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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수는 검 한 자루-28화 (28/164)

00028 4. 기사와 귀부인 =========================

이에샤는 ‘아차.’ 하며 다리를 구부렸다. 오른 무릎을 바닥에 댔다. 반대편 무릎은 높이 세웠다. 고개를 숙였다. 기사의 예법에 따른 인사였다. 주변이 들썩거렸다. 델페레타 귀족들에게 아녀자가 바지를 입고, 무릎을 꿇는 모습은 경악스러웠다.

“처음 뵙겠습니다, 멘델린 공작 각하. 금방의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반갑소. 아들의 얼굴을 안다면 엘로나 님이 누구인지를 알고, 내가 누구인지도 알게 되는 법이지. 익숙하니 신경 쓰지 않소.”

“감사합니다.”

이에샤는 공손한 몸가짐으로 일어섰다.

애버토스는 공주였던 엘로나에게 예를 지켰다. 이에샤는 어색한 기분이 되었다. 애버토스처럼 아내에게 정중한 남자는 처음 보았다. 알디온 부부는―구역질이 날 만큼―다정했으나, 오스터는 배알 꼬이는 일이 생기면 셀더리가 약속에도 나가지 못하도록 막았다. 에이릴리를 대하던 태도야 말할 것도 없었다.

애버토스 또한 이에샤로부터 색다른 느낌을 받았다. 이름을 퍼뜨려야 하는 처지로서 오늘 같은 대연회를 놓치면 바보짓이긴 했지만, 기사의 차림을 하고 올 줄은 몰랐다.

거기다 늘씬하고 어여쁜 아가씨가 아닌가? 드레스를 입으면 귀족 영애로밖에 보이지 않을 듯싶었다. 이에샤가 우락부락 왈패스러울 것이다 여겼던 자신이 반성되었다.

애버토스가 말머리를 꺼냈다.

“그대를 무어라 부르면 되겠소?”

“예?”

이에샤는 멍청히 되물었다. 물음의 뜻을 알아차릴 수 없었다. 남편을 속속들이 꿰는 엘로나가 나섰다.

“이 자리에 앨저 백작으로서 나왔습니까, 앨저 경으로서 나왔습니까. 귀부인하고 기사. 어느 쪽의 대접을 바라느냐 물으셨습니다.”

애버토스는 궁금했다. 이에샤가 기사단 정복을 입은 속셈이 무엇일까. 귀부인이 아니라 기사임을 내세우고자 했다면 훌륭했다. 여자 기사를 무시하는 군중에 이만한 어필은 없을 것이다.

한편 이에샤는 고개를 기울였다. 백작이든 경이든, 어떻게 불려도 괜찮았다. 어느 쪽도 제게 주어진 자리가 아닌가? 내키는 대로 고르면 될 일을 물어보는 멘델린 부부가 의아스러웠다.

애버토스가 이에샤를 흥미롭다는 듯이 훑어보았다. 이에샤는 조금 불쾌감을 느꼈으나, 내색하지는 않았다.

“각하께서 편하신 쪽으로 불러 주십시오. 앨저 백작과 앨저 경에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뻔한 질문을 하는 건 나를 시험하는 건가? 연약한 귀부인이 아닌, 당당한 기사로 봐 달라고 그런 옷을 입고 나오지 않았나?”

이에샤의 머릿속에 불경한 생각이 떠올랐다. 이게 무슨 개소리야?

선택지가 기사단 정복밖에 없었을 따름이었다. 파티에 어울리는 드레스를 가졌다면 그걸 입었을 터였다. 애버토스가 무언가를 오해한 모양이었다.

“공작 각하를 우롱하려는 뜻은 조금도 없었습니다. 옷차림은, 그것이……, 이게 가장 어울린다 생각했기 때문에. 드레스를 입지 않는다고 제가 앨저의 여주인이 아니게 되는 건 아니잖습니까?”

“어울리기에 입었다?”

“예.”

애버토스는 "그렇군, 어울리는 걸 입었단 말이지." 하고 중얼거렸다. 백화 기사단장은 자못 새롭고 흥미로운 관점을 내세웠다.

‘옷이 바뀐다고 알맹이가 바뀌지는 않고, 겉보기로 알맹이를 가릴 수도 없다, 인가.’

말마따나 이에샤는 날 때부터 백화 기사단 코트를 입고 태어난 것 같았다. 이에샤보다 옷맵시를 살릴 사람은 없을 듯했다. 여자가 남의 눈길도 개의치 않고 제게 맞는 옷을 골랐다니, 애버토스는 잔잔한 충격을 느꼈다.

이에샤 앨저는 귀부인이지만 기사였다. 기사이면서 귀부인이었다. 두 가지 정체성은 동떨어지지 않았다. 꿈보다 해몽이라고, 애버토스는 이에샤의 기개에 감탄했다.

“그거 좋군!”

“예?”

