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태자비의 대역으로 살아남기-60화 (60/126)

61화. 데뷔탕트 - 후궁 간택연. (2)

2018.06.06.

소드마스터의 청력에 관한 내 질문에 일부 영애들의 표정이 굳는 것이 보였다. 응? 얼굴 굳은 것들이 제법 된다?

저 많은 영애들이 다 같이 플로랄 영애를 괴롭힌 건 설마 아닐 테고, 뭐지? 내 욕이라도 실컷 했니?

예전에는 응접실의 두꺼운 문이 방음이 되어 못 듣는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내가 순진했었지. 하하하.

요즘의 카일의 행태를 보면 아니었다. 분명 광역 범위로 작용했다.

쳇, 아무리 생각해도 후작부인이 나 협박할 때 내 정체나 이것저것 다 듣고도 모르는 척 하고 있었던 거야.

그렇게 날 안심시켜 놓고 위로해주고 멋진 남자인 척 한 거였지.

하긴, 그래서 더 고맙고 카일을 사랑하게 된 거지만. 우리 남편 작전이 아주 잘 먹힌 것이다. 결국 내가 홀라당 넘어갔으니까. 이 치밀한 남자.

"물론입니다. 혹시나 비 전하께 해를 획책하는 자가 있을까 하여 모든 기감을 열고 듣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와인을 끼얹은 영애가 덜덜덜 떨기 시작했다. 안쓰러워라. 분명 이용당했겠지? 딱 봐도 이름 없는 집안의 영애인데...

"그럼, 혹시 지금 일어난 일이 누구의 소행인지도 들었나요?"

"비 전하. 제가, 제가 플로랄 영애가 두 분 전하께, 관심받는 것을 시, 시기했습니다. 무례를 저지르고 연회장의 분위기를 엉망으로 만들었으니 제게 벌을 내려주세요."

영애는 떨면서도 끝까지 자신의 탓이라는 말을 했다. 눈빛은 그게 아니면서, 체념, 공포가 뒤섞여 있었다.

아마 이 일을 지시한 영애에게 불똥이 튀면 저 영애나 영애의 집안에 해를 끼치겠다 협박했을지도 모르겠다. 나중에 따로 챙겨야 하려나?

모든 것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고 마무리를 지으려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나쁜 짓을 시키고 자신들은 뒤에서 숨은 진짜 범인들을 용서하기 싫어졌다.

"프리케, 저 영애의 말이 사실인가요?"

"영애의 잔에 포도주를 가득 부어준 영애는 따로 있었습니다. 지시를 내린 영애도 따로 있었고요."

슬쩍 플로랄 영애를 쳐다보며 미안한 표정을 짓던 프리케가 말을 이었다.

"플로랄 영애 같은 괴짜가 황태자 전하의 후궁이 되면 안 된다고 험담을 하더군요. 그러면서 저런 영애를 챙기시는 비 전하께 내궁의 주인이 되기에 격이 떨어진다 모욕도 하였습니다."

누가 진짜 격이 떨어지는지 모르겠네.

프리케의 말에 연회장은 침묵과 경악이 내려앉았다. 다들 진짜 프리케가 그런 소리를 들었나 믿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그런 한편 황족을 모욕한 간 큰 영애가 누군지 궁금한 모양이었다.

그래, 그럼 이제 격이 높으신 아가씨의 고상한 얼굴을 확인할 시간인가?

"그 영애들을 추려낼 수 있나요?"

프리케는 망설임 없이 세 명의 영애들을 골라냈다. 그리고 휴게실에 가장 주도한 영애가 있다 했다.

세 명의 영애는 바로 나와 카일 앞에 끌려왔다. 무릎을 꿇릴까? 말까?

내 욕했다고 무릎 꿇리는 것은 너무 속 좁아 보이겠지?

휴게실에 있다는 영애도 시종들의 손에 의해 끌려왔다. 그녀는 걸어오는 동안 고귀한 자신의 몸에 어딜 감히 손을 대려는 것이냐는 표정이었다.

이미 네가 후궁, 아니 황태자비라도 된 것 같은 표정이네?

