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68 7. 리타 밸리의 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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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의 네 번째 일요일.
연둣빛 봄기운이 푸르러졌다. 여름 냄새가 풍겼다. 유월이면 땡볕이 부르트리라. 이에샤는 백화 기사단 정복에서 블라우스와 트라우저만 갖추었다. 블라우스도 두툼한 편이었으나, 코트만 벗어도 나았다.
셈브리온은 아침 식사를 푸지게 차리려 했다. 이에샤가 손사래를 쳤다. 역겨운 얼굴을 보는 날이었다. 거나히 먹어 보아야 얹힐 성싶었다. 가볍게 줘. 셈브리온은 못마땅해했다. 전쟁터에 나가는 병사처럼 욱여넣어도 모자랄 마당이었다. 대식가인 이에샤가 견딜 수 있을까? 이에샤는 완강했다. 치커리와 어슷썰기 한 토마토에, 묽은 드레싱으로 간한 샐러드만을 받아들였다.
셈브리온의 염려는 들어맞았다. 역마차에 타자 후회막급했다. 고기 들어간 메뉴로 잔뜩 먹을걸. 알디온 후작가에 다다랐을 때, 이에샤는 예민해진 채였다. 배고픔이 아랫배를 뒤틀었다. 샐러드뿐이라도 볼로 두 번 비웠다. 뭇 귀족 여자는 한 접시만으로도 버틴다고 들었다. 어느 쪽이 이상한 걸까.
문지기가 정문을 열어 주었다. 이에샤는 익숙한 정원을 가로질렀다. 저택이 보였다. 정장 차림의 늙수그레한 남자가 기다렸다. 알디온 후작가의 총집사였다.
“어서 오십시오, 이에샤 아가씨. 건강해 보이시는군요.”
“음……, 오랜만.”
서너 초 망설였다. 집사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에샤가 이에샤 알디온일 적부터 일한 사람이었다. 기억해야 마땅했다. 계면쩍었다.
미안하지는 않았다. 집사가 이에샤를 보는 눈길에는 경멸이 서렸으므로. 홱 돌아섰다. 아가씨는커녕 돈 빌려준 사람을 맞이할 때도 저보다는 친절할 것이다. 이에샤에게는 예사로운 태도였다. 집사의 뒤를 따랐다. 한 사람은 성큼성큼 걷고, 한 사람은 산책하듯이 쫓는데도 속도에 차이가 없었다. 기묘한 광경이었다.
집사가 얕잡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씨. 요즘 주인님께서 감정 기복이 심하십니다.”
“그래서?”
“저택의 분위기를 해치지 않도록 공연한 행동은 말아 주십시오.”
이에샤는 실소하고 말았다. 집사는 지금도 이에샤가 더부살이하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이에샤는 알디온에서 땡전 한 푼 들고나오지 않았다. 집주인인 오스터가 초대장―이란다, 그게―도 보냈다. 불청객 취급받을 까닭이 없었다.
집사의 몸이 바닥을 굴렀다.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목덜미가 서늘했다. 이에샤를 돌아보았다. 이에샤의 손에 들린 롱소드에, 소름이 쫙 끼쳤다. 검을 뽑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는데.
“시건방지게 굴지 마. 한 집안의 관리자로 몇십 년을 일했으면서 주제 파악이 안 되나? 아까부터 나를 아가씨라고 부르는데 참아 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지.”
“그, 그게 무, 무슨.”
목이 달아날 뻔했다고 깨닫자, 입술이 부들거렸다.
“나는 이 집에서 아가씨라 불릴 이유가 어디에도 없다. 앨저 백작으로, 손님으로 깍듯한 예우를 갖춰. 그러지 않는다면 알디온 후작에게 앨저를 무시한 책임을 따지겠다.”
“후, 후작님은 아가씨의 친부이십니다!”
“내가 패륜아인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지?”
사실이었다. 오스터가 지랄하면, 이에샤는 패악을 떨고는 했다. 재떨이를 집어 던지길래 낚아채서 오스터의 이마로 되돌려 준 일도 있었다. 셀더리가 어깨를 밀쳐서 다행이었다. 아니었다면 큰일 났으리라. 그때는 이에샤도 어려서 막가는 면이 강하기는 했다.
