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은밀한 전주곡. (2)
2018.08.09.
"도대체 그런 일로 찾아오는 시녀는 무슨 생각이지? 죄인이 달거리를 하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카일이 툴툴 거렸다. 하지만, 음... 일단 여자가 그때는 진짜 괴롭다고. 죄인이라 갈아입을 옷도 충분하지 않을 텐데...
여성 죄수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군. 챙기긴 챙겨야겠다. 이건 동정심이 아닌 인간 존엄성의 문제야.
"테일러경, 일단 그것들을 받아서 공녀가 갇힌 방에 넣어줘요. 사실, 공녀가 지금 반쯤 미친 상태인데다가, 스스로 처리할지 의문이긴 하지만..."
며칠 하녀들이라도 보내서 뒷수습이라도 시키면 되겠지. 그런데 공녀랑 나랑 시기가 비슷하네. 나도 곧인데... 뭐 나야 만능 운디네님이 계시니 월경통 걱정은 안 해도 되겠지.
테일러경에게 일 처리를 지시하고 우리는 즐거운 밤을 보내기로 했다. 부하들은 부려먹으면서 우리는 참, 못됐네. 호호호.
내일은 재판 상황을 참관하기로 했으니까 적당히 즐겨야지. 요즘 피곤해서 체력관리도 해야 해.
하지만 나의 의사와 관계없이 오늘 밤도 녹초가 되고 말았다. 윽, 카일에게 당분간 야채만 먹이든가 해야지, 내가 힘들어서 안 되겠어.
"비 전하, 겨울이라서 그런가 피부가 많이 거칠어지셨네요. 아르간 오일을 더 써야겠어요."
"카일이 밤새 괴롭혀서 그래."
"어머, 시집도 가기 전인 저희들 앞에서 못하는 말이 없어요."
야, 에이린, 너는 알 거 다 알잖아. 쳇, 내 남동생과 친우의 명예를 위해 입 다물어 주지. 비스가에 시집오기만 해봐. 마구 골려줄 테다.
"하아암."
"전하께서 정령들을 불러주지 않으셨어요?"
"불러줬는데도 피곤해. 요즘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크잖아. 신년제 준비로 너무 바빠."
사실 짜증도 많이 났다. 나 아직 황태자비인데, 황후가 할 일까지 내가 다 해야 하잖아!! 이럴 줄 알았으면 후궁이라도 받을 걸 그랬나? 일만 시켜 먹을 유능한 내 심복으로...
아니야, 그건. 차라리 내가 힘들고 말아야지, 우리 남편을 공유할 순 없지 아무렴.
"참, 유리아. 프리케는 만나봤어?"
"요즘 루피넬리아 정세가 바뀌어서 많이 바쁘더라고요."
"흠... 언제 떠나야 할지 모르니까, 너도 단단히 준비해둬. 필요한 것 있으면 다 이야기하고. 내가 할 수 있는 한 전부 챙겨줄게. 하필 겨울에... 에효."
"비 전하."
"응? 왜 유리아?"
"사랑해요. 그리고 감사해요."
별안간 날 끌어안고 내게 고백을 해대는 유리아였다.
고마운 것은 나였다. 내 비밀을 아는 몇 안 되는 사람이고, 제 오라버니와 함께 날 진심으로 대해주는 사람이니까.
센스 있는 화장으로 매번 내 입술을 카일에게 헌납하게도 만들어 줬고.
또, 무엇보다... 프리케의 곁을 지키겠다고 나섰잖아. 프리케가 과거에 좋아했던 게 나라는 것도 알 텐데, 그런 것에 관계없이 외로운 프리케의 곁을 지켜주겠다고 하잖아.
"유리아, 내 친구 잘 부탁해. 행복하게 해줘야 해, 알았지? 너두 꼭 행복해야 하고."
"네, 꼭 그럴게요."
"그리고 그 녀석 고집 있어서 언제 널 두고 도망 칠지 몰라. 카일한테 부탁해서 철저히 감시 할테니 너도 언제든 따라나설 준비하고."
