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조신하지 못한 남편 같으니!
2018.07.30.
카일의 목소리에 잔뜩 긴장하고 애가 탔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황급히 마부석에 노크를 해서 앞에 앉아있던 시종에게 물병을 받았다.
"카일, 잠시 기대앉아봐요."
내게 작지 않은 덩치의 남자를 마차 안에서 낑낑대며 앉혔다.
"정신이 들어요? 어지럽진 않고?"
"뜨, 거워."
물병의 물을 입에 조금 흘려보냈지만 카일은 잘 받아먹지 못했다. 카일의 입으로 흘려보낸 물은 그의 턱을 따라 내려와서 옷을 적실뿐이었다.
어쩔 수 없이 내가 입으로 전해줄 수밖에 없었다.
한가득 물을 입에 머금은 뒤 그의 입을 통해 물을 흘려보냈다.
"윽!"
이 인간!! 정신 차렸네!!
내가 황급히 그의 입술에서 떨어졌음에도 카일은 입을 옹알거리고 있었다.
"당장 운디네 불러요. 화내기 전에."
"나, 진짜 뜨겁고, 힘없는데..."
"얼른요."
"운디네..."
진짜 못 말려. 기운이 없어 보이는 것은 맞았다. 그렇지만 정신 차린 것도 사실이었다. 정신 차렸으면 당장 정령을 불러다가 회복시켜야지, 뭐 하는 짓인데 진짜!!
"운디네님, 카일 몸에 남아있는 수면제인지 뭔지랑 미약이랑 다 정화시켜줘요."
"안, 돼, 운디네... 수면제만, 해독해. 미, 약은 아직, 못, 써먹..."
"야 인간아!!"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힘으로 카일의 팔을 내려쳤다. 찰싹 소리가 났는데 뭐가 좋은지 카일은 히죽거렸다.
"헤에, 세이 손, 길, 다, 좋... 아."
단단히 미쳤네. 이렇게 좋아하는데 설마 미약에 당해서 사고 친 것 아냐?
"무슨 일 있었는지 당장 말해요. 하나도 빠짐없이."
운디네가 수면제 성분은 완전히 해독시켰는지 조금씩 몸은 가누는 카일이었다. 그런데 미약은 여전히 정화시키지 않았는지 여전히 카일의 몸이 뜨거웠다.
"네가 입구에서 귀족들에게 붙들렸다고 와인이나 마시고 기다리고 있으라 하길래 마셨지."
"낯선 사람이 주는 것을 의심도 없이 마셔요?"
"음... 볼라드 공작을 믿기도 했고. 사실 독이 있는지는 혀끝만 대도 아는 걸. 후우... 운디네한테도 확인 시켰는데 독은 없다잖아."
카일은 중간중간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왜 미약은 아직도 해독 시키지 않는 거야?
"카일, 미약도 당장 해독 시켜요."
"아, 아까운데. 우리의 뜨거운..."
"각방 쓸래요?"
"운디네! 당장 해독시켜!"
나는 한참이나 이 철없는 남자를 노려봤다. 카일은 그런 나를 보고 움찔하면서 있었던 일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미약이 있는 것을 알고도 마구 퍼마셨다는 거예요?"
"마구라기보다는..."
"무슨 부작용이 있을지 알고!!"
"미약의 부작용이야 뭐... 그리고 운디네가 대기하고 있었고..."
"수면제도 있었잖아요."
"그건 내가 좋다고 너무 많이 마셔서... 그건 내가 방심. 음, 그리고 수면제라기보다는 신경을 나른하게 해서 판단을 흐리게 하려는 약이라던데?"
공녀의 속셈이 완전히 보이는 짓이었다. 그대로 카일을 덮치려는 것이었다. 하아, 어이없어. 상대방이 원치 않는데 무슨 쓰레기 같은 짓이야?!
"그래서 공녀가 원하는 대로 당해줬어요?"
"무슨 소리야!! 내가 정조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데!! 나는 냄새만 맡아도 세이인지 아닌지 구별한다고!! 계속 구린 냄새의 여자가 너인 척 들러붙어서 계속 밀어내고 쳐내느라 힘 빠져 죽는 줄 알았단 말이야."
