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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비의 대역으로 살아남기-116화 (116/126)

116화. 황후의 속셈. (1)

2018.08.23.

"와, 와!!"

신년제의 사열식이 열렸던 장소에서 오늘은 출정식이 열렸다. 테라스에서 내려다 본 군사들의 행렬은 끝이 없었다.

중무장한 기사들의 사기는 드높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군대를 이끄는 것은 대륙 최고의 실력자인 창공의 지배자, 카일룸 헬리오스 데피니토르이니 두말하면 잔소리였다.

이렇게 사기가 높은 기사와 군인들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착잡했다.

"지지 않는 태양인 데피니토르의 황태자가 너희들을 이끌 것이다. 북부의 애송이들에게 너희들의 뜨거움을 제대로 보여주거라!"

폐하의 말에 더 어마어마한 함성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바마마는 카일에게 지휘관을 상징하는 보검과 망토를 내려주셨다.

검을 받아든 카일은 망토를 걸치고 기사들을 내려다보았다.

"나를 믿고 따르면 누구도 지지 않는다. 그대들은 너희를 이끄는 나를 믿을 것인가?"

"황태자 전하를 믿고 따릅니다. 존명!"

"존명!"

테일러경이 무릎을 꿇으면서 선창하자 나머지 기사들이 파도가 일렁이듯 일제히 외치며 무릎을 꿇었다. 그 모습이 이 기사들이 얼마나 잘 준비되었는지를 보여주었다.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절도 있는 기사들의 모습. 이들을 믿고 카일을 보내줘도 되겠지?

"카일."

나는 꼭 이 순간을 예상하고 만든 것처럼 준비된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처음에 만들었던 것에 비해 아주 정갈해진 수가 놓여있었다.

4대 정령의 상징과 카일, 그리고 내 이니셜을 새긴 손수건을 꺼냈다. 이것을 카일의 검 손잡이에 묶어 주려는데 손이 계속 떨려버렸다.

카일은 차분히 그런 나를 기다려 줬다. 예쁘게 묶어주려던 마음과 달리 비뚤어진 매듭의 모습에 참아왔던 눈물이 터지려 했다.

기사들이 지켜보고 있어. 황태자비가 울면 기사들의 사기가 떨어질 거야.

아가야, 엄마가 아빠 잘 보낼 수 있게 기운을 줘.

"승리의 여신이 늘 당신 곁에 함께 할 거예요."

"이 손수건이 내 승리의 여신인 거지?"

"응."

"네가 유일하게 자신 없어 하던 것을 드디어 성공했네?"

"여전히 볼품없어요."

"내게는 그 어떤 장인의 작품보다 좋아 보여."

카일의 다정한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나는 카일에게 약속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약속을 늘 지키는 사람이니까.

"봄이 오기 전에 돌아와야 해요. 알죠?"

"물론이지."

약속을 들은 나는 카일에게 웃어 준 뒤 기사들이 있는 테라스를 향해 돌아섰다.

"정령의 딸인 나, 아르세아아 스텔라 데피니토르가 전쟁에 나서는 그대들을 위해 축복을 내린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연인을 다시 만나기 위해서라도 그대들의 용맹함은 찬란하게 빛나리."

나의 외침과 함께 기사들이 도열한 곳 주변으로 아바마마의 생신 때와 같은 스노우드롭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기사들에게 보내는 희망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알리페르에게 줬던 아나이스와, 최근에 구했던 독수리가 기사들의 주변을 돌며 용맹함을 뽐냈다.

독수리는 이번에 카일의 전령조로 따라갈 것이었다.

기사들이 검집이나 창끝을 바닥에 두들기며 우렁찬 소리를 질러댔다. 꽃이 활짝 피고 새들의 비행이 끝난 시간. 이제 진짜로 카일은 전쟁터로 떠나야했다.

카일은 마지막으로 내게 키스를 했다. 그 모습에 기사들의 함성 소리는 더 커졌고 기사들의 연인들이 너도 나도 튀어나와 손수건을 매어주고 키스를 나누었다.

그 중에는 테일러경과 루시엘라도 있었다. 루시엘라의 표정도 나만큼 좋지 않았다. 그 옆에 있던 무인은 아니지만 참모 자격으로 떠나는 루카스는 그의 사촌으로 보이는 여자와 티격태격 싸우며 잠깐의 이별을 고하고 있었다.

짧은 이별의 순간이 끝난 뒤 자신의 검은 흑마 위에 올라탄 카일은 기사단의 선봉에서 대군을 이끌고 성문을 나서기 시작했다.

카일은 성문이 열리는 순간 멀리 테라스 위에 있는 나를 돌아보았다. 멀어서 확실하지는 않지만 나를 향해 미소를 지어주는 듯했다.

