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나만이 할 수 있는 일.
2018.07.07.
숲 위로 얼굴만 쏙 올라온 생명체는 희한한 모양새였다. 아래쪽은 숲에 가려서 보이지 않지만, 머리는 독수리? 그런데 몸통은 단단한 비늘로 덮여 있었다. 그런데 등은 또 독수리 날개였다.
사나운 소리를 내는 저 괴수는 나무를 마구 짓밟으며 난리를 피우기 시작했다. 야 이놈아!! 죄 없는 식물들을 왜 밟아!! 뿌리라도 살려두지 왜 이제 뽑기까지 하는 거야!!
갑자기 그 괴수가 우리 쪽을 쳐다봤다. 인간들을 발견한 괴수는 발걸음을 우리 쪽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걸음마가 서툰가? 아주 느려. 설마 저러다 그냥 나는 것은 아니겠지?
"우아아악!!"
평소 우직함을 자랑하던 기사들 사이에 당황스러운 비명이 퍼졌다. 다들 우왕좌왕하는 사이로 카일의 침착한 목소리가 가로질러졌다.
"동요하지 말고 자리를 지켜라. 저것을 해치우는 일은 내 일이니 너희는 너희의 일을 할 것이다."
카일의 말에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자리를 맞춰 대형을 짰다. 기사들의 할 일은... 음 누가 봐도 날 지키는 것이군.
내 주변으로 무장한 기사들이 층층이 둘러싸는 모습은 뭐랄까, 역시 과보호인가 싶기도 하지만, 이건 위급 상황이니까.
그래도 카일은 정체도 모를 저것을 혼자 상대하겠다고? 카일이 다치면 어쩌려고?
"카일? 저게 뭐예요?"
"글쎄, 이번 것은 그 흑마법사가 만든 잔재 같은데..."
그 말벌 독에 당한 그놈? 그 미친놈이 저런 것도 만들었어? 그 자식은 도대체 정체가 뭐야?
"전하, 마법사의 키메라면 상대하기 쉽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일단 주인의 영향에서 벗어났으니 영리하게 움직이진 않을 거야. 머리까지 쓰면서 덤비는 녀석이 상대하기 귀찮은 거지."
"제가 곁에서 엄호하겠습니다."
"그래, 프리케, 나의 비를 부탁하지."
"부탁하지 않으셔도 제가 지킵니다."
프리케의 태도에 이제는 기분 나빠하지 않고 피식 거리는 경지에 오른 카일이었다.
"알비, 너도 세이를 지켜."
"멍!"
"다치면 안 돼요."
"걱정 마. 여기에 안전하게 있어."
기사들이 카일의 검을 건네자 이를 받아 허리춤에 찬 카일은 내 이마에 짧게 키스를 하더니 말을 몰고 달려나갔다.
블랙버드, 절대 카일을 네 등에서 떨어트리면 안 돼. 아무리 저 괴수가 무서워도 우리 카일 버리지 마. 알았지?
그런데, 어쩌지? 이 상황에서 카일한테 또 치였어. 어쩜. 저렇게 멋진 자세로 말을 몰고 가는 거야? 꼿꼿한 자세로 등을 세우고, 한 손에는 자신의 검을 쥐고 있는 그의 뒤태가 아주 그냥, 확 껴안고 싶게 생겼잖아. 어머어머 진짜 멋져.
큼큼. 그런데 카일은 갑옷을 입지 않았다. 그래서 걱정도 되었다. 괜찮을까?
괴수는 카일과 테일러경을 본능적으로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몸에 있는 마나를 느끼는 걸까?
"크아아!"
괴수가 날아오르더니 카일과 테일러를 발로 밟으려 시도했다. 그 덕분에 괴수의 아래쪽 모습은 확인할 수 있었다.
도마뱀이었다. 커다란 발톱과 두꺼운 꼬리를 가진 도마뱀.
"저렇게 큰 도마뱀이 있어?"
"마법의 힘으로 키웠겠죠?"
그렇겠지? 내가 아는 한 저런 사이즈의 동물은 없다고. 괜찮을까?
괴수가 카일을 밟으려는 순간 내 심장이 멈출 뻔했다. 하지만 카일은 예상이라도 한 듯 빠른 속도로 옆으로 빠져나갔다. 그러자 그 경로로 날아오는 커다란 꼬리!
"카일!!"
카일은 말에서 훌쩍 뛰어 꼬리로 올라탔다. 블랙버드도 주인의 뜻을 알아차린 것인지 주인이 사라지자 머리를 바짝 숙이고 그 자리를 피해 도망갔다.
한편 카일은 꼬리를 타고 괴수의 등 위로 달려 올라가기 시작했다. 테일러경은 괴수의 눈앞에서 알짱대며 시선을 분산하고 있었다.
