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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수는 검 한 자루-10화 (10/164)

00010 2. 싸움에 이기고 =========================

“왜 그랬어요?”

첫 번째 관문을 넘어선 50명에게 휴식이 주어졌다. 점심밥도 함께. 호밀빵을 갈라서 햄을 접어 넣고, 스테이크를 끼우고, 미트 소스를 부은 ‘고기에서 고기까지’ 샌드위치였다. 이에샤는 게눈 감추듯이 먹어 치웠다. 포도주까지 한잔했다. 음식이 부모의 원수라도 되는 양 우적거리는 이에샤를, 모두가 질린 눈으로 쳐다보았다.

실지로 이에샤는 화가 났다. 셈브리온이 있었다면 목을 조를 기세로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렸을 것이다. 한바탕 악쓰고 엉엉대면 마음이 풀리고는 했다. 셈브리온은 이에샤가 한계에 달한 순간을 귀신같이 알아차렸다. 어깨를 치면서 “울자.” 하고 말하면 이에샤는 마법처럼 눈물을 흘렸던 것이다. 셈브리온이 보고 싶었다.

엘테르트는 침착을 지켰다. 이에샤가 찾아올 줄은 예상하였다. 소철궁에는 쇠 냄새가 떠도는 듯했다. 머무르고 싶지 않았다. 꾹 참고 이에샤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이에샤는 여유를 잃어버린 모습이었다. 뿜어낼 상대가 없어 속만 버글버글 끓이는 분노에,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감사받거나 생색을 낼 꿍꿍이는 아니었습니다.”

“감사 안 해요. 난 떳떳하니까.”

엘테르트의 도움은 뜻밖이었다. 동시에 당연했다. 엘레트르 멘델린은 관료였다. 황실의 구성원. 에브라힐 궁전에서 벌어지는 불의를 막을 의무가 있었다.

엘테르트에게는 화나지도 않았다. 이에샤를 흔들어 놓은 것은 치졸한 오르겔과 나머지 수험자, 기사들이었다.

“멘델린 경과 제 관계가 원만함이랑 거리가 머니까 묻는 거예요. 수상하잖아요.”

“당신이 오르겔 소후작의 검을 일격에 날렸다지요.”

엘테르트는 생뚱한 대꾸를 돌려주었다. 이에샤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오르겔 소후작은, 브링을 더하지 않은 팔심조차 견뎌 내지 못한 약골이었다. 그런 놈이 신동으로 알려졌다니!

이에샤가 목이 터지라 소리질러도 남자들은 들으려 하지 않았다. 이에샤에게 힘이 있다는 사실을 못 본 체했다. 엘테르트 또한 의심하는 티가 드러났다.

“믿지도 않으면서 보증은 왜 서요? 남작의 의구심을 풀어 주자면, 난 천재예요. 오르겔 소후작의 자질과 능력이 제 발끝에도 못 미쳤을 뿐이랍니다!”

“……진심으로 하는 소립니까?”

“농담할 기분으로 보여요?”

물론 그렇지 않았다. 이 순간 이에샤는 세상에서 가장 참되어 보였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스스로를 천재로 믿는 모양새였다. 엘테르트는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말했다시피 백작을 도운 데에 타의라곤 없습니다. 당신의 결백을 믿은 것도 아니고, 믿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도울 필요성을 느꼈을 뿐이지.”

“왜요? 제대로 설명해요.”

이에샤는 멘델린 소공작에게 명령조로 내뱉었다. 노여움으로 눈앞이 흐려졌는가, 본디부터 천방지축인 탓인가. 후자일 성싶었다. 엘테르트는 짜증을 억눌렀다. 루시온의 변덕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이라고 되뇌며.

“소후작은 잃을 것이 없고, 당신은 잃을 게 너무 많았습니다.”

“……?”

