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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수는 검 한 자루-63화 (63/164)

00063 7. 리타 밸리의 별 =========================

종잇장을 찢어 쪽지로 만들었다. 시더에게 건네주었다. 접지 않았으므로, 시더는 내용을 읽었다. 양미간이 죄어들었다. 이에샤의 글씨는 달필도 악필도 아니었다. 하나 시원시원했다. 획에 거침이 없었다. 문장마저 그러했다. 엘테르트에게 이토록 싸늘한 전갈을 보낼 수 있는 여자는 드물 터였다.

“앨저 경. 멘델린 남작님이랑 아직도 싸우세요?”

“으음?”

이에샤는 어리둥절해졌다. 시더의 물음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안부 카드까지 주고받았다. 어찌 싸운다고 생각하는가? 엘테르트에게 만나지 말자고 했지만, 이제 피해 다니지 않아도 되었다. 검술이 연정을 덮어 줄 것이었다. 엘테르트도 제 말을 무릅쓰고 접촉해 왔다. 어물쩍 넘어가겠다는 뜻이 분명했다. 이에샤는 그리 여겼다.

“내용이 좀, 뭐랄까, 짤막하지 않은가요?”

“그 사람도 짧게 썼어.”

“아니, 하지만 카드가 엄청 예쁘잖아요! 남작님의 성의는 딱 보이는데 상대방이 이렇게 종잇장 북 찢어서 보내면 허탈하지 않으시겠어요?”

“시더.”

쌀쌀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시더는 명랑하고 귀여웠으나, 성가실 때가 있었다. 깍듯해야 하는 이에샤에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얕잡히는 듯했다. 탐탁스럽지 않았다. 시더로서는 섭섭할 의심이었다. 친근감을 무시로 받아들이다니. 안타깝게도 이에샤는 둘을 가려볼 만큼 처세가 좋지 못했다.

“내가 하는 일에 토 달지 말렴.”

“죄, 죄송합니다.”

“됐다. 사과했으니 나도 더 문제 삼지 않으마.”

미엘라는 한숨지었다. 미엘라는―겁먹고 놀라기는 해도―통찰력이 좋았다. 시더가 주제넘는 데에는 이에샤의 탓도 있었다. 다른 귀족처럼 지배자 노릇을 하지 않으면서도, 권위가 깎였다 싶으면 화냈다. 일정한 태도를 지키지 못하면 주변에서도 갈팡질팡하게 마련이었다. 이에샤의 인지는 비좁고 삭막했다. 백화 기사단에는 다정다감한 사람이 필요했다.

미엘라의 속도 모르고 이에샤는 기지개했다. 오전 수련까지는 멀었다. 스란은 사무실에 나타나지 않았다. 연무장부터 향한 모양이었다. 부러웠다. 이에샤도 기사단장 자리만 아니었다면 그리하고 싶었다. 미엘라에게 손짓했다.

“오늘 아침은 나, 뭐뭐 봐야 해?”

“오시기 전에 다 정리해 놨어요. 여기, 이만큼이요.”

“……조금 게을러도 좋으련만.”

“네?”

미엘라가 되물었다. 이에샤는 쓴웃음을 흘렸다. “아무것도 아니야.” 하고 중얼거렸다.

루시온은 종탑을 지나는 중이었다. 알아보고 허리를 수그리는 이도 있었다. 황태자가 홑몸으로 걸어 다니리라고 상상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으나. 루시온을 곁눈질하고도 어느 집안의 도련님이겠거니, 넘기는 쪽이 많았다. 번듯한 얼굴도 한순간에 스쳐서야 기억할 수 없었다.

평소라면 호랑가시궁에서 일을 볼 때였다. 이오르의 부름으로 본궁에 들렀다. 이오르는 루시온에게 안부부터 물어보았다. 라제카와 란델이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는지도 확인했다. 마지막으로 이실리아 이야기를 꺼냈다. 성정이 진지한 황제였다. 망가져 버린 황후에게 낯을 들지 못했다. 결혼식 날 처음 만난 아내인데도 그랬다.

이오르는 겨우살이궁을 찾기조차 조심했다. 이실리아가 괴로워했기 때문이다. 원망하는 상대를 앞에 두고도, 군주라고 책망하지 못하는 탓이었다. 이오르는―이실리아가 그나마 예뻐하는 자식인―루시온에게 모후의 상태를 묻곤 했다.

하지만 루시온마저 미움을 사 버렸다. 이실리아는 영춘 사냥 대회 뒤로 넋을 놓았다. 한 달째 나아지지 못했다. 밤마다 헛소리를 지껄여 댔다. 죽은 시녀장을 찾아 헤매기도 했다. 이실리아의 비난은 루시온에게로 쏠렸다. 황후를 대행할 황태자비가 없어, 베르타가 죽게 되었다고.

