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태자비의 대역으로 살아남기-96화 (96/126)

96화. 진실을 마주보려는 용기. (1)

2018.07.21.

귓가를 스치는 소리에 순간 몸이 굳었다. 카일과 내 뒤를 따르던 알리페르, 프리케도 잠시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 여기서 고개를 돌려 소리나는 곳을 바라보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고개가 돌아가려는 본능을 참아냈다.

아직은 다른 사람들에게 내 진짜 신분이 알려져서는 안 됐다. 카일이 받고 감당해야 할 정치적 부담이 컸다. 그것은 막고 싶었다. 나로 인해서 카일이 힘든 것은 싫었다.

언제나 누군가가 나를 주시하고 있을지도 몰라. 당황해서도 안 되고, 관심 가져서도 안 돼! 그저, 못 들은 척 무심하게 흘리자.

"세이 괜찮아, 프리케가 저 사람들 따로 감시할 거야."

"내 정체가 벌써 드러나면 황후파에서 공격해 올지도 몰라요. 볼라드 공작도 속았다고 생각하고 등돌리면 어떡해요?"

"괜찮아, 괜찮아. 나는 네 정체가 언제든 발각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런 경우의 대책도 세워 뒀으니까, 염려하지 마."

마차로 걸어가는 동안 우리는 귓속말을 나누었다. 다들 다정한 부부의 대화로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긴장으로 굳어진 나를 카일이 계속 달래는 중이었다.

손이 축축해 질만큼 식은땀이 흘렀다. 그런 내 손을 단단히 지탱해주는 것은 카일이었다.

"어떤 경우에도 나는 널 지켜. 다시는 널 지옥에 빠트리지 않겠다고 했잖아."

그래, 믿어야지. 내가 카일이 아니면 누굴 믿어? 믿어야 지, 믿어야 되는데...

마차에서 계속 긴장된 상태로 앉아있자 카일이 실프와 살리맨더를 불러 주었다.

"정령들도 네가 긴장한 것 보고 잔뜩 놀랐어. 걱정해주네."

"아, 고마워요, 실프님, 살리맨더님."

나를 포근히 감싸주는 따뜻한 바람이 느껴졌다. 정령들은 알비가 말하는 것처럼 나쁘기만 한 존재는 아닌 것 같은데...

비록 계약관계라지만 카일이 이렇게 사심 가득 이용해 먹어도 늘 불만 없이 다 들어줬잖아. 나는 정령에 대한 생각으로 주의를 돌려 놀란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조금 진정이 되자 아까의 목소리들을 차분히 생각했다.

세이렌의 존재를 안다면, 하늘 저택에서 살기 시작한 이후에 만난 사람일 것이다. 어쨌든 아버지의 딸이었던 나를 거리낌 없이 부를 수 있는 여자라...

"카일, 으음, 혹시 나에 대해서 아는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거나 하진 않을 거죠?"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혹시 프리케가 붙어서 감시하는 것이, 오히려 주목을 끌지 않을까요?"

"일리 있어."

"일단, 아버지의 이혼 허가서가 떨어지면 어머니와 비스가의 사생아의 존재에 대해서도 드러날 테니까..."

"그래, 알았어. 그때까지 너무 관심 끌지 않도록 주의할게."

카일은 다시 한 번 나를 안심시켜 주었다. 사실 카일을 믿지만, 혹시나 내 안전을 위해 죄 없는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게 될까 걱정도 되었다. 그렇게 되면 나는 또 저주받은 존재가 되는 기분이 들 것 같았다.

고아원 아이들과 함께했던 설렘은 어느새 불안함으로 바뀐채 환궁하게 되었다. 프리케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비 전하, 왜 이렇게 손이 차요? 어머, 안색은 또 왜?"

오늘 황궁에 남아있던 에이린이 날 걱정하며 뜨거운 수건을 가져왔다.

"누님의 옛 이름을 아는 이가 있었습니다."

"네? 그래서요?"

"그냥, 나더러 세이렌이랑 닮았다고 한 거야."

최대한 별일 아닌 듯, 대수롭지 않은 일인 듯 말했다. 하지만 에이린의 표정은 쉽게 펴지지 않았다. 이미 카일이 여러 차례 살리맨더를 불러주었음에도 효과가 없던 내 손을 주물러주고 화로도 채우고, 날 살뜰히 보살펴줬다.

물론 놀란 내 손은 여전히 쉽게 데워지진 않았다.

"세이, 괜찮아?"

"다들 그렇게 걱정하면 내가 민망해져요. 내가 지레 겁먹은 거니까, 음... 진짜 괜찮아요. 나랑 여동생이랑 워낙 쌍둥이처럼 닮았고, 그 사람들이 떠들고 다녀도 그저 비스가의 사생아를 떠올리게 되겠죠."

그래 그럴 거야. 솔직히 카일이 내 정체를 알고 있다고 너무 편하게 생각하고 살았다.

