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67 7. 리타 밸리의 별 =========================
라제카의 목소리는 예사로웠다. 밀레나를 향한 노여움도 이에샤를 향한 의심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에샤는 조마조마해졌다. 밀레나를 헐뜯었을 때, 받아들여진 적은 없었다. 모두 이에샤가 사랑스러운 이복동생을 시샘한다고 손가락질했다. 라제카에게 기대를 걸면서도 ‘혹시 공주님도?’ 하는 불안감은 남았다.
“내게 거짓말한 걸 탓하고 싶지는 않아요. 기만이나 능멸이라 하기엔 알디온 영애의 행동은 너무 사소하지요. 그보다는.”
라제카는 란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빗겨 주었다. 란델이 간지러운지 몸을 꼼지락거렸다. 가만있어. 라제카는 그렇게 타이르고는 말을 이었다.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앨저 경의 기분을 상하게끔 만든 게 화가 나네요.”
“……공주님께서는 제 말을 믿으십니까?”
“지금 경의 얼굴을 보면 동생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쯤은 알 수 있어요. 누가 거짓말을 하는지는 뚜렷하죠. 뭘 걱정하나요?”
그 뚜렷한 일을 알디온 후작가에서는 몰라주었다. 밀레나의 웃음과 눈물은 탁월했다. 밀레나는 이에샤에게 상냥히 굴면 ‘착한 동생’이 되는 걸 알았다. 이에샤에게 뿌리쳐지고, 울먹이면 ‘가엾은 동생’이 되는 줄도. 밀레나 알디온은 남의 호감을 사는 데 천부적이었다. 이에샤로서는 당해 낼 수 없었다.
이에샤는 항변을 관두었다. 이기지 못할 싸움이라면 패악이나 마음껏 떨자 싶었다. 라제카 또한 밀레나에게 좋은 인상을 받았다. 이에샤가 생트집한다고 오해할 만도 했다. 그러나 이에샤 쪽을 믿는다 하였다. 이에샤는 라제카에게 더없는 친밀감을 느꼈다.
“죄송합니다. 밀레나가 옛날부터 남한테 저희 사이가 좋다는 식으로 떠벌리고 다니긴 했지만 공주님께까지 그럴 줄은 몰랐습니다. 저는 어머니를 몰아낸 알디온 부인의 딸을 좋아할 만큼 관대하지 못합니다.”
“이해해요. 하지만 앨저 경, 다음에 만나더라도 내가 알디온 영애를 꾸짖으리라 기대해서는 안 돼요. 나는 그럴 수 없어요. 미리 사과할게요.”
라제카의 통찰력은 날카로웠다. 이에샤의 마음 깊숙이에 자리한, 밀레나를 곤경에 빠뜨리고 싶다는 욕망도 잡아냈다. 이에샤는 고개를 수그렸다. 부끄러운 면을 들킨 것 같았다. 얼굴이 뜨거워졌다. 라제카는 북돋우려는 듯이 말했다.
“알디온 영애가 황녀를 만나서 이복언니와 사이가 나쁘다 털어놓는다면, 그거야말로 앨저 경을 공격하는 짓이었을 거예요. 사이좋은 자매를 연기하는 게 맞기는 하죠.”
“예. 영명하십니다.”
“다만 앨저 경이 바라지 않는 배려란 안 하느니만 못하다는 걸 그녀가 모르는군요. 똑똑하면서도 어리석네요.”
옳은 소리였다. 밀레나가 호의로 포장한 행동은 이에샤의 짜증만 불러일으켰다. 라제카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저께 만난 밀레나는 놀랄 만큼 아름답고, 선량해 보였다. 자만심에 이르지 않는 자신감을 갖추었다. 그러한 사람은 제가 틀렸다고는 생각지 못하는 법이었다. ‘의좋은 자매’라는 허울이 이에샤에게 필요 없음을 모르리라.
라제카가 걱정스럽게 입을 뗐다.
“조심하세요, 앨저 경.”
“예? 무얼 말입니까?”
“라제카는 경을 먼저 알았고, 경을 훨씬 좋아하니까 괜찮지만 다른 사람 앞에서 알디온 영애에게 적개심을 보이는 건 좋지 않을 듯해요.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죠?”
모를 수가 없었다. 라제카의 반응은 유달랐다. 많은 사람이 이에샤보다 밀레나를 편들 터였다. 밀레나는 허풍을 치지 않았다. 속마음이야 어떻든, 겸손을 꾸며 냈다. 그러한 성미로 “사교계의 으뜸이 됐어.” 하고 장담했다. 사실이리라. 이에샤가 보기에도 밀레나는 눈부셨으니.
