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나쁜 소식 중에 반가운 소식. (2)
2018.06.19.
오랜만에 응접실에 프리케와 함께 있었다. 평소 같으면 카일이 나타났겠지만, 오늘은 매우 바쁘신 몸이라 나타나지 못할 것이다.
오전에도 나랑 아버지를 만난다고 시간을 뺏겼으니까. 지금은 자살한 유피테르 백작의 뒤처리도 바쁘고, 어쩔 수 없었다. 특히나 황후쪽의 움직임도 수상해서 카일이 자리를 비우기 힘들었다.
그러니 나 혼자 프리케에게 감사 인사를 해야 했다. 많이 많이 고맙다고 해야지. 항상 받기만 하는데.
"프리케!! 고마워. 너는 매번 날 위해 희생하네."
"그러려고 비 전하의 기사가 된 것 아니겠습니까?"
어깨를 으쓱하며 말하는 프리케였다. 아무렇지 않게, 그저 웃었다. 당연한 일을 했다는 듯이.
저러면 내가 칭찬하기 머쓱하잖아!!
"아직, 내 기사로 안 받아 줬는데?"
"쳇, 호위 기사이지 않습니까?"
"아직 네 소속은 비스 기사단이거든. 내 호위로 임대되어 온 거고."
"우와, 너무하네."
입을 삐죽이는 프리케를 보고 웃음이 터졌다. 프리케도 그러는 날 보고 마냥 웃음을 지어 줄 뿐이었다. 아마도 나에 대한 마음을 점점 정리하고 있는 것이라 믿었다.
내게 프리케라는 친구는 한없이 미안하고 또, 한없이 고마운 존재였다.
좋은 신붓감도 찾아주고, 루피넬리아의 왕족에 걸맞은 신분도 만들어 줘야지.
기왕이면 카일한테 루피넬리아 왕가의 왕위 다툼에 끼어들어서 프리케를 왕으로 만들어 달라 그럴까? 아니야, 제국이지만 남의 나라 내정에 간섭해서 제국이 분란에 휩싸이게 해선 안 돼.
사사로이 권력을 쓰면 갑질하는 황태자비가 된다고!
도울 일이 생기면 그때는 적극적으로 지원하자.
"그런데, 어머니가 사라진 걸 후작부인 쪽에서 모를까?"
"전 초보자가 아닙니다."
어머니가 계시던 수도원은 숲 깊은 곳에 있었다고 한다. 종교가 크게 번성한 제국은 아니었지만 사제들은 곳곳에서 환자나 빈민들을 구제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밤중에 어머니를 구해냈다. 대신 그 수도원에 큰불을 냈다고 했다.
"사실 비 전하의 어머니를 감시하던 여사제가 있었어요. 후작 부인에게 주기적으로 연락을 전했나 보더라구요."
그 사제는 멀쩡한 어머니를 위험한 환자로 둔갑시켜 수도원에 감금을 시켰다고 했다. 주기적으로 장소를 이동시킨 것도 그 사제였고.
돈만 주면 무엇이든 하는 가짜 신의 종.
저런 자들 때문에 제국에서 종교가 번성하지 못한 거겠지. 대신 그래서 나쁜 귀족들이 은밀히 사람들을 치우고 싶을 때 이용하는 거고!
"잔인한 이야기인데 들으실 거예요?"
"뭐, 얼마나 심하길래?"
프리케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한 내 얼굴은 점점 하얗게 질렸다.
윽, 그 사제를 죽이고, 불을 냈다고? 그런데 엄마와 사제 두 사람 몫의 시체가 필요해서 뭐? 어떻게 잘랐다고??
더 이상은 못 들은 걸로. 나같이 심약한 사람은 이런 호러, 스릴러적인 이야기는 듣지 말았어야 해.
결론은 아주 크고 뜨거운 불을 내서 두 명이 죽었다 정도로만 알아보게 만들었단다.
그래서 수도원에서, 내 어머니는 죽은 사람이 되었다.
후작 부인에게도 소식이 전해졌을까? 속 시원해 하겠지? 아버지의 요구로 제 손으로 죽이지도 못하고 어머니의 편지를 주기적으로 전달했다고 했다.
