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후련함 vs 공허함. (2)
2018.08.06.
"카일!!"
나는 카일의 목에 팔을 감고 매달렸다. 꿈이었지만 너무 생생했다. 떨어지는 느낌이 좋지 않았다.
"악몽을 꾼 거야? 끙끙거리길래 불렀는데, 놀랐어??"
꿈... 꿈 내용이 갑자기 잘 기억나지 않았다. 하얀 새가 내 품에서 놀던 것만이 선명했다. 내가 왜 떨어졌지?
카일이 계속 토닥 거려 주자 놀란 마음은 진정이 되었다.
사실 후작부인의 장례식이 진행되는 동안 나는 아바마마를 뵙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두문불출 중이었다. 그리고 카일 외에는 누구도 만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장례식을 가야 했다. 그래서 좀 불안했던 걸까?
"괜찮아졌어요. 절벽에서 떨어지는 꿈꿔서..."
"키 크려나? 다 커서 키 크는 꿈꾸고 그래?"
"더 크면 좋죠."
"지금이 내가 안았을 때 딱 좋거든, 더 크지마."
"풉. 이제 그만 떨어져요."
"싫어, 안은 김에 더 안고 있자."
으휴, 이 변태! 안고 있자면서 손이랑 입은 왜 움직여? 뭐, 오후까지만 나가면 되고, 치장할 것도 많이 없으니... 조금만 더 있지 뭐.
결국 점심 즈음에야 방에서 나왔다. 에이린이 있었다면 놀렸겠지만 모일라와 유리아 외에는 내 사정을 몰랐기에 다들 내 걱정을 했다.
"많이 야위셨어요. 어쩜 좋아."
크흠... 좀 찔리네. 너희들이 생각하는 그 이유가 아니야!!
"굳이 화장은 짙게 하지 않아도 좋아."
그래야 아파 보이니까. 일단은 피곤한 티를 팍팍 내자. 그런데 가서 울어야 하나? 우는 연기 힘든데...
다행히 검은 베일이 달린 모자를 써서 애써서 눈물까지 흘릴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아마 거기서 내가 운다면, 그건 후작부인이 아니라 알리페르 때문일 것이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모일라가 염려스러운 눈빛으로 내게 인사했다. 나의 사정을 아는 그녀기에, 아마도 몬테 공작이 날 괴롭히지는 않을까 염려가 되는 모양이었다.
"걱정 마, 카일이 함께 가니까 아무일 없을 거야."
"그러면 다행이지만."
"모일라, 카일을 닮아서 나에 대해서 너무 걱정이 많은 것 아냐?"
"비 전하께서 워낙 나가실 때마다 크고 작은 사건에 연루되시니까 그렇죠."
그건 그렇지만, 아닐 때도 많았거든? 하지만 임팩트가 컸던 사건들이 많아서 차마 아니라고 우기지 못하겠다.
"알았어. 걱정 시키지 않게 잘하고 올게. 날 믿어."
"비 전하의 현명함이야 언제나 믿죠. 조심히 다녀오세요."
"응."
카일과 함께 몬테 공작가의 별채로 향했다. 제국에서 신을 믿는 이들은 수도원에서 장례를 치르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귀족들은 별채의 작은 홀에서 장례를 치렀다.
비록 후작 부인은 아버지와 이혼 전이었지만, 비스 가문에서 축출된 상태라 그녀의 친정인 몬테 가문에서 장례를 치르게 된 것이었다.
"황태자 전하와 황태자비 전하께서 드십니다."
작은 홀 안에는 화려한 꽃 장식으로 둘러싸인 관이 있었다. 오늘이 방문객들을 받는 마지막 날이기 때문인지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향하는 곳에는 작고 초라한 검은 관이 놓여있었다. 비스가에서도, 몬테가에서도 버림받은 여인의 장례식이라서일까…?
그녀의 마지막 길이 생각보다 많이 초라했다. 그 모습을 보자 기분이 묘했다.
19살, 카일을 다시 만나기 전까지 나의 인생을 모두 뒤흔든 여자. 그런 여자의 최후가 이렇게나 허무하구나.
그녀로 인해 사생아가 되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녀로 인해 나는 저주받은 마녀가 되었던 걸지도 몰랐다. 게다가 그녀의 학대로 지워진 내 기억들로 인해 카일과의 인연의 끈마저 끊어질 뻔했다.
그렇게 내 인생을 망가뜨리더니, 내가 인생을 되찾고 진실이 밝혀지자 자신의 인생을 포기했다.
나는 당신과 싸울 준비가 되었는데, 왜 당신은 나와의 싸움을 포기한 거야? 당신이 내 인생을 망칠 때에도 없던 죄책감이 이제라도 생겼어?
"세이..."
"괜찮아요."
카일의 염려스러운 목소리에 애써 대답했다. 그런데 그 소리가 생각보다 살짝 떨려버렸다.
카일이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나는 베일 너머로 카일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나의 인생을 찾아준 사람이 곁에서 나를 지켜주고 있어서 다행이야.
나는 카일에게 의지해서 검은 관 앞으로 갔다. 조문객들은 우리를 위해 자리를 비켜주었다.