으아, 우리 남편 저러다 떨어지면 안 되는데!! 심장이 계속 벌렁거리며 내가 긴장하고 있다는 신호를 보내줬다. 이러다 기절하면 어쩌지? 그럼 우리 남편이 내 걱정 하다가 다칠 테니까 정신 똑바로 차려야지.
"꺄악! 안 돼!! 카일!!"
갑자기 그 새인지 도마뱀인지가 날아올랐다. 커다란 새의 날갯짓에 주변 나무들의 나뭇잎이 태풍을 만난 듯 흩날렸다. 우리도 갑자기 불어온 바람에 섞인 흙먼지에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카일은? 떨어진 것 아냐? 나는 바람이 멎자마자 눈을 크게 떴다.
다행히 카일은 괴수의 비늘을 잡고 매달려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위태로워 보였다. 소드마스터니까 버틸 힘이 있긴 하겠지만 바람을 이길 수 있을까?
괴수가 마치 카일을 떨치려는 듯 몸을 막 흔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우리 카일의 몸도 흔들흔들 거렸다. 저 비늘에 쓸리면 고운 얼굴과 몸이 상할 것 같은데. 소드마스터라고 옷까지 강화하진 못 할 것 아냐!!
"야 이 나쁜 놈아! 우리 카일 내려놓으라고. 날지 마, 우리 남편 떨어지면 용서 안 해!!"
내 외침이 끝나자 괴수가 날아오르던 것을 멈추고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잉? 내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걸까??
하지만 카일이 귀찮은지 계속해서 꼬리로 내려치려고 했다. 카일은 그것을 피해 빠른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쩌면, 동물들도 내 말을 듣는데, 쟤도 듣진 않을까? 그리고... 아까부터 거슬리는 불쾌함이 있었다. 저 괴수를 감싸고 있는 묘한 기운. 검은 안개 같기도 하지만 어른 거리는 것이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다.
"프리케, 혹시 저 괴수를 둘러싼 기운 보여?"
"전체적으로 그 흑마법사를 녀석의 마나가 덧씌워져 있긴 한데, 밖으로 삐져나오는 기운은 없습니다."
"검은 안개 같은 것 안 보여?"
"아니요. 제 눈에는..."
자연의 것이 아닌 불길한 기운. 찝찝하고 불쾌한 느낌이 드는 저 검은 것이 안 보인다고? 깨끗하게 치워버리고 싶은 욕구가 드는데...
흐음. 이건 그냥 느낌인데, 저 기운을 없애면 정화가 될 것 같은 기분?
내가 고민하고 있는 순간 카일이 괴수의 목 부근까지 올라갔다. 마나를 둘렀는지 카일의 검에는 푸른 기운이 어른 거렸다. 테일러경이 계속 눈앞에서 짜증 나게 알짱거리는 통에 괴수는 카일의 움직임을 막지 못했다.
날아오르면 그나마 테일러경을 피할 수 있을 텐데 그러지 않는 것은 내 말 때문일까? 그렇다면...
"카일, 테일러경, 잠시만요. 얘, 너 엎드려 볼래? 부리를 다물고!"
으헉!! 진짜다!! 내 말을 듣고 저 괴수는 순진한 강아지가 된 듯 엎드렸다. 저, 저기요?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하지? 알비야, 쟤 혹시 네 친구니?
이거 완전히 괴수를 조종하는 마녀가 될 각이잖아!! 아하하!
"저기, 다들... 내가 저 괴수의 몸에 걸린 저주를 풀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맡겨 볼래요?"
내 말에 괴수가 슬픈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자신들이 원해서 괴수가 된 것이 아니니까. 너도 원래의 몸으로 돌아가고 싶구나.
카일은 검에서 검기를 거둬들였다. 그리고 휙 휘파람을 불어서 블랙버드를 불러들여 훌쩍 말에 뛰어올랐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 쪽으로 말을 몰았다.
어휴, 괴수가 다시 덤비면 어쩌려고 저렇게 무방비하게 오는 거야? 테일러경은 여전히 경계하면서 오는데 말이야. 어휴,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데 피식 웃음이 났다.
"황태자는 비 전하를 너무 믿네요."
"그치? 쟤가 갑자기 돌변하면 어쩌려고. 프리케, 내가 저 괴수 쪽으로 가고 싶은데."
"호위해 드리겠습니다."
만약을 대비해 알비를 다른 기사에게 안겼다. 잘 지켜요. 내 소중한 아이니까.
내가 카일이 오고 있는 방향으로 말을 몰자 프리케가 근접 호위를 했다. 그리고 뒤로 우르르 기사들이 따라왔다. 나 어미닭이 된 기분이야. 병아리들도 아니고!
"카일, 다친 곳 없어요? 긁히거나 그런 것 아냐?"
"멀쩡해 옷이 좀 찢어졌지만 몸은 마나로도 보호했고, 놈과 실프가 방어막을 만들어 줬어."
휴우, 다행이다. 어디 긁히거나 해서 몸 상했으면, 저 괴수를 때리고 싶어질 뻔했어.
