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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수는 검 한 자루-11화 (11/164)

00011 2. 싸움에 이기고 =========================

심판 기사 바이첸의 얼굴이 납빛이 되었다. 칼빈은 보기만 해도 아프도록 얻어터졌다. 이에샤를 말려야 했다. 그러나 칼빈이 이를 악물었다. 계속해서 이에샤의 빈틈을 찾으려 들었다. 흉터 하나 없어 보이는 계집애에게 당해선 안 된다는 듯이. 칼빈의 친구인 바이첸은 쉬이 판가름내지 못했다.

그 아집이 이에샤에게는 반가웠다. 앞으로 나서며 반 바퀴 돌았다. 원심력으로 검을 내그었다. 가죽 조끼가 찢겨 나갔다. 칼빈은 이에샤가 상대라고 흉갑을 마다했던 저를 저주했다. 갈비뼈가 부러지는 줄 알았다.

기실, 이에샤의 몸에는 숱한 흉이 있었다. 셈브리온은 이에샤가 구르고 깨져도 “일어나! 너라면 문제없어! 넌 천재니까!” 하고 다그쳤던 것이다. 눈부신 재능에 사로잡혔던 무렵의―본인은 부끄러워하는―추억이었다.

“너, 너……!”

“경도 제가 지난 시험에서 아티팩트 따위를 사용했다 믿으십니까?”

“그건, 컥!”

“왜 그러세요, 옷자락이라도 베어 보셔야죠. 몸 수색까지 받은 뒤인데.”

점심때 황녀의 시녀가 다녀갔다. 이에샤는 독방에서 옷을 벗어 보였다. 시녀는 루시온에게 고해바쳤다. 앨저 백작께서는 미신고 소지품을 지니지 않았습니다. 마력 반응도 보이지 않습니다. 남자들은 할 말이 많은 눈치였으나, 황후의 소꿉동무에게 큰소리치지는 못했다. 칼빈은 맨몸의 여자에게 힘으로도 기술로도 밀리는 셈이었다.

이에샤가 몸을 낮추었다. 칼끝을 바닥에 끌었다. 검을 지렛대 삼아, 몸을 띄워 올렸다. 날씬한 다리를 휘둘렀다. 칼빈이 신발코에 턱을 맞고 벌러덩 나자빠졌다. 이에샤는 도로 똑바로 섰다. 검을 내려뜨렸다. 서늘한 눈길로 칼빈을 흘겼다.

엘테르트는 그 광경을 차마 바라보지 못했다. 안색이 송장 같아졌다. 루시온은 “끙.” 하고 침음했다.

“너한테는 좀, 자극이 강하긴 하겠다. 넌 보석 달린 검 들고 빙글빙글 도는 결투도 과격하다는 녀석이니까.”

“……속이 메스꺼워.”

“미안. 앨저가 설마 저렇게까지 터프할 줄은 몰랐어. 몸놀림이 검법이라기보다 마치,”

“전쟁터의 용병 같지 않습니까.”

체사로가 은근스레 끼어들었다. 루시온은 체사로를 힐끗했다. 그만큼의 추렴새로도 이에샤의 스승이 어떤 족속인지 알 수 있었다.

‘대체 뭘 어떡하면 귀족 여자가 용병을 스승으로 둘 수가 있는지.’

소박맞은 앨저 영애는 평범한 귀부인이었다고 했다. 이에샤가 용병과 어울리기는커녕 검을 잡지도 못하게 했을 터였다.

루시온은 젊었다. 부모를 여의고, 남편에게 배신당하고, 어린 딸과 위자료만 끌어안은 여인의 설움을 이해하기에는 일렀다. 에이릴리 앨저는 자신의 처지를 정확하게 파악했다. 기사들은 명예가 땅에 떨어진 부인을 섬기지 않았다. 사병을 거느릴 깜냥도 못되었다. 이름난 용병을 찾아내, 이혼 위자료의 육 할을 선금으로 치르고 에이릴리는 병들어 버렸다.

이에샤는 저에게 최소한의 안배만 남기고 떠난 어머니를 기억했다. 이에샤의 삶은 조금도 귀족적이지 않았다. 깎아지른 벼랑길을 걷는 듯이 위태로웠다.

이에샤의 칼끝이 버르르 떨렸다. ‘아차.’ 싶었다. 칼빈을 패는 데에 지나치게 몰두해 버렸다. 어느새 브링이 끓어올랐다. 칼날에 파란 기운이 맺히려 했다.

