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거짓말 하지마, 이 여자야! (2)
2018.08.20.
"의료 기구라고?"
"예, 소리를 확대시켜 사람의 몸속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을 들려줍니다. 얼마 전 마탑의 마법사들의 도움을 받아 크게 성능을 개선했지 뭡니까. 그래서 다 들립니다!"
황궁의가 자랑에 자랑을 거듭했다. 고작 소리를 듣는 것이지만 이 소리를 듣고 사람의 심장, 허파, 내장 등의 위치에 놓으면 소리를 듣고 아픈 곳을 알 수 있단다. 어찌나 자랑을 해대는지 지겨울 지경이었다.
"그러니까 태아가 있다면 분명 아랫배에서 심장박동이 들릴 것입니다."
그 말에 황후가 반색했다. 아기만 태어나면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황족으로 만들 작정인가 보았다.
"좋아, 얼른 해보거라."
황후와 콘스탄트 공작은 황궁의를 재촉했다. 폐하도 카일도 인상을 구기고 있는 것이 보이지 않나 보았다. 사람이 눈치가 있어야 하는데 말이지.
동그란 쇠붙이에서 이어진 기다란 관이 양 갈래로 나누어진 이상한 물건을 꺼내 든 황궁의는 관의 양쪽을 제 귀에 꽂았다. 하녀들이 천을 들고 공녀의 앞을 가려주었고 동그란 물건은 그 천 사이로 들어갔다.
하녀들은 황궁의의 지시에 따라 쇠붙이를 조심스럽게 공녀의 배 위에 밀착시켰다.
사실 황궁의에게 공녀에 대해 의논했을 때 차라리 상상임신을 했길 바랐다. 하지만 나와 같은 작은 생명력이 그녀에게서도 느껴졌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황궁의의 대답은 예상한 대로였다. 한참을 조용한 상황에서 집중하던 황궁의의 입이 드디어 떨어졌다.
"태아의 심장소리가 들립니다. 회임이 맞습니다."
방안은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황후와 콘스탄트 부녀의 얼굴은 환희로 물들었다. 승리감에 도취된 그들이 막 입을 떼려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군요."
황궁의의 말에 내가 침착하게 반문했다.
"왜? 태아에 이상이라도 있는 것인가?"
"그게..."
"어서 말하지 못할까? 황손에게 이상이라도 있는가?"
황후가 다급하게 황궁의를 독촉했다. 계속 말을 해야 하나 고민하며 공녀와 공작의 눈치를 보던 황궁의는 드디어 입을 열었다.
"최근에 제가 비슷한 시기의 임산부의 태아를 청진했습니다. 회임한지 약 7주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심장소리가 아주 미약하였지요."
"그것이 지금과 무슨 상관이지?"
"그런데 지나치게 소리가 큽니다."
"건강하다는 뜻 아닌가?"
황후의 말에 황궁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부정했다.
"제가, 귀해진 황실의 자손을 위해 최근 몇 년간 회임한 임산부들을 상대로 많은 진료를 한 결과, 태아들은 시기별로 조금씩 성장한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공녀처럼 8주 전후의 태아는 심장이 만들어진지 얼마 되지 않아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공녀의 태아는 적어도 12주 이상의 태아입니다."
그 소리에 황후의 얼굴이 굳어버렸다. 차마 예상하지 못했나 보았다. 이른 출산이 꼭 없는 일은 아니었으니까, 출산 시기가 다르면 그냥 우기면 된다 여기고 준비 못 했겠지.
이제 저 여자들의 거짓말을 밝힐 순간이 온 건가?
"자네의 말은 황태자 전하와의 관계가 있었다는 날에 만들어진 아이가 아니란 뜻인가?"
"의사로서의 소견은 그렇습니다. 제 명예를 걸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황후, 공녀, 할 말이 없는가?"
아바마마의 노기 어린 목소리에 공녀는 울음으로 호소했다.
