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8 6. 폐허에 틔운 싹 =========================
(연참 2/2)
이에샤는 성문을 닫는 무렵에 퇴궐했다. 궁전 앞에 역마차 정거장이 있었다. 피올라 거리로 향하는 마지막 마차에 올랐다. 40분가량 달리면 도착으로, 이에샤가 집에 들어갈 즈음에는 아홉 시가 가까웠다. 매일 그랬다.
역마차에서 내려섰다. 저녁 식사가 꺼지고 출출할 때였다. 운 좋게도, 손수레 한 대가 나타났다. 달려가 들여다보았다. 사과 몇 알이 굴러다녔다. 집으로 돌아가는 과일장수인 듯했다. 남은 사과를 몽땅 사겠노라 말했다. 과일장수는 고마움을 숨기지 않으며, 종이 봉투에 사과들을 담아 주었다. 이에샤는 그중 하나를 으적거리며 걸었다.
피올라 거리의 밤은 고요하지 않았다. 시끄럽지도 않았다. 여염집에서 새어 나오는 소음이 엷게 깔렸다. 들판의 잡초가 부대끼는 소리와도 닮았다. 이에샤는 익숙해진 길을 밟아 갔다. 이윽고 깨끗한 이층집에 다다랐다. 놋 열쇠로 현관문을 땄다.
집 안은 쌀쌀하고 캄캄했다.
“나 왔어, 세비. 세비?”
이에샤는 밤눈도 좋았다. 성큼성큼 벽난로로 다가갔다. 부지깽이를 집어 들었다. 잿더미를 뒤져, 불씨가 살아남은 땔감을 끄집어냈다. 벽에 튀어나온 등잔을 찾았다. 심지에 불을 옮겨붙였다. 등잔불이 거실을 밝혔다. 사과 봉투를 탁자에 올려놓았다.
셈브리온은 소파에 드러누운 채였다. 덩치 탓에 종아리가 팔걸이 밖으로 삐져나왔다. 바닥에 요리책이 널브러졌다. 읽다가 잠이 든 성싶었다. 이에샤는 피곤해서가 아니라 책이 따분해서 꿈나라로 갔을 스승을 깨워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귀찮으니까 그냥 두자.’
사과 덕분에 배고픔은 가셨다. 셈브리온은 날이 저물기 전에 집안일을 끝내고는 했다. 할일은 남지 않았을 터였다. 이에샤는 내버려두기를 골랐다. 저도 잠옷으로 갈아입고 잘 준비를 하기로 했다.
제 방으로 들어섰다. 방 넓이에 알맞은 작은 옷장을 열었다. 튀어나온 돌기마다 원피스가 걸렸다. 셔츠와 바지는 개켜서 바닥에 두었다. 밀레나는 파우더룸에 늘어선 마네킹으로 드레스를 보관하지만, 이에샤는 허름한 옷장만 써 왔다.
흰색 나이트가운을 꺼냈다. 기사단 정복을 벗었다. 방구석에 세워 둔 마네킹에 블라우스와 코트를 입혔다. 이들만은 마구 보관할 수 없어서 마련한 것이었다. 옷을 다 갈아입었다.
거실로 나왔다. 마지막으로 셈브리온이 깼나 확인할 셈이었다. 쪽잠이 이어지면 등이 배기고, 팔다리가 삐그덕거릴 터였다. 브링어라도 도리 없었다. 인사를 못 나누고 침대에 들기도 싫었다.
“세비. 일어나 봐. 나 왔어.”
이에샤는 깨어날 낌새가 보이지 않는 셈브리온의 어깨를 흔들었다.
“……으이샤?”
“그래, 이에샤. 당신 제자.”
셈브리온은 쉬이 눈을 떴다. 불을 밝혔어도 방안은 어슬했다. 셈브리온의 검은 눈동자가 그림자에 녹아들었다. 반사광만이 또렷했다. 이에샤는 팔짱을 꼈다. 한심하다는 얼굴로 셈브리온을 내려다보았다.
