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수는 검 한 자루-3화 (3/164)

00003 1. 골칫덩이 이에샤 =========================

“부탁해.”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간절하냐고? 기사가 되겠다는 다짐을 오늘 했다. 애가 끓을 턱이 없었다. 이에샤의 마음은 조바심에 가까웠다. 2년 뒤에는 성년. 알디온 후작가에서 검만 휘두르는 삶을 마쳐야 했다. 독립하여, 앞길을 닦을 수단이 필요했다. 용병보다야 기사가 신분에 어울리리라. 벌이도 빵빵하고.

“나 기사가 될래. 세비, 도와줘.”

“좋아. 이-샤는 내 딸이니까.”

셈브리온이 농담조로 말했다. 이에샤는 깔깔 웃어 버렸다. 셈브리온을 사랑했지만, 포크 쓰기가 귀찮다고 손으로 고기를 뜯는 아버지는 폼이 안 났다. 그래도 머리카락이 화려한 빨강으로 바뀐다면 좋을 것 같았다.

* * *

델페레타 제국의 근위 기사단장―체사로 에버렛은 외골수였다. 보잘것없는 자작가의 차남으로 태어나 검만 보며 살아왔다. 근위 기사가 되었던 나이는 서른. 거기서 9년 만에 브링을 깨쳐, 단장 자리에 올랐다. 백작위까지 내려졌으니 자수성가한 셈이었다.

세계의 강호를 묻는다면 체사로는 세 손가락을 꼽았다. 쟐레 왕국의 천부장 벨타르테오. 레오웰 도시 연합의 헤놀 시장. 마지막으로 벨체터의 대용병 셈브리온 데힐. 브링어 중에서도 빼어난 이들이었다. 체사로는 셈브리온과 검을 부딪쳐 본 적이 있었다.

체사로의 기억 속 셈브리온은 사나운 남자였다. 제국의 벨체터 파병을 반기지 않았었다. 체사로에게도 날카롭게 굴었다. 헤어질 즈음에는 친구가 되었으나,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거라고 여겼다.

넉살 좋게 웃는 셈브리온은 딴사람 같았다.

“아니, 자네 도대체. 제국에 있었단 말인가?”

“어쩌다 보니 11년째.”

셈브리온이 뒷머리를 긁었다. 체사로는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제가 벨체터에서 돌아온 지 1년 만에, 셈브리온도 델페레타로 왔다는 소리가 되었다. 그러면서 편지 한 통 주지 않았다니! “셈브리온이라는 남자가 주인님을 뵙고 싶다는데요.” 하고 들었을 때는 동명이인인가 싶었다.

외로운 파병 생활을 달래 주었던 친구가 야속하기 그지없었다. 성격도 많이 바뀐 듯했다.

“델페레타가 철수하고 나한테도 일이 많았어. 더는 고향에 있을 수가 없게 됐지. 여기가 말이라도 통하니까 온 거야.”

“자네는 언어를 배우는 게 빨랐지. 다른 나라로 갔어도 소통은 금세 됐을 거네.”

“됐어. 세상에 제국보다 안전한 곳이 있겠나. 이제 전쟁은 지긋지긋해.”

체사로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벨체터에서는 내란이 한창이었다. 셈브리온이 청년일 무렵부터 그러했으니, 응어리진 것이 많을 만도 했다. 지나간 이야기는 덮어 두기로 했다.

에버렛 백작 저택은 훌륭했다. 알디온만큼은 아니어도 크고, 점잖았다. 작위조차 없던 평기사가 이제는 근위 기사단장이자 백작이 되었다. 세월이란 대단했다.

셈브리온이라고 제자리걸음만 한 것은 아니었다. 아니, 어마어마한 결실을 맺어 냈다. 브링어 제자 키우기가 예삿일이겠는가.

“실은 내 자네에게 부탁할 게 있어서 왔어.”

“부탁? 돈은 부족하지 않을 테고. 제국인이 아니라고 불이익이라도 당했나?”

“그런 건 아니고, 연줄에 기대서라도 추천하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체사로는 놀랐다. 셈브리온의 붙임성은 끔찍했었다. 델페레타 파병군에서도―검에 열심이라는 이유로―체사로밖에 가까이하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경계심을 품었다. 그러한 셈브리온이 제국에서, 해묵은 인연까지 꺼내 가며 바라지하려는 사람이 있다니. 궁금증이 피어올랐다.

셈브리온의 말문이 떨어졌다.

“자네, 종기사 둘 생각 없나?”

“글쎄. 얼마 전에 데리고 있던 놈을 독립시키기는 했는데.”

“그거 잘됐군! 젊고 똘똘하고 재능 있는 종자 하나 생각 없어?”

