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태자비의 대역으로 살아남기-92화 (92/126)

92화. 다시 만난 우리. (4)

2018.07.14.

세이의 막사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세이와 시녀의 대화를 엿들었다.

세이는 어떻게 해서든 내게서 벗어나고 싶은가 보았다. 처제와 내가 미리 포섭한 시녀가 열심히 세이를 설득하고는 있는데...

"죽여, 그것도 단칼에! 전부!"

저기, 세이는 동물들 괴롭히는 사람 싫어하는데...

"전하는 손속이 잔인하신 분이야."

세이가 겁먹을 것 같아. 결국 시녀의 반 협박에 세이는 도주는 포기한 것 같았다. 그런데 처제의 편지는 무슨 내용일까?

시녀가 막사 밖으로 나오자마자 불러냈다.

"유베르 영애. 세이에게 내 장점을 좀 부각해주지 않겠나?"

"어머, 죄송해요. 설득하느라 어쩔 수가 없었어요. 내일부터는 전하의 좋은 점만 말씀드릴게요."

유베르 영애에게 세이가 불에 대해 무서워하게 된 이유를 한 번 더 자세히 캐물은 뒤 나는 기사들을 소집했다.

세이의 막사에서는 흐느낌이 세어 나왔다. 속상했다. 그리고 겁을 먹고 있는 세이가 안쓰러웠다.

"테일러, 내가 분명히 황태자비 주변에서는 마법등만 쓰라고 했지?"

처제가 아무 설명 없이 마법등만 쓰라고 했지만, 나는 철저히 그 명을 기사들에게 전달했다. 다 세이에게 필요한 일이라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이 사달을 내서 나의 세이의 고운 금발머리를 다 뜯기게 했다 이거지??

"다들 목검 들어."

목검으로 대련을 하냐고? 아니, 대련하는 척 두들겨 패는 것이다. 이놈들을 막 굴려야 속이 시원해 질 것 같았다.

두들겨 맞은 기사들에게 체력훈련까지 더 시킨 뒤 해산 시켰다.

"전하, 연인 때문에 더 독해지셨네요."

테일러의 투덜거림을 뒤로하고 세이의 막사로 갔다. 세이의 막사에는 이제 규칙적인 숨소리만이 들려왔다.

천막을 살며시 걷어 그 앞을 지켰다. 아직도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듯했다.

나 때문에 겁을 먹은 것일까? 미안했다. 내가 떠난 후 받은 고통도 내 탓이고, 지금 그녀가 받는 고통도 내 탓이니까...

나는 세이의 이불을 여며주고 밖으로 나왔다. 봄바람이 어쩐지 쓸쓸했다.

다음 날 아침 일부러 세이를 찾아갔다. 혹시나 했는데 눈이 아주 퉁퉁 부어 있었다. 그렇게나 무섭고 싫은가? 내가 싫은 것은 아니겠지?

그저 갑자기 대역을 떠맡아서, 갑자기 바뀐 환경이 불편해서 그런 것이겠지?

정령들 중에서 운디네는 회복과 치유 능력이 있었다. 그래서 세이의 부은 눈을 가라앉혀 주려고 손을 뻗었는데, 이런...

세이가 공포에 질린 눈으로 몸을 뺐다. 세, 세이? 나 무서운 사람 아닌데?

결국 눈앞에 있는 수건에 운디네를 불러 냉기를 씌우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세이를 두고 일단 밖으로 나왔다.

"내가 그렇게 싫은가?"

"크크크, 그렇게 애타게 기다리시던 분께 차였습니까? 우리는 덕분에 밤새 열심히 굴려졌는데요."

"시끄러."

유베르 영애는 이번에는 내 칭찬을 단단히 하러 들어 간 것 같았다. 나더러 다정하대. 그런데 세이는 별로 반응이 없네. 쓰읍.

나도 돌아갈 준비를 하고 단정하게 옷을 갖춰 입고 세이를 기다렸다. 세이가 좀 늦자 테일러가 세이에게 타박을 했다.

네 간덩이가 부었구나. 내가 살기를 실어서 노려보자 테일러의 입이 쑥 들어갔다.

이게, 어제 세이 때문에 좀 굴렸다고 일부러 그러는 거지?

세이는 내가 에스코트를 위해 내민 손을 강아지를 핑계로 거절했다. 그래서 그 강아지를 뺏어들고 치우려고 했다. 쳇, 쟤가 나보다 좋다 이거지? 내가 하다 하다 이제 강아지랑 세이를 두고 경쟁을 해야 하다니... 내 신세가 처량해졌다.

넘어질 뻔한 것을 잡아준 것도 난데... 왜 세이는 그 강아지만 좋아하는 거지? 서러워서 중간에 괜히 키가 커진 것 같다고 놀렸더니 움찔하는 것을 보는 재미가 있었다.

세이, 미안. 그런데 네가 너무 귀여워서. 변명하는 모습이 너무 예쁘잖아. 그리고 겁먹지 마. 나 너 해치지 않아.

