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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수는 검 한 자루-43화 (43/164)

00043 6. 폐허에 틔운 싹 =========================

속이 미어졌다. 가슴에 쇳덩어리를 올린 것만 같았다. 이곳의 분위기는 깔깔한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이에샤는 잦아들어 가던 에이릴리의 말소리를 떠올렸다. 첫새벽에 어린 딸과 용병 사내를 침실로 불러 남겼던 한 마디.

「고맙소, 데힐 씨.」

그리고는 들숨을 멈추었었다. 에이릴리는 자신이 죽을 때를 내다보았다. 고르고 고른 유언은 셈브리온을 향한 것이었다. 이에샤는 망연자실했다. 원망스럽기도 했다. 왜 저에게는 작별의 말을 고하지 않고 갔는가.

비로소 헤아릴 수 있었다.

에이릴리는 귀족이었다. 귀족 사회를 속속들이 꿰었다. 피붙이라고는 아버지밖에 없는 이에샤가 어디로 갈지 알았다. 이에샤가 셈브리온에게 매달릴 줄도 예상하였다. 오스터는 이에샤를 돌보지 않을 남자였다. 결과적으로 용병의 손에 자란 앨저 백작이, 누구와도 결혼하지 못하리라 계산했다.

혼삿길을 막는 것만이 에이릴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보호였다. 딸만은 남편에게 저당잡히지 않는 삶을 살도록. 셈브리온의 낮은 지체를 도리어 이용한 셈이었다.

헤리카 벨제아는 에이릴리와 같았다. 불행하지도 고달프지도 않았지만, 남에게 운명을 좌지우지되는 처지였다. 평범하고 흔한 이야기가 아닌가. 지독하게도.

“남편을 원망하지는 않았어. 아니, 원망하지 않게 됐지. 시간이 지나면 감정도 흐려지고 정도 들게 마련이니까…….”

헤리카는 선대 벨제아 백작을 사랑했다. 연모는 아니었다. 하지만 가족으로 받아들였다. 좋은 남편이었다. 바깥으로 도는 일도 없었고, 안살림에 참견하지도 않았다. 아들도 훌륭했다. 황후의 시녀라는 일등 신붓감을 얻었으니.

“모자람이라고는 없는 행복한 인생이었단다.”

황혼의 세계에서 남편을 만나면 자랑할 수 있었다. 내가 홀몸으로도 벨제아를 잘 돌보았노라고.

“그래도 기사 작위를 받은 날의 충격이 조그만 응어리로 남아서, 살날이 줄어들수록 가슴을 찌르는 거야. 나는 황궁에서 여자애들이 꼬물꼬물 기사단을 꾸렸다고 하자 참을 수 없이 궁금해졌단다.”

이에샤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헤리카의 손을 잡았다. 차가웠다. 우그러진 살갗에 검버섯이 피었다. 헤리카는 소리마디를 뱉을 때마다 괴로워했다. 이에샤는 조급해졌다. 말려야지 않을까 하는 걱정과 참고 들어야 한다는 마음이 부딪쳤다.

“아가.”

눈주름에 눈물이 괴었다. 회한으로 이루어진 웅덩이였다. 이에샤가 쥐어짜낸 목소리로 “말씀하세요.” 하고 북돋워 주었다.

“너는 네 힘으로 기사가 되었을 때 어떤 기분이었니? 햇빛 같았니. 바람 같았니. 아니면 우리가 일말의 공통점이라도 있어서 벼락을 맞는 것 같았을까?”

황태자가 칙령을 들고 온 날을 돌이켜보았다.

달거리 탓으로 피곤했었다. 설명을 들으면서도 ‘천을 갈아야 하는데.’ 하는 걱정에 시달렸다. 피가 비치기라도 할까 봐 곤두섰다. 와중에도 루시온에게 화를 터뜨렸던 일은 기억났다. 작위를 받는 순간에는 어땠더라? 화장실에서 월경대를 갈며, 무슨 생각을 했지? 이에샤는 고민했다.

“저는,”

떠오른 답을 헤리카가 마음에 들어 할지 자신이 없었다.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저는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제가 마땅히 받아야 할 걸 받았다고만 생각했어요. 기사 작위요.”

“그래?”

“네.”

헤리카는 눈꺼풀을 붙였다. 납작하게 마른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했다. 지쳤다. 이토록 대화를 나누기는 오래간만이었다. 한계가 찾아왔다.