“웬일로 그리 곤히 잠들었어? 용병은 잠귀가 밝은 법이라 큰소리칠 땐 언제고.”
“아니, 미트볼 만들기가 생각보다 힘들더라고.”
“미트볼?”
의아하게 되물었다. 셈브리온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고기를 다지고, 당근·양파·아스파라거스·버섯을 썰어서 주무르고, 간한 다음에 동글동글 빚으니 진이 빠졌다. 요리란 힘들었다. 조리하는 과정은 재미있을지 몰라도, 준비와 뒤처리가 끔찍하게 성가셨다.
그런 줄도 모르고 제자는 바보같은 소리를 지껄여 댔다.
“그게 뭐가 힘들어? 그냥 고기를 동그랗게 자른 거 아니야?”
셈브리온은 이에샤와 대련할 날이 오면 지금 느끼는 울분을 쏟아부어 상대해 주리라고 마음먹었다.
“……첫애라 그런지 아빠가 잘못 키워도 한참을 잘못 키웠어요.”
“그야 보통은 여덟 살짜리 계집애 손에 검을 쥐여 주진 않지.”
뚱한 표정을 지었다. 셈브리온이 이에샤에게 검술을 가르쳤던 까닭은 저를 지킬 힘이 필요하다고 여겨서였다―이에샤가 수백에 한 명꼴로 나타날 근골이기도 했다. 검에라도 미치지 않았다면 이에샤는 살지 못했을 것이다. 굶어 죽든, 병에 걸려 죽든, 얼어 죽든, 외로워 죽든.
스승의 깊은 뜻도 모르고 이에샤는 과거를 놀림거리로 삼았다.
“그래서, 싫어? 검술 배우지 말걸 그랬어?”
“그럴 리가 없잖아. 당연히 좋지. 검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내 인생은 암흑 그 자체였을 거야.”
“아니 뭘 또 그렇게까지.”
셈브리온은 픽 웃고 말았다. “끙차.” 하며 자세를 바꾸었다. 바로 앉았다. 이에샤를 올려다보았다. 발아래까지 내려오는 흰 원피스가 빛나는 듯했다.
“들어가 자. 오늘도 고생 많았어.”
“세비는?”
“부엌 마저 치워야 해. 막막해서 미뤄 놓고 딴짓하다가 잠든 거야.”
이에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쌩하니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셈브리온은 쩝, 입맛을 다셨다. 도와주리라는 기대는 하지도 않았다. 하지 않았지만, 얄밉기는 했다. 꼬마 시절에는 셈브리온이 뭔가 하면 딱 달라붙어서 저도 하겠다고 꼼지락거렸는데.
귀여움이 다 얼어죽었다. 그래도 셈브리온은 이에샤가 귀여웠다. 이에샤가 무슨 잘못을 하더라도 받아 줄 수 있을 만큼.
“저거 시집보내고 나면 쓸쓸해서 어쩌나.”
중얼거리며 부엌으로 향했다. 뱃속이 비어 버린 기분이었다.
이에샤가 행복하기만을 빌어 왔다. 귀족 여자의 행복이란 권세 높은 집안에 시집가서 자식을 보고, 다과회나 무도회를 즐기는 생활이 아니던가. 아무것도 모르는 삶. 생각할 필요가 없는 삶. 주어진 길을 걷기만 하면 되는 삶.
……아니, 사실은 달랐다. 이에샤가 검술사로서 이름을 남기기를 누구보다도 바랐다. 셈브리온이 이에샤를 사랑하게 된 이유도 불세출의 재능이었으니까. 하지만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여자는 세상에 기억될 수 없잖아.’
이에샤의 장래만 떠올리면 울적해지는 자신이 황당했다. 진짜 애아빠도 아닌데 말이다. 부엌의 등에 불을 붙였다. 채소와 고기 찌꺼기가 이룬 난장판이 펼쳐졌다. 한숨이 나왔다.
