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나쁜 소식과 좋은 소식. (2)
2018.08.14.
하녀의 말이 끝나자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모처럼 설레고 기뻤는데, 이 무슨!!
"비 전하!!"
"괜찮으십니까?"
내가 이마를 짚고 마차에 기대자 기사들과 하녀가 모두 안절부절하는 것이 느껴졌다.
설마 했는데... 진짜였구나. 공녀를 마지막으로 봤을 때 느껴졌던 기시감. 그것은 태아의 기운이었나 보았다.
게다가 공녀의 이상한 행동들, 어느 정도는 눈치 챘었는데... 바보같이 남의 것은 눈치를 채 놓고 나에 대해서는 이제야 알았네.
"이 사실을 아는 하녀들이 몇이지?"
"저, 저를 포함해서 2명이요."
"알프레도경. 이 하녀가 알려주는 하녀들을 이 아이와 함께 만월궁의 별궁으로 거처를 옮겨요. 그리고 이 자리에서 이 이야기를 들은 이들의 입도 함구합니다. 이 사실이 밖으로 새어나갈 시에는 황실을 지키지 못한 죄를 물을 것이니 철저히 감시해요."
가라앉았지만 침착한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그것이 이들에게는 더 무서워 보인 모양이었다.
사실 욕하고 싶은 거 참고 있으니까 다들 너무 그러지 마요.
후우, 일단 돌아가서 쉬어야지. 머리도 아프고, 갑자기 급 피로가 몰려왔다. 앞으로 어찌할지 대책도 세워야 하고...
만월궁 침실로 돌아온 나는 침실에 누웠다. 따뜻한 물이 든 양가죽 주머니를 껴안고 있는데 성질이 나서 물주머니에 화풀이를 했다. 진짜, 시집 잘못 온 것 같아!!
원래 신년제 첫날 행사는 해가 뜰 때까지 이어졌다. 내가 연회 마무리 잘 지으랬지만 아직 돌아오지 않는 카일이 짜증났다.
"아가야, 진짜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너네 아버지 너무하지 않니?"
황태자비 자리에 대역으로 처음 왔을 때 보다 지금이... 더 무겁고 힘들게 느껴졌다.
혹시나 있을 아기를 위해 억지로 눈을 감았다. 내가 화내면 아기한테 전해질 거야. 아프면 힘없는 아기는 더 아플 거니까...
아침에 따스한 햇살이 창문 너머로 슬그머니 기어들어와 잠에서 깼다. 그런데...
"안 들어 온 거야? 아님 벌써 나간 거야?"
평소라면 날 두고 일찍 나갔다 하더라도 서운하지 않았을 텐데... 서러움이 갑자기 몰려왔다.
내가 왜, 누구 때문에 황궁에 와서 볼 거, 못 볼 거 다 보고 있는데!!
"세이!! 일어났어?"
대답하지 말자. 섭섭한 마음 때문에 카일이 바로 들어왔는데도 입이 열리지 않았다. 내 대답을 듣지도 않고 카일이 트레이에 직접 무엇인가를 받쳐 들고 들어왔다.
"어제 많이 피곤해서 일찍 들어왔다며. 일찍 말했으면 운디네한테 널 봐달라고 했을 텐데."
카일이 내 침대 옆으로 작은 탁자를 끌고 와서 가지고 온 음식을 내려놓았다.
"요즘 밥도 잘 못 먹고, 어디 아픈 것 아냐? 황궁의 부를까?"
내가 불만스럽게 입을 꾹 다물고 쳐다보자 카일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당황하기 시작했다.
"내, 내가 혹시 뭐 잘못했어?"
"공녀가... 임신한 것 같아요."
카일은 음식 위에 덮어놨던 뚜껑을 열다가 툭 떨어트렸다. 하긴 놀랍기도 하겠지.
"나, 나 아니야! 세이, 나 못 믿는 것 아니지? 진짜로 나 건드린 적 없어. 그때 내가 아무리 인사불성이었어도 너랑 그 여자랑 구별은 한다고. 나 억울해, 우와, 미친 여자."
카일은 억울하다며 펄쩍 뛰었다. 어찌나 억울해 하는지 당장 그 여자를 죽이겠다며 날뛰었다.