“오르겔 후작은 세도가입니다. 아랫것들의 입쯤은 통제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소후작이 여인에게 패배한 일은 빠르게 잊힐 테고, 누군가는 그 여인이 술수를 부렸다든가 오르겔에서 일부러 져 주었다든가 하는 식으로 포장하겠죠.”

이에샤는 멍하니 귀를 기울였다.

밀레나가 생각났다. 알디온의 고용인은 밀레나가 하는 모든 일을 우러렀다. 숨만 쉬어도, 밀레나 아가씨의 숨결이 얼마나 보드랍고 따뜻한지 떠들 기세였다.

반면에 이에샤는 삿된 취급을 받았다. 식사하다가 스프 한 방울을 흘려도, 수풀에 걸린 무지개를 들여다보아도, 복도 벽의 무늬를 훑으며 걸어도, 알디온 사람들은 질겁하고 보았다. 이에샤가 미치광이라도 되는 것처럼.

“사교 모임을 일절 즐기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관심이 없어요. 그런 거에.”

“그렇다면 모를 겁니다. 힘있는 자의 실수는 용감한 도전이 되고, 약자의 실수는 낙인이 되는 흐름을. 앨저 백작, 세상의 잣대는 대단히 편파적입니다.”

낙엽 한 장이 날아왔다. 엘테르트는 움찔했다.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이에샤가 그것을 낚아챘다. 주먹 속으로 구겨 버렸다. 바스러진 나뭇잎 조각이 바람에 흘러갔다.

이에샤는 불쑥 억울해졌다. 엘테르트의 살갗이 도자기처럼 매끄러웠기 때문이다. 누구는 온종일 운동만 해도 뾰루지가 나는데, 경보도 못하게 생긴 놈의 얼굴에서 광이 났다. 아랫눈썹이 촘촘하여 고혹적이었다. 저보다 엘테르트가 예뻤다. 말마따나 세상 돌아가는 이치가 편파적이었다.

“난 무 자르듯 나눠 떨어지는 공정함이야말로 조화를 해친다고 믿습니다. 약자에게는 꿀을, 강자에게는 매질을. 그렇게 조율해 나가는 것이 멘델린의 방식입니다.”

“그래서 나를 도왔다는 거예요? 내가 그 새끼보다 약해 보여서?”

“……테세르 오르겔 후작 영식입니다, 앨저 백작.”

엘테르트가 엄격하게 고쳐 주었다. 이에샤는 “그 이름 내 머릿속에 집어넣으려 하지 마요.” 하고 투덜거렸다.

못마땅스러웠다. 엘테르트가 늘어놓은 바른말에 고개가 끄덕여졌으므로. 그 투기장에서 자신은 약했다. 어느 하나 이에샤의 외침을 귀담으려 하지 않았다. 증거와 진실에 아랑곳없이 실격되었을 미래가 훤했다.

아니면 브링으로 몽땅 족쳐 버리고, 엽기 살인범으로서 사형대에 오르든가.

“좋아요. 이해, 으득, 했어요. 설명 참 잘하시네요.”

“종종 아카데미 초빙 교수 일을 맡기도 합니다.”

이에샤는 울컥했다. 가방끈 짧다고 무시하는 거야? 속으로 꿍얼거렸다. 엘테르트로서는 황당할 오해였다.

“뻐기는 거예요?”

“백작이야말로 스스로 천재라고 자칭했잖습니까.”

“난 사실을 말한 거였어요.”

“나도 사실만 말했습니다.”

세상에 ‘애교를 떨면 대련해 준다고 약올리는 셈브리온’보다 성가신 놈이 있었다니. 이에샤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엘테르트는 잔잔한 낯빛만 지어 보였다. ‘할 말은 다 했느냐?’ 하고 묻는 듯했다.

이에샤는 마음을 다졌다. 엘테르트의 뜻은 알아들었다. 치밀던 속도 가라앉았다. 스트레스에 절었던 정신을 가다듬고, 날뛸 차례였다.