“나는 그대를 앨저 경으로 부르겠소. 기사로서의 그대가 좀 더 알려지기를 바라니까.”

“아, 예. 감사합니다……?”

손을 내밀었다. 이에샤는 고민에 빠졌다. 제까짓 게 멘델린 공작과 악수해도 괜찮을까? 맞잡았더니 애버토스가 “속임수였다! 이년을 불경죄로 처넣어라!” 하고 경을 치지는 않을까? 갖은 망상이 들었다. 까불거리는 루시온보다 애버토스가 어려웠다.

“뭐하시오? 나를 무안하게 만들 셈이오?”

“아, 아닙니다. 영광입니다, 공작 각하.”

끝내 악수를 받아들였다. 애버토스의 손은 딱딱했다. 익숙한 자리에 굳은살이 박였다. 검술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는 듯했다. 참으로 아들과는 닮지 않았다.

애버토스가 손을 두어 번 흔들고 놓아주었다. 엘로나도 이에샤에게로 한 발짝 다가섰다.

“공작님께서 그리하신다면 나도 따라야겠죠. 반가워요, 앨저 경. 소문이 실물을 쫓아가지 못하는군요.”

“레이디 엘로나께도 감사드립니다.”

이에샤는 도대체 무슨 소문이 도는가 어림해 보았다. 좋은 이야기는 아닐 성싶은데, 무구한 낯빛의 엘로나가 저를 비꼬았다고 여기기도 어려웠다. 갈팡질팡하며 감사를 표했다. 엘로나가 손등으로 입가를 가리고 웃었다.

오스터는 샴페인 잔을 떨어뜨리지 않고자 애썼다. 펠트런의 시선이 느껴졌다. 말을 붙이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기색이 울화를 부채질했다. 앨저 핏줄은 저와 무슨 원수가 졌다고, 집을 나가서까지 물을 먹이는가―뻔뻔한 생각을 떠올렸다.

딸년이 바지 차림으로 나타난 일만도 터무니없었다. 온 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멘델린 공작과 악수를 하다니! 애버토스는 퍽 정다운 눈길로 이에샤를 보았다. 믿기 힘든 일이었다.

‘왜? 왜? 대체 왜!’

오스터는 벌게진 눈으로 이에샤 쪽을 보았다. 옆구리에 여자 가슴이 닿아 왔다. 누구인지는 뻔했다. 팔을 들어 셀더리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셀더리가 놀라움과 노여움으로 달뜬 숨결을 토했다. 손가락이 바들바들 떨렸다.

“여보, 어떻게 된 일이에요?”

“나도 모르오.”

“왜 저 애가 여기 나타난 거예요? 8년 동안 관심조차 없었잖아요. 저 꼴은 뭐고요. 멘델린 공작하고는 어떻게 된 거죠? 왜 저 계집애가!”

“진정해, 진정하시오, 셀다. 나도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으니까!”

오스터가 빠르게 속삭였다. 타이르는 말이었으나 목소리는 윽박지르는 듯했다. 셀더리는 움찔했다. 더 캐물었다가는 화를 돋울 성싶었다. 오스터는 자상한 남편이었지만, 머리 꼭대기까지 달아오르면 고용인에게 지팡이를 휘두르거나 물건을 집어 던지기도 했다. 이런 곳에서 자극하면 위험했다.

“밀레는 언제 올까요? 난 그 아이가 오늘 무도회에서 가장 주목받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마찬가지요. 내 딸이 가져가야 할 시선을 저년이 가로채 버렸어.”

크흠!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셀더리는 뒤늦게 펠트런을 알아차렸다. 화들짝 오스터로부터 떨어졌다. 뺨을 붉혔다. 젊은 연인처럼 남편에게 매달렸던 것이 부끄러웠다.

“오래간만이에요, 오라버니. 아저씨는 좀 괜찮으셔요?”

“여전하시지. 시간이 그리 남지 않은 것 같다.”

펠트런과 셀더리는 고갯짓으로 인사했다. 선대 펠트런 후작이자 셀더리의 종숙이 치매에 걸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사이 오스터는 이에샤만 노려보았다.

이에샤 주변은 한산했다. 동그랗게 공간이 남았다. 호기심 어린 눈길은 쏟아졌지만, 다가가는 사람은 없었다. 애버토스와 엘로나도 발코니로 나간 뒤였다. 이에샤는 오도카니 섰다. 삼삼오오 무리 지은 곳에 끼려고는 하지 않았다. 무도회를 즐길 마음이 없어 보였다. 오스터는 “저럴 거면 왜 온 거야?” 하고 구시렁댔다.

고개만 두리번거리던 이에샤가 눈을 빛냈다. 음식이 차려진 테이블을 찾아냈다. 낯이 환해졌다. 쭐레쭐레 테이블로 걸어갔다. 오스터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해 댔다.

‘계집애가 여전히 식탐만 많아서는!’

