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7 6. 폐허에 틔운 싹 =========================
생각해 보면 많이도 달라졌다.
한동안은 여자를 희롱하는 남자가 보이면, 플뢰레 쥐는 법도 모르는 문관에게까지 결투를 걸어 댔다. 엘테르트가 말로 타이르라고 주의시켜도 듣지 않았다. 백화 기사에게는 여인을 지켜야 한다는 명분이 있었다. 그를 위하여 검을 뽑아도 막을 수 없었다. 엘테르트는 발만 동동 구르며 이에샤에게 ‘원만한 해결’을 가르쳐야 했다.
이에샤의 주장도 틀리지는 않았다. 해로운 남자를 벌하지 않고 넘어간다면 남자를 지키는 길이지, 여자를 지키는 길이겠느냐. 엘테르트도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며칠을 고심한 끝에 타협점을 내놓았다. 백화 기사단장에게 평기사와 하급 관리의 봉급을 깎게끔 권한을 준 것이었다.
그때부터 이에샤가 검을 뽑는 일이 줄어들었다. 대신 한 달치 봉급을 제하기 시작했다. 반발이 거셌지만 엘테르트는 “책잡힐 짓을 하지 않으면 된다.” 하고 물리쳐 버렸다. 이에샤가 감봉권을 휘두르고 다닐까 걱정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의료원이 백화 기사단장에게 얻어터진 남자로 들끓는 현상부터 잡아야만 했다.
다행히 이에샤는 나서서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았다. 남자든 여자든, 사람과 얽히기 자체를 싫어하는 모양이었다. 황궁이 잠잠하다면 이에샤도 얌전했다.
엘테르트는 감개무량해졌다. 아집으로 뭉친 남자 기사보다 이에샤 쪽이 말이 통했다. 브링어라는 점이 엘테르트를 움찔하게 했지만, 이에샤는 괜찮은 ‘대화 상대’였다. 친밀감이 솟아났다.
“왜 사람 얼굴을 빤히 보세요? 실례입니다, 멘델린 경.”
“아, 미안합니다. 앨저 경이 어느덧 기사단장으로 자리잡았다니 훌륭해서 그랬습니다.”
“아침에 뭐 잘못 드셨나요? 안 하던 칭찬을 하시고.”
엘테르트는 한 손으로 목덜미를 잡았다. 열없었다. 이에샤의 변화는 가랑비에 옷 젖는 듯했다. 그동안 눈치채지 못했던 만큼, 본인도 모를 터였다.
“상한 걸 먹거나 하지는 않았으니 그리 수상하게 보지 마십시오. 아! 이렇게 하면 어떻습니까?”
“……?”
“사냥 대회에서 앨저 경이 싸움질을 벌이지 않고 넘어간다면 제가 선물을 드리겠습니다. 남에게는 비밀로 해야겠지만.”
이에샤는 고개를 기울였다. 선물이라니 갑작스러웠다. 호기심이 피어올랐다. 엘테르트가 줄 만한 물건이 짚이지 않았다. 편지조차 받은 적이 드물어, 헤아리기 어려웠다. 셈브리온처럼 검을 만들어 줄 리야 없을 터였다.
엘테르트가 윗몸을 내밀었다. 팔을 뻗었다. 이에샤의 목께로 손을 가져갔다. 손가락 끝이 스카프 자락과 스쳤다. 살갗이 닿지는 않을 만큼 모호한 거리였다.
“어머님의 유품이다 보니 젊은 여인에게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보르 센트라의 스카프를 준비할 테니, 노력해 보시겠습니까?”
“센트라? 디자이너 센트라?”
이에샤도 들어 본 이름이 나왔다. 황궁에서 일하다가 은퇴한 디자이너였다. 황실 전속으로 뽑히기 전에는 수도 공업 지대의 패션가에서 커다란 의상실을 경영했었다. 지금은 몇몇 대귀족밖에 상대하지 않았지만, 이에샤로서는 알 도리 없었다.
“백화 기사단의 코트에 어울리는 모양으로 주문해 놓겠습니다.”
엘테르트가 팔을 거두어들였다. 이에샤는 간질간질한 기분이 되었다. 이상했다. 엘테르트가 재수없게 굴어도 싫었지만, 친절하게 대해 오면 그것대로 불편했다.
“좋, 아요. 한 번 해 보죠. 그 내기.”
“내기라…….”
엘테르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선물을 상품으로 받아들이다니. 어처구니없었다.
