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앞으로도 지금처럼... (完)
2018.08.30.
기나긴 꿈을 꾸었다. 몇 년 치 기억인지도 모르겠다. 대부분은 아팠던 시절의 꿈이었다.
사람들에게 배척받고 외면받던 시절. 내 소중한 여동생을 화마에 잃을 뻔했던 시절의 이야기들.
아르도르가 화재 현장에 있는 것을 봤던 것도 기억났다. 나의 거부에도 나를 구하기 위해 애쓴 4형제의 모습도 선명하게 떠올랐다.
너무나도 많은 여러 가지 기억 때문에 혼란스러웠다. 깨어나는 순간 다시 저런 절망스러운 일들이 펼쳐질 것 같아서 괴로웠다. 그래서 눈을 뜨기 싫었다.
그런데 아픈 기억들 때문에 눈물이 흐르던 중간중간 내 뺨을 만져주는 사람이 있었다. 애타게 나를 부르는 목소리도 있었다.
"꽃이 이렇게나 많은데, 내 눈에는 네가 제일 예쁘네."
저런 낯부끄러운 소리를 하다니!! 누군가와 싸우는 소리도 들렸다.
저기, 나 자는데 싸울 거면 딴 곳으로 가서 싸우시죠?
"세이, 곧, 처제가 온대. 처제 얼굴 봐야지. 언제 일어날 거야?"
내가 일어나길 바라는 목소리는 매일 같이 찾아왔다. 그리고 나를 꼭 끌어안고 잠이 들었다.
이 사람이 나를 끌어안아 줄 때마다 나쁜 꿈을 꾸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향기가 나를 편하게 해줬다. 레몬 향인가? 기분 좋아.
어느 순간부터 이 남자가 곁에 있으면 기분 좋은 꿈만 꾸었다. 아버지께 오르골을 선물 받았던 일, 그것이 망가져서 울 때 아버지가 내 앞에서 그것을 고쳐주고 머리를 쓰다듬어 준 일도 떠올랐다.
내가 뽀뽀를 해드리자 울 것 같은 눈으로 환하게 웃으셨지.
여동생에게 꽃을 선물해주고 같이 뛰어 놀았던 것도 떠올랐다. 그 아이는 나를 병아리처럼 따라다녔다. 귀여워.
그리고, 케이. 우리 다시 만난 것 같은데, 케이가 누구더라?
"이제는 그만 네 목소리를 들려주면 안 될까? 그리워. 네가 혼내는 것도, 찡그리면 이마에 뽀뽀를 해주던 것도, 등짝을 때리는 것도 전부... 네 배속의 아기가 어떻게 커가고 있는지도 듣고 싶어."
아기? 내 배속에 아기가 있어?
아, 그래, 잊고 있었어 나의 아기, 나와 케이, 아니 카일의 아기가 있었지. 아가야, 무사하니?
다행히 아기의 생명력이 느껴졌다. 내가 계속 이렇게 꿈만 꾸고 있으면 이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지 못할 거야. 깨어나야 해.
그때 내 입술에 닿는 따뜻한 감촉이 느껴졌다. 조금은 거칠어진 입술. 카일의 입이 나의 입술을 살짝 물어오는데 아직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아, 안 돼. 카일, 조금만 더. 카일의 입술이 떨어지려 하자 애가 탔다. 카일이 도망가지 못하게 막아야 해.
치사하게 너만 즐기면 다냐!!
손끝부터 힘을 줬다. 그러자 팔이 움직여질 것 같았다. 그래서 있는 힘껏 팔에 힘을 주어 그의 목을 감쌌다.
"혼자 즐기기 있어요?"
내가 살짝 카일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러자 카일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것이 보였다.
"세이!!"
"늦게 돌아와서, 미안해요."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카일이 나의 입술을 다시 덮쳐왔다. 아까의 조심스러운 태도와는 다른 적극적인 카일의 입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살짝 입을 벌리자 카일의 것이 나의 것을 휘감았다.
도대체 이게 얼마 만에 느끼는 감촉이야?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카일을 향해 더 밀착하고 적극적으로 임했다. 이제는 내가 먼저 카일의 것을 감고 카일의 향을 느꼈다.
"세이, 보고 싶었어."