하지만 심각한 분위기와 제 수족 같은 영애들이 고개 숙이고 떨고 있는 모습에 눈치를 챈 것인지 위세가 조금 수그러들었다.

그런 와중에 플로랄 영애가 서있는 바닥에 남은 와인 흔적과 멀쩡한 그녀의 모습을 이해 못하겠다는 듯 쳐다봤다.

카일은 아무 말 없이 이 상황을 보고만 있었다.

"황족 모독죄의 처벌은 어찌 되죠?"

"죄의 경중에 따라 사형이나, 구금 또는 가택 연금이 가능합니다."

볼라드 공작부인의 말에 영애들은 벌벌 떨기 시작했다.

"아, 아니에요. 저희는 그런 말을 한적 없어요."

"황족 모독이라니요? 아닙니다."

"저, 기사가 거짓말을 하는 거예요. 우리 중에 후궁이 유력한 영애가 있는 것을 알고 저희를 모욕하려는 거라고요."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아, 얘들 호구조사 안 해도 황후 쪽 아이들이구나. 어제 황후랑 있었던 것 같기도 해.

아까 휴게실에 간 황후도 이만큼 소란이 일었으니 나타날 때도 됐는데?

"도대체 누가 나의 후궁이 된다는 거지?"

카일의 낮고 서늘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저, 저기 드미트리 영애의 미모며, 지성이며, 고귀한 핏줄이... 게다가 황후께서 며느리 삼고 싶다고..."

"여기에 나의 비보다 미모와, 지성과, 고귀한 혈통, 그 어느 것도 뛰어난 영애가 어딨다는 거지?"

저기, 남편님, 사람들도 많은데 오글거리니까 적당히요.

시종일관 심각한 표정이었던 프리케 마저 고개를 돌려버렸다. 볼라드 공작부인도, 루시엘라 영애도.

아악, 부끄럽게!!

"그리고 황태자 비의 기사가 거짓말을 한다고?"

"이, 이렇게 시끄러운 곳에서 들릴 리가 없잖아요."

"황후 폐하의 휴게실에서 황태자 전하의 눈에 띄기 위해 의상을 손보고 있었지요. 영애는?"

드미트리 후작영애의 변명에 프리케가 팍 인상을 구기며 말을 쏟아냈다.

"그래서 아까는 가슴을 가리던 레이스를 걷어내고 거기에 금가루를 뿌리셨고요. 황후께서 안 되면 육체적인 매력을 보여야 한다고 해서 사향주머니도 차고 나오지 않았습니까?"

야, 너 그렇게 멀리에서 나는 소리를 듣고 그러냐?? 프리케가 저 정도면 카일은? 하아, 그동안 내게 진정한 사생활은 없었던 것인가?

프리케의 지적에 영애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랐다.

드미트리 후작 영애. 확실히 예쁘고, 관능적이긴 했다. 아까 봤을 때보다 노출이 조금 더 심해졌긴 하네.

"무슨 말씀인가요? 어떻게 홀에서 멀린 떨어진 곳에서 나는 소리가 들린단 말이에요?"

"혹시나 비 전하께 해를 끼칠 궁리를 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복도로 나가 주의 깊게 듣고 있었습니다."

드미트리 영애는 끝까지 아니라고 우겼다.

"들었으면 어째서 막지 않은 거죠?"

드미트리 영애가 끝까지 발악하며 외쳤다. 프리케는 살짝 어깨를 들썩이며 별것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제 호위 대상이 아닌 분에게 일어나는 일은 막을 이유가 없습니다."

응? 내가 왜 대신 플로랄 영애한테 미안해지냐? 그리고 미리 언질 줬음 내가 뒤집어쓰고 더 난장판 만들 수 있었다. 좀 아쉽군.

그런데, 다들 잊고 있는 것 같은데, 여기에 소드마스터가 한 명 더 있는데요? 그것도 대륙 최강의 소드마스터 일걸요?

"영애, 프리케 경의 말을 인정 못 하나 보군. 잊고 있나 본대, 이 제국에서 가장 마나를 가득 품고 있는 소드마스터는 나야. 나도 그대가 나의 비를 모욕하는 사실을 똑똑히 들었거든?"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태자의 말이었다. 더 이상 거짓말 할 배짱은 없겠지?