사실, 이에샤가 사냥 대회를 넘기지 못하더라도 스카프는 주고 싶었다. 낡은 스카프는 정말이지 어울리지 않았다. 이에샤는 반반한 생김새 중에서도 깎아지른 콧날과 곧은 목이 아름다웠다. 거기에 하잘것없는 장신구를 다는 건 아깝게 느껴졌다.
“전할 말은 다 전했군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들어가세요, 멘델린 경.”
엘테르트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에샤는 앉은 채로 인사했다.
미엘라는 멍하니 떠올렸다. 저 사람들, 괜찮은가? 평민 출신인 미엘라도 멘델린의 위명을 알았다. 엘테르트 멘델린이 얼마나 많은 아가씨의 마음을 녹였는지도. 엘테르트와 이에샤는 도저히 걸맞지 않은 한 쌍이었다. 미엘라는 이에샤가 입방아에 오르내릴라, 둘이 아무런 사이도 아니기를 바랐다.
밀레나 알디온은 아름답고 정숙했다.
봄이면 모임이 늘었다. 알디온 후작 저택에는 하루에도 서너 통씩 초대장이 날아들었다. 밀레나는 부모의 평판에도 불구하고, 사교계의 내로라하는 아가씨였다. 멘델린 소공작조차 밀레나를 어여뻐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쟁쟁한 집안의 부인이나 딸도 밀레나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오늘은 발레오스 후작 부인의 살롱이 있었다. 발레오스 후작은 마법사였다. 농업 마법의 권위자로, 황실 마법부에 들었다. 온습도를 조절할 수 있는 아티팩트 건물 ‘마법의 온실’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후작 부인은 온실을 희귀한 꽃으로 채웠다. 사람을 모아서 다과회를 벌이고는 했다.
발레오스 후작은 쉰에 접어들었다. 후작 부인은 스물여덟 살이었다. 그녀는 귀부인보다 귀공녀 무리에 끼고 싶어 했다. 남편의 명성을 내세우면서 나이는 숨겼고, 결혼으로 얻은 안정감을 자랑했지만 불확실한 미래를 부러워했다. 밀레나 같은 소녀를 시샘하면서도 곁에 두고자 했다.
밀레나는 살롱을 연 발레오스 부인 옆자리에 앉았다. 도자기 잔에 화차가 담겼다.
“알디온 양이 사냥 대회를 구경하러 간다고요?”
“네. 저는 작년 대회가 끝나고 데뷔했으니까 그동안 기회가 없었거든요. 꼭 한 번 보고 싶었어요.”
“아예 참가자로 나가 보는 게 어때요?”
피라 엘던 백작 영애가 까르륵했다.
아버지가 사냥을 좋아하면 딸에게 가르치기도 했다. 사냥꾼 하인을 거느리고―덫을 놓거나 몰이하는 일을 시켰다―사람이 손질한 사냥터에 다니는 식이었다. 사냥 취미를 가진 여자는 왈가닥으로 통했지만, 태황태후부터가 명사수였다. 업신여기기 힘들었다. 사냥 대회도 여자의 참가를 막지 않았다.
영춘 사냥 대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밀레나는 활 가까이 가 본 적도 없었다.
“농담도, 피라. 사냥꾼 아가씨라면 1월부터 이번 대회를 준비했을 거야. 바지런히 활시위에 기름을 먹이고 화살촉을 갈려면 얼마나 힘들었겠어? 재미로 나가느니 마느니 하면 실례잖아.”
밀레나의 답에는 뼈가 있었다. ‘나는 험한 일 따위 하지 않는 숙녀다.’ 하는 뜻이 담겼다. 피라는 말을 잊었다. 차로 입술만 축였다. 발레오스 부인이 손수건을 들고 키득거렸다.
“알디온 양이 들어도 괜찮은 날붙이는 바늘과 꽃가위뿐이지요. 고운 손에 옹이라도 생기면 큰일이잖아요. 어쩜, 저만치 하얀 피부는 여름에도 그을지 않죠.”
“햇볕이 강한 날에는 따갑게 붓기도 해요. 어디에나 장단점이 있지 않겠어요, 부인.”
“난 여름만 되면 얼굴이며 손이며 까맣게 타 버린답니다. 알디온 양은 행복한 고민을 하는군요.”
밀레나는 미소만 띠었다. 이야기를 더했다가는 잘난 척으로 몰릴지도 몰랐다. 여기에 있는 여인들은 크든 작든 밀레나에게 질투심을 품었다. 틈을 보이면 위험했다.