내 마음을 알아들은 건지 괴수가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그러게 왜! 갑자기 튀어나오고 그러냐!!
"그런데 무슨 말이야? 저 괴수를 되돌릴 수 있다니?"
"어, 자신은 없는데요. 저 아이를 감싸고 있는 이상한 검은 안개가 보여요. 억지로 자연의 순리를 거스른 대가? 그런 느낌이에요."
"이 키메라가 원래보다 크기가 커진 게 그렇다면 그 검은 안개 탓이라는 거야?"
"카일의 눈에도 안 보이는 거죠?"
카일은 내 물음에 대한 답 대신 정령을 소환했다. 상급 정령이라고. 그러자 뒤에서 알비케라의 불만스러운 으르렁 소리가 들렸다. 요즘 대놓고 정령을 싫어하는구나.
"이봐 살리맨더, 네 눈에는 보이겠지? 순리에 어긋난 것들을 불로 태워 벌주는 것이 네 일이잖아."
아, 정말? 정령들 중에서 심판자의 역할을 하고 있나 보네. 그렇다면 볼 수 있을지도 몰라.
"세이, 살리맨더도 보인다는데? 그리고 살리맨더가 해야 하는 일은, 어... 저 순리를 어긴 생명체를 불에 태워 죽여야 한대."
"어째서요! 저 괴수들은 마법사가 만든 피조물이 변형된 것이라면서요! 그럼 죄 없는 동물인데, 살릴 방법을 찾지 않고 죽이겠다니, 안 돼요."
비록 괴수일지라도 내게 순종적인 생명체였다. 마법사만 아니었어도 이런 꼴은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살려주고 싶었다. 인간의 탐욕에 의해 희생된 거잖아. 자신들의 의지가 아니었다고.
"하지만 세이, 방법이 없잖아."
"일단, 저 검은 안개를 없애야 해요."
"살리맨더도 태우지 못해서 저 괴수를 태우려는 거야."
"내가 해볼게요.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니 할 수 있어요."
내가 강한 의지로 이야기하자 카일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혹시라도 네가 위험해질 것 같으면 나는 살리맨더에게 저 괴수를 태우라고 할 거야. 그건 약속해야 돼."
"카일, 날 믿어줘서 고마워요."
"무리하지는 마, 알았지"
나는 카일의 뺨에 가볍게 키스한 뒤, 같이 괴수를 향해 갔다. 내 의지를 확인한 나머지 소드마스터들도 날 호위하며 따랐다.
무슨 자신감인지는 나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저 검은 안개를 내가 정화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잠시만 기다리렴."
내가 손을 내밀자 놀랍게도 괴수는 순종적인 자세로 내 손길을 받았다.
순리를 어긴 것에게 내려지는 자연의 벌. 하지만 그 순리를 어긴 자는 이 아이들이 아니었다. 그러니 잘못 내려진 벌이야.
나는 꽃에게 축복을 내릴 때처럼 대지의 기운을 모았다. 주변의 바람도, 물도 나의 바람을 들어주었다. 심지어 저 멀리 떠 있는 태양조차도 나의 의지를 받아주었다.
이 불쌍하고 가련한 생명에게 축복을 내려줘.
따스하고, 단단한, 그러면서도 시원한 바람이 내 곁을 감싸주었다. 지난번 정령계에서 모았던 축복의 힘보다 더 많은 힘이었다.
이번에는 실패하지 않을 거야.
제발, 저 아이들을 살려줘!!
"세이!!"
내가 무너져 내렸다. 카일은 단단한 팔로 그런 나를 지탱해줬다.
"단지 기운이 빠진 거예요."
나를 매개로 모인 힘이 일순간에 터져나갔기 때문이었다. 몰랐어, 힘이 내 몸을 통해서 전달된다는 건. 지금까지는 작은 힘만 써서 미처 자각하지 못했구나.
"성공한 걸까요?"
괴수가 있던 자리에는 붉은색, 푸른색, 초록색, 노란색의 빛무리가 가득 차 있었다. 자연의 모든 것이 담겨 있는 빛.
그 빛이 검은 안개를 점점 잠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차 검은 안개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점차 색색깔의 빛이 밝고 투명한 빛이 되어 사그라졌다.
"카일, 성공한 것 같지 않아요?"
내가 카일에게 안긴 채로 함박웃음을 지으며 손으로 정화된 동물들을 가리켰다. 작은 도마뱀과 늠름한 독수리!
"비 전하!! 황태자보다 더 대단한데요?"
프리케가 외쳤다. 테일러경도 경탄해 마지않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뒤에서 기사들도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지르는 것이 들렸다.
헤헷, 카일의 정령도 못하는 일을 해냈어. 아, 뿌듯하다.
그런데 왜 남편만 칭찬해 주지 않는 거죠? 남편님, 너무하십니다!
"카일?"
"정령의 여왕."
"네?"
"정령의 여왕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라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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