"아닙니다. 억울해요. 저는 황태자 전하 이외의 남자는 몰라요. 제 아이는 황태자 전하의 아이입니다."
"폐하, 황궁의가 잘못 진단 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심장소리로 태아의 개월 수를 알 수 있다니요? 검증되지 않았습니다."
황후 역시 공녀의 편을 들며 역성을 들었다.
"폐하, 소신이 보기에도 황궁의가 한 말을 완전히 신뢰하긴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어린 영애가 저렇게까지 눈물로 호소하지 않습니까?"
아아아, 몬테 공작. 이런 식으로 소심한 복수를 하는 건가요?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갈 텐데, 쯧.
"아바마마, 사실 혹시 공녀가 패악질을 일삼는다는 어린 하녀들의 말에 뒷조사를 했었습니다. 혹시나 황실에 폐가 되면 아니 되니까요."
"오오, 며늘아, 그래서 알아낸 것이 있느냐?"
"물론이죠."
내 말이 떨어지자 대기하던 황태자 근위대가 일련의 사람들을 끌고 들어왔다. 그중 몇몇을 알아 본 공녀가 흠칫 몸을 떠는 것이 보였다.
"네 신분은?"
"콘스탄트가의 빨래 담당 하녀인 클로이입니다."
"공녀의 달거리와 관련해 네가 아는 것을 고하거라."
"저, 그... 잡혀가시기 전에 이미 두 달째 달거리를 하지 않으셨어요."
하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녀는 거짓말이라며 발악했다. 그러면서 하녀를 공격하려 해서 근위대가 막아서야만 했다.
정말 귀한 황손이면 태교를 위해서 그러면 안 되는 것 아니니, 이 여자야?
"혹시 불규칙해서 그런 것 아니냐? 여인들 중에는 그런 경우가 종종 있지 않느냐."
"1년 넘게 일했는데 매달 꼬박하셨고 그 양도 상당하셨어요."
"그래, 그렇군."
"저 아이가 거짓을 고하는 거예요. 저 여자의 협박을 받은 것이라고요."
"살해 협박은 공작가에서 했죠! 제 입을 다물게 하려고!"
하녀가 발악하며 소리를 쳤다. 공녀는 부끄러운 줄 모르고 계속 거짓말이라 우기며 소리를 질러댔다.
그걸 듣고 있던 나는 코웃음을 쳤다. 만약의 경우 카일의 아이가 아님을 숨기기 위해 그녀의 신상을 아는 하녀들을 죽이려 한 것은 공작가였다. 그것을 내 남동생이 구해내어 보호한 것이고.
"저 남자들은 누구냐?"
그 사실을 전해 들은 아바마마는 공녀를 노려본 뒤 내게 질문을 하셨다.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공녀의 연인들이지요. 다들 고개를 들거라."
하나같이 카일을 닮은 구석이 있었다. 카일의 푸른 머릿결이나, 노랗게 빛나는 눈동자는 기본이었다. 신분도 다양했다. 하급 귀족부터 평민들까지 다양한 카일 짝퉁이었다. 물론 퀄리티는 아주 떨어졌다.
"다들, 공녀와의 육체적 관계를 인정하더군요. 특히나 최근 두 달 사이, 가장 사랑받던 이가 이 남자라고 합니다."
내가 가리킨 남자는 그나마 카일에 제일 가까울 뻔했다. 그래도 한참 못 미치지만.
"항상 저를 취하며 황태자 전하의 존함을 외쳤습니다. 전하의 아들을 갖고 싶다 하더군요. 아들을 낳아야 한다며 피임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필요한 것을 얻었다며 돈을 챙겨주며 쫓아냈습니다."
"그게 언제지?"
"한 달 반 정도 되었습니다."
카일과의 일이 있기 전이군. 게임 끝, 나의 승리야. 이제 거짓말은 그만두고 인정해!!
