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번외편(2)- 그녀의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2018.06.08.
나는 제국에서 가장 귀한 사람 중 하나이다. 그리고 가장 행복한 사람이기도 했다.
"카일룸! 뭐 해요?"
요즘 나만큼이나 바쁜 나의 비, 아르세이아 때문이었다. 이 데피니토르, 아니 대륙, 아니 우주에 나보다 예쁜 아내를 둔 자가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세이 생각하고 있었지."
"뭐예요? 또 일 안 하고 농땡이 친 거예요?"
억울하다. 이건 다 유모와 아바마마 때문이었다. 괜히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해줘가지고는. 내가 조금만 쉬어도 닦달을 했다.
내가 얼마나 바쁜데!! 억울해.
내가 조금 심통 난 표정을 짓자 내 책상 앞에 걸터앉는 모습이... 요염했다.
이런, 아직 할 일이 산더미인데, 곧 알현도 잡혀있고, 죽겠네. 어째서 늘 곁에 있는데도 나는 세이가 매일 고픈 것일까?
"내가 카일 생각 많이 할 테니까 당신은 열심히 일해요."
살며시 내 볼에 뺨을 맞춰오는 게 너무 감질났다. 확 저 빨갛고 도톰한 입술을 지금 훔칠까?
세이는 다음 일정이 뭐더라? 플로랄 영앤가 하는 여자를 만나야 하던가? 다른 여자들도 만나지 말고 나랑만 있음 안 되는 것인가?
최근에 와인색 대신 좀 더 옅은 연지로 바꿨는데, 어째서 더 탐스러워 보이는 것일까? 다른 놈들 못 보게 내가 먹어치워 버리면 안 될까?
"야한 생각하지 마요."
"들켰군."
"당신이 엉큼한 생각하는 건 다 보여요. 거의 매일보다 보니 익숙하네요."
내 속마음을 읽을 수 있다고 좋아하며 웃는 모습이 참 밝아서 좋네.
역시 널 내 곁에 두길 잘했어. 네가 웃으니까 나도 이 지긋한 황궁 생활이 힘든 지 모르겠거든, 아르세이아.
"점심은 플로랄 영애랑 볼라드 공작부인과 먹기로 했어요."
"나는?"
"오늘 당신도 중립파 귀족들 만난다면서요?"
"귀족들이랑 밥 먹으면 나 체해."
나의 억지에 세이는 눈을 가늘게 떴다. 역시 거짓말인 것이 티가 난 모양이었다.
"카일, 투정 부리지 말아요. 대신 오후에 티타임은 당신이랑 할 테니까 시간 비워두고요."
"어, 알았어."
나는 끝까지 투정을 부리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러자 세이는 예쁜 미소로 나를 꼭 끌어안아주었다. 책상에 앉은 그녀였기에 내 얼굴은 자연히 그녀의 포근한 가슴에 닿았다.
으으음. 세이 향기. 그녀에게는 어릴 때부터 신비로운 향이 났다. 은은한 꽃향기도 나고, 또 숲의 냄새가 났다. 어지러운 마음에 안식을 주는 상쾌한 향기.
이 향기가 너무 그리웠는데, 그 긴 세월을 난 어찌 참았었나 몰라.
게다가 세이를 위한다고 했던 행동들이 그녀에게 많은 상처를 주기까지 했지. 조금 더 일찍 세이를 찾아서 보호해줬어야 했는데.
세이가 혼자 감당했어야 했던 시간이 길었다. 그렇게 힘든 시간을 보냈을지 몰랐다. 모든 기억을 지워버리려 했을 만큼 힘들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의사 말 듣지 말고 전부 다 털어놨었으면 그녀의 향기와 더 빨리 가까워질 수 있었을까?
그랬으면 세이는 나에 대한 기억을 되찾을 수 있었을까?
아니야, 그랬으면 세이는 날 사랑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되살려지지 않는 과거는 이미 지나가 버린 바람일 뿐이니까.
그녀가 나에 대한 기억을 찾기 위해 노력하다 애써 지운 기억의 고통을 다시 받길 원하지 않았다. 그녀가 밝아진 것이 기억들을 지워서라고 했다.
기억을 되찾은 대가로 그녀가 불행한 기억에 갇혀 사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차라리 나와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이 나았다.
"세이 냄새 좋다."
"당신 몸에서 나는 향기도 좋아요."
내 머리 위에 짧게 키스를 남긴 그녀는 제 할 일을 하러 떠났다. 그녀가 머물던 책상 주변에는 아직 그녀의 향기가 남아 있었다.
그 향기가 내게 일할 의욕을 불어 넣었다.
"열심히 일하자! 그래야 세이와 데이트를 하지!"
"좋은 생각입니다. 전하. 오늘은 이만큼만 처리하시면 됩니다."
루카스가 내게 산더미 같은 서류를 내밀었다. 이 자식!! 커플 방해꾼인가? 요즘 시니컬 해졌다.
유베르 영애가 처남이랑 연인이 되고 나서 유독 잔소리도 심해졌고, 일거리도 몰아서 줬다.
