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태자비의 대역으로 살아남기-67화 (67/126)

68화. 그물을 쳐야 고기를 잡지.(1)

2018.06.14.

다음 날 아침, 카일은 귀족들을 소환해 회의를 열었다.

나는 아침부터 기사들과 시중인들을 모아 펠과 면담을 시작했다. 대상자는 나의 친정 나들이 때의 수행원들이었다.

에이린을 제외하고는 시녀나 하녀는 없었다. 기사들과 소수의 시종과 요리사였다.

"요즘 황태자 전하와 나를 수행하느라 고생이 많았네. 내 그대들의 노고를 치하하고자 불렀으니 많이들 드시게."

아침부터 차랑 다과를 대접받게 된 기사들과 시종들은 조금 당황한 모습들이었다.

당신들도 당황스럽겠지만, 나도 당황스럽답니다. 카일의 충실한 수하들 중에 배신자가 있을 수도 있다니. 하아...

"누님, 누님은 너무 너그러우십니다. 충실한 기사와 시종의 탈을 쓰고 주인들의 정보를 빼돌린 이가 있을지도 모르는데요."

우리 펠, 연기 잘하는구나! 알리페르와 나는 이들의 충성심을 테스트하기로 했다. 다수의 기사들은 카일에게 충성하고 있을 것이었다. 그 점을 최대한 활용해야지.

"어머, 펠. 설마 이들 중에 나의 안 좋은 모습을 떠들고 다닌 이들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기사들과 황태자궁의 시종은 모두들 천만금보다 무거운 입을 가지고 있는 것 아니었어?"

나는 잠시 말을 끊고 사람들을 돌아봤다. 그리고 짐짓 슬픈척하면서 눈꼬리를 내리며 말을 이었다.

"우리 친정의 비스 기사단에서는 그런 일을 상상조차 할 수 없잖아."

비스 기사단이 충직한 것은 맞으니까. 다른 기사단과의 비교는 황태자 근위 기사단의 자존심을 긁어 놓기 쉬웠다.

"비 전하!! 저희 근위 기사단은 절대 주인을 배신하지 않습니다!!"

"맞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주군이신 황태자 전하와 비 전하의 신상에 관한 것을 밖으로 발설 한 적 없습니다!"

근육들보다 더 성난 표정으로 자신들의 억울함을 주장하는 기사들의 얼굴은 절실했다.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믿을 수 있을 만큼 간절했다.

"그렇지? 그날 밤에 나 때문에 황태자께서 수행했던 기사들에게 고된 훈련을 시켰다기에... 혹시나 내게 서운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나 않을까 염려도 되고..."

"무슨 말씀이십니까? 비 전하가 돌아오신 뒤로 황태자께서 얼마나 말랑말랑해지셨는데요!"

"저희가 편해졌습니다!"

"황태자궁이 밝아졌어요. 살 것 같다 말입니다."

흐음. 역시나 우리 카일이 기사들도 마구 굴리고 살았어. 착하게 좀 살지. 뭐 덕분에 나는 황태자를 다스린 황태자비로 황궁에서 인기는 높아지고 있었다.

"그럼 도대체 누가, 나의 아픔을 다른 이들에게 퍼뜨렸을까? 하아, 나는 도대체 누구를 믿어야 하나? 이래서야 내가 계속 황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내가 다치거나 죽으면 우리 카일이 과거의 모습으로 돌아갈 텐데..."

조금은 과장된 몸짓으로 슬픔을 표현하자 기사들이 더 난리가 났다. 아 웃겨. 다들 내가 사라지면 카일이 자신들을 다시 얼마나 괴롭힐지 아는 기색이었다.

그래, 알겠으면 나한테 잘하라고!

"저희가 어떤 놈이 입을 나불대고 다녔는지 샅샅이 뒤져서 찾아오겠습니다."

"분명 술 처먹고 실수를 한 것이겠지요."

"기사들이 자주 다니는 술집을 뒤지면 나올 겁니다."

"꼭 술집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누님. 기사들과 시종들이 접촉한 모든 외부 사람들을 다 확인해야 합니다."

펠의 말에 기사들은 맞장구치면서 그날 자리에 있던 시종들과 요리사들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다들 공감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와중에 유독 표정이 밝지 않은 시종이 하나 있었다. 억지로 웃는 것 같네?

기사들과 시종들에게 그간의 노고를 치하하며 남은 티타임을 가졌다. 그리고 곧 해산을 시켰다.

끝까지 나를 찬양해 마지않는구나. 이놈의 인기란...

이 얼마나 찬란하게 부담스러운 황궁 생활인가!! 나중에 카일에게 웃전에 대한 지난친 찬양과 아부를 금지하는 법 만들어 달라고 해야 할 지경이야!

카일이 평소에 좀 친절하고 따뜻하게 살았으면 내가 이런 민망한 소리 안 들을 텐데!!

"자네는 잠시 남았으면 하는데? 심부름을 할게 있어서 말이야."

역시 펠도 나와 같은 이를 주시하고 있었다. 혈육이라 텔레파시가 잘 통하는 모양이야.

"네? 네, 소후작님. 하명하십시오."

