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수는 검 한 자루-29화 (29/164)

00029 5. 무도회 속 함정 =========================

(연참 1/2)

엘테르트는 정오가 가까워서 도착했다. 하인들이 테이블의 음식을 끼닛거리로 바꾸던 중이었다. 엘테르트 또한 축포와 함께 나타났다. 왼편에는 밀레나가 파트너로서 걸었다. 팔짱을 끼지는 않았으나, 엘테르트가 밀레나의 허리에서 반 뼘 떨어진 허공에 팔을 두르고 이끌었다.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밀레나는 튤립 송이처럼 부풀린 드레스를 입었다. 파란 공단에 하늘빛 레이스가 덧대어졌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치맛단에서 빛나는 가루가 떨어지는 듯했다. 엘테르트는 갈색 테일 코트와 검은 바지를 매치했다. 보타이 색깔은 우연인지 맞추었는지, 밀레나의 드레스와 같았다.

두 사람은 나타나자마자 눈길을 사로잡았다. 보기 드문 선남선녀였다. 멘델린 소공작과 사교계를 주름잡는 숙녀이기도 했다. 둘뿐 아니라 알디온 후작 부부에게도 관심이 쏟아졌다. 엘테르트가 여자와 동반한 것은 처음이었기에, 멘델린이 알디온과 사돈을 맺으려는 게 아니냐는 쑥덕임이 돌았다.

이에샤는 이 무도회에 싫증을 느꼈다. 재미가 없었다.

“앨저 경.”

“말씀하십시오.”

“에르디한테 인사하러 안 가?”

물끄러미 루시온을 보았다. 마법으로 바꾼 머리 모양이 어설프기 그지없었다. 루시온에게는 바짝 깎은 머리보다 뺨까지 길러서 다듬는 쪽이 알맞았다―조각 같은 얼굴에 머리카락이 무어가 대수겠냐마는. 이에샤는 처음에 루시온을 엘테르트에게 지지 않는 미남자라고 생각했던 걸 떠올렸다.

“피붙이라 그런지.”

“응?”

“멘델린 남작이랑 이베르 님은 닮았어요.”

“내가 에르디랑 닮았다는 소리는 처음 듣는데. 동생들도 어마마마도 말이야, 에르디 쪽이 나보다 훨씬 고귀해 보인다고 말하거든.”

실웃음을 흘렸다. 황후와 황자·공주가 무슨 뜻으로 말했는지 알 성싶었다. 엘테르트가 새하얀 비단 같다고 한다면, 루시온은 표범의 털가죽을 연상시켰다.

“그런 이야기가 아니고, 두 분 다 엄청나게 눈에 띄잖습니까.”

“잘생겼다는 칭찬?”

“좋으실 대로 받아들이십시오. 그냥 뭐랄까, 밀레나, 제 동생이…….”

루시온이나 엘테르트와도 격이 맞아 보여서. 이에샤는 고개를 설레설레 털었다. 질척이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이에샤가 연회장에 들어서자 대부분 사람이 돌림병 환자라도 본 양 질린 얼굴을 했었다. 밀레나는 달랐다. 밀레나가 엘테르트와 들어왔을 때도 사방이 고요해졌으나, 이윽고 열띤 흥미로 달아올랐다.

어째서 이다지도 다를까. 이에샤는 밀레나는 어여삐 보이고, 제가 미치광이 취급받는 까닭을 알 수 없었다. 머리카락을 자르고 바지를 입고 검을 들고―‘보통’에서 벗어나는 것이 그렇게 큰 잘못이란 말인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세상에는 황족이 있고 귀족이 있고 평민이 있었다. 기사가 있고 용병이 있고 장사꾼이 있었다. 여자가 있고 남자가 있었다. 어린아이. 어른. 늙은이. 키가 큰 사람, 작은 사람. 오스터 같은 놈이 있는가 하면 셈브리온이 있었다. 누구도 똑같지 않았다.

자신은 그중 하나일 뿐이었다. 이에샤는 그렇게 여겼다. 왜 용쓰고 버둥거려도 좋게 보아 주는 사람이 늘지 않을까. 정말로 제가 그릇된 자인가 하는 불안마저 들었다.

“후우! 아무것도 아닙니다. 멘델린 남작도 밀레나도 바쁜 거 같고, 제가 끼어들면 성가시기만 할 테니까요.”

“앨저 경, 동생하고 사이 나쁘지?”

“예?”

뜬금없는 물음이 날아들었다. 루시온이 입술을 터뜨리며 웃더니, 한쪽 팔로 이에샤의 어깨를 감쌌다. 이에샤는 뿌리치지 않았다. 안았다기보다 건들건들 어깨동무한 모양새였으므로. 내버려둬도 되지 싶었다.