세이가 마차에 오르고 나도 이어서 마차에 탔다. 그러자 세이의 눈이 완전히 동그래지면서 안절부절못하는 것이 보였다.

아... 그렇게나 나랑 함께하는 것이 싫은가? 조금 위축되려고 했다.

"왜 타요?"

"게이트에서 내리면 황도를 지나치거든. 다정한 황태자 부부의 모습을 보여줘야 제국민들이 좋아한다고."

그녀의 얼굴에 낭패감이 가득했다. 그러더니 큰소리로 자신의 강아지도 같이 타야 한다며 우겼다. 싫어. 절대 태우지 않겠어. 그런데...

"안 돼요?"

세이가 처음으로 제대로 내게 눈을 마주쳐 왔다. 그리고 기다란 속눈썹을 팔랑 흔들며 눈을 깜박여 왔다.

예쁘다. 여신인가? 어릴 때도 요정같이 예뻤는데, 지금은... 숨이 멎을 듯이 아름다웠다. 사랑스러웠다. 지금이라도 달려들어 안고 눈에 키스를 퍼붓고 싶을 만큼 미치도록 눈부셨다.

결국 그녀의 소원을 들어 주었다. 자신의 강아지와 노는 세이는 나랑만 있을 때보다 자연스러웠고 편해 보였다.

그래서일까? 저 하얀 강아지가 미워서 미칠 것 같았다. 게다가 내가 앉아보지도 못한 세이의 무릎에 올라가 앉겠다고 발을 올리지 않는가?

"안 돼."

내 단호한 말에 세이가 이유를 물었다. 순간 말문이 막혔다. 질투가 나서 안 된다고 어떻게 말하겠나? 저 강아지 대신 내가 네 무릎에 앉고 싶다고, 네 손 위에 강아지 발 대신 내 손을 얹고 싶다고 말하고 싶지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급히 핑계를 대기로 했다. 저 개 발이 더럽네. 좋아 이 핑계로 세이 손이라도 잡자.

내가 손수건을 꺼내들고 세이의 손을 닦자 세이가 당황해하는 것이 보였다. 조금 소심한 복수라도 할까?

"결혼반지가 없군."

역시나 세이는 당황해서 핑계를 대기 시작했다. 사실 그 결혼반지, 이미 처제가 남부 왕국에 가서 유용한 자금으로 쓰고 있었다.

그저, 세이가 날 먼저 봐주지 않아서 부린 심술이었다.

"죄송해요."

세이가 너무 걱정하고 당황하는 게 보여서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손을 하얀 강아지에게 옮겼다.

"알비케라 발!"

내가 하는 짓을 의아하게 보는 세이에게 아까 급히 준비한 핑계를 열심히 읊었다.

"고귀한 나의 황태자비의 몸에 더러운 흙을 묻힐 순 없잖아? 알비케라, 앞으로 황태자비의 무릎에 앉고 싶으면 언제나 발부터 닦아라."

"멍!"

세이가 키우는 강아지이니, 세이 말은 잘 알아듣겠지. 그런데 내 말도 알아듣는 것 같았다. 똑똑하네.

"수컷인가?"

"암컷이에요."

그렇군. 그렇다면, 뭐, 세이의 무릎을 양보해 줘도 되겠어. 일단 세이의 손을 잡는 목적은 달성했으니 봐주자.

에효, 어쩌다 내가 세이의 손도 못 잡는 신세가 된 거지? 예전에는 늘 손잡고 다니고 꼭 끌어안고 잤는데. 한심해.

손에 서류는 많았지만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 저기..."

아까부터 세이가 날 힐끔거렸다. 의식하고 있었지만 최대한 덤덤하게 답했다.

"왜 그러지?"

"소매에 개털이 묻어서..."

잘 못 떼는 척하면, 세이가 떼주지 않을까? 은근한 기대감에 애써 열심히 떼지 않고 대충 털었다. 아니나 다를까.

"휴우, 이리 줘봐요."

자신의 자리에서 일어서서 세이가 내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살짝 허리만 숙이더니 내 소맷자락과 가슴 부근의 개털을 찾아 손톱으로 살살 긁기 시작했다.

어째서 직접적인 접촉이 없는데도 세이의 손이 내 피부에 닿은 느낌이 들까? 간질간질, 세이의 손톱의 움직임이 내 마음속을 파고들어왔다.

갑자기 심장이 튀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내 귓가는 심장소리만으로 가득 찼다. 이 소리가 너무 커서 세이의 귀에 들리는 것은 아니겠지?

세이가 잠시 마차 밖을 들여다봤다. 그런데 기사 놈들이 흐뭇한 눈으로 우릴 돌아 보는 게 느껴졌다.

세이 모르게 내가 고개 치우라고 작게 입모양으로 말하자 일제히 고개를 돌려버리는 놈들이었다.

