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2 6. 폐허에 틔운 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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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란과 미엘라가 들어오고 여섯 날이 지났다.
스란은 이에샤에게 덤벼들지 않았다. 이에샤는 매일같이 대련해 줄 각오를 다졌으나, 잠잠하기만 했다. 스란은 엘테르트가 짜 놓은 일과표를 지켰다. 수련할 시간에는 수련을. 순찰할 시간에는 순찰을. 잡무로 이에샤와 미엘라를 거들기도 했다. 이에샤와의 격차가 뚜렷하니, 당장은 마음을 접은 모양이었다.
뜻밖이었던 점은 또 있었다. 스란은 검술을 닦으면서 즐거워하지 않았다. 이에샤는 연무장으로 나가기 전―옷을 갈아입을 무렵부터 설레했다. 스란도 같을 줄로 알았다. 스란은 이에샤야말로 이상하다는 듯이 말했다.
“앨저 경처럼 수련이라면 항상 좋은 사람이 많겠습니까? 저한테 검술은 먹고살 재주입니다. 필요하니까 갈고닦는 거고, 매일 하다 보면 지치고 질립니다.”
이에샤는 놀랐다. 살면서 알고 지낸 검술사라고는 셈브리온뿐으로, 저 못지않은 ‘검술광’이었기에. 둘에게는 검술만큼 쉬운 공부가 없었다. 검을 잡으면 행복했다.
스란은 천재도 아니고, 검에 미치지도 않았다. 이에샤에게 공감할 수 없었다. 스란의 자존심은 명예욕과 같았다. 많은 사람 가운데 최고가 되고 싶었다. 검의 끝을 보고자 하는 뜻은 없었다. 이에샤에게 검술이 목적이라면 스란에게는 수단이었다.
이에샤는 아쉬움을 느꼈다. 여자 검사를 만나서 반가웠는데, 걷는 길이 동떨어졌다. 그래도 스란은 실력이 좋았다. 이에샤의 공격을 곧잘 피했다. 받아치는 경우도 있었다. 이에샤가 브링을 쓰지 않는다면 스란의 팔심이 셌다. 찌르르한 손목이 호승심을 불러일으켰다. 황제가 장담한 실력자다웠다.
미엘라 쪽은 이에샤의 구세주였다. 엘테르트가 “왜 같은 조목을 자꾸 빼먹습니까?” 하고 야단치던 활동 보고서의 구멍이 사라졌다. 미엘라의 사무 능력은 물샐틈없었다.
가르치는 일에도 능했다. 미엘라는 끈기 있는 선생이었다. 이에샤가 어디에서 실수했는지, 찾아낼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엘테르트도 설명은 잘했다. 범인(凡人)의 머리를 헤아리지 못했을 뿐. 자질구레한 부분은 완벽하리라 믿고 넘어갔다가, 다음날 ‘사람이 어떻게 이런 걸 틀리느냐?’ 하는 눈빛을 보내 왔다.
백화 기사와 제국 기사는 동등했다. 스란과 미엘라도 준귀족으로 뛰어오른 셈이었다. 그런데도 미엘라는 시더와 터놓고 지냈다. 시더는 미엘라의 손재주가 꽝이라며 깔깔거렸고, 미엘라는 너스레를 떨었다. 내가 바로 서향궁의 문제아였거든!
이에샤는 흡족했다. 첫날의 걱정이 계면할 정도였다. 동성 또래라고는―말을 빙빙 돌리고 꼬는데 천부적인―밀레나와 이에샤를 무시하는 하녀 몇 사람만 보아 왔기에, 석곡궁 여자들이 마음에 들었다. 순식간에 엿새가 지나갔다.
……일요일. 달갑지 않은 아침이 밝았다. 벨제아 백작 부인의 티 파티 날이었다. 이에샤는 심사가 꼬였다. 쉬는 날에 셈브리온과 놀지도 못하고, 귀부인들의 구경거리가 되어야 한다니! 세상이 우중충하게 보였다.