"카일."
"세이, 나 믿지, 응?"
"후우... 못 믿겠다면요?"
카일의 얼굴에서 절망이 묻어 나왔다. 그리고 충격에 얼굴을 파묻고 비틀 거렸다. 그리고 침대 옆에 있던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음... 심했나? 긁적, 이 상황이 좀 성질이 나서 나도 모르게 그만...
"농담이에요. 믿어요."
내 말에 카일이 손을 걷고 다시 내게로 튀어왔다.
"진짜야? 진짜 믿는 거야?"
"당연하죠. 다들 당신이라고 욕을 해도, 나는 당신을 믿어요. 그리고 이거."
서류 더미 하나를 꺼내서 카일에게 쥐여줬다.
"신년제 준비로 바빠서 조사 끝내 놓고도 못 줬어요."
"이건..."
카일이 한참을 읽어내렸다. 그러더니 날 너무 사랑스럽게 봐줬다. 나 기특하죠?
"세이, 사랑해. 믿어주고 이렇게 미리 준비해줘서 고마워."
"그러니까 나한테 잘해요."
내가 새벽에 하녀의 말을 듣고도 침착할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에이린과 알리페르의 도움이 컸다.
"당장 이것을 공개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 거예요. 기왕지사 이리 된 것,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내버려 두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아요."
"하지만 그러면 네가 너무 힘들잖아."
"괜찮아요. 그까짓 소문들이야 뭐."
게다가, 진짜 당신의 아이는... 음 내 뱃속에 있는 것 같거든요. 내가 임신을 한 것이 아니라면 상당히 압박도 받고, 상처도 받겠지만, 진짜는 나니까 괜찮을 것 같았다.
흠, 내가 임신이 아닐 확률은... 생각하지 말자. 그리고 진짜 아기를 가졌대도 이런 상황에서 내 아이를 지키려면 당분간은 공개를 못하겠네.
이 남자에게는, 음, 어쨌든 맘고생 시킨 죄로 천천히 알려줘야겠다. 크크, 나중에 완전 놀라게 해 줘야지!
"자, 세이, 그럼 구체적인 계획은 나중에 의논하고. 일단 밥 먹자. 그리고 먹고 나서, 음, 불타는 오전을..."
"밥만 먹어요."
나의 단호함에 시무룩해지는 카일이었다. 미안하지만, 당분간은 안 돼요. 약 9개월 즈음은 금욕하시던가.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카일이 가져다준 조개 수프를 반도 못 먹었다. 비렸다. 너무 비렸다. 원래 이 바다 냄새 정말 좋아했는데!! 왜 비린 건데!
결국 오늘도 나는 과일로 배를 채웠다. 카일의 유리온실이 있어서 다행이야.
오늘 저녁에는 건국 기념제가 열려야 했다. 다들 새벽까지 이어진 첫 연회로 피곤하겠지만, 제국의 귀족이라면 누구나 참여 해야만했다.
그래서 어제는 참석하지 않은 몬테 공작이나 콘스탄트 공작이 참여할 가능성이 컸다.
혹시나 그들이 내게 해를 끼칠 수 있으니, 내 몸 상태를 정확히 알아야겠어.
그래서 황궁의가 내 앞에 은밀히 불려왔다. 최근의 내 증상과 지난 달거리 상황을 말했다. 의사지만 조금 부끄럽기는 해.
"가슴이 뭉치거나 콕콕 쑤신가요?"
"아, 그러고 보니 그런 증상도 있었어."
"화장실도 자주 가게 되셨지요?"
"그렇지?"
"비 전하 감축드립니다. 제가 알기에는 임신 증상이 맞습니다. 보자, 비 전하의 마지막 달 거리를 생각해보면..."
쟤는 나에 대해서 너무 많은 것을 아는군. 주치의라는 거 나를 솔직히 좀 부끄럽게 만든다.
"이제 임신 6주차에 접어드시겠군요!!"
"진짜, 확실한 것이지?"
"다음 달거리 날이 되면 더 확실해지겠지요. 8주차가 넘어가면 태아의 심장소리도 미약하게 들립니다. 그때 배에 대고 들으면 확... 진은 할 수 있으나 제가 전하께 죽겠지요."
