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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비의 대역으로 살아남기-46화 (46/126)

47화. 말해도 될까요??

2018.05.17.

습격이 있던 밤 카일은 알리페르와 프리케에게 나의 개인 호위를 부탁했다. 솔직히 못마땅한 표정이었지만...

공식적으로는 비스 기사단에 황태자비의 호위 지원을 부탁한 모양으로 되었다.

흠. 덕분에 나는 프리케의 개인 기사가 되겠다는 요청에 대한 답을 미룰 수 있었다.

"밤하늘을 비추는 작은 별, 황태자비 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앉으세요."

다음 날, 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웃으면서 다시 황태자비의 업무를 시작했다.

일단 탄생연이 코앞이었으니까.

마담 레이아와 스튜어트 남작과 차 한 잔씩을 마시며 간단한 대화를 나눈 뒤 완성된 드레스와 액세서리를 확인했다.

"어머."

돈을 쓴 보람을 느끼게 하는 디자인이었다. 최고야. 마음에 들어!

내가 원했던 커플 아이템이 완벽 구현됐다. 옷도 보석도!

누가 봐도 우리 한 쌍으로 보이겠다. 좋아라.

그의 예복은 짙은 검은색 비단에 은은한 푸른색 펄이 감돌았다. 그리고 붉은빛이 도는 금색 실로 왼쪽 가슴 부근에 자수가 들어갔다. 자수는 가운데 부분이 비어있었다.

내 드레스는 옅은 하늘색으로 시작해 아랫단으로 갈수록 더 짙푸른 검은색으로 자연스럽게 물들었다.

치맛단에는 그의 머리 색을 닮은 작고 푸른 사파이어가 촘촘히 박혀 있었다. 풍성한 레이스는 한층 더 우아함을 살렸다.

홀터넥으로 올려진 목 부근에는 내 머리색과 닮은 토파즈들이 우아한 무늬를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예복처럼 왼쪽 가슴 부근에 수가 놓여있었다. 그의 청남색 머릿결을 닮은 푸른빛이 도는 은빛 수가.

"여기에 이렇게 브로치를 올리면 됩니다."

루비로 만든 별을 감싼 옐로우 다이아몬드와 골든 베릴로 만든 태양.

또, 태양의 주위를 감싼 붉은 별.

앞의 것은 카일의, 뒤의 것은 나의 옷에 달 브로치였다.

"마음에 드십니까?"

"생각한 것보다 훌륭하군. 마음에 드네."

사실 너무너무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그런 티를 너무 여과 없이 내면 없어 보이잖아.

하하. 우리 단골 해요.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어제의 습격이 마음속에서 지워지기까지 시간은 걸릴 것이다.

하지만 이겨내야 해. 카일은 이보다 더 한 일도 많이 겪었는걸.

"세이, 네가 이런 일을 겪게 만들다니... 미안해."

"괜찮아요. 당신 옆에 서기 위한 시련이라고 생각하면 되는걸요."

어제 밤새도록 카일은 나에게 미안하다고 했고, 오히려 그런 그를 내가 위로해야 했다.

큰일은 내가 겪었는데 말이야.

신기한 것은 그렇게 무서운 일을 겪고도 내가 그 일을 잊어버리거나 기억을 회피하려 하지 않은 것이다.

예전 같으면 벌벌 떨다가 알비케라에게 내 어둠을 또 부탁했을 텐데.

다, 카일 덕분이야.

날 지켜주려는 카일의 마음이, 그를 믿고 의지하려는 내 마음이... 용기를 주니까.

자, 이제 시간 여유가 있으니까 어여쁜 생명들을 만나러 가볼까?

"알비케라. 밤새 잘 지냈지? 어머!"

알비케라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천천히 내 앞으로 왔다. 그런데 그 아이의 머리 위에 하얀 다른 생명체가 올라가 있었다.

"안녕? 잘 잤니? 아픈 곳은 없지?"

