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65 7. 리타 밸리의 별 =========================
밀레나는 양산대를 어깨에 걸쳤다. 허리를 꼿꼿이 했다. 아쿠아마린 같은 눈동자가 이에샤를 담았다. 이에샤는 화난 와중에도 생각했다. 속마음을 싸매고 남의 심기를 살피는 데에만 골똘하던 눈빛이 떳떳해졌다고. 자신을 알아주도록 부추기는 게 아니라, 알아보라고 나서는 듯했다.
어째서일까? 바람직한 변화로 느껴지지 않았다.
“얼마 전에 황실 훈장을 받았다지, 언니. 늦었지만 정말 축하해.”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마. 너한테 축하받으면 뒷맛이 나빠.”
“언니 말이 맞아. 사실은 진심에서 우러나는 축하, 못 해 주겠어.”
이에샤는 쌍심지를 켰다. 밀레나는 생글생글할 따름이었다. 악의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말과 낯이 달랐다. 옛날에도 이에샤를 낮잡고는 했지만, 무구한 태도로 포장했었다. 드러내 놓고 깔아뭉개기는 처음이었다.
“훈장을 받은 남자라면 모를까 훈장 자체는 우리한테 도움이 안 되잖아.”
“난, 진짜 네가, 아까부터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언니 스스로 자기 가치를 깎았다는 거야. 나라면 언니처럼은 하지 않아.”
훈장이란 황제의 치하였다. 단순한 상에서 그치지 않고 가문에 새겨지는 명예. 이에샤와 옐윈의 훈장이 낮은 급이기는 했다. 그렇다 해서 하잘것없지는 않았다.
밀레나는 알았다. 귀족 남자의 자존심이 얼마나 검질긴지. 저보다 똑똑하고 많이 가진 여자를 어떻게 따돌리는지. 훈장도 마찬가지였다. 델페레타는 평화로웠다. 이에샤와 밀레나 또래 남자 가운데, 무공을 세운 수훈자는 드물었다. 이에샤의 명예는 결혼 시장에서 걸림돌이 될 터였다.
밀레나는 이에샤의 ‘기사 놀이’가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고도.
“언니는 예뻐.”
“시비 거냐?”
“예쁘면서도 예쁜 여자가 얼마나 유리한지 몰라. 알았다면 더 아름다워지도록 가꿨겠지. 검 따위를 드는 게 아니라. 그래서야 어떤 신사도 언니랑 결혼하려 하지 않을 거야. 반면에 난 이 나라에서 가장 훌륭한 신랑감과 맺어질 수도 있어.”
빈손으로 치맛자락을 집었다. 살며시 들어올렸다. 작별 인사를 갖추었다. 아찔하리만치 매혹적인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쯤 하고 갈게. 일, 열심히 해. 조만간 집에도 놀러 와 줘.”
이에샤로부터 돌아섰다. 드레스 탓으로 느릿느릿했으나, 이에샤는 붙들지 않았다. 이에샤에게는 ‘자매끼리 나눌 말’이라는 게 없었다. 모르는 사이처럼 지내고 싶었다.
헛숨을 터뜨렸다. 평소처럼 심한 말을 퍼붓지 않은 까닭은, 어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구구절절한 개소리에 무어라 받아쳐야 할지 몰랐다.
밀레나는 커다란 착각을 했다. 이에샤에게는 결혼할 뜻이 없었다. 앨저 가문에 데릴사위가 필요하기는 했다. 작위를 잇지 못한 청년 중에 몸 튼튼하고, 착실하고, 말 잘 듣는 사람으로 고르면 될 일이었다. 좋은 혼처는 간절하지 않았다.
벨제아 백작가의 노부인―헤리카를 떠올렸다. 헤리카나 에이릴리처럼 살기는 싫었다. 남편에게 굽히고 들어가지 않겠노라 다짐한 터였다.