"나의 아름다운 비의 외모를 뒷골목의 몸 파는 여자에 비교한 것도 들었다. 또 교양이 부족해 사교계에 나오지 못하고 은둔한다는 말도 하더군. 나를 뭐, 미약을 써서 유혹 한 것은 아니겠냐고?"

카일의 목소리가 점차 낮게 깔리며 서늘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먼저 회임해서 나의 비를 쫓아내고 미래의 황후가 되겠다는 당찬 포부도 들었지. 내가 듣다가 몇 번이고 네 목을 조르고 싶었는지 모를 거야."

우와! 좀 심하네. 우리 카일 완전히 빡쳤잖아. 저렇게 살기를 뿜어대다니!!

나야 뭐, 평생 저주받은 마녀 괴물 소리를 듣고 살았었다. 그래서인지 타격이 크진 않았다. 그래도 기분이 나쁘긴 하네.

결국 영애는 카일의 살기를 받아내지 못하고 주저앉고 말았다. 실례를 안 한 것만으로도 영애의 정신력을 높게 사도록 하죠.

그러게 차라리 잘못했다고 싹싹 빌지. 왜 그랬대?

"황태자, 황태자 비. 이제 막 데뷔한 영애의 실수이니 그만 용서하는 것이 어떠하겠느냐?"

오, 진짜 배후 등장하셨군요. 생각보다 너무 늦으셨습니다. 이미 우리는 원하는 것을 다 얻은 듯해요.

"아리엘, 얼른 사과하거라."

황후의 말에 드미트리 영애는 후들거리는 몸을 일으키고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기 시작했다.

철딱서니 없는 아이를 혼낼 목적은 아니었다. 그런데 하는 꼴이 사교계에서 사고 많이 치고 다니겠네?

아니, 오늘 이만큼 수모를 겪었는데 설마 또 사교계에 나타날까? 대부분 이렇게 데뷔 때 망신당하면 두문불출하던데.

콘스탄트 영애급의 정신력이라면 가능하려나? 하하. 혼처도 구하기 힘들겠다. 외국으로 시집가야 할지도 몰라.

"영애, 사과는 플로랄 영애에게 해야지요? 그녀는 전하가 안 계셨으면 크게 수모를 겪은 채로 돌아갈 뻔했어요."

나는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그녀를 훈계했다.

"아무도 없으면 나라님 욕도 한다는데, 내게 준 모욕에 나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아요. 그러니 플로랄 영애에게 끼친 피해에 대해 사과하도록 하세요."

아니 솔직히 마음 상하지만, 이미 복수는 끝난 것 같아서 자애로운 척, 쿨한 척 하는 거야.

내 말에 샤프롱으로 따라온 귀부인들이 온화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지메이킹이란, 이렇게 하는 거지. 호호.

드미트리 영애는 자존심이 상한 표정으로 플로랄 영애에게 사과를 했다. 그녀가 사과하자 그녀의 친구들과 와인을 쏟은 영애도 사과했다.

"어차피 진실은 늘 드러나게 되어있답니다. 허니 앞으로는 상대적 약자를 이용해 남을 괴롭히는 짓은 하지 말아요. 나와 카일이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너희들이 협박한 영애를 나중에라도 괴롭히다 걸리면 용서 안 하겠다고 말했다. 그것도 아주 엄격하고 근엄하며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했다.

한마디로 나의 협박이었다. 결국에는 우리가 더 힘 세다고! 잘 알아들었으면 좋겠어.

플로랄 영애가 사과를 받아들여주고 혼란은 끝나가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이걸로 끝낼 순 없지. 이제 하이라이트라고.

"폐하, 오신 김에 오늘 온 영애들을 살펴 본 결과를 말씀드릴까 합니다."

순식간에 영애들의 눈이 초롱 해졌다. 어머 아까 얼굴 굳었던 소녀들, 다 내 욕해서 그랬던 것 아니야?

그래놓고 기대하다니, 조금 웃기네.

"나의 후궁이 될 자는, 현숙하고 모범적인 황태자비인 아르세이아를 존경하고 보좌해야 합니다."

