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7 3. 마모(磨耗) =========================
연무장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콜로세움 모양의 대연무장보다 훨씬 수련장다웠다. 돌담을 쌓아 풀숲과 선을 긋고, 바닥은 석회암으로 포장했다. 모서리를 따라서 이런저런 도구가 갖추어졌다. 병장기를 거는 대, 목검이 여럿 꽂힌 통, 세울 수 있는 짚단, 버클러와 건틀릿을 찬 인체 모형 등. 훌륭했다. 이에샤는 홀린 듯이 연무장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갔다.
“입구에서 오른쪽 담 모서리 중간쯤.”
“……!”
“나와요. 도둑이나 죄인이 아니라면.”
오감을 날카롭게 갈았다. 움직임의 크기나 숨결 따위로 미루어 보건대, 상대방은 몸집이 작았다. 허리 꼬부라진 늙은이. 병에 걸려서 자라지 못한 사람. 또는…….
풀숲, 이에샤가 짚은 자리에서 머리통이 솟았다. 열두어 살쯤 되었을까? 까만 머리채를 땋아 내린 여자아이였다. 드레스 차림으로도 담을 기어올랐다. 한두 번 해 본 일이 아닌 모양이었다.
홍차 젤리 같은 눈동자가 낯익었다. 어디서 봤더라? 이윽고 떠올릴 수 있었다. 엘테르트가 똑같은 색깔을 지녔다. 얼굴 생김은 루시온과 닮았다. 이에샤는 ‘대체 무슨 일이람.’ 하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공주님을 뵙습니다.”
“오라버니 말씀대로 눈썰미가 좋군요.”
어안이 벙벙했다. 오랫동안 열리지 않던 궁에 숨어든 공주라니. 놀라움을 넘어서 괴이쩍은 이야기였다.
“수행인도 없이 뭘 하고 계셨습니까? 여기 오신 걸 시녀는 아는지요?”
“후후! 앨저 경한테만 특별히 가르쳐 줄까요? 에브라힐의 모든 별궁에는 라제카만 아는 길이 있어요. 저쪽 수풀 사이에도 말이에요.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요, 앨저 경인 줄 알았더라면 숨지 않았을 거예요.”
라제카는 지금쯤 벨제아 부인이 넋을 놓았을 거라며 조잘댔다. 이에샤는 멍하니 들었다.
황궁의 땅속에는 복잡한 미로가 뚫렸다. 적이 쳐들어왔을 때를 대비한 도주로였으나, 평화가 이어지며 쓸모를 바꾸었다. 죄인을 밀어넣고 탈출할 수 있을지 내기하는 오락장으로. 그 잔혹한 형벌은 4대 전의 멘델린 공작이 폐지시켰다. 미궁은 지도 한 장만 기밀문서로 남기고 잊혔다.
라제카는 우연히 그곳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찾았다. 1년을 들여서 출입구도 모조리 꿰었다. 본디 비상구 노릇을 했던 만큼 미로는 규칙성을 띠었다. 규칙만 알아내면 지도가 없어도 막다른 길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고 해도, 마법의 빛이 둥실둥실 떠다니는 미궁은 라제카에게 매혹적인 놀이터였다.
사정을 모르는 이에샤로서는 개구멍이라도 있나 생각할 따름이었다.
“라제카는 앨저 경이 너무너무 만나고 싶었어요. 그거 아나요? 여인네의 고충을 들어 줄 조직이 필요하다고 처음 발의한 것도 저랍니다. 3년 전에요.”
라제카의 말씨는 조곤조곤하면서 되바라졌다. 이에샤는 당혹했다. 라제카를 멀거니 보았다. 몸을 낮춘 탓에 두 사람의 눈높이는 비슷했다. 갈색 눈에서 이채가 흘렀다. 공주는―황족이니 당연하겠지만―평범한 어린아이 같지가 않았다.
“그러니 앨저 경은 라제카의 숙원이에요. 경과 대화해 보고 싶어서 모두를 걱정에 빠뜨리는 것도 감내하고 석곡궁에 온 거랍니다.”
“아, 예. 숙원, 입니까.”
라제카가 눈살을 찌푸렸다. 오밀조밀하게 생긴 눈썹이 팔자를 이루었다.
“라제카를 거리에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꼬마 취급하는군요? 나는 내 식견에 맞는 어휘를 썼을 뿐인데, 사람들은 겉모습만 보고 내가 재롱이라도 부린 양 웃지요.”
이에샤는 입을 다물었다. 대꾸가 떠오르지 않았다. 라제카의 나무람에 틀린 점이 없었으므로. 말본새로 보나 몸가짐으로 보나 라제카는 비범했다. 신동으로 불러도 옳으리라. 그렇게 느끼면서도 건성건성 받아넘기려 했으니, 골이 날 만도 했다.
하지만 라제카가 어리고 조막만 한 것 또한 사실이었다. 보통이니, 표준이니 하는 낱말이 왜 생겨났겠는가?
“실례했습니다, 공주님. 사람이란 눈에 보이는 모습에서 자유롭지 못한 법인지라…….”