"결국에는 잠들어서 쓰러졌잖아요. 그사이 무슨 일을 당했는지 어떻게 알아요?"
"그대의 남편은 소드마스터라고!! 잠이 든 상황에도 오감을 열고 적아를 구별하고 대처해."
"그래서 내가 밖에서 그렇게 애타게 당신을 부르는데도 잤어요?"
"그, 그건 네가 결국 날 찾으러 올 줄 알았으니까, 기다리다보니 그 여자도 도망갔고... 그러다 진짜 깜박 잠들었어."
"당신한테 아무 일 없었다는 확신을 어떻게 하죠? 당신 밝히는 남자잖아요."
"우와, 억울해!! 내 옷 멀쩡한 것 봤잖아. 나는 네게만 내 순정도, 순결도 다 바쳤어. 믿어도 돼. 아니 꼭 믿어야 해"
카일이 너무나도 진지하게 말했다. 그리고 간절하게, 애절하게 내게 애원했다. 그의 눈빛이 자신은 오로지 나의 것이라고 말해줬다.
"멍청한 카일!! 한 번만 더 이런 일에 휘말려 봐요!!"
"응, 나는 네가 금방 나올 거라 생각하고 네게 온 힘을 바치려고 그거 마시고 있었던 거라니까. 아깝다, 불타는..."
쫘악!! 이 변태 남편아!! 정신 못 차리고 헛소리하고 있어!!
"윽! 나 환자야, 아파아."
결국 내가 눈물을 글썽이자 카일이 미안해서 어쩔줄 몰라 했다.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끝까지 농담하고 있어.
"저기, 세이, 미안해, 정말 네가 보낸 와인이라 생각했어."
카일이 날 꼭 껴안고 토닥여 주었다.
"내가 미약 같은 것을 왜 넣어요."
"그러게, 내가 분위기에 취해서 방심했나 봐. 진짜 미안. 나는 너랑 관계된 일이면 다 판단이 흐려지는 멍청이었나 봐."
"진짜 바보야. 너무해."
"그러게, 내가 왜 그랬나 몰라. 진짜 미안해."
나는 카일의 품에 안겨 그의 가슴을 마구 때리며 엉엉 울고 말았다. 그리고 카일은 그런 나를 하염없이 달래야했다.
그리고 카일은 그날 밤 내 침실에서 쫓겨날 위기는 면했다. 하지만 벌로 내 몸에 손끝 하나 대지 못했다.
다음날 황궁은 발칵 뒤집혔다. 공녀를 비롯한 죄인들이 잡혀들어 온 것이다.
우리는 아바마마께 전날 있었던 일을 말씀드리러 갔다. 아무래도 공작 가문이 반역죄에 연루되었으니 상의를 드려야 했다.
"아가, 네가 마음 고생을 했다며?"
요즘 부쩍 수척해진 폐하는 기운이 없는 와중에도 나를 걱정하고 위로해주셨다. 그리고 아들을 크게 혼내셨다.
"어릴 때도 그리 사고를 치고 다니더니, 어여쁜 아내를 두고 참으로 예쁜 짓을 저질렀구나. 쿨럭."
할 말이 없는 카일은 그저 입을 다물고 있었다.
"사나이 대장부가 조신하지 못해서야, 쯧! 쿨럭쿨럭!"
그러게요. 우리 남편 조신하지 못한 것 같아요! 그짓을 그리도 밝히니까 뻔한 수작에 넘어갔지!
"며늘아이한테 싹싹 빌었느냐? 쿨럭."
"아바마마, 혼도 냈고 카일에게 사과도 받았어요. 그런데 왜 계속 기침을 하셔요? 감기에 걸리신 거예요? 카일, 살리맨더님이랑 운디네님 불러줘요 얼른."
"어."
카일이 부른 정령들은 폐하를 진정시켜주었다. 체력도 많이 떨어지고 쉽게 감기에 걸리다니, 아바마마도 많이 늙으셨네.
효도해야 하는데 이렇게 걱정이나 끼치고...