그런데도 편안했다. 이에샤의 이야기는 세상에 대한 불만으로 얼룩진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다.

“그랬구나. 아가는 기뻤구나.”

“예?”

“그것참, 듣는 내가 다 좋구나…….”

노부인은 남편과 집안에 매여 살았을지언정 지혜로웠다. 서투른 기사 아가씨가 느꼈던 바를 꿰뚫어보았다. 헤리카가 색색대며 입속말했다.

“너를 보니까, 이다음에도 여자로 태어나도 괜찮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에샤는 헤리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무슨 꿈을 꾸는지 입꼬리가 올라간 채였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밀고 나갔다. 줄곧 말비다가 서성이는 기척이 들려왔다. 우아하고 빈틈없는 귀부인답지 않았다. 이에샤는 처음으로 말비다에게 친밀감을 느꼈다. 말비다가 “핫.” 하며 이에샤에게 다가들었다.

“어머님은요?”

“잠드셨어요.”

“그, 그렇군요. 저도 슬슬 끝날 때 같아서 찾아온 거였습니다.”

이에샤는 실웃음을 흘렸다. 거짓말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입 밖으로 낼 용기는 없었지만 말이다. 말비다는 딱딱한 몸가짐을 꾸며 냈다.

양손을 배꼽노리에 얹고 이에샤를 올려다보았다.

“앨저 경.”

“예?”

“저는 여전히 사내의 영역과 여인의 영역이 구분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에샤는 눈을 끔뻑했다. 갑작스러워서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말비다의 입이 열리기만 기다렸다.

“성서에도 최초의 여자는 세계의 왕을 보필하기 위한 왕비로 신께서 빚으셨다고 나오지 않습니까.”

말비다는 고리타분한 소리를 늘어놓았다. 이에샤는 억울해졌다. 부탁을 들어주고도 야단맞다니! 하지만 말비다는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단지 저는 낯선 곳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을 때, 잘 대해 주신 어머님을 여한 없이 보내드리고 싶었습니다. 제 가치관보다 어머님이 소중했습니다.”

“……대부인께서도 기뻐하실 거예요.”

“오늘 벨제아의 초대에 응해 주신 앨저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경의 앞날에 무궁한 행운이 있기를.”

말비다의 머리가 숙어졌다. 받아 본 적 없는 극진한 인사에 이에샤는 뺨을 붉혔다.

말비다는 헤리카를 간병하느라 정신없어 보였다. 이에샤에게 차를 대접하겠다 하였으나, 조바심을 감추지 못했다. 이에샤는 고소하며 사양했다. 하녀의 안내를 받아 백작저에서 나왔다. 집사가 삯마차를 불러 주었다. 평상시에 타는 것보다 번듯한 사륜마차였다.

피올라 거리는 좁았다. 커다란 마차로는 빠듯했다. 이에샤는 거리 어귀에서 내려섰다. 해가 뉘엿뉘엿하는 무렵이었다. 짧은 그림자가 너울거렸다. 어린아이처럼 제 그림자로부터 떨어져 보겠다고, 발장난을 치며 걸었다.

셈브리온이 마음에 걸렸다. 일주일에 한 번뿐인 휴일인데 혼자 두다니. 셈브리온은 “나가서 친구도 좀 만나고 그래!” 하고 투덜댔지만, 셈브리온만이 이에샤의 친구이자 가족이었다. 기사가 되고 인연은 제법 생겼다. 하나 이에샤는 그들을 자기 울타리 안의 사람으로 치지 않았다.

집에 다다랐다. 세 칸짜리 돌계단을 올랐다. 현관문 앞에 섰다. 안쪽에서 흐릿한 기척이 느껴졌다. 셈브리온이 거실에 있는 모양이었다. 셈브리온도 제가 왔음을 알아차렸으리라.

현관은 잠기지 않았다. 문고리를 비틀었다. 집 안으로 들어선 순간이었다.

“어……?”

머리보다 몸이 빨랐다. 이에샤는 침입자를 피해 옆으로 한 바퀴 굴렀다. 낯선 사내가 달려들었다. 몸은 호리호리한데, 기세로 미루어 힘은 장사였다. 끝으로 갈수록 휘어지는 검을 들었다.

