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62 7. 리타 밸리의 별 =========================
“웃어 보면 어떻겠느냐?” 하는 권유가 못할 바는 아니었다. 이야기하다 보면 오갈 법도 했다. 별개로 엘테르트는 제가 잘못했음을 인정했다. 듣는 이가 달가워하지 않는다면, 뱉어서는 안 될 말이었다. 사람마다 어울리는 대응이 있었다. 많은 이가 엘테르트의 화술을 좋아했지만 이에샤는 노여워했다. 주의했어야 옳았다.
엘테르트는 고민을 귀찮아하지 않았다. 대화 상대의 속내를 살피는 것은 당연했다. 싫어하고 말고 할 일이 아니었다. 인간관계의 기본을 그르쳐 버렸을 따름이었다. 나란 놈은 멀었구나. 자조감이 들었다.
멘델린은 델페레타의 영광을 내다보는 독수리였다. 멘델린의 주인은 멀리 날아 황제의 길을 밝혔다. 후계자는 낮게 날아서 제국에 헌신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마음을 굳혔다. 부끄럽지만, 아버지에게 기대야 할 성싶었다.
애버토스는 엘테르트가 제 몫을 하자 일선에서 물러났다. 계속 황실에 이바지했으나, 에브라힐에 드나들지는 않게 되었다. 사업을 넓히며 구민에 힘쓸 뿐이었다. 지금도 서재에서 이런저런 계약서를 살피는 중이었다.
푸른 사자 성의 북쪽 복도는 쌀쌀했다. 애버토스는 추위에 강했다. 찬 공기가 집중에 도움된다고 북단에 서재를 마련했다. 엘테르트는 망토를 여몄다. 서재 문을 두드렸다. 안으로 들어섰다. 애버토스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별일이구나. 이런 밤에 날 찾아오고.”
“시간을 빼앗아 죄송합니다, 아버님. 도움을 구할 일이 있어서요.”
“그거야말로 별일이구나. 네 머리가 나보다 나을진대.”
엘테르트는 한숨지었다. 저는 아버지가 농을 거는 줄 알았지만, 고용인들은 겁을 집어먹고는 했다. 애버토스에게는 웃을 때조차 세상에서 가장 진중하게 보이는 재주가 있었다.
“생각과 계산이 빠를 뿐 지혜롭지는 않죠.”
“지혜란 남한테 구하는 게 아니라 부딪치고 깨지며 얻는 거지. 내 아들은 나이 여덟에 그 이치를 깨쳤다, 엘테르트. 그런데도 도와달라며 아비를 찾아왔으니 내 돕지 않을 수가 없구나.”
“하하.”
애버토스가 엘테르트에게 손짓했다. 손님맞이 테이블로 이끌었다. 안락의자에 앉았다. 엘테르트는 애버토스의 왼편, 소파에 자리잡았다. 서재의 공기는 초봄 같았다. 엘로나를 닮아 추위를 타는 엘테르트에게는 괴로웠다. 애버토스는 엘테르트를 물끄러미 보았다. 테이블에 목걸이 한 개가 놓였다. 금줄에 눈알만 한 크기의 루벨라이트가 달렸다. 집어서 건네주었다. 발열 마법이 걸린 아티팩트였다.
“어머님 거잖아요.”
“아들이 덜덜 떠는데 빌려주지 않으실 분이 아니다. 하려무나.”
“하지만 여성용이라…….”
“이성의 물건을 걸치는 일이 감기에 걸려 주변에 폐 끼치는 것보다 수치스럽다면야 말거라. 네 목이 엘로나 님보다 굵다고 들어가지 않는 건 아니잖느냐?”
엘테르트는 대꾸를 멈추었다. 엘로나가 머무를 수 있도록 갖추어 놓은 목걸이를 걸었다. 애버토스의 말대로 줄이 길었다. 머리 위로 뒤집어쓸 수 있었다. 엘로나와 판박이인데다가, 잘생기면 뭐든 어울린다고 엘테르트의 모습은 어색하지 않았다. 따뜻한 기운이 몸을 감쌌다.
입을 열기가 어려웠다. 애버토스는 참을성 있게 기다려 주었다. 약관을 넘긴 아들이어도, 애버토스에게는 꼬마와 같았다. 철모르고 빈틈투성이에 생기발랄했다. 어른은 아이의 말을 방해치 말고 들어야 하는 법이었다.
“아버님.”