"아바마마, 날이 추워져서 산책도 못하고 힘드시죠? 건강 관리도 하셔야 하는데, 요즘 자주 아프신 것 아니에요?"
"아니다. 그저 요즘 계속 기력이 떨어진 것 뿐이란다. 나도 늙었지 않느냐."
"아직 정정하실 나이잖아요."
"나는 내 손주랑 손녀 보기 전에는 쓰러지지 않을 것이니 걱정 말거라."
"죄송해요. 제가 부덕해서..."
"아니다, 아가. 너희 부부처럼 제국의 백성들을 아끼는 황족들이 어딨다고 그러느냐. 네 고운 심성에 감동받은 하늘이 곧 좋은 소식을 내려 줄 테니 너무 초조해하지 말렴."
아바마마는 오히려 나를 위로하며 언제나 내 편임을 확인해주셨다. 공녀 욕도 해주시고, 카일을 계속 혼내주시고. 역시 고마운 분이셔.
우리는 앞으로의 처분에 대해서 심도 있게 대화를 나누었다.
콘스탄트 공작가의 수장을 바꾸는 것과 파멸시키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위험부담이 적은지에 대한 논의를 했다. 또한 루피넬리아의 정세에 대해서도 폐하와 카일은 열심히 대화를 나누었다.
"아, 그 도움을 청했다는 거물급 인사가...?"
"어."
"정말 잘 됐네요. 우리 쪽에서는 명분도 얻은 셈이네요?"
"그렇지. 지원하기 더 좋아졌어."
"프리케에게 큰 도움이 되겠네요."
대행이다. 프리케랑 유리아도 좀 더 쉬운 길을 갈 수 있겠어. 잘 됐으면 좋겠다. 꼭!
"우리 아가는 아랫사람들도 챙길 줄 아는구나. 그래, 자고로 밑의 수하들을 잘 챙겨야 인덕을 얻는 법이지."
"아바마마께 배운걸요."
내 말에 허허허 웃는 아바마마셨다. 아바마마는 내가 뭘 해도 이쁜 모양이었다. 그 점은 카일이랑 똑같았다. 부전자전. 그래서 내 황궁 생활이 편해졌지만.
"그리고 아가, 네 아버지의 이혼 말이다. 보름 내로 서류 처리가 끝날 것 같구나. 이제 다시 마음고생이 시작될 텐데 괜찮겠느냐?"
"사가의 일로 걱정을 끼쳐드려 송구스러워요."
"몬테가의 여식이 언젠가는 사고 칠 줄 알았었다. 허나 네 잘못이 아니질 않느냐. 네 피는 그들과 섞이지 않고 맑아서 다행이란다."
윽. 역시 아셨구나...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죄를 빌어야 하나?? 무릎부터 꿇어야 할까? 아바마마께 나를 속인 거니까. 그런데도 날 이뻐해 주시다니. 어찌해야 하지?
안절부절못하는 내 눈빛이 마구 흔들렸다.
"허허허, 그렇게 놀라지 말거라. 네가 처음 내게 인사 온 날부터 알았단다. 내 아들이 국혼 때도 웃질 않았는데, 네가 온 뒤로는 웃지 않았느냐."
"죄송해요. 이렇게나 아껴주시는데, 저는 아바마마를 속이기나 하고..."
"애초에 속인 건 나야. 네가 아니라."
내 목소리가 기어들어 가자 카일이 내 역성을 들어 주었다. 그래도 대역을 수락하고 들어온 것은 나인걸. 카일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은 뒤에도 아바마마께는 사실을 말하지도 않았고...
"그렇지. 이놈이 지 아비도 속이고 일을 저질렀지. 나는 네 신분이랑 관계없이 널 인정했을 거란다. 이놈이 국혼 전에 처음부터 말했으면 더 적극적으로 도왔을 텐데 말이다."
"아바마마..."
"내게 너는 내 아들을 살려주고, 아들의 웃음을 돌려주더니, 결국 내가 다시 아들을 찾게 해주지 않았느냐. 너는 내게 축복받은 아이란다."
내게 축복은 카일이었다. 세상의 모든 사랑을 가져다준 존재. 가족의 사랑도 되찾아주고, 새로운 가족도 만들어주고, 너무 소중한 존재.