"나도요."
한참이나 이어진 키스 후에 카일이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의 눈가는 아직도 촉촉했다.
"너를 잃는 줄 알았어."
"미안해요. 괜히 내가 당신 찾으러 가는 바람에 더 고생시키고, 걱정시켰어."
"아니야. 내가 더 강했으면 너를 다치게 하지 않고 지켰을 거야. 게다가 네가 애쓴 덕에 아바마마도 지켰고, 황후 일당들도 손쉽게 해결했어."
"다 해결된 거예요?"
"응."
카일이 그 사이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해줬다. 모두 결국 내 활약 덕분이라며 웃어주는 카일 덕에 괜히 부끄러워졌다.
"다들 세이가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어. 그리고 세이가 아기를 마음껏 키울 수 있게 준비하고 있어."
"아... 우리 아기, 무사한 거예요?"
"응. 임베르가 네가 쓰러진 동안 너랑 아기를 잘 돌봤어."
그러고 보니 이곳은 정령계였구나. 임베르가 카일의 칭찬에 쑥스러운 듯 정령수 옆에서 웃고 있었다.
아, 키스하는 것 다 봤겠네.
"다들, 오랜만이야."
"여왕, 나를, 우리를 용서한 것인가?"
아르도르가 내 눈치를 살폈다. 카일은 그런 아르도르를 아니꼽다는 듯이 봤다. 둘이 싸웠나?
"내가 너희를 오해했어. 미안해."
"아니다. 네가 싫어하는 짓을 골라 한 우리의 자업자득이었다. 이제는 바뀌도록 노력하겠다."
"응. 고마워. 정령수랑 금지된 숲은 어찌 됐어?"
"네가 정령의 여왕임을 자각해서 느리지만 천천히 회복되고 있다."
나는 정령석이 사라진 정령수를 보았다. 아직은 싱싱하지 않지만 조금씩 생기를 되찾고 있었다.
나는 손으로 정령수의 줄기를 짚은 뒤 정령수의 회복을 빌었다. 그러자 바로 정령수의 잎이 싱싱하게, 반짝반짝 빛을 내며 활짝 피어났다.
"역시, 여왕이군. 그전에는 너의 거부감으로 만든 봉인 때문에 힘을 쓸 수 없었던 것 같다."
"이제는 잘 보살필게. 정령수도, 자연도."
나는 정령왕들에게 자주 놀러 오겠다고 약속하고 카일의 손을 잡았다.
"이제는 집으로 갈까요, 나의 기사님?"
내 말에 카일이 환하게 웃었다. 내 악몽을 지워주는 소중한 사람. 카일의 걱정처럼 기억을 되찾은 나는 방황했다. 하지만 결국, 카일 덕분에 중심을 잡고 깨어날 수 있었다.
"어서 가실까요, 나의 비?"
만월궁에서 나를 맞이한 시녀들은 엉엉 울었다. 다행히 내가 떠난 사이 희생된 사람들은 없는 듯했다.
"다행이야."
"비 전하, 나빠요. 우리 버리고 가서는 쓰러지셔서 돌아오지도 못하고!!"
에이린이 나를 원망했다. 미안하게... 알리페르도 무모했다며 나를 혼냈다.
"미안, 펠."
"누님을 잃는 줄 알고 얼마나 걱정한지 압니까?"
"나는, 내 소중한 사람들을 두고 쉽게 죽지 않아. 봐줘. 이렇게 잘 풀렸잖아."
"다시는 이러지 마십시오."
"응."
궁인들과 기사들에게 인사를 한 뒤 나는 아바마마를 뵈러 갔다.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아가, 너도 고생했구나."
아바마마는 이전보다 훨씬 건강해지셨다. 혈색도 더 좋아지셨다.
"정령왕의 능력이 대단하더구나."
"원하시면 불로장생의 꿈을 이루어 드릴게요."
"허허허, 나는 자연스럽게 늙다가 네 시어머니 곁으로 갈 거란다. 그나저나 내가 대단한 며느리를 두었구나. 정령의 여왕이라니."
"헤헤헤."
아바마마와 즐거운 회포를 풀었다. 내가 온다고 궁 밖의 디저트 가게에서 내가 좋아하는 케이크들도 잔뜩 준비해주셨다.