옷차림도 마뜩잖았다. 기사단 정복을 차려입자니 께름했다. 무도회처럼 벅적한 곳이라면 모를까, 코앞에서 눈총을 받기는 싫었다. 발까지 덮는 베이지색 원피스가 좋을 성싶었다.
헝겊오라기로 가슴 밑을 동여맸다. 이에샤에게는 코르셋이 없었다. 원피스에 몸을 꿰었다. 앞 단추를 채워 올렸다. 오래간만이라서 낯설었다.
‘그 부인, 진짜 돈 많구나.’
벨제아 백작저는 으리으리했다. 알디온이 작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이에샤는 삯마차에서 내리자마자 기가 질렸다.
약속한 시간보다 일렀다. 벌써 사람이 나온 채였다. 머릿수건을 두른 하녀가 허리를 수그렸다. 이에샤의 귀족답지 못한 차림새에도 주춤하지 않았다. 치마폭 좁은 하녀복이 엄격해 보였다. 이에샤는 어색하게 고갯짓했다. 겉옷이 있었다면 건네주며 인사했을 텐데, 맨몸으로 와 버렸다. 봄이 원망스러웠다.
벨제아 백작은 부유했다. 숲과 광산을 여럿 가졌다. 다른 대륙과 무역하는 상단도 거느렸다. 라제카는 ‘세금도 잘 내는 모범적인 갑부’라고 설명했다. 이에샤는 ‘탈세하지 않고도 돈이 썩어나는 진짜배기 부자’로 받아들였다.
끝이 보이지 않는 정원을 가로지르던 참이었다. 위화감이 피어올랐다. 무엇이 이상한지 찾고자 눈을 두리번거렸다.
‘아, 마차.’
작은 모임이라도 손님 서넛은 불렀을 터였다. 귀족가의 안주인이 타고 다닐 법한 마차가 한 대도 없었다. 이에샤가 알디온의 이름을 쓸 적에, 에이릴리가 다과회를 여는 날이면 온 정원이 부산스러웠다. 오가는 고용인이 많았었다. 벨제아 백작가는 고요하기만 했다.
대리석 계단을 올라갔다. 현관이 나타났다. 말비다가 꼿꼿한 자세로 기다렸다. 이에샤를 보고 미간을 좁혔다. 이에샤는 찔끔했으나, 말비다는 만족스러웠다. 말괄량이 앨저 경이 드레스를 갖추리라고는 기대하지도 않았다. ‘여인의 차림’을 하고 왔으니 되었다.
“벨제아에서 앨저를 환영합니다. 어서 오십시오. 오늘따라 차림새가 소곳하니 보기 좋군요, 경.”
“안녕하십니까, 부인. 감사합니다. 으음,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에샤는 감사의 말만 되풀이했다. 대화를 잇기가 어려웠다. 침묵이 내려앉았다. 망설이다가 말머리를 꺼내기로 했다. 궁금한 점을 물어보았다.
“다른 부인들은 어디에 계시나요?”
“…….”
“파티는 어디에서 벌어지는지요?”
“사죄드립니다, 앨저 경. 티 파티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뜻 모를 대답이 돌아왔다. 이에샤의 눈이 동그래졌다. 예? 멍청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말비다가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이에샤는 얼떨떨한 채 저택에 들어섰다.
말비다의 낯빛이 무거웠다. 눈썹이 치솟는 일은 많았어도, 처진 모습은 처음 보았다. 버슬로 부풀린 드레스의 꽁무니를 뒤쫓았다. 말비다는 체면도 불고하고 몸소 이에샤를 이끌었다.
“제 위치가 그렇습니다. 황실에 이바지하는 기사에게 사사로운 청을 넣는다면 벨제아의 적들이 꼬투리를 잡을 겁니다. 황권을 무시했다든가, 갖다붙일 말은 얼마든지 있지요. 결과적으로는 공주님과 황후 마마께도 누가 됩니다. 사교 모임에 초대하는 형식으로 경을 모셔야만 했습니다.”
