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0 5. 무도회 속 함정 =========================
(연참 2/2)
베빈으로부터 딱딱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만났던 날, 이에샤에게 결혼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말할 때와 같았다. 이에샤는 멈칫했다. 소심한 베빈이 남편을 함부로 부르는 게 어색했다. 자신이 아는 가장 나쁜 놈―오스터 알디온을 떠올리며 물었다.
“혹시 렌디드 자작이 바람을 피우나요?”
“아뇨. 그러지는 않아요. 하지만 전 차라리 그 남자가 따, 딴 여자를 만났으면 좋겠어요.”
이에샤의 눈이 동그래졌다. 오스터의 외도는 이에샤에게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겼다. 한 여자를 죽음으로까지 몰고 간 행동. 이에샤 속에서 배우자를 저버린다는 건 무엇으로도 용서할 수 없는 짓이었다. 그렇기에 베빈의 말이 괴이쩍기 그지없었다.
“어, 음. 베빈. 자작을 편드는 건 아니지만 그런 말은 좀.”
“알아요. 부끄러운 소리죠.”
베빈은 순순히 답했다. 델페레타에서는 한 명의 짝만을 인정했다. 외도를 법으로 다스리지는 않았으나, 짐승만도 못하다고 손가락질했다. 델페레타 귀족은 어려서부터 사랑하지 않더라도 남편과 아내를 존중해야 한다는 마음가짐을 배웠다―오스터 같은 놈도 있었지만 말이다. 베빈이라고 다를 턱이 없었다.
“앨저 경, 저는 지옥 같은 결혼 생활을 남한테라도 떠넘기고 싶어요. 그가 바람을 피운다면 관청과 사원은 내 편을 들어주겠죠. 이혼할 수 있을 텐데, 전, 전 그러지도 못해요. 딜란 렌디드는 겉보기에는 번드르르한 마법사니까.”
“렌디드 자작이 마법사였습니까?”
이에샤는 자못 놀랐다. 마법사는 고급 인력이었다.
자연물에 깃든 마력을 뽑고 정제해, 순리를 거스르려면 두뇌 노동이 필요했다. 마법사란 한평생 글자를 끼고 산다는 말까지 돌았다. 숱한 숫자와 기호로 계산하고 계산해야만 마법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보통 머리로는 문을 두드릴 수조차 없고, 천재라도 끝을 보기 어려운 학문. 그렇기에 빼어난 마법사는 ‘현자’라 불렸다.
델페레타는 황실에 마법사로만 꾸려 가는 부처가 있을 정도였지만, 마법사가 흔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렌디드 자작도 권세깨나 떨칠 것이 틀림없었다.
“네. 마법부에서도 여러 번 부름 받은 사람이에요. 하지만 그는…….”
베빈이 아랫입술을 씹어 댔다. 이에샤는 양손으로 베빈의 오른손을 붙잡았다. 꼭 쥐고 “하지 마요.” 하고 얼렀다. 만날 때마다 핏방울이 맺히니 안쓰러웠다. 베빈은 흠칫하며 이빨질을 멈추었다. 미안해요, 워낙에 안 고쳐지네요. 입속말로 중얼거렸다.
“앨저 경, 마법의 원칙이라고 들어 본 적 있어요?”
짐짓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화두를 돌렸다. 이에샤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전 마법은 몰라요. 뭐길래요?”
“인류에 이로운 기술로써만 사용하라. 마법의 원칙이에요. 그래서 마법사들은 전쟁에 뛰어들어거나 무기를 만들지 않는대요. 아티팩트 범죄는 아티팩트를 만든 마법사의 책임이 아니니까 어쩔 수 없는 모양이지만. 이걸 어기면 학계에서 매장당한다고 해요.”
그러고 보면 나무를 베고 바위를 터뜨리고 가축을 괴롭지 않게 죽이는 마법은 있어도, 사람을 해치는 마법은 들어 보지 못했다. 원칙으로 정해졌기 때문이라. 이에샤는―상황에 어울리지 않게―흥미진진하게 귀를 기울였다. 다행이라고 할까? 베빈은 이에샤의 호기심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긴장한 채였다.
베빈이 입술을 잘근거렸다. 이에샤는 말리기를 포기했다. 베빈은 흘린 땀이 식어 버리는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바깥에 두었다가는 감기에 걸릴 성싶었다. 이에샤가 들어가서 얘기할까요, 물어보려던 차였다. 베빈의 말문이 떨어졌다.