"다, 네 배속의 아기를 위한 것이니 많이 먹거라."
"아바마마, 세이가 깬지 얼마 안 돼서 위에 부담이 갈지도 모릅니다."
"위에 탈나면 임베르 부를 거예요. 우리 아기가 배고프대요. 그냥 먹을래."
내가 그렇게 말하자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마음껏 배부르게 먹었다. 달달한 것들이 참 맛있었다.
한참을 먹는동안 우리는 태명을 정하면서 싸워댔다. 리틀 세이와 리틀 카일을 두고 결정을 못 했다. 결국에는 아주버님의 애칭으로 태명이 결정됐다.
"케이야, 너네 아빠 너무 똥고집이야."
"그래도 나는 네 엄마를 무지 사랑한단다."
만월궁으로 돌아간 나는 알비케라의 방으로 갔다. 아직 알비가 가지고 놀던 장난감들이 다 그대로 있었다.
"괜찮아?"
"알비는 끝까지 나를 지켜주고 보호해줬어요."
"정말 고마운 아이였어."
"다시 만나고 싶은데... 혹시라도 다시 태어난다면, 그 때는 내 아이로 태어나 주면 좋겠어요. 내가 사랑만 듬뿍 주게."
"꼭, 찾아 올 거야."
"응."
***
3월, 봄이 시작되는 달, 제국에는 큰 행사가 열렸다. 바로 황제와 황후의 대관식이었다. 선황, 그러니까 아바마마의 양위로 이루어지는 대관식에는 대륙 곳곳의 손님들이 찾아왔다.
"스타티나!!"
"언니! 아니 비 전하. 아니다. 이제 황후 폐하인가?"
"네게는 언니로 족하거든?"
나와 스타티나는 서로를 꼭 끌어안았다. 서로 쌍둥이처럼 닮은 우리는 서로를 보고 눈을 붉혔다.
"언니, 보고 싶었어."
"나도, 내 소중한 동생."
"말 못 하고 가서 미안해."
"어, 덕분에 고생 많이 했어. 어떻게 편지를 그렇게 쓰고 가니?"
내가 머리라도 쥐어박을 듯이 굴자 스타티나는 헤헤거리며 피했다.
"스타티나, 이제 제국의 공녀인데 얌전히 좀 굴거라."
"아버지, 어머니!"
지난달, 반역죄에 대한 처분이 끝난 뒤 아버지와 펠의 공을 인정받아 비스 후작가는 공작가로 격상되었다.
그길로 아버지는 바로 어머니와 재혼하셨다.
"스타티나. 왕자님은 오지 않은 건가요?"
"그, 네, 왔어요. 잠시 공관에 들렸다가 온다고 했어요. 그, 저, 어머니."
스타티나는 어머니를 아직 조금 어색해했다.
사실 죽은 몬테 공작이 변란 동안 내가 가짜 황태자비이고 저주받은 아이라는 소문을 황성에 퍼트렸다.
그래서 카일이 실종되고 아바마마가 쓰러졌다나? 불안한 정세에 황성에 사는 제국민들의 상당수가 믿었다고 한다.
카일이 돌아오고 몬테 공작이 처형된 뒤에도 소문은 암암리에 퍼졌다.
결국 카일은 애초에 청혼서에 비스가의 장녀를 시집보내라 했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리고 몬테가에서 또 사특한 마음으로 차녀를 황태자비로 보낸 것이라 밝혔다.
그리고 마음 착한 차녀가 몬테 공작을 속이고 나를 다시 황태자비로 보내고 자신은 숨은 것이라고 바로잡았다.
그리고 내가 정령의 여왕임을 밝혔다. 그것은 나와 교류했던 농민들이 적극 지지했다. 내가 나누어준 겨울 작물들이 소출이 좋아 수확을 앞둔 그들은 나를 열렬히 찬양한다고 했다.
그래서 스타티나의 방문은 많은 귀족들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정령의 여왕인 황태자비를 돌려준 용기 있는 공녀가, 타국의 왕세자와 결혼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얼른 새 사위랑 친해지고 싶은데."
"사위요?"
"그럼요. 스타티나도 내 사랑하는 딸인걸요."