이에샤는 울그락불그락하는 오스터를 모르는 채, 음식상을 둘러보았다. 과자나 사탕과 견과류가 많았다. 디저트와 술안주인 모양이었다. 한입 크기로 잘라서 막대기에 꿰어 놓은 샌드위치가 개중 나을 성싶었다. 아침 식사로 샐러드만 나온 탓에―셈브리온이 단단히 삐쳤다―배가 고팠다.

샌드위치 하나를 입에 넣었다. 훌륭한 맛이 났다. 셈브리온이 만드는 마구잡이식 요리와는 비할 수조차 없었다.

행복하게 입을 우물거리는 참이었다. 등뒤로 누군가가 다가붙었다.

“아주 예쁘게 차려입고 왔는걸, 자기.”

이에샤는 빵과 채소 조각들을 뿜을 뻔했다. 뒤로 돌아섰다. 불청객을 올려다보았다. 갈색 머리카락을 시원스레 깎은 청년이 섰다. 웃음기 가득한 얼굴이 낯익었다. 청년이 이에샤의 옆머리를 귀 뒤로 넘겨 주었다. 이에샤는 입술을 누르고, 샌드위치를 씹어 삼켰다.

“……전하.”

“이베르라고 불러 주겠어? 우리가 이러고 있는 거 들키면 그대도 귀찮아질 텐데.”

“아, 예. 그러시겠죠. 알겠습니다. 이베르 님. 됐나요?”

이에샤는 놀란 가슴을 가라앉혔다. 퉁명스레 쏘아붙였다. 황태자의 기행이라면 익숙해졌다. 자기 집에서 변장을 하든 여장을 하든 알 게 무언가? 이유를 물어보기도 귀찮았다.

“안 물어?”

“그 머리 어떻게 된 거냐고요?”

“현자가 만든 가발이라고 해 두지. 그런 거 말고, 내가 왜 이러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아?”

“네.”

곧바로 대답이 튀어나왔다. 루시온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루시온 황태자는 이따가 폐하와 입장하기로 했거든. 하지만 그대가 왔다는 소리에 기다릴 수가 있어야지. 와 줘서 기뻐.”

“아, 예. 저도 제가 와서 기쁘네요.”

“으음, 그, 오랜만에 만나는 거 같은데…….”

“며칠 전에 뵈었습니다.”

맞다. 그랬지. 이에샤가 호랑가시궁의 결계에 갇혔던 일을 돌이켰다. 무사를 확인하자마자 헤어져서, 머릿속에서 지워져 버렸다. 루시온이 기억하는 이에샤의 마지막 모습은 작년 말―기사 작위를 내렸을 때였다.

그날의 일을 되짚어 보았다. 화냈다가 울먹였다가 놀랐다가 하는 얼굴이 재미있었다. 그러다가 “월경대를 갈고 와도 되겠습니까?” 하는 폭탄 발언이 떠오르자, 황급히 상념을 떨어냈다.

“앨저 경, 나한테 쌀쌀맞아지지 않았어? 처음엔 제법 호의적이었던 것 같은데.”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쭉 전, 아니, 이베르 님께 호감정도 악감정도 없답니다.”

“이것참! 미운털이 박혔구만.”

이에샤는 쿠키를 집어 들었다. 반 정도 깨물어 먹었다.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 거 아닌데.’

루시온을 향한 원망은 남지 않았다. 기사가 되면서 사그라졌다. 불온의 장막에 빠졌을 때는 황태자인 루시온에게 변고라도 생겼을까 무서워, 기를 쓰고 싸웠을 정도였다. 자신은 루시온을 싫어하지 않았다.

‘고운 소리가 잘 안 나간단 말이지.’

까닭은 모르겠으나 루시온에게는 심술을 부리게 되었다. 하지만 루시온도 저에게 장난질을 해 대지 않는가? 피차일반인 셈이었다. 이에샤는 루시온이 시비를 걸어서 저도 뾰족하게 반응하는 거라고 결론지었다.

그때, 루시온과 붙어다니는 남자가 오늘은 없다고 깨달았다. 이에샤를 만나러 오지 않는 남자가. 생각하니 부아가 났다. 눈을 치켜뜨고 루시온을 보았다.

“오늘은 멘델린 남작과 함께가 아니신가요?”

루시온의 얼굴에 묘한 빛이 스쳤다. 뜻밖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 같았다. 이윽고 푸하,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앨저 경. 몰랐어? 이번 신년맞이 무도회는 에르디가 처음으로 엄마가 아닌 여자를 에스코트해서 오는 파티라고.”

“여자를 에스코트…….”

“에르디의 파트너가 누군지도 모르겠군?”

============================ 작품 후기 ============================

길었던 챕터 4가 끝났습니다~

루시온이 독자님들 뒷목을 좀 잡으시게 만들긴 했지만 이에샤를 많이 아껴요...

선추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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