입술을 깨물었다. 아쉬웠지만, 루시온은 대련을 중단시키지 않았다. 흥미진진하게 지켜보았을 따름이었다. 이에샤의 무위가 마음에 들었다는 뜻이리라. 그만둘 때가 되었다.

“크흐, 으, 끅.”

사위가 고요했다. 칼빈이 헐떡거리는 소리만이 이어졌다. 누구도 말문을 떼지 못했다. 이에샤는 낡은 롱소드를 땅에 세웠다. 폼멜에 손바닥을 얹었다. 삐딱이 체중을 실었다. 바이첸을 향하여 까딱, 턱짓했다.

“슬러그 경, 더 못 싸울 것 같습니다만.”

“이게 무슨 짓이오!”

대답은 기사단장 사이에서 튀어나왔다. 이에샤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근위 기사단장의 옆에 옆―3 기사단장이 콧김을 내뿜었다. 이에샤에게 삿대질을 했다. 이에샤는 부러 심드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비록 지도 대련의 형식이라고는 하나, 엄숙한 결투에서 그따위 천박하고 기사도라곤 없는 싸움질을 보이다니!”

“슬러그 경이 포기하지 않았고 바이첸 경이 제지하지 않았습니다. 수험자가 멋대로 시험을 끝낼 수는 없잖습니까?”

“내 부하들은 부당한 압박에 굴복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싸운 거 아닙니까?”

이에샤는 황당하게 대꾸했다. ‘패배를 받아들이지는 않겠지만 네가 너무했다.’라니. 생떼에도 정도가 있었다. 루시온이 의자 팔걸이를 부여잡고 웃음을 참는 꼴이 보였다.

엘테르트는 넋 나간 사람처럼 앉았다. 이에샤로부터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저 보는 건지 노려보는 건지, 이목구비가 분간되지 않았으므로 몰랐다. 무릎을 움켜쥔 자세가 뻣뻣하기 그지없었다. 손등에 핏줄까지 도드라졌을 성했다.

이에샤는 고개를 기울였다. 왜 저토록 얼어붙었을까? 진귀한 구경을 시켜 줬다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애초에 심사 자격도 없었으니, 저는 이만 자리를 뜨겠습니다.”

“에르디.”

“강인한 기사를 얻은 데에 미리 경하드립니다. 전하.”

엘테르트가 차갑게 내뱉었다. 천막을 벗어났다. 빠른 걸음으로 콜로세움에서 빠져나갔다. 이에샤는 영문도 모르는 채 엘테르트의 뒷모습을 건너다보았다.

루시온이 턱을 긁적였다. 폭력과 무력을 증오하는 사촌형이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이번만큼은 루시온도 미안스러웠다. 짓궂은 마음으로 엘테르트를 붙잡아 두는 게 아니었다.

‘저 여자가 이런 퍼포먼스를 보여 줄 줄은 몰랐지.’

한숨지으며 일어나 섰다. 눈이 벌게진 3 기사단장을 향해 손짓했다. “다물어.”라는 뜻이 뚜렷했다.

쓴웃음을 금할 수 없었다. 체사로의 청을 들어줄 때는 가벼운 마음이었는데, 뜻밖의 연속이었다. 이에샤 앨저는 루시온의 예상보다 똑똑했다. 예상보다 능력 있었다. 그리고 자존심이 셌다.

“제국 기사를 상대로 이만한 대승을 거둔 수험자는 일찍이 없었지.”

루시온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이에샤는 귀를 곤두세웠다. 모두의 미움을 산 마당에, 희망은 황태자뿐이었다. 기대가 크다고 말해 준 사람. 모험을 즐기는 사람. 이곳 투기장에서 가장 힘있는 사람. 의연히 섰지만 심장은 쿵쿵거렸다.

“황태자 전하! 이건 명백히 이상합니다. 어찌 아녀자가 검으로 평기사를……!”

“내 누이는 아카데미 남학생보다 복잡한 수식을 잘 이해하고 셈을 잘하오. 여자라도, 뭐, 불가능하지는 않다는 거 아니겠소?”

루시온이 기사단장의 말허리를 썩둑 잘랐다.

이에샤는 환호성을 지르고 싶어졌다. “해냈어, 세비!” 하고. 자신은 시험에 붙은 게 틀림없었다. 이에샤의 눈동자가 불꽃처럼 빛났다. 그 모습을 보며 루시온이 선고했다.