세이는 이제 반대편 소매의 개털을 털겠다고 손을 내밀었다. 세이가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나도 고개를 따라 돌리다가 시선이 한군데 멈춰버렸다.

크흑. 피가 쏠리는 것 같아. 위험해. 뭘 해야 하지? 추하게 코피 흘리고 이러면 안 되는데!! 얼굴에 계속 열이 몰려들었다.

잠깐, 아까 그 새끼들이 창틈으로 세이의 가슴을 내려다보고 흐뭇하게 웃은 건 아니겠지? 그놈들 눈을 뽑아버릴까?

나는 온갖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고개를 돌리지 못하고 뻣뻣하게 굳어서 내 정면을 응시했다.

내 기억 속의 꼬마 요정은, 훌러덩 옷을 벗고 물에 뛰어들던 그 시절의 요정은, 나와 가슴이 그다지 다르지 않았는데.

세이는 너무 잘 성장했다. 잘 먹지도 못하고 학대받았다는데 왜 저렇게 발육 상태가 좋은 건데?

세이에게 안 예쁜 구석이 없는 것은 알았지만... 윽... 힘들다.

나 좋다고 거의 벌거벗고 달려들었던 여자들에게서는 느끼지 못했던 내 안의 욕망이 꿈틀댔다.

정말... 다행이었다. 오늘 밤은 공식 합방일이었다.

꿀꺽, 침을 삼키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는데 갑자기 세이가 내게 말을 걸었다.

"전하?"

"크, 크흠. 왜?"

"얼굴이 왜 그리 빨개요?"

"그, 그야. 그대의 몸이 내 눈앞에 붙어 있으니까."

최대한 돌려 말했다. 하지만 내 시선은 계속 한곳에 머물러 있었다. 세이, 나도 지금껏 내가 금욕과 절제로 다져진 인간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네가 내 숨겨진 욕망의 용들을 불러일으킨 것 같아.

"꺅! 어딜 봐요!"

내 시선을 느낀 세이가 제 앞을 팔로 가리며 후다닥 뒤로 물러났다. 아, 아쉽다. 모르는 척 그냥 과로한 사람처럼 픽 쓰러지면서 안겨 버릴걸.

이미 지나간 일은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

한참이나 우리는 서로 말을 붙이지 못하고 어색하게 앉아있었다. 마차 안의 공기는 점점 차가워져만 갔다.

더 이상 세이가 내 옷에 붙은 개털을 떼어줄 것 같지 않아 실프를 불러 처리했다. 세이는 볼에 바람을 불어넣고 잔뜩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내 소맷자락만 쳐다봤다.

"기왕이면 내 손 말고 얼굴을 들여다 봐주면 안 되나? 손도 예쁘지만 얼굴은 더 잘생겼는데."

"예뻐서 본 거 아니거든요?"

세이가 뾰로통하게 대답하는 모습에서 예전의 꼬마 요정의 모습이 떠올랐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내 요정님.

내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이제 곧 저 게이트를 통과하면 세이는 내 곁에 영원히 머물게 될 것이다.

과거의 기억은 지워져 버렸지만 우리에게는 새로운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밑바닥부터 새로운 신뢰를 쌓아야 하는 부담감은 있었지만, 걱정되지는 않았다. 분명 내가 사랑하는 만큼, 세이도 날 사랑하게 될 테니까. 내가 본능적으로 그녀를 알아봤던 것처럼 - 물론 루카스 때문에 어긋날 뻔했지만 - 그녀도 내가 케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어린 시절의 풋사랑이 기다림을 거쳐 잘 영글었다. 어릴 때는 내가 도움을 받고 보호받았지만, 이제는 내가 너를 돕고 지킬게.

게이트를 앞두고 잔뜩 겁을 먹은 세이였다. 한 번도 써본 적 없었나 보았다. 귀족 영애인데도, 아무것도 누리지 못하고 살았다는 사실에 또 가슴이 저며왔다.

내 앞에서 처제인 척 애쓰는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울컥했다.

겁먹지 않게, 내가 곁에 있음을, 너의 든든한 지지자가 나임을 꼭 알려주고 싶었다.

"겁이 나면 내 손을 꽉 잡든가. 내가 그대를 안전하게 지켜줄 테니."

내가 내민 손 위에 세이가 찰싹 손을 얹었다. 바로 빠져나가려는 그녀의 보드라운 손을 힘을 주어 잡아당겼다.

그리고 그 손등 위에 키스를 하며 마음속으로 기사의 맹세를 했다.

나, 카일룸 헬리오스 데피니토르는 나의 하나뿐인 반려, 아르세이아에게 몸과 마음과 생명을 바칩니다. 나의 모든 것은 그대의 것이며, 그대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임에, 그대만을 위해 살 것을 맹세합니다.

다시 만난 우리. 이제는 떨어지지 말고 마지막 날까지 함께하자.

"아르세이아, 내 곁으로 와줘서 고마워. 잘 지내 보자구. 나의 비, 세이."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