* * *
델피르력 753년 3월 14일. 백화 기사가 세 명이 되는 날이 밝았다.
이에샤는 여느 날보다 이르게 입궁했다. 설레기도 했고, 떨리기도 했다. 백화 평기사 두 사람은 이에샤가 처음으로 공동체를 맺는 이들이었다. 셈브리온만 마주하며 살아온 이에샤였다.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샤는 기본적으로 사람을 싫어했다. 남의 간섭을 견디지 못했다. 작은 일에도 날을 세웠고, 싫은 소리를 들으면 화부터 냈다. 그런 주제에 저는 브링어니까 어디에서나 환영받을 것으로 믿었다.
제국 기사단 입단 시험이 이에샤의 환상을 부쉈다. 세상이 녹록치 않다고 가르쳐 주었다. 엘테르트는 이에샤가 약하다고 말했다. 루시온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흐름을 읽으라 충고하였다. 이에샤도 받아들이기로 했다. 노력하고 싶었으나, 가까이할 사람이 없어 애태우던 차였다.
친하게 지내기를 바랐다. 성깔도 죽여 볼 셈이었다. 아침으로 셈브리온의 미트볼을 잔뜩 먹었으니,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다.
힘차게 사무실의 문고리를 돌렸다. 시더가 양탄자의 먼지를 떼어 내는 중이리라.
“안녕, 시더……!”
이에샤의 허리에 매달렸던 검이 번개 같이 뽑혔다. 쏘아져 오는 단검을 쳐 냈다. 습격자가 움직이려 했다. 이에샤 쪽이 빨랐다. 이에샤는 반쯤 열린 문을 걷어찼다. 안쪽으로 달려들었다. 한쪽 다리를 내밀어, 땅을 지르밟았다. 가로로 크게 베었다. 브링을 쓰지 않고도 매서운 궤적이 블라우스의 자보를 잘라 버렸다.
스란은 뒷걸음질치다가 책상에 걸렸다. 허리가 꺾어졌다. 이에샤는 칼끝을 스란의 목 아슬아슬한 곳까지 들이밀었다.
“무슨 짓인가?”
“읏!”
“하극상으로 처단할 수도 있는 일이다. 알고 벌였겠지?”
스란의 까만 눈에 당혹이 배었다. 이에샤는 스란의 눈동자가, 자신에게는 익숙해도 델페레타에서는 드문 빛깔임을 알아차려렸다. 살벌한 상황에서도 호기심이 피어올랐다. 팔을 내리지 않은 채 물었다.
“경―뭐라 불러야 하는지 모르겠군. 혹시 벨체터에서 왔나?”
“제 출신은 귀족 나리의 귀에 들어가기엔 너무 천해서 밝힐 수 없습니다. 성도 없으니 아무렇게나 불러 주십시오.”
검을 거두어 주었다. 스란이 등허리를 세웠다. 목을 문질러 댔다. 이에샤가 검을 겨누었을 때, 베이지도 않았건만 목이 달아난 것처럼 섬뜩하였다. 황제의 말이 맞았다. 이에샤 앨저는 저보다 강했다. 분했다.
“그럼 스란 경으로. 자, 이제 변명해 봐.”
“……앨저, 경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싶었습니다. 장식으로 검을 차고 다니는 건 아닐까 해서.”
“나는 여덟 살에 목검을 받았고 같은 해에 진검을 잡았다. 대답이 됐나?”
어린아이 적, 셈브리온은 이에샤의 몸에 맞는 짧은 검을 구해 줬었다. 돌이켜보면 오드펠에게 주문 제작한 물건인 듯했다.
스란이 허리를 숙였다. 터번을 두르지 않은 채였다. 포니테일로 묶은 머리카락을 드러냈다. 역시나 머리도 검었다. 기사단 정복에서 코트만 벗었는데, 이에샤와 싸우느라 블라우스가 망가져 버렸다. 스란은 신경쓰지 않고 말했다.