“요즘 사교계의 유행은 그녀가 선도한다 해도 지나치지 않아요. 앨저 경, 리타 밸리의 별이라는 이름을 들어 봤나요?”
“밀레나가 처음 선보인 액세서리 시리즈라고 들었습니다.”
“아는군요. 그럼 그 유행이 언제부터 시작됐는지도 아나요?”
기억을 들추어 보았다. 이에샤는 귀족 여인의 옷차림을 구경하고는 했다. ‘리타 밸리의 별’이 어느 무렵부터 나타났는지, 어렴풋하게나마 짚을 수 있었다. 오래지 않았다.
라제카가 란델의 뺨을 조몰락댔다. 란델은 누이의 치근거림에 익숙한 성싶었다.
“보름이에요. 보름 만에 알디온 영애가 차고 나온 목걸이랑 귀걸이가 사교계를 휩쓸었어요. 무명 세공사가 수도에서 가장 바쁜 장인으로 탈바꿈했죠. 이게 뭘 뜻하겠어요?”
“…….”
“지금 귀족 사회에서 그녀의 영향력은 황족을 넘어서요. 당장 사교계 활동을 하는 여자 황족이 없다지만, 고모님이 계시는 한 쉬운 일은 아니죠.”
아픈 황후와 어린 공주 대신, 사교계의 꼭대기에 앉은 이는 엘로나 멘델린이었다. 30년가량 변함없었다. 그 권좌가 밀레나에게로 넘어갔다.
“옛날에 온 제국이 고모님과 사랑에 빠졌다고 하죠. 알디온 영애도 그렇게 기억될지 모르겠어요.”
이에샤의 눈살이 죄어들었다. 밀레나가 떠받들어진다니. 배알이 뒤틀렸다. 밀레나의 큰소리도 신경을 거슬렀다. 난 이 나라에서 가장 훌륭한 신랑감과 맺어질 수도 있어. 소식에 어두운 이에샤라도 제국 제일의 청년이 누구인지는 알았다.
황태자와 황자는 아니었다. 혼인으로 델피르 황가에 끼어든 여자는 집안과 고리가 끊어졌다. 황족으로서의 이름을 얻고 부모의 성을 버려야 했다. 황후의 친정이란 부질없었다. 황후에게는 혈족이 없는 법이었으므로. 딸을 황태자비로 내세우는 집안은 명예나 권력보다, 황실에서 치르는 막대한 예물이 필요한 곳들이었다. 가난한 명문가라든가.
델페레타에서 가장 영예로운 귀부인 자리는 정해졌다.
‘멘델린 경…….’
이에샤는 손으로 가슴을 눌렀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셈브리온은 움찔했다. 이에샤가 집에 들어오자마자, 벽에 주먹을 지른 탓이었다. 브링은 쓰지 않아 다행이었다. 요즈음 이에샤는 물 만난 고기 같았다. 셈브리온도 대련 열 번 중 여덟 번은 쩔쩔맬 정도였다. 그 기세가 죽어 버렸다. 세상이 끝난 양 고심스러운 꼴이었다.
저녁은 먹었으리라. 셈브리온은 맹물만 한 컵 따랐다. 이에샤에게 가져다주었다. 이에샤는 묵묵히 받아 들었다. 꿀꺽꿀꺽 들이켰다. 속이 타는 모양이었다.
한참 만에야 말문이 떨어졌다. 우중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세비.”
“어, 엉?”
“당신은 내가 이 나라 최고의 기사가 되는 거랑 이 나라 최고의 남자한테 시집가는 거, 뭐가 좋을 거 같아?”
셈브리온은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내 소원은 뒤엣것. 이-샤의 행복은 앞엣것.”
이에샤는 피식했다. 셈브리온다웠다. 셈브리온은 ‘이에샤 귀부인 만들기’의 꿈을 포기하지 못했다. 봉급이 쌓이자, 드레스를 사면 어떻겠냐고 부추기기 시작했다. 이에샤는 흘려들었다. 저택을 마련할 때까지 사치는 금물이었다. 셈브리온이라면 “남자 잡아서 그 집으로 들어가면 되잖아!” 하고 안달할 터였지만.
“있잖아, 세비.”
“왜?”
“세비는 사랑해 본 적 있어?”
이에샤가 컵을 건네 왔다. 셈브리온은 헛손질을 하고 말았다. 나무 컵이 바닥을 굴렀다. 내용물은 비웠으나,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주워들 생각도 나지 않았다. 검은색 눈동자에 핏발이 섰다. 사람이 모순적이었다. 이에샤에게 좋은 남자를 잡아야 한다고 타이르면서도, 이에샤가 남자를 만난다 상상하니 열이 뻗쳤다.