뭐가 이렇게 안 풀리냐? 루시온은 입속말을 중얼거렸다. 신년맞이 무도회부터 잇따른 사건으로, 자신도 지쳤다. 아랫것에게 짜증을 부리는 일이 늘어났다. 와중에도 엘테르트는 멀끔했다. 부드러운 태도를 잃지 않았다. 루시온은 두 손 들고 말았다. 성직자도 엘테르트처럼 유순하지는 못하리라.

우뚝, 발걸음을 멈추었다.

‘보고 싶다, 보고 싶다 하니까 헛것까지 보이나.’

이에샤가 상수리나무의 가지에 올라탔다. 양발을 일자로 두었다. 중심에 흔들림이라고는 없었다. 성큼성큼 걸어 나아갔다.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루시온은 나뭇가지에 연분홍색 챙모자가 걸렸음을 알아차렸다. 나무 아래에는 머리카락을 드러낸 소녀가 섰다. 이에샤가 모자 앞에 다다랐다. 집어 들었다. 루시온은 ‘돌아가서 줄기를 타고 내려오겠군.’ 하고 떠올렸다.

이에샤의 몸이 떨어져 내렸다.

자기도 모르게 튀어 나갔다. 받아 주기에는 턱없는 거리였다. 아는데도 다리가 움직였다. 이에샤는 가뿐히 땅에 내려섰다. 소녀의 머리에 모자를 얹어 주었다. 루시온은 달리기를 멈추었다. 숨을 몰아쉬었다.

이에샤가 웃었다. 치켜 올라간 눈초리가 처졌다. 눈동자가 반달꼴을 이루었다. 바람이 불어왔다. 머리카락에 붙은 나뭇잎을 데리고 갔다. 소녀는 이에샤에게 꾸벅 인사했다. 종종걸음으로 떠나갔다. 차림새를 보아 에브라힐 궁전을 관광하러 온 귀족 영애 같았다.

루시온은 이에샤가 일하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나무 타기쯤은 하인에게 시켜도 될 터였다. 여자를 돕겠다고 궂은일을 맡는 여자. 뭇사람이 여성을 약하고, 단순하고, 이기적이라 여겼다. 루시온은 달리 생각했다. 그들은 겸손하고 섬세하며 예의 발랐다. 이에샤가 소녀에게 바친 봉사 또한 유별난 게 아니었다.

“앨저 경.”

“아!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이에샤가 한쪽 무릎을 구부렸다. 루시온은 손사랫짓했다. 호감 가는 여자를 내려다보고 싶어 하는 취향은 없었다.

“방금 멋지던데.”

“보셨습니까?”

“나무 위에 있길래 내가 허깨비를 보나 생각했어.”

사실이었다. 이에샤는 언제나처럼 농담으로 받아들인 듯했다. 루시온은 “신화 속에 나오는 숲요정 같았어.” 하는 말까지 꺼내려다가, 그만두었다.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우아한 요정은 이에샤와 어울리지 않았다.

대화가 끊어졌다. 이에샤에게는 할 말이 없었다. 루시온은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보고 싶었어. 오늘도 예뻐. 걱정 끼치는 행동은 하지 마. 어느 하나 입 밖으로 내서는 안 될 소리였다. 새삼 제 처지에 갑갑증이 났다.

“음. 시간 있어? 좀 걸을까?”

“저야 한가롭지만. 전하께서 바쁘시지 않습니까?”

“에르디가 유능해서 괜찮아.”

이번에도 사실이었다. 루시온이 20분쯤 늦더라도, 엘테르트라면 수습할 법했다―욕은 먹겠지만 말이다.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에르디…….”

“응?”

“전하는 멘델린 경과 각별하시지요. 늘 친근하게 부르시네요.”

고개를 주억였다. 같은 젖을 먹은 사촌이었다. 배움도 함께했다. 엘테르트는 무슨 학문이든 빼어났다. 루시온은 몸을 잘 다루었다. 두 사람은 상대방을 응원했고, 시샘하지 않았다. 루시온이 즉위할 즈음에 엘테르트도 공작위를 이으리라. 델페레타의 사자와 독수리는 그 어느 시대보다도 끈끈할 것이다.

“왜. 경도 친근하게 불러 주면 좋겠어?”

“됐습니다. 황공해서 싫어요.”