말비다는 백화 기사의 얼굴을 세워 주었다. 여자가 사내의 영역을 넘보아서는 안 된다고 여겼으나, 드러내 놓고 깔아뭉개려 하지는 않았다. 점잖게 타협하고 절제하였다. 귀부인이라는 낱말에 걸맞았다.
“앨저 경에게 꼭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씀하시죠. 제 능력이 닿는 한 힘을 빌려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말비다의 걸음이 멎었다. 커다란 방문 앞에서였다. 멀구슬나무로 짠 문짝에 꽃가지를 문 비둘기가 음각되었다. 목털에만 하얗게 칠감을 먹였다. 벨제아의 문장―방 주인이 벨제아 가문의 일원이라는 뜻이었다.
“제 청은 앨저 경께서, 누군가의 마지막 이야기를 들어 주는 것입니다.”
말비다는 노크하지 않고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이에샤는 한 발자국 물러섰다.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진통제 냄새가 풍겨 나왔다.
창가에 침대가 놓였다. 반투명한 캐노피 너머로 쪼그라진 팔이 보였다. 협탁에 자질구레한 구급품이 올라갔다. 약그릇, 구역질을 받아 내는 용도로 보이는 무명천, 물이 담긴 대야와 수건…….
병상에 누운 노부인이 말비다와 이에샤를 돌아보았다.
“아가.”
“어머님, 오늘 기분이 괜찮으신지요? 얼굴에 핏기가 도십니다.”
“어제보다 숨쉬기가 편하구나. 어머나, 말리. 같이 온 아가씨는 누구니?”
“앨저 경입니다. 일전에 어머님이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지요.”
벨제아 백작가의 마님과 노마님이 주거니 받거니 했다. 이에샤는 씁쓸한 심정이 되었다. 방안에 익숙한 공기가 감돌았으므로.
에이릴리가 눈감았던 옛 앨저 저택의 침실을 기억하게 하는 공기였다.
“한 시간 뒤에 들어오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말비다는 빠져나갔다. 이에샤는 보석이 박힌 의자에 앉았다. 선대 벨제아 백작 부인을 지켜보았다. 헤리카 벨제아는 서글서글한 노파였다. 말비다에게 하던 것처럼 이에샤 또한 “아가.” 하고 불렀다.
이에샤는 입을 열지 못했다. 이야기를 들어 달라고 해서 왔지, 들려줄 깜냥은 없었다. 죽음을 앞둔 노인을 상대로는 더더욱.
“내 눈감기 전에 아가를 꼭 만나 보고 싶었단다. 말리는, 며느리는 말이야. 할머니인 나보다도 꽉 막혀서 이런 일을 해 주기가 쉽지 않았을 거야. 죽을 날을 받아 놓고 다른 집안 사람과 만나면 두 집안 다 화를 입는다잖니.”
“맞아요, 그런 얘기가 있었죠. 저희 어머니도 돌아가시기 며칠 전부터 제 스승님한테 방에 들어오면 안 된다 하셨어요.”
“저런. 어머니가 벌써 떠났어?”
헤리카는 에이릴리가 소지품을 깜빡하고 나들이라도 간 양 말했다. 이에샤는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어머니의 죽음이란 낡은 이야깃거리였다. 웃기도 무엇하고 슬퍼하기도 무엇했다.
“그거 아니, 얘야. 우리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는 걸.”
“죄송하지만 잘 모르겠어요. 벨제아 부인께서 미련한 저에게 답을 일러 주시면 안 될까요?”
능청스러운 대꾸에 헤리카가 키드득거렸다. 혀뿌리에서 맴돌던 웃음은 입술을 비집으며, 신음으로 바뀌었다. 젖은기침이 잇따랐다. 이에샤는 놀라서 설렁줄을 찾았다. 헤리카가 손사래 쳤다.
“괜찮다, 괜찮아. 그래, 아가. 무슨 얘기를 했더라? 맞아, 우리 공통점을 찾고 있었지.”