“억울하게 기사단 입단 시험에서 떨어진 경이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죠.”
“예?”
어리둥절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라제카는 방긋 미소했다. 앙증하기 그지없는 낯꽃이었으나, 이에샤는 셈브리온에게 검술을 배우기 시작한 날과 비슷한 기분을 느꼈다. 겸손하게 귀를 기울여야만 할 것 같았다.
“모든 황궁 여인을 수호하는 기사님. 라제카의 슬픔을 들어 줄래요?”
“아, 네! 받잡겠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우리는 왜 가진 바 재주에 어울리는 대접을 받지 못할까요? 어째서 받지 못해야만 하죠?”
새해가 밝았다. 겨울철 기사단 입단 시험으로부터 한 달이 지났다. 그때의 굴욕감과 무력감은 흐려지지도 않고, 불쑥불쑥 이에샤의 화를 돋웠다.
검술로 이름난 남자를 이겼다가 부정을 저질렀다고 몰렸다. 힘을 증명코자 제국 기사를 찍어 누르니, 루시온의 말마따나 백 명의 미움을 샀다. 그 시험에서 이에샤는 과녁이었다. 두드려 맞아 마땅한 과녁.
황궁에는 앳된 관리가 몇 사람 있었다. 엘테르트만 해도 열 살 무렵부터 아버지를 도왔다. 열여섯 살 소년이 셈을 잘한다고 재무부에 들어오기도 했다. 그러나 라제카만은, 슬기로 가득한 의견을 내놓아도 귀여운 공주의 옹알이로만 받아들여졌다.
이에샤와 라제카는 닮은꼴인 셈이었다. 이에샤는 라제카만큼 똑똑하지는 못해도 에두른 이야기를 알아들을 만한 머리는 있었다. 작은 공주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경의의 뜻을 담아서.
“고민을 들어 드린다고 했는데, 영명하신 공주님께 도리어 가르침받았습니다.”
“괜찮아요. 내 고민에 대한 앨저 경의 견해가 듣고 싶네요. 어떤 내용이어도 좋아요, 나도 정답은 모르니까.”
라제카가 제법 그럴싸하게 팔을 뻗었다. 이에샤는 포동포동한 손을 잡아 끌어당겼다. 실크 장갑 위로 입술을 포갰다. 라제카가 쿡쿡 웃었다.
“제가 감히 공주님의 고충을 덜어 드리고자 말씀드리자면.”
자신보다 지혜로운 공주에게 무슨 답을 내놓아야 할까. 어차피 이에샤는 조리 있게 설명하거나 설득할 깜냥은 안 되었다. 아는 것을 쥐어짜, 진심이 닿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눈으로 좇기조차 어려운 셈브리온의 검을 받아치려 용쓰던 어릴 적처럼.
“제국 기사가 되지 못했어도, 저는 지금 백화 기사단장입니다. 그러니까…….”
“괜찮으니 멈추지 말아요. 라제카에게 말해 보세요.”
“정도(正道)가 아니어도 우리는 샛길, 빙 돌아가는 길, 하다못해 땅굴이라도 찾아내게 될지 모릅니다. 저도 최근에 깨달은 거지만, 공주님? 꾹 참고 스스로를 세상에 맞춰 갈아 나가다 보면 어떤 형태로든 결실이 손에 잡히더랍니다.”
라제카는 부드러운 낯빛을 자아냈다. 예상대로 ‘노력하면 된다.’ 하는, 틀에 박힌 대답밖에 얻지 못했다.
다만 누가 말했는지가 중요했다. 루시온이나 엘테르트, 란델이 지껄였다면 울화가 치밀었을 소리였다. 이에샤는 달랐다. 이에샤는 라제카와 같은 벽에 부딪치는 이였으니까.
라제카는 고분고분하게 피고 질 공주의 삶을 뒤흔들어 줄 사람을 기다렸다. 이번에 루시온이 눈독들인 인재는 라제카의 마음에도 꼭 들었다. 풀씨가 묻은 드레스 자락을 양쪽으로 펼쳤다. 무릎을 굽혀 보였다.
“속이 후련해졌어요. 라제카 바르벨로샤가 앨저 경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영광입니다. 별말씀을요.”
“백화 기사단장으로서 첫 일을 멋지게 성공했으니, 이제 라제카를 서향궁으로 데려다줄래요?”
때를 맞추듯 종소리가 울렸다. 날이 오후로 접어들었다.
이에샤가 맡은 일에는 황족 여자와 귀부인의 호위도 들어갔다. 수행을 부탁받으면, 따라야만 했다. 조그맣게 한숨을 쉬었다. 끝내 검은 잡아 보지도 못했다.
“공주님!”
말비다 벨제아는 반쯤 울부짖었다. 깐깐한 몸가짐은 온데간데없었다. 땀과 눈물로 화장이 번졌다. 이에샤는 분첩도 연지도 가지지 못했지만, 화장에 대한 호기심은 있었다. 그러나 마음을 접기로 했다. 화장한 채 검을 썼다간 얼굴이 어떤 꼴이 될지 깨달았으므로.