대외적인 활동을 하다 보면 우연히라도 세이렌을 아는 사람을 마주칠 수도 있었다. 심하면 과거의 저주받은 소녀를 아는 사람도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을 잊고 지냈어.

후작부인이 미쳐가고 있으니, 언제든 그쪽에서도 말이 흘러나올 거고... 몬테 공작이 자신의 가문을 지키려 그녀의 입을 막고는 있겠지만, 알 수 없지 뭐. 내게 원한이 크다면 같이 자멸하자고 덤벼들지도.

에이린이 준 따뜻한 차를 마시며 몸과 마음을 데웠다. 그런 내 곁을 지키는 카일과 알리페르, 에이린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비 전하!"

"프리케!"

"누군지 찾아냈나?"

"예, 전하. 너무 심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예전 비 전하께서 영지 목장에 살 때, 목장 관리인 부부와 그 아들이었습니다."

아, 토미랑 그 부모님인가?

"그들이 황태자비가 세이렌과 닮았다는 말을 옮길 가능성은?"

"그들과 연이 있어 우연히 만난 것 처럼 접근했습니다. 그들은 비스 후작님의 둘째 아가씨의 얼굴을 거의 못 봐서요. 일단, 제가 세이렌과 닮은 둘째 아가씨라고 했습니다."

아, 맞다. 토미는 스타티나를 본적 있지만 그 부부는 본 적이 없었다. 스타티나가 후작부인을 피해서 몰래 찾아왔으니까.

"수긍하더군요. 세이렌이 갑자기 사라져서 걱정하는 모양이었습니다. 해를 끼칠 자들은 아니니 걱정 마십시오. 그리고 가족 행사 때문에 올라왔고 다시 영지로 돌아갈 예정입니다. 오는 길에 후작님께 보고드려놨으니 적절한 조치를 취해주실 겁니다."

"후우..."

내가 한숨을 크게 내쉬자 다들 날 돌아봤다. 아, 민망하다 진짜. 괜히 별일 아닌 일로 수선을 떤 기분이었다.

"하지만, 방심해서는 안 돼. 여전히 세이를 노리는 자들은 작은 단서도 주시할 수 있으니."

"맞습니다. 누님, 당분간은 황궁 밖을 돌아다니는 것도 자제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시무룩. 요즘은 습격도 줄고, 카일이랑 괴수 쫓아다니고 그래서 나가는 재미가 있었는데...

"세이렌을 알만한 평민들이 나타날 확률이 높은 일들만 줄이지."

우와!! 역시 우리 남편!! 고마워요.

"황궁에 가둬두면, 우리 세이 가출할지 몰라."

"하긴, 예전에 누님이 자주 담을 넘었죠."

"제가 비밀 호위가 되고 나서도 몇 번 도망치셨습니다. 어찌나 잘 나가시는지... 조심하십시오, 전하."

그건 내 생존을 위해서였잖아, 이 사람들이!!! 내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려는 이 가상한 노력들을 보게!! 가만 안 둬!!

"나, 진짜 가출할래."

"잘못했어!!"

결국 카일이 싹싹 비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아는 사람들이고 그저 단순히 세이렌을 입에 올렸을 뿐이기에 마음이 조금 편해지긴 했다. 하지만,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나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언젠가는 밝히자고 했지만, 과연 한때 저주 받았다는 소리를 듣고 살았던 나를 제국민들이 받아 줄까?

다들 물러나고 카일과 둘만 남아서 쉴 때 나는 이런 고민을 카일에게 털어놓았다.

"어릴 때 날 알던 사람들이 나를 황태자비로 받아줄까요? 나를 불길한 존재로 생각할 텐데..."

"세이, 지금 네가 보여주고 있는 행보를 보면 그런 말이 소수나온다 하더라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거야. 그리고 나는, 흐음. 네 기억이 잘못됐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

"아..."

하긴, 화재사건에 대해서도 잘못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위로하려고 하는 소리가 아니라, 그 찢어 죽일 여자가 네게 말도 안 되는 짓들을 많이 했잖아. 일기장에 드러나지 않는 나쁜 짓들도 많이 했을 거야."

내가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 동생들의 모친이라 욕하고 싶진 않지만, 그래도 사실이니까!

"다음에 어머니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여쭤봐야겠어."

카일은 안 좋은 기억들을 떠올리고 내가 고통받을까 봐 반대했다. 하지만 피하기만 하면 언제나 도망치고 덮어두기만 해야 하니까...

그래서 지금 나는 카일이 어머니를 위해 마련 해둔 안전 가옥으로 왔다. 비교적 황성의 외곽에 위치한 집이고, 특별히 주목받을 만한 외관도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겉보기에는 귀족이 살만한 집이 아니었다.

단지 높은 담과, 정령들이 만들어준 결계 때문에 일반인의 출입이 어렵다는 정도? 허락받지 못한 자는 입구를 찾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오오, 내 남편 능력 최고!!"

