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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비의 대역으로 살아남기-90화 (90/126)

90화. 다시 만난 우리. (2)

2018.07.12.

역시, 화가 난 것일까? 아니면 날 못 알아보는 것일까? 어린 시절 내가 데리러 간다는 약속을 잊은 것 같아서 서운했다.

"미안하오. 그저, 어린 시절 알고 지내던 꼬마 요정과 닮은 듯하여... 나도 모르게 그리 불렀군."

꼬마 요정이라는 말에 반응이 없었다. 우리 사이에 갑자기 커다란 벽이 쳐진 느낌이었다.

원래 우리는 이런 사이가 아니었는데. 편하고, 자유롭고, 격이 없던 사이.

7년이란 세월이 이렇게 만든 것일까? 아니면 성인이 되면서 자각한 신분 탓일까?

나만 알아보는 듯하여 조금은 섭섭했다. 그래서 나에 대해 기억하는 것이 있는지 물어보기로 했다.

"혹시, 그대는 케이라는 자를 모르나?"

그녀의 눈이 아주 동그래지더니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날 기억했구나?

"설마? 하지만..."

춤을 추는 내내 그녀는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한참 후 춤이 끝날 때까지 그녀는 말이 없었다.

"한 곡 더 추겠소? 아니면, 대화를 나누겠소?"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요. 조용한 곳에서요."

젊은 남녀가, 특히나 내가 여인을 데리고 테라스로 간다면 바로 스캔들이 날 테지만 상관없었다. 나의 반려는 무조건 세이여야 하니까. 음, 혹시 그 사이 세이에게 다른 연인이 생긴 것은 아닌지 살짝 걱정이 들긴 했다.

"테라스로 가지."

나는 세이를 에스코트해서 테라스로 갔다. 역시 모든 이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나는 최대한 그녀를 시기의 시선으로부터 가려주었다.

테라스로 들어가기 전 손짓으로 이쪽 방향의 모든 테라스에 사람들의 출입을 막았다. 정원 쪽도 근위대가 사람들의 접근을 막을 것이다.

"케이가 누구인지 기억이 났나?"

"어째서 전하께서 케이라는 거죠?"

조금 도발적인 눈빛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는 듯한 눈빛.

"아직 온전히 기억하지 못하나 본.."

"케이는 검은 머리라고요!! 어째서 푸른 머리의 황태자께서!!"

응? 나는 한 번도 검은 머리였던 적이 없었다. 어째서 날 그리 기억하는 것이지?

"아니지, 그건 기억이 뒤섞여서 착각했을 수도 있어. 그래, 본인이 케이라는 다른 증거를 보여주세요."

세이가, 좀, 성격이 괄괄해진 것 같았다. 천진하고 명랑한 성격은 있었지만, 이렇게 내 말 끊어먹고 자기 할 말만 하는 아이는 아니었는데.

하긴 거의 6년의 세월이 흘렀으니, 변했을 수도 있겠지?

"증표로 준 나무 반지면 되겠나?"

"대박!! 찾았어! 진짜 케이라니, 어머, 어머!! 어쩌지?"

이건 기뻐하는 것 같긴 한데, 음... 뭔가 핀트가 이상하게 어긋난 느낌이랄까?

"우와, 대단해. 황태자였다니! 이거 복잡한데, 흠. 고난도야."

내 기분과 관계없이 그녀는 계속 떠들어 댔다.

"저기 영애? 그대가 내가 아는 세이가 맞는 건가?"

"네? 음, 글쎄요. 호호호."

나를 향해 눈을 휘어가며 웃는 그녀의 미소가 조금 소름이 돋았다. 아니다. 나의 이성이 그렇게 소리쳤다.

하지만 이렇게나 비슷한 외향을 가졌는데, 게다가 케이의 존재를 알고 있지 않는가? 도대체 뭐지?

나름 냉철하고 이성적인 판단으로 살아오던 나라고 자부했는데,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다.

혹시...

"너는 나의 세이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인가?"

조금 살기를 실어 물었다. 혹시 세이에게 해를 끼친 것은 아니겠지? 영혼이 뒤바뀌었다던가 하는 초자연적인 일이 벌어진 것은 아닐까 두려워졌다.

"네. 황태자께서 찾고 있는 세이가 누군지 잘 알고 있습니다."