말비다가 라제카의 어깨를 붙들었다. 이리저리 돌려 댔다. 레이스 한 장이라도 떨어졌을까 살펴보았다. 라제카가 말짱하다는 걸 알자, 꺽꺽 소리치기 시작했다.
“말도 없이 어디를 가셨던 겁니까! 공주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아아, 전 정말 황후 마마를 뵐 낯이 없어서!”
“지, 진정해요, 벨제아 부인. 앨저 경과 단둘이 얘기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방해받고 싶지 않았어요.”
“그렇다고 몰래 사라지시다니요! 아무리 황궁 안이어도 위험합니다!”
“아이 참.”
라제카가 아하하, 난감하게 웃었다. 이에샤는 ‘저 사람도 황궁 여자니까 내가 달래야 하나?’ 하고 고민했다. 껄끄러웠다. 공주에게도 잔소리를 퍼붓는 사람인데, 제까짓 게 당해 내겠는가. 자신이 안 들었다.
“저기, 부인. 공주님께서 홀로 외출하신 건 물론 안 될 일입니다만, 오시는 길에는 제가 수행했으니…….”
머뭇거리며 말을 붙여 보았다. 말비다는 이성을 추슬렀다. 라제카를 야단치는 일은 황후에게 맡겨도 되었다. 이에샤를 향하여 눈을 부릅떴다.
“당신은 부끄러운 줄 아십시오. 저는 이래서 안 될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자 기사라니, 감히 아녀자가 사내의 영역을 넘보니까 이 사달이 난 게 아닙니까?”
“예? 아니, 잠깐만요! 어째서 얘기가 그렇게 되죠?”
“벌써 어린 공주님의 마음에 헛바람을 불어넣지 않았습니까? 여자가 정숙하지 못하게 설치니 주위까지 뒤숭숭해지는 겁니다!”
라제카는 크게 당황했다. 말비다는 저에게도 “황자도 아닌 공주가 학문을 닦아 봐야 무용합니다.” 하고 타이르곤 했지만, 이에샤까지 꾸짖을 줄이야! 가뜩이나 ‘검을 들고 싸우는 여기사’를 고까워하는 사람이 많았다. 권세 높은 백작가의 안주인인 말비가와 척을 지면 큰일이었다. 라제카는 조마조마하게 이에샤를 곁눈질했다.
뜻밖에 이에샤는 얼굴을 붉히거나 찡그리지 않았다. 조용히 말비다를 쳐다볼 따름이었다.
노여워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이쯤은 내다본 바였기에, 의연할 수 있었다. 셀더리 알디온만 해도 집안 망신이 따로 없다며 찻잔을 집어 던졌었다―물론 이에샤는 포크로 접시를 깨 버렸다.
‘입단 시험 전이었다면 못 참았을지도 모르겠다.’
이에샤는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세상의 잣대로 쟀을 때 이상한 쪽은 셀더리와 밀레나가 아니었다. 자신이었다. 가진 것이라고는 검 한 자루뿐인 여백작. 말비다의 손가락질 또한 ‘정상적인’ 반응일 터였다.
참고 웅크릴 수 있었다. 뒷날에 자신을 억누르려던 모두가 후회하도록 나아갈 테니.
“벨제아 부인! 부인답지 않게 무슨 무례한 언사입니까? 라제카가 멋대로 빠져나갔을 뿐인데요!”
“저는 괜찮습니다, 공주님.”
놀랍게도 웃음이 나왔다. 검과 브링만으로는 세상을 헤쳐 나갈 수 없다고, 기사단 입단 시험에서 깨달았다. 엘테르트와 루시온의 설명도 도움이 되었다.
앞뒤를 따져 보고 목검으로 후려갈겨라. 셈브리온의 가르침은 결과적으로 옳았다. 이에샤는 제가 뒤집을 수 있는 상황에만 덤벼들기로 마음먹었다. 공주의 시녀는, 아직은 이에샤가 구슬릴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말했지요, 흘러가는 대로 닳아 가는 과정입니다.”
“하지만, 그렇지만요. 앨저 경.”
“알맹이만 변하지 않으면 돼요.”
말비다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영문 모르겠다는 표정을 띠었다. 이에샤는 개의하지 않고 라제카 앞에 무릎을 꿇었다. 두 사람의 눈높이가 맞물렸다. 다정한 눈길을 라제카에게 보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제가 지켜 드리겠습니다. 황궁 여인을 위하는 기사가 되었으니까요.”
============================ 작품 후기 ============================
< 3. 마모 > 편이 얼추 마무리되었어요.
라제카는 앞으로 중요해질 캐릭터라 이번에 비중을 많이 할애했어요...
그동안 뜨문뜨문 나왔던 엘테르트가 본격적으로 이미지 쇄신에 들어갈 거랍니다...
이 소설은 사회부적응자였던 이에샤가 세상에 맞추기도 하고 세상을 자기 뜻대로 바꾸기도 하면서 씩씩하게 살아가는 이야기입니다ㅎㅎ
작가도 씩씩하게 살고 싶네요
+) 9시 30분, 자잘한 문장을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