어제보다 상태가 좋아 보이는 새하얀 까마귀는 나를 보자 내게 포르르 날아왔다. 내가 손을 내밀자 그 앞에 얌전히 내려앉았다.

아직 어리구나. 이제 괜찮은가?

내게 머리를 비벼대는 까마귀는 더 이상 아프지 않음을 어필했다.

"그래, 그래. 나도 고마워. 어제 네 덕분에 소중한 내 동생을 지켰는걸."

"비 전하, 진짜 까마귀에요?"

"응. 신기하지?"

"너무 예뻐요. 털이 하얀데 반짝이기까지 하고. 제가 아는 까마귀랑 너무 다른데요?"

흔하지 않은 외모에 에이린이 호기심에 까마귀 곁으로 다가왔다. 내가 에이린과 친해진 이유 중 하나였다.

그녀는 내가 부른 동물들을 무서워하거나 피하지 않고 함께 친구가 되어주었으니까.

"물리면 아프다."

"히익, 이렇게 순하게 생긴 애가 물어요?"

"얼마나 용맹한 새라고, 그치 까마귀야."

"이름을 붙여주시는 게 어때요?"

그럴까? 이제 같이 살 거니까. 흐음... 뭐가 좋을까?

"아나이스? 어때?"

"까악."

"어머, 마음에 드나봐요. 머리 비비는 것 봐. 너무 예뻐요."

"그지? 까마귀는 똑똑하기까지 해. 사람 얼굴도 구별할 줄 아는 걸."

"진짜요?"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줬다. 에이린은 신기하다는 듯이 까마귀를 한참이고 들여다봤다.

그리고 그런 에이린을 까마귀도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봤다.

둘이 뭐 하냐? 그냥 친구해.

"산책하러 나가자."

강아지와 흰 까마귀, 그리고 인간들의 어울리지 않는 조합으로 우리는 후원의 미니 목장으로 나갔다.

"하하하하. 알비, 조심해."

아나이스가 알비만 쫓아다니고, 알비케라는 도망가는 일의 연속이었다. 알비가 갑자기 휙 방향을 바꾸면 놀란 아나이스가 날아올랐다.

그러나 뛰는 놈이 나는 놈을 이길 순 없지. 쯧쯧.

아나이스는 알비의 머리 위에 앉아서 의기양양했다. 알비가 제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구는구나.

"까악."

"멍멍!"

우리 알비, 드디어 나 말고 단짝이 생기려나 봐. 그런데 이를 어째. 이종족 간의 사랑이라니.

"누님."

"펠, 프리케. 어서 와."

둘은 어젯밤 황태자궁의 별채에서 묵고 오늘 아침 잠시 집으로 돌아갔었다. 비스 기사단에 절차를 밟고 온 것이다.

"앞으로 잘 부탁해요. 기사님들."

조금 안심이 되었다. 나를 지켜주는 이들이 이렇게 내 주변에 많다는 것이.

이젠 나 혼자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어제의 습격이 꿈이었던 것처럼 안심이 되었다.

"자, 그럼 일단 밥부터 먹자. 나 배고파."

둘을 이 황궁에서 처음 봤을 때보다는 편하게, 그리고 즐겁게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펠, 우리 요리사들 못하는 요리가 없지만, 이 스튜는 진짜 최고야. 먹어봐."

"네, 누님. 진짜 맛있네요."

내가 펠에게 이것저것 요리들을 직접 덜어주며 시중을 들어 주었다. 펠은 그것을 불평 없이 다 받아 먹어 줬다.

소꿉놀이하는 기분인가? 하하, 동생을 보살피는 것도 즐겁구나.

"에효, 누나 없는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나."

으이고 투정은. 옜다 먹어라.

"프리케는 예전부터 닭 요리 좋아했지? 그래서 특별히 부탁했어."

발골한 닭에 채소볶음을 넣고 말아서 다시 오븐에 구운 요리인 갈라틴을 한 점 잘라서 프리케의 접시에 올려줬다.