사내가 앞쪽을 베며 돌진해 왔다. 이에샤는 요즘 들어 습격을 자주 당한다고 생각하며, 오른쪽으로 달아났다. 자신의 방이 가까웠다.

“쯧!”

혀끝을 찼다. 원피스에 검을 찰 수는 없어, 맨몸으로 나간 일이 후회되었다. 침입자가 들리라고 예상이나 했겠는가? 사내는 아무리 봐도 좀도둑 따위가 아니었다.

다리에 브링을 돌렸다. 방문을 걷어찼다. 문짝이 경첩 채로 떨어져 나갔다. 셈브리온이 마련한 집에 상처를 입히다니! 아까워서 죽을 것 같았다. 저놈을 가만두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백화 기사단 정복을 입은 마네킹 허리에 검은색 롱소드가 걸렸다. 이에샤는 그것을 잡아 뜯었다. 그사이에도 공격이 들어왔다. 허리를 비틀어 피했다. 사내의 검을 받아쳐 냈다. 사내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내가 검을 잡은 이상,”

이에샤는 반 발짝 물렀다가, 반동으로 튀어 나갔다. 왼 어깨로 사내의 오른쪽 어깨를 밀치며 파고들었다. 폼멜로 아래턱을 올려 쳤다.

“넌 죽었어!”

칼등으로 손목을 후려갈겼다. 사내가 검을 놓쳤다. 떨어진 칼끝이 바닥을 긁어 놓았다. 이에샤는 더욱 노여워했다. 맨손이 되어서 비틀거리는 사내를 내차려 했다. 여기서 죽일 생각은 없었다. 집은 소중하니까.

사내가 입꼬리를 씨익 끌어올렸다. 이에샤의 다리를 붙들었다. 비틀거리는 모습은 연기였던 모양이었다. 그대로 이에샤를 끌어당겼다. 바닥에 내리꽂아 버렸다. 이에샤는 뒤통수를 나무 바닥에 부딪쳤다.

“윽!”

“설마 이렇게 잘 싸우는 아가씨일 줄은 몰랐지만…….”

사내가 중얼거렸다. 이에샤의 귀에는 서먹서먹한 언어가 흘러나왔다.

“상대가 나빴어.”

이에샤는 눈을 부릅떴다. 우악스러운 양손이 목을 움켜쥐었다. 엄지가 기관을 눌렀다. 입술 틈으로 쇳소리 같은 것이 새었다.

“고운 것만 보고 자란 제국 여자가 벨체터에서 굴러먹던 천뜨기를 이기려 들면 쓰나.”

“윽, 읍! 으읍!”

“혹덩이는 정리해 두는 편이 이브론한테도 좋겠지.”

안간힘을 끌어올렸다. 몸을 버둥거렸다. 조금씩 팔다리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코가 맵고, 시야는 뭉그러졌다. 두려웠다. 브링을 얻은 뒤 처음으로 공포를 느꼈다. 죽고 싶지 않았다.

‘젠장! 망할! 개자식! 기사가 된 지 이제 겨우 석 달인데!’

속으로 악다구니를 써 댔다. 생리적인 눈물이 넘쳐흘렀을 때였다. 바람이 불어온 듯했다.

방밖에서 매서운 서슬이 느껴졌다. 이에샤는 서둘러 몸을 웅크렸다. 시뻘건 빛줄기가 뚫린 문을 통하여 밀어닥쳤다. 빛깔은 달랐지만 친숙한 모양새였다. 브링의 폭풍에 사내가 밀려났다. 이에샤는 허겁지겁 숨을 들이마셨다. 공기가 차오르자 가슴이 뻐근해졌다.

“어떤 놈이.”

셈브리온이 한 손으로 검을 늘어뜨리고 걸어 들어왔다. 반대쪽 손목에는 시장바구니가 걸렸다.

“어떤 놈이 내 제자를 건드려.”

============================ 작품 후기 ============================

셈브리온 이야기가 궤도에 접어들었네요.

이에샤가 당한 건 상대를 몸 성하게 제압하려 했기 때문입니다(+약간의 방심)...죽일 각오...아니 칼로 찌를 각오로만 싸워도 필승...

현재 브링어는 대륙에 약 50명쯤 되고, 실력대로 줄을 세운다면 셈브리온은 다섯 손가락 안에 듭니다. 이에샤는 아직은 중위권...재능은 따를 자가 없지만요.

선추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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