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수는 검 한 자루-56화 (56/164)

00056 7. 리타 밸리의 별 =========================

루시온은 엘테르트가 앉곤 하던 소파에 걸터앉았다. 사람이 바뀌었을 뿐인데 퍽 새로운 느낌이었다. 엘테르트는 꼿꼿한 자세만 보였다. 루시온은 등받이에 한쪽 어깨를 파묻고, 온몸으로 ‘나 피곤하다.’ 하는 티를 냈다. 이에샤는 습관적으로 시더를 부르려 했다. 시더가 도망간 채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황태자에게 차 한 잔 대접하지 못하자니 좀이 쑤셨다.

루시온은 이에샤를 물끄러미 보았다. 역시 예쁘단 말이지. 실없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샤의 얼굴은 매끈했지만, 그동안 본 미인들에 견주면 그냥저냥이었다. 중요한 건 루시온에게 매력적이라는 점이었다. 유능하고 독특한 이에샤는 루시온의 취향에 들어맞았다. 이따금 귀엽기도 했다. 구미가 당겼다. 흠 없는 집안의 딸이기만 했어도 혼삿말을 꺼내 봤을 텐데.

하기야 번듯한 귀족 영애가 검술을 배우고, 기사가 되겠다며 나섰을 턱이 없었다. 루시온은 엘테르트의 충고대로 흘려보내야 할 마음이라고 결론지었다. 마주앉으니 속수무책으로 설렜지만.

“전하?”

“엉? 아, 내가 딴생각을 했군. 그대가 예뻐서 넋을 잃었어.”

“아, 예. 그러십니까.”

루시온에게는 참말을 농담처럼 건네는 재주가 있었다. 이에샤는 한심하다는 낯빛을 감추었다. 고달픈 몰골에 잠깐이나마 걱정한 제가 어리석었다. 루시온이 낄낄거렸다.

“골 때리는 일이 있었는데 앨저 경 얼굴을 보니 다 부질없이 느껴져.”

“그 일이라는 게 저와 관련됐나 보군요.”

“말귀 밝아서 좋다니까. 빌어먹을 사냥 대회 때문에 정신없이 바빴어. 와중에 그대를 문제 삼는 놈들까지 나타났거든.”

이에샤는 눈을 홉떴다. 이실리아는­―삼일을 앓아눕기는 했지만―무사했다. 자객은 죽었다. 제 손으로 이루어 낸 일들이었다. 훈장까지 받았다. 무슨 뒷말이 나오는지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옐윈 때문에 배알이 뒤틀리는데, 볶아 댈 건이 남았단 말인가.

“경도 알겠지? 역심을 품었다면 심문관한테 넘겨서 모든 꿍꿍이를 실토케 한 다음 처형해야 하는 거.”

“제가 놈을 그냥 죽여서 문제라는 겁니까?”

“이런 중요한 건을 허투루 처리하는 여자한테 기사단장 자리를 맡길 수 없다 이거지. 말하자면 자격 요건 의심이야.”

짜증스러웠다.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혼자서 달아나지도 못하는 사람을 지키며 적까지 사로잡으라니. 들고일어난 놈―기사든 관료든―을 셈브리온 앞에 던져 놓고, 네가 벨체터 용병이랑 맞붙어 보라고 윽박지르고 싶어졌다. 킬타로스는 어려운 상대였다. 아픈 여자를 공격하는 데 망설이지 않았다. 싸움에 격식도 없었다. 이에샤가 마구잡이식 대련에 익지 못했다면 고전했을 터였다.

“그래서, 바라는 게 뭐랍니까?”

“그대를 평기사로 강등하고 백화 기사단장을 더 엄정하게 뽑거나, 제국 기사 쪽에서 데려와 앉혀야 한다는데.”

“백화 기사단은 여자 기사단이잖습니까!”

“그래도 우두머리는 남자한테 맡겨야 한다는 거지.”

모든 게 지겨웠다. 기사 작위를 내놓고 싶다는 충동까지 솟았다. 셈브리온과 떠나도 좋을 성싶었다. 브링어 콤비 용병이라니 못 해낼 일이 없으리라. 각오를 다져도, 사방팔방에서 때려 대면 못 배기는 법이었다. 이에샤에게는 위안이 필요했다. 힘낸 만큼의 보상과 저를 괴롭히는 이들의 불행이.

붉어졌다가 푸르러졌다가 하는 낯을 보며 루시온도 한숨지었다. 자그마치 네 달을 시달렸다. 신경 쇠약에 걸리지 않은 게 용했다. 루시온은 집게손가락으로 뺨을 긁적였다. 이에샤가 괴로워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말인데 앨저 경.”

“말씀하십시오.”

“너무 세게 깨물지 마, 입술 상처 난다. 내 생각에는 앨저 경이 종교의 도움을 받아야 할 거 같아.”