초라한 검은 관 앞에는 알리페르가 수척해진 모습으로 서 있었다. 알리페르를 보자 눈물이 핑 돌았다. 후작부인이 아닌 내 동생이 안쓰러워 흐르는 눈물이었다.
"누님, 오셨습니까?"
"펠, 얼굴이 너무 야위었잖아. 제대로 먹지도 않은 거야?"
"저는 괜찮습니다. 누님이야말로 괜찮으십니까? 오지 않으셔도 됐는데요."
"네가 혼자 지키고 있는데 어찌 오지 않겠어?"
알리페르는 그저 웃기만 했다.
데피니토르의 장례문화에 따르면 떠나는 자를 위해 관에 꽃과 장신구 등을 선물처럼 넣어 매장을 했다. 아버지는 시종을 통해서 시집올 때 가져온 패물들 중 챙겨가지 못한 것을 보냈다고 했다. 멀리서 보니 관 안에는 여러 가지 작은 장신구들과 꽃, 편지 등이 들어 있었다.
그것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알리페르를 올려다보았다.
마음이 무거웠다.
"네게 너무 큰 짐을 지운 것 같아서 미안해."
"그런데 왜 공작은 보이질 않는 거지?"
카일이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공작가에 황태자 부부가 방문했는데 아직도 나타나지 않았다. 나에 대한 불만으로 카일에게까지 무례한 것은 좀 아닌 것 같은데? 나까지 기분이 나빠졌다.
"죄송합니다. 외숙은 지금, 비스가에 배상해야 되는 문제로 정신이 없는 것 같더군요."
"아아아, 황태자보다 자신의 재산과 작위가 더 중요하다는 뜻이군."
카일의 불만스러운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소리에 장례식을 돕던 몬테가의 사용인들의 얼굴이 굳는 것이 보였다. 조용히 몇몇이 빠져나가는 것으로 보아 공작을 부르려는 것 같았다.
나는 공작이 오지 않는 쪽이 나은데... 하지만 카일은 공작을 갈아 마시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러니 기다리고 있는 것이겠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알리페르와 함께 관 앞으로 간 나는 후작부인의 시신과 마주했다.
이미 차갑게 식어버린 시신은 두꺼운 화장으로 검푸른 반점들을 지웠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흔적들도 회반죽이라도 바른 것인지 티가 나지 않았다.
나를 볼 때면 가지던 표독스러운 얼굴이 아니어서일까? 평소랑 다르게 고와 보이는 얼굴이었다. 역시 사람의 얼굴은 표정에 따라 달라 보이는구나.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평화로운 표정이지? 억울해서, 집착이 남아서 일그러진 얼굴일 줄 알았는데...
아버지가 그렇게 좋았어요? 나와 어머니를 그렇게 증오할 만큼 사랑했나요?
콘스탄트 공녀가 카일에 대한 연정으로 미쳐버린 모습을 본 뒤였기 때문일까? 장례식장에 오기 전까지는 그렇게나 미워서 죽을 것 같았는데, 더 이상 날 괴롭히지 못할 테니 홀가분할 줄 알았는데!
허무했다. 지독히도 공허했다.
"다시 태어나면... 일방적인 사랑은 하지 마요."
나의 어린 시절 불행의 원인은 후작 부인이었다. 그런데 부인의 불행은? 결국은 그녀가 만든 늪이었다.
나는 그녀가 만든 늪에서 끝까지 발버둥 쳐서 수면 위로 올라왔지만, 그녀는 스스로 걸어들어갔다. 나와 내 어머니를 탓했지만 결국에는 그 핑계는 자기 위안일 뿐.
후작 부인은 내 말에 이제 대답할 수 없었다. 내게 사과도 하지 않고, 반성도 거부한 채 끝내 비스 후작 부인이라는 겉치레를 지켜내고 떠났다. 비참하게, 그리고 외롭게...
그런 그녀에게 나는 마지막으로 보라색 매발톱꽃을 올렸다. 깊은 산속에서 여름에 피는 꽃. 카일과 정령에게 급히 부탁해 온실에서 피운 꽃이었다.
버림받은 여자에게 보내는 승리의 맹세.
나는 이미 그녀에게 이겼고, 앞으로도 지지 않을 것이다.
"펠, 묘지는 어디로 하기로 했어?"
"두 가문 모두가 거부해서, 일단은 수도원에서 운영하는 공동묘지로 보낼까 합니다."
그렇구나. 후작부인은 마지막까지 철저히 모두에게 버림받았구나.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해."
"아닙니다. 누님께서는 하실 도리를 다 했다고 생각합니다."
"조금만 더 쉬고 복귀해. 에이린도 같이 쉬게 해줄게. 알았지? 항상 고맙고, 미안해. 그리고... 사랑해, 내 동생."
펠은 이곳이 장례식장이라는 것을 잊은 듯이 환하게 웃었다. 그런 내 동생을 향해 나도 애써 웃어주었다.
"외숙이 오기 전에 누님은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독이 잔뜩 올라있거든요."
알리페르가 조용히 일러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카일과 밖으로 나갔다.