얼마나 눈엣 가시였을지 안 봐도 뻔했다. 지금까지 죽이지 못하고 살려 둔 것이 용할 만큼.
사랑했다는 이유로 사기까지 쳐가며 얻어냈던 남자가 진짜 사랑한 여인의 죽음. 그녀에게는 평생의 앓던 이가 빠진 느낌일 것이다.
"이젠 그 긴 시간 동안 쌓아 미움과 원망들 온전히 내게 쏟아붓겠네."
"그전에 이혼당하고, 자식들에게도 버림받고 쫓겨나겠죠."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아."
"그게 당연한 거죠. 하지만 부단장님은 절대 비 전하를 원망하지 않을 테니까, 편하게 생각하십시오."
후작부인이 내 어머니를 죽이지 못한 이유 중 하나는 내가 그녀를 증오해 괴이한 죽음을 맞이할까 하는 두려움이었다.
그걸 생각하면 아버지와 내게 당분간 어머니의 소식을 전하지 않겠지?
그녀를 동정하거나 안타까워 하진 않는다. 하지만 펠을 생각하면 후작부인이 더 이상 죄를 짓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뭐가 아직 불안하십니까?"
"펠과 스타티나를 위해 그녀가 더 이상 죄를 짓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럴 리가 없다는 예감이 들어서."
"저랑 황태자가 함께 끝까지 지켜드릴 겁니다. 그 여자가 비전하를 해치지 못하도록."
수호 기사라며 나서는 프리케가 고마웠다.
이런 프리케에게 뭔가 보답을 해주고 싶었는데, 프리케는 극구 사양을 했다.
"황태자가 선물을 주기로 했어요. 꼭 받고 싶은 선물은 아니지만, 생각해보면 나쁜 일은 아니라서."
응? 내 남편이 프리케에게 선물을 해줄 리가 없는데? 간택연때 조금 친해지긴 했어도 프리케가 떠난 뒤 아주 좋아했던 남자라고!
네게 준다는 선물이 알고 보면 널 굴리고 괴롭히는 걸지도 몰라.
친구인데 구해줘야 하는데, 왠지 말리면 카일이 삐칠 것 같아서 어쩔 수가 없구나. 미안하다. 친구야.
"황태자가 그렇게까지 경우 없는 사람은 아닙니다. 걱정 마십시오. 저도 조금은 원하던 일이니까 잘 된 일일지도 몰라요."
"응..."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도 멀리 다녀왔더니 피곤하네요. 가서 쉬겠습니다."
"며칠 푹 쉬고 나중에 호위로 합류해. 고생했잖아."
"너무 쉬면 몸 굳어서 안 돼요. 저 이만 갑니다."
프리케는 너무나도 쿨하게 떠났다. 표정이 뭔가 후련한 듯해 보였다. 이제 미련 같은 것은 없다는 시원한 표정. 금방이라도 어디론가 가버릴 것 같은 뒷모습이었다.
내가 바라던 것들을 다 이뤄주고, 너는 그렇게 내게 아무것도 받지 않고 가버릴 거니?
욕심인 것은 알기에, 더 친구로 곁에 있어달라고 할 수 없었다. 대신 떠나는 날이 오면 잘 보내줘야지.
프리케가 떠난 오후, 오랜만에 나는 알비케라와 아나이스를 데리고 유리온실로 향했다. 유리아, 에이린 그리고 알리페르도 함께 했다.
"어머, 비 전하. 여기 너무 예뻐요."
"카일이 나한테 청혼하려고 만들었다던데?"
"로맨틱해라, 그래서 청혼 받으셨어요?"
"아니, 아직."
일단 대외적인 결혼식은 봄에 끝났고, 나랑 카일의 마음이 이뤄지고, 서로의 비밀을 공유한지도 꽤 지났다.
해준다곤 했지만 평생 못 받겠지 뭐. 나는 웨딩드레스도 못 입어 보는구나. 상관없긴 한데, 좀 아쉽네.
응? 근데 우리 똥강아지 왜 이래? 축 늘어져서는 꼬리도 안 흔드네?
"알비케라, 한여름도 아닌데 왜 이렇게 기운이 없어? 요즘 자주 못 놀아줘서 화났어?"