귀를 대는 시늉을 하는 황궁의의 모습에 내가 잔뜩 인상을 구기자 그가 급하게 수정했다. 저 의사는 진짜, 내가 잘랐어야 했는데!!
"제가 귀하신 분의 몸에 손을 대지 않고 내장 기관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장치를 개발해 놨습니다! 그걸 쓰면 됩니다!!"
"그것을 쓰면 태아의 심장소리가 들리는가?"
"제가 귀하신 분들의 후계자 생산을 성공적으로 하기 위해 연구 중인데, 태아의 성장과정에 따라 달랐습니다. 아무래도 마도를 접목하면 크게 개선될 여지가 있는데, 6주에서 8주 사이에는 미약하게 들리고, 10주가 넘어가면 아주 선명하게 들렸습니다."
나는 그의 답에 크게 미소 지었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좋아, 조만간 시험해 볼 일이 있을 테니 준비 잘해두게. 그리고, 내 회임은 아직 어느 누구에게도 발설해서는 안 되네. 자네도 알다시피 나를 노리는 자들이 많지 않나. 황태자께도 내가 직접 알릴 터이니, 절대 알리지 말게."
"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황태자 전하께서 힘들어하실 수 있어서 미리 말씀드리는데, 초기에는 태아를 위해 관계를 피하셔야 합니다. 대신 안정기에 들어가는 4개월 정도부터는 과격하지 않는 선에서 합ㅂ..."
내가 진짜, 저 황궁의를 아주 그냥!! 어휴!! 아가야, 아버지가 좀 밝혀서 황궁의가 낯부끄러운 소리를 마구 하려고 하는구나. 이해하렴.
내가 노려보자 겨우 입을 다무는 황궁의였다. 회임기간 동안 조심해야 할 행동들, 태아의 성장 등에 대해서 자세히 질문을 하고 답을 들었다.
"이제 나가보아도 좋네. 내 그대에게 크게 상을 내릴 테니 복중 태아에게 좋을 약들을 다른 이들의 눈에 뜨이지 않게 내어오게."
황궁의를 보내고 혼자 남은 나는 내 배를 자꾸만 만져보았다. 진짜 이 속에 내 아기가 들어 있는 걸까?
납작하기만 배에서는 큰 반응이 없었다. 나만이 느낄 수 있는 생명력의 기운도 아직 크지 않아서 진짜 이것이 나의 아기인지 아직도 믿기지가 않았다.
임산부의 빈혈에 좋은 로즈힙 차를 내어오라고 한 뒤 말린 과일을 잔뜩 넣은 쿠키와 함께 먹었다.
아직 본격적인 입덧은 하지 않아서인지 냄새 때문에 거부감은 있어도 뭐든 꾸역꾸역 먹고 있었다.
흐음, 태교를 위해서라면 예쁜 것, 좋은 것을 봐야 하는데 걱정이 없겠어. 세상에서 제일 잘생긴 아기 아빠가 곁에 있으니까, 카일 얼굴만 맨날 봐도 태교가 제대로 되겠네. 헤헷.
"카일 닮은 개구쟁이였으면 좋겠다. 카일이 자기 같은 아이 만나서 고생을 좀 해봐야 하는데."
"안 돼! 나는 무조건 너 닮은 딸!!"
"엄마얏! 애 떨어질 뻔했잖아요!!"
으악, 내 심장!! 아가야, 너네 아빠가 이렇게 철이 없단다. 가끔 놀랠일이 많을지도 모르니까 이해하렴.
"미안, 미안."
그래도 얼굴이 모든 걸 용서하네. 음, 엄마는 아빠 얼굴만 보고 결혼한 것은 아니야. 자상하고, 친절하고, 약속을 지킬 줄 아는 사람이란다. 좋지? 그런 사람과 나 사이에서 네가 생긴 거야.
"뭐가 좋아서 그렇게 싱글벙글이야?"
"카일이 좋아서요. 그런데 왜 왔어요?"
"황궁의가 다녀갔대서."