"네!"
사실, 너도 프리케도 보내기 싫은데. 얼마나 위험할지도 모르는 데다가, 전쟁이라도 나면 너희가 휩쓸릴지도 모르잖아. 차마 속마음은 전하지 못했다.
간단히, 그리고 단정하게 치장한 뒤 카일과 재판이 열리는 곳으로 갔다. 평민들도 관람할 수 있는 구조로 되어있는 이곳에서는 한창 디미트리 후작의 재판이 열리고 있었다.
"황태자비 전하를 시해하려 한 것을 인정합니까?"
황실 방계인 재판관은 근엄한 얼굴로 후작에게 질문했다.
"그저 놀라게 하려 했을 뿐이오. 유피테르 백작이 황태자비 전하께서 불을 무서워한다기에!"
"흠, 유피테르 백작과 황족의 사생활을 뒷조사 한 것을 인정하는 발언이군요."
오오, 저 재판관, 카일에게 충성 맹세를 한 유능한 인재랬는데. 잘한다!! 파이팅!
"아니, 내 의지와 관계없이 그가 알려준 것이오."
상석에 앉아있는 우리는 줄줄이 발목에 족쇄를 찬 상태로 앉아있는 황후파 귀족들의 얼굴이 잘 보였다. 다들 하나같이 초라한 모습이었다. 구경을 온 평민들보다도 더 하찮아진 모습이었다.
"외국의 군대인 그림자 군을 끌어들인 사실은 인정합니까? 황태자비 전하 시해 시도 못지않은 반역죄란 말이지요."
"그저 용병단인 줄 알았소."
"황태자비 전하를 처음 시해하려고 한 자들도 그림자 군이라던데, 그대들의 짓이오?"
누가 봐도 정황상 그렇지. 동일 집단의 두번의 습격이었다. 당연히 같은 이가 사주했다고 보는 것이 논리적으로 맞았다.
"아니오. 절대 아니오."
이미 찾은 증거만으로도 반역죄라 사형인데, 기왕이면 배후를 밝히고 좀 가시지.
카일이 조용히 재판관을 향해 손을 들자 그는 심문을 멈추었다.
"직접 심문하실 것이 있습니까?"
"드미트리 후작. 아니 누구라도 좋다. 그림자 군을 끌어들인 이를 자백하는 자는 형에 자비를 베풀겠다. 뭐, 그대들의 입에서 나오지 않아도 상관없어. 어차피 지금 너희들이 그림자 군을 이용해 저지른 만행들을 술술 불고 있는 자가 있거든."
그 흑마법사. 요즘 황후파 귀족들이 시켰던 일들을 줄줄 분다더라. 이권 뺏으려고 상인이나 지방 귀족들을 납치 살해 이런 것 시켰다며? 나랑 상관없이 그것만으로도 너희 꽥일 듯해.
사실 카일이 줄여준다는 형은, 목을 잘라서 성에 효시할 것을 그냥 들에 던져서 들짐승 먹이로 만든다던가, 참수할 때 이 빠진 도끼 대신 잘 벼려진 도끼로 한방에 죽여준다였다. 잔인한 남자, 훗.
하지만 마법사 놈이 핵심인 아주버님 시해랑, 내 습격의 배후를 속시원히 밝히지 않아서 미끼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누군가가 이미 자신들의 죄를 줄줄이 내뱉고 있다는 소식에 드미트리 후작의 얼굴에 작은 동요가 일었다. 같이 재판 중인 황후파 동료들을 쳐다보았지만 다들 자신이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어, 거기에 자백한 놈 없어.
"기회는 신년제 직전까지만 주도록 하지. 그리고 재판관. 이미 죄인들이 황태자비뿐 아니라 무수히 많은 납치, 살해와 연관된 증거와 진술을 보내주지 않았나? 다음 재판까지 검토하고, 그냥 자백만 받아도 될 듯해. 뭐, 무죄 가능성이 있어야 심문을 하지. 이건... 쯧, 형량 줄여줄 구석도 없겠네."