“제 남편은 원칙을 어긴 마법사예요, 앨저 경.”
베빈은 반데스 자작의 막내딸이었다. 닐보칸(제국 남부의 통칭)의 소도시에서 태어나, 귀족 사회에서는 변변찮아도 근방에서는 떵떵거리며 자랐다. 브로칸, 닐보칸, 다이칸(동부), 시어칸(서부)의 처녀가 으레 그러하듯이 베빈도 중부로 시집가기를 꿈꿨다. 부모를 졸라 댔으나 수도에서 반데스와 혼담을 주고받으려는 집안은 없었다.
어느 날 베빈은 수도에서 온 자작과 만났다. 나이 서른에 아내를 잃은 그 남자는, 상냥하고 세련되었다. 사투리 섞이지 않은 말씨가 베빈의 귀에 그럴싸하게 다가왔다. 여행하는 까닭도 멋들어졌다. 자신은 마법사이며 연구를 위하여 남부의 흙과 돌을 캐고 다닌다는 것이었다.
딜란 렌디드는 베빈의 권유로 반데스 저택에서 머무르게 되었다. 그다음은 일사천리였다. 한 번 결혼했던 남자와 수도로 가고 싶어 하는 여자의 득실이 맞아떨어졌다. 반데스 자작 또한 마법사 사위를 달가워했다. 베빈은 딜란의 작은 키와 주먹코가 별로였지만, 어느 귀족이 결혼을 사랑으로 하겠는가?
꿈에 그리던 일들이 펼쳐졌다. 알 굵은 프러포즈 반지. 수도의 의상실에서 맞춘 웨딩드레스. 눈부신 결혼식. 렌디드 자작 부인이 된 베빈은 마지막으로 어머니와 얼싸안고 운 뒤, 수도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끔찍한 첫날밤이 이어졌다.
“딜란은 폭력적이고 무자비해요. 애완용 새나 강아지를 사 와서 죽이는 취미가 있을 줄 저, 제, 제가 어떻게 알았겠어요?”
베빈은 차분히 말을 꺼냈으나, 갈수록 더듬거렸다. 이에샤는 입을 헤벌렸다. 친절과 웃음으로 사로잡아 놓고 결혼한 뒤에 본색을 드러냈다니. 상상조차 해 보지 못한 이야기였다. 세상에 그렇게 소름 끼치는 일도 벌어지는 줄은 처음 알았다.
베빈의 고백은 끝나지 않았다.
“전 처음으로 그와 잠자리를 가졌을 때, 배가 지져졌어요.”
“……뭐라고요?”
“말, 말했잖아요. 원칙을 깼다고. 그는 짐승으로는 만족, 훌쩍, 할 수 없다면서 나한테, 흑, 마법으로.”
“마법으로 당신 배에 불을 붙였단 말이에요, 지금?”
목소리가 커지지 않도록 애썼다. 남이 들어서는 안 되었다. 해가 더디게 졌으면 싶었다. 겨울이라 부질없는 바람이더라도, 베빈에게 모든 사정을 들어야만 했다. 방해꾼이 나타나면 곤란했다.
“나, 난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해 봤어요. 일부러 구, 구토를 한 적도 있어요. 어떻게든 그가 나를 괴롭, 괴롭히지 않고 지나갔으면 해서. 흑!”
“베빈, 진정해요.”
어찌하여 베빈이 털어놓기를 꺼렸는지 알 듯싶었다. 남편 앞에서 속을 게워 냈다니, 귀부인에게는 밝히기 힘든 치부였다. 이에샤는 왜 지금껏 백화 기사단에 도움을 구하러 온 귀족 여자가 없었는지 깨달았다.
남자의 희롱으로부터 여인을 지키라고? 지켜 달라고 말하는 데에도 각오가 필요한 법이었다. 베빈이 백화 기사에게 편지를 보내는 과정에 얼마만큼의 용기가 들어갔는지 루시온도, 엘테르트도, 황제도 모를 터였다. 여자이지만 위협할 자가 없는 라제카 공주도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제 임무를 얼마나 안이하게 받아들였는가! 이에샤가 가장 악랄한 남자라고 여긴 이는 오스터였기에, 외도를 넘어서는 문제는 떠올리지도 못했다. 오스터는 에이릴리를 때리지는 않았으므로.
“그는 제 모, 몸에 상처를 내면서도 저를 두려워하는 것 같았어요. 흑. 내가 어디 가서 자기 얘기를 할까, 봐, 흐흑, 항상 의심하고 간섭하려 들었, 나, 난 시간 약속에 조금만 늦어도 맞았, 보, 보복당했어, 힉! 흑!”