이에샤는 당황했다. 예상치 못한 소리였다. 종교라니. 성직자가 무슨 수로 황실 기사를 돕는단 말인가? 해신교는 정재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교단에서 이에샤 한 사람을 도우려고 나설 리가 없었다.

루시온은 이에샤의 궁금증을 읽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덧붙였다.

“달신교 말이야.”

“달신이요?”

“그래. 내 임의로 대사제에게 그대에 관해 전했거든. 달신교 전체의 이름으로 백화 기사단과 앨저 경, 그대를 지지하는 일을 검토해 보겠대. 긍정적인 반응이야.”

해신교와 달신교는 끈끈히 얽혔으나, 해신교만이 번성했다. 달신이 해신의 보좌에 지나지 않는다는 까닭이었다. 사람들은 해신을 남성으로, 달신을 여성으로 그렸다. 해신교는 남자 사제와 수녀로 이루어졌지만 달신교의 사제는 여자뿐이었다. 구민 활동도 노파·여인·소녀에게만 펼쳤다. 의당 남자의 반감을 샀다.

그런데도 달신교는 영향력을 지녔다. 신벌 탓이었다. 달신은 자식을 애지중지하여, 달신교 사제를 욕보이면 변을 당하고는 했다. 교세는 약하더라도 달신교가 백화 기사단을 뒷받침한다면 이로울 것이 틀림없었다.

“그쪽은 여성이라면 무조건 싸고도는 경향이 있거든. 백화 기사단의 취지를 듣고 아주 좋아하더군.”

“세상에. 백화 기사단 좋다는 곳은 진짜 처음 듣습니다.”

“아직 결정 난 건 없으니까 너무 기대하지는 말고. 그래도 앨저 경, 도서관에서 달신교 성서 정도는 읽어 보라고.”

루시온은 지친 숨을 내쉬었다. 달신교는 폐쇄적이었다. 황태자라도 쉬이 만날 수 없었다. 바쁜 가운데 사원까지 드나드느라 고생깨나 했다.

“기분 많이 상했겠지만 내 얼굴을 봐서라도 조금만 참아 줘.”

“으음…….”

이에샤는 머쓱해졌다. 루시온이 석곡궁을 찾기는 처음이었다. 시종을 보내 불러들이거나, 바깥에서 마주치기만 해 왔다. 몸소 들르리만큼 신경써 주니 황송했다. 기실 루시온은 이에샤가 지내는 곳을 구경고 싶었을 따름이었지만.

“바쁘실 텐데 애써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벨리오노 전하.”

“뭘. 애초에 백화 기사단은 앨저 경을 등용하고 싶어서 내가 만든 거야. 그대를 강등시키라니 본말전도잖아. 어림도 없지.”

이에샤는 빙그레 웃었다. 미래의 황제가 장담해 주었다. 든든하기 그지없었다. 남에게 기대어 얻는 자리는 마뜩잖았다. 하나 지금은 저를 응원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뻤다. 루시온과 이야기할 때는 마음이 잔잔해졌다.

“역시 전하는 좋네요.”

루시온은―언젠가 푸른 사자 성에서처럼―의자에서 굴러떨어질 뻔했다. 이에샤의 얼굴은 말갰다. 끈적한 뜻이라고는 없어 보였다. 그 점이 루시온을 환장하게 했다.

“방금은 다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는데 덕분에 힘이 났습니다. 감사합니다.”

“앨저 경, 그, 다시 한 번 말해 줄래? 내가 뭐라고?”

“감사합니다?”

이에샤가 말끝을 되풀이했다. 루시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보다 더 앞에……, 아니, 아니다. 그만두자. 내가 미쳤지.”

“왜 그러십니까?”

“아무것도 아니니까 물어보지 마. 명령이다.”

이에샤는 어리둥절했으나, “예.” 하고 답했다. 루시온이 절박해 보였으므로. 루시온은 손부채를 부쳐 댔다. 벌게진 귀가 식지 않았다. 이에샤 앨저는 느닷없이 치고 들어오는 데에 타고났다. 엘테르트가 왜 입조심을 시키겠다고 별렀는지 알 것 같았다.

쓴웃음이 흘러넘쳤다.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이에샤를 바라보았다.

“앨저 경.”

“예?”

“너무 뒤흔들지 말라고.”

이에샤는 양미간을 좁혔다. 생뚱스러웠다. 화들짝하는 태도며, 뜻을 알 수 없는 말이며. 금방의 대화를 돌이켜보았다. 제가 이상한 소리라도 했나 싶었다.

‘아, 그건가.’

엘테르트의 주의가 떠올랐다. 엘테르트는 이에샤에게 남자를 대할 때는 낱말을 골라야 한다고 일렀다. 이에샤도 모르지 않았다. 다만 자신의 밀어와 뭇사람의 밀어는 기준이 다른 성싶었다.