"황태자 전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평민들과 다른 귀족들의 본보기가 되는 재판이 되도록 만들겠습니다."
우리 남편이 재판관에게 갑질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여긴 황권이 법인 제국이니까. 호호. 미래의 황제님 잘한다!!
그 이후 재판은 그들의 죄를 묻고 확인하는 것 외에 어떤 변론도 허락되지 않고 진행됐다. 그것이 압박이 되었는지 죄인들의 표정이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얼마나 의리 있는지 두고 봐야겠네.
한참이나 재판 과정을 지켜보다 밖으로 나왔다. 우리가 지나갈 때마다 평민들은 우리에게 응원의 함성을 남겨줬다.
그런데 카일의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왜 그러지? 마차에 올라타기 전 카일은 기사들 몇을 불러 이것저것 지시를 내렸다.
"카일, 무슨 일 있어요?"
"응? 나중에 알려줄게."
카일이 저럴 때는 9할 이상의 확률로 나와 연관된 일이었다.
"누가 내 욕이라도 해요? 이상한 소리 수군거리는 것 들었어요?"
흠칫! 찍었는데 맞았어? 카일이 영 안절부절하는 것이 보였다. 나도 이제 카일이 야한 생각하는 것 외에 다 읽을 수 있게 되었군. 좋은데?
아니, 이게 아니라.
"맞구나. 내가 마녀래요?"
"아니, 가짜가 아닐까... 하는 말들?"
으음. 아직은 황후의 귀에 들어가면 안 되는데. 차라리 마녀나 저주받은 아이 쪽이 낫단 말이야.
"일단 기사들을 보내서 헛소리의 배후를 캐고 차단할 거야."
"어머니의 생존을 빨리 알리는 편이 낫겠네요."
"응, 신년제 전에 알리고, 신년제 때 장인이 파트너로 모셔오는 걸로 해야겠어. 네 아버지와 죽은 몬테 공녀의 스캔들 쪽이 더 귀족들의 관심을 끌어 주겠지."
카일에게 믿고 맡기면 될 거야. 걱정하지 말자. 조금은 가라앉은 상태로 환궁을 했다.
기분이 우울해서인지, 요즘 쌓인 피로 때문인지 아무것도 하기 싫어졌다. 카일은 일하러 보내고 혼자 침실에 누워 있는데 배가 살짝 아파졌다.
때가 되었나. 시무룩해졌다. 이번에도 아닌가 봐. 아직 일주일은 남은 것 같은데, 컨디션이 별로이긴 한가 보네. 당겨지려는 것 보니.
아니나 다를까 그날 밤 소량의 출혈이 있었다. 컨디션이 꽝인 나를 카일은 애지중지 소중히 다루며 곁을 지켰다.
"세이, 살리맨더나 운디네 불러줄까?"
"음,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아요. 그냥 당신이 곁에서 귀찮게만 안 하면 될 것 같은데요?"
"귀, 귀찮아 내가?"
"음. 그 소리가 아니잖아. 그냥 얌전히 당신 체온으로 꼭 안아만 줘요. 다른 짓은 하지 말고."
카일의 코를 살짝 잡아당겼다. 코끝이 빨개진 게 귀엽네. 후훗. 나는 카일의 품에 안겨서 잠이 들었다. 그런데, 날이 추워져서인지, 감기가 오려는 것인지 으슬으슬 추워서 결국 카일이 살리맨더를 소환 해야했다.
"괜찮아?"
카일이 이마를 짚어주며 물었다. 딱히 아픈 것은 아닌데, 음... 그냥 컨디션이 좋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냥 피로 누적에 달거리까지 겹쳐서 그런 거야. 괜찮으니까 나 꼭 껴안아 주기나 해요, 나 잠 오니까."