다들 출가외인에, 친모 때문에 마음고생한 황태자비를 배려해서 조용히 길을 내어주었다. 그동안 어미의 문제로 구설수에 오른 황태자비이기에 누구도 우리 부부가 잠시 왔다 떠나는 것을 두고 입을 떼지 못하리라.
"생각보다 홀가분하지 않나 보네?"
"그냥, 이래저래 생각이 많아져서요. 아버지도 그렇고, 당신도 그렇고..."
"응? 우리가 뭐 잘못했어?"
"그럼요. 이 죄많은 사람들 같으니..."
딸과 엄마의 운명은 닮는다더니, 어째서 우리 모녀는 이렇게 인기남들을 사랑하게 돼서 마음고생을 하는 걸까?
나는 어리둥절해 하는 카일의 팔짱을 스륵꼈다. 그리고 웃어주자 카일도 마음을 놓는 듯했다.
"나는 그 여자가 네가 받은 고통보다 더 큰 아픔을 겪게 하고 싶었어."
"아마 내 생각이지만, 이미 충분히 고통받았을 거예요. 내가 당신이랑 크게 싸우고 외면하고 이혼하자고 하는 걸 상상해봐요."
카일은 내 말에 우뚝 서더니 식은땀을 흘렸다. 어머, 상상만으로도 그리 힘들어요? 나는 조심스레 그의 땀을 닦아주며 웃었다.
"지, 지옥이 펼쳐졌어. 다신 그런 상상하게 하지 마."
"그렇죠? 그분의 인생은 전부 아버지에 대한 집착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잖아요. 어긋난 사랑으로 시작한 악행들이었으니, 그만큼 더 괴로웠을 거예요. 사과는 끝내 받지 못했지만 괜찮아요."
카일은 살짝 불만스러운 표정이었지만 내 뜻을 이해해줬다. 그리고 한 걸음 다시 옮기려는 순간 카일이 내 어깨를 감싸며 살짝 경계를 했다.
"공작, 이제서야 나오나?"
"... 찾으셨다 하여, 죄송합니다."
"누이의 죽음보다 자네의 재산이 중요하다는데 어쩌겠나?"
카일의 비꼬움은 다시 내게로 화살이 되어 날아왔다. 예전에는 그저 혐오스러운 벌레를 보는 듯했다면, 이제는 박멸할 대상으로 보는 느낌?
"자네의 사랑스러운 조카딸에게 무슨 불만이 있나?"
"아아, 그렇지요. 비 전하는 저와 피가 이어진 조카였지요?"
진실을 알지만 서로 거짓을 내뱉는 두 남자들은 서로를 향한 적의를 유감없이 내뿜었다. 독기가 올랐다더니 사실이었다. 아직 배상 규모가 정해지지 않았는데 이리 막 나올 작정인가?
"공작, 조만간 비스 후작가에 보내야 할 배상 규모가 정해질 걸세."
"제가 지은 죄는 달게 받겠습니다만... 출가외인의 배상까지 저희 가문에서 져야 합니까?"
순간 고개를 드는 생각이 있었다. 그가 저렇게 당당한 이유가 있었어. 공작이 후작부인을 죽였거나, 최소한 죽음으로 내몰았구나!!
"아아, 그랬군. 그런데 이미 이혼 허가서가 도착했을 텐데 말이야. 그녀가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황실 직인이 찍혔어. 이미 그 여자는 후작부인이 아니야. 다시 몬테 공녀로 돌아왔지."
카일은 이미 이를 예상하고 행동한 듯했다. 카일의 말에 얼굴이 일그러진 몬테 공작이었다.
"아아, 수신인이 후작부인이라 두 개의 서류가 전부 후작가로 갔나 보군. 후작이 보낸 공녀의 유품 중에 황실 직인이 찍힌 서신이 있을걸? 확인해보게. 그리고 배상금의 기본 안도 들어 있거든. 조금 더 깎아주려 했는데, 급히 처리되어서 말이야. 아니다 싶으면 황실에 이의신청해. 그럼 이만."
우리는 분을 참지 못하고 씩씩대는 공작을 두고 걸음을 옮겼다.
"우리 가문이 무너진다면 비 전하께도 좋을 일이 없을 텐데요?"
공작의 협박에 카일이 우뚝 섰다. 그리고 노호성을 내지르려는 것을 내가 붙잡았다.
"외숙, 아니 공작. 과거의 과오를 끝내 인정하지 못하면, 무너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겁니다. 부디 자중하길 바라요. 카일, 가요."
어쩌면 몬테 공작이 후작 부인을 대신해서 나를 계속 괴롭힐지 모르겠구나.
황태자비의 자리에서 내가 지켜야 할 것들이, 경계해야 하는 것들이 조금씩 내 어깨를 짓눌렀다.
"하아... 도망치고 싶다."
"오오, 드디어 네가 내 마음을 이해한 거야? 언제든지 네가 원하면 황궁에서 벗어나게 해줄게."
"날 황궁으로 데리고 온 게 누군데, 또 탈출시켜준다고 그래?"
"윽..."
카일의 볼을 살포시 비틀었다. 뭐, 그래도 이남자가 곁에 있으니까. 괜찮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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