재능은 지나칠 정도였다. 셈브리온이 따져 봐도 ‘브링어 종기사’란 낭비의 끝판 같았다. 이에샤가 남자였다면 삶이 탄탄대로였을 텐데.

“누구길래 그래? 자네가 그렇게까지 추천한다면 내 한 번 보겠네. 싹수가 있는 놈이면 내 밑으로 들이지 못할 것도 없지.”

“그게 말이야, 놈이 아니라서 그러는데…….”

“으음?”

한숨이 나왔다. 체사로의 됨됨이를 믿었지만, 바보 취급당해도 할 말이 없었다.

이에샤를 위해서라면 자존심쯤 구겨져도 괜찮았다. 제국 귀족의 사정에야 저보다 체사로가 밝을 터였다. 알디온 후작 부부의 스캔들은 유명했고. 용건을 매끄러이 밝히고자, 셈브리온은 이에샤의 신상부터 꺼냈다.

“자네, 앨저 여백작이라고 들어 봤나?”

체사로는 시야가 넓었다. 자신부터 바닥에서 기어올랐으므로 모두에게 기회를 주고 싶어 했다. 근위 기사가 되면서 생겨난 너그러움이었다. 오랫동안 헤어졌던 셈브리온은 체사로의 포용력을 몰랐다. 이에샤의 이야기도 코웃음을 칠 줄로 예상했다.

“여자애가 자네 훈련을 따라왔다고? 난 자네의 지도 대련이 아직도 꿈에 나와 벌벌 떤다네.”

“이-샤는 출중해. 재능만 놓고 보면 나보다 낫지.”

“그 정도인가? 셈브리온, 자네는 최연소 브링어잖아.”

셈브리온은 대답을 삼갔다. ‘최연소 브링어’ 자리는 이에샤에게 넘겨준 지 오래였다. 그를 밝혔다가, 이에샤가 눈총에 휩싸일까 봐 두려웠다. 천재에 계집. 구설수에 오르내리기 딱 좋았다. 같은 까닭으로 셈브리온은 이에샤에게도 브링을 드러내지 말라고 일러 두었다.

털어놓는다면 이야기가 쉬워질 수도 있었다. 체사로는 괜찮은 반응을 보였다. 여자라도 꺼리지 않는 듯했다. 하지만, 저는 마흔이 되어 이룩한 경지를 이에샤가 밟았음을 알아도 태연할까? 사람은 어떻게 돌변할지 몰랐다.

체사로를 만난 것은 12년 만이었다. 셈브리온은 체사로를 믿지 못했다.

“틀림없이 어른이 되면 브링을 얻을 거야. 나보다 빠를지도 모르지.”

“허참! 자네 정도 되는 사람이 그리 극찬을 하니 정말로 궁금해지는군. 알디온 후작의 딸이 그런 귀재란 말이야?”

“제 아버지보다 날 닮았지. 고용주가 죽고 거의 내가 키웠거든.”

“후작 부인, 아니지, 앨저 영애도 자네에게 고마워할걸세.”

체사로가 들어맞았다. 에이릴리의 유언은 “고맙소, 데힐 씨.”였다. 그러고는 숨이 끊어졌다. 이에샤에게 사랑한다 말하기도 전에. 그만큼 셈브리온에게 감사한 것이었다. 돈을 받고 지켜 주었을 뿐인데.

그 돈으로 이에샤에게 장난감을 사 주고, 쓸만한 철검도 가져다주고, 이제 장래에까지 신경을 기울이니 감사받기에 차고 넘쳤다. 체사로의 종기사가 된다면 알디온을 나오더라도 에버렛에 의탁할 수 있으리라.

“나한테 이럴 게 아니라, 기사단 입단 시험을 보게 하지그래?”

“……뭐?”

“그토록 뛰어난 재목이라면 종기사 생활을 하느니 시험으로 수련 기사가 되는 게 낫잖은가? 평민도 아니니까. 경력에 오점도 안 생기고.”

“아니, 그, 그럴 수 있다면야 좋겠지만.”

셈브리온은 당황했다. 체사로가 입단 시험을 권해 올 줄은 몰랐다. 파격이 지나쳤다. 셈브리온은 체사로를 해괴망측하게 쳐다보았다.

“여자라니까? 제국에서는 여자가 기사도 될 수 있나?”

“그 여자를 기사로 만들어 달라고 찾아온 건 자네면서. 선례가 없다뿐이지, 여자라서 안 된다는 조항은 없네.”

“굳이 넣지 않아도 기사가 되려는 여자가 없기 때문이지! 꽉 막힌 놈들이 반대하지 않겠어?”