제발, 무사히, 다들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와 주길...

"아가, 같이 차나 한잔 하자구나."

카일의 뒷모습에 눈을 떼지 못하는 내게 아바마마가 말을 걸어오셨다. 나는 뒤늦게 터진 눈물을 빠르게 수습하고 뒤돌아섰다.

"네, 아바마마와의 티타임은 언제나 즐거워요."

가능한 최대한 눈을 휘어서 대답해 드렸다. 그런 나를 인자하게 봐주시는 아바마마였다.

태양궁으로 옮긴 우리는 아바마마의 서재에 자리 잡았다. 응접실도 아닌 서재로 부르신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처음 보는 장소에 조금 들떠 이것저것 책을 꺼내 보았다.

"모르는 책이 많아요. 우와."

"마음에 드느냐?"

"네, 좋아요. 오래된 책에서 나는 냄새가 이상하게 편하게 느껴지네요."

"허허, 네 아이들은 널 닮아서 공부를 열심히 하겠구나. 자, 이제 자리에 앉거라."

자리에 앉자 예전에 봤던 친근한 시종장이 차와 다과를 내어주셨다.

"어머, 이건..."

"요즘 이것을 많이 찾는 다지?"

과일 푸딩과 젤리, 그리고 절인 과일을 잔뜩 올린 타르트와 말린 건과일이 듬뿍 들어간 쿠키가 준비되어 있었다. 게다가 차는 내가 태아를 위해 열심히 마시던 로즈힙 차였다.

"아바마마..."

"예전에 카일 녀석의 친모도 너와 같은 처지였지. 전대 콘스탄트 공작은 호시탐탐 황후를 밀어내고 제 가문의 여식을 황후로 책봉하려고 했단다. 그래서 회임한 것을 밝히지도 못하고 배가 불러올 때까지 숨겨야 했었어."

역시 황실의 여인은 어려운 자리네. 어마마마도 그리 고생하셨구나. 하긴 그때는 후궁들까지 있던 시기니까 더 마음고생 심하셨겠다.

"카일 녀석이 후궁 제도를 폐지해서 너는 좀 나아졌으리라 생각했는데, 여전히 같은 상황이라 내가 다 미안하구나."

"제가 선택한 남자가 황족이라 어쩔 수 없죠. 저는 괜찮아요. 그런데 감기에 걸리신 거예요? 왜 이렇게 잔기침을 많이 하세요."

아바마마는 크지는 않았지만 계속 자잘한 기침을 하셨다.

"흐흠, 늙으면 면역이 떨어지는 법이란다."

"카일이 곁에서 건강을 챙겨드렸어야 했는데..."

"내가 내 손주들 보기 전에는 쓰러지지 않을 거라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가을이면 만날 수 있는 거냐?"

"네, 수확제 전일 것 같아요."

"허허허허, 좋구나. 그런데 아가, 내가 공녀를 아직 살려두어 불안하지?"

솔직히 말하면 맞았다. 화근이 될 것이 분명했다. 황후가 무슨 꿍꿍이인지도 모르는데...

"자, 이걸 받거라."

아바마마는 작은 상자를 하나 내어주셨다. 그리고 그 속에 든 것은...!

"아바마마!!"

"황후와 콘스탄트 공작이 나쁜 꿍꿍이를 가진 듯하니, 잘 지니고 있거라. 꼭 필요할 것이야."

"하지만, 이것을 어찌 제가..."

"자, 아가, 네가 시큼한 것을 좋아한다 해서 레몬을 절여서 타르트를 만들어 봤단다. 어찌 제 아비 식성을 빼닮았는지, 카일 닮은 아들 녀석일까 봐 무섭구나."

아바마마는 사람 좋게 웃으면서 내게 타르트 조각을 내밀었다. 말을 돌리는 아바마마는 더 이상의 질문에 답하지 않겠다는 듯 단호한 표정이었다.

결국 아바마마가 내밀어 주신 타르트를 베어 먹는 데 너무 상큼했다. 그리고 맛있었다.

"아바마마를 닮아서 카일이 자상한가 봐요."

"나는 무뚝뚝한 반려였단다. 그래서 후회를 많이 했지."

아바마마의 표정에 여러 가지 회한 어린 슬픔이 묻어났다. 표현을 하지 않으셔서 모르겠지만, 아마도 아바마마는 돌아가신 어마마마를 누구보다 사랑하지 않으셨을까?

"그래도 어마마마는 행복하셨지 않을까요? 화첩이나 초상화를 보면 언제나 웃고 계셨는걸요."

내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는 아바마마셨다.