“그 빌어먹을 친부녀 사이에 명예 결투 벌인다고 신문에 나면 웃기잖아. 똑바로 처신해.”
“……아, 알겠습니다. 앨저 백작님.”
집사는 놀랐다. 알디온에서 이에샤는 망아지 같은 계집애에 지나지 않았다. 성깔머리가 더럽기는 해도, 앙갚음이라고는 때리고 차는 게 다였다. 단순했다. 명분을 들어 가며 아랫것을 꾸짖기는 처음이었다. 없던 주변머리가 생기다니. 평민 거리에서 약 탄 물이라도 마셨나 싶었다.
이에샤는 콧방귀를 뀌었다. 엘테르트가 옳았다. 약자를 짓밟아 본 이는 그에 취하여 행동을 걷잡지 못하게 되었다. 옛날의 이에샤는 약했다. 악만 바락거리며 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어떻게 법도를 지키며 위아래를 바로 세우는지 알았다. 황궁 생활이 일주일만 더하면 다섯 달을 채우는 터였다.
집사의 걸음이 더뎌졌다. 겁먹은 몰골이었다. 이에샤는 복도를 둘러보았다. 살던 집이니만큼 낯익었다. 외부인으로서 들어왔다고 색다르지 않았다. 실내 장식도, 분위기도 그대로였다. 별다른 일이 일어난 낌새는 없었다. 지나다니는 하녀들의 얼굴에 뿌듯함이 서리기는 했다. 밀레나 덕택에 콧대가 솟은 모양이었다.
“주인님. 크, 큰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
집사가 응접실 앞에서 소리쳤다. 이에샤는 눈살을 찌푸렸다. 오스터라면 이에샤가 한 집안의 주인으로 대접받는 걸 아니꼬워하리라. 혹덩이 같은 딸이라도 제 소유물처럼 여기고는 했으니까. 집사는 볼 일이 드물 이에샤와 계속 모셔야 하는 오스터 사이에서 당연한 선택을 했다.
저 늙다리 등에 칼이나 꽂아 주고 싶다. 이에샤는 그렇게 떠올렸다가, 멈칫했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경각심이 들었다. 킬타로스를 죽였을 때의 느낌이 되살아났다. 죽여야만 했던 상황이었다. 죄악감은 없었다. 하지만 걱정스러웠다. 폭력에 젖어들까 봐 두려웠었다. 입술을 깨물었다. 생각을 고쳐먹었어도, 오랫동안 힘으로 문제를 풀어 온 처지였다. 당장 엘테르트 같은 호인이 되기는 어려웠다.
이에샤가 검으로 집사를 겁박한 줄 알면 엘테르트는 실망하리라. 울적해졌다. 이딴 기분으로 오스터를 만나야 하다니. 응접실에 발을 들여놓았다.
“왔느냐.”
“대체 무슨 일로 불렀어요?”
오스터는 일인용 안락의자에 앉았다. 시가를 피우던 참이었다. 두 사람은 인사조차 나누지 않았다. 오래간만에 만난 부녀로는 볼 수 없었다. 이에샤는 오스터가 자리를 권하기도 전에, 마주 보는 의자에 엉덩이를 내렸다. 팔걸이에 팔꿈치를 붙였다. 손바닥으로 뺨을 괴었다. 오스터의 눈썹이 꿈틀했다.
“훈장을 받았단 얘기는 들었다. 내 딸 중에 수훈자가 생길 줄이야.”
“그런 소리 하려고 부른 건 아닐 테고.”
“밀레랑도 만났다면서?”
“빙빙 돌리지 말고 용건만 간단히 하시죠.”
대화가 맞물리지 않았다. 이에샤는 오스터의 이야기를 못 들은 체했고, 오스터는 이에샤가 짜증을 부리든 말든 할 말을 늘어놓았다. 신경전이 팽팽했다.
오스터가 시가를 재떨이에 눌렀다. 비벼서 껐다. 고약한 냄새가 피어올랐다. 흡연 예절을 집어던진 짓이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는 뜻이었다. 이에샤로서는 짚이는 바가 없었다.
“그래, 내 너한테 용건이 쌓였다. 이 되바라진 년. 우리 집안 이름에 먹칠을 하려 작정했느냐?”