"어디 있지? 세이는 안전한가? 어째서 나타나지 않는 거지? 날 기다리고 기억하는 것은 맞나?"

내가 쉬지 않고 말을 이어나가자 그녀는 눈을 양껏 휘어가며 웃었다. 기분이 좋아 보였다. 내가 세이를 찾는 것이 우스운 일인가?

그런데 갑자기 그녀의 표정이 변했다.

"황태자께서는 지난 6년간 세이를 찾지 않아놓고, 왜 이제서야 찾는 거죠? 그때 당신이 데리고 갔다면, 그랬다면..."

말을 잇지 못하는 비스 영애였다. 주먹을 꽉 쥐고 부들부들 떨며 분노에 떠는 모습이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나에 대한 원망일까? 아니 원망의 대상은 내가 아니었다.

"후우, 이미 지나간 일이니 어쩔 수 없죠. 질문을 바꾸죠. 세이를 찾으면, 그녀를 안전하게 지킬 수 있나요?"

"그녀를 지켜주겠다고 맹세했다. 지난 6년간 그녀를 지켜주고 온전히 내 곁에 두기 위해 이 자리에서 싸워온 것이다."

"믿어도 되나요?"

"물론이다. 그러니 알려다오. 내 꼬마 요정이, 나의 세이가 잘 지내고 있는 것이냐? 어디 있는 거지? 날 그리워하지 않는가?"

"제가... 그녀를 황태자 전하께 드릴 테니... 저를 황태자비의 자리에 올려주실 수 있나요?"

그녀의 말에 내 눈에 불꽃이 튀었다. 감히, 그녀를 두고 내 반려의 자리를 거래하려는 것인가?

"아, 물론, 진짜로 달라는 것은 아니에요. 왜, 제가 황태자비의 자리를 달라고 하는지는... 제 아버지의 영지로 찾아오시면 알려드리죠."

내 노기를 확인했는지 비스 영애는 급하게 말을 이었다. 진짜 달라는 것이 아니라고? 이 여자는 도대체 무슨 꿍꿍이지?

"보름 뒤에 비스 영지에 있는 성으로 몰래 찾아오세요. 근처에 기사 아카데미도 있으니, 정체를 잘 숨기셔야 할 겁니다."

"내가 널 어떻게 믿지?"

"물론, 전하께서는 얼마든지, 당장이라도 그녀를 찾겠죠. 하지만, 섣부른 움직임은 언, 아니 세이를 위험하게 만들지도 몰라요. 전하가 관심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요. 저는 그녀를 지키고 싶어요."

그 말을 남기고 비스 영애는 테라스를 떠나버렸다. 홀로 남겨진 나는 문득 아까 봤던 갈색 머리의 영애가 떠올랐다. 설마!

급히 홀로 돌아왔지만 그녀는 없었다. 그리고, 비스 영애도 사라지고 없었다.

"황태자 전하, 저기, 안녕하세요?"

"전하, 부끄럽지만 저희와 잠시..."

"비켜라."

내 몸에 손을 대려는 여인들을 보자 성질이 치밀었다. 나의 세이도 아직 내 손을 다시 잡지 못했거늘!!

나도 모르게 내게 접근하려던 여인들에게 살기를 내뿜었다.

"허억!"

영애들이 주저앉은 것 같았으나 관심 갖고 싶지 않았다.

"루카스!"

"네! 전하! 비스 영애와 좋은 시간 보내셨습니까?"

"무능한 녀석, 따라와!"

나는 놈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매우 쳐도 부족했다. 이 멍청이! 이러고도 유능한 보좌관이라고 뻐겼어?

"왜, 왜 이러세요? 꽃다운 영애들이 보고 있는데!"

"시끄러!"

귀를 잡고 끌고 갔다. 인적이 없는 곳까지 간 뒤 루카스에게 할 말을 쏟아부었다.

"비스 영애가 아니었다."

"네? 에이, 세이라는 애칭을 쓰는 데다가 그 시기에 비스 영지에 있었다는 것 확인까지 했는데요?"

"다른 사람이라고 본인 입으로 말했어."

"다른 남자가 있어서 거짓말한 것 아닙니까?"

움찔, 그런 쪽으로는 생각 못 해봤다. 설마, 그런 것일까? 세이는 날 잊고 딴 놈이랑...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내게 황태자비 자리를 주면 진짜 세이의 정체를 알려준다고 했어.”