“그대 집안은 여러모로 복잡하니 당연한 질문인가?”

“저는 앨저에 입적되었습니다. 알디온이 제 집안이라는 말은 맞지 않습니다.”

“실례. 여하튼 저 동생을 좋아하지 않지? 어째서야?”

이유야 명료했다. 밀레나가 약삭빠르게 사람을 미친년으로 몰고 가니까. 이에샤를 깔아뭉개며 스스로를 치켜세우는 말본새가 빤한데, 모두가 이상하리만치 속아넘어갔다. 이에샤는 고민했다. 이러한 이야기를 고하면 루시온도 저를 이복동생에게 질투나 하는 여자로 보지 않을까, 저어되었다.

결국은 한숨 섞인 목소리로 얼버무렸다.

“예쁘고 재주 많고 정숙한 동생을 싫어하는 언니가 뭐 때문이겠어요?”

“앨저 경은 정말이지 나를 못 믿는구나. 시시한 질투에 눈멀 사람이 아닌 거 알아.”

울컥, 속이 치밀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뭘 아는 체하는 거야.

“그래서요? 어차피 전하께서도 여자란 밀레나 같아야 한다고 생각하실 거 아닙니까? 전 저 애처럼은 못 하겠어요. 어떡해야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쏘아붙이듯이 늘어놓았다. 루시온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이에샤는 볼수록 별난 여자였다.

여인의 공부에는 관심 없지만 사내가 되고 싶은 건 아니다. 눈치는 재빠르면서 세상 돌아가는 모양을 모른다. 사람을 싫어해도 남과 어울리지 않고는 살 수 없음을 인정한다. 지고는 못 배기지만 지레 포기해 버리기도 한다.

모순투성이 이에샤 앨저. 루시온은 이에샤의 앞뒤가 맞지 않는 기개를 좋아했다.

“우리 단순하게 생각하자고. 그대가 사랑스럽지 않은 게 아니라 다른 놈들 눈이 삐었다는 건 어때? 마음을 편하게 먹는 건 중요하거든.”

“아니, 전 사랑스럽다거나 그런 건 좀…….”

이에샤는 말끝을 삼켰다. 루시온의 얼굴이 불쑥 다가온 탓이었다. 축축한 입술이 귓가에 닿을락 말락 했다. 질겁하여 밀치려 했으나, 황태자를 패면 큰일난다는 이성이 가로막았다. 그 틈에 루시온이 속삭였다.

“그대도 예뻐.”

“저, 전하.”

“빼어난 재주도 지녔지. 정숙하지는 않아도, 나는 그대가 명예로운 기사이자 귀부인이라고 생각한다.”

이에샤는 견디지 못하고 루시온을 뿌리쳐 버렸다. 한 손으로 떠밀었을 뿐이나 루시온은 뒷걸음쳤다. 이에샤는 힘이 셌다.

“됐습니다. 그런 말 듣고 싶었던 거 아닙니다!”

“칭찬했는데 왜 그래? 앨저 경, 얼굴이 빨간데. 혹시 설렜나?”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더워서 밖에 좀 나가 보겠습니다. 전―이베르 님도 어서 돌아가십시오!”

벌건 낯으로 외치고 이에샤는 몸을 돌렸다. 허둥지둥 테이블 둘레를 벗어났다. 커튼이 열린 발코니를 향하여 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에샤의 모습이 바깥으로 사라졌다.

루시온은 모자이크 쿠키 한 개를 집어 들었다. 킥킥 웃은 다음 아작, 깨물어 먹었다. 즐거웠다.

“엘테르트 님? 무얼 보고 계시나요?”

밀레나가 엘테르트의 손목을 두드렸다. 엘테르트는 흠칫 놀랐다. 밀레나를 돌아보았다. 인사하러 밀려들었던 귀족 무리가 지나간 채였다. 밀레나는 조금 상기됐다. 엘테르트는 하인을 불러 샴페인 잔을 집었다. 밀레나의 뺨 쪽으로 기울여 주며 답했다.

“아는 사람이 있었던 것 같은데, 안 보이는군요.”

밀레나는 엘테르트에게서 샴페인을 받아 들었다. 고개를 젖히지 않고 홀짝였다.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셔요. 역시 제가 무리한 부탁을 드린 건 아닌지.”

“아닙니다. 걱정하게끔 만들어 죄송합니다. 파트너 실격이로군요.”

“그, 그렇지 않아요! 전 엘테르트 님과 이리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기쁜걸요.”

엘테르트는 잠자코 웃어 보였다. 피로를 내비치지 않는 일만도 힘들었다.

이번 신년맞이 무도회에는 나올 마음이 없었다. 애버토스가 참석하지 않아서 얼굴을 비쳐 왔지만, 올해는 애버토스가―백화 기사를 보고자―나가겠노라 하였다. 밀레나의 청만 아니었어도 푸른 사자 성에서 쉬었을 터였다.