워낙에 바빴고, 내가 없어도 시녀들이 산책도 시켜주고 잘 놀아줬다. 그런데 왜 이러지?
야, 너 진짜 삐쳤냐?
나는 네가 나 말고 카일을 서열 1위로 인정했어도, 밥과 장난감을 제공하고 섭섭지 않게 대우했거늘!! 이럴 거야?
나의 소중한 복슬 강아지는 그런 것 아니라면서 고개를 저었다.
"화난 것도 아니라면서 왜 이래. 수의사한테라도 보여야 될까?"
내가 너무 속상한 표정으로 알비를 끌어안자 알리페르와 에이린도 걱정스레 알비케라를 바라봤다.
"이 강아지가 누님의 악몽을 막아준 강아지이죠?"
"응. 원래는 흰 사슴이 해주던 일이었는데."
"죄송합니다. 누님."
"네 잘못이 아니잖아. 네가 왜 사과를 해?"
화재가 나고 난 뒤에 나는 죄책감과 후작부인의 학대로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뒤에도 정신을 차리고 살기 힘들었다.
어머니와 스타티나는 살아남았지만, 저택의 많우 시종과 하녀들이 죽었다. 그중 내 동생들의 유모도 있었다. 후작부인이 여동생처럼 생각하던 몬테공작가에서 데려온 시녀였다.
그래서 정말 후작부인에게 많이 맞았고, 죽은 사람들이 다 내 잘못인 것 같아 악몽을 많이 꾸었다.
그때 우연히 만났던 흰 사슴. 그 사슴은 정말 신비로운 존재였다. 그 아이를 만나고 올 때마다 나쁜 기억이 조금씩 사라졌으니까.
그런데 그 아이를 잃었다. 후작부인이 흰 사슴을 보고 그 아이의 신비한 털을 탐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 뒤로 다시 나는 나쁜 기억들로 뒤범벅이 된 악몽을 꾸기 시작했다. 그런 나를 다시 숨 쉬게 해준 것이 알비케라였다.
내 생일날 홀연히 나타나 악몽과 나쁜 기억을 잡아먹어준 나의 소중한 강아지.
"네 어머니가 아니었어도 희귀한 흰 사슴이었기에 다른 사냥꾼들의 손에 희생됐을지도 몰라. 그리고 네가 한 일도 아닌데 자식이라는 이유로 그 일을 사죄하지 마."
"그래요. 도련님이 잘못하신 일도 아니잖아요."
"린, 펠한테 아직도 도련님이라고 부르는 거야? 네가 비스가의 하녀도 아니고, 도련님이 뭐야? 연인끼리 그렇게 부르게 내버려 두는 거 아니다, 펠?"
우와, 연인이란 소리에 둘이 얼굴 새빨개 진 것 봐!!
기운 없는 알비를 내가 안아 들자 아나이스는 넓은 펠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아나이스는 펄펄 잘 나는구나. 펠의 어깨가 좋아?"
"도련, 아니 알리페르님 어깨가 직각인데다가 넓어서 좋긴 하죠."
"흐으으응, 너 내 앞에서 남자친구 자랑하는 거니?"
"비 전하의 남동생 칭찬한 건데요?"
에이린은 내 눈빛을 피했다. 아쭈? 이렇게 피해 가시겠다?
아나이스! 물어! 쪼아! 이런, 이 녀석. 은혜를 잊고, 에이린과 우정을 높게도 쌓았구나.
우리는 온실에 피어있는 다양한 꽃들을 감상하며 산책했다.
그러고보니 봄에 카일이랑 숨바꼭질했었던가? 다음에 온실에서 술래잡기, 아니 나 잡아 봐라를 하면서 놀아야지.
"알비, 예전에 기억나? 그때 내기에 졌을 때 나대신 네가 카일이랑 뽀뽀했잖아. 호호호."
"멍!"
기억하는구나.
"비 전하, 너무하시네요."
"그때는 진짜 카일이 싫었단 말이야."
"세, 세이? 진짜야? 너무해!"
으아아악!!! 남편 언제 왔어? 카일이 풀죽은 표정으로 나타났다.
"그, 그때는 당신이, 나한테 상황 설명도 안 한 채로 마구 들이댔잖아요. 그니까 막 징그럽고, 귀찮고... 그랬죠."
