다를 테니 조금 살려도 괜찮을 거란 눈빛을 주고받은 나는 내 머리에 꽂힌 꽃에 아주 살짝 생명력의 축복을 내렸다.

"됐어?"

"어. 이 가발보다 네 진짜 머리에 꽂았음 더 예뻤을 건데."

"어쩔 수 없지."

"하긴, 그래도 넌 예쁘니까 괜찮아."

"뭐래?"

아르세이아는 연회 시작을 알리는 나팔소리가 날 때까지 도착하지 않았다. 또 땡땡인가? 이번에 빠지면 후작부인이 난리할 텐데 나한테만 불똥 튀지 마라.

내 염려를 모르고 연회는 아름다운 연주와 함께 시작되려고 했다. 연회의 주인공인 황태자가 홀의 가장 높은 곳에서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 영애들의 표정에서 두근거림이, 혹시 나는 아닐까 하는 기대감이 번졌다.

나는 그저 주변을 둘러만 보고 있었다. 아르세이아는 언제 오는 거지? 황태자가 떠나기 전에 도착해야할 텐데. 후작부인이 제 딸을 황태자비로 만들고 싶어 얼마나 극성인데 큰일 나겠어.

내가 입구만 기웃거리는 사이 주변에서 웅성거림이 느껴졌다.

"저기, 세이렌."

"너랑 춤 안 출 거라니까. 프리케, 응? 왜? 앗!"

내 눈앞에 호기심으로 가득 찬 노란 눈이 다가와 있었다. 황태자는 손을 뻗어 내 머리에 꽂힌 장미를 만졌다.

뭐, 뭐지? 싱싱해진 것이 티가 많이 나는 걸까? 내가 바짝 긴장해 움츠러들자 장미를 향했던 노란 눈길이 내 이마를 지나 내 눈동자에 닿았다.

호기심과 의문이 가득한 눈빛.

정령을 다룬다던 황태자. 그의 눈에 다른 꽃들과는 차이나는 내 꽃의 생명력이 보인 것일까?

혹시 들키면 어쩌지? 위험한 힘은 아니지만 동물과 친한 내 힘과 더불어 불길한 취급을 받을 텐데. 정령과 계약도 하지 않은 인간이 식물에게 생명력을 주다니. 마녀라 오해받을지도 몰랐다.

당황하는 내 주변으로 시기와 질투가 가득한 적의 어린 시선이 꽂혔다. 특히 콘스탄트 공녀에게서는 악의가 철철 흘러넘쳤다.

"혹시?"

"아르세이아 비스 후작 영애가 들었습니다."

그가 내게 뭔가 말하려던 순간 황태자에게 아르세이아의 등장을 알리는 남자가 있었다. 루카스 보좌관이었다.

"맞나?"

"예, 모든 면에서요."

황태자는 나를 한 번 더 돌아보았다. 그러더니 몸을 돌려 홀 입구로 갔다. 그의 손에 들린 장미는 홀 안의 어떤 여인들의 꽃보다 탐스러웠다.

아르세이아의 고운 머리에 어울리는 화사한 장미꽃이 꽂히고, 그는 간택연이 열린 후 네 번째 만에 첫 춤을 청했다.

"황태자께서 아르세이아에게 빠지신 것 같네."

"그러게."

"흠. 아르세이아가 결혼하면 너도 편해지겠지?"

"그러려나?"

"너도 여유를 찾으면 그때 나랑 도망 갈래? 비스가의 마수에서 벗어나게 해줄게."

"글쎄 가능하겠어? 일단 황태자께서 아르세이아와 혼인하길 바라는 게 먼저겠네."

춤을 추고 있는 두 사람을 보았다. 황태자는 누가 봐도 잃었던 연인이라도 찾은 양, 절절한 눈빛으로 아르세이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그렇게 그녀를 선택했었다.

혹시 그가 그때 나를 선택했다면 우리의 미래는 달라졌을까?

후우. 깊은 한숨만이 나왔다. 시선을 아래로 두고 그가 있다는 행정관을 향해 걷는 내 발걸음이 무거웠졌다.

"아르세이아! 어찌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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