밀레나의 변화는 부질없었다. 상대방이 웃기를 바라면 웃고 울기를 바라면 울어 주던 소녀에서, 나서서 넥타이를 푸는 여자가 되었을 따름이었다. 불쌍하지는 않았다. 연민하기에는 쌓인 앙금이 많았다.
‘바보같은 계집애.’
비웃음을 흘렸다. 이에샤에게 밀레나의 발버둥은 멍청하게만 보였다. 왜 자발적으로 머리를 조아리는 걸까? 이해할 수 없었다.
「부담을 줄 생각은 없었습니다. 미안합니다.」
이에샤는 종이쪽의 귀퉁이를 잡았다. 뒤집어 보았다. 깨끗했다. 다른 이야기가 적혔을 줄 알았다. 아쉬움이 피어올랐다. 책상 서랍을 열었다. 두 번째 카드를 아침에 받은 카드 위로 포개어 두었다.
답장을 쓸까 하다가 말았다. 거듭거듭 주고받는 카드라니. 연애라도 하는 것 같아서 싫었다. 엘테르트에게 타의라고는 없겠으나, 이에샤의 마음 문제였다. 엘테르트와 깊게 얽히고 싶지 않았다. 저를 미워하지 않는다고 알았으니 되었다. 평범하게 사귀면 될 터였다. 루시온에게 하듯이.
“루시온 전하라…….”
황족은 황명(皇名)으로 일컬어야 옳았다. 하나 친밀하다면 사사로운 이름을 부르기도 했다. 이에샤는 라제카를 바르벨로샤라고 부르지 않았다. 란델 또한 ‘탈리오노’라 하기에는 어색했다. 물론 루시온은 어린 황자가 아니었다. 장성한 황태자였다. 격을 차려야 마땅했으나, 내심은 보통 이름으로 불러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럼 안 되지. 이제부터 거리를 둬야겠어.’
이에샤는 둔하지 않았다. 사람 경험이 적기는 해도, 재빠른 눈치를 타고났다. 루시온이 저를 보는 눈길에 무어가 담겼는지도 알아차렸다. 상서롭지 못했다. 루시온은 이에샤보다 주변이 좋았다. 섣부르게 굴지야 않을 터였다. 하지만 곁을 내주어서는 위험했다―못할 짓이기도 했고.
‘멘델린 경한테는 지금보다 평범하게. 이벨리오노 전하께는 지금보다 서먹하게. 뭐 이렇게 복잡하담.’
이에샤는 긴 숨을 내쉬었다.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석곡궁에서 노크란 형식적인 것이었다. 대답하기도 전에 시더가 밀고 들어왔다. 발걸음도 가볍게 책상으로 다가왔다. 까만 치마가 하느작하느작했다. 시더는 이에샤에게 야단맞은 일을 털어 낸 모양이었다. 미엘라라면 오래갔을 것이다.
“앨저 경! 간식으로 푸딩을 만들었어요. 드실래요?”
“주면 좋지. 내가 먹을 거 사양하는 거 봤니?”
“점심이 거했으니까 배가 안 꺼지셨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그럼 가져다 드릴게요.”
시더의 말대로였다. 석곡궁에 식사를 대는 주방에서 경사라도 있었는지―주먹만큼 속을 채운 샌드위치와 단호박 한 개를 쓴 수프가 나왔다. 미엘라는 반 넘게 남겼다. 스란은 먹는다기보다 치운다는 느낌으로 욱여넣었다. 이에샤는 즐겁게 자기 몫을 해치웠다. 미엘라가 남긴 음식이 탐났지만, 체면상 달라고 할 수는 없었다.
알디온 저택에 살 때보다 운동량은 줄었다. 하지만 이에샤의 식사량은 변함없었다. 집에서도 많이 먹었고 궁전에서도 많이 먹었다. 살은 붙지 않았다. 까닭은 셈브리온이 가르쳐 주었다. 셈브리온은 거구를 자랑했으나, 브링어가 되기 전부터 컸다고 했다. 브링을 얻고는 몸무게가 잘 늘지 않았다고. 브링 사용이 열량을 잡아먹는 성싶었다.