카일과 눈이 마주쳤다. 내가 사랑스러워서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아니야, 다 거짓말이야. 나는 카일룸의 아이를 유일하게 품은 여인이라고!! 내 배속에는 그분의 아이가 자라고 있어!"
"공녀, 이만 포기하지? 카일룸은, 내 남편은 널 품은 적이 없어."
내 말에 공녀는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기 시작했다. 뭐, 어쩌라고? 네가 내 남편 뺏으려고 해서 다 까발려 준 것인데 어쩌자는 건데?
나는 공녀를 어이없다는 듯이 보다가 혀를 찼다.
그 순간 공녀가 내게 덤벼들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배를 감싸며 뒤로 물러섰다. 당연한 일이지만 카일이 막아섰다. 그리고 공녀는 가볍게 뒤로 밀려났다.
뒤로 밀려나 주저앉은 공녀는 카일을 원망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황후 폐하, 공작, 끝까지 공녀의 배속의 아이가 내 아이라고 우기고 싶은지?"
카일은 나를 단단히 감싸 안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에게 약을 쓴 것도 모자라 아이의 아비마저 속이려 했군. 아니면 저 남자가 황태자를 사칭한 것인가?"
"저는 전하를 사칭한 적 없습니다! 공녀님이 가끔 황실 예복 같은 옷을 입힌 적은 있지만 제가 먼저 사칭한 적은 없습니다. 억울합니다."
"저희도요. 검을 차게 하거나 전하가 입으셨던 것과 비슷한 옷을 입어야 밤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공녀의 취향이 고스란히 드러나 버렸다. 쯧, 어쩌다 저렇게 미쳤을까? 사랑은 참 무서운 거구나.
"내, 내가 조카가 미친 것을 모르고 깜박 속을 뻔했군, 미안하구나."
황후가 공녀의 문란한 사생활을 듣고 결국에는 발을 뺐다.
"공작, 자네는?"
"요, 용서하십시오. 딸아이가 전하를 사모하는 마음이 깊어 마음의 병이 생겼나 봅니다."
공녀의 행동을 부정하는 발언에 공녀는 공허한 외침을 이어갔다.
"내 아이는 전하의 아들이라고. 왜 다들 안 믿어요?"
콘스탄트 공작이 제일 불쌍하네. 영지에 계속 있지 괜히 올라와서는 다시 망신이나 당하고. 쯧.
"황실을 기만하고 황족의 태생을 속이려 한 죄는 반역과 다름없다. 게다가 그에 동조했으니 황후와 공작도 죄를 피하긴 힘들 것이다."
아바마마의 노기 섞인 발언은 단호하기 그지없으셨다. 일을 줄이고 기운 없어 보였던 것이 언제였는지 알 수 없을 만큼 황제로서의 위엄을 갖춘 모습이었다.
황후와 콘스탄트 공작은 이를 물고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이 정도 공격으로 끝날 일은 아닐 텐데... 지난번에 그리 당해놓고 또 허술하네.
다른 꿍꿍이라도 있을까?
그때 눈치 없이 끼어드는 자가 있었다.
"공녀는 끝까지 황족의 씨를 가졌다고 믿는듯합니다. 황궁의, 혹시 일정하게 달거리를 하던 이가 한, 두 달 미루기도 하는가?"
저기, 몬테 공작? 적의 적은 아군이다 이건가? 몬테 공작은 콘스탄트 공작을 돕기로 한 모양이었다. 원수지간이 편들어 주면 개관적인 것처럼 보이잖아.
"스트레스나 환경적 요인으로 없는 일은 아닙니다."
"게다가 태아의 심장소리도 황궁의만 들었고 증명된 것이 없지 않습니까? 폐하, 물론 공녀가 황실의 여인이 되기에는 너무 문란하게 논 것이 사실이나, 만약 진짜 복 중 태아가 황손이라면 큰일이지 않습니까?"