아니, 예전에 처제를 아르세이아라고 알려줘서 고생을 하게 만든 놈이 루카스 아니었던가? 그래놓고 나한테 성질을 내다니, 이 간땡이 부은 녀석.
그래도 솔로니까 불쌍해서 봐준다.
흠. 이 녀석 마음에도 봄바람이 불어야 날 자유롭게 해 주려나? 아니다. 이놈은 분명 사랑에 빠지면 지가 할 일도 내게 떠넘길 놈이야. 당분간은 더 굴리자.
세이, 기다려. 내가 빨리 일 끝내고 달려갈게.
초인적인 집중력과 정신력으로 업무를 끝냈다. 그런데 빌어먹을 루카스 자식이 날 못 가게 막고 새로운 일감을 주었다.
세이는 내가 땡땡이치는 것을 싫어해서 결국 꾸역꾸역 하다 보니 약속한 시간보다 늦어졌다.
젠장, 요즘 가만있어도 바빠서 데이트를 못했는데! 진짜 황태자고 뭐고 때려치우든가 해야지.
2층 내 집무실에서 약속했던 장소로 날아갔다. 실프, 어서 빨리!! 중급 정령으로 소환했다. 최대한 빨리 날아가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 했다.
"세이!! 늦어서...!"
아, 이런... 나의 사랑스러운 아르세이아는 책을 읽다가 엎드려 잠이 들어 있었다. 아니, 책을 읽던 게 아닌가? 뭔가를 쓰던 건가??
"쉿!"
시녀들이 나를 보고 세이를 깨우려는 것을 저지했다. 그리고 내가 입고 있던 재킷을 그녀의 등에 덮어주었다. 그리고 살며시 의자를 당겨서 세이의 맞은편에 앉았다.
이마가 볼록한 것이 여전히 귀여웠다. 어린 세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정말 귀여웠는데. 동글동글한 얼굴에 양 갈래로 땋은 머리. 작은 입술로 옹알거리던 목소리.
내게 경계심 없이 다가와서, 나에게 새로운 빛을 준 나의 요정.
세이의 기다란 속눈썹은 여전했다. 속눈썹 때문에 생긴 그늘은 아직도 그녀의 슬픈 과거를 보여주는 듯했다.
세이가 더 이상 슬프지 않으려면 할 일이 많았다. 후궁 제도도 빨리 없애야 했고, 그래서 열심히 귀족들을 설득 중이었다.
또 그녀가 가장 그리워하고, 그녀를 가장 아프게 하는 그녀의 어머니를 찾아줘야 했다.
어제 후작과 면담 후 검정개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세이의 어머니를 꼭 구하라고, 그러면 그의 신분도 되찾아주고, 그의 복수도 돕겠다고 굳게 약속했다.
"황태자께서 그렇게 당부하지 않아도 꼭 구해옵니다."
하, 저 건방진 놈. 지가 뭐라고. 좀 좋게 봤더니 어디까지 기어오르는 거야?
그래 저놈이 예전에 세이에게 맹세를 했었댔던가?
"그래. 꼭 그랬음 좋겠군. 내가 가면 더 빠르게 해결되겠지만, 나는 세이 곁을 지켜야 하니까."
녀석의 입이 불만스레 꾹 닫혔다. 그래, 저래야지. 너는 내게 패한 거야. 음하하.
"비 전하는 황태자께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가지셨는데, 왜 전하는 불안해합니까?"
이런, 정곡을 찌르는군. 사실 그녀와 내가 떨어져 지낸 시간이 짧지 않았기에 불안했다. 내가 세이 곁을 지키지 못한 사이 세이를 지킨 것이 저놈이니까. 게다가 세이가 저놈을 케이로 믿는 것 같으니까 불안한 것이었다.
세이는 케이에 대해 단편적인 것만을 기억하는 듯했다. 머리색이라던가...
"불안하지 않아. 단지, 네가 거슬리는 거지."
"그러니 경계 마십시오. 비 전하를 가장 행복하게 하는 사람이 황태자, 당신 아닙니까? 그렇게 경계하지 않아도 그분의 행복을 훼방 놓을 생각은 없습니다."
단호한 루피넬리아의 왕자는 내게 조금은 건방진 미소를 지었다.
"도대체, 네가 세이에게 해줬다는 첫 번째 맹세는 뭐야?"
"글쎄요?"
뭐지? 저 기분 나쁜 미소는? 내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세이의 소중한 친구라서 봐주려고 했더니, 아주 기분이 가라앉아 버렸다.
"그 분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돌아올 때까지만이라도 곁에서 지키겠다 했습니다. 그때도 거절하셨지만... 아니, 제 입장에서는 완료한 맹세인 것 같네요."
검정개는 내 어깨를 툭툭치며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비 전하를 행복하게 할 사람이 당신뿐이라는 게, 조금 분하네요."
* * *
그놈의 말을 듣고 나서야 조금 남아 있던 티끌 같은 불안감이 사라졌다. 나는 그녀의 마음속에 항상 머물러 있었구나.