내 칭찬에 카일이 입을 헤벌쭉했다. 어째서 이러십니까? 카일이 케이라는 것이 밝혀진 뒤 뭐랄까... 이제는 신비감이 사라진 듯. 어째서 이렇게 긴장감 없이 이리도 편하신가요!!

오늘도 괴수 퇴치를 명분으로 황궁에서 나온 뒤, 조금 일찍 일을 마무리 짓고 - 오늘은 귀여운 병아리였다. – 정예 멤버만 먼저 빠져나온 참이었다.

"세이, 전하. 어서 오세요."

"어머니."

나는 쪼르르 어머니의 품으로 달려들어 안겼다. 지난 세월 하고 싶어도 참아야만 했던 어리광을 마음껏 부리기로 했다.

"비 전하, 너무 이러면 남편이 흉봐요."

"흉이 아니라 질투니까 내버려 둬도 돼요."

내 말에 카일이 헛기침하는 소리가 들렸다. 많이 찔리시나 봐요, 남편님?

어머니는 내가 온다고 해서 오래간만에 솜씨를 발휘하셨다. 요리사를 둘 만큼 부유하지 않은 자작가였기에 어머니는 어릴 때부터 요리를 배우셨다고 했다.

게다가 나 때문에 나가서 살면서는 더 요리를 많이 하셔서 수준급이셨다.

"으으음!! 이 맛이야!!"

내가 너무 맛있게 먹자 카일과 어머니의 얼굴에 미소가 퍼졌다.

"장모님 요리 솜씨를 세이가 닮았나 봅니다."

"어디 내놓을 실력은 아닙니다. 가정식 요리 정도인걸요. 게다가 귀족들이 먹기에는 고급스럽지도 않고요."

"제 입맛에도 맞습니다."

"어머, 황태자께서 인정해주시니 뿌듯하네요."

카일은 밥 잘 먹는 사위의 모습을 보여주려는지, 연거푸 그릇을 비웠다. 잘 먹으니 보기 좋네. 그런데, 이거 내가 어릴 때 좋아하던 거라 진짜 서민음식인데...

양파와 각종 채소들만으로 만든 스튜였다. 거기에 단단한 곡물빵.

물론 그럼에도 어머니의 요리 솜씨가 뛰어나 맛있긴 했지만...

"전하가 오신다고 해서 고기 파이도 구웠어요. 생각보다 일찍 오셔서, 이제야 익었네요. 드셔보세요."

사위 대접하느라 고기 파이도 구우셨어!! 그거 나 어릴 때는 내 생일 때나 먹었던 건데!! 당신 정말 제대로 대접받는 거예요.

"리아, 나 왔소."

"어머니, 저도 왔어요."

아버지와 알리페르가 뒤늦게 나타났다. 윽... 이건 못 뺏겨.

"카일, 이건 어머니의 특선 요리에요. 뺏기면 안 되니 얼른 먹어요."

"아니, 비 전하! 두 분만 드시다니요!!"

역시 아버지도 이 고기 파이의 진가를 알고 계셨다. 후훗. 그러나 마지막 조각은 우리 입속으로 들어간 후였다.

아버지는 애써 키운 딸이 시집가더니 남편만 챙긴다고 서러워하셨고, 알리페르는 배를 잡고 웃느라 한바탕 소동이 일었다.

고기 파이 한 조각에 불효녀 소리를 듣다니... 쩝, 그래서 어머니와 함께 고기 파이를 새로 함께 구워서 아버지랑 알리페르에게 먹여야 했다.

"내가 청소년기를 보냈던 황궁과 다르게, 여기는 사람 사는 곳 같군."

카일의 조금은 씁쓸한 목소리가 들렸다.

"카일, 지금은 아니잖아요."

내가 어머니를 도와 정리를 끝내고 카일 곁에 앉으면서 미소 지었다. 내가 있어서 살맛 나는 곳 아닌가요? 호호.

"그리고 우리 가족도 얼마 전까지는, 황궁보다 더 삭막했어요."

내 말에 알리페르가 빙긋이 웃으며 말을 받아줬다.

"매형이 아니었다면, 누님은 아직도 눈물만 흘리셨을 겁니다. 아버지도 의무만 지키는 근엄한 가장이었겠죠. 다 매형 덕분입니다."

아버지의 얼굴이 살짝 빨개진 것은 기분 탓이겠지? 우리 아버지도 귀여운 구석이 있으셨어.

자, 이제 어느 정도 정리됐으니 본론에 들어가 볼까?

"어머니, 오늘 오겠다고 한 거 말이에요. 제가 어릴 때 있었던 사건들을 듣고 싶어서예요. 아버지가 절 찾게 된 과정 이 알고 싶어요. 그러니까 제가 저주받았다는, 마녀라는 소리를 왜 듣게 된 걸까요?"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