이런. 역시 황궁에는 비밀이 없구나. 카일에게 딱히 숨길 생각은 없지만, 서프라이즈를 해야 하고, 음. 이 팔불출 남편은 분명 비밀로 해야 한다고 해도 좋아하는 티를 못 숨길 것 같단 말이지.
어차피 곧 입덧이 심해진다 했으니까 금방 들통날 일이었다. 일단 아바마마의 탄신연 때까지만 참자. 그날 아바마마께는 최고의 선물이 되겠지? 헤에에에, 카일이랑 아바마마, 아버지 표정이 상상이 되었다.
"뭐야, 왜 대답은 안 하고 계속 실없이 웃는데? 좋은 일 있어?"
"황궁의는 내가 요즘 계속 소화도 못하고 해서 잠시 불렀어요."
"뭐라는데? 큰일 있었어?"
"스트레스가 심해서 위가 약해졌대요. 신선한 과일도 많이 먹고, 좋아하는 것 이것저것 위에 부담되지 않는 선에서 먹으래요."
"응? 위가 안 좋은데 먹으라고 했어?"
예리한 인간!!
"약해져서 그런 거라고! 그리고 편한 옷 입어서 혈액순환 잘 시키고, 마음 편하게 먹고, 그 정도?"
"어? 알았어. 마음 편히 먹게 황후파는 다 쓸어 없애줄게. 안 그래도 어제 감옥에 있는 놈들이랑 흑마법사가 배후를 불겠다는 의사를 밝혔어."
"그래요? 잘 됐네요."
"단지, 자백하는 대신 여러 조건들을 내걸어서 조금 더 시간이 걸릴 것 같아."
"조건요?"
내 질문에 카일이 팍 얼굴을 구겼다. 그 인간들을 생각하니 짜증이 나나 보았다. 이해해요. 하지만 내 태교를 위해서 인상 쓰면 안 되거든요?
"쪽, 인상 쓰지 말고 이야기 해 봐요."
"헤에."
아가야, 너는 부디 팔불출이 되지 말렴.
"형량을 깎아달라는 거지."
"뻔뻔하게도 남의 목숨을 몰라도 제 목숨은 소중하구나. 그래서요?"
"서류로 남겨 달래서 남겨줬어. 자백한 죄는 사면해주기로. 물론 자백한 것에 대해서 만이지. 이미 찾아놓은 죄로 사형은 확정이고. 후후후."
아가야, 너네 아버지 무섭구나. 우리 너희 아빠 마음에 잘 들도록 노력하자.
오늘 밤에는 건국기념제가 있었다. 폐하도 오시고, 꼴 보기 싫은 두 공작도 올 것이었다.
"후우... 오늘은 코르셋 조으지 마."
아가가 배속에 있다고 생각하니 코르셋을 쓸 수가 없었다.
"네?"
"나 맘껏 먹을 거야."
일단 먹는 핑계를 대자. 시녀들에게도 아직은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다. 대부분 내 사람들이고 믿을 수 있지만 언제, 어디서 말이 새어나갈지 모르니까.
"그럼, 코르셋 대신 페티코트만으로 치마를 더 부풀려서 허리가 가늘어 보이게 하죠."
"가벼운 소재로 해줘."
무거운 것도 힘들어. 사실 연회 나가는 것 자체가 힘든 일이었지만, 나가야 했다.
준비를 끝내고 나가자 언제나처럼 카일이 서 있었다. 카일이 에스코트를 하면서 내 허리를 감싸더니 날 쳐다봤다.
"어? 한 겹을 덜 입었네."
"오늘은 만찬처럼 식사 나오잖아요. 잘 먹으려고."
연회장에 도착하자 곧 폐하 내외가 도착했다. 아바마마는 언제나처럼 자애로운 눈으로, 황후는 살벌한 눈으로 꼬라, 아니 노려보셨다.
이제 고운 말을 써야지.
오늘은 국내외 귀족과 사절단에게 선보이는 근위대의 사열식이 있었다. 그래서 폐하 내외가 온 뒤 준비된 테라스로 이동했다.
조심조심 올라가는 길에 여러 귀족들을 마주쳤다. 그중 하나는 콘스탄트 공작이었다.
왜지? 어째서 저렇게 여유롭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