카일에게서 좌중을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흘러나왔다. 그 와중에 내 칭찬을 끼워 넣다니!

"오늘 온 영애들은 시기와 질투에 눈이 멀었더군요. 모두들 후궁 간택에 나온 황태자비를 험담하고, 시기하는 소리에 귀가 아플 지경이었습니다."

진짜예요? 우와 나 오늘 욕 많이 먹어서 진짜 오래 살겠다.

"이 자리에는 황태자의 후궁에 어울리는 영애가 없었습니다."

조금 전까지 기대에 찬 표정을 짓던 영애들은 순식간에 실망과 부끄러운 얼굴이 되었다. 눈물을 흘리는 영애도 있었다.

우리 남편이 그렇게도 좋았니? 하긴, 여자들 여럿 울리게 생기긴 했지. 인정.

"안타깝게도 이 연회장의 어떤 영애도 저의 후궁이 되진 못하겠군요."

에? 샤프롱으로 따라온 콘스탄트 공녀가 만족스럽다는 듯이 씩 웃고 있었다. 쟤 무서워. 자기가 못 가지면 남도 가지지 못한다는 의미인가?

하지만 황후는 이를 듣고 가만히 있진 않았다.

"그래서 후궁을 들이지 않겠단 뜻인가? 황태자! 분명 간택연을 열고 후궁을 선발하겠다 대신들 앞에서 약조하지 않았나?"

"했지요. 그런데, 잊으셨나 본 대... 황태자비 간택도 4번째 만에 그 주인을 찾지 않았습니까? 다음 신년제 데뷔탕트때에는 괜찮은 영애들이 나왔으면 좋겠군요."

카일은 말을 마치고 내 손을 잡고 밖으로 나와 버렸다.

우리 남편 말 잘한다!!

카일과 내 발걸음은 너무도 발랄했다. 둘 다 연회장을 벗어나자마자 크게 웃음을 터뜨릴 만큼.

"아하하하하하. 황후 표정 봤어??"

"그럼요. 그분이 그렇게 표정 관리 못하는 모습 처음이에요. 그 표정 초상화로 남겼어야 했는데 아까워요."

"프리케경. 수고했어. 꽤 쓸만한데?"

"두 분께 도움이 됐다니 다행입니다."

프리케도 우리를 따르고 있었다. 카일이 프리케를 대하는 게 예전보다 조금 누그러져서 다행이었다.

탄생연 이후로 저러는 것 같기도 하고. 내가 질투하며 성질낼 때 카일 편 들어줘서 저러나?

나 몰래 둘이서 가끔 대련하는 것도 같긴 한데, 흐으음. 뭐 친해졌음 다행이고.

"아까 그 드미트리인가 뭔가 하는 미친 여자의 목은 진짜 배었어야 했는데."

"오늘 일을 빌미로 후작을 불러다가 이권 하나라도 받아내요."

"그럴까?"

"드미트리 후작령의 북쪽 산맥을 뺏으시죠. 거기 아직 알려지지 않은 루비 광맥이 있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오, 좋은데? 그러자."

응? 프리케, 너 제국 정보를 어찌 그리 잘 알아? 나의 의문 어린 눈빛에 그가 답했다.

"예전에 도망치다가 그 산맥에 잠시 몸을 피한적 있어요. 그때 붉은 원석을 주웠었습니다."

아하, 그렇구나.

"프리케경. 자네가 제 신분을 찾겠다고 하면 언제든 도울 테니 말하게. 세이의 얼마 안 되는 친우이지 않나."

카일, 내 남편은 언제나 자상하고 다정하구나. 늘 내가 좋아하는 것을 먼저 챙겨주고. 사랑스러워라.

"그래서 빨리 제국을 떠나라는 말씀이죠?"

"정확해!!"

"그렇다면 저는 평생 기사로 살렵니다."

하아, 이 유치한 남자들.

뭐, 그래도 말만 저렇게 투닥거리지 사이가 나쁜 것 같진 않으니까. 봐주자.

이제 후궁 문제도 정리됐으니 평화롭겠지? 카일과 알콩달콩 즐겁게 살아야지. 헤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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