햇빛도, 바람도 많이 서늘해졌다. 감기 들려나? 살리맨더! 나의 비가 감기 들지 않게 지켜줘.
나의 부름에 작은 불꽃이 그녀의 주변을 감싸 안는 것이 보였다.
"우웅."
변화를 느꼈는지 살짝 칭얼대는 모습도 귀여웠다. 어? 잠꼬대인가?
"카이이이일, 헤에에에"
이젠 꿈속에서도 나만 보이는 건가? 하하, 기분 좋아. 세이의 모든 순간에 내가 함께하고 있다는 것이 너무 감동적이었다.
그녀가 조금 더 편히 잘 수 있도록 자세를 바꿔주기로 했다. 내 허벅지에 눕혀야지.
그녀 옆의 의자에 앉은 뒤 조심스레 그녀를 내 다리 위에 눕혔다. 시녀들은 그녀가 편히 누울 수 있게 의자를 더 가져와 그녀의 다리를 챙겨주었다.
담요를 덮어주고 나는 내 턱 아래에서 고이 잠든 나의 여신의 얼굴을 감상했다. 편해진 자세로 내게 기대어 왔다. 내가 곁에 있는 것을 아는 듯했다.
흠, 그런데 아까 쓰던 게 뭐였지? 테이블 위에 있던 작은 책은 아직 그 자리에 있었다.
궁금했다. 나는 그녀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싶고, 알아야 직성이 풀렸다. 알고 있다. 이것이 지나친 집착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궁금하잖아."
슬금슬금 손을 뻗어 작은 책인지 노트인지를 집었다. 그 속에는 정갈하지만 힘 있는 필체로 쓰인 세이의 일기가 적혀있었다.
일기라니!! 이거 걸리면 각방 각인데!!
조심스레 소리가 나지 않게 한 페이지를 넘겼다. 거기에는 내가 세이에게 해줬던 일들이 첫 장부터 가득 새겨져 있었다.
내가 그녀에게 초야를 미루기로 했던일, 그녀와 숨바꼭질을 한 일, 분수대에서 내 과거를 이야기했던 날 밤.
그녀와 나의 추억으로 가득 찬 일기에 내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그녀가 이렇게나 나와의 기억을 간직하려고 했는지 몰랐다.
"으으음, 카일?"
화들짝 놀란 나는 황급히 책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결국 그 모습을 들키고 말았다.
"뭐예요!! 누구 마음대로 내 일기장을 훔쳐봐요!!!"
상체를 일으킨 세이는 분노로 이글거리는 푸른 눈동자를 내게 쏘았다.
"저, 저기, 그러니까..."
"이씨, 부끄럽게! 내가 막 고백도 써놓고 했는데!! 다 봤어요?"
"으응. 그니까 지금 내 얼굴이 이렇게 빨갛지."
다 봤어 세이, 네가 내 얼굴 어디가 그렇게 좋은지, 내 몸의 어디가 마음에 드는지, 많이도 써 놨더라.
"하아... 당신 나에 대해 모르는 것 없는 거, 이런 식으로 스토킹 한 거죠?"
아니라고는 말 못하겠는데 말하면 혼날 것 같았다. 묵비권을 행사해야 하나?
"어휴, 내가 진짜, 남편 잘못 만나서 사생활도 없고 밤에 잠도 못 자고."
그래도 좋다고 써 놓은 것도 이미 봤지.
"그래서 나 사랑하잖아. 내가 너밖에 몰라서."
내 말에 세이는 꺄르르 웃어주었다. 역시 내가 제일 좋지?
"이거, 원래는 스타티나가 돌아오면 보라고 쓴 거였어요. 이제는 필요 없어졌지만."
아, 처제는 내가 안전한 곳에서 잘 지키고 있는데. 처제 걱정도 많이 하겠지? 후작부인만 치우면 처제도 마음껏 왕래할 수 있을 테니 조금만 참아줘.
"그런데?"
"당신이 처음부터 나만 좋아한 거 알고부터는... 막, 내가 당신한테 하고 싶은 부끄러운 말들 써놨단 말이에요!"
"훔쳐보기 잘했네. 끝까지 못 들을뻔 한 말이잖아."
볼에 바람을 가득 채운 세이는 불만스럽게 날 쳐다봤다. 그러더니 갑자기 내 이마에 자신의 머리를 콩 박았다. 그러더니 내 옷의 목깃을 콱 잡아챘다.
"당신 일기장도 내놔요."
"없어, 그런 거."
"그럼 속마음을 털어놓던가."
속마음?
"너의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남자는 단 하나뿐이었음 좋겠어. 나 말고는 그 누구도 네 마음에 들어가게 두지 않을 거야. 그건 내 마음도 마찬가지고."
만족스러운 표정의 그녀가 내 멱살을 잡은 채로 내게 키스를 해왔다. 점점 박력이 넘치는 내 아내의 모습에 새삼 놀랐다.
도발을 해왔으면 응해주는 것이 인지상정이지. 세이, 후회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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