“앨저 백작 이에샤.”

“예! 황태자 전하!”

“그대는 실격이다.”

뎅그렁, 뎅그렁, 뎅…….

종탑의 알림이 들려왔다. 종소리는 다섯 번 울리고 멎었다. 12월의 첫날, 오후 5시. 이에샤의 기사단 입단 시험이 끝났다.

* * *

셈브리온은 알디온 후작가의 정원을 서성거렸다.

하늘이 검푸른색을 띠었다. 겨울철에는 해가 짧아졌다. 금방 일곱 시를 넘겼는데도 땅거미가 졌다. 여덟 시에는 정문에 빗장을 지를 터였다. 이에샤가 돌아오든, 돌아오지 않든.

‘아마 떨어졌겠지.’

셈브리온은 처음부터 기대를 품지 않았다.

가슴에 응어리진 것이 있었다. 제 손으로 벼린 천재 검술사를 세상에 선보일 수 없다는 이치. 그런데도 이에샤를 기사단 입단 시험에 보냈다. 새 검도 장만해 주었다. 한 톨의 욕심과, 이에샤도 세상의 쓴맛을 알 때가 되었다는 보호자로서의 판단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해쓱한 얼굴쯤 예상했었다.

“……어서 와, 이-샤.”

이에샤는 답하지 않았다. 셈브리온이 두 손을 뻗었다. 이에샤의 뺨을 감싸쥐었다. 찬 바람을 맞고 거칠어진 살갗이 안쓰러웠다. 이에샤가 제 딸이었다면 얼굴을 쓰다듬을뿐 아니라 부둥켜안아 주었을 것이다.

“늦었네. 밥은 먹었고?”

“세비, 나 이겼어. 이기고 왔어.”

이에샤가 웅얼웅얼 말했다. 목소리에서 맥이 빠져나갔다. 셈브리온은 눈을 끔뻑였다. 이에샤의 말뜻을 헤아리기가 어려웠다. 시험에 붙었다는 걸까? 멍한 표정을 보면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뒤통수를 토닥여 주었다. 자세히 설명해 보라고 부추기는 손길이었다.

“싸움에는 이겼는데.”

“응.”

“시험에는 떨어졌어.”

벨체터 사람의 눈동자는 대체로 검었다. 눈구멍에 어둠을 잘라 가둔 듯했다. 델페레타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빛깔이었다. 이에샤는 셈브리온의 눈을 들여다보며, 제가 새카만 구덩이에 빠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내가 기사가 되면 기강을 해칠 것 같대. 그래서 기사단에 받아 줄 수 없대.”

“…….”

“그래도 잘했대. 나더러 대단하대. 무려 황족이 말해 준 거다?”

그래, 굉장하네. 셈브리온은 쓸쓸하게 중얼거렸다.

후회가 밀려들었다. 평생 무릎 아래에 두고 금이야 옥이야 기를걸, 하고. 밀레나 알디온처럼 귀공녀 대접은 못 해주더라도 지켜 줄 수는 있을 텐데.

하지만 이에샤는 귀족 가문의 주인이었다. 용병 나부랭이하고만 어울려서는 안 되었다. 셈브리온은 이에샤가 사교 모임에도 나가고, 커튼 뒤에서 잘생긴 청년과 노닥거리기도 하기를 바랐다. 그렇게 살아가지 않는다면 괴로움만 겪을 게 뻔했으니까.

“그딴 칭찬이 대체 다 무슨 소용이야?”

셈브리온의 사랑하는 제자는 천재였다. 몸을 잘못 입고 태어나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할 천재.

셈브리온이 이에샤의 어깨를 건드렸다. 이에샤는 마법에 걸린 것처럼 울음을 뱉었다.

============================ 작품 후기 ============================

짧아서 죄송합니다(_ _) 제가 계산을 잘못해서 분량이 애매하게 나왔네요~ 이번 챕터는 이것으로 끝입니다.

고구마로 끝나 버려서 첨언하자면, 황태자에게는 다른 꿍꿍이가 있습니다. 이에샤는 당당히 기사가 될 거예요.

처음에 셈브리온 나이를 28살 청년 용병으로 설정했다가 너무 남주각이길래 아저씨로 바꿔버렸다는 뒷사정이 있어요ㅎㅎ

선추코 감사합니다!!

+) 오전 11시, 자잘한 문장 수정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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