엘테르트가 말문을 떼었다. 애버토스는 한쪽 팔걸이에 팔꿈치를 붙였다. 몸을 기울였다.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짚었다. 귀를 기울였다.
“말실수로 남을 상처 입힌 적이 있으십니까.”
“……수없이 많지.”
“사과하고도 용서받지 못한 적, 있으십니까?”
“대부분 용서받지 못했다.”
엘테르트는 눈을 크게 떴다. 놀라웠다. 누가 멘델린 공작의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는단 말인가? 애버토스는 혀끝을 찼다. 아들은 겸손한 탓인지, 공경이 지나쳤다. 소공작인 저는 일꾼이기를 자처하면서 공작인 아버지는 하늘처럼 받들었다.
“헛똑똑이야, 내가 신이라도 되느냐? 가슴의 응어리가 풀려야 용서지. 나뿐 아니라 폐하께서도 마찬가지다. 생각해 봐라, 황후 마마께 용서받지 못하는 게 폐하인들 좋으시겠느냐. 지위의 고하와는 상관없어. 너는 사람을 다스려야지, 조종해선 안 된다는 걸 알잖느냐.”
“저, 전 딱히 아버님이 지위로 용서를 강요하셨다고 생각한 건 아닙니다.”
“네가 그런 건방진 생각을 품을 주변머리라도 있었으면 엘로나 님이 골치를 썩으시진 않았겠지.”
말 속에 뼈가 있었다. 애버토스의 아내 사랑은 끔찍했다. 아들이라도 엘로나를 번거롭게 한다면 봐주지 않았다. 엘로나가 엘테르트의 짝을 찾으려, 정보를 모으고 젊은이 모임에 쫓아다니는 일이 걱정스러웠다.
“옹이가 생기면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 마주보고 웃다가도 문뜩문뜩 옛일이 떠올라서 눈앞의 상대가 징그러워 보이지. 내가 말로 상처입힌 자들도 그럴 거다.”
“그럼 도대체 어떡하면 용서받을 수 있습니까? 꼭 사과해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도와주십시오, 아버님.”
애버토스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엘테르트는 전에 없이 간곡했다. 어려서부터 보챔이 적었었다. 받고 싶은 선물을 물어보아도, 고개만 가로젓고는 했다. 이리 매달려 오다니 뜻밖이었다. 애버토스는 ‘설마?’ 하고 떠올렸다.
“그 사람이 여자냐?”
“…….”
“여자로군.”
“아, 아닙니다.”
“늦었다.”
엘테르트가 우거지상을 했다. 애버토스는 즐거워졌다. 하나뿐인 자식은 지나치게 똑똑하였다. 키우는 재미가 없었다. 자식을 재미로 키우겠느냐고 위안했으나, 사람 마음이 간사했다. 엘테르트의 귀여운 모습을 한 번쯤은 보고 싶었다.
“얼마나 훌륭한 여자길래 내 아들이 홀렸을꼬.”
“그런 게 아닙니다! 그녀는 공주님 같은 여인으로,”
“뭐라고?”
엘테르트는 자신의 헛소리를 깨달았다. 애버토스의 눈길이 따가웠다. ‘내 아들이 언제부터 어른의 문을?’ 하고 놀라는 듯했다. 낯이 뜨거워 죽을 것 같았다. 서둘러 바로잡았다.
“라제카 공주님 같은 여인으로. 언젠가부터 여동생처럼 아끼게 되었습니다.”
“흠! 그 아가씨도 널 오라비처럼 따르더냐?”
“꼴도 보기 싫으니 찾아오지도 말라 하더군요.”
“너 혼자 좋아한다는 소리구나.”
울적해졌다. 애버토스가 찔리는 곳을 후벼팠다. 엘테르트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딱히 저만 싫어하는 건 아니라고 했습니다.” 하고 웅얼거렸다.
애버토스는 장난기를 갈무리했다. 점잖은 태도를 되찾았다. 차분히 가라앉은 눈으로 엘테르트를 보았다.
“엘테르트.”
“예.”
“내 해 줄 수 있는 말이라곤 강요는 금물이라는 것뿐이다. 그녀가 널 보기 싫다고 했다면 거기 따르거라. 사죄한답시고 얼굴 비치는 게 더 역겨운 법이니.”
“하지만! 아버님, 도저히 방법이 없는 겁니까?”
“네 잘못이 흘려보낼 수 있는 건이라면 시간이 해결해 준다. 그러지 못할 죄라면, 글쎄, 난 네가 그만큼의 잘못을 저지르진 않았으리라 믿으니 할 말이 없구나.”