“갑자기 왜 욕이에요? 염병이 났으면 곱게 눈이나 감으세요.”
“네년이 집 안에서 바지를 입고 다니든, 검을 덜렁거리며 다니든 나는 내버려 뒀다. 내 앨저 집구석에 잘못한 게 있기는 하니까. 거둬 먹여 주면서 얼마나 방종하게 굴든 넘어간 내가 미쳤지! 황족 앞에서까지 계집애가 기사 놀음을 해? 너 미쳤느냐?”
‘뭔.’
이에샤의 입이 헤벌어졌다. 기가 찼다. 이에샤가 알디온 저택을 떠난 때는 기사가 되고도 스무날쯤 지나서였다. 왜 이제 와서 트집을 잡는지 몰랐다. 오스터가 대리석 테이블을 내리쳤다.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멘델린 소공작이 네가 에브라힐의 명물이 다 됐다고 칭찬을 하더구나! 내 얼굴을 들 수가 없어서 원!”
“……칭찬을 듣고 왜 얼굴을 못 들어? 지금 대체 내가 뭘 잘못한 거죠?”
“멍청하기는! 비꼬는 말이 당연하지 않으냐! 그날 멘델린이 다짜고짜 우리 사업장에 투자한 돈을 어떻게 썼나 감사하겠다고 나섰다! 네년이 눈 밖에 난 탓이야!”
이에샤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까부터 년, 년, 귀에 거슬렸다. 노여움이 치밀었다. 집사에게 을렀듯 이에샤는 수그리고 들어갈 까닭이 없었다. 오스터는 호통과 모욕을 퍼부을 계제가 못 되었다.
엘테르트가 저를 비꼬지 않았음은 검을 걸고 장담할 수 있었다. 오스터를 만난 목적부터가 투자금의 감사였을 것이다. 이에샤 이야기는 지나는 결에 나왔을 뿐이리라. 오스터라고 모를 턱이 없었다. 이에샤는 깨달았다. 이는 화풀이였다. 멘델린의 돈을 사사로이 써먹었거나 장부에 구멍이 났거나 하여, 된통 깨지기라도 했는가.
“그따위 용무로 날 불렀습니까? 알디온 후작.”
“아비한테 그 시건방진 말씨는 뭐냐. 그래, 말 잘했다. 용무? 더 있다. 이 미친년. 너 때문에 밀레가 어떤 고초를 겪었는지 아느냐? 지지난달에 밀레가 무슨 소리를 들었는데! 황궁의 망나니를 언니로 두었다고 샤이어의 딸년이 망발을 지껄였어!”
“이야, 그거 잘됐네요. 내가 일만 열심히 하면 밀레나가 욕을 들어요? 정말 마음에 드는걸요.”
“뭐, 이……!”
“어차피 요즘 걔 잘나간다며. 그럼 됐지, 왜 나한테 걔 일을 따지고 들어요? 누가 밖에서 사생아 싸지르래? 어머니가 이혼해 줄 때까지 납작 엎드려서 기다렸다가 씨 뿌렸으면 우리가 얽힐 일도 없었잖아.”
오스터가 핏발을 세웠다. 이에샤가 비아냥으로 받아칠 줄이야. 미치광이처럼 던질 물건을 찾고 가구를 걷어차게 할 셈이었다―시가를 비벼 끈 데에는 재떨이를 무기로 써먹지 못하게 하려는 계산도 들었다. 괴롭힐 상대가 필요했다. 이에샤가 분에 차서 어찌할 줄을 모르는 꼴이 보고 싶었다.
요즈음 오스터는 두려워할 자가 없었다. 딸 덕이 톡톡했다. 저와 셀더리를 손가락질하던 귀족들이 설설 기었다. 밀레나와 다리를 놔 주십사 청해 왔다. 이에샤 따위가 대드니, 화가 치밀었다.
“절차 무시하고 도리 무시했으면 이만한 일은 감당해야지. 누구는 이 똥통보다 못한 알디온에 발목 잡히고 싶었던 줄 알아? 그렇게 내 일로 골머리 썩기 싫었으면 우리 집안이랑 깔끔하게 정리했어야 할 거 아니야!”