"어머니, 딸이라면서 왜 존댓말이에요."
"언니 말이 맞아요. 제게 편히 말하세요."
그 말에 어머니의 눈에 다시 눈물이 맺혔다. 헤헤, 우리 진짜 모두 제대로 된 가족이 된 거죠?
"비 전하!"
"프리케! 유리아!"
"잘 지내셨습니까?"
"응, 아니지. 잘 지냈답니다. 루피넬리아의 국왕과 왕비, 두 분도 좋아 보이네요."
"꺄아,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아직도 어색해요."
유리아도, 프리케도 잘 지낸 것 같았다. 프리케는 열심히 자국을 복구하는데 힘쓰고 있었다. 아직 내전의 상처가 수습되지 않아 못 올 줄 알았는데.
"황태자, 아니 폐하께서는 어디 갔습니까? 몸 무거운 임산부만 밖에 세워두고요."
"그러게. 내가 널 만나면 분명 짜잔 나타나서 이유없이 으르렁거려야하는데."
그러고 보니 대관식 준비를 하다 말고 어디로 사라진거야? 이 남자가 진짜. 나만 바쁘잖아.
대략의 귀빈들을 만난 뒤 나는 이제 대관식 준비를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웠다. 그때까지 카일은 나타나지 않았다.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다시 하려고 풀었는데 그제야 나타났다.
"어딜 갔던 거예요?"
"잠시 나랑 어디 좀 가."
"응? 어디요?"
카일은 그저 웃으면서 날 들어 안았다. 이 사람이!
"케이 놀라겠어요."
"우리 딸은 좋아할 거야."
"아들일 거라니까요."
투닥 거리는 사이 카일은 에우루스를 불러다가 우리를 유리온실까지 옮기게 했다. 온실은 거대한 검은 천이 덮고 있었다.
"뭐예요?"
땅에 발을 디디자 카일이 내게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 위에 내 손을 겹치자 카일은 나를 유리 온실로 데려갔다.
검은 커튼으로 가려진 온실은 새까맸다. 온실의 문이 닫히고 카일이 손가락을 튕기자, 갑자기 안이 환해졌다.
"아, 카일, 너무 예뻐요."
온실 안은 크리스털로 만든 커다란 장미와 별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리고 크리스털들은 가운데 달린 마법등 때문에 아름다운 빛을 내며 반짝였다.
그리고, 거기서 날아오르는 빛이 있었다.
"이 계절에, 어떻게 구했어요?"
커다란 반딧불이들이 날고 있었다. 예전에 이것을 꼭 같이 보러 가자고 약속했었는데.
"정령왕들이 애를 썼지."
아마 정령계에서 데려왔겠지. 피식 웃는데 갑자기 카일이 내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아르세이아."
"카일!"
"나는 네게 철없는 남편인 것 알아. 질투랑 투정도 많고 네게 집착도 강하지. 그래서 평생 널 귀찮게 굴지도 몰라."
카일은 새삼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어쩌면, 우리 아이한테도 질투할지 모른다? 게다가 황제가 된 이후에도 너와 나를 이간질하려는 무리들이 끊이질 않을 거야."
카일은 잠시 고개를 숙이더니 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그리고 상자 뚜껑을 열면서 말을 이었다.
"그래도 나를 사랑한다면, 나와 함께 하겠다면, 나의 유일한 황후가 되어주겠다면, 이 반지를 받아주지 않을래?"
카일의 손끝이 살짝 떨렸다.
"바보, 이미 나는 당신의 유일한 반려잖아요. 왜 떨고 그래요."
나는 카일이 내미는 반지 앞에 내 손을 내밀었다. 카일은 세상 누구보다도 행복한 표정으로 나의 손에 반지를 끼워줬다.
장미 모양으로 만들어진 반지는 나만을 위한 결혼반지였다.
"카일, 사랑해요. 우리 앞으로도 지금처럼 서로를 위하면서, 아끼면서 평생을 함께해요."
"사랑해, 세이."
카일과 나는 입술을 겹쳤다. 그리고 우리의 뜨거운 키스는 우리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전혀 배려하지 않았다.
뭐, 상관있어? 우리가 이제 황제고 황후인데, 기다리라 그래.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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