“사냥 대회에는 누구를 보러 가려는 걸까요? 엘테르트 님은 한 번도 사냥에 참가한 적이 없으시다 들었는데요.”
“낮게 나는 독수리께서는 늘 천막에서 구경만 하시죠. 활을 들어도 아름다우실 텐데요. 알디온 양에게 멘델린 소공작 말고도 응원할 분이 계시는 게 아닐까요?”
“아뇨.”
담담하게 부정했다. 밀레나에게는 어떤 남자의 호의도 시원찮았다. 사냥 대회까지 쫓아가서 짐승을 잡아올 때마다 박수하고, 웃고, 손수건으로 땀을 닦아 줄 남자 따위 있을 턱이 없었다. 엘테르트가 참가한다면 모를까.
밀레나는 찻물을 두어 모금 들이마셨다. 새파란 눈동자에 웃음기가 깃들었다. 여자라도 홀릴 만큼 아리따운 낯꽃에 발레오스 부인과 피라는 넋을 잃었다.
“다른 날도 아니고 영춘 사냥 대회잖아요. 그곳에서 아녀자가 할 일은 사내를 응원하는 게 아니라 황후 마마의 기도에 정성을 보태는 거죠.”
“그, 그건 그렇지만.”
“제 이복언니가 황후 마마와 공주님을 지킨다 하더랍니다. 언니가 황실에 이바지하는데 어찌 저 혼자 집에서 쉬겠어요?”
고요가 내려앉았다. 어색한 눈길이 오갔다. 살롱 참가자 중에 이에샤 앨저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요즈음 밀레나 알디온을 넘어서는 화젯거리가 아닌가?
밀레나를 꺼리는 무리가 있었다. 젊은이는 자태에 사로잡혔으나, 나이든 귀족은 뿌리에 연연했다. 어느 노부인은 "태생이 불온하니 꾸며도 땟국이 빠지지 않는다." 하고 헐뜯기도 했다. 밀레나는 피나게 애썼다. 부모가 저지른 잘못을 자신의 미덕으로 덮었다. 모두가 최고의 숙녀라고 칭찬할 때까지.
그러자 이에샤가 황실의 기사가 되었다. 정갈하지 못한 몸가짐을 보여 댔다. 밀레나까지 쑥덕질에 휘말렸다. 엘테르트의 무도회 파트너가 되어 입지를 다지려 했지만, 또 이에샤가 훼방을 놓았다. 이복동생의 파트너를 잡아끌고 가 버리다니! 그 천방지축인 여자는 밀레나의 걸림돌이었다.
“세상에 둘뿐인 자매인걸요.”
“하지만 알디온 양…….”
“언니가 여러 황족 분들 앞에서 긴장해서 실수하지 않을까 걱정도 되고요.”
밀레나는 잔잔히 웃기만 했다.
“세비, 이거 어떡해?”
초저녁밖에 되지 않았다. 이에샤는 퇴궐했다. 목이 갑갑했다. 스카프를 풀어 버리고 싶었다. 셈브리온은 어리둥절해졌다. 이에샤의 기분이 좋아 보였기 때문이다. 물어봐도 여느 날과 같노라 대답했지만, 알 수 있었다. 들뜬 티가 뚜렷했다. 아니라면 저녁 준비를 돕겠다고 나설 턱이 없었다.
이에샤는 얼굴을 찡그렸다. 달걀을 깨야 하는데―셈브리온은 쉬운 일을 고르려고 애썼다―난관에 부딪쳤다. 조리대에 내리치고 껍데기를 추스르지 못해, 조각이 흰자에 빠졌다. 당황스러웠다. 손가락으로 조각을 집어내려 했다. 프라이팬은 달궈진 채였다. 셈브리온은 기겁했다.
“이-샤, 손! 손! 불!”
“어? 아.”
이에샤가 얼빠진 소리를 흘렸다. 손을 거두어들였다. 반사 신경이 좋아서 다행이었다. 셈브리온은 이에샤에게 불을 맡겼다가는 큰일난다고 깨달았다. 제 손에 들었던 식칼을 손잡이 쪽으로 돌려 내밀었다. 애호박도 함께.
“카, 칼질은 잘하니까. 이거나 채 썰어 줄래?”
“채는 어떻게 써는데?”
“…….”
이에샤는 아가씨였다. 알디온 후작가에 살 무렵에도 부엌일은 하지 않았다. 셈브리온은 이에샤를 가르칠 방법보다, 쫓아낼 꾀를 짜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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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너무 많이 안 좋아서 내일 하루 쉴게요...
선추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