“멘델린 경. 난 더는 빚을 만들면 안 돼요. 내 스승에게 갚을 것만도 산더미랍니다. 그러니까 경의 도움은 당장 갚겠어요.”

“아니, 그럴 필요는…….”

“진귀한 구경 시켜 드리죠. 아카데미나 도서관에서는 못 볼!”

이에샤는 씹듯이 한 자, 한 자 끊어서 말했다. 시퍼런 서슬에 엘테르트는 움츠러들었다. 귀찮은 자를 건드린 듯하다는 예감이 피어올랐다.

어머니의 관을 부여잡고 울던 이에샤에게, 셈브리온이 일렀었다.

「이-샤. 너는 지금부터 나쁜 년이 돼야 해. 네가 싫다고 해도 주변은 널 나쁜 년으로 만들려고 혈안이 될 테니까, 그냥 받아들이는 편이 이득이야.」

「왜 세비까지 그런 말을 해? 내가 왜 나빠……?」

「착한 아이로 살아남으려면 똑똑해야 하는데, 넌 그쪽 머리는 없어 보이거든.」

열 살짜리 이에샤는 셈브리온의 속을 읽을 수 없었다. 셈브리온은 이에샤를 위해 쉬운 말로 풀어 주었다.

「누가 네 기분을 상하게 하면 곰곰 생각해 보고 목검으로 후려갈겨.」

그 지침은 이에샤의 피가 되고 살이 되었다. 이에샤는 ‘앞뒤를 따져 목검으로 후려갈긴다.’의 참뜻을 알아차릴 만큼은 야무졌다. 알디온 후작가에서 하녀에게 비웃음당하면 나처럼 머리채를 잘라 주마 달려들었고, 하인이 발을 걸면 걷어차서 자빠뜨렸다. 손님이 오면 몸을 숨겼다. 손님은 패선 안 되었으므로.

요컨대, 뒤집어도 되는 판만 성질껏 뒤집으라는 소리였다.

“제3 기사단 소속, 칼빈 슬러그다.”

“앨저 가문의 이에샤, 가르침을 부탁합니다. 슬러그 경.”

“하나뿐인 여자 수험자라고 봐주는 일은 없을 거다.”

봐주기는 무슨 얼어죽을. 이에샤는 욕지거리를 삼켰다. 발맞춰서 몰아세우고, 낄낄대며 지켜본 주제에 말이다.

이에샤는 열두 번째로 불려 나온 수험자였다. 지금까지는 따분한 승부만 이어졌다. 케케묵은 롱소드를 들었다. 칼빈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시험을 치르고자 준비된 검들은 비슷비슷했다. 귀족의 아들이 돌이킬 수 없는 부상을 당하지 않도록 날이 무뎠다. 목검에 견줄 만했다.

이에샤는 심사관이 모여 앉은 천막을 곁눈질했다. 루시온이 양손을 머리 뒤로 돌리고, 의자에 몸을 파묻은 채였다. 즐거워하는 티가 팍팍 났다. 옆자리에는 엘테르트가 영 불편해 보이는 자세로 있었다.

이번 ‘판’에서 이에샤의 숨줄은 루시온이 쥐었다. 사로잡으면 성공이었고, 노여움을 사면 실패였다. 이에샤가 미루어 보기에 루시온 황태자는 노름꾼이었다. 재산을 베팅하고 손에 땀을 쥐고 판돈을 얻으려는 일에 중독된 사람. 이에샤는 루시온의 판돈이 되고 싶었다. 그것도 아주 대박 난.

‘내가 사람 경험이 없으니 확실치는 않지만……. 이거 끝나면 사교계란 곳도 좀 고민해 봐야지.’

다행히 이에샤의 감은 날카로운 편이었다. 루시온은 저를 탐내게 될 것이다. 탐낼 수밖에 없었다. 왜냐?