숨결이 엉클어졌다. 베빈이 가슴을 치며 꺽꺽거렸다. 이에샤는 서둘러 베빈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등을 두드려 주었다.
“진정해요. 천천히, 코로 숨 쉬어요. 제가 도와줄 테니까 차분해집시다, 베빈.”
“저, 전 아무한테도 말할 수가! 수, 수도는 무서워요. 경, 나는 살롱에서도 다른 부인들한테 니, 닐보칸 촌것이라고 무시당하고. 나, 나는 남편이 마법사라고 으스댄 적 따위 하, 하, 한 번도 없는데……!”
“베빈!”
베빈이 거꾸러지려고 했다. 이에샤는 초조해졌다. 베빈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자리에 누여야 할 성싶었다. 그러나 수레국화궁에도, 사교 모임에도 처음인 이에샤는 지친 참가자를 어디로 데려가야 하는지 몰랐다.
상담할 만한 사람도 없었다. 루시온이 대연회장에 남았는지는 확실치 않았다. 라제카는―란델 황자와―다른 파티를 벌이는 중일 터였다.
‘딱 맞는 사람이 한 명 있긴 하지.’
머릿속에 한 남자가 그려졌다. 불의와 폭력을 보아 넘겨선 안 된다고 말하고, 백화 기사단의 일을 의논해 왔고, 연회장에서 곧바로 찾아낼 수 있을 만큼 눈에 띄며, 권력을 쥔 사람.
이에샤가 아는 사람.
“베빈, 잠깐만 혼자 계실 수 있겠습니까?”
“시, 싫어요! 앨저 경, 그가, 남편이 오면, 가, 가지 말아요, 제발!”
“사람을 데려오려고 해서 그래요. 지금 도움될 만한 사람이 있어요. 같이 들어갔다가 렌디드 자작하고 마주치면 더 곤란해지잖아요.”
이에샤는 베빈을 달래느라 진땀을 뺐다. 베빈은 남편의 이름이 나오자 자지러질 듯이 놀랐다. 이에샤는 매달려 오는 베빈을 미로원으로 통하는 아치까지 잡아끌었다.
“여기를 지나가면 미로가 나와요. 무서우면 거기 숨어 있어요. 저는 베빈이 어디에 있든 찾아낼 방법이 있으니까 괜찮아요. 사람을 불러서 데리러 올게요.”
“그렇지만!”
“꼭 오겠습니다. 약속해요. 저는 백화 기사단장이잖아요.”
끝내 베빈의 고개가 아래위로 흔들렸다. 아치 안쪽으로 등을 떠밀어 주었다. 몸을 돌렸다. 밀레나와 마주치기는 죽기보다 싫었지만, 죽더라도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이에샤는 맡은 바 소임을 해내고 싶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방법이란 더 떠오르지 않았다.
엘테르트를 찾아야 했다. 발코니로 돌아갔다. 난간에 달린 샛문을 열었다. 잰걸음으로 대연회장에 들어섰다.
아까보다 사람이 늘어난 모양이었다. 발 디딜 틈도 없게 느껴졌다. 엘테르트도 보이지 않았다. 이에샤는 연회장을 누비기 시작했다. 이에샤가 가까워지면 귀족들이 화들짝 달아난 덕분에, 가로막히는 일은 없었다.
플로어에서 춤추는 남녀 중에도 엘테르트는 없었다. 이에샤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석곡궁으로 만나러 오지 않는 것만도 섭섭한데 찾아다닐 때조차 보이지 않는가. 엘테르트의 탓도 아니건만 원망이 치밀었다. 참으로 싫은 남자였다.
어서 돌아가야 하는데.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앨저 경?”
“멘델린 경!”
이에샤의 등뒤에 엘테르트가 섰다. 반듯한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에샤는 저도 모르게 엘테르트의 소맷자락을 잡았다. 입술 연지만 발긋한 얼굴이 엘테르트를 올려다보았다.
“어디에 있었어요? 내가 얼마나 당신 보고 싶었는지 알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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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연참은 무리였습니다.
엘테르트는 제자리걸음만 하는데 루시온이 진도를 쭉쭉 빼네요...
표지를 이에샤 얼굴로 바꿨습니다...작품 공지로 가시면 얼굴뿐 아니라 포즈까지 다 보실 수 있어요...
지난 공지에서(지금은 삭제했습니다) 걱정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_ _)
선추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