여자 쪽에서 나서는 데에만도 용기가 들었을 텐데 물리칠 수는 없었다. 소문이라도 퍼졌다간 밀레나의 평판이 떨어졌으리라. 밀레나가 아니라 어떤 여자가 부탁했더라도 받아들였을 것이다. 엘테르트는 누구에게나 친절했다.

한 사람에게만 빼고.

‘대체 왜 루시온이랑…….’

변장한 루시온과 시시덕거리던―이에샤가 들으면 장갑을 던질 생각이었다―이에샤를 떠올렸다. 뱃속이 술렁거렸다. 뒤숭숭한 기분이 들었다. 이에샤가 나간 발코니로 따라 나가고 싶다는 충동이 피어올랐다.

“엘테르트 님, 저, 저기.”

밀레나가 말을 붙여 왔다. 입술만 작게 달싹거렸다. 무언가 전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엘테르트는 밀레나의 바람을 알아차렸다. 부드러운 낯빛을 꾸며 냈다. 연회장 한가운데 쪽으로 손짓했다.

“예. 한 곡 춰 주시겠습니까?”

“물론이에요!”

두 사람이 플로어를 향하자 음악이 바뀌었다. 오케스트라가 기다렸다는 듯, 자연스레 박자를 타고 다른 곡으로 넘어갔다. ‘밀애’라는 이름의 왈츠곡이었다. 엘테르트는 드러나지 않게 이맛살을 찌푸렸다.

주변의 시선이 무거웠다. 무도회가 끝나고 어머니로부터 받게 될 질문 공세도 두려웠다. 바깥공기가 마시고 싶었다. 자신이 총무부와 조경부, 마법부를 지휘해서 꾸민 수레국화궁 정원을 이에샤는 마음에 들어 할까. 문득 궁금해졌다.

“예뻐……!”

이에샤는 자기도 모르게 경탄했다. 수레국화궁은 정원까지 눈부셨다. 마법의 불을 집어넣은 등이 여기저기 떠다녔다. 촘촘하게 뜬 레이스로 등갓을 만들어, 불빛이 가닥가닥 새었다. 공기는 쌀쌀했으나 등불을 보자니 훈훈한 느낌이 들었다. 누가 생각해 냈는지는 몰라도 훌륭했다.

날이 저물면 북적일 듯했다. 짝지은 남녀가 나와, 으슥한 데에서 서로를 어루만지기에 제격인 정경이었다. 고요한 때는 지금뿐이리라. 이에샤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거닐었다. 덩굴에 휘감긴 아치를 지나 보았다.

아치 끝에는 미로원이 기다렸다. 길을 따라 뼈대를 세우고, 관목으로 채운 미로가 펼쳐졌다. 이에샤는 신나서 발을 들여놓았다.

하나 나아가지는 못했다. 잰 걸음으로 서성대는 인기척이 느껴졌으므로. 브링을 곤두세웠다. 숨결이나 보폭 따위를 알아보았다. 누구인지 알 성싶었다.

지나온 아치를 되밟아 나갔다. 우왕좌왕하는 여자가 보였다. 오늘도 베빈은 어린아이가 어른의 옷을 걸친 양, 머리 모양과 드레스가 엉성했다.

“저 여기 있어요, 베빈.”

“애, 앨저 경! 어떻게?”

“당신 모습이 언뜻 보여서 돌아 나왔습니다.”

베빈은 의심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샤는 베빈의 뺨에 거스라미 따위가 일어난 줄 알았다. 자세히 보니, 분가루가 뭉치고 뜬 채였다. 베빈은 이 날씨에 땀을 비 오듯이 쏟아 냈다. 얼어붙은 티가 역력했다.

이에샤는 한숨을 쉬었다. 사연이 깊은 것은 틀림없는데, 입을 열도록 이끌기가 쉽지 않았다. 팔을 내밀었다. 엘테르트의 에스코트를 흉내내어 베빈의 허리를 감았다.

“우리, 좀 걸을까요?”

“너무 멀리 갈 수는 없어요. 남편한테 잠깐 소피만 보고 오겠다고…….”

거기까지 말하고 베빈은 멈칫했다. 눈동자가 되록되록 굴렀다. 생각에 골몰하는 모양새였다. 이에샤는 어리둥절해서 “베빈?” 하고 불렀다. 베빈이 헉하고 숨을 집어삼켰다.

“아니, 아, 돼, 됐어요. 어디로 가든 괜찮아요. 네, 괜찮겠네요.”

“예? 방금 남편 때문에 안 된다고,”

“이젠 됐어요. 어차피 오늘로 그 남자하고도 끝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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