다음날이 되자 으슬으슬 추웠던 것은 싹 사라졌다. 그리고 컨디션도 좋아졌다. 단지 계속 음식을 먹을 때마다 예전에는 미처 몰랐던 냄새들 때문에 조금 식욕이 떨어진 것이 카일의 걱정을 샀다. 그래도 새콤달콤한 것들은 잘 먹는데.
카일이 일하러 간 사이 알비케라가 집무실에 놀러 왔다.
"알비! 꺄하하, 그만해."
알비의 애교가 늘었다. 고양이도 아니고 앞발로 내 다리를 꾹꾹 누르며 놀아 달라는 모습이 참 예뻤다.
"엄마 일해야 해. 조금만 기다려."
초겨울이라 춥지만 산책은 빼먹을 수 없지. 일단 일은 좀 끝내고!!
다른 일은 다 끝내 놓았는데 아바마마의 생신 때 선보일 쇼를 정하지 못했다. 무엇이 좋을지, 끙... 꽃 피우고, 열매 맺고, 나비쇼 말고 겨울에 할만한 게 뭐가 있을까?
"멍멍!"
"꼬리 그만 흔들어. 어휴, 그래 나가자, 나가."
카일에게도, 알비에게도 애교에는 약한 나였다.
솜옷을 꼼꼼히 껴입고 오랜만에 목장으로 갔더니 독수리가 내게 날아왔다. 도마뱀 녀석은 변온동물이라 겨울잠을 자는지 요즘 통 보이질 않았다.
"잘 지냈니?"
어제는 그렇게도 컨디션이 나쁘더니 오늘 달거리의 양도 갑자기 확 줄어서 하는 둥 마는 둥이었다. 덕분에 기운도 조금 다시 올라서 힘들지 않았다.
"알비, 곧 첫눈이 올 것 같지 않아?"
하늘에는 검고 짙은 먹구름이 드리워 있었다. 흐음, 이럴 때는 카일이랑 데이트를 해야 하는데...
"알비, 우리 아빠 찾으러 가자."
"멍!"
알비가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너 이제 황궁 생활 오래 했다고 길 잘 아네? 호호.
걷기에는 조금 멀지만, 운동 삼아 걸어야지. 몸이 차가워지면 카일에게 뜨겁게 만들어 달라고 하면 되니까. 아이, 왜 벌써 얼굴이 뜨끈한 거야.
응? 그런데, 저기 왜 저렇게 소란스러운 거야? 다들 뭔가를 잔뜩 옮기면서 화가 난 듯해 보였다.
"무슨 일이냐?"
"저기, 비 전하. 그게... 죄인이 계속 난동을 피워서요."
하녀들이 신경 쓸만한 죄인이라면, 공녀인데? 흐음... 이젠 난동도 피우나 보네.
"어떻게 말이지?"
"식사를 넣어준 것을 역하다며 이게 음식이냐며 던지고 그래요."
"네, 비 전하. 다른 죄수들에 비하면 진수성찬인데요. 저희 식사보다도 고급이라고요. 그런데 냄새만 맡고 구역질을 해대면서 엎어서 청소도 해야 하고 힘들어요."
"감히 전하와 비 전하를 해하려 한 주제에 너무 뻔뻔해요. 자기가 죄인인 것 모르나 봐요."
하녀들이 식사를 넣거나 청소라도 하러 들어갔다가 당한 것이 많이 있는지 내게 하소연들을 했다.
미안하다, 얘들아. 공녀가 미쳐서 그런 것이니 조금만 이해해 주렴.
"조금만 힘내거라. 나중에 다 끝나고 나면 휴가와 함께 너희들의 노고에 답을 해줄 테니. 그리고... 혹시 공녀의 신변에 이상이 있으면 내게 보고하고. 알았지?"
"네!!"
사실, 아직 공녀가 진짜 미친 것이 맞는지 믿음이 안 갔다. 동물들 외에도 감시자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그런데 뭘까? 이 찝찝한 기분은... 개운하지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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