“어떤 놈이야? 일단 내가 보고 판단해야겠어.”
“저기, 난 당신한테 물어봤거든?”
“일단 지난번의 그 뺀질……, 황태자 전하는 안 된다. 그분은 너무 잘생기셨어. 남자가 말이야, 이 스승님만큼만 생기면 괜찮아도 그렇게까지 잘생기면 콧대가 높아서 안 돼요.”
“얼씨구.”
이에샤는 코웃음을 쳤다. 기가 막혔다. 결혼은커녕 남자와 어울릴 마음조차 없는 처지였다. 셈브리온의 연애담이 궁금했을 따름이었다.
“그냥 당신 결혼 안 했으니까, 평생 여자 하나 없었나 했을 뿐이야. 연극이나 소설들 하는 말이 온통 그거잖아. 남녀가 만나야만 순리네, 사랑이 세상에서 제일 중하네. 당신은 어땠어?”
“그을쎄에. 용병질할 때 놀아난 여자는 많긴 한데.”
경멸 섞인 눈초리가 셈브리온에게 꽂혔다. 셈브리온은 상처받았다. 짝이 있는 여자라면 쳐다보지도 않았건만. 피임도 했다.
우스갯짓을 그만두었다. 지난날을 돌이켜보았다. 이에샤의 물음이 날카롭기는 했다. 셈브리온은 누군가를 연모해 본 적이 없었다. 벨체터는 사랑할 여유조차 허락되지 않는 땅이었다.
“살면서 사랑한 여자라고는 둘뿐이야. 너랑,”
“그런 의미로 얘기한 게 아니잖아.”
“다른 한 명은 내 어머니였던 여자. 그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스승님한테 연애 상담은 별로 똑똑한 선택이 아닙니다아.”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이에샤는 깔깔 웃었다. 남자에는―이해할 수 없게도―여자 경험이 적은 걸 부끄러워하는 놈이 많았다. 당당하게 제가 풋내기라고 밝힐 줄은 몰랐다. 셈브리온은 이에샤에게 자기의 모두를 공유해 주었다. 기억도, 경험도, 감정도.
“대신 이-샤, 네 눈에서 눈물 뽑은 놈을 몰래 야산에 묻어 달라는 부탁이라면 꼭! 꼭! 나한테 해야 한다.”
“그건 범죄고.”
“너만 입다물면 범죄 아니야.”
이에샤는 한숨지었다. 용병의 농담이란 무시무시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도 셈브리온의 배려가 느껴졌다. 싱거운 소리를 지껄여, 기분을 풀어 주려는 뜻이.
“……고마워. 세비 덕분에 홀가분해졌어.”
“무슨 일 있었던 건 아니지?”
“아니야.”
엘테르트와 밀레나가 나란한 모습을 그려 보면 속이 뒤집혔다. 도리 없었다. 벌어지지 않은 일이어도, 가능성은 넘쳤다. 이에샤가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동안 밀레나는 까마득한 곳으로 올라가 버렸다. 이에샤로서는 따라 할 수조차 없었다.
아니, 남의 비위를 맞추어 사랑을 구하기는 싫었다. 밀레나에게는 성공한 결혼만이 행복이었다. 자랑거리라고는 사교술뿐이었다. 이에샤는 자립적으로 인정받기를 바랐다.
“밀레나 걔도 참 피곤하게 산다 싶어서.”
“응? 아가씨가 왜? 만났어? 또 너만 나쁜 년 만들고 튀었어?”
“그러려고 했나 본데 상대가 호락호락하지 않아서 실패했어.”
라제카를 떠올렸다. 기분이 나아졌다. 휴우! 긴 숨을 몰아쉬었다. 역마차를 타고 오면서 갈등한 일이 있었다. 셈브리온은 말릴 터였으나, 털어놓아야 했다. 셈브리온에게 비밀을 만들 수는 없었다.
“그래서 말인데 나, 알디온에 가 보려고.”
밀레나가 사건을 겪은 것은 분명했다. 까닭도 없이 사람이 달라졌겠는가? 궁금스러웠다. 밀레나가 자신을 곤란하게 만들려 한다면, 맞받을 방법도 짜내야 했다.
알디온 저택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눈으로 확인해 볼 셈이었다.
============================ 작품 후기 ============================
성실한 성격이 못 되는데 어찌저찌 일일 연재 이어 나가는 거 보면 스스로 신기합니다...
후기에 쓰고픈 말이 참 많은데 본편 내용에 대한 구구절절한 부연 설명 제외하고 스포일러 제외하고 하다 보면 할 말이 별로 안 남네요...작가는 수다쟁이입니다...
선추코 감사합니다!!!!!
오후 2시 30분, 오타 수정했습니다. 지적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