체사로는 입술을 터뜨리며 웃었다. 저라고 셈브리온이 말하는 바를 모르겠는가. 셈브리온도, 친구에게 수그릴 만큼 아끼는 제자가 입단 시험을 치르길 바랄 터였다. 처음부터 좋은 길을 포기하다니 안쓰러웠다.

“그렇다면 내가 추천장을 쓰겠네. 이래 봬도 기사의 정상이야. 어울리지 않는 이를 시험에 넣어 줄 만큼의 권한은 가졌어. 자네 말을 믿고 앨저 백작에게 걸어 볼 테니, 입단 시험을 치르라고 하게.”

“체사로.”

“혹시 아나? 제국 기사단에서 최초의 여자 브링어가 탄생할지.”

“…….”

셈브리온은 체사로에게 몇 번이나 “고맙네.” 하고 인사했다. 양심이 콕콕 쑤셨다.

“입단 시험? 일이 그 정도로 술술 풀렸단 말이야?”

“그래. 내가 뭐랬어? 이-샤. 난 네 생각보다 대단한 사람이라니까.”

“정말 그렇네! 세비가 기사하고도 아는 사이인 줄은 몰랐어!”

이에샤는 환하게 웃었다. 셈브리온의 손을 맞잡고, 깡총깡총 뛰고 싶었다. 셈브리온이 “어허, 과년한 처자가.” 하고 말리지만 않았어도 그랬을 것이다.

셈브리온이 나간 사이 이에샤도 오스터를 만났다. 기사가 될 거예요. 이에샤의 말에 오스터는 박장대소했다. 엄청난 우스갯소리라도 들은 양. 이에샤는 울컥했지만, 테이블에 있던 만년필을 집어 던지지 않고 되풀이했다. 내가 기사가 되는 데 방해하지 마요. 오스터는 선뜻 그러마 하였다. 턱도 없다고 여기는 게 뻔했다.

이에샤에게는 자신이 있었다. 입단 시험에 으뜸으로 붙을 자신이. 종기사로서 남의 시중을 드는 일보다야 쉬울 터였다.

셈브리온에게는 이에샤의 생각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한숨을 지었다. 이에샤의 앞날은 마음처럼 순탄치 않을 것이다.

“이-샤. 나랑 한 가지 약속해.”

“응? 뭐를? 세비, 지금이라면 당신이 하라는 대로 다 할 수 있을 거 같아!”

“그거 잘됐네. 하지만 그런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

짧게 주의를 준 뒤, 벼르던 이야기를 꺼냈다.

“남한테 브링을 들키지 않겠다고 약속해. 쓰지 말라는 게 아니야. 검에 브링을 두르거나 네 몸만큼 큰 물건을 든다거나 하는 식으로 눈에 띄지 말라는 거야.”

“……어째서?”

“이-샤는 옛날부터 사람 만나기를 싫어했지. 그래서 사람에 대해 잘 몰라. 생각해 봐. 너라면 다섯 살짜리가 아카데미 교수가 낸 수학 문제를 푼다는 소리에 구미가 당기지 않겠어?”

이에샤는 바보가 아니었다. 셈브리온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실감은 나지 않았지만, 브링이라는 게 여간 엄청난 힘이 아니라고 하였다. 자신은 검에 있어서만은 천재인 모양이었다. 셈브리온은 이에샤가 너무 튀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넌 브링을 쓰지 않아도 체력이 좋은 편이야. 하는 일이 단련밖에 없었으니까. 사내놈들하고도 그럭저럭 맞붙을 수 있을 거야.”

“알았어. 세비 말 들을게.”

“착하다.”

셈브리온은 빙그레 웃었다. 이에샤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짧은 잿빛 머리카락을 헤집어 댔다. 이에샤는 “아, 하지 마.” 하면서도 뿌리치지 않았다. 세상 사람 모두가 해선 안 되는 일도, 셈브리온이라면 괜찮았다.

기사가 되면 톡톡히 공을 세울 셈이었다. 어연번듯한 백작으로 자리잡아야 했다. 그동안 셈브리온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서라도.

“한다면 제대로 하고 싶어. 세비, 나 근위 기사를 목표로 할래.”

“그것도 좋겠지. 제국의 최정예라고 하니까.”

“돈도 많이 나오겠지? 그래서 세비를 호강시켜 줄 거야.”

셈브리온은 말을 잊어버렸다. 이에샤의 다짐이 기쁘기는 했다. 기특하고 고마웠다. 그러나 어째서일까? “아빠한테 효도할래요!” 따위의 소리를 들은 기분이었다. 장난삼아 이에샤를 딸내미라고 부르곤 했지만, 결혼도 안 했는데 과년한 딸이라. 미묘했다. 어설픈 목소리로 “그, 그래.” 하고 말았다.

============================ 작품 후기 ============================

비축분도 거의 없이 지른 글이라 쫄리네요.

선추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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