목소리가 작아졌다. 아니 나는 아무것도 모른채로 끌려와서 들킬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모르는 남자가, 막, 그러니까.
"그, 그러게 진작 사실대로 다 말하지!! 그래 이제 와서 하는 말인데, 에이린! 너도 다 알고 있었지? 지금 생각해보니까 너 카일 편들면서 나랑 카일이랑 엮으려고 했었어!"
"저, 저는 힘없는 시녀거든요.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는!"
에이린은 큰 소리로 외치면서 카일을 쳐다보았다. 카일은 순간 당황한 듯 어버버 거렸다.
그래, 그래.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다 짜고 친 거다 이거지?
스타티나, 아버지, 에이린, 카일, 다 알면서 나한테 말도 안 하고 황궁에 날 밀어넣었구나?
"그렇게 큰 사기를 나한테 쳐놓고!! 내 입술 대신 알비 입술 좀 받았다고!! 나한테 너무하다 한 거예요??"
나의 분노에 펠은 먼 산만 보고 있었다. 우잇! 너도 공범이냐??
"펠!! 너도야? 하아!"
이 사람들을 내가 그냥!!
"세이, 용서해줘."
"비 전하, 죄송해요."
"누님..."
표정들 좀 봐!! 어휴, 내가 진짜! 당신들을 너무 사랑해서 봐준다!! 다 날 위해서 그런 것 아니까.
"카일, 피장파장이니까 알비한테 뽀뽀 받은 건 잊어요. 알았죠?"
"네, 부인."
부, 부인이라니. 갑자기 또! 얼굴 빨개지게 뭐라는 거야!! 처음 만났을 때 몇 번 들었을 때는 몰랐는데 이거 진짜 부끄러운 호칭이야!
그렇지만 나쁘진 않네. 흠흠!! 요거 사람들 없을 때 자주 불러달라고 해야겠어. 하하하.
"그런데 일은 잘 끝났어요?"
"아니, 난리야. 콘스탄트 공작은 자신은 무관하다며 날뛰고, 황후는 와서 질질 짜는 연기하고 가고, 개판이었어."
가끔 내 남편의 단어 선택이 황태자로서 적절한가 염려스러워. 평민들 보다 더 저렴하단 말이지.
"그래서 어쨌는데요?"
"나도 깽판 치고 왔지."
저기, 이 나라의 미래는 안녕하신 거죠? 무사히 잘 찾아오고 있는 것 맞죠?
"그런데 알비는 왜 이리 기운이 없어?"
"모르겠어요. 아픈 건지. 말을 안 해요."
남들이 들으면 강아지가 어떻게 말을 하냐 하겠지만 나는 들을 수 있으니까.
"정령왕들에게 데려가볼까? 동물들과 교감하니까 알지도 몰라."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알비는 그것조차 귀찮다는 듯 내게 기대어 있을 뿐이었다. 잠이 든 건가? 왜 이러니 진짜, 속상하게.
내게 너는 가족인데 이렇게 아픈 거 싫고 속상해.
에이린과 펠도 정령계의 입구로 데리고 갔다. 통과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고 했다.
"정령왕이나 정령의 여왕과 친해야 한다고요? 어, 저는 가능성이 없을 것 같은데."
"매형!! 저 꼭 들어가 보고 싶습니다. 정령계라니요!"
에이린은 별 기대를 안 하는 것 같았지만 알리페르는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이 나기 시작했다. 자주 느끼지만, 이 녀석 소드마스터가 되는 날 정령이랑 계약한다고 설칠 것 같아.
"에이린, 나도 통과했어. 걱정 마. 착한 사람이면 다 통과되는 것 같아."
"세이,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뭐, 적의나 살의로 가득하고 정령들의 친구들을 괴롭히는 이들이 통과하진 못할 테니 틀린 말은 아닌가? 아무튼 정령들을 만나고 싶다고 간절히 생각해야 해."
"네! 매형!"
우리 네 사람과 알비, 아나이스는 유리온실 구석에 있는 나무 사이로 통과했다.
그리고 그 순간, 잠든 줄 알았던 알비케라가 눈을 떴다. 그것도 아주 사나운 눈빛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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