심판을 맡은 기사가 우렁찬 소리를 내뽑았다.

“시작하시오!”

이에샤는 제국 기사와 맞붙는 시험에서, 상대방을 북처럼 두드릴 셈이었으니까. 엘테르트가 보증해 주지 않았는가. ‘너한테 져 봐야 잃을 거 하나 없다.’라고.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구경꾼들의 눈에는 이에샤가 바닥에 발을 붙인 채로 미끄러지는 것처럼 보였다. 발모서리를 밀어내며 무게 중심을 지키는 보법이었다. 이동 중에 얻어맞아도 배길 수 있도록. 이에샤의 유연성이라면 물 흐르듯이 대응할 수도 있었다. 이에샤가 자그맣던 무렵에 다리만 노려 대자, 셈브리온이 고안해 낸 기술이었다.

칼빈의 가슴께로 숙이고 들어갔다. 팔꿈치를 들었다. 엄지손가락을 왼쪽으로 향했다. 자연히 오른손에 든 검의 자루가 튀어나갔다. 폼멜이 칼빈의 명치를 찔렀다. 일련의 공격은 눈을 두어 번 깜빡이는 동안 이루어졌다. 칼빈이 ‘악’ 소리를 냈다.

“이게 무슨, 대체, 컥!”

이에샤가 칼등을 몽둥이처럼 휘둘렀다. 이번에는 어깨를 노렸다. 아팠을 것이다. 들키지 않을 만큼의 브링을 실어 때렸다. 칼빈은 세 발짝이나 뒷걸음질쳤다. 이에샤의 검이 직선으로 나아갔다. 하품이 나올 만큼 지루해 보이는 검로인데, 칼빈은 폭풍을 맨몸으로 막는 사람처럼 허둥거렸다.

엘테르트는 벌떡 일어섰다. 검에 문외한인 저라도 알 수 있었다. 칼빈은 이에샤와 맞설 주제가 못 되었다. 일방적인 폭력이 펼쳐질 게 뻔했다. 이에샤 앨저, 저 괴팍한 아가씨는 어지간한 평기사를 뛰어넘는 강자가 틀림없었다. ‘천재’라고 자칭한 대로.

루시온이 팔을 뻗었다. 엘테르트를 가로막았다.

“전하!”

“내버려 둬. 아까 앨저 백작이 당한 수모에 비하면 큰일도 아니다.”

“그런 문제가 아니잖, 아닙니다! 승패가 이미 명백합니다!”

“왜. 재밌는데.”

“루시온!”

심사관들은 엘테르트가 황태자의 이름을 부르자 식은땀을 흘리며 모르는 체했다.

“에르디. 넌 영 센스가 없어서 모르겠지만, 저 여자 지금 아주 날아다니고 있거든?”

“그러니까 말려야 한다고!”

루시온은 엘테르트를 올려다보았다. 새파란 눈동자에 흥분이 깃들었다. 입이 말랐다. 혀로 아랫입술을 축였다. 엘테르트는 루시온의 이러한 표정을 자주 보았다. 죄인의 아들을 시종으로 들이겠다며 고집부린 날. 그밖에도 온갖 기이한 자들을 곁에 두려 할 때.

“저건 놓치지 말고 등용해야 한다고 내 모든 감각이 외친다.”

“……난 이럴 때 네가 나랑 지독히도 안 맞는다고 느껴.”

“앉기나 해. 저렇게 사람 패는 여자를 어디서 다시 보겠냐?”

엘테르트는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무딘 칼끝이 가엾은 칼빈의 팔뚝에 붉은 금을 긋는 중이었다.

============================ 작품 후기 ============================

문제를 좋게좋게 덮고 넘어가기만 하면 나중에 곪아 터지는 것도 맞고

폭력에 폭력으로 맞대응하면 안 된다는 말도 옳죠...

그런 갈등을 제가 잘 전달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요~

선추코 모두모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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