“이에샤 앨저!”
“사람 좀 그만 괴롭혀! 내가 맞으라면 맞고 구르라면 구르는 개새끼인 줄 알아?!”
이에샤는 목적을 잊었다. 알디온과 밀레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아무래도 좋았다. 울분을 내뿜는 게 중요했다. 참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벌떡 일어섰다. 허리띠에 걸린 칼자루를 움켰다. 오스터가 움찔했다. 설마설마하니 눈이 뒤집혀서 친아버지를 죽이려 들까? 불안과 공포가 피어올랐다. 애써 고개를 쳐들었다.
이에샤는 그만 참기로 마음먹었다. 셈브리온의 당부도 머릿속에서 지웠다. 셈브리온은 이에샤가 브링어라는 사실을 감추었으면 했지만, “나 브링어요!” 하고 떠벌리고 다니더라도 쓴웃음을 지으며 받아줄 사람이었다. 더는 자신을 감추기 싫었다.
불꽃과 닮은 파르스름한 빛이 회오리쳤다.
“브,”
오스터는 넋을 잃어버렸다. 부녀 사이에 놓였던 대리석 테이블이 동강 났다. 양쪽으로 무너져 내렸다. 이에샤는 서슬 퍼런 눈초리로 오스터를 노려보았다.
“웃음이나 팔아먹는 당신의 예쁜 딸보다 내 쪽이 치열하게 살고 있어.”
“너, 브, 브링. 브링어!”
“그깟 말 몇 마디 들은 게 그렇게 억울하대? 남의 시선에 애달아서 아빠한테 쪼르르 이르러 오는 계집애가 사교계의 꽃이라니, 거기도 알만하다.”
몸을 돌렸다. 문 쪽으로 향했다. 문고리를 쥐려 했으나, 닫히지 않은 채였다. 빠끔하게 벌어진 틈새로 푸른 눈동자가 보였다. 이에샤는 문을 열어젖혔다. 밀레나를 지나쳐 갔다. 밀레나가 손을 뻗었다. 오늘은 붙잡혀 주지 않았다. 물 흐르듯이 비켜섰다. 밀레나를 돌아보았다. 밀레나의 낯은 창백하게 굳은 채였다.
“웃음 팔아먹고 산다고?”
“아니야?”
밀레나는 부정하지 않았다. 여자가 내보일 수 있는 값지면서도 동나지 않는 재산이 웃음 아니던가. 그를 바보 취급하는 이에샤야말로 어리석었다. 그렇게 믿었다.
“그게 나빠? 다들 그렇게 살잖아. 다 똑같이 산다고. 언니만, 언니 혼자서만…….”
“사람이 자기 줏대는 가지고 살아야지 않겠니.”
이에샤는 밀레나를 비웃어 왔다. 하나 애완견이나 다름없다고 깎아내리지는 않았다. 알디온 일가가 이에샤의 일과 삶을 ‘기사 놀음’으로 뭉갠 것이 잘못이었다.
멀고 먼 이상이어도 목표하고 나아가는 데에 의미가 있다. 이에샤는 엘테르트의 말에 공감했다. 밀레나처럼 주어진 길을 고분고분 걷기는 싫었다. 사람이 참기만 해서는 안 되는 법이었다. 터뜨려야 할 때는 터뜨려야만, 쓰러지지 않을 수 있었다.
서글픈 점이 한 가지 있었다. 자신은 엘테르트처럼 될 수는 없었다.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이지와 대화만으로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는 까닭은 엘테르트가 멘델린 소공작이기 때문이었다. 검 한 자루밖에 쥐지 못한 이에샤는 이따금 무언가를 부숴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
============================ 작품 후기 ============================
선추코 감사합니다!
글이 생각대로 안 써져서 시무룩하네요...의도는 피곤해도 투쟁해야만 한다는 내용이었는데 그냥 po패륜wer이 되어 버려서 슬픕니다...아무래도 이번 챕터가 끝나면 쉬면서 내용을 다듬어야겠어요...
★★★ 공지 ★★★
작가가 내일부터 사흘간 여행을 갑니다. 그동안은 글 올리기 힘들 거 같아요. 여행 다녀와서 다음 편 들고 찾아뵙겠습니다~