"황태자 전하께 보내는 서신이다. 세작의 윤곽이 잡힌듯하니 속히 확인하시라 전해드리고 답장을 받아오너라."

"예, 알겠습니다."

펠은 신중한 자세로 서신을 봉인했다. 시종은 살짝 긴장된 표정으로 펠이 내미는 서신을 받아 들었다.

그 서신을 확인한 시종은 부지런한 걸음으로 우리 눈앞에서 사라졌다.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그럴 가능성은 낮아 보이네요."

알리페르의 표정도 편치 않아 보였다. 카일과 돌아가신 아주버님이 배신당한 일은 널리 알려져 있었으니 펠도 카일을 염려하는 모양이었다.

"프리케가 없어서 너 혼자 계속 내 호위를 서야 하는데 힘들지 않아?"

"누님을 독점해서 호위하니 좋습니다. 유베르 영애와 만남을 가질 기회도 늘었지 않습니까?"

아 참, 너네 궁내 커플이지?? 직장 내 사사로운 연애는 금지시켜 버릴까?

흠흠, 뭐 우리 부부가 하도 꽁냥꽁냥 해대니 다들 연애 붐이 일긴했지.

"프리케가 얼른 돌아오면 좋겠... 아, 미안해."

나의 어머니가 돌아오면 너의 어머니가 내쫓기는 건데, 내가 혼자 좋아해 버렸어. 미안 펠.

"누님, 걱정 마십시오. 제 어머니는... 죗값을 받는 것입니다. 자신이 갖고 싶은 것을 위해 타인을 협박하고 위협했으며, 아버지를 약물로 속여 임신하지 않았습니까?"

알리페르의 표정에서 많은 어둠이 느껴졌다. 죄책감인 것 같기도 하고, 절망도 엿보였다.

"지은 죄만큼 벌을 받으셔야지요. 어쩌면 저와 작은 누이야말로 저주받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존재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누님의 어머니와 누님의 삶을 불행하게 만들었으니까요.”

"무슨 소리야!! 너랑 스타티나가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웃으면서 이 자리에 있는 건데! 너희는 내게 소중한 동생이야. 정말 정말로."

알리페르의 손을 꽉 잡고 크게 외쳤다. 진심이었다. 예전의 바보같이 동생들의 마음을 몰랐던 어리석은 나는 동생들을 미워하고 원망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내게 카일만큼이나 소중한 혈육들이었다.

"나는 펠과 스타티나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네 어머니의 죄가 밝혀져서 혹시라도 네 평판이 나빠지거나 해가 되는 것은 싫어. 네가, 네가 원한다면 나는... 마님을 용서해 줄 수도 있어."

내 말에 알리페르의 눈이 아주 동그래졌다. 그러더니 바로 눈가를 휘어 희미하게 웃으며 손을 들어 내 머리카락을 자신의 손가락에 휘어 감았다.

"누님. 마음만으로도 감사해요. 제가 이래서 누님을 좋아하는 거랍니다. 하지만 제 어머니는, 자신의 과오를 바로잡고 죄의 무게를 느끼셔야 합니다."

알리페르는 제 손가락에 휘어감은 머리카락을 살짝 풀어내며 쓸어내렸다. 그리고 덤덤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여기서 더 큰 잘못을 저지르지만 않는다면 이혼을 당하는 것으로 끝나겠지요. 저야 어차피 비스가의 하나뿐인 후계자이니 제 걱정은 마십시오. 알았지요? 스타티나 누님도 그것을 바라고 떠난 거니까, 심려 마세요."

알리페르가 누구보다 든든한 기사라는 느낌이 들었다. 강인한 마음, 흔들리지 않는 의지.

아직 알리페르는 프리케보다는 실력이 모자란다고 했다. 하지만 곧 알리페르도 소드마스터가 되고, 비스가를 이끄는 기사가 될 것이었다. 누구보다도 멋진 기사이자 가주가 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자, 지금 즈음이면 미끼를 물었을 것 같은데요? 그럼 이제 사냥을 하러 가 볼까요?"

알리페르가 내민 손을 잡고 카일이 있을 창공의 관으로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빠른 속도로 이동하기 위해 말을 타기로 했다. 알리페르와 나는 각자의 말을 타고 황궁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잘생긴 우리 펠의 승마 모습에 수많은 시녀들과 하녀들이 넋을 잃고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우리 펠은 아무나한테 못 주거든! 에이린도 내 시험에 통과해야 돼! 흥!!

"밤하늘을 밝히는 작은 별, 황태자비 전하께 인사드립니다."

창공의 관 앞을 지키던 관료들이 인사해 왔다. 다 비켜요. 나 바빠.

"황태자께서는 어디 계시지?"

"회의장 안에 계십니다."

"내가 보낸 심부름꾼은?"

"방금 들어갔습니다."

"회의장에 다른 심부름꾼은 없었나?"

시종은 나에게 오늘 이 회의장을 드나든 사람들의 명단을 소상히 알려주었다. 예상대로였다.

좋아! 이제 시작해보자. 나는 당당한 황태자비의 자태로 창공의 관으로 들어갔다. 어제의 황태자비 부부 습격사건으로 회의장의 분위기는 심각했다.