"맛있을 거야."

"어, 고마워가 아니라 감사합니다."

왜 줘도 떨떠름한 표정인 건데? 프리케는 갈라틴을 한 조각 입에 넣고는 살짝 얼굴을 붉혔다. 응? 채소 속에 칠리라도 들었나? 매운가?

"어제 둘 다 너무 고생했어. 나 때문에 다들 죽을 뻔하고..."

죽음을 마다하지 않고 날 지키기 위해 검을 드는 기사들. 동화에서나 볼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했었다.

어제 알리페르가 적의 대장과 싸우는 모습은 아직도 간담이 서늘했다. 프리케가 날 위해 적을 죽이던 모습과 피비린내는 쉽게 잊진 못할 것이다.

"오히려 저희가 감사해야죠. 누님의 활약이 아니었다면 크게 다칠 뻔했습니다."

"맞아...요. 비 전하. 특히나 흰개미로 활을 제압한 건 정말 대단한 한 수였죠."

"내가 도울 수 있는 것은 겨우 그런 것 뿐인 걸."

내가 한 게 뭐있다고. 너희들이 나쁜 사람들을 모두 해치워 줬잖아. 그 덕분이야.

"겨우라니요!"

엄마얏, 깜짝이야. 펠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어?"

"누님께서 돕지 않았다면 저희 쪽 피해가 컸을 겁니다. 누님 덕에 저희는 다들 경상에 그쳤는걸요."

"그럼요. 최고셨습니다. 비 전하가 이번 전투의 수훈갑이십니다."

"아나이스가 최고 아냐? 그치?"

"까악."

우리 옆에서 같이 밥을 먹던 하얀 까마귀가 내 말을 알아듣고 대답했다. 역시 똑똑해.

어? 알비 삐지지 마.

"누님, 그런데 매형에게 누님의 능력은 아직 말씀 안 하셨습니까?"

"어. 아직. 일단 내 신분도 말 못했는 걸."

내가 비스가의 사생아인 것도 말 못했는데, 내가 남들과 다르다는 걸 어떻게 말하겠어?

"어제 제가, 음 비 전하의 활약을 좀 흘렸는데 황태자가 별말 안 했어요?"

"글쎄. 다른 일들이 많아서 못 들은 건지, 모르는 척하는 건지. 모르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모르겠어. 말해도 될까?"

나는 아직 불안했다. 카일이 나를 사랑한다 해서 눈 앞의 두 기사들처럼 편견 없이 날 봐준다는 보장이 없으니까.

아니, 얘들은 내 능력의 추종자니까 좋아하는 거지.

"불안하십니까? 다른 사람들처럼 황태자께서 누님을 불길하다 여길까 봐요? 하지만 제가 아는 누님의 힘은 절대 저주받거나 불길한 것이 아닙니다. 녹음을 짙게 하고, 시들어 버린 식물을 되살려 풍요롭게 하는 것이 어찌 저주받은 힘입니까? 그런 누님을 맹수조차 사랑하는 것이 왜 불길한 일입니까? 그저 누님은 지금껏 그 힘으로 다른 힘없는 생명들을 살리려고만 하지 않았습니까?"

"꼭 그런 일만 있진 않았잖아."

"누님의 주변에서 일어났던 괴이한 죽음이오? 그게 어찌 누님의 잘못입니까? 누님이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잖습니까? 게다가 그때 화재가 난 이후로는 그런 일도 없었고요."

그야, 내가 더ㅇ이상 남들을 미워하지 않으려고. 저주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으니까.

설령 내가 직접 사람들을 불에 태우거나 얼려 죽인 것은 아니더라도 관계가 있는 것은 확실한 것 같았다.

하나같이 내 미움을 받은 사람들이 죽었기 때문이었다.

"황태자가 그 힘을 불길하다 생각하고 배척하면 황궁에서 뛰쳐나가면 되죠. 뭐가 문제에요?"