시더가 사무실을 나서려 했다. 이에샤는 퍼뜩 시더를 불러 세웠다.
“얘, 시더.”
“네에?”
“다녀간 전령, 누구였니? 어느 궁에서 왔대?”
“전령이라뇨?”
시더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에샤도 의아한 낯빛을 지었다. 오후 수련을 할 때 엘테르트의 전령이 다녀갔을 터였다. 엘테르트가 어느 별궁에 있는지 궁금해서 물어보았다. 시더는 모르는 눈치였다. 석곡궁이 딱한 처지의 여자에게 활짝 열렸다 한들, 남모르게 드나들어도 되는 곳은 아니었다.
“이상하다. 멘델린 경의 카드가 왔는데.”
“그건 남작님께서 직접 두고 가셨어요.”
“뭐?”
시더가 태연스럽게 밝혔다. 연애 소설에 빠져든 독자처럼 꿈꾸는 듯한 눈을 하고 말했다.
“연무장에 나가 보면 앨저 경이 계실 거라고 알려 드렸는데 글쎄, 그녀가 좋아하지 않을 거다, 이렇게만 말씀하시곤 가 버리신 거 있죠? 정말 목소리도 어찌나 달콤하시던지.”
“그, 래?”
“진짜로 두 분 아무 사이도 아니세요?”
이에샤는 고개만 주억거렸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저 혼자 엘테르트를 좋아할 따름이었다. 그나마도 관두기로 했다. 엘테르트는 에브라힐의 모든 이에게 친절했다. 루시온은 이에샤가 특별하다고 말했지만, 죄책감을 가졌을 뿐이리라. 남다른 사람이라면 차라리 신년맞이 무도회를 함께했던 밀레나 아니겠는가.
“밀레나…….”
“네?”
“그 계집애, 도대체 뭐였지?”
“무슨 소리세요? 앨저 경?’
이에샤는 떠오르는 대로 중얼거렸다. 생각이 밀레나에게 미치자 싱숭생숭해졌다. 영춘 사냥 대회 뒤로 무슨 일을 겪었는지 몰랐다. 알디온 후작가에 탈이라도 생긴 걸까? 그렇다면 박수하며 기뻐할 일이었지만, 아닌 성싶었다. 밀레나 본인은 행복해 보였다.
‘알디온이 들르라고 했었지. 그거랑 관계가 있나?’
머리를 설레설레 털었다. 궁금증이 솟아도, 알디온 저택까지 가서 알아볼 만큼은 아니었다. 그 집안이랑은 길 가다 마주치기조차 싫었다. 밀레나가 어떻게 되든 알 바 아니었다.
그보다 시더가 전해 준 엘테르트의 말이 신경쓰였다.
“시더, 멘델린 경이 정말로 내가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했니?”
“예. 그러셨어요.”
“이상하다. 우리 화해됐을 텐데?”
브링어를 꺼려서일지도 몰랐다. 연무장에 가기 싫어 둘러댔다든가. 실지로 이에샤는 브링을 보이지 않고 펼칠 수 있게 되자, 수련할 때마다 브링을 썼다. 엘테르트는 오지 않는 편이 나을 것이다.
시더는 한숨을 폭 쉬었다. 답답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잔뜩이었다. 주제넘다고 혼날까 봐 망설여졌다. 이에샤를 내버려두면 죽을 때까지 정답을 찾지 못하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결국, 입을 열기로 했다. 자신은 오지랖이 넓었다.
“앨저 경. 화해는 되는 게 아니에요. 하는 거죠.”
“……내가 그걸 모르겠니? 싸워도 서로 어물쩍거리다가 풀리는 거 있잖아.”