"네? 우와 당돌하네요."

"그보다, 아까 내가 관심 갖던 갈색 머리 영애 누군지 알아?"

"누구요? 아... 세이렌 소노르 영애였던가? 비스 가문의 가신 집안이에요."

"그 영애에 대해서 조사해. 출생부터, 남자관계까지 전부."

아까, 그 여자 곁에 있던 검은 머리 남자가 어쩐지 거슬렸다. 마나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분명 실력자였어. 알려지지 않은 소드마스터를 파트너로 데려오다니, 범상치 않은 여자였다.

게다가 대지의 축복. 분명 자연의 생명력이었다. 세이는 내가 정령왕과 계약 전에 만나서 그때 그녀가 쓰던 힘의 정체를 확실히 알 순 없었다. 하지만 아까 그것과 비슷한 느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그 푸른 눈. 그 눈빛이 계속 내 마음속에 맴돌았다. 젠장! 그런데 왜 머리색이 다른 거지? 오래전 기억이라 헷갈린 걸까?

며칠 뒤 소노르 영애에 대한 보고서를 받아 들었다.

비스 가문의 가신인 소노르 자작의 딸이 밖에서 낳아온 딸, 그러니 자작의 외손녀라고?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과거에 소노르 영애와 현 비스 후작의 스캔들이 있었다고 했다.

그 순간 떠올랐다. 세이가 자신의 가족들에 대해서 했던 이야기가 이제서야 또렷해졌다. 멍청하게!

어머니를 제외한 나머지 가족들을 남처럼 칭했다. 아버지의 아내라는 말을 왜 캐치하지 못했을까?

세이는 사생아임에 틀림없었다. 그것도 인지 받지 못한 사생아. 비스 영애가 알고 있는 것으로 보아 어쩌면 둘은 이복자매일 것이다. 놀랍도록 닮은 자매.

당장 소노르 영애를 찾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비스 영애의 말에 망설이게 되었다. 나로 인해 그녀가 위험해진다는 말.

게다가 현재 그녀의 위치가 파악되지 않는다고 했다. 혹시 내가 연회 때 관심을 준 탓에 위험해진 것은 아닐까?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조금만 참자. 지켜낼 수 있을 거야. 초조해하면 안 돼, 카일룸. 냉정하게 판단하자.

비스 영애에게 감시를 붙이고, 조용히 미행했다. 그리고 약속된 날에 그녀가 있는 비스 영지로 찾아갔다.

"어머, 정말 오실 줄 몰랐는데."

"세이는, 소노르 영애는 어디 있지?"

"벌써 알아내셨어요? 역시 황태자 전하시네요."

빙글빙글 말을 돌려서 하는 것이 짜증이 났다. 감히 나의 세이를 두고 나를 기만하려는 것일까?

"아이, 무서워라. 전하, 눈에 힘 좀 빼시죠. 처제가 될지도 모르는데?"

처, 처제? 갑자기 열기가 확 몰려왔다. 그런 내 모습을 보며 한참 웃던 비스 영애는 갑자기 슬픈 눈으로 날 쳐다봤다.

"세이렌, 아니 아르세이아 비스, 그게 내 언니의 진짜 이름이에요. 황태자 전하께서 찾던 세이죠."

자신의 이름을 언니의 이름이라 말하다니 이상한 영애였다.

"제 아버지가 자신의 장녀에게 주려던 이름이에요. 추악한 제 어미에 의해 본의 아니게 제가 뺏었지만."

슬퍼 보였다. 비스 영애는 자신과 제 언니의 출생과 관련된 가족사를 이야기해주었다. 그리고 내가 떠난 사이 세이에게 가해진 입을 다물 수 없는 학대의 순간들까지...

"가, 감히, 나의 세이에게..."

분노로 이가 덜덜 떨렸다. 눈앞의 영애가 쓰러질까 살기를 갈무리하는 것이 힘들 지경이었다.

"제 어머니를... 용서하지 마세요."

처연해 보이는 미소를 짓는 비스 영애, 아니 내 처제였다.