“죄송합니다.”

“응? 뭐가?”

“앞으로는 전하를 좋아한다거나, 그런 이상한 말 꺼내지 않겠습니다. 잊어 주십시오.”

다과도 대접받지 못했건만 루시온은 사레가 들렸다. 기침을 터뜨려 댔다. 이에샤의 놀란 눈길이 느껴졌다. 가슴을 두드리며 생각했다. 눈치가 빠른 건지 둔한 건지 모르겠어.

일이 많았다. 황후 시해 미수 사건의 배후를 밝혀 내지 못했다. 영춘 사냥 대회가 흐지부지되며 해신교와도 골이 생겼다. 민심도 술렁였다. 백화 기사단 문제는 두말하면 잔소리였다. 석곡궁에서 뭉갤 짬이 없었다. 우중충한 기분이나마 가셔서 다행이었다. 만나러 오기를 잘했다. 아쉬운 목소리로 이에샤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조금 뒤, 스란과 미엘라가 기어들어 왔다. 시더는 일하러 간 모양이었다. 이에샤는 둘을 흘겨보았다.

“열받은 황태자 전하를 나한테 떠맡기고 마음은 좀 편했나?”

“죄송해요! 그렇지만 앨저 경을 찾아왔다 하셨단 말이에요. 저, 저, 저 같은 게 황족의 존안을 뵙고 제정신일 수가 있겠어요? 전 정말 처형장의 이슬이 되는 줄 알고!”

“올센 경. 최근 몇 년 동안 극형을 선고받은 죄인이 얼마 없었다는 건 경이 나한테 가르쳐 준 얘기잖아?”

미엘라는 심호흡했다. 가슴이 벌렁거렸다. 스란도 인상을 펴지 않았다. 이에샤는 눈을 치떴다. 황제의 개인 조직에 들었던 스란마저 루시온을 두려워하다니. 뜻밖이었다. 루시온에게 제가 모르는 면모라도 있는가 싶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황태자 전하께 사사로운 감정이 쌓여서.”

“짝사랑?”

“끔찍한 소리 마십시오, 앨저 경.”

스란은 몸서리까지 쳤다. 스란의 말인즉, 열다섯 살 무렵에 루시온은 궁전을 빠져나가는 데 재미 붙였다. 이오르는 암무에 감시를 명했다. 스란은 하루가 멀다 하고 돌발 행동을 하는 루시온 때문에 온갖 곳을 가 보았다. 도박장까지 따라 들어가며 어찌나 성가셨는지. 루시온은 아직도 제가 몇 사람을 힘들게 했는지 모를 터였다.

이에샤는 황당해졌다.

“전하, 일 때문에 궁에서 꼼짝도 못 하시잖아?”

“국무에 참여하시기 전이었으니까요. 저는 정말, 그때 세수도 못 하고 전하의 뒤를 밟던 일만 떠올리면 아직도 속에서 천불이, 죄송합니다. 약간의 불충한 마음이 고개를 드는지라.”

“……고생이 많았나 보네.”

어색하게 위로했다. 지금 보아도 루시온은 개구쟁이였을 법했다. 쫓아다니기만도 보통 일이 아니었으리라. 스란은 갑갑한지 블라우스 단추를 두 개 풀었다. 미엘라가 양미간을 찌푸렸다.

미엘라는 흐트러진 차림새를 싫어했다. 정숙하고 정갈하지 못한 모습은 부덕하다 여겼다. 바지만큼은 못 입겠다며 “앨저 백작님, 살려 주세요!” 하고 울기도 했었다. 지금에야 백화 기사단 정복에도 적응했으나, 늘 코트에 구김살 하나 없었다. 스란에게 짱알거렸다.

“스란 경, 제가 단추는 꼭 다 잠그라고 했잖아요. 남사스러워요! 집에서도 툭하면 헐벗고 다니셔서 얼마나 민망한지 알아요?”

“내 집인데 뭐 어때. 얹혀 사는 녀석이 꿍얼거리지 마라.”

이에샤는 손으로 턱을 괴었다가, 팔꿈치를 무너뜨렸다. 책상에 이마를 박을 뻔했다. 스란과 미엘라가 왜 그러냐는 듯 이에샤를 쳐다보았다. 이에샤는 제가 무슨 말을 들었는가 고민했다.

‘얹혀 살아? 올센 경이? 스란 경 집에?’

탁상을 내리쳤다.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경악한 낯빛을 지울 수 없었다. 미엘라는 거구에 딱딱한 인상의 스란을 무서워했었다. 조금씩 가까워지기는 했으나, 스란이 검을 만지작거릴 때면 움찔했다. 그랬을 텐데.

“언제부터?!”

============================ 작품 후기 ============================

시더도 이에샤보다 미엘라랑 친합니다...

이에샤는 친구가 없습니다...

선추코 감사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