카일이 있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또 한 번의 습격 소식 때문인지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셨다.

저 괜찮아요. 걱정 마세요.

콘스탄트 공작의 못마땅한 표정과 몬테 공작의 불만스러운 표정은 여전했다. 뭐, 어쩔 건데? 저기 내 든든한 빽이 당신들 노려보고 있거든요?? 흥!

"황태자비 전하, 이곳은 국정을 다스리는 회의장입니다. 여인이 사사로이 드나들며 소꿉놀이를 하는 곳이 아닙니다."

저자가 그때 그 황후의 시녀인 소피? 그녀의 양아버지인 유피테르 백작이던가? 황후파의 끄나풀, 콘스탄트 공작의 온갖 더러운 일을 대신한다던 자였다.

"내가 찾아온 것은 어제 습격사건과 관련하여 황족의 보안 정보를 빼돌린 자와, 그 정보를 받아 나를 위태롭게 한 반역자를 추려내기 위함이오."

어지간하면 귀족들에게 존중의 의미로 존댓말을 쓰던 내가 하대를 하자 유피테르 백작의 얼굴이 굳었다.

왜? 나는 황족이고, 너는 일개 백작이야. 불만 있으면 네가 황족 하든가!

"백작, 황태자비는 나의 지시를 받고 세작들을 조사하고 있었네. 그러니 다시 한번 토를 달면 내 명령을 무시하는 것으로 알지. 비, 증거를 잡았나 본데, 발언해도 좋소."

카일이 내 편을 들어주자 백작은 조용히 찌그러졌다. 처음부터 그럴 것이지! 두고 봐 당신!

"비스 소후작, 그자를 잡아다가 내 앞에 무릎을 꿇리게."

으아아아, 그런데 계속 이렇게 말하려니까 소름 돋아. 참자. 이제 강력한 황태자비가 되려면 이 정도 어색함은 무시해야지.

"네! 비 전하!"

아까 내보냈던 시종은 나와 카일 앞에 강제로 무릎이 꺾였다. 안쓰러울 정도로 덜덜 떠는 남자의 모습에 혀차는 소리가 귀족들에게서 흘러나왔다.

"황태자께 내가 전하라는 서신은 전했나?"

"네? 네! 방금 전했습니다."

"당연히 서신의 내용을 읽지는 않았겠지?"

"물론입니다!! 봉인도 잘되어 있었습니다. 전, 전하 아니 그렇습니까?"

"일단 서신의 봉인은 멀쩡했어."

카일은 엄지와 검지로 봉투를 집어 들어 올려 보여줬다. 하지만 우리 세명은 피식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함정을 팠었다. 잘 뜯어지게. 밀랍에 남부 왕국에서 들여온 고무라는 특별한 식물의 진액을 넣어서 조금 말랑하게 만들었다.

아마 특별한 도구를 사용하지 않았어도 쉽게 밀랍을 열었으리라. 저절로 뜯겼을 수도 있고. 그걸 다시 붙이려면 봉인의 밑부분만 살짝 녹이면 됐을 것이다.

"서신을 열지 않았는지 지금 확인해 보도록 하죠."

싱긋 웃는 내 미소에 카일도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우리는 어제 마탑주에게 받은 휴대용 마법등을 꺼냈다.

그리고 서신을 비췄다. 그러자 얼룩덜룩 손자국이 밀랍과 봉투 곳곳에 찍혀 있는 것이 보였다.

"뭡니까?"

유피테르 백작이 다급하게 소리치는 말이 들렸다. 사뿐히 무시해 주마.

카일이 날 대신해서 백작을 향해 서늘하고 무서운 시선을 마구 쏘아 주셨다.

우리 남편의 눈빛이 많이 무서울 텐데? 역시나 조용해졌네? 그럼 이제 설명해 주지.

"봉투 속에는 특별한 꽃가루가 뿌려져 있었네. 이 마법등은 꽃가루에 비추면 이렇게 특별한 빛을 내도록 만들지. 야광 물질이라고 하더군."

카일이 봉투를 집었던 손가락에도 아주 살짝 빛이 났다.

"그런데 말이야. 어째서 이 가루가 봉투에 묻어있는 것일까?"

내가 정말 궁금하다는 말투로 시종을 돌아 보자, 시종의 몸에서 떨림이 크게 증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시종의 손을 마법등으로 비추어주었다.

"어머? 자네 손에도 아주 많이 묻었네?"

"비, 비 전하. 밀랍 봉인이 약해져서 봉투가 살짝 열렸는데 그때 꽃가루가 흘러나왔나 봅니다."

"그래? 봉인은 네가 다시 했나 봐? 지금은 이렇게 잘 닫혀 있는 것을 보면?"

내 말에 시종은 아주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을 긍정했다.

"네, 네!! 만월궁 1층에서 나가는 길에 잠시 양초를 빌려 마저 봉했습니다."

"그러면 봉투를 열어 안을 만진 적이 없다. 이거지?"

"그렇습니다!"

피식, 차갑게 식어버린 비릿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딱 걸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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