이에샤가 퉁명스럽게 물리쳤다. 루시온은 하하 웃었다. 청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래, 그대한테도 애칭으로 불러 주는 사람 정도는 있을 테니. 그 용병 스승은 발음을 못해서 그리 부르는 모양이지만.”

“뭐 어떻습니까? 얼마나 귀여운데요!”

이에샤가 날을 세웠다. 셈브리온을 농담거리 취급하다니! 화가 났다. 루시온은 한숨을 내뽑았다. “내가 잘못했어.” 하고 사과했다. 이에샤에게 스승보다 특별한 사람이 있기나 할까. 부러운 마음이 솟았다.

“……지금은 아무도 없습니다. 옛날에는 어머니가 애칭으로 부르셨지만요.”

“오, 뭐였는데? 이아? 이스?”

“에시아.”

이에샤는 담담히 뱉었다. ‘에르디’만큼이나 변칙적인 애칭이었다. 고아한 발음이, 수줍은 아가씨를 연상시켰다. 이에샤의 인상과는 드달랐다. 루시온은 그만두기로 했다. 에시아보다 ‘앨저 경’ 쪽이 이에샤다웠다.

“안 어울려. 그냥 부르던 대로 부르련다.”

“그러니까 싫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앨저 경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신분은 아니지.”

이에샤의 낯이 찌그러졌다. 루시온은 양손을 흔들어 보였다. 농담이야, 농담. 이에샤는 루시온을 흘겼다가, 표정을 풀었다. 처음부터 친근하게 부를 생각은 없었을 터였다. ‘백화 기사단장과 황태자의 문란한 관계’ 소문이 온 궁전에 깔릴 테니까.

“마음대로 하십시오. 어차피 전 전하께서 명령하신다면 뭐든 따를 테니.”

“이야아. 그렇게 말하니까 나 진짜 나쁜 놈 같다.”

“그, 그런 뜻이 아니오라.”

당황스러웠다. 불경한 소리를 할 셈은 없었다. 참말로, 루시온의 명령이라면―셈브리온의 안위와 관련한 일 빼고―들어 주고 싶다는 뜻이었다. 이에샤에게 루시온은 남달랐다. 허둥지둥 해명을 늘어놓았다.

“전하께서는, 스승님 이후로 처음 제게 잘 대해 주신 분이세요. 그래서 바라시는 바 모두 이루어 드리고 싶습니다.”

“어…….”

“이래 봬도 저, 어디 가서 찾기 힘든 검사거든요.”

루시온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에샤의 말은 기뻤다. 가슴 깊숙이에 와 닿아, ‘쿵’하고 울릴 만큼 달콤했다. 연정을 받지는 못하더라도 이에샤의 마음 한구석을 차지한 것 같았다. 하나 달갑게만 들을 수 없었다.

“왜 내가 처음이야? 그대의 스승은 언제 만났는데?”

“일곱 살 때, 부모님이 이혼하고 얼마 안 돼서요.”

“근데 왜 내가 처음이야?”

같은 물음을 되풀이했다. 이에샤는 움찔했다. 루시온의 비위가 상한 듯했으므로. 말실수라도 했나, 돌이켜보았다. 짚이는 점이 없었다. 루시온의 눈치를 살폈다. 꽉 다문 입매에 불쾌감이 서렸다.

“그냥, 처음이니까 처음입니다. 이유를 물으셔도 어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럼 정말 12년 동안 앨저 경한테 잘해 준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단 말이야?”

루시온은 얼떨떨해졌다. 이에샤에게 곡절이 많다는 건 알았다. ‘알디온 후작 부부 이혼 사건’은 귀족 사회에서도 알려진 스캔들이었다. 그렇다고 이에샤가 괴롭힘당하는 모습은 그려지지 않았다. 참을 성미도 못 되었다.

루시온의 어림짐작대로―이에샤는 참지 않았다. 성깔에 따라 뒤엎으며 살아왔다. 알디온 후작가 사람들은 이에샤를 건드리지 못했다. 무시했을 따름이었다. 그는 잘해 준 것이 아니었다. 이에샤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예. 정말로.”

“에르디는? 나보다 먼저 알았잖아.”

“멘델린 경, 말입니까?”

이에샤의 낯빛이 썩어 들어갔다. 엘테르트와의 만남이 되살아났다. 끔찍했었다. 이에샤는 손님인 엘테르트에게 결례를 저질렀다. 엘테르트는 이에샤를 모욕했다. 가운데에서 밀레나가 장작을 넣었다. 그 개판을 황태자에게 고해바치기는 께름했다.

“전하도 아실 거 아닙니까. 멘델린 경은 저를 싫어해요.”

============================ 작품 후기 ============================

에르디둥절

몸살이 나서 내일은 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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