시간. 엘테르트는 속으로 되뇌었다. 답답했다. 이에샤가 조건을 붙인 까닭도 시간을 달라는 뜻이었을까? 한 달을 기다리면 용서해 줄까. 엘테르트는 무언가 잘못 짚은 듯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조마조마하며 말했다.
“아버님. 제가 그녀에게 편지를 쓰면, 그 또한 잘못일까요?”
“말리고 싶구나.”
애버토스는 단칼에 잘라 냈다. 그러나 엘테르트가 낙담하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덧붙였다.
“하지만, 그래. 누군가에게는 성의를 보이는 방법이 통하기도 하지. 더 나빠질 각오를 세우고 네가 선택하거라. 나는 그 아가씨가 너그러운 사람이기를 빌어 주마.”
엘테르트는 지친 숨을 내뽑았다. 해결된 것이라고는 없었다. 이에샤와 화해할 수 없다는 확증만 얻은 듯싶었다.
목걸이 줄을 잡았다. 끌어올려, 머리 위로 벗겨 냈다. 추위가 밀려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애버토스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아버님 덕분에 공부가 되었습니다. 가 보겠습니다. 안녕히 주무십시오.”
“조급해 말거라.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든 결과가 나오는 법이다.”
“……예.”
입안이 썼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아버지의 서재를 나섰다.
* * *
「편안한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델피르력 753년 5월 7일, 아침.
이에샤는 탁상의 카드를 뚫어지라 보았다. 글귀 아래로 ‘E.M.’ 하고 적혔다. 누구의 이니셜인지는 뻔했다. 엘테르트도 이에샤의 눈치를 믿었으리라. 빳빳한 종이에 금가루를 입힌 카드는, 이에샤가 본 적도 없는 고급품이었다. 엄지와 검지로 집어 들었다. 까끌까끌한 감촉이 색달랐다.
가슴이 뛰지 않았느냐 묻는다면 아니었다. 좋아하는 남자가 카드를 보내 왔다. 마땅히 설레었다. 다만 부질없이 느껴졌다. 마음은 흘려보낼 셈이었다. 검과 셈브리온만 끌어안고 살 것이다. 엘테르트의 카드는 이에샤를 흔들지 못했다.
“시더. 멘델린 경 왔다 가셨니?”
“아니요! 전 못 뵈었어요.”
“사람을 시켜서 두고 간 게 아닐까요? 멘델린 남작님이 몸소 오시기는 좀…….”
그건 그렇지. 미엘라의 짐작에 고개를 끄덕였다. 엘테르트가 카드 한 장 놓겠다고 시간을 쪼갰을 리 없었다. 이걸 어쩐다? 고민에 빠졌다. 남의 성의를 버리기는 무엇했다. 가지자니 귀찮았다. 무게도, 부피도 없다시피 한 종잇조각을 잃어버리지 않고 보관하기란 성가신 일이었다.
카드를 뒤집어 보았다.
「왼쪽 위 귀퉁이를 세 번 두드리면 불타오르도록 해 놓았습니다. 안전합니다.」
흠칫했다. 이 싱거워 빠진 카드가 아티팩트였다니! 부담이라면 없애 버리라는 뜻이겠으나, 이에샤로서는 돈지랄로 느껴졌다. 눈썹을 찡그렸다.
“……풋.”
결국은 웃음이 새고야 말았다. 어처구니없었다. 고작 말실수를 사과하겠다고 아등바등하는 엘테르트가 생경스러웠다. 카드는 간직하는 편이 좋을 성싶었다.
“시더, 이따가 호랑가시궁으로 내 답신을 부쳐 줄래?”
“예에. 두 분 이제는 펜팔까지 하시는군요.”
이에샤는 시더의 종알거림을 못 들은 체했다. 책상 서랍에서 펜과 서류용 종이를 꺼냈다―편지지는 없었다. 저쪽에서 짧게 썼으니, 이쪽도 같이할 생각이었다. 글씨 모양이 미워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적어 나갔다.
「아티팩트까지 만들지 마세요. 더 부담스러워요. 경도 좋은 하루 되시기를.」
============================ 작품 후기 ============================
이에샤는 엘테르트랑 어떻게 돼 보겠다 하는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엘테르트는 이에샤가 아직도 화난 줄로만 압니다...
바보들입니다...
선추코 감사합니다!
yellowysk 님 후원 쿠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