올리브색 눈동자에 이에샤가 비쳤다. 싱그러웠던 시절에는 초록색이었으리라.
“나는 기사란다.”
“네?”
이에샤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헤리카는 여윈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렸다. 말하기가 벅찼다. 시야가 가물가물했다. 뒤끓는 목소리로 이어 나갔다.
“왜, 남편이 공을 세우면 아내한테도 경(dame)이란 칭호를 내리지 않니? 이 여인은 남편이 마음 놓고 바깥일을 할 수 있도록 이만큼 잘 내조해 줬습니다, 하고. 나는 시집오자마자 작위를 받았어. 남편의 영지에서 은광이 발견되었거든.”
“아, 그래서 벨제아 가문이…….”
“그래. 벨제아는 내 대에서 부흥했단다. 아들이 돈 모으는 법을 몰랐다면 이만큼 풍족해지지 못했겠지만.”
헤리카의 머릿속에서 지나간 일들이 되살아났다. 평범했던 결혼식. 직전까지 벌벌 떨었지만 시작하니 수월했던 분만. 귀여운 소녀가 며느리로 들어왔던 날.
나이든 목소리가 세월을 거스르는 물고기처럼 벌떡거렸다.
“기사 작위를 받았을 때, 일어서서 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단다.”
이에샤는 잠자코 귀를 기울였다. 헤리카의 이야기를 끊고 싶지 않았다. 비로소 제가 불려온 까닭이 짐작되었다. 황혼, 그중에서도 끝자락에서, 기사 작위를 가진 노부인은 궁금했던 것이다. ‘실질적인’ 제국 최초의 여자 기사가 어떠한지.
“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손에 들어온 명예가 일깨워 줬지. 엘론드 자작가의 외동딸은 더는 없고, 태어나지도 않은 벨제아에 종속된 여자만이 있다고. 모르지는 않았어. 우리 같은 사람들이 평생을 배우는 게 그거잖니, 계집은 사내에게 순종하고.”
이에샤는 남자 앞에서 자신을 굽히는 방법 따위 몰랐다. 오스터의 두 딸 중 그러한 공부를 배운 쪽은 밀레나뿐이었다.
에이릴리는 딸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스승을 만들어 주었다. 셈브리온은 제자에게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쳤다. 누구도 이에샤가 이성을 의지해야만 한다고 정해 버리지 않았다. 뭇 귀족 여자와는 달랐다.
하지만 “저는 부인이 말씀하신 ‘우리 같은 사람들’에 들지 않아요.” 하고 대답할 수는 없었다. 헤리카의 눈시울이 젖어들었다.
“하지만 그때 처음으로 생생히 느낀 거야. 나라는 사람의 주인이 내가 아니고 남편이라고.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남편이 잘하면 칭찬받고 못하면 욕먹고, 그럴 팔자라고.”
============================ 작품 후기 ============================
1화에서 '현숙한 귀부인에게 기사 작위를 내려 치하하는 경우가 있다'라고 스치듯 언급했었죠...
이번 챕터는 셈브리온의 과거와 얽힌 챕터이기도 하지만, 셈브리온은 조연이지 주인공이 아니므로 이에샤는 이에샤대로 자기 이야기를 진행해 나갈 거예요...
선추코 감사합니다!!!
+)
6화의 한 장면이 지속적으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거 같아 해명합니다.
~ '치마를 입었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윗몸을 조이는 보디스 탓일까? 다른 날보다 가슴과 허리가 두드러졌다. ~
이 부분은 엘테르트가 이에샤의 몸매를 훑어본 것이 아니고, 헐렁한 셔츠를 입을 땐 안 보이던 몸선이 딱 붙는 보디스를 착용하니까 드러났다는 작가 시점의 묘사입니다. 에르디는 아 저 여자가 치마도 입는구나 정도의 생각밖에는 하지 않았습니다. 후에 명확하게 전달되도록 문장을 고치겠습니다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