“불경을 저질렀습니다. 처벌은 달게 받겠습니다.”
“뭐, 됐어. 어차피 내가 이겼으니까.”
“큭!”
이에샤는 검을 허리띠로 되돌렸다. 스란이 입술을 깨무는 모습에 기분이 나아졌다.
무엇보다도 스란에게 흥미가 생겼다. 처음의 단검은, 정확하게 이에샤의 정수리를 스치도록 날아왔다. 단검과 아밍 소드를 섞어 쓰는 전투 방식에 관하여 들어 보고 싶었다.
“스란 경? 우리 진득하게 얘기 좀 하지 않겠어?”
말문을 떼며 의자에 앉은 순간이었다.
“느, 느, 늦어서 죄송합니다! 앨저 백작님!”
새된 목소리가 말허리를 잘랐다. 갈색 머리의 소녀가 사무실로 뛰어들어왔다. 미엘라 올센은 17살이라고 들었는데, 동갑인 밀레나와 판달랐다. 밀레나가 날씬하면서도 탄력적인 몸매를 자랑한다면 미엘라는 깡말랐다.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남루한 원피스를 입어서 더 그러했다. 미엘라가 휘청하며 양갈래로 땋아 내린 머리카락이 출렁였다.
"죄, 죄송, 죽을 각오로 뛰었더니!"
낯빛이 새파랬다. 이에샤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세 기사 모두 늦기는커녕 조기 출근을 했다. 미엘라가 쩔쩔매는 까닭을 알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새벽에 나와서 청소를 해 놨어야 했는데! 긴장해서 잠을 설쳤더니 늦잠을 자 버렸습니다!”
“아니, 괜찮아. 청소 같은 건 우리 담당 하녀가 해 줄 거야.”
“예? 하녀요? 제 주제에?!”
이에샤는 이마를 짚었다. 아침인데도 피로가 몰려왔다. 자칭 ‘천한 출신’의 스란과 공주의 하녀였던 미엘라. 새로운 백화 기사들은 기사단의 평판에는 도움되지 않을 성싶었다.
============================ 작품 후기 ============================
캐릭터가 늘었습니다...스란과 셈브리온은 눈동자가 검은색이라는 거 빼면 관련이 없습니다...셈브리온 과거에 얽힌 캐릭터는 아니에요.
미엘라는 이름을 짓고 보니 밀레나와 어감이 비슷해서 (동공지진)했던 그런 아이입니다...
+) 지난편에 나온 셈브리온의 벨체터 시절 애칭이 에브론->이브론으로 수정되었습니다. 벨체터어에 에 발음이 없다는 설정을 작가가 까먹어서 그만...이실직고합니다...
선추코 모두모두 감사합니다!!!
Arensiars 님, aallaa 님 후원 쿠폰 감사합니다!
쪽지를 몇 통 받아서 사족을 덧답니다.
작품 소개글의 '여백작'이라는 단어 선정에 불편을 느끼는 독자님들이 계시는데,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작가는 저 단어가 성차별적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으며 연재를 시작하고 나올 부정적인 의견을 감안하고 골랐습니다.
이에샤가 지닌 모든 약점(용병 손에 자람/여자가 검을 배움/여자가 작위를 계승해 놓고 데릴사위를 들이지 않음)을 소개글에 나열하고, 본문에서 차근차근 다루어 나가고 싶었습니다.
불편한 기분을 안겨 드린 데에는 다시 한 번 죄송합니다. 소개글을 고치는 방향도 생각해 보겠습니다.
+) 추가합니다. 쪽지를 보내주신 분들은 모두 정중하게 질문이나 건의해 주신 분들입니다ㅠㅠ 후기에 적은 까닭은 불편하지만 말하지 못하시는 분들께 제 답을 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코멘트로 비난은 삼가해 주세요. 흑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