프리케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자기 일 아니라고 막말하냐?

그렇게 단순한 문제라면 좋겠지만. 나는 황궁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카일의 곁을 떠날 수 없었다.

"나는 말이야, 카일에게 외면받고 싶지 않아... 그런데 사실, 나 같은 게 카일 곁에서 황태자비로 있는 게 맞는지 모르겠어."

"누님!!! 누님은 유서 깊은 비스가의 장녀이십니다!!! 그리고 이미 황태자비로써 걸맞은 행보를 보이고 계시지 않습니까? 지난여름 누님의 공으로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목숨을 구했는데요! 다들 누님을 칭송한단 말입니다!"

"제 눈에는 세상 그 어떤 여인보다 고귀하십니다!"

자기 일처럼 흥분해서 외쳐주는 두 사람 때문에 따뜻한 마음이 가슴속에 가득 찼다.

"둘 다 고마워, 하지만 진실을 알면 세상사람들은 그렇게 보지 않을거야. 게다가 아버지 조차도 날 숨기고 사셨는데 뭘."

내 말에 알리페르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제 아버지를 닮은 짙은 에메랄드빛 눈동자로 나를 뚫어져라 보았다.

저 눈빛은 연민일까?

"누님, 아버지에 대한 오해가 깊으신 줄은 알았지만, 하아. 얼른 두 분이서 대화를 나누셔야겠습니다."

어...? 불편한데, 안 하면 안 돼? 으윽... 저 눈빛. 진짜!! 할게. 알았어. 알겠다고.

"어, 그러도록 노력할게."

"오전에 뵙고 왔는데 걱정 많이 하셨단 말입니다."

"언제부터 내 걱정을 했다고..."

"누님!"

윽, 알았어. 나한테 이집 식구들은 여러모로 힘들어.

"그리고, 매형께도 꼭, 말씀드리는 겁니다. 알았죠?"

"으응. 그러도록 해볼게."

백년해로하다 죽기 직전에 말하면 안 되겠니? 자신 없는데...

"참, 프리케, 너 오늘 저녁에 테일러경이랑 대련하기로 했다며?"

"어찌 아셨습니까?"

"시녀들한테 소문 쫙 났던데? 테일러경을 추종하는 시녀들이 많거든."

"훗, 짓밟아버려야지."

"그래 프리케. 비스 기사단의 명예를 걸고 싸워라. 지면 쫓겨날 줄 알아."

"카일이 너 지면 내 호위 자리에서 자를 거라고 했다던데?"

"윽, 그 황태자 새..."

야, 너 그러다 황족 모독죄로 끌려가도 나 책임 안 진다!

"꼭 이길 겁니다. 이겨서 비 전하 곁에 남을 거고, 황태자에게도 도전할 거라고요. 비 전하는 저 응원하실 거죠?"

"난 중립이야."

"너무 하십니다!!"

그래 일단, 복잡한 문제는 다음에 생각하자. 혹시나 들켰다 해도 카일이 날 버리진 않을 거야. 아마도...

"참. 펠, 나 어제 갔다 온 시찰. 루카스 보좌관이 하고 싶은 일 있으면 마음껏 정리해보라는데 보고서 쓰는 것 도와줄래?"

"물론입니다. 누님을 위해서라면 뭐든지요."

"저도 돕겠습니다."

"프리케경이 이런 일 할 수 있어요?"

"무시하지 마십시오."

네가 몸만 쓰는 기사인 줄 알았지. 미안. 네가 도와준 다니 마음껏 굴려주마.

일단 오늘은 가서 본 것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개선책을 쓰는 것이었다. 오래 걸리는 일은 아니니까 금방 끝내고 쉬자.

그나저나 카일은 일 잘하고 있나? 시킨 대로 하고 있겠지? 후궁 문제, 싫다고 나랑 의논 한대로 안 하고, 깽판 놓고 있는 거 아닌가 몰라. 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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