“그런 건 가족이나 절친한 친구 사이에서 있는 일이죠! 앨저 경하고 멘델린 남작님, 아무 사이도 아니라면서요? 그럼 절대 저절로 풀리지 않아요. 제 세 달치 봉급도 걸 수 있어요.”
이에샤는 놀랐다. 어린 하녀란 형편이 팍팍하게 마련이었다. 봉급을 걸다니! 시더는 자신만만했다.
그동안 이에샤가 다투고 풀어 본 상대라고는 셈브리온뿐이었다. 셈브리온 쪽에서 은근슬쩍 살갑게 굴어 오고는 했다. 그러한 화해가 당연한 줄 알았다. 엘테르트와 이에샤는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해결될 사이가 못 되었다. 어린애도 알 만한 걸 이에샤는 몰랐다.
“그럼 어떡해?”
“만나서 말씀하셔야죠. 우리 그만하고 다시 잘 지내자고.”
“그냥 찾아가거나 오길 기다렸다가 말하면 돼? 뭐, 따로 해야 할 말 같은 건 없어? 표정은 어떡하는데? 웃어? 아니면 무표정?”
“아휴!”
시더는 한심스럽다는 눈빛을 갈무리했다. 이에샤는 저보다 한 살 많았지만, 10년은 사람을 만나지 않고 산 것 같았다. 처세술을 갖추지 못한 귀족이라니. 사교 모임은 물 건너갔다. 시더는 소매를 걷어붙였다. 뜻이 있는 행동은 아니었다. 마음을 다지기 위해서였다. 백작 나리에게 ‘친구와 싸우고 난 뒤의 대화’를 가르쳐야만 했다.
두 사람은 푸딩 따위 까맣게 잊어버렸다.
엘테르트는 눈가를 문질렀다. 피곤했다. 오늘은 총무부에서 열린 모임의 수와 쓰인 객실 수가 맞지 않는 일을 돌보고, 분수에서 흙탕물이 나온다는 조경부에 추가 예산을 주기로 하고, 의료원을 하나 더 지어야 한다고 날뛰는 보건부 관리를 달래고, 진상된 준마 가운데 레오웰 도시 연합의 일란드 시티로 보낼 말을 골라야 했다. 자잘한 일은 셀 수도 없었다. 사과하고 싶은 이로부터 쌀쌀맞은 답을 받기도 했다.
진지하게, 오래 살 자신이 없었다. 몸이 부서져라 일하다가 서른 살 즈음에 과로사할 것만 같았다. 같은 길을 걸었을 애버토스도 말짱하건만 말이다.
상념에 빠진 채 걸었다. 송악궁 앞에서 서성이는 사람을 지나쳐 갔다.
“잠깐만요, 멘델린 경!”
하얀 손이 소맷부리를 낚아챘다. 모양새는 아담한데, 힘이 장사였다. 휘청해 버렸다. 뒤쪽을 돌아보았다. 깜빡.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이에샤가 놀란 얼굴을 했다. 두 뺨이 저녁노을에 젖어들었다.
“앨저 경.”
“아, 괜찮아요? 넘어질 뻔했습니까? 그러려던 게 아닌데.”
“앨저 경.”
엘테르트가 되풀이했다. 눈빛이 너울거렸다. 지친 기색이 뚜렷했다. 이에샤는 엘테르트의 소매를 놓아주었다. 엘테르트는 괴로워 보였다.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앨저 경.”
“세 번째예요, 멘델린 경. 왜…….”
“미안합니다. 당신 화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정말로 미안합니다.”
============================ 작품 후기 ============================
밀레는 이에샤와 더불어 가장 공을 들이고 있다고 말해도 좋을 만큼 신경을 많이 쓰는 캐릭터입니다. 그저 그런 악당으로 소모되지 않도록, 의미 없는 '여자의 적은 여자' 구도로 빠지지 않도록 끝까지 주의 기울이겠습니다.
선추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