그리고 그런 카일을 누구보다 소중히 키워왔을을 아바마마셨다.
그런 분이, 어쨌든 사생아인 나의 존재를 인정하고 축복이라 말해주셨다. 오해와 소문의 산물이란지만 지금껏 저주란 말을 듣던 나에게 축복이라고 해주시다니...
나와 카일의 관계를 모두 다 알고 계셨구나. 그래서 더 예뻐해 주셨어.
"평생 효도할게요. 그러니 오래오래 사셔야 해요. 아셨죠?"
나는 황실 예법도 잊고 아버님을 꼭 껴안고 말씀드렸다. 그 모습에 카일이 약간 불만스러운 헛기침을 하는 게 들렸다.
"허허허, 아가, 이러다 네 남편이 또 날 미워하겠구나."
진짜 웃긴 남자야. 제 가족들까지 질투하다니, 바보. 그래도 그런 모습이 좋았지만.
"카일은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미워하지 않아요. 걱정 마세요."
"그건, 부정 못하겠네요. 게다가 아바마마는 세이를 친부모님들 만큼이나 아껴주시니, 소자가 어찌 미워하겠습니까?"
카일의 말에 폐하는 정말 기분 좋게 웃으셨다.
"내가 줄을 잘 섰구나. 아가, 역시 내가 너와 친해지길 잘 한 것 같아."
응? 사실, 황제 시아버지의 권력을 잡으려 한 것은 저였습니다만. 서로 윈윈으로 하시죠.
역시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했다. 아바마마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친딸처럼 대해주셨다.
"이번에 일이 잘 해결돼서 황후파를 온전히 찍어누르고 나면, 내 황위를 네게 물려줄 생각이다."
"아바마마!"
나는 차마 옆에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이미 황제 대리로 황제나 다름없이 국정을 돌보는 카일이었다.
하지만 황제랑 대리랑은 무게감이 다른 일이었다.
"나는 쉴 때가 됐어. 그리고 무능력한 나보다는 너희들이 이 제국을 잘 이끌 거라는 확신이 드는구나."
"아직은 정정하시잖아요."
"세이의 말이 맞습니다. 강건하시지 않습니까?"
"사실, 콘스탄트 공작 덕에 황위에 오른지라 그들에게 내가 너무 휘둘렸지. 그래서 자식도 잃고, 상처도 줬고..."
회환에 잠긴 황제 폐하의 모습은 조금은 초라한 남자의 모습이었다. 분명 아바마마도 괜찮은 황제셨다. 큰 업적은 없었으나 백성들에게 고난 없이 무난하고 평온한 삶을 선사해 주셨으니까.
하지만 황제이기에 자식을 잃어야 했던 고통은, 아버지로서 견디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짐을 이제 내려놓고 싶으신 것이겠지.
특정 세력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일어선 카일이라면 자신과 같은 실수는 반복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으신 것 같았다.
나는 아바마마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조금만 더 있다가요. 황손에게 든든한 황제 할아버지 모습은 보여주시고, 그때요. 공작을 처리하고 나면 아바마마도 편해지실 거잖아요."
"이 녀석들, 이 아비가 좀 편안한 여생을 보내겠다는데, 방해하는 것이냐?"
폐하는 결국 뜻을 굽히지 않으셨다. 그리고 그 길로 계획대로 일을 처리하라며 우리를 쫓아냈다. 어쩔 수 없이 밖으로 나오는 발걸음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카일..."
"어, 일이 다 끝나고 우리에게 다 물려주기까지 하시면... 갑자기 늙으시겠지. 지금도 그러신데..."
"이제는 문안도 더 자주 드리고, 재롱도 피워드려야겠어요."
"재롱은, 음, 손주가 부려야 하는데, 세이가 이제 손도 못 대게 하니까..."
"후우, 따라와요."
용서해준 것 아니다. 연회 준비로 며칠 쉬어갔다고 욕구 불만도 아니었다. 아바마마의 소원이니까, 얼른, 손주 만들어야 해서 허락한 거야. 흠흠! 효도해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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