"이미, 전하께서 간택연 때 언니에게 관심을 보여서 어머니가 잔뜩 예민하세요. 자칫하면 언니를 숨겨버리거나 죽이려 들 것 같아서... 그때 무례인 것을 알면서도 늦게 입장했어요. 다행히 제게 관심을 돌리셔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그녀는 제 이복 언니를 끔찍이도 예뻐하고 좋아하는 듯했다. 자신의 분신과도 같다고 했다.

"전하, 언니를 당장 데리고 가고 싶으시겠지만 전하가 청혼서를 넣는 순간 언니는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닐지도 몰라요."

"내가 지킬 것이다."

"언니는 케이만 기다리고 있어요. 그런데 음, 언니의 기억에 왜곡이 심해서..."

"무슨 소리지?"

내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이가 살던 저택에 큰 화재가 났다고 했다. 그 이후 거듭된 육체적, 정신적 학대에 세이는 반쯤 미쳐갔다고 했다.

그러다가 겨우 제정신으로 돌아왔을 때는 아팠던 기억의 대부분을 지웠다고 했다. 그리고 나에 대한 기억도...

"언니가 살아남기 위해서 한 선택이었어요. 지금도 기르던 강아지가 없으면 악몽에 시달려요. 덕분에 케이에 대한 기억도 다 지워지고, 검은 머리의 케이가 자신을 구하러 올 거라고 믿고 있죠."

"이, 이런."

"그래서 드렸던 제안이에요. 제가 황태자비가 된다면, 제 어머니는 언니를 당분간 괴롭힐 정신이 없을 거예요. 그리고 제가 사라지면, 저와 완벽히 닮은 외모인 언니를 대역으로 세우려 할 거예요."

비스 영애는 자신을 희생해서 언니를 내게 보내주려 했다. 도대체 어째서?

"언니가 행복하게 웃는 것을 보고 싶거든요. 저 때문에 모든 것을 누리지 못하고 사는 언니에게, 다 주고 싶어요. 우리 언니, 저주받은 존재가 아니라, 사랑받아야 하는 존재라는 것 알려주고 싶어요."

비스 영애, 아니 처제는 눈물을 떨어트리며 내게 애원했다. 언니를 반드시 지켜준다고, 행복하게 해준다고 약속하라고...

"나의 존재를 먼저 밝히고 세이를 데려가겠다."

"안 돼요. 언니는 분명, 그 사실을 알면 어머니 앞에 섰을 때 거짓말을 못할 거예요. 게다가 의사가 기억 함부로 되돌리려고 해선 안 된다고 했어요."

처제는 절대 안 된다며 펄쩍 뛰었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황궁의에게 확인해 보겠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는 구체적인 계획을 짜기로 하고 헤어졌다.

돌아가는 길에 나는 멀리서 세이를 지켜보았다. 목장에서 동물들을 돌본다고 했다.

"알비케라!! 저기 양들이 도망가잖아. 야! 내가 할 수 있지만 너도 밥값은 해야지!"

편한 옷을 입고 하얀 강아지와 목장을 뛰어다니는 눈부신 그녀가 서 있었다.

사람들이 없어서인지 특유의 적금발을 질끈 묶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어느새 자신을 둘러싼 양들의 품에 안겨서 꺄르르 웃는 모습은 내가 그리워하던 그녀의 모습 그대로였다.

나의 꼬마 요정. 내가 그때 널 두고 오지 않았다면...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이제라도 더 이상 상처 입지 않게, 네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줄게. 몇 달만 더 버텨.

내가 그녀를 응시하는 데, 그녀의 주변을 맴도는 검은 머리의 사내가 눈에 들어왔다. 저놈은, 세이의 파트너였던... 비밀 호위라고 했나?

"세이! 이제 그만 들어가. 내가 스프랑 빵 얻어왔어."

"프리케! 여기 좀 봐! 코스모스가 피려나 봐. 양들이 먹어버리면 안 되는데!"

"꽃을 미리 피우던가, 양들더러 먹지 말라고 하면 되지."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니 부아가 치밀었다. 내 자리인데, 세이와 마주 보는 사람은 나여야 했는데.

젠장, 루카스만 아니었어도, 바로 세이를 알아보고 당장 궁으로 데려갔을 텐데!!

일단 처제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온전하게, 안전하게 세이를 내 곁에 두기 위해서는 바빠지겠군.

나는 억지로 떼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뒤로하고 궁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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