"특히 무덤에 있던 가족들의 그림 말이에요. 아이들을 바라보는 아바마마와 그런 남편을 바라보는 어마마마의 표정은 모두 행복했어요."

"그거 사실 황후가 아이들을 보고 있었는데 나를 보고 있는 것으로 고쳐 그리게 했단다. 허허허. 그래도 웃고 있긴 했지. 너만큼이나 웃는 게 예쁜 사람이었단다."

역시 권력이 있으면 못하는 게 없구나. 하하하. 아바마마도 카일못지 않은 질투쟁이가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두 형제를 보는 어마마마의 고개를 돌려버리셨지.

역시 부전자전의 힘!!

윽, 그런데 나중에 카일도 저러면 어쩌지? 자식들에게 질투하고 그러진 않겠지?

아바마마와 이것저것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따뜻한 차를 드셔서인지 아바마마의 잔기침도 멈추어서 마음이 놓였다.

온 김에 미래에 태어날 황손들의 이름을 같이 골랐다.

"황녀는 역시 꽃 이름이 예쁘겠지?"

"저도 좋아요."

"황자들은, 흠 영웅들의 이름이 좋을까?"

아바마마는 최근에 하는 일 중에서 가장 열정적으로 임하는 일이라고 하셨다. 꺄아, 우리 시아버지 너무 귀여워.

그나저나 카일이 돌아오면 자기 빼고 정했다고 삐치려나?

"그런데요. 아바마마의 자식은 속이 좀 좁아서 우리끼리 정했다면 분명 투덜거릴 거예요."

"그러면 황자, 황녀 이름 후보를 세 개씩 정해놓음 되겠지. 이 중에서 고르면 그놈 의견도 들어가는 셈 아니냐."

"네. 그렇게 해요."

"누굴 닮아서 그렇게 속이 좁은지, 쯧쯧."

그러게, 누굴 닮은 거야?

나도 모르게 아바마마를 쳐다봤다. 흠흠. 설마 돌아가신 어마마마는 아닐 거고.

아바마마가 곁에 계셔서인지 조금은 긴장되고 염려되었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카일이 돌아올 때까지 정신 똑바로 차리고 아바마마와 이 황실을 지켜내야지.

저녁때까지 아바마마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저녁까지 함께 먹은 뒤 태양 궁을 나서려는데 황후를 만났다.

어휴, 아바마마가 내가 잘 먹는 것들로만 준비해주셔서 오랜만에 배불리 먹었는데 체하겠어.

"이제 돌아가느냐?"

"... 예, 폐하."

"어디 불편한 곳은 없고?"

"네, 괜찮습니다."

이 황궁에서 이제 불편한 사람은 당신 밖에 없는데요?

"황태자가 자신을 기다리는 어여쁜 비를 위해서라도 금방 돌아와야 하는데 말이야."

카일을 걱정하는 듯이 말하는 황후의 말이 역겹게 들렸다. 돌아오지 못할 곳을 가기라도 한 것처럼 말하는 것이 듣기 거북했다.

황후의 시선이 내 배와 손에 들린 주머니로 차례로 이어졌다.

다행이었다. 아바마마가 주신 상자는 주머니의 제일 아래에 넣어 두었고, 쿠키들을 그 위에 채워 둔 것이다.

"폐하가 너를 참 많이 아끼나 보구나."

"다과를 함께하는데, 제가 너무 잘 먹는 쿠키가 있어서 잔뜩 챙겨주셨어요."

내 배와 주머니를 번갈아 보다가 눈썹이 살짝 올라가는 것이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폐하가 살아 계신 동안 효도 많이 하거라. 후회하지 않게."

황후의 눈빛이 묘했다. 저런 바른 말을 할 사람이 아닌데...

"당연하지요."

내 대답에 묘한 미소를 보이는 황후였다. 어째서 심장이 울렁거리는 걸까? 불길한 느낌이 강하게 차올랐다.

분명히 내가 회임한 것을 알고 있는 느낌이었다. 궁인들이 보고 있는데 날 확 밀어버리거나 이러는 것은 아니겠지?

그 불안한 느낌을 부채질이라도 하듯, 갑자기 황후가 내 곁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내가 흠칫 뒤로 물러서려고 하는데 갑자기 내 팔을 잡아채는 힘에 상체가 끌려갔다.

하필, 알리페르가 곁에 없었고 다른 기사들은 황후를 막아서야 하나 망설이며 우물쭈물했다. 그 사이 황후는 제 얼굴을 귓가에 대고 내게 속삭였다.

"내 편이 되라 할 때 말을 듣지 그랬니? 이제는 후회해도 늦었단다."

내 팔을 놓아 준 황후는 입꼬리를 크게 올리며 크게 웃었다.

"호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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