몬테 공작의 말에 반색한 콘스탄트 공작이 애원했다.
"그, 저희 딸이 지은 죄는 크나, 배속의 아이는 죄가 없으니 죄인의 아이로라도 살아갈 수 있게 해주십시오."
뭐래, 반역죄는 연좌제인데. 당연히 공녀의 아이가 황태자의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만약이라는 가능성에 폐하께서 주저하시는 모양이었다.
아들을 믿는 마음과 손주의 문제는 별개니까. 게다가 나를 아끼고 사랑하셔도 핏줄을 버리긴 힘드시겠지.
이해하는 마음과는 별도로 조금 서운했다. 아들을 믿어주시지.
"짐은, 내 아들과 며느리의 명성에 단 하나의 오점도 남기고 싶지 않다. 지금까지의 정황으로 봐서는 내 아들이 파렴치한 짓을 저지르지 않았고, 공녀가 문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쪽이 더 올바른 추리가 맞다. 이대로 공녀를 처분하면 억측을 남겨 내 소중한 아이들을 더럽히겠지. 그러니 티끌만 한 오점도 남아서는 안 되기에, 공녀의 출산 과정을 지켜보겠다. 황궁의."
아, 아바마마, 오해했네요. 죄송해요. 반성하자.
"예, 폐하. 하명하십시오."
"복중의 태아가 성장하는 것은 다르다고 했지. 증거가 있느냐?"
"서대륙 의사 협회에 최근 연구 결과를 논문으로 제출했고, 비슷한 연구를 하던 의사들의 검증을 받은 책이 있습니다."
"그 의사들을 초빙해 공녀의 태아 상태를 점검하라. 8개월 후에 태어나는지, 10개월 후에 태어나는지, 공녀가 주장하는 개월에 맞는 변화가 생기는지 검증해야 할 것이다. 볼라드 공작, 풍문에 동대륙에는 피를 이용해 혈연관계를 확인하는 비술이 있다 들었다. 동대륙에 사신을 보내 그 비술을 얻어 오너라."
공녀는 몸을 떨며 끝까지 카일의 아이라며 웅얼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황후와 공작은 눈에 띄게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8개월 뒤면 거짓이 드러날 텐데, 왜 안심하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화근이 될 것이라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이미 증거가 차고 넘치는데, 공녀의 억지로 당장 일어날 일을 넘겨서는 안 돼.
어차피 루머 같은 것은 금방 지워질 일이었다. 감수할 수 있는 오점이라고.
"아바마마, 저는..."
"폐하!! 큰일 났습니다! 국경에서 급보가 날라왔습니다."
갑자기 뛰어들어 온 전령이 있었다. 국경이라고? 설마?
"무슨 일이냐?"
"북부 왕국의 새로운 왕이 제국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국경인 비스 영지와의 경계에 군사를 배치하고 있다고 합니다."
나는 똑똑히 보았다. 그 순간 얼굴에 만족감이 퍼지는 황후와 콘스탄트 공작의 미소를 잊을 수 없었다.
곧, 아버지는 영지와 제국의 국경을 지키기 위해 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못하고 떠나셨다. 카일과 공작들은 폐하를 모시고 긴급회의를 위해 자리를 옮겼다.
공녀를 다시 가두고 밖으로 나오는 길에는 나와 황후만이 남았다.
"또, 위기를 넘겼구나."
"폐하야말로 잘 피하셨네요."
"아슬아슬했지 뭐니? 정말 깜찍하구나, 황태자비. 그렇게나 잘 준비하고 숨기고 있는지 몰랐어. 호호호."
황후가 나를 위아래로 훑어 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은 잠시 내 배에 머물렀다.
설마, 눈치... 챈 거야? 전신을 감싸는 불안함에 몸이 떨려왔다.
"이번에는 내가 절대 지지 않을 것 같구나. 잘 지키거라. 네가 사랑하고 아끼는 것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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